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3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는 코로나 이슈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투표율이 26.7%를 기록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방증하였습니다. 전체 투표율을 봐야 알겠지만, 투표율이 높아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유권자가 정치효능감이 높아짐으로써,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반대 여론이 결집한 것도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두 이유는 모두 상충되지만, 결과적으론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올해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하여, 많은 정당이 선거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선거법에는 비례대표를 등록한 정당만 광고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이나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의 명의로 광고가 나왔죠. 그런데 광고가 매우 뻔하고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총선 광고와 비교해보았습니다.

 

 


 

# 복기  :  공수만 바뀌어버린 양당

 

 

 

바꿔야 미래가 있다. (미래한국당, 2020)
절망의 레드오션을 희망의 블루오션으로 (더불어민주당, 2016)

 

 

 심판 프레임은 질리도록 많이 본 프레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2016년 민주당 광고와 비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야당 포지션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약점을 잡아서 유리한 쪽으로 설득하려 합니다. 당연한 전략이지만 한편으로 뻔한 전략입니다. 전에도 네거티브의 효능에 대해서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네거티브는 일시적이며, 나아가 정치효능감을 저해하는 ‘자충수’입니다. 더욱이 이런 사안에서 자신과 교묘히 분리하여, 이야기한 것도 유권자의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문재인과 더불어시민당은 같은 말입니다.(민주당, 2020)

 

  더불어시민당의 광고에 있어서는 사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설득이 없습니다. 일말의 고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4년 전 촛불을 다시 사용하였고, 유권자가 빠지고 그 자리에 대통령을 세웠습니다. 물론 촛불의 의의도 중요하고, 대통령의 국정운영 또한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국에 대한 고민은 다 차치하고,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걸 보는 유권자는 뭐라고 생각할까요? 누구는 수긍할 수도 있겠으나, 지지하지 않는 이들에겐 오만한 발상이라고 보일 수 있습니다.

 

 

거대 양당의 광고를 보면서, 실망이 컸습니다. 유권자를 위한 설득이라기보단, 정당과 정당 간의 싸움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였습니다. 시간은 지났을지언정 아직도 정치광고는 2016년의 상황에서 진보한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당 모두 누군가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더욱 방점이 찍혀있었습니다. 정치를 유권자에게 팔려한다면, 그들의 말에서 카피를 찾고 컨셉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기보  :  2008

 

 

유권자는 자신의 고민을 알아주는 후보나 정당에 투표합니다. 정당은 그런 고민을 해결해주겠다는 공약으로 설득합니다. 그 설득의 문장은 쉽고 명쾌해야 합니다. 긴가민가한 카피는 상대 진영에게 기회를 뺏기게 됩니다.

 

 

서민에겐 고등어가 경제입니다. (한나라당, 2008)

 

2008년 총선에서 집행한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광고입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여당이 된 첫 해, 그것도 정권이 출범한 지 2달 만에 실시한 선거였기 때문에 지지도가 높은 상태였습니다. 다소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집행한 광고였지만, 나름 노력한 광고였습니다.

(실제 집행한 정책과는 정말 많은 괴리감이 있었지만) 권위적인 모습이나 친 기득권적인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피력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저 광고 전략이 정답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한 국내 논문이 있는데요. 논문(박병준 1990 : 208~209)에서는 성공적인 이미지 전제와 조건 중의 하나로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에 심리적 연대가 이뤄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대신 그 이미지가 자연스러우면서 일관되어야 하는데, 단기간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후보자는 4년 만에 나오지만, 유권자는 4년 동안 본 것으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오래 쌓인 생각과 태도의 집합체가 이미지이고, 이를 토대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 대국 : 3일 후 그리고 그 후

 

35개 정당이 이번 총선에 나왔지만, 관심을 받는 정당은 그리 많지 않아보입니다. (ⓒ KBS 뉴스)

 

결국 여당은 정권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야당은 정권 심판을 내세웠습니다. 광고만 놓고 본다면, 선거는 심판의 역할만 수행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수정당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오히려 주목받는 것은 두 당과 위성정당 뿐입니다.

 

 

유권자를 소비자라고 친다면, 이번 선거광고는 소비자의 니즈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광고입니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선거 광고에서는 유권자가, 혹은 능력이나 탁월성에 중심을 맞춘 광고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교안 "보수 유튜버에 입법보조원 자격 주자" 제안 논란 - [출처 : jtbc 19.12.16]

 

 

 

오늘은 광고라고 하기에는 좀 모호하지만, 여론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유튜브를 놓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인프라가 잘 조성된 한국 사회에서 유튜브는 이제 TV를 넘보는 거대한 미디어 매체가 되었고, 정치권에서도 너 나할 것 없이 채널을 만들어서 구독자를 올리는 데에 열을 올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난해에 있었던 이슈에 대해서도 유튜브는 집회를 중계해주거나, 이슈를 알리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대한 애국당과 같은 우파 진영에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지지를 결집하는 데에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유튜브는 정치에 그리고 곧 있을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 유튜브, 이목의 싸움.

 

 

 

유튜브의 장점은 빠른 컨텐츠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한 분야만 집중해도 구독자가 생겨난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오히려 한 분야만 집중하기 때문에 구독자들은 신뢰가 생길 수 있는 것도 부수적인 효과입니다. 무엇보다 유튜브는 손쉽게 소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유튜브를 보러 굳이 티비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단순히 침대 위에서도 전문화된 컨텐츠를 빠르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자신의 의견을 전파할 수 있다는 장점은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구미가 당기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정당이나 정치인들도 모두 유튜브를 만들게 됩니다. 무엇보다 유튜브는 '이목'을 끌기 쉽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몇 년 전에 잠시 인기를 끌었던 팟캐스트를 기억하시나요? 팟캐스트는 음성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이었다면, 유튜브는 음성과 더불어 영상 중심의 플랫폼입니다. 현장이 보이고, 사람이 직접 나오는 영상이기에 음성보다 더욱 쉽게 수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수용과 확산을 할 수 있도록, 썸네일부터 영상 제목까지 '이목'을 끌기 위한 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파 계열 정치권에서는 이렇게 '이목'을 끌기 위한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적극 지지자들이 직접 발로 뛰면서 현장에 다니고, 정당 차원에서 직접 의사 표현을 하는 데에 앞장서는데요. 특이한 점은 종종 지지자들이 원색적인 비난을 하거나, 유명 정치인들이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를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해 '어그로'끄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주 비효율적인 전략만은 아닙니다. 

