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아 단일민족이라 자부하던 한국에서도 외국인 유학생들과, 귀화 이주민, 한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 가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다소 폐쇄적이고 그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 정서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분위기로 변한다는 점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원칙 없는 다문화주의로 인해,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들에게는 사회 적응 문제가 가중되고, 자국민에게는 사회불안과 상대적인 역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나는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과도한 다문화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바이다.

 

첫째, 현재 한국에서 문화적 상대주의를 과잉 포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나머지, 특정 문화권에서의 비인간적인 인습이 우리 사회로 그대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 흔히 아랍권에서 여성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행해지는 여성 할례나 명예살인, 차도르 착용의 풍습은 서구의 아랍 이주사회에서도 현지인들의 무관심 속에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아랍의 풍습을 상대주의, 다문화주의의 관점으로 이해하기에는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 인권, 평등, 생명존중에 지극히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명예살인 사건”
1989년 미국 미주리 주에 살던 팔레스타인 이민자 가정 출신 소녀 티나 이사, Tina Isa(당시 16세)는 아버지가 주선한 중매결혼을 거부하고 그의 허락 없이 비무슬림 남성과 만나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 의해 살해되었다. 그녀를 죽인 아버지 Zein Isa는 91년 12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97년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진참조, http://www.nydailynews.com/news/justice-story/justice-story-honor-killing-article-1.1510125)

 

 

문화적 다양성은 당연히 인정해야 하지만 특정 문화가 자유, 인권, 평등의 가치에 어긋난다면 분명 이는 범인류적으로 배척해야할 인습일 뿐, 그것을 전통이라 간주할 수는 없다. 이처럼 타인이 강제로 상대방의 의사와 반대되는 신체구속과 훼손을 행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헌법 가치에도 크게 위배되는 바, 향후 원칙 없는 다문화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의 안녕과 자유를 위협하는 비인륜적 외국풍습이 난무하게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격언은 세계화 시대에 국수주의적 자국중심문화를 부추긴다는 평도 있지만,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재의 기준에서 볼 때 이는 ‘주인’으로서 최소한으로 주장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해당 국가의 헌법, 사회가 지향하는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손님인 이방인이 존중하는 틀 안에서 자신들의 특수문화를 영위하는 이른바 ‘원칙 있는 다문화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두 번째로 외국인 범죄 예방 및 대응 시스템의 미흡으로 인한 치안 불안문제이다. 외국인 범죄율이 해마다 늘고 있지만 외국인 범죄전담에 필요한 수사 인력과 조직운영에 관한 시스템 구축은 아직 미흡하며, 외국인들에 대한 양형기준 또한 외국과의 외교관계를 과도하게 고려한 나머지 너무 약하다는 평가이다. 2006년 서래마을에서 발생한 프랑스 부부의 영아살해유기 사건과 재작년에 있었던 미국 출신 방송인 비앙카의 마약복용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만 검경 수사당국의 미적지근한 영장발부신청과 출국금지조치 처리 미숙 등으로 인해 당사자들은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고, 사법당국은 양형선고는커녕 제대로 된 수사조차 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아이를 죽인 적이 없으니, 한국으로 돌아가 수사를 받지 않겠다.”
2006년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자신이 낳은 영아 2명을 살해, 유기한 쿠르조 부부는 사건 후 출국하여 프랑스에서 한국의 경찰과 사법체계를 믿지 못하겠다는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다가 프랑스 현지 검찰에 의해 기소, 범죄가 인정되어 부인 베로니크 쿠르조씨는 징역8년을 선고받았다.
(사진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357425)

 

“미국으로 도망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앙카”
2013년 대마초 복용 및 매매, 알선 혐의로 한국 검찰에 기소된 방송인 비앙카 모블리(미국)는 한국 검찰이 출국금지 기간 연장 신청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 틈을 타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방송인인 비앙카를 신뢰, 인권보호 차원에서 출국정지 연장을 하지 않은 것"이라며 "실수라는 언론보도는 적절치 않다"고 변명했다. 뒤늦게 한국 법원은 비앙카에게 강제소환을 명령했지만 미국 시민권자인 그녀는 한국 법원의 명령을 이행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64403)

