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의 셰어하우스 생활기>

처음 셰어하우스에 살게 된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나는 신촌에 있는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고, 병원과 가까운 집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 이대에 위치한 셰어하우스를 알게 됐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과 산다는 게 처음부터 쉽게 느껴진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한번은 가서 봐보자’ 라는 생각에 집을 방문하고서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그렇게 이집에 살게되고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사진=1층 거실 식탁)


- 보증금 80만원에 집을 얻다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지 4년, 별의 별 집에서 다 지냈었다. 기숙사, 반지하, 홍대 원룸, 강북 엄마 친구집, 친적집, 복층 오피스텔까지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1년에 두번 꼴로 짐을 쌌다 풀었다 했다. 짐이 되는 겨울옷은 애시당초 많이 사지도 않고, 조금만 필요없어도 물건을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에게 집의 개념은 잠자는 곳 정도 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곳은 ‘집’ 이 아니라 ‘방’ 이였다.


높은 보증금과 월세 그리고 그만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가지게 되는 좁은 방. 지금 내는 월세도 버거운데 더 좋은 집에서 살려면 더 많은 비용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지 앞으로 내가 살아가게 될 미래의 집에 대해서도 낙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포기’는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까지도 서서히 퍼져나가는 듯 했다. 


“지금 현재 이렇게 좁은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데 언젠가는 내가 내 집을 마련하고 독립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집살려면 10억은 있어야 한다는데."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였다.


1000만원이 넘는 보증금은 도저히 내 스스로 벌 수 있는 돈이 아니였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도 버거워하셔서 친구와 반반씩 모아 집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셰어하우스의 보증금은 달랐다. ‘두달치 월세가 보증금’ 그 돈은 80만원이였다. 보증금이 100만원도 아니고 80만원이라니. 보증금은 적을 수록 좋다지만 나에게는 너무 파격적인 가격이라 이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000만원을 감당하던 나에게 920만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였다. 아담한 3층 주택에 거실이 2개, 쾌적한 부엌, 넓은 옥상에 아담한 테라스까지 빠짐없이 좋았다. 7명이 한집에 살면서 거실, 부엌, 화장실을 공유하지만 방은 따로 쓰기 때문에 나의 개인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생긴다는 것

7명이 함께 살았지만 다같이 밥을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다 각자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세명, 네명 시간이 되는 사람끼리 같이 밥을 먹었다. 귀찮을 땐 혼자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는데 그러면 라면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서 누군가가 같이 먹으려고 나오게 되어있다. 그런게 좋았다. 집에서 사람사는 냄새가 나서 뭐든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어느정도 맞춰나가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다. 룰이 필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은 집 사람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면서 청소와 다른 문제들을 상의해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식탁에서 회의도 하고, 회의 후에는 같이 요리를 해서 밥을 먹기도 한다. 






- 월세는 28~38만원, 좋은 공간 그리고 좋은 생각



   (사진=1층 거실)


   (사진=2층 거실)


사실 셰어하우스라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1층 거실에서 우리는 한 두명씩 모여 빈둥빈둥 티비를 보기도 하고, 2층 테라스에서 연애나 일 이야기를 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때로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 문닫고 하루종일 잠만 자기도 하고 셰어하우스에서의 생활은 특별하기보다는 대게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1층 거실에서 밤새 대학 과제를 하기도 하고, 몇몇은 모여서 컴퓨터 게임을 하기도 한다. 혼자서 원룸사는 일이 지루하고, 무섭던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딱 좋다. 모든 셰어하우스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집은 다들 셰어하우스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같이 산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같이 티비보고, 밥 먹고 이런 것들이 매일 같이 사는 가족들 보듯이 일상적인 일들이 되어버려서 맞추어간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가끔 직장 다니는 친구와 학교 등교시간이 비슷해서 같이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헤어질때 '저녁에 만나' 라고 말할 때면 가족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때면 모여사는 우리가 신기하다.


