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머니’라는 존재가 된 뒤, 뉴욕 현대미술관에 가게 됐을 때, 그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Ⅱ”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 그림을 보고 임신한 여성 아래에 여러 명의 여성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울고 있어요”라고 같이 간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이 “이 여자들은 행복하게 잠들었는데?‘라고 반문해서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여성들은 임신한 여성 아래에서 아주 편히 잠들어 있었다.

 

사진 : 구스타프 클림트 ”희망Ⅱ“,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아이를 낳기 전, 내가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은 클림트의 그녀와 같았다. 그러나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의 그림 속 여인들이 울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고단하고 괴로운 과정을 거쳤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 주위를 떠돌던 모성 신화에 대한 과장과 거짓을 마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으로 인해 축 늘어진 피부를 붙잡고 3시간에 한 번씩 먹여달라 울어대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그 사이사이 기저귀를 갈아달라 울어대는 아이에게 기저귀를 갈아주고 그 사이사이 토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한 생명을 생존시키는 데는 나의 인내심과 체력이 ‘모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에게 모성에 대해 누가 물었다면 24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없는 고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커서 어린이집에 가고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사회로 나왔을 때, 나는 내 존재가 지워진 채 살아야 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꼈다. 돈벌이를 하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이외의 시간 중 내 시간은 없었다. 그 시간은 온전히 아이의 양육에 쓰였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누가 내 존재를 지워버렸는지에 대해 항상 궁금해했다.

 

이러한 나의 물음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답했다. ‘모성’은 가부장제를 지속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일신론은 단순히 신의 형벌을 바꾸어 놓은 것만이 아니었다. 여자의 신성을 앗아갔고 어머니로서 또는 신성한 아버지의 딸로서만 존재하게 했다. (중략) 남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알려면 그 아이들의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만 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어머니를 독점적으로 소유해야한다는 뜻이다. (중략) 가부장적 남성은 ‘그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그의’ 자식을 낳도록 했다.” 에이드리언 리치(20180,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평민사, p.134-135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빼앗긴 존재가 되었다. 앵겔스의 말대로 가부장제 하에서 남편은 부르주아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렇기에 리치는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다시 소유하게 되면 인간 사회에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p.327)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세상에서는 여성이 선택에 의해 아이들을 낳고 여성의 사고(思考) 그 자체가 변모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괴로웠던 그 순간에도 뱃 속의 아이와 소통하고, 출산 후 아이와 첫 대면을 하고 내가 해주는 행위로 인해 아이가 방끗 웃을 때면 즐거웠다. 나는 이러한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겐 내가 가부장제에 순응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에 매번 절망을 느낀다.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해 모성이라는 것을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해야 하는 것인가는 고민해볼 문제다. 왜냐하면 지금의 모성은 남성에 의해 변형된 남성을 위한 모성이지 진짜 모성은 따로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치의 말대로 가부장제가 타파된 이후, 그동안 삭제되었던 진짜 모성이 드러나길 바란다. 임신 출산이라는 여자의 고유 능력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받고, 그 후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가 자녀 양육과 보육의 일부를 공유한다고 해서 그를 칭송하고 감사히 여기는 일이 더 이상 없”(p.243)는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면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이 행복하게 잠자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한 달에 두세 번씩 이메일과 쪽지로 인턴 관련 질문을 받는다. 대학생 시절 ‘아름다운 가게’에서 인턴생활을 했는데 블로그에서 올려둔 인턴 활동 일지를 읽고 문의가 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면접에서 합격할 수 있는지 물어오는 문의가 10번 중 3번 정도이고 나머지 7번은 인턴 월급에 대한 문의다. 짧게는 2달에서 많게는 4달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인턴 활동에 금전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문의해서 알아보고 인턴 지원을 할지 말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인턴 급여문제가 심각해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필자의 인턴 활동 장면 (출처 : 필자 본인)


 필자는 2012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2달간 인턴생활을 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인턴활동 지원금을 받고 활동했다. 재밌던 것은 같은 근무시간을 보내는 같은 기수의 인턴인데도 고용노동부 지원금 외에 나오는 학교 지원금에 따라 40만 원부터 70만 원까지 월급이 천차만별이었다. 월급이 나오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용노동부의 지원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인턴활동에 참여한 경우 무급으로 일하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인턴 문제는 월급 외에도 있다. 바로 근무 내용이다. 필자가 고용노동부의 지원금만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턴활동을 한 이유는 인턴 근무 프로그램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2일간의 단체 소개와 체험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는 책상에 앉아 흔히 말하는 ‘카피+코피+커피’의 과정을 치를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장에 나가는 물건을 정리하는 ‘되살림터’ 체험, 직접 매장에 나가보는 매장 체험, 독거 어르신과 저소득 가구에 생필품을 나눠주는 ‘나눔 보따리’ 포장 작업, 배치된 부서에서 진행하는 사업 관련 외근 체험을 비롯해 인턴이 보는 단체에 대해 의견을 듣는 발표 시간도 2번이나 있었다. 


 더 좋았던 것은 정기적으로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강연이 진행되는데 강연 주제가 마음에 들면 근무하다가도 내려가서 들을 수 있었고 도서관에서 책도 마음껏 빌려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외에도 필자의 전공에 따라 업무를 줬는데 언론학을 했던 필자에게는 매일 아침 사회공헌 관련 뉴스를 부서 전체 직원에게 이메일로 정리해 보내주는 일과 홈페이지에 게시되는 기사 작성하기가 주 업무였고 국내외 비영리단체의 사회공헌사업 및 홈페이지 구성에 대한 보고서 작성도 추가로 주어졌다.  이렇게 두 달여 동안 알차게 인턴활동을 한 덕분에 현재 근무하고 있는 단체에서 인턴활동을 하며 배운 것들을 많이 활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알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2015년 1월 28일에는 청년 유니온의 주최로 ‘청년 과도기 노동 당사자 증언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대회 참가자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눈에 들어온 이야기는 미술관에서 두 달간 일했다는 학생의 이야기였다. 그곳에선 인턴 교육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주 업무의 90%가 청소와 설거지와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미술관은 왜 인턴을 채용했는지 의문이 든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필자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인턴을 뽑는 단체에서 근무하는 곳에서 근무하는데 그동안 스쳐간 대학생 인턴만 총 7명이다. 인턴 활동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직접 짤 때마다 대학생 때 겪었던 인턴활동을 바탕으로 작성하고 있다.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출퇴근 시간과 전공에 대한 것이었다.  우선 출퇴근 시간을 이야기하자면, 필자가 인턴활동을 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오전이나 저녁시간에 학원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리상의 이유로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출근을 하고 나서 한 시간(오전 9시부터 10시)과 퇴근하기 두 시간 전(오후 4시부터 6시)에는 집중도가 현격히 떨어져서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데 이때 차라리 학원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는데 시간이라도 줄여주면 얼마나 좋겠나!) 이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기만 해도 충분히 학원을 다니거나 기타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을 듯하여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단체의 인턴 출퇴근 시간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정했다. 하루 5시간 근무해서 제대로 배우겠냐는 우려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인턴에게 하루 8시간씩 가르칠만한 알찬 교육거리가 없다. 또, 주말에 근무를 하게 되면 반드시 대체근무를 하게 했는데 이것만 지켜도 인턴은 자신의 시간을 알차게 사용할 수 있다. (그마저도 최근엔 오후 1시 출근 5시 퇴근으로 바꿨다.) 


