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대외적 전쟁과 내적 착취로 인해 발생한 종주국과 식민지의 종속적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 등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배제의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한 것들로 점철된 것을 보며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데 그러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왜 이기적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집단에 속한 인간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일제 강점기 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헌병대에 근무하는 어떤 일본 장교는 심성도 착하고 친구들에게 더없이 믿음이 가는 벗이며 부모에게 효도도 하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요, 아내에게는 더없이 든든한 남편이다. 하지만 그는(그가 속한 일본이라는 국가, 헌병대라는 조직의 입장에서) 조선인 불순분자 사범을 대할 때만큼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고문을 자행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그 일본 장교는 과연 선한가? 악한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1920,30년대 독일은 실업률도 높고 국민은 빈곤에 빠져 있었다. 변변한 자원도 없고 식민지도 없었던 독일인들이 ‘살기 위해’ 내린 ‘합리적인 선택’은 아이러니하게 ‘전쟁’이었다. 합리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기껏 선택한 결정이 전쟁, 즉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1899년 발발한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계 이주민인 보어인과의 전쟁 당시 영국군은 보어인들의 조직적인 게릴라전에 맞서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불태우고 보어인 여성과 노약자를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가혹하게 다루었다. 무고한 보어인 부녀자를 발로 차는 걸로 묘사된 영국군의 모습과 달리, ‘집단의 범주가 아닌 개인 단위로서의 영국군’은 아마 선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출처: https://teachwar.files.wordpress.com/2013/05/boerwar_camp.jpg)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 집단에 속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개인은 선하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비도덕적일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우리에게 답한다. 그리고 그 주요원인은 ‘이성의 한계’와 애국심과 같은 ‘집단의 생존 욕구’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의 한계’는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현실적으로 압도하는 ‘사회조직의 가치와 집단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사회조직이 국가일 때 이성에 입각한 개인의 이성과 양심 표현은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현실에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성과 양심은 생각보다 집단적 이기주의와 환상 앞에 쉽게 굴복한다. 계급투쟁과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브리앙(Aristid Briand, 1862~1932, 프랑스의 정치가)도 정권을 잡자 ‘사회의 생존권’을 앞세워 노동 계급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들에게 충성심을 강요하였다. 애국심은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한편, 국민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이타주의적 미덕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포장된 이타주의는 어느새 ‘국가의 생존’이라는 미명하에 국가 이기주의의 형태로 변질된다. 앞서 예시를 든 일본 장교의 경우, 타인의 신체에 대한 고문과 억압은 개인적인 행위로는 분명 비인간적이지만 국가에 충성하고 안보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조직적 정당성의 외피를 입는 순간,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본받아야 할 애국심으로 돌변한다. 이렇듯 국가이기주의는 여러 비도덕적 행위를 국가의 이름으로 면죄한다.

 

 

"레벤스라움(Lebensraum)",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생활권 확대’(Lebensraum)를 주장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히틀러와 독일인들은 전쟁을 통한 침략 행위마저 정당화했다.
(출처:http://constitutionalistnc.tripod.com/hitler-leftist/id9.html)
 
그렇다면 애국심은 왜 필연적으로 국가 이기주의로 변하는가? 첫째로 국가는 여러 개인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의무를 이행한다는 측면에서 개인보다 도덕적 의무감에서 자유롭고 두 번째는 국가 간 관계는 사실상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에 국가의 폭주를 제재할 실질적 제도와 장치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집단의 생존 욕구에 기인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존욕구가 국가적 차원으로 응집되면 그 생존 욕구는 더욱 절실해지고 이에 따라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집단에게 있어 ‘자기보존욕구’는 곧잘 이기적 충동으로 변하기 쉽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집단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술했듯이 사회와 달리 국가 간 분쟁을 조정해주는 상위 기관이 부재하기 때문에 국가는 타국에 대한 침략적 행위도 생존권 확보를 명분으로 정당화한다. 아울러 양보와 소극적 태도가 상대 국가에게 곧 나약함과 군사력 부재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국가 간의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가진 자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시혜적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이러한 생존의지(will-to-live)가 쉽게 권력의지(will-to-power)로 전환된다는데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힘을 낮출 때 까지 몸을 낮추는 전략)와 같은 방어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과거 중국의 외교정책이 오늘날 아시아에서 주변국과 영토분쟁까지 각오하며 패권을 겨루는 ‘적극적 민족주의’로 쉽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그들은 ‘중국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항변한다. 상대국의 존재 자체가 자국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내 것만 잘 지키면 생존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기준점은 통용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남의 것을 먼저, 그리고 최대한 뺏어야 그것이 곧 자국의 생존권을 지킨다는 자기보존 논리가 팽배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힘의 대결장’이었고 내가 살기 위해 먼저 남을 침략하는 ‘예방적 성격의 전쟁’(preventive war)이 빈번하였으며 오늘날 서구 선진 산업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는 주변부를 착취하여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이기심에 ‘적정함’이란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필요 이상의 욕구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존과 권력의지가 교묘하게 섞인 애국심 앞에서 지성인의 이성과 양심은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성인과 조건 없는 자애심을 강조해온 종교적 지도자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국가에 만연했을 때, 오히려 체념 내지 편승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20년대 바티칸과 교황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방관하였고 1930년대 독일의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은 나찌의 팽창을 전혀 견제할 수 없었다. 그들도 이성에 입각한 정의로움보다는 우선 ‘국가의 생존’을 ‘사회와 개인의 보존’으로 동일시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자기보존욕구에 부분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체로 애국심은 이성과 논리의 메커니즘의 통제를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맹목적으로 추동된다. 헌신적인 충성의 맹목적인 성격이야말로 국가 권력의 기초이며 도덕적 제한을 전혀 받지 않고 무한대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 토대이다.