친구들이 놀러와서 7명인 식구가 10명 정도 되면 1층 거실에서는 술판이 벌어진다. 다들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집에 놀러온 손님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배달음식 시키고 편의점에서 술 사와서 치맥하다보면 이 집 살기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놀러온 손님들도 이런 우리집을 신기해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작년에 방송했던 '괜찮아, 사랑이야' 같다고 한다. 테라스에 있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기도 하고, 저렇게 이불을 널어놓기도 한다. 여름에는 돗자리를 깔아놓고 치킨시켜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우리집 사람 참 많다라고 느낄때는 요리를 할 때다. 찌개를 좋아하는 나는 김치찌개를 끓일 때면 10인분을 한다. 아니면 다음날에 내가 먹을 김치찌개가 없기 때문이다. 입이 많아서 인지 왠만한 요리를 다 한그릇씩 비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찌개를 끓이다가도 양을 보면 집에 사람 참 많다라는 생각이 든다. 라면사러 가기 귀찮으면 아무나 라면있는 사람 있나고 묻고 다음에 사다준다고 한다. 그런게 웃기기도 하고 재밌다. 


집 값이 비싸고, 1인 가구가 많은 서울에서 서로 어느 정도 배려하고, 규칙을 지켜나갈 용의가 있다면 셰어하우스는 좋은 주거 형태이다. '방'이 아닌 '집'에서 높은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10억을 모아 서울에서 내 집마련 할 수 있을 까?" 이 집에 살며 사회문제인 주거난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함께 풀어나갈 고민을 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무능력한 개인이라서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집 값이 비정상 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좋은 대안이였다. 셰어하우스가 보편화되며 많은 이들이 같이 밥 먹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



   (사진=2층 테라스)


   (사진=내 방)



(출처: 고시텔 닷컴, http://www.gositel.com)

"대학생 주거 문제는 빈곤 그 자체일 뿐이다"

은 최저임금과 높은 주거비를 감당하며 가지게 되는 집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부모비동거 대학생들은 방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방에 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시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부모님도 이 사회도 그리고 그들마저도 이렇게 방에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 개인이 아니라 과반의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유지했기 때문에 더욱 문제될 것 없이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제적 이유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고 하나,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가지는 문제라면 이것은 사회적 문제로 치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생의 주거는 왜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을까.


대학생의 주거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한시적 문제로만 치부됐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충분히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존재로 평가됐다. 대학생의 주거문제는 언제가 극복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됬다. 그리고 대학생 그들 스스로도 언제가 취업을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돈을 모아 자신의 집을 가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원룸은 진정 ‘한시적’ 주거인가 생각해 봐야한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승진을 하고, 대출을 끼고서라도 전세로 수도권에 아파트를 얻기까지 그 과정들이 모두 쉽사리 이루어질거라고 낙관할 수 있는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세대이다. 우리는 과거세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러한 집에서 살게 되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1인 청년가구 주거빈곤 비율은 36%였다. 1인 청년가구는 시설미달, 면적미달, 반지하, 옥탑등 최저주거에 미달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최저임금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면서도 인간으로서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에 놓인 것이다. 쪽방 속의 삶들은 이제 과정이 아니라 ‘빈곤’ 그 자체로 치부되어야 한다. 대학생과 빈곤이라는 단어가 당치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빈곤’이다. 더 이상 젊음을 이유로 대학생의 주거 문제를 ‘견뎌낼만한 일’로 사회가 치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그 다음세대가 더, 다음세대보다 그 다음세대가 더, 이 작은 쪽방에서 더 오랜 시간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주거문제는 한시적 문제도 아니며 우리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학생들이 새로운 주거 공동체와 문화 속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안정감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학생의 주거문제가 사회적 패배감과 미래에 대한 비관으로 이어지지 않게 주거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 필요하다. 한국과 비슷한 사회정서와 주거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1인가구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한 일본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셰어하우스’이다. 우리나라에는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주거 형태이다. 셰어하우스란 한 집에 살며 거실과 주방, 화장실등은 공유하되 방은 따로 쓰는 주거양식이다. 주거비가 높아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도시인들이 집에 살며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기존의 고시텔과 하숙과는 다르게 취미나 생활양식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서적 사회적 교류가 존재한다. 일본의 뉴스에 따르면 독립적인 1인가구보다 임대비용은30∼40% 저렴하지만, 생활의 만족도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셰어하우스 주거 문화에 대한 일본 내 통계조사에 따르면, 셰어하우스 거주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주거비 절감 때문이었으며 거주자의 62% 이상이 장기거주계획은 없었으나 다른 거주자와 함께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도로 인해 장기거주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1인가구 증가추세와 한국과 일본이 비교적 비슷한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향후 우리나라도 셰어하우스가 보편적 주거의 형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생을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낮다.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셰어하우스가 확산된다면 비정상적으로 치솟아있는 주거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방’이 아닌 ‘집’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평균 1400만원대의 높은 보증금이다. 일본의 셰어하우스를 벤치마칭해 한국에 도입한 셰어하우스들은 지금 ‘두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측정하고 있다. 월세가 40만원정도일 경우 보증금은 80만원인 것이다. 천만원대의 보증금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이다. 또한, 거실과 부엌, 화장실등 공유공간을 여러명이 나눠씀으로 인해 오는 임대료 절감 효과도 있다.