 두 번째는 전공 활용 부분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학생에게는 번역 업무와 사업제안서 작성을 해보게 했고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던 친구에게는 동아리 로고 디자인과 명함 디자인을 과제로 내주었다. 친구들 모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업무를 맡았기에 결과물에 만족해하며 인턴과정을 수료했다. 이외에도 언론과 인터뷰를 하거나 법정에서 문화재 관련 재판이 있을 때, 박물관에 볼만한 전시가 있을 때 인턴 친구들과 함께했다. 이들에게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우리 단체에 맡겼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약 2년 전부터는 시급을 만원으로 책정해서 인턴에게 지급하고 있다. 시급 만원을 지급하니 단체 입장에서도 인턴을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투입할 수 있게 됐다.




필자가 인턴 재직시 받은 명찰이다. (출처 - 필자 본인)



 인턴활동 환경이 안 좋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에 많은 청년이 희생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시민단체 경력 7년 차 필자에게도 일어났다. 


 필자는 강의를 듣고 연구논문을 제출하며 3개월간 인턴 활동까지 마치면 이수증이 나오는 국회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매너리즘 때문에 단체의 허락을 구하고 휴직 후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6월에 면접을 보고 합격한 이후까지 국회 인턴이 무급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설마 국회가 인턴을 무급으로 부리겠느냐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이었다. 거의 99%의 인턴이 무급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월급을 챙겨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연수담당자의 대답이었다. 필자가 아니어도 무급으로 인턴을 하려는 사람이 줄을 길게 서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열정과 시간을 앗아가는 도둑들이 국회에도 있었다. 이들이 사라지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한민국 청년연설대전 연습 과정에서였다. 금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던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그 반짝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지난 6년간 나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이를 먹지 못했습니다.” 


2012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14년간 동경하며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연예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연인이면 할 법한 것들을 했다. 그녀는 그와 자신이 연인이 된 줄 알았지만, 그는 그녀의 입이 너무 가벼워서 문제라며 입단속 후 돈을 줬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그 돈을 돌려줬고 그렇게 그와 연락이 끊겼다. 


14년을 믿어오고 동경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락이 끊기자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랑인지 폭력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해서 흘러갔고 그렇게 두 번의 자살시도가 있었다. 한동안은 정신과 병동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왜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생각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되살려 놓고 용서를 받고 다시 죽이고 애걸하고 울고 웃고 죽고 죽고 또 죽었습니다.”


연설 연습을 끝마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그녀는 말을 하며 펑펑 울었다. 굵은 눈물이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고 부축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힘들어 보였다. 연습을 마친 그녀는 대회 날에는 울지 않을 거라며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종료됐다. 



2018년 5월 26일, 청년연설대전 본선 무대에 오른 그녀


그 후, 연설대전 행사에서 그녀를 만났다. 검은색의 차분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앞선 참가자들의 연설을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복잡할 듯하여 쉬는 시간에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녀 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참가자 중에는 ‘방관도 폭력이다. 우리도 페미니즘을 배우자!’라는 주제로 연설한 남성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연설이 마음에 안 들었다며 훈계를 하는 잔소리꾼이 등장한 것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연설자에게 강요하던 잔소리꾼이 말했다.


“아니 그러면 옛날 케케묵은 일들까지 다 꺼내 가지고 처벌을 하란 말이야? 그건 아니잖느냐~”


그녀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연습 때 힘들어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서 얼른 그녀 옆으로 뛰어가서 듣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곤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조금 떠들다 가겠지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도 부탁했다. 그러나 잔소리꾼의 말은 내가 사진을 세 장 찍고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한 채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들을 계속해서 내던졌다. 나는 잔소리꾼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그렇게 길고 긴 쉬는 시간이 끝났고 잔소리꾼은 유유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냥 잊어버리고 살면 된다고 쉽게 말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그 집에 찾아간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를 용서하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연설에 나선 그녀에게 옛날 일을 들춘다며 떠드는 이도 생겨버렸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김승섭(2017),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p.305


그녀는 지난 6년간 상처받은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그 되새김의 과정에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를 혼내고 훈계하는 일들이 반복됐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발언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그 침범들은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연설 중에 가슴에 새겨진 말들이 있었다. 


“피해자 여러분, 이유 없이 숨지 마십시오. 가해자 여러분, 비겁하게 숨지 마십시오. 그리고 피해 당사자와 가해 당사자를 제외한 여러분, 어떨 땐 가만히 들어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녀는 연설을 마친 후 당당하게 걸어서 무대를 내려왔다. 고생했다며 힘껏 포옹해주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렇게 괜찮은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급히 대회장을 나갔다. 뒤따라가 보니 역시, 그 자리는 무척이나 힘든 자리였나 보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말을 했다며 연설 연습을 했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다. 

그때 그녀를 다독이던 다른 참가자가 말했다. “우리 언제 한 번 모여서 삼겹살 먹죠! 오늘처럼 딱 붙는 정장 말고 고무줄 바지 입고 말이에요!” 그 말은 그 순간에 정말로 적합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왜 울고 있니’, ‘네가 잘못한건 아니야?’, ‘잊어버려’의 말보다 같이 삼겹살 먹자는 말이 훨씬 더 알차 보였다. 조만간 우린 고기를 먹을 것이고 그녀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만히 들어줄 예정이다.   


* 그녀가 그 당시 상황을 부른 노래입니다.



 *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지난 8월 중순, 평소 문화재청 개혁을 외치던 문화평론가 출신 박물관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벌금 300만 원과 추징금 105만 원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평소 해외반출문화재 관련 시민운동 등을 전개했던 이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  서경덕 교수가 국가정보원 민간인 댓글 부대 연루 의혹에 휩싸이자 개인 SNS에 올린 해명 글, 현재 그의 SNS 계정은 삭제된 상태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9월 초순엔 한국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국가정보원 민간인 댓글 부대 연루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국정원 직원이 실적이 모자라 허위보고를 했다고 SNS상에 해명 글을 올렸다. 그러나 며칠 뒤 자필 서명된 국정원 영수증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고 돈을 받지 않았다던 서 교수는 국정원 영수증에 서명한 사실은 있으나 유네스코 한글 작품 전시를 위한 지원금이라고 해명하며 말을 번복했다.

