지금으로부터 70만 년 전, 여성들은 조개를 열심히 모았다 한다.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기 위해 틈만 나면 조개를 잡으러 갔다는데 그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현대의 여성들도 열심히 무언가를 모으게 됐다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주변의 여성들은 뭔가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우리 엄마는 틈만 나면 화분을 사다 모은다. 베란다가 포화 상태가 돼서 안방, 내 방 심지어 복도에도 화분이 길게 줄서 있지만 그래도 계속 해서 모은다. 나의 점심 짝꿍 주임님은 컵을 모은다. 예쁜 컵을 계속해서 산다. 컵이 너무 많으니까 한 번만 더 사오면 버려버릴 것이라는 부모님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컵을 산다. 
나는 책을 산다. 시작은 단순했다.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일 년에 책 100권 읽기를 목표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시작한 책 읽기 프로젝트는 이제 책 모으기 집착으로 이어져 무조건 산다. 쌓아놓으면 언젠가는 보기 때문에 일단 산다.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하면 책이 팔리는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 말을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출판사 창업을 위해 열심히 읽었던 책! '내 작은 출판사 시작하기'

 

2015년의 어느 날. 1인 출판사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1인 출판사 창업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읽었다. 책을 읽어보니 서류를 등록하는 절차 빼고는 특별하게 어려운 것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책을 읽자마자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그것은 출판사 경력 3년! 지금은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를 꼬시는 일이었다.

 

‘나랑 책 만들지 않을래?’

 

그렇게 후배는 꼼장어 한 접시에 넘어왔다. ‘됐어! 편집하고 전문적인 것은 후배에게 맡기는 거야!’라고 너무도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후배를 만나고 2일 뒤, 출판사 이름을 정했다. 사실 출판사 이름은 어렵지 않게 정했다. 인문/역사서를 주로 출간할 예정이기에 그에 맞게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금강초롱은 우리나라 특산종인데 일제강점기에 ‘하나부사야’라는 이름으로 식물학계에 등재된 슬픈 이야기를 갖고 있는 꽃이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담아보고 알려보자는 마음으로 금강초롱이라고 출판사 이름을 정했다. (필자가 근무하는 문화재제자리찾기의 책을 담당할 것이기에 문화재제자리찾기라고 이름 지을까하다가 혹시, 책 판매가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마음에 금강초롱으로 정했다. 사장이 된다는 건 미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출판사 이름을 정한 뒤 출판사 이름 등록여부를 검색 시스템을 이용해 알아봤다. 금강초롱은 없었다! 야호! 이 이름은 제가 가져갑니다!

 

그 다음! 신분증과 집문서, 주민등록등본을 들고 시청으로 갔다. 문화관광체육과로 가니 친절한 직원분이 출판사 등록 신청서를 꺼내 작성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내 경우엔 사무실을 두지 않고 ‘무점포 창업’이라 하여 사무실 없이 등록했다.
  신청 후, 며칠 뒤에 전화가 와서 등록증을 찾으러 오라 했는데 바빠서 엄마를 시켰다.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자리를 2일이나 비울 수 없었다. 등록증을 받을 때 등록면허세를 납부해야하는데 얼마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허허허. 2만원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심부름 값까지 해서 엄마한테 10만원을 덜컥 주고 왔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 엄마. 맛있는 거 사드셨나 모르겠다. 허허허.

 

출판 등록만 하면 끝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야했다! 아이고야. 이 때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사업자 등록이라는 것은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 찾아봐도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가 있어야 사업자 등록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작은 소호 사무실이라도 임대해야 하는건가 고민이 많았다. 밑져야 본전! 혹시 몰라 세무서에 가서 무점포 창업이라고 했더니 출판 등록증과 신분증만으로 사업자등록이 가능했다. 괜히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이제 등록하는 것은 끝인가 싶지만 하나 더 남았다. 국제도서번호(ISBN)이라는 것을 신청해야하는 것이다! 신청은 인터넷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됐다. 검색만 하면 어떻게 등록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블로그가 많았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처리했다! 아! 이제 진짜 다 된 것인가!

 

금강초롱에서 처음으로 발행한 책은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개정판이었다. 문화재 환수운동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청소년 권장도서로 지정된 좋은 책이었기에 개정판을 내는 것이 사실 많이 부담됐다.

 

편집자 후배와 회의를 하면서 출판을 하는데 정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일단 종이! 종이는 다 같은 종이인 줄 알았는데 종이부터 외계어가 시작됐다. 종이에 그람수가 표시돼 있는 견적서를 보고 ‘뭐? 뭐?’ 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80g이 뭔지 100g이 뭔지 알 수가 출판 경험 없는 내가 알리가 있나! 표지도 다 같은 표지가 아니어서 내가 원하는 질감의 표지를 찾기 힘들었다. 코팅은 어떤지 질감은 어떤지 색깔은 어떤지 등등 일반인의 언어로 설명했더니 내가 원했던 종이가 페스티벌이라는 종이라는 것을 편집자 후배가 알려주어서 그나마 쉽게 진행이 됐다. 아. 종이의 종류! 그러고 보니 판형도 사이즈마다 어떤 느낌인지 감이 안와서 다른 책을 들고 ‘이 사이즈!’라고 외쳤던 것 같다. 또, 책을 인쇄하면 표지와 본문이 따로 인쇄되기 때문에 두 개를 합쳐주는 작업, ‘제책’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으아.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직접 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책은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 잘 인쇄됐는지 모르게 인쇄가 돼서 창고로 들어갔고 필요한 수량만큼 받았다. 책이 나온 날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때부터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 작은 출판사 창업하기라는 책을 읽으며 출판에 대한 지식을 익혔는데 머리말부터 나오는 심오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출판사는 책을 내놓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내놓고 판매하는 회사다!”라는 이야기였다.

 

서점에 책이 간다고 해서 책이 팔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원고라도 알리고 또 알리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 같다. 5월 17일 출간 기념회를 시작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고 2쇄 인쇄를 앞둔 지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은 어떻게 팔아야 할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구글. 트위터. 우리가 의존하는 모든 서비스 ─ 그리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모든 서비스들이다. 어쨌든, 현금으로 말이다. 하지만 광고로 수익을 얻는 인터넷 플랫폼은 공짜가 아니며, 그들이 프라이버시나 통제control의 측면에서 뜯어가는 가격은 점점 비싸지고 있을 뿐이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중의 93퍼센트는 “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고 믿지만, 우리가 온라인에서 형성하는 정부의 양은 급증해왔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사용자의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페이스북과 다른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은 광고로 수익을 얻는다. 바로 이번 주만 하더라도, 페이스북이 소유하고 있는 인스타그램은 사용자의 피드feeds를 더 많은 광고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사업 모델에 대한 불쾌한 비밀은 인터넷 광고의 가치가 그렇게까지 크진 않다는 것이다. 1990년대, 사용자 제작 콘텐츠UGC(우리나라에서는 UCC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 옮긴이)로 웹 초기에 광고로 수익을 얻는 사이트 중의 하나인 Tripod.com을 창설하는 데 일조했던 이선 주커먼Ethan Zuckerman에게 물어보라. 심지어 그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광고 옆에 나타나는 유저 콘텐츠를 경계했기 때문에 팝업 광고를 고안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는 팝업과 광고로 수익을 얻는 사업 모델 둘 모두를 후회하기 되었다. 전자는 짜증스러울 뿐이지만, 후자는 풍부하고 다원적인 인터넷 구조를 파괴하는 공범이다.

 

주커맨은 페이스북이 한 달에 사용자당 20센트를 이윤으로 올린다고 지적한다. 회사에 따르면 평균적인 사용자는 매달 페이스북을 하는 데 인상적인 20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 액수는 가엾기 그지없다. 이 보잘 것 없는 이윤폭은 사업 모델을 추진한다drive. 사용자에 대한 추적과 대규모 정보 수집에 기반한 과한 타게팅 없이 인터넷 광고는 기본적으로 가치가 없다. 이건, 특히 미국 성인의 2/3가 개인적 행동에 대한 분석과 추적에 기반하여 그들을 표적으로 하는 광고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협상이다.

 

큰 가치가 없는 광고는 수억 명의 사용자를 거느린 회사만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사업은 거대한 인터넷 플랫폼에 안성맞춤이다.

 

광고에 기반한 사업들은 온라인에서의 상호작용을 왜곡시킨다. 사람들은 인터넷 플랫폼이 우리를 서로 연결하게 해주거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능으로서─전 세계의 풍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거기에 몰려든다. 하지만 광고에 기반한 자금조달은 회사들이 우리가 바라듯 서로 연결하도록 하는 대신, 광고주들을 대표하여 우리의 주의를 조작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용자들은 그들의 피드가 친구들이 올리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렇지 않다. 페이스북은 10억이 넘는 사용자의 뉴스피드를 우리가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독점적이고 변화무쌍한 알고리즘를 통해 운영한다. 만약 페이스북이 우리가 사이트에 더 오래 머물게 하고 스트림stream에 광고를 집어넣기 위해서 피드를 조작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우리에게 이 알고리즘에 대한 지배권을 기꺼이 내놨을 것이다.