 

 

이를 점화 효과를 통해서 설명하면 재미있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점화 효과(Priming)는 매스미디어가 유권자에게 특정한 방향을 강조해서 보여줌으로써 여론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인데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미디어에 노출된 사람 내에 내재된 키워드들을 건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략적 단어 선택만 잘해도, 미디어 시청자들의 의식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파 지지 성향의 유튜버가 ‘공산화’, ‘독재’라는독재’ 단어를 쓰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항상 내재하고 있는 공포이자, 그들이 판단하는 근거인 스키마(Schema)의 우선순위입니다. 굳이 깊이 사고하지 않아도, 시청자의 오피니언 리더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자연스레 의사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보수 지지자들을 수면 밖으로 노출시키고 결집이 쉬운 이유였습니다. 더욱이 수직적, 하향적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했던 이들이었기에, '생각할 것'이 아닌 오직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도 잘 먹힐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유튜브는 새롭고 쓸모 있는 선전수단이 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유튜브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선전수단으로써는 용이했지언정,부동층의 지지를 끌어오거나, 설득하는 데에는 미진했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대중들은 네거티브에 회의적입니다. 더욱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대중은 모든 말에 민감해집니다. 의도가 뻔한 말은 거르고 본다는 것입니다. 

 

 

 

# 이목이 아니라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치적 의사결정, 그러니까 투표에 있어서 유권자가 관심 있게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과서대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서 투표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우린 역대 선거에서 너무 많은 이변을 봐왔습니다. 사실 유권자가 투표하기까지 많은 이슈와 캠페인을 마주하는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소신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권자가 주목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투표 행위 모델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정치 커뮤니케이션에서 보는 유권자의 투표 행위 모델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사회학적 모델과 투표 양분자 모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지역별 우세현황.

 

 

'사회학적 모델'은 1948년에 발표된 연식이 좀 있는 이론입니다. 골자는 유권자는 자신이 소속된 사회나 계층에 의해서 투표 결정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당 소속감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근거로 작용하게 되는데요. 실제로 우리 선거 구도에서 고착된 동서로 지지 정당이 나뉜 것으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소위 '텃밭 지역'이라고 하여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큰 지출이나 전략 없이도 어느 정도 표를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모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마다 수많은 사연이 얽혀있겠으나, 결국에는 내가 속한 지역이, 내가 속한 계층이 지지하는 성향에 영향을 주는 것이죠.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정당에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유권자(있기는 하지만)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지역이니까 이 정당하는 심리도 이제는 점차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데요. 이를 반영한투표 모델이 '투표 양분자 모델'입니다. 투표 양분자 모델은 정당 소속감이 아닌 후보자에 관심을 두는 투표행위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당이 아니라 후보자의 개성이나 정책을 두고 유동적으로 결정하는 투표 모델인 것이죠.

 

 

 

 

2016년 20대 총선 부산지역 선거결과 [출처 : 이데일리]

 

 

이런 선거 당선사례는 실제로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2014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순천-곡성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된 사례를 들 수 있겠습니다. 또한 2016년 부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5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것도 사례를 들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라는 말도 점차 균열이 가고 있음을 방증하게 됩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 덕분에 '꼼수는 정수로 받습니다.'는 말은 이미 익숙하실 것입니다.

판이 몰릴 때,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두는 위험한 수가 꼼수입니다.

정치 유튜브에 관한 자료를 살피면서 꼼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모두 명분은 분명하지만 결국 많은 유튜브가 가리키는 곳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심판, '선거'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앞에 꼼수가 계속 놓였을 때, 정수로 받아칠지 기다릴지는 온전히 여러분의 몫입니다.

 

 

 

 

 

 광고홍보를 배우면 여러 분야를 마주합니다. 마케팅, 행동심리, 수사학 등을 넓고 얇게(?)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정치 커뮤니케이션도 포함됩니다. 쉽게 얘기해서 선거 광고랑 정치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죠. 이번 글부터 한동안 정치 광고가 어떻게 대중에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첫 글로 ‘네거티브’로 소재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최근에 많이 쓰이는 기법이기도 하면서, 여러분들도 많이 아실 것 같아서 꼽아보았습니다.

 

# 1964년

 

'못살겠다. 갈아보자' - 간결한 네거티브와 메시지가 응축되어있습니다.[사진 : 제3대 대선 민주당 포스터]

 

 

직역하면 "부정적"이라는 의미죠. 어떤 건지는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거나 비꼬아서 말하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거 맞습니다. 지금도 토론이나 유세에서 종종 상대 후보를 비난하는 것이 네거티브지만, 그런 기회가 없던 시절은 위의 사진과 같이 오직 선거 포스터와 문구를 통해서 네거티브를 진행하였습니다.

 

역대급 네거티브 사례는 미국 대선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1964년 미국은 대선을 앞둔 상태였습니다. 전해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어수선한 시국이었습니다. 당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는 강경한 정책을 내세웠고, 핵무기에 대한 언급이 잦던 시기였습니다. 민주당은 이런 시의성을 활용하여 대선 광고를 만들고 9월 7일 딱 한 차례 방송으로 송출합니다.



 

Vote for president Johnson on November 3. The stakes are too high for you to stay home.

11월 3일, 존슨 대통령에게 투표하십시오. 집에 있기에는 이 위험은 너무나 큽니다. 

 (1964, Lyndon B. Johnson presidential campaign)

 

 

 

광고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의 잠재된 공포를 내면 밖으로 끄집어서 보여준 것입니다. 민주당은 국민이 무엇을 겁먹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공화당이 가진 이미지를 단숨에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결과는 민주당은 61.1% 압승을 얻을 수 있었고, 후보였던 린든 존슨 또한 대통령직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네거티브가 선거의 판도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 1988년

 

네거티브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입니다. 선거 판도를 확실히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에도 정치인이 가진 이미지도 영향을 줍니다. 제가 가진 전공서에서 정의한 네거티브의 효과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  부정적 이미지는 대중이 생각하던 기존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준다.

*  처음 유권자에게 각인된 부정적 이미지는 긍정적 이미지에 비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

 

1988년 미국에서는 조지 H. W. 부시와 마이클 듀카키스가 대선에서 맞붙었습니다. 민주당의 듀카키스는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성공적인 이력을 바탕으로 당선이 유력한 인물이었는데요. 하지만 부시의 참모였던 리 애트워터가 제시한 네거티브 광고로 역시 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Revolving door' - 부시는 듀카키스의 죄수주말휴가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였습니다.