 

 

소위 말하는 국뽕('국'가+히로'뽕'이 합쳐진 말이다.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심하며 타민족에 배타적이고 자국만이 최고라고 여기는 행위나 사람을 일컫는다.)관련 일을 하고 있던 활동가들의 구설수에 오르자 그 전에 그들이 했던 운동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  1910년에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도록에 ‘이순신 장군이 항상 차고 다니던 칼’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쌍룡검’의 실제 모습이 담긴 사진이 담겨있다.(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문화평론가 출신 박물관장은 2014년 8월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1910년에 조선미술대전에 보면 쌍룡검이라고 이순신 장군이 썼던 칼이라고 해서 한 쌍의 칼이 나오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63년도에 현충사에 있는 이 칼이 나올 때까지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없어진 칼이 63년도에 보물로 지정됐다”며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이 가짜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과 장검은 다른 칼이다. 당시 그가 다른 칼을 같은 칼로 혼동하여 보물로 지정된 장검을 가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문제가 제기됐었다.

박물관 재직 시절엔 장애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서 특수제작 된 유모차를 탄 6살 아이에게 일반 유모차로 갈아타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다고 했고 이와 관련하여 ‘뇌 병변 1급이라고 얘기하셨잖아요. 그 장애어린이가 유물을 보나요?’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당시 그는 오프더레코드를 기자가 기사화했다고 해명했다.)

 

 

▲ 이영애가 재능기부하여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비빔밥 광고

 

 

 

서경덕 교수는 2013년 초, 이영애가 재능 기부하여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비빔밥 광고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비빔밥 광고 하단부에 비빔밥 재료들을 설명하면서 한국어 ‘김’을 일본어 ‘노리’라고 표현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문제점을 지적받은 후에도 문구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 상해 빌보드 광고를 강행해 강도 높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 2014년 올해 가장 괴상한 광고라고 혹평받은 추신수 선수의 불고기 광고

 

 

2014년 초에는 추신수 선수의 불고기 광고가 등장하자 광고업계 전문지인 ADWEEK는 ‘올해 가장 괴상한 광고’라며 혹평했다. 한국 문화 블로그 운영자인 조 맥퍼슨은 칼럼을 통해 “(이 광고는)홍보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는데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런 걸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며 비판했다.

 

▲ 군함도 관련 영상 광고에 등장하는 광부가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다. (사진출처 유튜브)

 

그 뒤로도 서 교수의 사소한 실수가 이어져 올 7월에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등장한 군함도 관련 영상 광고에 등장하는 광부가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알려져 사과한 바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실수는 왜 바로 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한국과 관련하여 일하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 사람들의 인식이 관대해져서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 ‘까임 방지권(타의 모범이 될만하거나 개념 있는 어떠한 일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잘못을 저질러도 어느 정도 비난을 방지 받는 권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15년, 세종 때 제작된 측우기가 영국 왕립과학박물관에 있다며 이것을 환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소식을 듣고 세종 때 제작된 측우기가 어떤 이유로 불법 반출됐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자가 일하는 문화재제자리찾기(해외로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로 측우기에 대한 질의가 계속 들어와서 조사해보니 영국 왕립과학박물관에 있던 측우기는 모조품이라는 사실이 5분 만에 밝혀졌다. 측우기가 모조품이라는 사실은 각종 블로그에도 심심하지 않게 올라가 있는 상황인데 자신이 본 것만 믿은 시민단체 관계자가 언론에 크게 떠들었던 것이다.

과거사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실수가 국익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한 번의 실수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2013년 3월 절도범에 의해 우리나라로 밀반입된 관세음보살좌상 회수 문제를 위해 한국의 시민단체가 대마도 관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당시 약속도 잡지 않고 관음사를 방문하여 일본 우익 세력에게 ‘한국은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무례한 민족이다’라고 말할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후, 일본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시민단체의 활동이 제한당했다. 지금도 일본 측은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어떤 문제도 언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2013년 한국 시민단체의 대마도 방문 사건은 성급한 판단 때문에 모든 시민운동가의 활동을 방해하여 일본에서 진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된 사건이다.

 

▲ 2012년 10월 11일, 판결직전 최봉태변호사가 개정표에 있는 사건명을 가리키고 있다.

 

 

2012년 10월 11일 오전 10시 30분,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법원은 한일협정 문서 완전 공개에 대해 ‘공개 판결’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100% 공개는 아니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하라는 판결이다. 당시 원고였던 최봉태 변호사는 2008년에 제소하여 4년이 걸려서 ‘공개 판결’을 받아냈었다.

 

 

2001년 1월 12일,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노근리 사건과 관련하여 유감 성명을 이끌어낸 사람도 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이다. 그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각국의 대학생들에게 평화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정말 좋은 일하는 것에 대해 칭찬할 때는 칭찬해야 한다. 그러나 실수가 있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관대하게 대하다 보면 더 큰 위기에 다다를 수도 있다. 지금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단순히 말로 떠들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더 평가받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진짜 싸워서 이긴 사람들을 평가해주어 그들이 더 힘을 내서 성과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문정왕후어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출된 지 66년 만의 일이다. 기자가 일하고 있는 종로구 사무실에서 대각선 거리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문정왕후어보가 와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창문 앞에서 고궁박물관을 향해 서 있다가 사무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아주 슬픈 음악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09년부터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그 결실을 보았는데 ‘시민단체’, ‘민간단체’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두루뭉술하게 처리된 것 같아서 너무 서러웠다. 기자가 입사했을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일본 궁내청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를 포함한 도서 1,205책을 반환받았을 때였다. 그 당시에도 문화재청은 ‘문화재제자리찾기’라는 이름을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넘겨버렸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대표에게 처음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나라는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시킨 나라잖아.”

 

△ SNS에 담긴 사진, 이 사진 덕분에 많은 응원을 받았다.

 

그렇게 열심히 교육받았는데도 막상 당해보니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그 모습이 사진에 담겨 SNS에 퍼졌고 그 사진 한 장으로 엄청 많은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또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여 기사도 실렸는데 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

 

기자가 그 날 고궁박물관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그동안에 받았던 모멸과 비웃음이 생각나서였다. 2016년 초,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민간단체 보조금 신청 면담을 하던 날이었다. 그때 앉아있던 심사위원이 기자에게 말했다.

 

“정부가 잘하고 있는 일을 시민단체에서 그만 좀 훼방 놓으세요!”

 

그렇게 2016년 민간단체 보조금 중 해외 출장비용이 전액 삭감됐다. 해외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찾는 단체에 해외 출장비용을 전액 삭감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 정도 되면 2013년도부터 보조금을 받았던 단체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 전화가 올 법도 한데 재단 측은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해외에 출장 나가 있을 때는 너무 심하게 전화해서 제발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할 정도인 재단이었는데 말이다. 창밖을 보며 울다 보니 그 당시 심사를 보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팀장님의 말도 떠올랐다.

