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열풍이 한차례 불어닥친 한국에도 여성 서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만큼 여성 중심 공동체를 특별할 것 없이, 아주 잔잔하게 그려내는 영화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화는 안토니아와 자손들의 삶을 지극히 유토피아적으로 그린다. 카메라의 중심에는 언제나 ‘여성’ 이 있다. 여성과 여성의 삶을 존중해주는 유니콘 같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사회에서 정한 정상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질문한다. 과연 이 사회가 정한 부계 중심의 정상성이 보편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보편성 역시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낸 개념은 아닌가?

아주 다양한 사건들이 각자 의미를 갖고 스쳐 지나가지만, 나는 안토니아의 3대가 균열내는 정상성이 무엇인지 상징하는 바를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의 포스터 (출처 - 네이버영화)



안토니아 – 결혼보다는 파트너십으로


 안토니아는 바스의 청혼을 받지만 (“내 아들들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오.” 라는, 지극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청혼이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그를 거절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동반자로 산다. 비혼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 – 특히나 결혼 가능한 이성 파트너일 경우 – 결혼 대신 파트너쉽 관계를 평생 유지하자고 제안했을 때, 선뜻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거기에는 세금 감면이나 내 집 마련 등 정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이라는 경제적 이유 역시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연애 관계의 최종 도착지를 결혼으로 결론짓고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장하는 한국 사회에서 둘의 파트너십은 결혼이 아닌 동반자로서의 삶, 결혼의 대안을 이상적으로 보여준다. 안토니아와 바스는 이성애-유성애 관계를 맺지만, 둘의 파트너십은 이성애-유성애 틀의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델로서 작용할 수 있다.


다니엘 – 원하는 가족을 선택할 권리, 이성애 관계에서 이탈하기


 다니엘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한다. 안토니아는 그런 딸을 나무라는 대신에 괜찮은 남자를 직접 물색해준다. 결국 다니엘은 목표했던 대로 테레사를 낳는다. 출산을 남성과 여성의 사랑의 결실로 그리는 클리셰와는 100만광년 정도 동떨어진 행보다. 다니엘의 출산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 위한 일종의 ‘도구’적 행위다. 그 과정에서 남성은 자식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다니엘의 행위는 ‘대’를, 자신의 핏줄을 통해 부나 명예를 후손에 물려주고자 했던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집단과 자손을 낳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점에서 다를 것 없는 결과를 보이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맥락을 보이게 된다.

정상성을 이탈한 다니엘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니엘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 파트너와 평생을 함께하는데, 둘의 파트너십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안토니아의 공동체에 녹아든다. 둘의 결합은 이상하다거나 특이하다는 시선 없이 안토니아 공동체의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축복받는다. 재생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성 당사자를 배제하고, 동성 연애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와 대비되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테레사 – 재생산의 자유와 모성 이데올로기, 공동 육아


 다니엘의 딸 테레사가 임신했을 때, 가족들은 출산 결정권을 온전히 테레사에게 부여한다. 아무도 테레사에게 “낳아!” 혹은 “낳지 마!”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테레사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테레사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을 때 구성원 중 누구도 그녀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낙태와 같은 재생산 과정에서 결정권을 온전히 당사자에게 준다는 점에서 안토니아의 작은 사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면모를 보인다.

사라를 낳은 이후, 테레사는 사라에게 헌신하지 않는다. 애초에 테레사는 결혼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사라에게 냉담한 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자녀의 육아에 관심 없는 테레사에게 아무도 모성 운운하지 않는 장면은 몹시 인상 깊었다. 테레사는 늘 그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일 – 작곡 – 에 집중하며 산다. 테레사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점에서, 이 공동체에는 모성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모성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인가? 모성을 당연하게 상정하는 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은 아닌가?

사라의 육아는 아빠 시몬과 다른 가족들이 함께 한다. 사라는 공동육아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형성한 친밀한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 없이 성장했지만 사라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 감수성 넘치는 사람으로 자란다.