 

초기에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해서 흥분했던 비영리 시민 단체들은 이제 자신들의 업데이트를 홍보boost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에 다가가기 매우 어렵다는 것에 낙담한다.

 

뭘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인터넷 사이트는 사용자들이 고객이 되도록 허용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동의할 거라 확신하는데, 나는 페이스북이나 구글이 나를 추적하지 않고, 암호화를 업그레이드하고, 선호와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하나의 고객으로서 나를 대우해준다면 기꺼이 매달 20센트 그 이상도 낼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인터넷 서비스에 직접 돈을 낼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러한 서비스가 공짜라는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에 잘못 빠져있기 때문이다. 광고에 대한 프라이버시 비용을 점차 인식해감에 따라 상당히 바뀔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여러 영화의 해적판을 공짜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Netflix에 돈을 지불한다. 결국 구입하는 생산물엔 비용이 포함되어있듯, 우리는 어쨌든 광고에 돈을 지불한다. 현재의 월 한도까지, 우리가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할 때 시간 당 몇 페니penny를 나눠 지불하는 식의, 빈틈없고 안정적인 소액결제 시스템은 전반적인 풍경landscape을 개선할 것이다.

 

다른 장애물이 있다. 누군가 이런 실행 가능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소액결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지만, 실리콘 밸리는 기업가적인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빚을 지고 시작할 순 없다. 사용자들이 여기저기서 소액을 쓰고, 모든 빅 브라더들에게 쉽게 추적당하지 않고, 심지어 개인화를 가능하게 한 소액결제 시스템은 인터넷 초기에 이미 발명되었다. 큰 은행과 거대 인터넷 플랫폼은 그들의 감시 능력을 제약하는 이러한 소액결제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걸 부활시킬 수 있다.

 

우리의 지불은 이미 광고가 하는 것처럼 빈국의 접속에 보조금을 줄 수 있다. 페이스북 15억 사용자 중 1/4만이라도 그들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표적이 되거나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매달 1달러를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 매년 40억 달러─분명 고려할 가치가 있는 숫자다─을 양산해낼 것이다.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엄청난 부를 가진 듯 보이지만, 나는 그에게 내 재산의 일부를 주고 싶다. 나는 내 정보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꺼려하는 후원받는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라─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약간이라도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 나는 생산자가 아니라, 고객이 되고 싶다.

 

소문에 따르면 주커버그는 캘리포니아 팰로 앨토Palo Alto의 회사 근처에 집을 구입하기 위해 3천 달러를 섰고, 하와이의 한적한 땅을 사기 위해 3억 달러 이상을 썼다. 그는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라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몇 달러를 지불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사진 및 원문 출처: http://www.nytimes.com/2015/06/04/opinion/zeynep-tufekci-mark-zuckerberg-let-me-pay-for-facebook.html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유럽에는 불과 5년여 기간 동안에 독일과 동유럽 일대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과 집시를 집단 총살하거나 가스를 이용해 대량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었다. 또한, 그는 소련에서만 약 200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연합국의 반격에 의해 점차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조국 독일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와 국민들에게 ‘전범 민족’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만을 남겨준 채 1945년 4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돌프 히틀러.’ 그는 오늘날까지 적어도 현대사에서만큼은 희대의 살인마 수준을 넘어서 ‘악의 화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앵글로-아메리칸-나치 깃발”, 영미는 과연 정의로운 선의 세력일까? 19세기의 영국 패권시대와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살펴보면 나찌 독일의 지배와 착취, 학살 등이 상당부분 영국과 미국을 ‘벤치마킹’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영국과 미국이 나찌 독일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든다.
(
http://sttpml.org/canada/breathtaking-hubris-and-hypocrisy-the-nature-and-foundations-of-anglo-american-and-nazi-imperiums-part-i-u-s-origins-development-inspirations-and-cover-ups-of-wmds/)

반면, 이러한 악의 화신과 그의 추종 세력인 나찌 독일을 무찌른 미국, 영국을 위시한 연합국은 곧 선과 정의의 승리로 칭송되어왔다. 세계는 우생학에 기초한 인종주의, 전체주의 등 나찌 독일의 패악적 문명의 잔재를 일소하고, 영미(英美)의 언어, 철학, 문학, 미디어, 정치제도, 기술 등 앵글로 색슨 문화권의 모든 것들이 곧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정의로운 것’, ‘세련되고 문명화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종전 후 오늘날까지의 70년은 이들의 문화가 곧 지극히 상식적이다 는 ‘국제 표준’(global standard)의 지위를 차지하는 과정이었다. 국제정치경제의 측면에서도 이들 앵글로 색슨(영국, 미국)의 패권이 공인되고 이들의 주도하에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체제와 IMF, 세계은행으로 대변되는 영미권 주도의 국제 금융체제 구축 역시 전후 질서에서 최후의 승자로 등극한 영국과 미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앵글로 색슨 문명권(영국, 미국)은 근현대사에서 나찌 독일이나 공산 소련의 위협에 맞서 항상 약자를 보호하고 전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희생한 정의의 세력이었는가? 애석하게도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시절부터 오늘날 미국의 패권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오히려 이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세계 경영은 그 잔혹성과 비인간적인 측면에서 나찌 독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뻔뻔하게 앵글로 색슨 문명권의 정의로움을 자화자찬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전 세계에 주입하려하는 등 상당히 오만하기까지 하다. 근 200여 년간 번갈아가며 정의로운 세계경찰을 자임해온 영국과 미국의 그 위선을 이제 하나하나씩 들추어내고자 한다.

영국의 제국주의: 인도의 벵갈 대기근과 보어 전쟁

영국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 5대양 6대주에 걸쳐 제국을 경영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패권국이었다. 그 중 하나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공식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영국인들의 사상적, 기술적 진보에 필요한 식량을 제공하고, 영국 시민들의 복지비용 확보를 위한 명목으로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를 당하였다. 이미 인도는 18세기부터 영국의 곡물 수탈로 인해 주기적인 기아 상태를 경험하였고 그 때마다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굶주림으로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의 절정은 1943년의 벵갈 대기근이었다. 당시 인도에 쌀을 공급하던 영국령 버마가 영국의 적국인 일본에 의해 점령되자 영국의 처칠 수상 내각은 일본의 인도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인도 벵갈 지역과 방글라데시의 곡물을 군용으로 징발하는 한편, 민간으로의 유통을 엄금하기 시작했다. 이는 벵갈 지역의 인도인들을 최악의 아사지경에 빠뜨렸다. 당시 벵갈 지방의 대도시 콜카타에서는 굶어죽어 가는 아녀자, 아이, 노인이 속출했고 길거리에는 이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마운트배튼 당시 인도 총독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처칠은 “인도인들을 증오한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요구를 묵살했고 구호물자를 보내겠다던 호주와 미국의 요청도 거절하였다. 전문가들은(차이가 있지만)이 기간 동안 무려 약 300만~700만 명의 인도인이 아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학살 외에도 19세기에만 영국의 혹정, 기근 당시 영국 식민당국의 책임 방기 등으로 인해 약 2000만 명의 인도인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American Holocaust 』, David Stannard)

 

“1943년의 인도 벵갈 대기근”, 영국의 곡물 수탈과 지원 거부로 약300만~700만 명의 인도인이 아사하였다.
(
http://www.boydom.com/2013/06/02/top-10-ways-world-war-ii-affected-india/)
(
http://news.bbcimg.co.uk/media/images/80414000/jpg/_80414821_famine.jpg)

영국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870년대에 남아프리카 보어인(17세기에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 계 백인 이주민의 후손)의 영토였던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탐이 난 영국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1880년 1차 보어 전쟁을 일으켰다. 보어인의 치고 빠지는 식의 게릴라 전술에 패배한 영국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벌어진 2차 보어 전쟁에서는 보어인들의 장기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없게 아예 그들의 주거지를 소개해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그와 더불어 16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보어인 여자와 아이, 노인들을 집단 수용소에 감금했다.

집단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이질,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이 돌았고 그 중 2만여 명의 보어인이 사망하였다. 보어 민간인의 집단 감금은 보어 군의 사기를 저하시켜 결과적으로 영국에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 잔인성으로 인해 영국은 엄청난 국제적 비난에 시달려야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제국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수단, 이집트, 중동,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통계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인적, 물적으로 착취했다. 나찌 독일이 단기간에 수백만 명을 학살한 것만 나쁜 짓이고 영국이 긴 시간에 걸쳐 학살뿐만 아니라 혹정과 수탈을 병행하여 간접적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 죽인 것은 과연 덜 욕먹을 일인가?