 

“다른 단체는 보고서도 예쁘게 꾸며서 내던데 여기는 참 …….”

 

△ 당시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는 승복바지를 잃어버려 검은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협상장에 갔으며(왼쪽) 필자는 한복 속치마 레이스가 밖으로 튀어나온지도 모르고 협상장에 들어갔다.(오른쪽)

 

반환발표가 나던 날도 떠올랐다. 당시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승복바지를 잃어버려서 검은 운동복 바지를 입고 협상장에 갔고 기자 역시 한복 속치마의 레이스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협상장에 들어갔다. 그만큼 협상 문서 이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날이었다. 그런 기자에게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린 작전을 안 짰잖아! 여기 괜히 온 거 같아. 우리 여기 왜 왔어?”

 

그런 모멸과 비웃음을 꾹 참으며 했던 운동이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언급되지 않고 ‘민간단체’, ‘시민단체’로 대충 넘어가 버렸고 그래서 그 날 창밖을 보며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9년간의 운동이어서 한 번도 그 과정을 통째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기에 글로 남길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어떻게 하면 쉽게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운동이 총 4개의 악장으로 이뤄진 교향곡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출입증, 2011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가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방문하여 <볼티모어 선>기사를 발견했다. 2012년 1월 28일까지 출입증을 사용할 수 있다고 표시돼있다.

 

1악장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로 논거 확충하기 시간이다. 어보가 불법 반출됐다는 미국 국무부 문서 확보 및 어보가 한국으로 반환돼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를 정리했던 시간이다. 이 작업은 알려진 대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및 미국 내 불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문정왕후어보 결의안 발의 기자회견, 국회 정론관에서 문정왕후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 발의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악장은 2013년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LA 카운티박물관과의 협상 과정이다. 이 때 문정왕후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발의됐고(아쉽게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LA 카운티박물관과의 1,2차 협상 진행 및 LA 카운티슈퍼바이저 면담, 백악관 청원운동 ‘응답하라 오바마’ 등이 진행됐다. (LA카운티 박물관은 2013년 9월 19일 문정왕후어보 반환발표를 했다) 이때 안민석 국회의원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 면담, 2014년 당시 김진태 검찰총장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힘써줬다.

 

3악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7년 6월 30일까지다. 이때부터는 조선왕실 어보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받자는 운동을 2차례 진행했다.

2014년 4월 25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대한제국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인장 9점을 반환받게 한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마’를 1차로 진행했는데 당시에 문정왕후어보가 올 줄 알았으나 오지 못하여 다시 반환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 후 2017년 6월에 와서야 드디어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되어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오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미 수사공조 시스템을 활용해서 검찰총장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나아가 정상회담으로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써주었다.

 

양주 회암사지, 문정왕후 사망 후 하루아침에 폐사가 됐다.

 

문화재환수 운동은 반환이 끝이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정왕후어보가 돌아옴과 동시에 4악장을 시작했다. 기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문정왕후어보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오던 지난 주말, 양주에 있는 회암사지를 찾았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8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무차대회를 3일 앞둔 4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 뒤 무차대회를 주최했던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 극형에 처하게 되었고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화로 하루아침에 폐사됐다.

(* 무차대회 : 승려, 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는 법회)

 

보스턴 미술관 라마탑형 사리구 방문조사 당시(2011년)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회암사지에서 반출됐다고 추정되는 사리를 예경하고있다.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결정적 증거가 됐던 아델리아 홀 레코드(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에 의해 어보가 47과 약탈됐다는 미 국무부 문서)는 회암사 유물을 찾기 위해 미국 내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발견한 기록이었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회암사지와 문정왕후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고 여겨 2015년 10월부터 문정왕후어보를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긴 호흡으로 3년 정도 앞을 내다보며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2건 더 있다. 이것은 시민단체만의 순수한 힘으로 해내기 위해 아직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 2015년 10월, 양주 회암사지에서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풍등 날리기 행사를 진행했다.

 

서럽게 울고 난 후 다시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문정왕후어보와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직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교향곡이 끝나면 함께 고생한 모든 이에게 기립박수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한·미 양국 정부가 오는 6월 29일~ 30일 진행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협의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문정왕후어보는 6.25전쟁 당시 약탈당한 문화재로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2013년 9월 19일 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반환 결정을 이끌어낸 문화재다.

 

 

 

▲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화재반환 포스터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4년과 2017년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화재 반환운동을 두차례 전개했다.

 

시민단체,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어보 반환을 두 번째 이끌어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문정왕후어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됐으면 좋겠다는 시민운동 'Fly to the 문'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 국무부 및 한국 외교부와 국무총리실 등에 관련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한국 외교부는 이에 관하여 6월 14일까지 답변을 하기로 하였으나 현재까지 답을 미루고 있는 상태다. 아마도 계속해서 미국 정부와 협의 중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문정왕후어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돌아온다면 시민단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문화재 반환을 이끌어 낸 두 번째 사례가 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4년 4월 25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을 반환하게 만든 단체다.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 역시 6.25전쟁 당시 분실된 문화재로 2013년 샌디에이고에서 압수된 문화재다.

 

 

 

▲ 문정왕후어보 반환은 시민단체의 승리 2013년 9월 20일 월스트리트저널은 "LACMA가 소장한 문정왕후 어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된 것은 한국 시민단체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외면하고 해외에서만 평가받은 시민단체의 문화재 환수운동
월스트리트 저널은 2013년 문정왕후 어보 반환 발표를 접한 뒤 "문정왕후어보 반환은 시민운동의 잠재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또한 국내 언론들도 문정왕후어보 반환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이 2014년 청와대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반환됐을 때도 국내 언론 역시 시민단체가 정상회담을 통해 문화재 반환을 성공시켰다며 주목하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만이 시민단체의 노력을 평가절하 한 채 공식문서에 한 차례도 단체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민간이 주도하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 정부는 문화재를 받아오는 통로가 되겠다며 '만관협력'을 강조하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민간이 주도하여 협상에 성공하면 민간단체는 배제된 채 모두 정부의 성과로 치부되는 것이 문화재환수 운동이다.

 

 

 

 

▲ 문정왕후어보 측면에 '六室大王大妃(육실대왕대비)'라고 흐리게 써진 묵서가 보인다.

