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안동에 도착하니 낮 열두 시였다. 다른 도시에 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친가가 있는 이천과 외가가 있는 속초를 제외하곤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화를 한 뒤 시내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등산용 가방을 들고 안동시내 지도를 든 채 서성거리는 나는 영락없는 여행자이자 외지인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간고등어 정식과 찜닭집이 있었지만 내가 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에 나보다 먼저 여행을 간 동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집에 돌아온다. 동생 역시 안동을 첫 방문지점으로 잡았다. 두 시 열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니, 내가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걸었을 땐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는 왜 안동까지 와서 그런 걸 먹어, 동생의 웃음 섞인 핀잔을 뒤로한 채 다음 주에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스호스텔이나 콘도에서 밖에 외박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정집같이 생긴 그곳의 작은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곳의 매니저라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 이용에 관한 설명과 안동 주변지역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숙소를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었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중앙의 ‘젊음의 거리’를 돌고나서 구 시장 거리까지 나아갔다.
<젊음의 거리에 있는 조형물>
아쉬운 점은, 이런 ‘거리’나 ‘구 시장’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속초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던 포항. 그곳에서 보아왔던 시장거리와 젊음의 거리. 그 거리들의 생김새와 안동의 그것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투리와 가판대에서 주로 판매되는 것이 찜닭재료인 닭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속초든 포항이든 안동이든 모두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가. 같은 문화생활권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수산물 대신 팔고 있는 ‘찜닭’이 이곳이 안동임을 알려주는 자그마한 특징이자 차별거리였다. 외려 안동에서 이미 예전에 현대생활로 편입되어버린 구시대적 풍경이나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바랬던 내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 갔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시내에 있는 유적. 고려 개국공신들을 모신 곳이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물>
시장 거리를 돌아본 다음에는 시내 오른쪽 위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았다. 아마 마을 프로젝트로 조성했을 안동의 벽화마을은 그럭저럭 산책코스로 괜찮았다. 하지만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도 잘 되진 않는지 또 와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을 돌았는데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젊음의 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빵 두어 개를 사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젊음의 거리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잠시 사색에 빠졌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엔 처음 보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이따금씩 재미있는 상호 명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과거의 이곳을 유추해보고 미래의 이곳을 상상해본다. (2015年 7月 17日)
2일 차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게스트하우스 정숙시간이 24:00 ~ 7:00 인 탓에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숙소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 돌아온 후엔 여덟 시부터 야경투어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도 따라 나갔다. 허름한 봉고차에 열댓 명이 타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동강변에 설치된 음악분수였다. 여덟시 정각이 되자 음악이 나오며 분수가 작동을 시작했다. 분수에 설치된 조명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졌다. 음악의 강약에 따라 조명의 색깔과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세기가 달라졌다. 마치 컴퓨터에서 음악파일을 열면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져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엔 월영교로 향했다. 월영교 근처에는 안동댐 상류에서 가져온 초가집 몇 개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모셨던 숙소, 그리고 석빙고도 있었다. 운전기사로 같이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소개를 곁들이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동은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상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북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석빙고는 시원했다.
깨끗했던 날씨 덕분에 월영교는 그대로 검은 강물에 반사됐다. 올해도 지어진 지 12년 된 월영교는 안동시내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야경이었다. 구도만 잡아놓고 찍으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진 사진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열 시 즈음이었다. 같이 야경을 본 사람들 중중에 같은 방에 배정된 사람들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가 거실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눴다.
<음악분수.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외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에 예정된 아침 관광투어를 통해 도산서원과 제비원을 둘러봐야 했지만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을 했지만 안동의 거의 모든 사적지는 시내에서 버스를 최소한 사십 분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시에 오후투어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열두 시까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유적지로 가는 버스들은 열 시부터 운행을 했고, 나는 관광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배로 더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어제 갔던 월영교를 넘어 민속촌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여행을 왔으니, 내 두 다리로 어딘가를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생수 한 통을 사고 자전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중간에 석탑 하나를 보고, 월영교도 지나갔다.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이클 복장을 갖추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만을 봤을 뿐. 월영교로 가는 아침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목적지였던 안동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안동댐은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반환점부터 갑자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했다. 일천 원의 관람비는 꼭 일천 원정도의 값을 했다.