 

“보어인 집단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삶”, 2차 보어 전쟁(1899~1902)에서 영국인들은 아예 보어 민간인들의 주거지와 농장을 불태우고 여성, 어린이, 노인 들을 강제 수용소에 감금하였다. 이 현대적인 형태의 보어인 집단 수용소는 나중에 히틀러의 유대인 수용소 건설에 영감을 주었다.
(
http://www.reformation.org/boer-war.html)

미국의 위선: 인디언 보호구역과 도쿄 전범 재판, 그리고 월남전

미국은 유럽 국가에 비해 해외 식민지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영국과 같은 무력위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독립을 통한 구 제국주의 청산을 종용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측면에서 영국보다 한층 자유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도 마찬가지로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으니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에 자행된 인디언 대학살이다. 인디언 대학살 역시 영국이 일으킨 보어 전쟁과 마찬가지로 자원에 대한 욕심(서부의 금광)때문에 일어났는데 미국인들의 전략은 영국인들보다 더 교묘했다. 직접적인 학살 외에도 이른바 인디언들의 위생과 생활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디언의 거주 지역을 계획했는데 이는 사실상 ‘인디언들을 척박한 오지로 강제 추방하는 형식’이었다. 뻔뻔스럽게도 인디언 거주지역의 명칭은 ‘집단 수용소’가 아닌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이라는 위선적인 명칭을 띠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인디언에 대한 직접 학살보다는 인디언의 생존 조건을 차단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 미국인들이 인디언의 주요 식량인 아메리카 들소를 의도적으로 대량 사냥하여 거의 멸종시킨 행위는 기아를 통한 인디언 종족의 '절멸'을 그 최종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 인디언 절멸 정책은 총칼보다는 자연 아사나 종족 도태 등의 방식으로 서서히 진행되어갔으며 서부 개척시대 기간 동안 무려 5000만 명에 달하는 인디언이 죽었다고 추정된다.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최호근)

“일본 731 부대장 이시이 시로”, 그는 인간을 상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체실험을 했던 전범이자,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총책임자였다. 1945년 종전 후, 그간의 실험 결과를 미국에 제공하기로 한 대가로 도쿄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
http://en.wikipedia.org/wiki/Shir%C5%8D_Ishii)

미국은 화학, 생물, 방사선 무기 등(이하 화생방)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 체제(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를 주도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나라에 왜 ‘포트 데트릭’(Fort Detrick, 미 육군 생화학전 연구소)  같은 기관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미국은 적국의 화생방 공격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만든 연구기관이라고 변명하지만, 사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화생방 무기에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화생방 무기를 실전에 사용한 역사가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미국 포트 데트릭은 어떻게 화생방 무기 제조 기술을 축적했는가? 2차 대전 종전 직후 일본의 전범을 처리하던 도쿄 전범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일본의 맥아더 미군정은 본국에 일본 731 세균전 부대의 연구를 보고했고 트루먼 미 정부는 비밀리에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731 세균전 부대장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는 대신 연구 결과를 넘겨받는 거래를 성사하였다.

“민간택배회사 페덱스로 국내에 生탄저균 반입한 주한미군”, 100kg으로 무려 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생물 무기인 ‘살아있는 상태의 탄저균’을 한국 정부와 상의 없이 몰래 들여왔다.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98727&plink=ORI&cooper=NAVER)

그리고 전술했듯이 미국은 화학 무기를 실제로 전쟁에 투입했는데 월남 전 당시 베트콩들이 은신한 정글을 고사시키기 위해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 고엽제의 종류) 살포가 그것이다. 이는 다이옥신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 물질이었으며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하였다. 1962년부터 71년까지의 기간 동안 고엽제로 인해 베트남에서는 15만 명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을 포함하여, 300만 명 베트남인들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고(베트남 적십자사 발표) 결과적으로 4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으며, 50만 명의 어린이가 불구로 태어났다고 밝혔다.(베트남 외교부 발표) 뿐만 아니라 당시 작전을 수행 중이던 미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 참전군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각종 암과 백혈병,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애석하게도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쓰이게 마련이다.

영국과 미국은 200여 년 동안 나찌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직접 학살 외에도 불평등 무역을 통한 경제적 착취, 의도적인 병원균 살포, 거주지의 파괴와 식량 수단 제거 등 교묘한 방법으로 무고한 인명 살상을 주도하였다. 문제는 영국과 미국의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착취, 원주민 대량학살, 절멸 정책이 훗날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찌 독일의 만행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의 보어인 수용소를 참조하여 나찌의 유대인 수용소를 구상하였다. 또한, 추방과 보호구역 감금과 같은 인위적인 환경 조작, 기아와 질병으로 절멸에 이르게 한 미국의 인디언 정책을 그의 측근들에게 자주 칭찬하곤 했다.(『Adolf Hitler』, John Toland)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이었기에 승자의 추악한 과거는 숨겨지고 패자의 만행은 더 잔인하고 악랄하게 남겨진다. 1943년 벵갈 대기근으로 인도인 약 300만 명이 아사한 사건이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처칠 영국 내각의 의도적인 식량 봉쇄 정책으로 인한 인재(人災)였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밝혀졌다. (『Churchill's Secret War』, Madhusree Mukerjee, 2010) 미국의 인디언 절멸 정책 역시 단순한 학살이 아니었다. 인디언 학살을 통한 영토 확장이 신이 미국인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 일종의 ‘종교적 광기’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미국은 정의의 사도인척 행세하고 뒤로는 천인공노할 일본의 세균전 전범들을 연구 자료 몇 장에 면죄하였다. 현대에 들어 미국은 있지도 않은 생화학 무기를 찾는다고 이라크를 박살내는 등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에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그 자신들은 가공할만한 생화학 무기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물론 히틀러와 나찌 독일의 전쟁 범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 역시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들의 패권체제는 어느 정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등 다소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패권은 약소국에게는 착취를, 신흥국에게는 반감을 불러 또 다른 대립과 전쟁이 촉발되는 원인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국제 사회에서 말하는 평화란 항상 힘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정의롭지도 못할 뿐 더러 언제나 불안한 상태이다.

문제는 오늘날 영미권의 패권이 국제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문화와 생활양식 등 소프트 파워 적인 측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크고 영어가 신분상승의 도구가 된지 오래이며 영미 권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정, 재계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영미 문화에 대한 지나친 편중은 결국 세계를 균형 있고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저해할 것이다. 물론 영미 선진국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부도덕한 과거사와 오늘날의 잘못된 세계경영을 옹호하고 무조건 그들이 ‘선’이라고 숭앙하는 행위는 실리적인 측면에서 영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차원과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까? 영미(英美)의 제국주의 정당화

자신들의 과거 잘못에 영국과 미국은 어떤 반응일까? 우선 그들은 나찌 독일이 일으킨 전쟁과 자신들의 패권 추구를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통치 기간 동안 식민지 국가에서는 전근대적 봉건 체제가 혁파되고 해당 국민들에게는 문명에 기반을 둔 계몽과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항변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착한 제국주의’였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논리가 그러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가 인도인들에게 철도, 전기, 의료 등 선진 문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한, 자신들의 지배가 아니었다면 인도는 아직도 전근대적 봉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오히려 자신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역시 19세기 말에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필리핀인들의 위생 개선’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렇다. 이들의 논리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철도도 놔주고 학교와 병원도 세워줘서 오늘날 한국이 그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외형적인 근대화가 해당 식민지인들에게 어느 정도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줬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본국인들과 평등한 교육의 기회, 참정권의 기회는 그 어떤 식민지에서도 행해지지 않았다. 단순히 식량과 의료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착취를 위한 가축을 사육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양육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더구나 산업 인프라의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식민지 착취에 필요한 하나의 경영 도구에 불과했을 뿐, 마음에서 우러나온 시혜적 조치는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앵글로 색슨 문화권(특히 영국, 미국)의 근거 없는 도덕적 오만함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패자인 나찌 독일과 달리 그들은 반성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승자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유심히 바라볼 때가 있다. ㄱ부터 시작해 ㅎ으로 끝나는 연락처 중 다짜고짜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유감스럽게도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절반가량은 전화를 받은 뒤 당황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부턴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연락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전화기 속으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휴대폰에 저장된 이들은 하나같이 일상적인 사람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적인 일로 그들에게 연락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연락하기 껄끄러운 사람들은 아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연락처를 꾹꾹 눌러가며 저장한 건 어디까지나 나였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취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면서와 같은 이런저런 핑계로 일상적인 사람들을 기억에서 지운 건 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특별한 사람을 기대하곤 했다. 전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거나,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미연에 눈치 채고 조언해주는 사람. 하지만 그런 특별한 사람이 어느 순간 짠하고 나타날 리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런 방식으로 특별한 이를 찾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특별한 사람은 절대소수다. 그에 반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은 주변에 넘쳐난다. 오늘도 나와 같은 일상인들은 일상적인 사람들 속에서 허우적댄다.