 

정부의 무능과 무시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LA 카운티 박물관과 1차 협상을 하던 날이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협상이 끝난 후 문정왕후어보를 살펴보다가 어보에 붙은 묵서를 발견했다. "六室大王大妃(육실대왕대비)", 종묘 6번째 방에 이 어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가 쓰여 있던 것이다. LA 카운티 박물관 스테판 리틀 동아시아 부장은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문정왕후어보와 관련된 조사를 하였는데 왜 그때는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하여 안민석 국회의원이 LA 현지에서 한국으로 연락해 알아본 결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이 LA에 왔다가 어보 조사를 하지 않고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시애틀에 간 것이 확인됐다. 지금까지 이 직원의 업무 태반에 대한 징계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정부의 무능함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2014년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대한제국 국새 반환을 위해 검찰에 진정서를 냈을 때의 일이다. 이를 통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대한제국 국새의 반환이 차일피일 미뤄진 이유가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국새 및 압수 인장에 대한 감정 평가서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서가 오지 않으니 미국 내에서 반환을 위한 절차가 멈춰 있던 것이다.
이에 김진태 전 검찰총장의 지시로 관련 서류가 정리되었고 미국 메넨데즈 상원 의원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가열찬 시민운동이 진행되어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반환이 성사됐다.

 

 

 

▲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타종식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3년 8월 30일,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보신각종 타종식을 진행했다.

 

2014년 당시, 대한제국 국새와 함께 오기로 한 문정왕후어보의 반환이 늦어지자 2015년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한 번 더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어보가 반환되어야 한다며 다시 검찰총장을 면담하고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한미정상이 문정왕후어보의 조속반환을 합의하고 법무부 장관이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어보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민간단체보조금 지급을 신청하였으나 심사 면접에서 '정부가 잘하고 있는 일에 시민단체가 시끄럽게 하지말라.'며 문정왕후어보 반환 관련 보조금을 전액 삭감당했다. 2013년에도 문화재청이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관한 민간단체보조금을 천 만원 교부하기로 하였으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자체적으로 절반을 삭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6년부터 정부 보조금을 거부한 채 문화재 환수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 6월 9일, 문화재청은 문정왕후어보의 몰수절차가 완료 됐다며 수사절차 종결 합의서를 작성하고 문정왕후어보가 6월 말 즈음 돌아온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그 기사를 보며 너무도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시민단체의 노력은 한 줄도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문정왕후어보 수사절차 종결 2016년 6월 9일,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국 이민관세청과 수사절차 종결에 합의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장이 합의서를 들고 찍은 사진을 보며 2013년 9월 20일, 문정왕후어보 반환 발표가 있던 다음날 새벽,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호텔 로비에 홀로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환 결정이 난 날, 협상장에 올라가는 문서를 작성한 적도 없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가 공을 가로채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았기때문이다. 모두가 기뻐 할 줄 알았던 순간에 그런 모습을 보니 별별 다양한 감정이 교차되어 '나는 왜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무척이나 허망했던 기억이 있다.

2017년 6월 30일, 한미정상회담이 끝나면 대통령 전용기에 문정왕후어보가 함께 올 것이다. 대통령 전용기로 문정왕후어보가 한국에 오면 8월부터 고궁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한다고 한다.
만약 이번에도 정부가 시민단체를 외면한다면 민간단체에 의한 문화재환수운동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정부의 외면덕분에 국내의 문화재환수운동가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가장 나이 어린 활동가(행정직 제외)라고 알고 있다. 필자가 이 일에 뛰어든지 6년이 다 돼 가는데도 그 뒤로 이 운동에 뛰어드는 젊은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 의한 문화재환수운동도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마지막으로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묵묵히 노력해준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부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영원히 잊힐 것 같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거리에서 백악관 청원을 위해 뛰어준 문화재제자리찾기 청소년연대(단장 신수진, 부단장 정경서)학생들과 아카데미 수료 학생들, LA에서 도와주신 정연진, 노태현 선생님, 문정왕후어보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주신 뉴욕 뉴스로의 노창현 기자, 매넨데즈 상원위원에게 청원서를 제출해주신 제이크 정, 제니스 정 변호사 부부, 워싱턴 PNP포럼의 홍덕진 목사,하남에서 홀로 뛴 이영아 위원, 대전에서 도와주신 서진희 선생님, 번역을 도와준 최우수씨, 자선 콘서트를 열어준 아웃사이더, 협상 때마다 동행하여 도와준 안민석 국회의원, 시민단체의 요구에 흔쾌히 법률 처리를 도와준 김진태 전 검찰총장,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발견하여 어보들의 반환을 이끈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와 언급하지 않았지만 문화재제자리찾기 시민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전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느냐 책 읽는 시간마저 허락이 안 됐던 올해 초, 아이가 잠든 사이 소파에 기대 숨소리 내지 않고 SNS를 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던 시간에 사진으로 올라온 <<82년생 김지영>>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리 많은 사람이 읽을까 궁금했고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드디어 나에게도 책장을 넘길 기회가 왔다.


▲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본인촬영)


‘이거 내 이야기인가?’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87년생 나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현실은 심하면 더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출장 프로젝트 건으로 수원의 한 식당에서 저녁 겸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상대측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냐 마느냐 선택하는 날이었다. 출국이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주인은 상대측 인사의 친구라며 미팅 도중에 불쑥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그냥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날계란과 소주를 들고 말이다.

식당주인은 맥주잔에 날계란을 넣고 남은 공간을 소주로 가득 채웠다. ‘저게 뭐하는 걸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앞에 맥주잔이 놓였다. 나는 날계란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며 한 번에 그 많은 소주를 마셔본 적도 없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못 마시겠으면 거부해도 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고 그 자리에서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어른이 타주는데 안 마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명령조의 말을 듣자 황당했다. 내가 왜 저 사람의 강요를 들어줘야 할까. 오늘 나의 미팅 상대는 저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다시 마시지 못하겠다고 했고 상대측 인사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시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식당 주인은 다시 한번 나에게 반말을 시작했다. “야, 빨리 마셔 안 죽어.”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중견 기업의 홍보부와 회식을 하게 된 김지영 씨. 홍보부 부장이 따라주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19금 유머까지 참아가며 자리를 지켰던 김지영 씨. 홍보부 부장이 대학생인 딸이 데리러 오라 했다며 자리를 일어나는 장면을 보며 했던 그 생각을 나도 그 날 날계란이 담긴 소주를 마시며 했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주변인 1이 되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출산휴가만 쓰고 육아휴직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아이를 두고 회사로 복직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퇴근 후 친정엄마 집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이가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할머니와 둘만 공유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외딴 섬에 홀로 갇힌 사람 같았고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그저 ‘주변인 1’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맘충이 되었다.’

‘주변인 1’을 벗어나기 위해 그나마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문화센터 가기였다. 그 날만큼은 아이와 신나게 놀아주는 날이었다. 조리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육아정보를 교류하는 날도 그 날이었다. 아기 띠를 매거나 유모차를 끌며 다니는 우리를 많은 사람이 지켜볼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100일 된 둘째 아이를 데리고 조리원 친구들과 점심을 먹게 됐다. 뷔페식 식당에 자리 잡은 아이 셋과 엄마 셋. 다행히 아이는 잠들어있었고 오랜만에 맛있는 것을 먹을 생각에 엄마 셋은 들떠있었다.