 


외에도 중국, 동남아 등지의 조직폭력배들이 한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경찰당국은 실태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그치고 있지만, 다문화주의를 앞서 경험한 선진국의 예(특히, 최근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동유럽 이민자 범죄 집단들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한 강간, 납치, 살인 등)로 살펴볼 때, 향후 이들이 한국인들로 범죄의 대상을 확대할 가능성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그야말로 내 나라, 내 조국에서 외국인 범죄조직 때문에 맘 편히 발 뻗고 살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말로 욕을 하며 돌멩이, 물병, 음식물, 보도블록 조각, 스패너까지 마구 던졌다.”
2008년 4월 송파 올림픽 공원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당시, 1000여명에 달하는 한국 거주 중국 유학생 집단이 티베트 독립과 중국 인권 개선을 주장하던 시민단체와 충돌 중, 무고한 일반 시민들까지 싸잡아서 폭행하고 제지하려는 한국 경찰에게까지 폭력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이들 중 형사처벌을 받은 유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사진참조: http://www.sfgate.com/news/article/China-continues-attacks-on-Dalai-Lama-3217752.php)

 

 

세 번째로 다문화주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다문화주의를 위해 자국민이 감수해야 하는 역차별이 심화되고 있는 문제를 들 수 있다. 한국 특유의 배려 문화에서 비롯된 과도한 영어 사용 권장 문화로 인해 영어 교육 사각지대에 놓인 일부 자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언론을 접하거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때 어려움을 겪곤 한다. 또한 한국인과의 결혼 이민과 귀화에 필요한 한국어 능력과 한국사 능력 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예정되어있어 이들이 향후 한국에서 거주할 때 필요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능력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된다. 그리고 정부지원금의 혜택을 받기 위한 일부 대학들의 원칙 없는 마구잡이식 중국 유학생 모집은 자국 학생들에 대한 학내 편의제공 역차별(유학생 기숙사 우선배정, 상이한 장학금 선정기준 등등)이 심화되고, 왜 한국 대학은 중국어로 된 수업이 없느냐는 주객전도(主客顚倒) 격 중국 유학생들의 볼멘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지만, 역설적이게도 제 국민국가들 간의 문화전쟁은 날로 확산되고 있다. 안 그래도 자국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적은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데, 체류 외국인들의 단순편의를 위해 이민, 귀화에 필요한 한국어, 한국사 요건을 완화시켜야 한다거나 우리가 자발적으로 영어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속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한국 사회는 앞으로 정체성 혼란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외국에 의해 완전히 사장되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 우생학을 토대로 한 인종차별제도의 법제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호주처럼 이민을 가려 받고 조직적, 제도적으로 외국인들을 차별하자는 얘기 또한 아니다. 단지 눈앞에 놓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턱대고 시행되고 있는 원칙 없고 문화철학 없는 중구난방식의 다문화정책을 염려하는 것이다. 또한 여타 선진국 다문화 사회가 앞서 겪은 사회갈등과 치안불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자국 내 외국인 범죄와 타 문화권 간 충돌에 대한 우리만의 구체적 치안, 사법 시스템이 조속히 확립되어야 한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한다면 상대적 상실감을 느낀 자국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반감은 더해지고, 엄연히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들 내지 귀화인들 역시 뿌리 깊은 차별에 대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거친 응답을 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주민들을 장기간에 걸쳐 자국의 문화에 편입시키는 흡수주의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이민, 귀화 심사 시 요구되는 한국어, 한국사 능력요건을 강화시켜 이들이 한국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게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하며, 향후 이들의 한국 문화 습득에 필요한 교육 지원 정책을 주기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또한 외국인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불안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재 체류 중인 외국인 범죄조직과 국제 테러조직에 대한 수사당국의 정확한 실태 파악이 요구된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심각하게 저해하거나 우려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사전입국금지, 강제추방 같은 강력한 법적 제재수단 역시 실질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내, 외국인 간에 공평한 법치적용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외국의 눈치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이고 원칙 있는 사법집행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국가적 의지와 법의 양형제도 보완이 절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기본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범인류적 가치인 자유, 인권, 평등, 생명존중에 반하는 외국 풍습에 대해서 역시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단호하게 근절시켜야만 현재 일그러진 다문화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 스포일러 없음. 추후에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마음 놓고 읽어도 무방함 ※)