 

하지만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은 일상적인 사람들 사이에 숨어있다. 평소에 살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친구의 눈물에 비극을 느끼기도 하고, 오랜 도전 끝에 결실을 맺은 친구의 성공에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상적인 사람은 특별한 사람으로 뒤바뀐다. 일종의 전복이다. 특별한 사람은 일방적이지 않다. 그가 나에게 특별하듯, 나도 그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귀인오류에 빠진다. 나의 성공은 능력이고, 남의 성공은 환경 덕분이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에게만큼은 귀인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그의 성공은 어디까지나 그의 능력 덕분일 것이라 굳게 믿는다. 특별한 사람을 스스로와 동일시할 정도로 친밀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는 5살 때부터 10살까지 함께 자란 이웃집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유치원을 같이 다녔고,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같이 사진을 찍었으며,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놀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를 가던 날 친구는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 뒤를 쫓아오며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그때 이를 악물며 따라온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당시 차를 뒤따라오던 친구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은 잊히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을 찾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이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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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주거문제
- 한국친구들은 대학 가서도 부모님께 월세, 용돈 받고 산다며?

‘독립’ 그것이 문제로다.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다른 나라 애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독립한다더라. 그래서 자기 월세랑 생활비도 다 자기가 번데.’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독립을 가까이 있는 것, 조금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면밀히 따져보면 대학생의 독립이란 사실상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300만원이 훨씬 넘는 등록금과 6000원이 되지 않는 최저임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알바를 했을 시 손에 쥐게 되는 돈은 40만원 안팎이다. 대학가 평균월세인 50만원을 감안한다면 이미 우리는 ‘적자’다. 버스한번 안타고 주말에 친구들과 치맥 한번 안하고 남자친구와 영화한번 안 봐도 월세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돈이다. 월세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것은 더 더욱 말도 안 되는 일다.

우리는 ‘아이유’, ‘김연아’ 가 아니다. 우리는 대기업 직원 연봉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아이돌도 아니며 천재적인 스포츠스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평균이 우리가 이러한 삶을 누리는 게 과연 개인의 ‘무능력’ 의 탓일까. 우리가 그들만큼 특출나지 않은 무능력한 개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걸까.

청년 주거 문제는 사회적 문제라기 보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 보편적으로 대학생의 주거는 부모가 경제적 지원을 해줌으로서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부모님의 경제적지원이 불가능 하거나 낮은 수준인 경우 대학생들은 주거 문제에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은 ‘젊음’으로서 고통을 당연하게 감내하는 세대로 판단되어 왔다. 대학생 주거문제는 한시적 주거문제로 생각되며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높은 대학등록금과 낮은 최저임금으로 구조적으로 대학생의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대학생 주거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친구들은 대학 가서도 부모님께 월세, 용돈 받고 산다며?’
‘너도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살았으면 그랬을지 몰라.’
많은 외국 학생들이 의아해 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한국의 구조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이유들을 명확해진다. 최저임금과 월세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시급은 만원정도이고, 학교다니면서 알바하는 친구들은 일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백만원 초반부터 중반까지 받아 그리고 월세 삼십만원정도 되는 셰어하우스에 살아 남은 돈은 용돈으로 쓰지.’ 한국 학생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나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미국의 학생들과 비슷한 시간의 노동을 한다. 그러나 수입은 적으며 지출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차이 때문에 먼나라 학생들은 돈을 모아서 중고차를 사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월세도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 너무 진부한 말일까. 그래서 이번에는 대학생 주거 실태에서부터 셰어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대립하고 있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빈번하게 개입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결국 ‘국민투표’같은 ‘다수의 의지’, ‘다수결 민주주의’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법적 절차와 제도의 틀 안에서 소수의 지성이 legal mind를 발휘하는 헌정주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균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재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사진참조: 위키 백과

 작년,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나는 통진당의 일부 정치이념을 결코 찬성하지 않으며 통진당의 정당 활동이 국가안보와 민주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헌재 판결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가 직시해야할 문제는 통진당이 과연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위협인 반국가단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국가 중대사를 결정해야할 때마다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9인중 1명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재판관 3인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할 수 있고 3인은 대법원장이, 나머지 3인은 국회(여당지명2, 야당지명1)에서 지명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당지명 2인도 보통 대통령의 정치성향과 비슷한 인사가 추천되기 때문에 사실상의 헌재소장, 헌재 재판관 선출은 집권정부의 ‘코드 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 더구나 명시적인 최종 임명권은 9인 모두 대통령에게 그 권한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헌재가 독립된 사법기관이라 할 수 없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지 않은 9명에 불과한 소수 권력이 사회의 가치를 정립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소수의 종교지도자 집단이 헌법위에 군림하여 국정을 주무르는 “이란의 신정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다. 물론 미국에도 우리나라의 헌재와 비슷한 상위재판기관인 ‘연방대법원’(Supreme Court)이 있고 연방대법원 재판관들도 미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지만 그들의 임기는 ‘종신직’이다. 지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재판관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정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라 정부코드와 상반되는 판결도 내릴 수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국회 설득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는 재신임 투표, 탄핵 사태 등 불리한 상황 때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등 ‘국회’가 아닌 ‘거리’에서 정치 현안을 해결하려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아예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위임해버렸다. 이는 사법독재를 심화시키고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진참조: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qxh&articleno=1574, 연합뉴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헌재 재판관들은 연임은 가능하지만 6년의 정해진 임기가 있기 때문에 연임을 위해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부와 다른 진보적, 양심적 목소리를 내기가 사실상 힘들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헌재 재판관은 정부 입맛에 따라 인사교체가 단행되기 쉽다. 그로 인해 어느 정치 성향을 가진 재판관이 얼마만큼 선임되느냐에 따라 이전의 사법 기관들이 내렸던 판결이 자주 뒤집어지는 등 사회 가치판단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렇듯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따라 국가 정책의 정당성과 사회가치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이후 역대정권과 집권 여당은 대화와 타협이 결여된 독단적인 결정을 ‘헌재의 판결’이라는 거역하기 힘든 사법적 권위를 빌려 형식적인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불만을 손쉽게 제어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헌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과 사회적 파급 효과는 헌재의 판결에 사후 반대하는 행위를 정부 입장에서 대한민국 헌정을 부정하는 ‘폭도’나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기 좋은 구실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런 사법 의존 현상을 심화시킨 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크다고 본다. 예전에 행정수도이전, 재신임 투표에 이어 탄핵 사태 등 자신과 참여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헌법재판소의 권한에 기대어 여소야대의 열세적 상황을 정면 돌파하려는 ‘승부사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소통문화성숙의 기회를 최소화하는 등 사실상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소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참조: http://www.ddanzi.com/ddanziNews/3702466)

 그 뒤로도 우리 사회는 어떤 현안에 대해 시민과 정부, 의회가 기탄없는 토론과 포괄적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단 ‘미국산 쇠고기 파동’, ‘집시법’, ‘사형제’, ‘인터넷 실명제’, ‘남성의 병역의무’ 등 굵직한 사회문제현안 해결과 가치판단을 “9인에 불과한 권력”에 사실상 떠넘기고 말았다.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여론수렴의 절차가 불투명해지고 헌법재판소가 모든 국가 중대사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세태에 대해서 예전에 강원택 교수(서울대 정치학과)는 “사법독재”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딱 그러하다. 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에 대해 소통과 타협을 선호하는 방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통과 대화의 과정은 험난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되어진다. 대화는 안 통한다고 단정 짓고 반대 세력을 설득시키기는 귀찮으니 그저 편하게 “어떤 지엄한 카리스마적 권위”에 현답을 구하려 애쓴다. 그래서 어느 새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할 때, 특정 사법기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 된 게 아닌가? 집권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 사법부의 상황에서 헌재의 권력화와 그 영향력의 비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과거 군사독재시절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왕삥(王兵)

 

인터뷰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당신의 유소년기와 가정환경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1967년에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의 반은 도시에, 반은 시골에 있었다.[각주:1] 부모님은 1950년대에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상대적으로 시골인 촌락에서 떠나 수도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대약진정책’[각주:2] 이후 1960년대 초반은 흉년이었고, (식량 – 옮긴이) 공급에 대한 압박을 줄이기 위해 도시 거주자들은 다시 시골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떠나야했지만, 우리 삼남매(누나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남동생은 네 살 아래다)는 모두 시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문화 대혁명’[각주:3]은 시작된 상태였다. 도시에서 살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안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게 더 편하다고 모두가 충고했고, 아버지는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이후, 어머니는 늘 우리를 시골로 데려가 키웠다. 우리는 모두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도시 출신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모두 어머니와 함께 머물렀다. 내가 여섯 살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를 할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누나나 동생 없이, 나는 몇 년 동안 혼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모두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에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간헐적으로 할아버지와 떨어져 있기도 했다. 때로 어머니에게 돌아가곤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게는 마치 두 곳의 고향이 있던 셈이다. 
 