그러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 한 숟가락 먹자마자 지옥이 시작됐다. 내 아이는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었고 다른 엄마 둘은 오뚝이처럼 아이가 깨지 않도록 몸을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기저귀를 다 갈고 오자 이번엔 다른 아이가 깨서 밥을 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모유 수유를 마치고 오자 이번에는 또 다른 아이가 수유할 시간이 됐다. 엄마 셋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당을 나왔는데 식당밖에 긴 줄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데려와서 자리를 오래 차지한 맘충이 됐다.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그저 맘충이 됐다. 1500원짜리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맘충이 된 김지영씨처럼 내 돈 내고 밥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맘충이 돼 버렸다.

 

나는 분명 매일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 나보다 2살 많은 85년생 주임님과 밥을 먹으며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를 했다.


“주임님, 저는요. 택시 타기 전에 현금을 준비해야하는 제 모습이 싫어요. 남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무슨 얘긴지 전혀 못 알아듣더라고요.”

“아휴, 연구원님. 현금만이 다예요? 물건이 무거워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달라고 하면 택시 기사가 투덜대서 결국 현금 내고 거스름돈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 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토론회 (SBS캡처)

 


지난 6차 대선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인구가족부를 신설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다. 이 소리를 듣고 지난 10년간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나는데 그에 따른 인식은 왜 제자리인가에 대한, 그러니까 내가 왜 82년생 김지영 씨처럼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저출산 문제는 ‘아이를 낳으면 이것도 해주겠다 저것도 해주겠다’는 저출산만 생각하는 정책들로는 해결할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여성가족부 폐지 견해를 들으며 더 안타까웠던 것은 여성가족부의 ‘여성’이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인구’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승민 후보의 ‘인구가족부’ 신설과 같은 이야기는 행정자치부가 만들었던 저출산지도와 같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다음 정권이 더는 생물학적 차이를 ‘출산’이라는 단어로 묶어 차별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출산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라는 인식이 사라질 때 저출산은 사라질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는 왜 기분이 우울한가에 대해 고민해봤다. 어쩌면 아무리 극복하려고 해도 극복되지 않은 사회 인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의 마지막 문장이 더더욱 가슴에 파고든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 내가 일할수록 내 아이는 정말 불쌍한 것일까?

 

▶ 출근 시간, 시간이 없어 감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아이를 맡기러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있다. (본인남편촬영)

 

출산휴가가 끝나고 육아휴직에 돌입했다. 작은 비영리단체에 다니는데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대체 인력을 투입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다. 휴직 기간 동안 내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급한 업무만 우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발로 밀어가며 했다. 우는 아이를 재우고 다시 일하고 다시 달래고 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당연히 업무효율은 최악이었다. 애를 보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심신이 지쳤다. ‘차라리 출근하자!’고 외치며 2달간의 육아휴직을 종료하기로 선언했다.

 

출근을 결심하자 아파트 단지에 ‘0세아 전용 어린이집’이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첫째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까지 친정엄마에게 맡기기엔 죄스러웠다. 그래서 현수막을 보자마자 입학 상담을 했다. 어린이집 상담 후 둘째 아이를 오전 8시 30분에 맡기고 오후 8시에 데려오기로 했다. 필요하면 토요일에도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이와 선생님이 적응할 필요가 있으니 출근 2주 전부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어린이집에 적응훈련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가 둘이어서 둘째 아이가 종일반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주민센터에 가서 잘 알아보고 종일반으로 등록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다음 날 주민센터에 가서 알아보니 첫째 아이가 종일반에 다니기 때문에 둘째 아이가 종일반 등록을 할 수 없다 했다. 출산 휴가 및 육아휴직 동안 내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 둘 다 종일반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일을 쉬는 동안 첫째 아이가 종일반으로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했다.

방법은 하나, 맞벌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오늘이라도 둘 다 종일반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출근 날짜는 정해져 있고 어린이집에서는 종일반으로 등록하라고 했으니 난감했다. 종일반 등록을 해달라고 했던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 때문에 출근 직전 열흘 동안 종일반 등록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주민센터에서 담당자와 한참을 대화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육아휴직 급여를 열흘 치 포기하기로 했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을 위해 나는 서류상으로 정식 출근보다 열흘 일찍 출근한 것이 됐다.

 

이제 100일이 갓 지난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하니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불쌍하다는 친척들의 비난이 들렸다. ‘아이는 엄마가 봐야 하는데……’라는 이야기를 첫째 때부터 꾸준히 3년간 듣고 있다. 내가 일을 하면 아이들이 불쌍한 존재가 되니 마음이 아팠다. 첫째 때보다 죄책감 지수가 10배는 되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는 단어로 몸부림치다 보니 복직하는 날이 돌아왔다. 준비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더 심한 눈치 보기가 시작됐다.
입학 상담 당시 8시 30분에 아이를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8시 30분에 갔더니 ‘아이가 일찍 왔네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 약속한 시간에 갔는데 일찍 왔다 하니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싶었다. 아이를 맡기며 오늘부터는 출근하기 때문에 오후 8시에 아이를 데리러 올 수 있다 했더니 아직 어린데 그렇게 늦게 오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어려서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하면서도 어린이집에 눈치가 보였다. 점심시간에 친정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정엄마가 첫째는 업고 둘째는 유모차에 태워서 오후 6시 30분에 대신 하원을 시켰다. 친정엄마에게 또 미안해졌다.

하루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변을 못 봤다 하여 유산균을 챙겨 보냈다. 하루에 2~3포 먹었다 했더니 많이 먹는다는 답이 왔다. 권장량대로 먹이고 있는데 많이 먹는다는 답변이 오니 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분유 타줄 때 유산균 넣기 귀찮다는 뜻인가 하여 괜히 눈치가 보였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한 마디에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큰 뜻이 없는 이야기일 텐데 괜히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았다.

출근하는 날엔 아침에 아이를 맡기려니 머리를 말릴 시간도 없어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흐른 채로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침마다 어깨가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결국, 감기에 걸렸다. 아이에게 감기를 옮길까 전전긍긍했다. 머리도 못 말리고 출근한 내 자신이 또 원망스러웠다.

 

 

 

▶ 집에오면 본격적으로 집안일이 시작된다. (본인촬영)


일하는 도중에도 퇴근해서 아이 찾아올 생각만 들었다. 아이를 찾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집안일이 시작됐다. 아이를 씻겨야 하고 먹여야 하고 재워야 한다. 아이가 자기 시작하면 아이 옷을 빨고 널고 개고 젖병을 소독해야 한다. 밤중 수유도 이어져서 24시간 쉴 시간이 없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올 6월까지 주 2회 출근 주 3회 재택근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출근하는 날은 정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전쟁이었다.    