 

 

듀카키스가 주지사 시절 시행한 죄수 주말 휴가제도는 의외로 성공을 거둔 정책이었습니다. 치안도 상당히 좋았고, 살인 사건도 전국 최저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을 공화당에서 교묘히 이용하여 듀카키스를 치안과 행정에 안일한 사람으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유권자에겐 머나먼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직결되는 주제였으니 효과는 더욱 강력했습니다. 이 외에도 안보와 경제에 관한 지속된 네거티브 공세에 결국 듀카키스는 낙선하고 맙니다.

 

# 2002년

 

우리나라에선 2002년 민주당 국민 참여 경선에서도 이를 활용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선에서 대세론의 적임자를 자처하던 이인제 후보는 선거 초반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2위였던 노무현 후보가 표차를 좁히며 바짝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인제 후보 측에서는 네거티브로 승부수를 던집니다. 당시 이인제 후보는 노무현 후보를 향해, ‘언론 국유화’ 발언과 장인의 ‘빨치산’ 이력을 토대로 공격하였습니다. 이 이슈는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사실의 여부를 떠나, 한번 씌워진 프레임은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낙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2002, 노무현 후보 연설 중 발췌)

 

 

네거티브 공세 앞에서, 일차적인 대응은 즉각적이고 단호한 반박입니다.  '현재진행형'  의혹이 공격이 들어온다면, 타이밍 또한 중요합니다. 아무리 반박을 하더라도 제 때에, 확실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무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네거티브 선거전에서 실패한 이유 또한 타이밍과 단호함을 놓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후보는 제기된 공격을 타이밍에 맞게 단호하게 부정하였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발언은 묘수이자 승부수였습니다. 장인의 과거 이력에 대해  ‘감정적’ 호소지만 조목조목 반박하였습니다. 사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에 대한 통상적인 대응은 사과를 하거나 이슈를 감추고 후보의 좋은 이력들을 어필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후보가 잘못해서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이미지 회복 전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수사학에서 유명한 학자 케네스 버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의론]이라는 책을 썼는데, 재밌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정인이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불쾌한 감정이 발생하여 대중의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을 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사하는 것, 다시 말해 인물이 명성을 회복하는 일은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희생양을 두고, 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라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저 연설은 편한 선택을 버리고,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습니다. 위험 부담이 따르고, 단어 하나만 어긋나도 자칫 대중들에게 명분 없는 선동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부담이 있음에도 묘수를 던졌다는 것은 놀라운 선택이었습니다. 후보의 인간적인 부분이 잘 전달이 되었고, 결국은 성공적인 설득이 되었습니다.

 

# 현재

 

사상 유례가 없는 셀프 네거티브 (네거티브 당사자가 대안없이 스스로 언급하는 것은 금기이자 자충수입니다)

 

네거티브는 위력적입니다. 그리고 깔끔한 무기입니다. 네거티브는 보통 출처는 기억하지 않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하고 또 와전되니까 말이죠.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도 상대를 위기에 몰아넣는 좋은 전략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툭하면 네거티브를 씁니다. 그러나 사실 대중들은 네거티브를 싫어합니다. 당장은 상대 정치인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유권자 모두에게 정치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불신이 생기고 맙니다.

 

문제 있는 사람도 저렇게 후보가 되는데, 정치판은 어떻겠어? 그 나물에 그 밥이지.’ 같은 생각들이 만연하게 됩니다. 단기간적으로는 투표율 저하가 일어날 것이고, 정치인 전반에 대해서 불신과 회의감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서른 번째 생일이 지나갔다.

 

크게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었고 생일을 축하받았다. 3을 강조한 선물을 많이 받았고, 서른에 관련된 책은 두 권이나 선물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서른 줄에 들어섰음을 강조하는 것 같아 잠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10대의 마지막 생일에는 싱그러운 20대 청춘을 꿈꾸며 기대에 가득 찼었던 것이, 10년의 차이를 두고 이렇게 바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아쉽기만 했다.

 

4월 둘째 주인 생일 주간은 애매한 기간이다. 학생 때는 대부분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직장에 와서는 대부분 가장 바쁜 기간이라 대충 챙길 때도 많았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일주일을 차이로 마냥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애매한 주간이 되었다.

 

5년 전 4월의 어느 날은, 내가 일하느라 한창 바쁘던 시기였고 동생이 제주도 수학여행을 일주일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야근을 일삼던 일이 갑자기 중단되어 무슨 일인가 싶어 뉴스를 보며 집으로 가던 퇴근길도 아직 생생하기만 하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전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모처럼 편안하게 일찍 잠에 들었던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악몽처럼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 차가운 물에 배의 마지막 조각이 안쓰럽게 잠기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삶은 얼마나 슬픈가. 그런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더 슬퍼하지 못한 채로, 나는 일 중단으로 인해 일당을 주지 못함을 다른 근로자에게 설명해야 했고 항의를 받았다. 자본이 인간성에 흠집을 내는 매 순간을 내가 익숙하게 살고 있었다.

 

 

슬픔의 감정은 조금 늦게, 매 순간 다가왔다. 동생의 수학여행이 취소되었을 때, 고3이 되었을 때, 졸업과 입학을 했을 때, 새내기가 되었을 때. 동생 같은 그 아이들이 제때 구조되었다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흘러갔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에 많이 미안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더 노력했지만 그 미안함의 조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비슷한 모양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5년이 지나 공영방송에서는 오보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앞으로의 역할을 다짐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또 반대에선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을 비웃고,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다. 타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냉소를 보내기 전에 그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줄 수는 없을까. 슬픔의 무게마저 진영의 잣대 위에 올리는 세상인가 그러한가 싶어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죽이는 거야”

 

최근 종영한 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흑화 하면서 뱉은 한 마디를 들으며, 문득 다른 장면을 하나 더 떠올려본다. 그것은 작년 늦가을이었고, 11년 만의 삼성의 사과였다. 나는 현장에서 터지는 많은 플래시 속에서 약간의 슬픔과 안도, 안타까움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당연했어야 할 일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지난 11년이 유가족과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故황유미씨의 아버지는 그렇게 서글프고 푸른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들의 죽은 세상이 여전히 그곳에 살아 있었다.