두 마을에서의 삶은 어땠나? 친족관계는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나?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산시성의 중심부가 고향이고, 그곳은 농경 지역이었고 농경문화가 짙게 배어있었다. 역사적으로, 그곳은 산시성의 남부나 북부보다 훨씬 빨리 개발되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시안에서 대략 8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진양(旌陽)현이었다. 도시로 직접 연결된 버스가 있어 교통수단은 나쁘지 않았다. 그 마을에는 약 60가구가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시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저우즈(周至)현에 속했으며, 친링(秦嶺) 산맥의 작은 언덕에 위치했다. 그 마을에는 1970년 당시 2만의 인구─외가(外家)의 마을에 비해 훨씬 큰─가 있었는데, 산시성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두 곳의 문화는 매우 달랐다. 확실히 두 곳의 특성이나 친족적인 요소가 유사한 건 맞으나, 산시성 중부에 위치한 관중(關中)에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그곳의 생활양식은 허난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각주:4] 혹은 허베이성(河北省)과 같은 중국 내륙의 다른 지방들과는 판이하다. 나는 여러 번 그곳에 위치한 시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늘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우리 산시성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다. 내가 봤을 때 이러한 문화적 보수주의의 주된 원인은 산시성이 중국 근대기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대학 공부는 언제 시작했나?

 

나는 1978년과 1979년에 중학교를 다녔으나, 가정사 때문에 12년이 지난 1991년에야 대학에 진학하였다. 아버지는 시안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1966년 이전에 이미 졸업하여 지방의 건설-디자인 스튜디오에 배정된 상태였다. 내가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1981년, 아버지가 가스 중독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당시 정책은 사망한 노동자의 자식이 빈 일자리를 채울 수 있게끔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자리를 하나 얻어선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겨우 14살이었다. 처음에 나는 온갖 잡일을 하는 ‘후방 공급rear supply’ 부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말 내게 중요했던 유일한 문제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미혼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기숙사의 젊은이들은 모두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같이 놀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는데, 문화 대혁명 이후 대학이 재개되자마자 매년 (스튜디오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디자인 스튜디오는 지방의 최상급 학생들 몇몇을 데려왔다. 그들 중 여럿은 지적으로 뛰어났다. 그들은 모두 가슴으로 그들의 예술사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1980년대였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80년대는 쉴 겨를이 없는─모든 이들이 미래, 직업, 개인적 삶 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시대였다. 80년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80년대는 또한 차라리 따분한 시기였다.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나는 예술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규율에 의존하여 광범위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는데, 건축은 그 규율의 기술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동시에, 건축은 예술 중 가장 실용적인 형식이다. 건축은 예술과 유용성─그러므로 건축을 공부한 사람들은 예술적 혹은 실용적 방향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의 혼합이다. 하지만 건축을 공부하는 것은 예술학교나 영화학교에서 훈련받는 것과 비교하여 사람들에게 독특한 힘을 갖게 한다. 예술학교 학생은 한 분야 혹은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갖곤 하지만, 보통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진 않거나, 개념적인 사고를 잘하진 못한다. 그런 측면은 수학과 과학 과정을 배워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굉장히 논리적으로 생각과 논점을 갖추는 건축과 학생과는 매우 다르다.

 

당시에 당신이 공부하고자 했던 것은 건축이었나, 아니면 토목공학이었나?

 

나는 한 번도 토목공학을 전공하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건축을 전공할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 시험─1984년에, 건축학과에 필요한 특별 시험을 준비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을 준비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1986년인가 87년인가에 나는 사진을 택했다. 또한 1988년쯤에는 회화를 택했다.

 

 

어떻게 사진으로 바꾸게 되었나?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으나, 대학에서 전공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 건축학과는 입학 요건이 엄격했고, 따라서 나는 순수 예술로 눈을 돌렸다. 스튜디오 친구들은 모두 회화에 대한 기본적인 연습을 해왔었고,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활동은 내가 예술 학교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순수-예술 과정에 진입하는 데에는 굉장히 열띤 경쟁이 있었고, 스튜디오에서 한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 옮긴이) 나에게 유일한 방편은 사진이 되었다. 거기다 나는 이미 몇 년 동안 카메라를 갖고 있었고 회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사진 연습을 해왔었다. 비록 내 사진들을 전시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1991년 나는 북동쪽에 있는 선양(瀋陽)의 ‘루쉰(魯迅) 예술 아카데미’에 사진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사진을 공부했고. (그렇다면 - 옮긴이) 언제 영화로 관심을 틀었나?

 

예술 컬리지 2년차에 이미 나는 영화로 전과(轉科)할 생각을 품었다. 영화에 대한 책을 사고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졸업하기 전 마지막 학년 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의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각주:5] 부서로 찾아가, 단기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말했다. 내가 꽤 높은 수준의 학위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내게 매우 친절했다. 사실 루쉰 예술 아카데미 졸업 일 년 전에 이미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내가 했던 공부를 계속하리라 결정했었다. 졸업 후, 베이징에서 나는 여전히 카메라로, 하지만 이제는 시네마토그라피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서는 얼마나 오래 수학했나? 그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은 몇 명이었으며,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는가?

 

원래 훈련 프로그램은 1년 과정이었지만, 일 년을 더 머물렀다. 여러 동기생이 있었고, 나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대다수는 정규 직장에서 임시로 떠나 그곳에 왔던 반면에, 나는 정규 예술 학교를 갓 졸업한 상황이었다. 기초 훈련의 측면에서, 이전에 우리가 습득한 경험은 (서로 - 옮긴이) 달랐다. 대다수는 엄격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었다.

 

사진은 정적인 반면, 영화는 동적이다. 당신은 둘 사이에서 친숙화 과정(사진에서 영화로 분야를 옮기는 과정에서 드는 비용을 말하는 듯 – 옮긴이)을 거쳐야 했나?

 

시각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사진에는 그만의 특성과 특징properties and characteristics이 있다. 많은 이들은 평생을 사진과 함께 한다. 선양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나는 매일같이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형식과 작업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특정 순간을 잡아내는 데 유별나게 매혹되지는 않았다. 내게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것은 인간 삶의 여러 양상을 전체론적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본질the reality of our time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을 선사했다.

 

친숙화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결국 친숙화는 구성요소material의 문제다. 예를 들어, 글짓기를 하는 기자에게 언어에 대한 친숙화는 필수다. 나에게 사진과 촬영기술 모두에 있어 기본적인 언어는 이미지다. 물론 처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 갔을 땐,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해 숙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양적인 축적을 질적인 변형으로 바꾸는 문제였다. 배움은 손 안에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Learning became something in one’s own hands 사실상 현장에서 2년을 보낸 뒤로, 영화 학교는 더 이상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14살에 디자인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부터 24살에 컬리지에 입학할 때까지, 당신은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을 배우는데 꼬박 10년을 보냈다. 당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나?

 

선양에 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80년대 내가 배운 것이나 읽은 책들은 모두 유럽─그리고 거기서 고전적인 건축사(建築史)는 예술사의 여러 양상들과 나뉘지 않는다─에서 온 것이었다. 건축 프로젝트는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그건 여러 전문분야로 분리되지 않았다. 과거에 외딴 건축사란 없었다. 우리는 건축을 예술사─모든 종류의 예술 형식을 총망라한, 장대한 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 컬리지에 입학하고 중국의 전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영화로 전향한 뒤에는 이 이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원문 p. 115-119>

 

 

FILMING A LAND IN FLUX(WANG BING).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cdn.asiancorrespondent.com/wp-content/uploads/2013/08/WangBing.jpg

네이버영화

  1.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에 대해 심화된 논의를 위해선, 루 신유Lu Xinyu, ‘Ruins of the Future’, NLR 31, January-February 2005 참고. 중국의 동시대적 움직입에 대한 조사에 대해선, 잉 치안Ying Qian, ‘Power in the Frame’, NLR 74, March-April 2012 참고. [본문으로]
  2. 1958년에 시작된 중국의 경제건설운동이다. 농산부분에는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공업부문에는 중공업 최우선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흉작과 구 소련인 기사들의 철수로 이 정책은 좌절되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려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4. 陝西省(Shaanxi)과 山西省(Shanxi)의 중국어 발음 표기는 ‘산시성’으로 같다. 둘의 구별을 위해 후자는 한자 발음, 즉 산서성으로 표기하였다. 산시성(陝西省)은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이고, 산서성(山西省)은 중국 동부에 있는 성이다.(옮긴이) [본문으로]
  5.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에 따르면 시네마cinema는 연극적인 요소가 포함된 작품을,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는 영화의 특성만을 지닌 작품을 말한다.(옮긴이) [본문으로]

 

 

올버니Albany[각주:1] – 소득 불평등은 모든 차원의 정부에서 지도자들이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국가적 문제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성공을 보장하지 못했지만, 한때 기회를 보장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후손들이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리라 믿지 않는다. (사회적) 유동성의 이상은 정체라는 현실에 자리를 내어줬다.