다음 달 내 생일에 1박 2일로 혼자 동해바다 보러 여행 갈 테니 남편한테 아이를 좀 봐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운전도 못 하는데 혼자 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3일 잘 버티다가도 4일째 되면 혼자 떠나고 싶고 다시 3일 잘 버티다가도 4일째 되면 또 혼자 떠나서 아이 울음소리 없는 푹신한 침대에서 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그런 상태로 매일 매일을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토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일정이 잡힌 것이다. 첫째가 둘째만 안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서 친정엄마가 아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린이집 찬스를 반드시 써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아침에 아이를 맡기면서 어린이집 선생님께 토요일에도 아이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말씀드렸다. 당연히 될 거로 생각했는데 어렵다는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토요일에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알아봐 주겠다 했다. 그 날이었다. 아이를 데려와서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보니 근로자의 날 등원 수요조사 종이가 왔다.

‘맙소사, 출근해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혹시나 토요일에 아이를 맡아줄까 싶어 원래 출근해야 하는 요일임에도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에 가서 업무를 보자 했지만 이제 막 4개월이 돼가는 아이를 데리고 회사에 나갈 순 없었다. 토요일 등원만 손꼽으며 수요조사 종이에 근로자의 날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는 서명을 한 후 돌려보냈다. 그렇게 3일이 지났고 아이가 너무 어려서 토요일에 맡아줄 수 없으니 양해해달라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첫째를 친정엄마에게 맡길 땐 친정엄마 눈치만 보면 됐는데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기니 이제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눈치까지 보게 됐다. 아이가 둘 이상 되는 맞벌이 가정들은 그동안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모르겠다. 

5월 징검다리 연휴를 보니 아찔하다. ‘2일과 4일에 임시 휴원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나마 다행이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일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또 내가 일하면 할수록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MBC 뉴스와 함께라서 모든 날이 좋았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오후 9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MBC 뉴스데스크를 보기 위해서였다. 9시에 하는 뉴스를 처음부터 보고 싶은데 학교가 9시에 끝나니 매번 뉴스 시작 후 20분 정도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나머지라도 보겠다고 집에 뛰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MBC 뉴스만 챙겨봤는지 기자 목소리만 듣고도 어떤 기자인지 알 정도였다. 

 

MBC뉴스의 매력은 앵커가 뉴스 마지막에 하는 클로징 멘트에 있다. 클로징 멘트가 얼마나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는지 엄기영 앵커가 말했던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멘트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의 절정은 신경민 앵커의 촌철살인 앵커 멘트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때의 MBC는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로 시청자들의 가슴이 시원해질 뿐만 아니라 신영철 대법관 촛불 이메일 파문, 재판 개입 사건 등을 집요하게 파던 송곳 같은 뉴스였다.

 

 

 

△ 신경민 앵커는 클로징 멘트로 인해 '촌철살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클로징 멘트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본인촬영) 


 
그런 MBC 뉴스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신경민 앵커가 갑자기 뉴스데스크에서 내려간 순간부터다. 그때부터 앵커들은 클로징 멘트를 하지 않았다. 하루는 뉴스 첫 꼭지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를 전했는데 앵커가 클로징에서 관련 코멘트는 하지 않은 채 그저 활짝 웃으며 시청해주셔서 고맙다는 말만 뱉고 뉴스를 마무리한 날이 있었다. 뉴스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고 그 후론 MBC 뉴스데스크를 잘 챙겨보지 않게 됐다.

 

MBC가 정말 끝났다고 느낀 순간은 그 후에도 자주 찾아왔지만 정말 결정적인 사건은 2012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었다. MBC는 선거방송에서 단연 선두주자였다. 2010년 6월 2일 MBC 지방선거 방송은 30~40대 여론 주도층이 압도적으로 시청했다는 조사가 나왔고 최첨단 그래픽 등이 재밌었다며 시청자들이 극찬했던 방송이었다.

 

△ 2010년 6.2 지방선거 MBC 개표방송의 모습. 후보자들의 모습과 터치스크린 등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MBC 개표방송 화면 캡처)

이랬던 MBC 개표방송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매우 끔찍했다. 후보들의 사진을 억지로 붙여넣은 듯한 그래픽 등으로 개표방송이 90년대로 돌아갔나 싶을 정도였다. 개표방송이 끔찍했던 이유는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해야 할 고급 인력들을 파업이 끝난 후 이른바 ‘신천교육대’ 등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뉴스를 제작해야 할 인력들을 서울 신천에 있는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 교육이나 받게 만들었으니 방송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뜨겁게 사랑했던 MBC 뉴스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MBC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박상권 앵커가 자진 하차한 후 보복성 인사발령이 있었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다. 그 기사를 보고 생각했다. ‘앵커 할 거 다 해놓고 이제야?’, 그 기사를 보고 몇 주 뒤 이번에는 MBC 기자들의 성명서를 접하게 됐다. 그때도 나는 냉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미 망했는데?’ 

 

MBC 소식을 접하면서도 나는 MBC 뉴스를 다시 응원해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MBC 막내 기자들이 올린 반성문 영상과 그 영상을 보고 선배 기자들이 회사 측에 보내는 경위서 영상을 봤다. 고등학교 때 MBC 뉴스를 보기 위해 집에 뛰어갔을 때 뉴스로 만났던 기자들의 모습이 나왔고 ‘이제까지 뭐하셨나요? 이제라도 다시 힘내주세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MBC 기자들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접해졌지만 안타깝게도 MBC 뉴스는 더욱더 망가지고 있는 듯하다. MBC 뉴스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장겸 보도본부장은 사장이 돼서 MBC를 더 손쉽게 망가트리고 있는 모양이다.

권력을 향해 비수를 들이대고 비판해야 할 MBC는 그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그들이 찬양했던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3일 밤 방송 예정이던 ‘MBC 스페셜’ “탄핵” 편을 불방시키고 담당 PD가 방송 제작을 할 수 없는 부서로 전보됐다 소식까지 들려온다.

 

MBC 임명현 기자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에서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MBC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냈다 한다. 2012년 파업 이후 MBC 기자들이 수치심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회사 측의 각종 폭력에 무감각해졌다는 게 논문의 내용이다. 

 

사실 MBC 기자뿐만 아니라 MBC 뉴스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MBC는 이제 안 돼, 나도 요즘 MBC 안 봐, MBC를 누가 봐? 무한도전 빼고?’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됐다. MBC 기자들이 회사 측의 폭력에 무감각해졌듯 MBC 뉴스가 더 심하게 망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 역시 무감각해졌다.   

 

△ 팬카페에서는  MBC 보도국에 과자를 보내거나 2012년 파업 당시엔 간식거리를 보내기도 했다.

좋은 뉴스를 만들어 달라는 MBC뉴스 팬들의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MBC 뉴스 팬카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약 10년간 MBC 기자의 팬카페를 운영하고 10년째 되는 날 그만둔 사람이다. MBC 뉴스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자랑이었다.