다음편에서는 대학생 주거 문제 해결방안으로서 셰어하우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대학생 주거문제
- 한국친구들은 대학 가서도 부모님께 월세, 용돈 받고 산다며?

‘독립’ 그것이 문제로다.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다른 나라 애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독립한다더라. 그래서 자기 월세랑 생활비도 다 자기가 번데.’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독립을 가까이 있는 것, 조금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면밀히 따져보면 대학생의 독립이란 사실상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300만원이 훨씬 넘는 등록금과 6000원이 되지 않는 최저임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알바를 했을 시 손에 쥐게 되는 돈은 40만원 안팎이다. 대학가 평균월세인 50만원을 감안한다면 이미 우리는 ‘적자’다. 버스한번 안타고 주말에 친구들과 치맥 한번 안하고 남자친구와 영화한번 안 봐도 월세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돈이다. 월세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것은 더 더욱 말도 안 되는 일다.

우리는 ‘아이유’, ‘김연아’ 가 아니다. 우리는 대기업 직원 연봉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아이돌도 아니며 천재적인 스포츠스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평균이 우리가 이러한 삶을 누리는 게 과연 개인의 ‘무능력’ 의 탓일까. 우리가 그들만큼 특출나지 않은 무능력한 개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걸까.

청년 주거 문제는 사회적 문제라기 보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 보편적으로 대학생의 주거는 부모가 경제적 지원을 해줌으로서 해결되어 왔다. 그러나 부모님의 경제적지원이 불가능 하거나 낮은 수준인 경우 대학생들은 주거 문제에 난항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은 ‘젊음’으로서 고통을 당연하게 감내하는 세대로 판단되어 왔다. 대학생 주거문제는 한시적 주거문제로 생각되며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높은 대학등록금과 낮은 최저임금으로 구조적으로 대학생의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고, 대학생 주거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친구들은 대학 가서도 부모님께 월세, 용돈 받고 산다며?’
‘너도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살았으면 그랬을지 몰라.’
많은 외국 학생들이 의아해 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한국의 구조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이유들을 명확해진다. 최저임금과 월세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시급은 만원정도이고, 학교다니면서 알바하는 친구들은 일하는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백만원 초반부터 중반까지 받아 그리고 월세 삼십만원정도 되는 셰어하우스에 살아 남은 돈은 용돈으로 쓰지.’ 한국 학생들이 독립에 대한 의지나 노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미국의 학생들과 비슷한 시간의 노동을 한다. 그러나 수입은 적으며 지출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차이 때문에 먼나라 학생들은 돈을 모아서 중고차를 사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월세도 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 너무 진부한 말일까. 그래서 이번에는 대학생 주거 실태에서부터 셰어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능성’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구분짓기는 왜 생겨난 것일까. 모든 구분짓기는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만들어 낸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구분짓기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짓기들이 정당하고 사회적으로 보편화 될 수 있도록 전파시킨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역사과 담론들은 약자의 논리가 아니라 강자의 논리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차이와 차별을 양산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차이’ 라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인 약자와 강자를 ‘구분짓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야만이 자신들이 통치하는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 대한 억압은 기득권이 자신들의 계급을 유지하는 통치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한 것들은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변화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중간계층에게 남의 일로 평가되지만 그 여파는 사회전체로 돌아가게 된다. 그 억압과 차별은 체제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계급이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국가라는 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체계가 필요하다. 무질서한 변화들은 국가의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질서가 존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은 이성애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라는 것은 기초 논리가 사람의 존엄성보다 시스템의 안정을 중시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준선상에서 도태되는 집단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에서는 그 구분이 아주 기초적이고 그 어떠한 사회적 의미와 권력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사회적으로 당연시 될수록 다른 차별들도 차이에서 비롯된 당연한 것으로 평가된다. 모든 차별들은 그 시대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적 차이’에서 발현된 차별이었다. 현 시대에 가장 보편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것 자체가 권력관계가 투영된 구분짓기 였기 때문에 이 개념자체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그것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없다.