안토니아의 대안 공동체


 안토니아의 공동체는 가부장제 사회의 일반적인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소수자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는 현실적이지 않다. 사회의 당연한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유별나게 특별한 것처럼 그려지지도 않는다. 영화는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가 ‘다른 인간’ 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맞춰 가는 모습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이다. 

 이 영화는 1995년에 개봉했다.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이 영화는 선도적이고 ‘특이’한 영화다. 다양한 관계와 선택지가 당연시되는 안토니아와 가족들처럼 한국 사회도 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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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7, 수많은 2차 가해에 시달리다 못한 후배가 죽었다.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자살의 징후가 가득했다. 산적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바빠서 그냥 넘겨왔던 게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 애의 사건을 일개 가십 취급하며 소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성폭력을 화제거리 취급하며 실명이 궁금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질려버렸다. 온통 그 애가 당한 성폭력의 수위에만, 그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한 피해자 상에 부합하는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여러모로 악몽 같은 여름방학이었다.

 

오롯이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의 죽음이었다. 나를 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직접 지목한 진정인의 죽음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여러모로 내게 큰 상실이었다. 나는 그 애의 죽음과 마주하며 과연 앞으로 내가 성폭력 사건 자체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가해자가 사과문을 빙자한 입장문을 붙이고 나서 익명 커뮤니티 반응[사진=커뮤니티 캡처]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학내 익명커뮤니티에 만연한 수많은 2차 가해다. 후배가 생전 고통 받았던 사건 두 개 모두 2016년에 벌어진 일인데, 아직도 당시 익명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때 익명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에게 왜 익명커뮤니티 시끄럽게 여기에 공론화 하고 난리냐는 반응과 가해자에 동조해서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가담하는 반으로 갈려 시끄러웠다. 아무리 피해자 편을 들어도 너 피해자 본인이냐? 평소 행실 보니까 억울할 일도 없겠는데 왜 난리냐?’ 는 반응만 돌아왔던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익명 뒤에 숨어 그를 적극적으로 난도질했고, 그의 과 사람들은 피해자를 평소 행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혹자는 별 일 없었으면 과 회장까지 했을 인재의 스캔들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마저도 익명커뮤니티의 분위기가 무서워 침묵해야만 했다.

 

결국 그 애에게 자기를 비난하는 익명 여론은 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싸워주지 못했던 우리 모두와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해가 바뀌고 성소수자 모임 레인의 동아리 승격심사 과정에서 가해자의 친구가 또다시 2차가해를 했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타인을 자살 직전까지 몰아간 사람이 포함된 동아리의 진실성을 의심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시 본인의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와 괴로워하던 그 애는 결국 우리 모두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2차 가해에 대한 의문은 내 안에 남아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20161학기에 있었던 성폭력사건 공론화 당시, 나는 가해자에게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난을 경계했다. 이 공동체에 가해자에게 떳떳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가해자가 가해를 저지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묵인과 방조를 저질렀고, 성폭력문화에 문제제기하지 않는 우리로부터 성폭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는 내가 가진 생각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 게 너무나 힘이 든다. 스스로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대자보를 쓰며 학교의 미온적 대처를 규탄하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반성폭력 실천 모임 활동을 하던 그 애를 떠올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까지도 2차 가해를 저지르며 떳떳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피진정인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공허해진다. 이론과 함께하지 않는 실천은 공허한 실천이라는데, 나는 그런 공허한 실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2018년이 되고 미투 운동이 사회 각계에서 터지는 동안에도, 성공회대학교는 여전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 틈에 수많은 성폭력이 벌어지고 묵인되고 사라진다.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생사회를 마주할 때마다 그 애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양예원 씨와 스튜디오 실장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볼 때마다 2016년 우리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가해자 입장대로 떠들어댔던 사람들의 차이점이 대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 가해자의 말이 진실이요, 양 측의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양비론적인 말을 진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그 애를, 나를, 수많은 피해자들을 무너지게 했을 것이다.

 

성폭력에 의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타살자들을 마주하게 될까. 자신의 피해를 꾹꾹 눌러 적었던 그 애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며 괴로워하고 위안받았던 다른 학교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댓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살아있을까? 부디 죽지 않았기를.