 

몇몇은 위를 끌어 내림으로써 소득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 옮긴이) 나는 아래를 들어 올림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최저임금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로기준을 높이는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2013년에 나는 뉴욕 시의 최저 임금을 올렸다. 7.25달러에서 8.75 달러로. (그리고 올해 말에는 9달러까지 오를 것이다) 최근 예산 집행 계획에서, 나는 다시 최저임금을 뉴욕시에서는 11.5달러, 그리고 나머지 도시에서는 10.5달러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입법부는 제안을 기각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입법자들은 뭉그적거리는 반면, 나는 행동하고 있다.

 

주법(州法)에 따르면 노동위원장은 특정 산업 혹은 직제에서 지불되는 임금이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을 대비하는 데 충분한지 조사할 수 있는─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임금이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추천하는 임금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권한이 있다.

 

목요일마다, 나는 노동위원장에게 그런 위원회를 구성해서 패스트푸드 산업에서의 최저 임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위원회는 대략 삼주 후 권고사항을 내놓을 것이고, 그것은 법적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g D. Roosevelt 대통령은 1938년 최저임금을 국법(國法)으로 설정했다. 그로부터 몇 년 전, 그는 “생활임금이라 함은, 겨우 연명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 그건 온당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임금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생활비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지 못해왔다.

 

패스트푸드만큼 소득 격차가 극단적이고 불쾌한 산업은 없다. 패스트푸드 CEO들은 최고 연봉을 받는 임원들이다. 패스트푸드 CEO들의 평균 연봉은 2013년 당시 2천 380만 달러를 달성했고, 그건 (물가상승을 고려하여) 2000년 평균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 반면, 뉴욕에서 요식업에 입문한 노동자들은 일 년에 평균 16920달러를 벌고, 그건 주당 40시간 일할 때 시간당 8.5달러를 버는 셈이었다. 국가적으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은 2000년 이후 (역시 인플레이션을 고려해서) 0.3퍼센트 올랐다.   

 

많은 이들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분의 용돈을 벌고 싶어 하는 십대일 거라 생각한다. 반대로, 여성이 73퍼센트를 차지하고, 20세 이상의 노동자들이 70퍼센트이며, 2/3는 아이를 부양하고 있으며, 가족에 있어 일차적 임금노동자primary wage earners(가족 구성원 중 가장 소득이 많은 사람 - 옮긴이)다.

 

패스트푸드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다른 가족에 비해 공공부조를 받을 가능성이 두 배 정도 더 많다. 나라 전반적으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 중 52퍼센트의─다른 어떤 산업에 비해 높은 수치인데─가족 구성원 중 최소한 한 명은 생활 보조금을 받고 있다.

 

뉴욕 주는 패스트푸드 노동자 한 명당 공공 부조액 지출이 연간 6800달러로 가장 높다. 그건 곧 납세자들에겐 연간 7억 달러의 비용이다.

 

패스트푸드 산업 노동자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는 반면, 산업은 건재하며,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총 천 9백 50억 달러의 수익을 냈고, 2018년까지는 2천 백억 달러까지 늘릴 계획에 있다. 맥도날드는 작년에 46억 7천 달러를 거둬들였고, 버거킹은 2억 9천 백십 달러를 벌었다. 정부는 이들 기업이 노동 비용은 낮고, 이익률은 높게 유지하도록 놔둔 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산업의 리더는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이 많은─보통 수입 수준의─고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프렌치프라이와 버거의 가격을 상승시키도록 추동할 것이라 주장해왔다. 하지만 다른 나라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호주는 성인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시간당 16달러로 책정했지만, <이코노미스트>의 빅맥 지수에 따르면, 호주의 빅맥 가격은 미국의 4.79달러와 비교해 평균 4.32달러에 불과하다. 최저 임금이 12달러 이상인 프랑스에는 1200개가 넘는 맥도날드 지점이 있다.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하여 600명 이상의 경제학자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에 대한 커져가는 합의가 경제를 손상시키지 않으리라 단언해왔다. 사실상, 임금 상승은 소비를 증가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경제에 도움을 준다. 연구에 따르면 최저임금이 1달러 올라갈 때마다 가정에서는 추가적으로 2800달러를 소비하고, 2014년 이후 최저임금을 인상해왔던, 뉴욕을 포함한 13개 주에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고용 성장을 경험했다.

 

임금 위원회를 통해, 뉴욕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하고, 납세자들의 부담을 덜고, 새로운 국가 표준을 정할 수 있다.

 

루즈벨트 또한 최저임금에 대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생활임금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것에 의존하는 어떠한 기업에게도 이 나라에 남아있을 권리는 없다.”


* 민주당원 앤드루 쿠오모Andrew M. Cuomo는 뉴욕 주지사다.

 

* 사진 및 원문 출처:

http://www.nytimes.com/2015/05/07/opinion/andrew-m-cuomo-fast-food-workers-deserve-a-raise.html

  1. Albany 뉴욕의 주도(옮긴이) [본문으로]

 

자본주의의 집약체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생각은 다 다르겠습니다만, 저는 신용카드라고 생각합니다. 현물 간의 거래에서, 돈의 거래로, 그리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돈의 거래를 하는 시대를 작은 플라스틱 카드 하나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카드로 거래가 간편해졌습니다. 여기에 어떤 카드는 할인 및 적립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카드는 소비의 화수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까지 카드 광고는 사용자의 소비를 권했습니다. 그 ‘화수분’과 같은 소비를 한다면 자신의 카드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카드가 소비자 머리에 계속 남기 위해, 카드사는 다른 광고보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외환위기를 이기고 난 2001년, 2002년은 카드사의 전성기였습니다. 위축되었던 소비심리가 기지개를 핌으로써, 카드사에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카드 광고는 화려하게 또는 참신하게 소비자의 지름신을 가져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요. 그 가운데서 BC카드와 LG카드, 현대카드 그리고 삼성카드의 광고 전쟁입니다.


BC카드 - 소비자의 부가 곧 나의 부


여러분, 부자 되세요 (2001, 비씨카드)

해맑습니다. 광고가 시종일관 담백합니다. 보는 사람들에게 모두 부자 되라고 하니 싫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 북해도의 설경까지 더하니 순수하게 ‘부자 되라는’ 해맑음은 더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광고에도 계산이 있습니다. 앞서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레 만드는 사람이 수레를 만들면 남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목수가 널을 만들면 사람이 일찍 죽기를 바란다.


목수가 정말 악독해서 사람 죽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수레 파는 사람은 착해서 남이 부귀해지길 바라기보다는 모두 자신의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길 바라는 거겠죠. 저는 카드 광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소비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카드를 긁을 일이 많을 테니, 결국 카드 회사는 소비자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카드회사가 마음씨가 순수해서 공연히 부자 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카드회사가 소비자에게 거는 기대와 바람이 깔린 것이죠. 광고가 나왔던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습니다. 2001년, 외환위기를 어렵사리 헤치고 나올 때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돈 걱정 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시절입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나니, 사람들은 부자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습니다. 작게나마 혹은 간절히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신념이 강해진 그 시기에, 광고는 그 시대의 바람을 잘 알고 그것을 긁어주었던 것입니다. 소비자와 시대 모두를 잘 파악한 좋은 광고였다고 생각합니다.


LG카드 - ‘브랜드 카리스마’

BC카드에 이어 등장한 나온 광고입니다. 당대 톱스타 이영애가 등장합니다. 역시 모델의 특성을 잘 살린 광고입니다. 화려하고 우아한 취미와 일상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등장합니다. (알바쟁이인 저에겐 꿈도 못 꿀 일상이네요ㅠ) 그런 장면 중에 이영애는 딱 한마디만 남깁니다.