 

사무실로 복귀하며 핸드폰의 반짝임을 위한 수많은 죽음과 피를 생각했다. 한 사람의 죽음 너머에 놓인 그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메탄올, 시안화수소 등 유해물질의 위험성을 미리 고지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사람들과 산산조각 난 그들의 세상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젊은이의 청춘을 뺏은 많은 일들은 또 어떠한가. 그런 조각난 누군가의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먹고 살기 위해’라는 이유로 늘 이 ‘익숙함’의 핑계를 대지 않았던가.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슬프다. 나의 오늘이 이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어느덧 이러한 일상과 감정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내 세상에서 분노와 슬픔마저 그러해서.

 

우리 사회의 상흔이 보다 옅어지고, 그 위에 새싹이 돋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지 여전히 가늠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선득거린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 세상이 더 이상 ‘익숙함’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본다. 익숙해지지 않는 서른처럼 다섯 번째 혹은 열 번째의 많은 것들도 그러할 수 있기를.

 

 

 

내가 ‘어머니’라는 존재가 된 뒤,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게 됐을 때, 그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Ⅱ”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 그림을 보고 임신한 여성 아래에 여러 명의 여성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울고 있어요”라고 같이 간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이 “이 여자들은 행복하게 잠들었는데?‘라고 반문해서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여성들은 임신한 여성 아래에서 아주 편히 잠들어 있었다.

 

사진 : 구스타프 클림트 ”희망Ⅱ“,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아이를 낳기 전, 내가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은 클림트의 그녀와 같았다. 그러나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의 그림 속 여인들이 울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고단하고 괴로운 과정을 거쳤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주위를 떠돌던 모성 신화에 대한 과장과 거짓을 마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으로 인해 축 늘어진 피부를 붙잡고 3시간에 한 번씩 먹여달라 울어대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그 사이사이 기저귀를 갈아달라 울어대는 아이에게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 사이사이 토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한 생명을 생존시키는 데는 나의 인내심과 체력이 ‘모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에게 모성에 대해 누가 물었다면 24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없는 고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커서 어린이집에 가고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사회로 나왔을 때, 나는 내 존재가 지워진 채 살아야 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꼈다. 돈벌이를 하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이외의 시간 중 내 시간은 없었다. 그 시간은 온전히 아이의 양육에 쓰였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누가 내 존재를 지워버렸는지에 대해 항상 궁금해했다.

 

이러한 나의 물음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답했다. ‘모성’은 가부장제를 지속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일신론은 단순히 신의 형벌을 바꾸어 놓은 것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신성을 앗아갔고 어머니로서 또는 신성한 아버지의 딸로서만 존재하게 했다. (중략) 남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알려면 그 아이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만 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어머니를 독점적으로 소유해야한다는 뜻이다. (중략) 가부장적 남성은 ‘그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그의’ 자식을 낳도록 했다.” 에이드리언 리치(20180,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평민사, p.134-135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빼앗긴 존재가 되었다. 앵겔스의 말대로 가부장제 하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렇기에 리치는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다시 소유하게 되면 인간 사회에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p.327)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여성이 선택에 의해 아이들을 낳고 여성의 사고(思考) 그 자체가 변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괴로웠던 그 순간에도 뱃 속의 아이와 소통하고, 출산 후 아이와 첫 대면을 하고 내가 해주는 행위로 인해 아이가 방끗 웃을 때면 즐거웠다. 나는 이러한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겐 내가 가부장제에 순응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에 매번 절망을 느낀다.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해 모성이라는 것을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해야 하는 것인가는 고민해볼 문제다. 왜냐하면 지금의 모성은 남성에 의해 변형된 남성을 위한 모성이지 진짜 모성은 따로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치의 말대로 가부장제가 타파된 이후, 그동안 삭제되었던 진짜 모성이 드러나길 바란다. 임신 출산이라는 여자의 고유 능력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받고, 그 후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가 자녀 양육과 보육의 일부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를 칭송하고 감사히 여기는 일이 더 이상 없”(p.243)는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면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이 행복하게 잠자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더 수작 일기는,

유튜브 <더 수작>(업로드 예정)의 촬영과정을 제작진의 관점에서 쓴 의식의 흐름 에세이입니다.

 

더 수작의 주인공 진성이는,

이태원 사업가이자 요리 연구가로, 비주얼만 보면 오금이 지리지만, 보다보면 친근하고 허당끼 가득한 우리 동네 보통 형입니다.

 

더 수작 앞으로는, <회차별 음식/컨셉 소개>, <레시피/요리 장면>, <식샤를 합시다(먹방 장면)> 3가지 카테고리로 심플하게 아무 생각 없이, 간섭 없이, 퀄리티 없이 이어져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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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네 곱창가게 ‘언덕집’ 일요일 휴무>

 

새찬 바람이 언덕집의 통유리창에 부딪쳐 사그라진다. 흔들흔들, 조금씩의 미동.

길은 하나. 주방쪽 뒷 창문. 가볍게 통과해 안으로 향한다.

 

안/밖. 밖의 사람들이 가게 통유리창 안의 다른 공간 속에 움직이는 나를 보고 힐끔거린다.

나 역시 지나가는 밖의 사람들을 쳐다본다. 서로를 볼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는 확실히 전혀 다른 세상이다.

 

4시 40분. 약속했던 첫 촬영 시간보다 40분이나 진성(수작)이가 늦게 도착했다. 이유는 촬영감독의 개인사연이니 스킵... 다행인 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니었다.

 

<촬영 준비>

 

앞으로의 메인 촬영장소인 이 곳. 촬영을 위해 페인트칠까지 쏴악 했다는 진성이.

일단 열정과 노호력에 봑수!

그러나 역시 셋이 모이니 담배와 잡담이 우선이다.

움직임은 최소, 우왕좌왕, 혼비백산. 일단은 죄책감에 아가리만으로도 각자가 해야 할 준비과정들을 정리한다.

 

가성비 끝판왕 다이소로 향한다. 촬영용 소스 그릇을 급하게 구매했다.

 

오자마자 새로 산 그릇들을 닦는 진성이. 추가적으로 프라이팬, 밥솥, 재료를 담을 그릇들까지. 안 씻고 대충 할 줄 알았는데 청결함과 진정성에 엄지 척!

 

카메라 감독은 1평 남직한 통로 사이에 한 껏 삼각대와 카메라 설치에 분주하다.