 

* 2차 가해/ 2차 피해에 대한 용어적 논의가 있지만 글을 쓸 당시 적었던 대로 2차 가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올해 4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폭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건의 시간대도, 가-피해자의 관계도, 발생한 공동체도 다양했지만 공통적인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가해자들의 사과 대자보의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의 폭로는 수도 없이 쏟아졌지만, 가해자들의 대자보 내용은 정말 비슷비슷했다. 본인의 가해 사실을 나열하고,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는 내용도 있었다. 감히 짐작컨대, 본인이 어떠한 맥락에서 가해를 저질렀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의제기를 받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사건 경위를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가해자에게 ‘본인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볼 것’ 을 권유했다. 그래서 듣게 된 사건 경위는 충격적이었다. 가해자는 본인이 왜 가해자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본인의 행위가 ‘성폭력’ 이 아니라 ‘로맨틱한 관계 사이에 흔히 발생하는 스킨쉽 사인 미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본질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성폭력은 나쁜 것’ 이라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왜 나쁜지, 성폭력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도록 가르친다. 성폭력 교육을 하면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 경찰청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성폭력 예방법 (폴인러브 : 16.08.22)

성폭력 예방 교육의 초점이 피해자에게 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성폭력 문제는 어떤 상황이든, 피해자가 어떤 상태이고 둘의 관계가 어떻고 등등과 관계없이 절대 합리화 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모든 강력 사건이 그렇듯 성폭력 역시 ‘가해자의 문제’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할까? 사실 아주 단순하다. 성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흔히들 폭력을 떠올릴 때, 현상에 집중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손상과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하는, ‘현상’ 말이다. 하지만 모든 폭력은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면서 발생한다. 폭력이 발생하는 관계성, 즉 강제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더 주의깊게 봐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다. 성폭력 역시 이 관계성을 정확하게 따른다. 2014년 경찰청 통계를 따르면, 성범죄(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기타 강간/강제추행 등) 전체 발생 건수 21055건 중 여성 피해자는 18974명으로, 약 90.12%이다. 가해자의 경우, 전체 검거자 19306명 중 남성 가해자가 무려 18983명으로 약 98.33%가 남성으로 집계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별권력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피해자 성비를 차치하고서라도,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98.33%가 남성이라는 건 현 한국 사회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지표다. 바로 ‘남성’ 으로 통용되는 집단이 성폭력을 저지를 ‘권력’ 을 쥔 집단이라는 것 말이다. 권력 집단이 성교육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성교육은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9.88%를 차지하는 남성 피해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남성’ 집단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이성애규범이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남성 가해자가 98.33%인데 남성 피해자가 9.88%라는 건 언뜻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가 나타내는 것은 명확하다. 남성 집단에 속해있는 개인 역시 권력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남성 개인 역시 ‘남성 집단’ 에게 요구하는 가부장제 남성성으로 권력을 판가름하기 때문에, 이상적 남성성을 획득한 사람은 남성 집단 – 남성 중심 사회에서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러지 못한 사람일수록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고 권력과 멀어진다.

 하지만 사회에서 남성이 권력을 차지한 지 굉장히 오랜 세월이 지났다. (청동기 시대부터 남성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 권력을 획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집단은 스스로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 남성이 사회에서 권력을 쥐고 있다 보니, 남성집단은 권력층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사회의 주류 이념이 남성에게 맞춰진 사회에서, 개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본인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 을 존중하는 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간섭/강요 없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성적 행위를 결정하고 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그 중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동의 구하기’ 이다.

 동의를 구하는 작업에서도 우선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상대와의 권력관계를 생각하는 것’ 이다. 본인과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는 ‘동의 표현-거절 의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이다. 거절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환경은 곧 성폭력을 조장하는 문화와 연결된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의 원 의미를 크게 훼손한다.

 우리는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언제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도록 방조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미약하지만, 수많은 개인이 모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믿는다. 당장 내가 속한 공동체부터 성폭력에 무방비한 공동체가 되지 않겠다 선언했다. 개인의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면, 언젠가 이 사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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