난 LG카드만 써요(2002, LG카드)


 앞서 말씀드린 특징들이 모두 있는 카드 광고입니다. 얼마만큼 ‘지름신’을 불러오게 할지 고민을 많이 한 광고인 것 같습니다. ‘소비’라는 욕구를 많이 소구한 점이 눈에 띕니다. 모델 이영애처럼 즐기면서 화려하게 사는 장면으로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주목할 점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선, 그 우아함과 고급에 대한 이미지를 브랜드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모델의 ‘난 LG카드만 써요’라는 멘트로 브랜드에 프레스티지(prestige)를 붙이는 것입니다. 광고학에선 이를 ‘브랜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LG카드만 써요라는 카피로, 사용자에게 LG카드가 당신의 프리미엄이자 자부심으로 느끼게 브랜드를 고급화시키는 전략인 것입니다. 소비의 어필, 동시에 자사의 브랜드의 고급화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광고였습니다. 몇 년 뒤 자금난으로 신한카드와 합병되었지만, LG카드는 이 광고의 여파였는지 모르겠지만, 2007년까지 가입자 수 1,000만을 돌파한 거대한 카드사로 군림했었습니다. 천만인의 사용자들에게 프리미엄을 전달한 것만으로도 브랜드 충성심까지 높일 수 있는 광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현대카드 - 공격이 최선의 방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2002, 현대카드)

마케팅에서 1등과 2등의 전략은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1등 기업은 자사 브랜드의 1위를 강조합니다. 우수함을 강조하거나 그 브랜드가 “당연하다”는 익숙함을 소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식의 카피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광고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안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2등은 달라야 합니다. 1등처럼 안정적인 여유를 부렸다간 2등마저도 빼앗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격적이고 공격적입니다. 1등을 흔들만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내놓아야 합니다. 판을 새로 짜는 1등을 향한 승부수를 던지는 것입니다.
2002년, 현대카드는 업계에서 우위가 아니었습니다. 한 해 1,000억 원의 적자와 시장 점유율은 고작 1.8%였습니다. 따라서 공격적인 마케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현대카드는 그 공격의 시작을 광고로 잡았습니다. ‘떠나라’라는 명령조의 카피, 그다음 이어지는 탁 트인 자유함은 외환위기를 겪고 온 이들에게, 이제는 좀 쉬고 싶다, 떠나고 싶다라는 욕구를 건든 것입니다. 질질끌지 않고 할말만 건넨, 정수만 짚은 광고라고 생각됩니다.

현대카드는 공격적인 메시지로 계속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시리즈 광고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걸 가져라~’는 한때 유행어가 되었죠. 최근에는 'make break make'라는 혁신적인 마케팅을 폈는데요. ‘옆길로새’(흰 앵무새가 랩을 하는게 인상적입니다. 중독성있더라구요)라는 온라인 광고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카드의 파격적인 광고는 TV가 아닌, 더 큰 판에 있었습니다.

'Super Concert' -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



2007년 비욘세, 2009년 플라시도 도밍고, 2012년 에미넴, 그리고 지난 2일에는 폴 메카트니까지 초청한 콘서트. 또한 페더러와 나달의 ‘슈퍼매치’, 피겨 갈라쇼(Super class on ice), 팀버튼 전 등 좀처럼 볼 수 없는 경기. 모두 현대카드가 주관한 경기들입니다. 규모를 보니 정말 압도적입니다. 현대카드 단독으로 진행하여, 이제 8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 사업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땡큐’겠지만, 다소 의아스러울 것입니다.
‘폴 메카트니 불러오는데 최소 몇십억일 텐데, 현대카드는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 남는 게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 텐데요. 현대카드 대표 정태영 사장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슈퍼콘서트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
반적인 광고로 기업이미지를 지금 수준까지 올리려고 했다면
이보다 몇 배의 비용이 필요했을 겁니다.
슈퍼콘서트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투자로 봐야 합니다.”


브랜드 자산이란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제품이지만, 그 브랜드 이름을 부착함으로써 얻는 효과를 계산한 것입니다. 브랜드 이름만으로도 기업의 자산이자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카드는 상품 자체보다 브랜드 자산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것도 단순히 TV에서가 아닌, 더 큰 타깃을 보았습니다. ‘현대카드’라는 이름 네 글자만으로도 갖는 힘에 주목한 것이죠. 이 사업은 분명 상당한 금액이 지출됩니다. 그렇다고 또 바로 고객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중들이 “야, 현대카드는 정말 다르구나.”라는 연상입니다. 그냥 장사치의 인식이 아닌, ‘다르다’라는 인식 말입니다. 그 인식이 기업의 이미지를 뒷받침하고, 점차 저변으로 확산된다면 그 기업은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삼성카드 - 실용주의, 고객을 생각하다

여태까지 카드 광고는 계속 ‘소비 권장’ 광고였습니다. 우리 카드로 사면 할인이 된다, 포인트가 적립된다 등등 고객 끌어모으기에 바빴습니다. BC카드 부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소비를 많이 할수록 카드사의 수익은 늘어나니까 적극 권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2013년 삼성카드는 다소 희한한 광고를 집행했습니다. ‘7초만 생각해보세요.’라는 카피가 많이들 귀에 익으실 겁니다. 


당신에게 참 실용적인 삼성카드 (삼성카드, 2013)

2013년부터 작년까지 삼성카드는 ‘실용주의’ 광고를 집행했습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지 생각해보라는 멘트가 저는 꽤 대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드로 결제를 많이 해야 수익이 생길 텐데, 넌센스한 광고가 아니었을지 말입니다. 그래도 광고는 광고입니다. 그만한 이득이 있으니 당당히 고객의 편에 섰다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광고 말미에, 카드 7개를 보셨나요? 광고 당시에 출시한 ‘숫자카드’입니다. 총 7종류로 출시되어, 소비자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7초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 사라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볼 만합니다.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사듯, 카드도 당신에게 딱 맞는 카드를 사는 것, 다시 말해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같은 조건이면 합리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판단하고 구매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시대가 지나, 정보가 다양해집니다. 그럴수록 소비자는 화려한 포장보다 더 실용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갈수록 용이해지고 있습니다. 삼성은 그래서 기능이 어떤지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의 욕구만 건든 것입니다. 그리고 절묘하게 상품으로 이어집니다. 7초와 7개의 숫자카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올해, 유해진과 이나영씨가 모델로 나오는 광고또한 실용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광고입니다. 경제적인 실용주의가 이제는 간편하고 즐겁다라는 이미지를 더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던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라는 유행어를 광고에 딱 들어맞게 넣은 것 같습니다.)


즐기자, 실용(2015, 삼성카드)

 

카드 광고를 훑다보면, 말이 어떻든 답은 하나입니다. 소비자의 지름신을 뺏기 위한 싸움입니다. 지름신을 모셔가기 위해 카드 광고는 오늘도 '지름신'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광고에는 화려한 장면이 많았다면, 이제는 소비자의 일상에 주목하는 것이 카드 광고의 트렌드인듯 합니다. 신용카드뿐만 아니라, 앞으로 많은 광고가 우리 일상에 주목할 것입니다.
일상에서 익히 겪는 한 부분이 화려한 어필보다 더 강렬하고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결핍으로 인한 불안이야말로 문학의 시작, 이라고 그는 말했다. 40여년을 ‘청년작가’로 살아온 그에게 찾아온 자유는 오히려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혼’을 꿈꾸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서재에서 내려와 아내에게 이혼을 하자, 라고 말을 하려 안방으로 왔는데 침대위에 누워있는 아내를 보고선 그런 생각이 쑥, 하고 들어가 버렸다. 침대위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는 온대 간대 없고 육십 대 중반의 볼품없는 통자 몸매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 떠올라서 차마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그는 느꼈다. 상대방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 환한 면 대신 그늘진 곳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었다.

 

자기갱신自己更新, 자기변혁自己變革. 삶의 본질적인 가치향상을 위해선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청춘이 아닌가. 비록 생물학적인 나이는 70세의 노인일지 몰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불씨가 살아있는 한은, 자신은 청년이고 아직도 청춘이라고, 그는 말했다.

 

*

 

결혼을 한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제 어미가 걱정을 할까봐 딸은 아버지에게만 연락을 했다. 아마도 애비가 유명한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 것이었으랴. 고심을 한 끝에, 사랑의 끝엔 우의만이 남는다고 답신을 해주었다. 하지만 딸애는, 답장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아내는 그릇을 내팽겨 진채 이렇게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요. 사랑의 끝엔 사랑이 있지. 그는 무언가로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그 내용을 딸애에게 보냈다. 몇 시간에도 답신이 없던 딸애는 어머니의 의견을 듣자마자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라고 했다.