 

*글을 쓰는 두 번째 자세

 

장수상회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굉장히 많은 생각들이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볼 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기도 했다. 물론 울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가는 아마 미세하게 떨렸을지도 모른다. 가족 영화는 그래서 불편하다. 감정이 담긴 통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만드니까. 나와는 대조적으로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웃었고, 울었으며 웃었다. 감정이 참 솔직한 친구다. 엔딩 크레딧을 응시하던 그는 이제 갓 1년 정도 지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이 많이 났을만한 그 영화를 보며 괜찮다, 라고 했다. 정말 괜찮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게 물든 코를 보니 문득 그의 조모상에서 본 그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그가 그런 코를 한 채로 와 줘서 고맙다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장수상회를 보고 나서 나는 문득 그와 내가 만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영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묘한 영화.

 

지금 아마 첫 문단을 보며 ‘어, 지난번하고는 좀 다른데.’하고 몇몇은 생각했을 법하다. 그리고 글쓴이가 그 사람이 맞는지도 다시 한 번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감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영화를 볼 때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하지만. 나는 영화를 고를 때에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고르고, 평가하는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각기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고, 그 스타일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그 영화에 맞는 글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지난번에 투고한 영화 <화장>에 관한 글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꽤나 진지체로 그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삶과 죽음에 관한 글은 가벼울 수는 없는 이야기니까 나는 나름대로 그 글의 스타일에 만족했다. 물론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른 의견이 있다면 겸허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맨날 같은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한 번은 클래식하게, 한 번은 캐주얼하게 글을 코디할 예정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연습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겠다.

 


* 눈이 가는 노년의 로맨스, 성칠-금님 커플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화를 보고 빠른 시일 내로 글을 쓰겠다던 다짐과는 다르게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와중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름대로 많은 일들을 마무리했지만 이상하게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뭔가 진지하게 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영화는 아니었으며, 킬링, 힐링타임 만들고 오라고 추천할 정도로 가벼운 영화도 아니었다.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우리들의 삶,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들은 신파극의 성공 맛을 본 배급사가 또 찍어낸 릴레이 신파극, 너무 많은 것을 넣어서 실패한 영화라고도 평했으나 나로서는 감정선을 건드린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장수상회에서 일하는 노인 성칠의 첫사랑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도와준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면에는 성칠이 재개발에 찬성할 수 있도록 금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인계를 쓰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주축은 성칠의 러브스토리다. 아마 이 점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의문을 남겼을 법하다. 보통 러브스토리라고 하면 젊은 층의 소유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등장하는 젊은 청년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되는 반면 중년이나 노년의 사랑은 불륜, 재산다툼, 새엄마 등과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매체에서 이들의 사랑은 비밀스럽고, 은근하게 다뤄진다. 하물며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노년의 로맨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물론 아닌 경우를 배제할 수 없으나 많은 경우 그들의 로맨스는 ‘남사스럽다’라는 표현의 장벽에 막혀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대놓고 노년의 로맨스를 다룬다. 물론 그들의 사랑에 있어 걸림돌이 될 요소는 없다. 배우자가 없는 상태(금님의 경우)이거나 배우자가 한 번도 없었던 상태(성칠의 경우)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는 장애물이 없다. 자녀의 반발이 약간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이것은 잠시일 뿐 이들의 로맨스는 환대받는 느낌이 더 강하다. 실제로 감독은 한 매체에서 노년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가 걱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잘 안 쓰이는 소재가 될 것 같아 신선했다고 답했는데 그 답이 참 적절했다고 본다. 쉽게 볼 수 없는 것에는 보통 눈이 먼저 가기 마련이다. 쉽게 볼 수 없는 노년의 사랑이, 거기에다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소재로 나왔으니 눈이 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민성-아영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즐기는 성칠-금님 커플