근접용 하나, 풀샷용 하나, 그리고 자기 손에 디테일 컷 용 하나. 이때까지만 해도 3 때만 동원될 줄 알았지... 뽀인트는 역시 풀샷은 아이폰이면 충분하다는 것. 4K도 지원된다는 사실 잊지 말자.

 

(전화) “ 형 배고파 ” / “ 그래서? ”

“ 요리해줘 ” / “ 뭐? ”

“ 오삼불고기(툭) ” / “ ... ”

 

<오삼불고기>

 

그렇게 오늘의 컨셉은 오삼불고기다. 구구절절한 동기부여 따위는 없다. 앞으로의 컨셉도 이러할 것이다.

 

먼저 진성이는 밥을 짓는다. 오늘은 첫 회라 특별히 촬영감독의 요구에 따라 밥 짓는 씬을 넣지만 앞으로 곤드레, 무쇠솥, 보리 등의 특별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면 딱히 촬영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진성이는 밥을 지을 때, 쌀과 물의 비율 1:1을 강조한다. 쌀은 불리지 않고 간단히 세척 후 바로 쓰는 게 포인트라며 카메라 앞에서 첫 미성의 목소리를 내는 진성이. 어색했다. 컷이다. 웃지 말라고 강조한다. 컨셉이 깨지니깐...

중간 불 정도로 가열 후 김이 나기 시작하니 약불로 태세 전환시킨다. 이른바 ‘7분 뜸 들이기’ 진성이 표 필살기란다. 그렇게 11분이 지나니 밥이 완성되었다. 밥을 이리저리 휘젓고는 한 입 무는 진성이, JMTGR! 물론 그 맛은 진성이만 느꼈지만...

 

그리고 정갈하게 진짜 오늘의 요리를 위한 재료들을 테이블 위에 디스플레이한다.

 

<레시피>

 

오징어 2마리, 돼지고기 200g, 양파 반개, 양배추 1/6 (크기에 따라 상이)

청양고추 2개, 깻잎 10장

그리고 양념...

고춧가루 4, 고추장 3, 간장 4, 마늘 1, 미림 3, 물엿 3, 설탕 2, 후춧가루 약간, 참기름 약간

 

먼저 양념장을 만드는 진성이.

위의 레시피대로 때려 넣고 섞는가 싶더니, 맛을 보더니... 조금씩 그 양이 추가된다.

그리고 ‘적당히’ ‘개인의 입맛에 따라’라는 무책임한 발언이 쏟아진다.

그러더니 전문가 멘트로 의구심을 가라앉힌다.

“양념을 모두 섞은 후 바로 사용하기보단 설탕이 녹을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게 좋아요 “

 

어쨌거나 일반인 입맛엔 위 레시피 정도면 웬만큼 고개를 끄덕일 정도라 하니, 믿고 가자.

 

노란 조명에 반사된 양념장 비주얼과 진성이의 손을 통해 비벼지는 질척한 ASMR이 그럴듯하다. 양념장, 성공적?

 

이제 메인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다듬질할 차례.

먼저, 양파와 야채를 먼저 썬다. 세심한 진성이의 손질에 찔끔 설렜다.

그다음, 오징어의 입과 내장, 눈을 제거한다. 아쉽게도 이미 손질되어 버린 걸 가져온 진성이. 영상에 담지 못했다.

다음, 오징어를 자른다. 진성이는 엄지손가락만큼 자르는 것이 꿀팁이라고 했으나 사람마다 엄지의 크기가 다르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무튼... 다리도 3등분이 적당하고 한다.

다음, 돼지고기를 무자비하게 찢는다. 앞다리 살을 이용해야 한단다. 구입 시 정육점에 제육볶음용으로 썰어 달라하면 얇게 썰어주니, 자신처럼 수고스럽게 고생하지 말라는 친절한 진성이.

완성된 채소 덩어리와 고기 오징어를 양념과 버무린다. 때깔이 영롱하다. 비빔의 소리는 청초하다. 그리고는 시크하게 식용 우가 발라진 주물팬에 진득하게 양념된 오삼불고기를 투척한다.

“ 쏘 ㅑ ㅇ ㅏ~ ”

 

<식샤를 합시다!>

 

완성된 오삼불고기와 흰밥.

진지한 표정의 진성이의 대가리에 액션캠을 달았다. 두를 것이 없어 촬영감독의 목도리가 감긴다. 비주얼만으로는 중동 부호가 따로 없다. 1인칭의 먹방까지 커버하려는 더 수작팀의 과한 노력이다.

 

소주 1병과 함께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고, 구름의 형상도 그려지는 날이었기에, 제작진은 클라우드를 추천했지만 진성이는 매운 음식에 무슨 맥주냐며 성을 낸다. (나 원...)

잠시 음식 내음에 미쳐 촬영 여부를 잊은 거 같지만, 주인공은 진성이니 편집으로 보듬겠다.

 

진성이가 잠시 꽃밭에 간 사이, 밥을 요구했던 그 동생이 도착했다.

형을 찾다가 테이블의 음식을 보고는 형이고 뭐고 소주 2잔에 밥 한 공기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진성이. 예상치 못한 시추에이션에 당황한다.

하이에나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고 게걸스레 먹고 있는 한 사람.

 

(대화) “네가 왜 먹어? 동생은?” / “먹고 갔는데?”

“갔다고?” / “응”

“이게 누굴 식모로 아나” / “ㅋㅋㅋㅋ”

“웃어? 넌 촬영은 누가 하라고 이러고 있어?” / “...”

 

진성이표 오삼불고기 + 흰쌀밥 앞에 촬영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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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2시, 알바가 끝났다. 영화관 알바는 심야상영이 완전히 끝나는 시간은 2시. 늦게는 3시까지 일이 이어질 때도 있다. 심야버스가 닿는 곳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득이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망설이게 될지도 모르게 되었다. 택시 요금이 오르면서 할증도 1천 원이나 더 인상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약자를 위협하는 택시비 인상

 

 택시요금이 인상된 지 1달이 지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납득하기 어려운 요금 인상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비단 800원이 오른 것뿐만 아니라, 거리요금과 시간요금도 각각 10m와 4초를 줄여, 132m당 100원, 31초당 100원으로 조정하였다. 여기에 오전 0시부터 4시까지는 심야 할증은 1,000원을 덧붙인다. 신촌에서 충무로까지 6.5km까지 택시를 탄다고 가정하였을 때, 8,600원에서 9,000원 정도의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의 타격은 고스란히 서민이 떠맡는다. 특히 새벽에 퇴근하는 이들에게는 밤마다 큰 지출을 감당할 수 밖에 없다. 대중교통이 모두 끊긴 4시까지는 택시 외에는 달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최저시급이 8,640원인 이 시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이들은 임금의 상당 부분을 집으로 가는 택시에서 날리고 있는 것이다.