 

국제질서와 교육으로 집단이기주의를 막을 수는 없을까?

 

국가 간에 항구적인 평화 마찬가지로 불가능에 가깝다. 혹자들은 과거 베르사이유 체제나 냉전시대의 데탕트, 오늘날 각종 군축 협상과 UN과 같은 국제기구의 활성화로 국가 이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평화는 신사적인 압제(?)를 통해 불만이 가까스로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현실에 더 가깝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국제 사회에도 불평등과 이에 따른 군소 국가들의 불만이 존재한다. 2차 대전 승전 5개국(미,영,프,중,러)이 상임이사국이라는 감투를 쓰고 과거의 패배자들과 신생 약소국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 그들의 불만을 은폐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평화란 어느 경우에든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러한 직접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있는 바로 그 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체제에 대한 반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증오심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영구적인 긴장 상태, 혹은 잠재적인 전쟁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으로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정책으로 ‘교육’을 구제 수단으로 내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이러한 교육가들과 도덕주의자들은 개인에게 적절한 도덕 교육과 사회 교육을 보장하고, 적절한 이성과 지성의 개발을 통해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방안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이 사회 정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인간 자체로서의 선의지를 촉진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교육마저도 국가, 혹은 국가를 움직이는 특권 계층에 의해 자신들 본위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론의 배양이 곧 행동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의 시위대와 전경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마저 타협과 조정의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결국 ‘억압에 상응하는 실력행사’도 병행하여 구사해야 쟁취할 수 있을까 말까다.
(출처: http://blog.daum.net/bando21/10934446)
 
조정을 통한 해결 방식 역시 완벽한 해결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정이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논리간의 대결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나의 것을 내어주고 남으로부터 내 것을 얻어온다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흥정'(bargaining)에 가깝다. 또한 어제의 양보가 다음 날 상대방의 더 큰 요구로 귀결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대개 교육 혹은 조정과 대화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상주의에 기반을 둔 중산층 마인드의 편견에 익숙하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으며, 집단 이기주의와 그것을 위시한 특권 계급의 이기심에 대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개 한 사회의 집단적 힘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고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할 현실적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 억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 여성의 참정권 획득, 민족의 독립,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으로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은 이성에 입각한 대화와 토론보다는 소극적 저항, 적극적 투쟁이 적절히 혼합되어 만들어진 ’행동하는 양심의 결과물‘이었다. 특권계급과 집단적 이기주의에 ‘그들의 선의에 기댄 양보와 도덕적 강요’만으로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피지배층이 바라는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그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발칙한 요구’였던 게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 허풍떨기를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집단 이기주의의 무자비함을 설명하였고 또 그 해결책으로 집단 이성이나 종교적 자애심은 부족하다고 설명하였다. 꽤나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전망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니버와 필자의 답은 이렇다. “허풍떨기를 그만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를 막기에 앞서 도덕적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충분히 이기주의적일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개인의 양심과 지성에 앞서 우선 자신이 속한 계급적, 계층적, 민족적 시각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한다. 그렇다고 이성과 양심을 활용하지 말자는 건 결코 아니다. 이성과 도덕적 의무감을 키워주는 교육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제국주의적인 부당한 폭력이고 어떤 것이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폭력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대화와 조정의 방식 역시 어떠한 사회적, 계급적 제약 없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대안들을 모두 펼쳐 보일 수 있는 타협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왜 집단 이기주의가 현실에서 집단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덕적 죄책감 없이 너무나 쉽게 폭력의 형태로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표출되는지 설명, 해결하기에는 이성과 도덕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너무 무기력해 보인다. 이기적 충동은 개인의 차원보다 집단의 차원으로 갈수록 그 속성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인정하는 한편, 집단 이기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만큼 제어할 수 있는 고도의 사회적 통제력이 필요하다. 결국 그러한 사회적 통제력은 민족적 애국심, 계급적 투쟁 등 종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공유를 통해 객관적 통찰력과 정당성을 확보해야하는데 아직 그러한 고차원적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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