 

그리고 사실 어느 세대든 사랑은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중년과 노년이 되어도 그들은 사랑할 때만큼은 다시 청년이 된다. 칠성 역시 마찬가지다. 까칠하고 꼿꼿한 70대의 노인이었던 그는 사랑을 하며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장수의 딸인 아영-민성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즐기며, 그는 본격적으로 노년의 로맨스를 시작한다. 노년의 로맨스는 관객의 눈길을 끄는데, 데이트 장면을 보면 성칠과 금님이라는 캐릭터에 다른 배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상 적합한 배우는 아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그 동안에는 미처 접하지 못했다는 것에 그 의외성이 있다. 성칠 역을 맡은 배우 박근형은 그동안 로맨틱한 노신사, 혹은 근엄한 노신사로 많이 등장해왔다. 최근에 등장했던 예능에서의 모습이나 드라마에서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금님의 역할을 맡은 윤여정 또한 비슷한 입장이다. 그 동안 집안의 억척스러운 엄마, 가장에 순응하는 엄마와 같은 이미지로 등장해 로맨스물에 어울리는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웬걸, 두 사람의 케미는 정말 의외인 것처럼 느껴진다. 깐깐한 노인으로 변신을 시도했던 박근형은 영화 전반을 지나며 로맨틱한 노신사로 변해가고, 그 옆에서 금님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여인이 된다. 그들의 데이트는 장수의 딸인 아영과 민성의 데이트만큼이나 싱그럽다. 로맨스가 청년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들의 데이트는 청춘이다.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성칠과 금님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감독은 인물 캐스팅을 하면서 성칠과 금님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캐스팅은 적중해서 그들의 모습을 본 관객들이라면 확실히 이 이상의 캐스팅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 그 속에서의 이웃 그리고 가족

 

칠성이 로맨스를 시작하며 부드러워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차 부드러워진다. 이런 그의 변화에 마을사람들은 칠성의 로맨스를 도우며 점점 하나로 뭉친다. 물론 여전히 이면에는 재개발 문제가 엮여있지만 뭐 어떤가. 어쨌든 그들의 조화로운 모습은 유쾌하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나타나며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든다. 현실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 친화되는 과정이 참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인간적이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인간적, 얼마나 살가운 말인지 모르겠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같은 건물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현재적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는 옆집, 뒷집 가족이 몇 명인지, 어느 집의 손주가 무슨 상을 탔는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이웃끼리 모여 집 앞에 돗자리를 펴놓고 수박을 쪼개 나눠먹기도 했다. 어디 먼 시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시에 있었던 어느 동네의 이야기다. 그런 동네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반갑고,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그 중에서 누가 제일 친근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마트 직원인 제갈청수를 꼽고 싶다.(사실 자갈치라고 그를 지칭하고 싶다. 성칠은 그의 이름을 종종 까먹고 그를 자갈치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목소리와 수다를 떠는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법한 캐릭터이기도 했고, 그의 오지라퍼(오지랖을 떠는 사람)적 특성은 관객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캐릭터가 오지라퍼였기 때문에 더욱 인간적이고,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외의 인물들도 이웃으로 두고 싶을 만큼 친근하다. 성칠의 로맨스를 돕는 마트 사장 장수나, 성칠을 위해 손님의 양복을 몰래 빼서 다려주는 치수와 같은 인물은 얼마나 코믹하면서 인간적인가.

 

성칠과 금님의 만남을 응원하는 동네 사람들
(제갈청수는 왼쪽 상단부에서 두 번째 인물이다.)