 

대학 때 쓴 리포트 제목도 모두 MBC 뉴스였다. ‘앵커와 뉴스 시청률의 상관관계 - MBC 뉴스를 중심으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방송뉴스의 위기 극복방안 - MBC 탐사보도부를 중심으로’, ‘국내 방송사 국제부 점검 - MBC를 중심으로’ 얼마나 MBC 뉴스를 좋아했으면 대학 때도 MBC 뉴스만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MBC 기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정보 제공 및 사회 곳곳을 감시하는 기사를 생산하며 MBC 뉴스의 가치를 만들어냈다는 것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열심히 날카로운 뉴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본 누군가는 미래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가끔 나의 성장과정을 다시 훑어보고 싶을 때면 팬카페에 들어가 본다.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이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MBC 뉴스는 그냥 뉴스가 아니라 인생이자 추억이자 행복이었다. 뉴스 오프닝 음악만 들어도 두근댔었던 적이 있다.

MBC 기자들이 수치심과 무력감이 올 때마다 이런 팬들의 인생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MBC는 한때 정정당당 MBC였고 승리의 MBC 아니었는가. 그동안 MBC를 지배했던 권력이 무너졌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엠빙신으로 남을 것인가, 다시 사랑받는 마봉춘으로 돌아올 것인가. 




- 아이를 잘 보라는 정책보다는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엄마 너무 힘들어서 이제 애 못 봐주겠어. 둘째 낳으면 몸조리 한 달하고 첫째 데리고 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일 그만두고 들어앉으면 안 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첫째를 봐주겠다며 아이 낳자마자 우리 옆 동으로 이사까지 왔던 엄마가 더는 애를 못 보겠다 했다.

 

엄마가 힘들다는 것은 매 순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은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여름 대비 에어컨도 설치해주고 냉장고가 고장 났다 하면 12개월 할부로 냉장고도 사드렸다. 애 볼 때 소파가 필요하다, 싱글침대가 필요하다, 이렇다저렇다 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엄마가 애 안 봐주겠다고 하면 큰일이니 눈치가 보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ISP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 출산 후 5달만에 대형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모습, 워킹맘으로의 삶이 시작됐다. (본인촬영)


저렇게 눈치를 본 이유는 하나였다. 밤낮없이 첫째가 엄마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근이 잦았고 주말 근무가 거의 매주 있었기 때문에 첫째를 데리고 올 시간이 없었다. 첫째가 처음으로 뒤집었을 때도, 처음으로 엄마라고 말을 했을 때도, 걸음마를 막 떼던 순간에도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2015년 여름, 나는 출산한 지 32일 만에 출근했다. 사무실 업무가 폭탄으로 쌓여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도 노트북을 갖고 들어가서 일을 했다. 심지어 출산 10일째 되는 날은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고 다시 산후조리원으로 복귀했다.

 

 

“뭐 그런 회사가 있냐! 너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냐!”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아주 작은 비영리 단체였고 내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 진짜로 있었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죄책감이 밀려왔고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을 못 썼으니 주 4회만 일하고 하루는 쉬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평일 하루를 쉬면서 한 일이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 가기였다. 조리원에서 만났던 엄마들과 문화센터 수업이 끝날 때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왔는데 갈 때마다 나는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 문화센터에 가서 정보를 많이 얻었으나 그 만큼 스트레스도 컸다. (본인촬영)


“얘는 이유식 얼마나 먹어요? 우리 애는 100cc를 못 먹어요.”
“이 과자 먹여봐, 애가 진짜 좋아해”

 

친정엄마가 만들어주는 이유식을 먹던 우리 첫째가 얼마나 먹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고 이유식의 양을 몇cc라고 이야기하며 봐줘야 하는 줄도 몰랐다. 아기가 과자를 먹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벽이 되고 싶었고 땅 밑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나며 내가 나쁜 엄마라는 생각에 너무나 슬퍼하는 동시에 단축근무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업무처리를 위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급한 업무는 눈감을 수 없어서 집에 와서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렇게 나의 단축근무는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좋은 엄마 되기를 포기한 나는 둘째를 갖게 됐다. 좋은 엄마도 못 되는 판에 남편과 이야기를 끝낸 가족계획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지 절대로 정부 정책이 좋아서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10년간 80조 원을 쏟아부었다고 하는데 아이를 낳은 나는 왜 피부로 와 닿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정부 정책이 대부분

자녀 3명 이상을 둔 집에 혜택이 가도록 만들어 놨다. 애를 낳는 사람만 계속 낳으라고 유도하는 정책인데 어떤 엄마가 직장을 다니면서 자녀를 3명 이상 낳아 기를 수 있을까. 특히나 나처럼 작은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워킹맘은 출산휴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이 낳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가정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해 대선주자들의 정책을 찾아봤는데 역시나 매력적인 정책이 하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해줄 터이니 집에 가서 아이를 보라는 것이 가장 맘에 안 드는데 모든 후보가 이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근로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소리이자 함께 일하는 다른 회사들과의 소통이 8시간 근무 시간보다 더 단축된다는 소리다. 이런 근무를 하면 업무 효율이 오를까? 근로 시간을 단축하는데 과연 눈치 보기 직장문화가 근절될까?

 

 

그것보다 워킹맘으로서 내가 바라는 것은 부모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자아실현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런 여성들에게 근무시간 단축과 같은 정책이 매력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해서 안전하게 아이를 맡기고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곳을 더 많이 만들어주는 정책을 생산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찍 집에 가도 눈치 주지 않는 직장 문화를 만들기보다는 정시에 퇴근해도 눈치 주지 않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소리다.

 

정부의 출산율 하락 대책을 보면 여성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정책을 찾을 수가 없다. 모두 어떡하면 엄마와 아이를 붙어있게 할까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여성을 위한 정책을 하나 발견했던 적이 있는데 성남시의 산후조리 지원금이었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하다고 지적하는 시대에 산후조리 지원금을 준다는 소리에 정말 놀랐다.

 

 

사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한 것이 아니라 서양 여성과의 골반 모양 및 크기의 문제, 온돌 사용으로 인해 추위를 잘 타는 체질 등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산후조리를 잘할 수밖에 없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하다며 매번 예로 드는 미국 같은 경우 민간 보험사들이 보험료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임의로 출산 후 입원보장 일수를 줄여버렸고 미국 산모들은 아이 출산 후 바로 퇴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애 낳고 회복이 빨라서 바로 퇴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산모와 아이 건강을 위해 미국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가 출산 후 24시간 이후에 퇴원하는 법안까지 통과시킬 정도였는데 이것을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와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올해는 엄마가 아이 보는 시간을 늘리기보단 한 명의 여성이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정책이 쏟아지길 바란다. 임신ㆍ출산ㆍ육아를 지표로만 보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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