 

 

2019년 2월 16일 부로 인상된 택시요금 조견표 (출처_서울시)


아무도 이득이 없는 인상

2013년에도 2,400원에서 3,000원으로의 택시 요금 인상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요금 인상에 대한 효과가 어떠했는지 체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안 좋은 점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기본요금 인상 이후 2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이 느끼는 택시 서비스의 질은 크게 향상하였는가? 무엇보다 ‘택시 기사들의 처우’는 개선되었는가? 일부 몰상식한 기사들의 승차거부는 여전하고, 택시 기사들이 느끼는 ‘후생의 개선’역시 미미하다. 택시회사 업주들이 기본요금 인상분만큼, 택시기사들에게 부과하는 ‘사납금’을 올리는 바람에 기사들의 실질임금 상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요금은 올랐지만 사납금 납부 후, 기사들이 손에 쥐는 돈은 종전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되었고, 시민들 역시 비싼 가격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회사와 운수 종사자 사이의 부당한 임금 관행 구조개선 없이 행해진 '원칙 없는 기본요금 인상'은 택시 회사 업주들의 배만 불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출처_“시장님, 그만 좀 올리시죠”, 박성환_2015.6.28)

 이런 상황이니, 택시에 대한 수요는 확연하게 줄었다. 시민들은 급한일이나 체력이 못 버틸 정도가 아니고서는 이제 택시를 찾지 않는다. 자연히 기사님들의 순수입은 줄어든다. 회사에 소속된 택시기사는 울상이 된다. 사납금을 메우려고 손님을 찾으려고 끼니를 거르고 운행에 나선다. 겨우 사납금을 납부하더라도, 월급은 사납금을 못 따라간다. 오직 운행한 만큼 돈을 얻는 개인택시기사와 택시회사 업주만 좋을 뿐, 손님에게도 기사에게도 남는 것이 없는 인상안이 되었다.

 


과연 합리적인 절차가 있었을까
 

 2018년 10월, 택시 요금 인상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사실상 얼마나 올릴 것인지에 대한 인상안 결정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3,800원 안의 인상으로 공청회는 의결하였다. 그 이후 심의는 물가대책위원회와 시의회 의견 청취, 택시정책위원회의 결정이 있지만 있으나마나 한 절차였다. 이유는 지금까지 한 번도 물가대책위와 시의회 의견 청취 과정에 서울시 의견이 부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시 의회의 90% 이상은 여당 소속이기 때문에 인상안 절차는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정작 시민의 의견이 조금이라도 반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공청회에서는 3가지 안이 나왔는데, 1안은 원가상승분만 인상하고 심야할증을 조정하는 것이고 2안은 1안에 서울시 생활임금 보장 수준의 처우개선을 해 주는 것, 3안은 1안에 서울시 평균 가구원수 중위권 가정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수준의 처우개선 안이 나왔다. 대중교통으로써의 고려가 아닌 기사 직업으로써의 생계만 논의된 고려만 논의되었다. 여기서 시민과 경제적 약자에 대한 고려한 부분은 조금도 찾을 수 없다. 공청회 이후 절충적 대안으로 볼 수 있는 ‘카풀’마저도 서울시는 택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택시는 이제 밤이라는 독과점 도로의 주인이 되었다. ‘시민의 발’이라고 자처한 택시는 부조리한 관행은 해결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민에게 갑질로 일관하고 있다.

 

 


택시 요금 인상, 이제는 전국이다  


  서울시 택시요금은 전국 택시요금의 바로미터이다. 서울이 요금을 올리면, 지역이 차례로 올린다는 이야기이다. 택시요금 인상은 시민의 반발을 무색하게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경기도는 3,800원으로 기본요금 인상을 4월부터 적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강원도와 충청북도도 3,300원으로 기본요금을 인상하는 결정안을 곧 적용하기로 하였다. 시민이 빠진 ‘만장일치’로 추진된 서울시의 정책이 이제는 전국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택시 요금 인상으로 결국 국민의 경제적 부담마저 가중시킨 양상이다.

 

2015년 서울시에서는 시민 10만명을 대상으로 '서울브랜드'를 투표를 통하여 "I.SEOUL.U"로 선정하였다. (출처_서울시)


 서울시는 홍보성 치적을 민주적 절차로 진행하였다. 그래서 졸속으로 처리한 기본요금 인상안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과정으로 시민들은 계속 택시비에 대한 부담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시정(市政)에 대한 신뢰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무작정 인상 반대를 외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상에 대한 논의가 최소한 일반 시민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 없이 추진된 기본요금 인상안을 과연 누가 수용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인상안인지 아직도 잘 모를 일이다.

 

 



“나는 교회가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욕심이 문제지. 교회도 크게 짓고 돈도 많이 모아서 지역사회에 공헌하면 좋은 일이지 않아?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크게 감당하기위해 건물을 짓는 것일 뿐이야”



 필자가 들은 신학교 학생들의 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간파한 책이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한자 한자 읽어나가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도리어 ‘노이즈마케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의 제목을 말하는 것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역시 잠시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여전히 잘못된 환상으로 신앙을 왜곡하는 교회에 대해 분명히 알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재물의 신이라고 불리는 ‘맘몬’이라는 두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미진 저 「왕의 재정」


 위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의 달콤한 유혹과 그 함정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럴듯한 저자의 간증, 그리고 그런 신앙에 재물에 대한 축복이 어우러져 같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보다 더 좋은 믿음의 생활은 없게끔 만든다. 소위 말하는 ‘깨끗한 부자론’을 추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마지막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우리에게 가장 도전되는 삶은 90퍼센트 기부하고, 나머지 10퍼센트도 넉넉하여 모든 것에 넘치는 삶이다.” 심지어는 기부, 저축 그리고 소비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몇 퍼센트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지도 규정해주고 있다. 과연 이 책이 기독교인들의 물질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책인지, 효율적인 재테크를 위한 책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이런 책이 현재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지침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이러한 돈에 대한 입장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돈과 인간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재물을 구하는 것이 문제이며, 이것을 ‘기복신앙(복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반면에 우리가 재물을 모아 일정부분을 타인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서 정당한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자 오히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을 더해주신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재물이 많을수록 더욱 교회의 일을 크게 할 수 있고 하나님나라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수월해진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심어지게 만든다. 얼핏 들으면 위 저자의 주장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맘몬의 교묘한 함정이다. 