이웃뿐만이 아니다. 장수와 장수의 딸인 아영, 금님과 민정과 같은 가족과 가족의 사이도 눈여겨봐야 한다. 가족들은 서로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간다. 진정한 가족이라는 게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가족이어도 개인과 개인인 ‘나’와 ‘나’로 이루어진 관계가 ‘나’와 ‘너’로 인정되는 관계이다. 이런 가족 친화적인 요소는 이 영화가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볼 만한 영화로 손색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더불어 이 인간적인 친화는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들에게까지도 물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가장 큰 이유도 가족 생각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들 누군가를 떠올렸겠지만, 나는 성칠과 금님에 중점을 두고 보다 보니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한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꼬장꼬장한 성칠과 닮아있던 외할머니는 세월이 흐르며 점차 작아지고 중이다. 한 성격 하던 때와는 달리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작아짐에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이 작아지고, 그런 당신을 나는 가끔 외면하지는 않았나. 문득 처음에 언급했었던 붉은 코의 그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며칠 전까지도 할머니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었다고, 더 오래 계실 줄 알았다고.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금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로맨스를 반대하는 민정에게, ‘우리에겐 이런 게 마지막일 수도 있어.’라고. 어쩐지 그 말이 여운이 남는다. 물론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총 횟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늦게 전에 할머니에게 종종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장수가 아버지의 곁을 늘 지켰듯이, 장수의 딸 아영이 할아버지를 의지했듯이, 그렇게 할머니 일상의 부분인 것처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권유해본다. 내일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떨지를.

 

* 스포일러를 할 수 없기에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로 대처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반전은 지켜달라는 장수씨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뚜―뚜. 상대방과 연결되기까지 울리는 이 알림음. 나는 이 연결음이 어떤 컬러링보다도 감미롭게 느껴진다. 통화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은 잡생각을 멈출 수 있으니까. 한 박자 여유를 찾을 수도 있다.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걱정은 단 10초면 사라진다. 조금 과장해서 가끔은 이 연결음이 1분 넘게 지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상대방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연결음을 들을 때가 더 반가운 경우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라는 메시지를 듣는 순간 마음의 평온은 불안으로 뒤바뀐다. 여유는 긴장으로 전복된다. 이때부터 갖은 추측과 끝없는 공상에 시달린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여 내가 너무 늦은 시각에 전화를 한 건 아닌지, 별의 별 이유를 찾으려 든다. 당황한 나머지 소리샘으로 연결돼 무심결에 녹음이 될 때도 있다. 대개 상대방에 대한 미련과 애착이 강한 경우다.

 

통화 연결음의 속도는 절대적이지 않다. 좋아하는 이의 연결음은 언제나 빠르다. 반면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이의 연결음은 한없이 느리게 지나간다. 이기적인 마음은 언제나 주문을 왼다. 좀 더 느리게 혹은 좀 더 빠르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세분화되는 만큼 연결음의 속도는 상대적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더 빨리 연결음이 흘러가고, 싫어하는 이의 연결음은 속절없이 느리게 지나간다. 상대방에 따라 연결음의 속도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정말 슬픈 것은, 연결음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다.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약간의 참을성만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상대방이 전화를 걸 때 유심히 전화기를 지켜보라. 30초도 되지 않아 벨소리가 끊어진다면, 또 그 과정이 여러 번 목격된다면, 당신의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은 일치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그게 이성 관계든, 썸이든, 친한 친구 사이든 상관없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른다. 이건 법칙이 아니다. 단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들로부터 도출된 하나의 인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듯, 연결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변한다. 연결음을 애타게 세며 기다리던 마음은 금세 식어버리고, 귀찮기만 했던 연결음이 간절해질 때가 있으며, 무의미했던 연결음이 한 움큼 의미 있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때로는 위기로, 때로는 기회로 다가오는 연결음의 변화. 이 순간을 부여잡든, 놓치든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꺼져버린 전화기는 응답이 없다. 울리지 않는 연결음처럼 공허한 것은 없다. 당신은 연결할 준비가 되었는가.