 

사랑이란 잘츠부르크Salzburg의 암염巖鹽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암염은 어둠과 시간의 합작품이다. 유기물들이 깊은 어둠과 시간을 헤쳐야만 암염이 될 수가 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긴 어둠과 시간을 이겨내야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는 결혼의 단계를 삼단계로 생각했다. 첫 번째 단계. 낭만주의. 이 시절의 결혼생활은 연애의 연장선이다. 부부싸움은 장미꽃 한 송이나 맛좋은 포도주 한 잔만으로 풀어질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리얼리즘. 아이를 낳고 아파트에 대한, 시부모님에 대한, 아이에 대한 현실적인 삶이 펼쳐진다. 이 단계의 싸움에서는 돈이 최고의 협상 카드다. 마지막 단계, 인간주의. 이 단계에는 여유롭다. 여유롭다 못해 고요하다. 싸움도 없는 대신 낭만도 없다. 그는 40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이 인간주의의 단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의 끝은 사랑이죠, 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나서 생각했다. 아내는 아직까지도 첫 번째 단계인 낭만주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

 

히말라야에서는 노새들이 짐을 옮긴다. 몸집이 작은 노새들은 낭떠러지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6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굽은 등에 얹은 채 한 발 한 발을 벌벌 떨며 땅 위를 걸어간다. 일 년에 꼭 한 번 히말라야에 가는 그는 어느 날 그 노새들을 보고 울음이 났다. 노새들은 부모님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 세상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지 않다. 그는 오늘만은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그들은 가난을 등에 맨 채 살아왔다. 어떻게든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해 야수적野獸的노동을 했다. 압축성장壓軸成長을 통해 한국은 역사상 가장 단시간에 급속성장急速成長을 했다.

 

현 사회에 팽배해져 있는 부정부패가 그들의 어두운 면이라고는 하나, 우리가 지금 모두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고, 소비적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꿈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노동을 했던 그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다음세대들이 홍대에나 강남등지에서 한 잔에 만원이나 하는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베란다에서 담배 한 개비도 쉬이 피지 못하는 처지에 몰려버렸다.

 

어머니, 아버지란 단어는 아름답긴 하나, 그것에는 잔혹함이 있다. 무조건 적인 헌신,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 60억 명의 사람 중 하나가 아닌 단지 한 단어로 그들의 규정해버리는 것. 그것은 분명한 잔인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권했다. 침대에 누워서 당신 부모님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라고. □□씨, △△씨. 母와 父로써의 인생이 아닌 그들 이름으로써의 인생이 그제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말이 통하지 않아요. 고집불통이에요.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하다. 야수적 노동을 하며 꿈을 버리고 오직 가난에서 탈피하기 위해 살아왔던 그들은 돈을 버는 방법은 배웠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보다 소통의 방법을 배운 그대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설득해고, 때론 칭찬하고 다그치는 것이 더 맞지 않는가. 늙는 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고 쓸쓸한 것이다. 자식에겐 거대해 보이는 아버지들, 그들은 알고 보면 속이 빈 공룡일지도 모른다.

늙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보라.

 

*

 

옛날의 청춘들에겐 ‘지상명령’이 있었다. 특명, 가난을 극복하라. 그들은 그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현재의 청춘들에겐 이런 것들이 없다. 부자도, 그렇다고 가난뱅이도 아닌 지금의 청춘들은 너무나 쓸쓸하다. 대량소비와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자본의 축적을 강요한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을 좇아갈 뿐. 오히려 옛 청춘들보다 못한 방황의 시기를 가지고 있다.

 

자기정체성이 중요하다. 20대엔 에너지가 있다.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가. ‘지상명령’이 없다면 자신이 그것을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별을 보고 공통의 별자리 대신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될게 아닌가. 이렇게 말하며 그는 조용히 자신의 청춘을 돌아보았다. 어둠만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청춘은 지금 와서 돌아보니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그는 우리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여러분들은 다들 빛나고 있어요.

 

‘아프니까 청춘’이 아닌 ‘아픈 것을 이겨낼 수 있으니 청춘이지’라는 말 또한 그는 강조했다.

 

구술문화口述文化는 생각하는 법을 잊게 한다. 자신의 별자리,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려면 자신만의 생각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확실한 문자가 존재하는 21세기는 오히려 구술문화의 장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글로 된 문장에서 생각하는 힘이 나오는 법이다. 진부한 소리 같겠지만 이는 곧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진리이기도 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

 

일주일 전 오늘,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박범신’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SBS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인 아이러브人의 녹화방송으로써, 등촌동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스포츠스타를 직접 보는 것처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보는 것을 평소에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나는 국문과에서 박범신의 강연회 방청권을 준다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신청했다.

 

자신을 ‘젊은 작가’라고 표상하는 60대 중반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작년에 김애란의 강연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작가들의 강연회는 마치 책 한권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내용을 자신의 삶, 혹은 좋은 비유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을라치면, 마치 낭독소설朗讀小說을 듣는 듯 했다.

 

강연의 대주제는 힐링, 이자 청춘들에게 권하는 독讀한 습관, 이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을 작가인 자신의 삶으로 시작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40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로 ‘사랑’을 말했고, 이 시대의 늙은 아버지들을 말하면서 그들의 삶을 다시 돌아볼 것을 권유했다. 또, ‘아프니깐 청춘’이 아닌 ‘아픈 것을 이겨낼 수 있으니 청춘’이다, 라는 말을 전했으며 다시 문학이야기로 돌아와 자신에게 문학은 ‘목 메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비유했다. 곧이어 현 사회의 문제점과 청춘들의 상태를 꼬집으며 1등만이 성공이 아니라는 말과,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라고도 말하며 끝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인들을 꺼내어보라고 권했다.

 

길어도 두 시간이면 될 것 같았던 강연은 무려 세 시간을 넘겼다. 내 왼편에 앉았던 다른 일행은 졸고 있었지만, 나는 그 세 시간이 마치 순식간에 지나갔다. 허리를 죄어오는 요통과 목을 뻐근하게 만드는 경통을 느낀 후에, 같이 강연회를 가준 지인의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해서야 열한시가 넘은 시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느꼈던 건,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현과 생각이 아직 깊지 못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던 것들을 강단 위의 그는 힘 있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주장들을 획일화 시키는 강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양성을 해치고, ‘이러저러하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내지는 ‘나처럼 될 수 있다.’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소설 대신 올라와있는 것들을 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은 그렇지 않았고, 그의 세 시간 분량의 강연을 감히, 아주 압축적으로 말해본다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자신만의 계획을 만들어서 실천하라, 였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고 있었던 질문시간에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강연 내내 ‘생각하는 힘을 길러라’라고 넌지시 일러주었지만, 방청객들의 질문은 20대 중반의 대학생도, 30대를 맞은 회사원들도 결국은 제가 지금 청춘인데 힘든 점이 있어요,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요, 혹은 달려가다가 넘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일어설 수 있을까요, 같은 그에게 일련의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뿐이었다. 오히려 맨 처음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아이가 그에게 물어보았던, 제 친구가 결혼을 지금 당장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깐, 결국은 이것이 누구의 문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만의 생각을 하려는 것보단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 답을 구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다양성을 중시하기보단 답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교육방식이 이미 너무 뿌리를 깊게 내린 것 같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부끄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에 소설 하나를 드디어 완성시킨 덕분에 나는 무언의 만족감과 게으름에 빠져서 다른 글을 쓰는 것을 중단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이미 한 학기에 하나를 쓴다는 목표를 이루었으니 천천히 써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태하게 지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방전放電이 됐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충격요법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그러다가 일주일 전 접한 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충전充電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시간 동안의 강연을 들으면 피곤할 법도 했지만,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나는 빨리 집에 가서 그의 강연회를 듣고 느낀 점을 써야 된다는 생각과 새로운 소설을 써야지, 라는 생각에 비로소 사로잡힐 수 있었다.

 

그의 강연회를 들으며 받은 책은 그의 문장집 <힐링>이었다. 앞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힐링’이라는 단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난과 불안에 시달렸던 전 세대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들도 쓰지 앉았던 ‘힐링’이란 단어를 우리가 쓰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이번에 <힐링>이라는 책을 썼지만, 자신도 아직 ‘힐링’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고 살며 마음속에 있는 시인을 가두지 말고 꺼낸다면, 자신처럼 흡연과 음주를 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역시나 ‘정답’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래서, 내가 앞서 썼었던 4개의 글은, 그의 강연회에서 필기를 했던 것을 토대로 재문장화再文狀化시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문장에 들어있던 단어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그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든 것은 나였으니, 결국 단어는 그의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문장은 나의 것이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강연을 갔다 오고 나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강연의 여운은 아직까지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의 문장집을 조금씩 읽으면서 더 좋은 문장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40살이나 더 젊은 내가 오히려 그에게 충전充電을 당했다. 아! 그야 말로 진정한 ‘젊은 작가’가 아니었는가.

 

- 2014. 5. 8

 

강연회를 갔다 온 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아직도 둔촌동 홀에서 그의 강연을 듣는 나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1년이 지날 동안 박범신은 한 두 개의 소설집을 더 냈고, 나는 훈련소를 갔다 온 뒤에 사회복무를 하고 있다. 그의 강연이후, 글을 다시 끄적거렸다. 완성된 초고를 세 개 정도 썼고, 하나가 마음에 들어 계속 수정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에 파묻혀 있던 글을 이렇게 다시 수면 위로 들어 올려본다.

 

End.


* 사진출처:
http://medicalworldnews.co.kr/data/news_image/1407/373fc446d570c09e6bababca531e6805_PI9atrG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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