필자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크게 두 가지부분에서 위 책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이와 같은 물질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 일뿐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물질이 뒷받침되어야 더욱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가르침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는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거부한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후 많은 이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자 할 때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양식을 구할 것을 이야기하신다. 책에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이들을 구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을 걷어찬 어리석고도 실패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돌을 떡으로 만들고 왕이 되어서 많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맘몬의 힘과 인간의 연약함을 간과한 것이다. 저자는 줄곧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맘몬은 우리가 그것을 노예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맘몬의 노예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할 만큼 약하지 않다. 반면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한다. 돈을 이용해서 타인을 돕고 베푸는 신앙생활이 처음에는 반듯하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행동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물질로써 베풀고자 하는 행위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리를 탐욕스럽고 교만하게 만든다는 것 또한 깨달아야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을 돕는 행위가 나의 공로를 자랑하고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맘몬의 힘이자 그것이 지닌 거대한 함정이다. 왜 하나님은 맘몬과 자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재물을 신의 경지로 빗대어 말씀하셨을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얼마를 기부해야 하고 또 얼마만을 나의 몫으로 정하고 사용해야하는지 규정하는 것 역시 우리를 더욱 맘몬신앙으로 이끈다. 설령 저자의 말처럼 90퍼센트를 기부하고 10퍼센트를 내 몫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10퍼센트 안에도 맘몬의 힘은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10퍼센트를 사용하면서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10퍼센트의 양을 더욱 늘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때에 맘몬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의 이성과 신앙을 흔들어 놓을 만큼, 그만큼 맘몬은 강력하다. 결코 나약하지 않다. 맘몬은 우리가 노예로 만들겠다고 다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탈출해야할 대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JTBC


 물론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기독교인은 무조건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이웃에게 베풀지 말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고는 우리에게 맘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함께 나의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점점 더 크게,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내 마음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면밀히 성찰해 보아야 한다. 가난하더라도 충분히 교회의 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 아니, 부유한 사람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부자가 되어서 많이 베풀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연합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 속에 사랑이 자리를 잡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와 같이 개교회주의에 물들고 재물을 통한 확장을 추구한다면 입으로는 예수를 찾고 믿음을 이야기할지 모르나 실상은 예수보다 물질을 쫓는, 맘몬에 종속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가치는 당연히 사랑이다. 따라서 현재 무한한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사랑의 원리를 점점 잃어버리는 교회의 현실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되어야 한다. 교회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그런 스스로를 속이는 신앙을 강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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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핵? 선한 악마?  (0) 2016.01.21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요즘 읽고 있습니다. 좋은 책입니다. 많은 치유를 얻었고,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은 책인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을 비롯해서 심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대목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점점 개인의 완벽주의의 기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완벽주의 경향성이 세대를 지나오면서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울과 불안으로 가는 포털이 점점 넓이지고 있는 것이지요. 2017년 메타 연구에 따르면,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완벽주의적 기준이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p109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면서 나의 기준이 높아지면서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 인색해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시대와 타인을 항상 의식해야하는 개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힐링, 치유와 같은 컨텐츠가 주목받는 것도 이러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이런 흐름이니 광고도 이에 맞게 반영합니다. 나는 불행한데, 광고는 세상모르고 마냥 행복하게 보인다면 누구도 그 상품에 대해 좋게 봐주지 않겠죠. 이번 글에서는 시대와 개인의 변화에 따라 바뀌었던 광고의 모습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박카스 - 나에게로 집중


박카스 광고는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제품 기능을 굳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업계의 굳건한 1위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1등을 굳히기 위해 박카스는 다양한 시도를 모색하였고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에 푼다. 박카스 (1994, 동아제약)


 20년도 더 된 박카스의 광고입니다. 신검장에서 “꼭 가고 싶습니다!” 외치며 청춘을 어필하던 박카스 광고보다도 더 전 시대의 광고입니다. 박카스를 통해서 가족 간의 사랑, 정(情)의 매개로 표현합니다. 관계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얻고, 힘을 얻는다는 식의 광고는 과거에 많았습니다. 개인보다 ‘협동’에 대한 가치가 확고했던 시대였기에, 이는 당연한 메커니즘인 줄 알았죠.



나를 아끼자, 박카스 (2018, 동아제약)


 그러다 지극히 개인을 위한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전 시대보다 개인은 더욱 우울함과 더 근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광고보다 인물 배경을 더욱 힘든 면을 부각하면서 시작합니다. 같은 가족이지만, 오히려 가족 속에 소외된 개인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물은 스펙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기준을 의식하는 오늘날의 현실과 본인의 노고를 잘 알아주지 못하는 불만도 토로하는 것 같습니다. 더 솔직해졌고, 타겟을 개개인으로 더 좁히면서 특정한 타겟들의 공감을 브랜드로 끌고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광고는 타겟 외의 사람들이 이해나 공감이 없다면 외면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노고가 크다고 하는 세상이기에, 한편으로 이는 감수해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왕뚜껑 - 변칙으로 개인을 들여다보다



지키고 싶은 따뜻함 (2018, 팔도)


 사실 이 광고를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보통 식품 광고에서는 저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광고학에서 ‘정교화가능성 모형’라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개인은 가전품이나 의약품(고관여제품이라 합니다)을 고를 때는 개인과 관련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음료나 라면 같은 본인의 이슈와 거리가 먼 제품(저관여제품)은 주어진 정보보다 감성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면광고들은 거의 즐겁거나 웃긴 상황을 연출하거나 신나는 음악을 깔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들을 왕뚜껑 광고에선 철저히 배제하였습니다. 결론이야 호의적인 정서로 유도로 하긴 했지만, 기존까지 해온 왕뚜껑의 광고를 비추어본다면 정말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이런 모험을 감행한 데에는 결국 타겟 소비자의 인사이트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타겟의 일상과 정서를 제시하면서 얻는 공감이 일반적인 라면 광고로 얻는 공감보다 편익이 더 크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일리 있는 선택입니다.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 모든 것이 제한된 10대가 다른 계층에 비해 컵라면 소비 비중이 더 높을 것입니다. 여기에 10대는 많은 부분을 타의에 영향을 받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이 갈등으로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경험은 다들 한번 쯤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광고에서의 공감은 소비자가 브랜드의 경계를 허무는 예리한 기술입니다. 이들의 일상에 더 깊게 파고들수록 타겟에게 브랜드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집니다. 왕뚜껑의 이런 변칙적인 선택, 즉 10대 개개인의 일상 어두운 면을 비추는 것을 통하여 공감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직방 - 개인을 더 쪼개어보기