 

* 사진출처: businessins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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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그 어젠다의 정치적 결말은 무엇이었나?

 

2009년 국무부가 이란의 녹색 시위[각주:1]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일면에 실렸다. 다른 나라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던 트위터가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의 선거 이후 이란에서 시위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을 때 웹사이트 점검 계획을 결정하자, (비록 트위터를 이용하는 이란인 수는 꽤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트위터 커뮤니티의 분노를 유발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때, 코엔은 트위터 최고 중역 중 한 사람에게 점검을 늦춰달라고 요구했고, 그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에 새어나갔다(혹은 넘어갔다). 그 사건은 이란 선거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읽힐 수 있었기 때문에, 코엔이 백악관과 마찰을 빚었다는 후문이 보도되었다. 그 사건 이후, 당시 에피소드는 미국 정부가 최소한 신흥 미디어 사용에 관여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었다. 실제로, 직업 외교관은 이 모든 것들을 싫어했다. 누군가는 이 두 젊은이들이 미국 외교 정책을 오로지 디지털을 기반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장문의 블로그 포스트를 쓰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는 실리콘 밸리가 단지 미국무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 이란, 중국 등의 국영 매체에서 인용되었다. 러시아에선, 미국 인프라American infrastructure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정부 부내를 소집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급작스레 과두제 집권층들은 러시아 인터넷 기업들의 소유주를 매수하기 위해 크렘린Kremlin 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만약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 저항을 촉진시킬 위험이 보이면 내용을 삭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어느 정도 아랍의 봄the Arab Spring의 결과가  『넷 딜루전』을 입증한다고 보는가?

 

좀 더 확장해보자. 비록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단 하나의 메시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독자들 중 일부는 내가 인터넷은 불가피하게 시위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을 다스리는 식으로 정부의 편에 설 것이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내가 인터넷은 피상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주의를 야기했으며, 실질적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 의해 묵살당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디지털 기술의 특정 양상은 사회적 움직임에 기여할 것이며, 다른 양상은 움직임을 억압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다.─이러한 경향 중 어떤 것이 지배적일지는 대부분 한 국가의 정치적 역학에 의존한다. 또한 나는 이런 기술들에 대한 유명 담론이 세 가지 현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기술들은 무엇보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적 기업들에 의해 운영 된다는 점. ‘인터넷 자유화’라는 슬로건들이 낡은 외교 정책의 고려사항들considerations을 갑자기 사라지게 하진 않는다는 점. (그에 대한 미국의 매혹은 냉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유토피아적인 등장은 미국 정부 스스로 온라인에서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사이버공격, 감시, 정보 조작spin)과 조화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아랍의 봄은 내 예감의 상당수가 사실임을 보여줬다. 우리는 서양 정권이 리비아와 이집트에 감시 기술들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 만약 군정과 겨룰 만한 지속적인 정치구조를 광장 밖에서 형성하지 않는다면, 사회 연결망에 의한 수평적 움직임의 용이함은 제한적인 도움만 줄 뿐이라는 것, 아랍의 봄에서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역할에 대해 널리 퍼진 찬양이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이 온라인 자원에 대한 지배를 한 층 더 팽팽하게 하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디지털 시위의 새로운 형식의 도래로서 아랍의 봄에 대한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정교한 미디어의 사용이 지적인 해방과 인권에 대해 높은 존중 따위로 이어지리라 믿게끔 했던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의 갱신된 버전에 불과했다. 이것이 넌센스라는 걸 보여주기에는 ISIS의 미디어 전략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의 관점에서 현재 인터넷의 소유구조는 어떠한가?