이 모든 방향성이 뒷 받침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엄성을 인정받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하며, 헌법에서도 명시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현 시대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강자와 약자가 나뉘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고 삶을 더 효율성과 상품이 강조된다. 인간도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며 경쟁력 없는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로 받아드려진다. 상품화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가 빈부격차를 넘어서서도 경쟁사회로서 ‘차이’, ‘차별’을 명명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러한 체제들이 다름을 다름으로 보지 않고, 무언가를 우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개인에게 세뇌를 시키는 것이다. 결국 체제는 차이와 차별을 반복시키며, 그 논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사회속에서 기득권의 담론들을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얼마나 무분별하게 받아드리고 있는 지에 대한 인식과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잘 보이려고 쩔쩔매는 사람은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보다는 ‘잘 보이려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쉽다. 그리고 썩 매력적이지도, 진정성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어렵다. 그저그런 사람으로 잊혀지기 마련이다.

 

친하지 않아 어색하거나 혹은 너무 소중해서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조심스러웠고, 잘하려고만 했고, 그래서 서로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모든 조심스러움은 상대방에게 편한함을 주기 힘들다. 그래서 결국 나라는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조금씩 착한 사람으로 비춰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착하다는 말은 진정 칭찬인 걸까.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맞춰주는 것이 정답인 걸까. 상대방과의 관계는 중요한 것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적당한 배려는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해야 배려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배제된 배려는 그저 감정의 소모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는 게 먼저다. 화가 날 땐 화를 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마음에 이미 ‘화’가 나있음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배출하지 못하고 억누르는 것은 좋은 해결방안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을 듣기위해 자신의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나 자신이 정말 화가 나지 않은 건지, 화를 낼 용기가 없는 건지 생각해 봐야한다.

 

거짓말 하는 것만이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다. 자신을 포장하는 행위도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나 자신의 어느 부분을 숨기는 행동이다. 숨기려고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이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포장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어쩌면 호감을 살 수 있을 까’, ‘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하지 않을까’ 이러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들이 삶을 가로막고 있다. 사실 자신을 적당히 포장하는 것은 쉽다. 나인채로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감정들을 남의 기분에 맞춰 적당히 흘려보내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착한 척, 괜찮은 척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상대방은 ‘쟤는 이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지나친다. 자신의 마음을 곪아가고 있는데 상대방은 아무 일 없는 줄로만 까맣게 모르게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굳이 집요하게 알아줄 사람은 없다. 말을 꺼내야만 자신의 감정 또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고, 착한 게 중요한 것처럼 배우고 자란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와 상황에 따른 배려’ 만이 존재하면 된다. 착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얻는 것이다. ‘착함’은 용기 없는 사람이 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속에서 화를 삭히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의 감정이다. 표현만이 진정한 자기 위안이 된다.

 

몇 년 전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난 착한 게 아니라 나빠질 용기가 없는 거지.’ 라고. 그때 난 이렇게 생각했다. 그 ‘나쁨’ 이 화낼 때 화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라면 ‘나쁜 너도 나는 좋다’ 였다. 서로가 마음에 조용히 화를 담아두면 조용히 멀어진다. 그 보다는 관계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건강한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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