어디에 살든 나답게 살자. 직방 (2019, 직방)


 이제 전문가가 나서서 제품의 효험을 ‘증언’하는 광고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특성은 저마다 다양한데 전문성만으로는 모두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빈자리에 개인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광고가 주류를 이룹니다. 특정 타겟만을 위한 광고로 자리잡는 것은 위험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위의 광고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광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타겟에게도 프로포즈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타겟이 쌓이면, 모든 타겟들은 ‘나만을 위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수많은 고객들이 있는 시장을 잘게 쪼개어 먹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특정 소수를 향한 광고가 많아지면서, 앞선 사례들과 같이 개인 일상에서의 소소한 공감을 사는 광고들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의 우울감이나 슬픔을 광고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상술의 일환으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구석들이 많습니다. 그런 광고들을 오늘 우리의 일상에 그린 짧은 단편 영화들이라고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책의 향기를 좋아한다. 처음으로 펼쳤을 때의 그 사각거리는 느낌과 손이 기억하는 각 페이지를 만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설레는 여행과도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동안 일이 많아 책의 향기를 맡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많이 읽어야만 쓸 수 있다는 글은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빅힙(Big Hip)’의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일도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시작한 글들은 여러 건이었지만 이들은 시의성에 맞지 않거나 흥미가 떨어졌고, 더 이상 써지지 않았기에 완결을 지을 수 없어 뜨다 만 목도리처럼 남아있었다. 목도리가 필요치 않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다른 전환점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상황에서 문득 나에게 있어 ‘글’이 어떤지 더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한동안 Q&A북이 유행한 적이 있다.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이 있을 때 그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그 답을 찾고는 하는. 나는 이것의 또 다른 형태로 무작정 눈에 닿는 책을 주문하거나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답을 찾았다.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읽는 중이다. 책을 읽고 난다면 더욱 깊은 맛이 나는 감상기를 쓸 수 있을 테지만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글 또한 재미있게 여겨졌다. 동시에 ‘빅힙’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낙서협동조합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처음으로 낙서 같은 글을 흘려 쓰고 있다. 물론 세상에 이렇게 긴 낙서가 어디 있겠느냐만 어쨌든 나는 지금 즐거운 낙서질 중인 것이다.


다시 돌아와 글을 쓰라는 책의 암묵적인 지시에 맞춰 나는 ‘글’을 다시 생각해보면, 글은 오랜 시간 동안 도피처와 같았다. 집과 학교를 나와 갈 수 있는 한정적인 공간이었던 도서관, 그 심리적인 불안을 묵묵하게 눌러준 낡은 사그락거림, 그리하여 흘러가던 시간들의 연속. 내가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그 사그락거림만이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유일하게 색채가 생생한 순간인 것 같았다.


운명처럼 처음으로 해본 과외도 독서와 토론이었고 학창시절 내내 편집부와 문예부에서 활동했다. 간혹 동생처럼 요트를 타거나 UCC를 제작하는 등 동적인 활동을 꿈꿔보기도 했으나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글이었으므로 다시 정적인 활동으로 숨어들어가곤 했다. 


숙명처럼 그런 학과로 진학해 장난 같은 글쓰기를 지나 다시 운명처럼 정착한 직장에서도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은 하고 싶은 글이기도 했으며 그렇지 않은 글이기도 했다. 숨어지지 않는 글을 나열하며 한동안은 모든 것을 날린 디스켓처럼 허망했고, 보잘 것 없음에 슬퍼했다. 그렇다, 무려 디스켓이다. 고작 2메가도 되지 않는 1.44메가 짜리의 보잘 것 없음에 나는 종종 괴롭고 혼란스러워했다.


흘려 쓰고 싶어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본다. 무려 제목이 「꿈과 꼬리」.



 사라지는 꼬리 속에 있었다. 바닥으로 긴 동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닥 없는 바닥이었다. 흔적 없는 흔적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꼬리 속에서 고개를 돌리는 꿈속이었다. 꿈은 번지고 뒤늦은 자리는 허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음을 따라 사방으로 나아갑시다.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오늘을 놓아둡시다.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쓴 것들』 중 「꿈과 꼬리」



활자로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오묘한 일이다. 사람의 스킨십과는 다른 따뜻함이며, 다른 종류의 위안이었다. 오롯이 책과 나만 존재하는 작고, 낡은 나의 도피처 속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그리하여 또 시간이 흘러갔고, 부정적인 감정 또한 사그락거림 속에서 사그라들곤 했다. 그리고 비로소 사부작거릴 마음이, 엉덩이를 들썩거릴 욕구가 생겨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흘려 쓴다. 가는 바람에도 이는 잎사귀마냥 자연스럽게.


재미있게도 또 다른 책의 첫 시작은 ‘민들레씨를 불어라’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시작하면 된다는 것. 민들레씨를 부는 일은 사소하지만 그 씨앗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른 꽃을 피울 것이다. 내 삶이 달그락거리는 중에서도 계속 사그락, 사부작대며 살아왔듯이. 



한 번도 살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살아도 좋지 않을까요. 사라지는 꼬리 속에 있었다. 울지 않는 얼굴들이 사라지는 꿈속이었다.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쓴 것들』 중 「꿈과 꼬리」



실체가 없는 어둠 속에서 발을 잘못 디뎌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불안정한 꿈을 종종 꾸곤 했다. 행복한 글을 쓰지 못해서 작품에서 인물은 종종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시는 결국은 아무도 이해시키지 못했고, 한동안은 또 글을 쓰지 못한 채 같은 꿈을 꿨다.



이제 다시 민들레씨를 분다.

언젠가는 내가 쓴 글의 사그락거림에 위안 받는 내가 있었으면 한다는 꿈도 같이 불어넣으며, 아주 긴 한숨을 담은 글을 흘려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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