 

나는 그 구조 전체의 복잡한 지도를 그려보지 않았고, 현재 대부분의 작업은 ‘인터넷’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에 맞춰져있을 뿐이다. 하지만 기업들에 대해 말하자면, 명백히 하드웨어에서부터 소프트웨어까지 압도적으로 미국 기업이 많다.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적잖은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의 운영체계─안드로이드─는 구글의 것이다. 이제 다른 물음이 떠오른다. 안드로이드는 오픈소스[각주:2]지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대다수는 미국에 본부를 둔 기업이 공급한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클로즈드 소스보다 낫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안드로이드가 구글에 의해 운영되고, 구글 소유의 다른 제품들과 통합되어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편익을 줄인다. 그 결과로, 여전히 미국의 거대한 한 기업이 트래픽과 데이터의 상당량을 지배하고 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걸었던 초기의 희망은 국가안보국과 같은 기관에 취약해질 수도 있는 코드에서 ‘비밀문backdoor’을 찾기 위해 그것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거대한 익스플로잇 공격exploits[각주:3] 시장이 있다는 걸 안다. 돈만 있다면, 당신은 심지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라도 익스플로잇 공격을 할 수 있다. 누구에게 돈이 있을까? 물론, 국가안보국이다.

 

자유로운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선, 최소한 해커 대 감시자의 고양이와 쥐 게임cat-and-mouse games이 가능하지만, 애플처럼 폐쇄된 체계에서는 국가안보국 같은 기관들이 당신의 데이터에 접근하는지를 알 방도가 없다.[각주:4] 이런 구분이 아직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제 이 상황을 평가하기 위한 규범적 기준에 대해 명확하게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 만약 그러한 질문이 단지 사적인 차원이라면, 물론 오픈 소스가 훨씬 낫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엄청난 개인정보의 저장소에 접근할 수 있는 구글과 같은 회사가 확장을 계속하고, 21세기 인프라의─건강, 교육 등에서─초기 공급자가 되기를 우리가 원하는지에 대한 이슈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그 서비스 중 일부가 애플에 비해 스파이 활동에서 좀 더 안전하다는 사실은 그러한 우려와 관련 없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미국 거대 기업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초국가적인 방법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는 나를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국가들 혹은 정부들에 그들(미국 거대 기업 – 옮긴이)에게 덜 타협한 대안으로서less compromised alternatives to them 독자적인 기업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라고 장려한다.

 

스노든Snowden 이후, 여러 해커들은 특히 정부 스파이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들에겐 그것이 문제다. 그들은 시민 자유 옹호자civil libertarians이며, 시장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른 해커들은 검열과 관련 있다. 그들에겐,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자유가 중대하며, 표현이 기업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노든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지만, 취약한 보안 업무를 가진 기업을 없애고, 높은 수준의 투명한 관리, 의무와 함께 국가안보국에 대한 더 엄격한 감시를 한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실리콘 밸리와 좋은 관계로 지낼 것이다. 개인적으론 국가안보국이 우리의 시민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 모르는, 실리콘 밸리의 재력means으로 자본이 일상에 침식해 들어오는 것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이 어젠다─그리고 그것은 여러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했다─를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노든의 개인적인 제안들은 여전히 법률을 엄격히 따른다. (스노든에 따르면 – 옮긴이) 만약 우리가 단지 미국 법률 체계에서 견제와 균형의 다섯 단계를 더 설립하거나, 대중public에 의해 잘 통제되는 법정을 구성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시장에 대한 더 무거운 정치적 질문이나 소유라는 이슈는 건드리지 않는다. 최근 작업에서, 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에게서 뽑아간 데이터는 구글, 애플 그리고 다른 회사들의 대차대조표에 반영되는 대로 엄청난 가치를 갖는다. 맑시스트의 입장에서 이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당신이 광고를 하나 볼 때 누가 누구를 위하 일하고 있는가? 왜 구글이나 애플이 초기 소유주여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이 데이터를 감시하고monitor, 모으고, 팔기를 강요받고 있는가? 이것은 어느 정도로 일상의 금융화에서 새로운 분야가 되고 있는가? 시민적 자유의 측면에선 그러한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

 

 

<원문> p. 52-55

 

What was the political upshot of this agenda?