민속촌을 나온 뒤엔 낙동강변을 따라 건너편으로 걸었다. 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강물이 왼쪽엔 숲이 울창했다. 숲과 물이 양쪽에 있으니 시원했다. 세 시간 가량을 걷고 나니 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낙동강변을 걸으며>
오후엔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나갔다. 상대적으로 ‘더’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동역 초입에서 게스트하우스 차를 타고 사십 분 쯤을 달리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서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봉고차는 신음소리를 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했다. 서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풍경만큼은 예뻤다. 적재적소에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함으로써 멋을 풍겼다. ‘만대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개방되어있었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이용하는 탓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써져 있었다. 비록 만대루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마당의 백일홍과 만대루는 멋진 조화를 이뤘다.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산들의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아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았더라했다. 안동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임진왜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고향이 안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자리를 옮기고 운영(?)했던 병산서원을 와보고 싶었다. 서애 선생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 이곳으로 서원을 옮겨올 때만 해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 줄기는 계속해서 그 흐름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병산서원>
서원을 나온 뒤엔 바로 하회마을로 향했다. 아마도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풍산 류씨 집성촌인 이 곳 하회마을이 아닐까. 허씨와 이씨가 이곳을 자신들의 터로 잡으려고 했지만 최종 주인은 류씨로 결정이 났다. 하회마을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 있었다. 탤런트 류시원의 젊은 시절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민속‘촌’과는 다르게 하회‘마을’인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했다. 예전엔 개방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후 관람객이 늘어난 탓에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만 개방됐다. 마을 초입엔 하얀 연꽃들이 펼쳐졌다. 장미꽃처럼 향기롭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엔 초가집과 기와집 두 종류가 있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집이라고 문화해설사가 말해주었다. 기와집들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나 그 유명한 풍산기업 소유자들의 집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과거에 양반들이 가마를 소유했다면 이십일 세기로 바뀐 지금, 그들은 가마 대신 외제차를 몰고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명패는 모두 ‘류’씨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엔 柳時元이라고 적혀진 명패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서애 선생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충효당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후투어만큼은 시간을 지켜 사람들과 같이 이동해야 되는 터라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회마을은 河回마을이다. 강물이 마을을 온전히 돌아나기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라는 평을 듣는 이 마을의 유일한 허점은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호’(하회마을을 원의 형태라고 보았을 때)부분만 강 건너에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애 선생의 형이었던 류운룡은 풍수지리에 아주 능숙했고, 산이 없는 그 ‘호’부분에 소나무 만 그루를 심어 그곳으로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 시절, 재력가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송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직도 이 나무 앞에서 굿을 하고 탈춤을 춘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 해설사는 강 위에 뜬 연꽃 같다고 비유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오십 미터도 안되는 강을 건너는데 삼천 원을 내야했다. 요금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하회마을은 풍산기업에서 운영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터라 국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편에 내린 뒤 이런 불평을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연정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집필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애 선생은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풍경은 조용했다. 그 옛날, 하회마을을 찾아온 보부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부용대에서 잠시 쉬어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가장 안동적인 것들을 본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던 일, 하회마을의 이면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오늘 보지 못한 것은 다음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2015年 7月 18日)
MEMO
*18일 부로 경북지역의 메르스 경보가 없어졌다. 마지막 자택격리자의 격리 일자가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강이 아닌 다른 강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기차역 바로 뒤로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한강의 이분의 일 정도였다. 첫 날 저녁 하류를 보고, 병산서원에서 막 산에서 내려온 중류를 보았다. 그 중류는 하회마을을 돌고 낙동강 댐을 지나 시내로 흘러내려간다.
*병산서원은 서재와 동재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를 구분해서 방을 쓰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과거科擧에 초시였던 사람과 재시, 삼시를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면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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