In 2009 the tale of the State Department’s help to the Green protests in Iran got front-page treatment in the New York Times. The official story was that Twitter, not knowing much about what was happening in other parts of the world, decided to schedule maintenance of their website just as protests were brewing in Iran after the election of Ahmadinejad, triggering outrage within the Twitter community (though how many Iranians were using Twitter was much exaggerated). At this point, Cohen asked one of Twitter’s senior executives to delay their maintenance, and the story leaked (or was passed) to the New York Times. Later it was reported that Cohen got into trouble with the White House, because this could be read as American intervention in the Iranian elections. After the event, the episode was spun to suggest the us government was at least in touch with emerging media use. Actually, career diplomats hated all this. Some wrote long blog posts complaining that these two youngsters were running us foreign policy on all things digital. The episode was used by state-owned media in Russia, Iran, China and elsewhere to prove that Silicon Valley was just an extension of the State Department. In Russia, you heard the first calls in government circles for something to be done about Russian dependence on American infrastructure. Suddenly there were moves by oligarchs close to the Kremlin to buy out the owners of Russian internet companies, so that they could either be shut down or have content removed if they risked provoking any social protest.


How far would you see the outcome of the Arab Spring as a vindication of The Net Delusion?


To some extent. Many people took the book to carry a single message, even if they rarely agreed on what it was. One group of readers thought I was saying that the Internet would inevitably favour governments over protesters and dissidents; another that I was suggesting the Internet led to shallow, ineffective activism and could be dismissed by those interested in real change. Actually, my argument was that certain aspects of digital technologies are conducive to social mobilization, and others to suppression of mobilization—which of these tendencies predominates largely depends on the political dynamics in a country. I also wanted to make clear that popular discourse about these technologies was completely disconnected from three realities: that they are operated by private companies interested, above all else, in making money; that slogans like ‘Internet freedom’ have not made old-style foreign policy considerations suddenly disappear (American fascination with them has its roots in the Cold War); and that their utopian appeal cannot be squared with most of the things (cyber-attacks, surveillance, spin) the us government itself was doing online.


So the Arab Spring did confirm many of my hunches. We learnt that Western companies were supplying surveillance technologies to Libya and Egypt; that the ease of horizontal mobilization afforded by social networks is of limited help if it doesn’t generate more lasting political structures that can contest the military rule outside the squares; that widespread celebration of the role of Twitter and Facebook in the Arab Spring led Russia, China, and Iran to take further steps to tighten control over their own online resources. Much of the talk about the Arab Spring as the arrival of a new style of digital protest, in fact, was an updated version of modernization theory, inviting us to believe that the use of sophisticated media leads to intellectual emancipation, greater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so forth. One look at isis’s media strategy is enough to show that this is nonsense.

 

What in your view are the current ownership structures of the Internet?


I haven’t developed a complex map of the entire stack of these, and much of my current work is on the ambiguity of this term, ‘the Internet’. But obviously, from hardware to software, if we are speaking of companies, these are overwhelmingly American. Samsung may have a respectable share of the smartphone market, but its operating system—Android—is Google’s. Which raises a further question. Android is open-source, but a lot of open-source software is provided by companies with headquarters in the us. Open-source software is no doubt better than closed-source, but the fact that Android is run by Google, and integrated with other products that Google owns, lessens the benefits of this. The outcome is still one giant us company in control of a vast amount of traffic and data. The initial hope with open-source software was that anyone could examine it for any ‘backdoors’ in the code that might make it vulnerable to agencies like the nsa. But we know that there is a huge market in exploits.4 If you have the money, you can exploit even open-source software. Who has the money? The nsa, of course.

 

With free or with open-source software, at least cat-and-mouse games of hacker-versus-surveiller are possible, whereas with closed systems like Apple’s there’s little way of knowing what access organizations like the nsa might have to your data.5 Shouldn’t one still make this distinction?


This is where we need to be explicit about the normative benchmarks by which we want to assess the situation. If the question is just privacy,then of course open-source is far better. But that doesn’t resolve the issue of whether we want a company like Google that already has access to an enormous reservoir of personal information to continue its expansion and become the default provider of infrastructure—in health, education and everything else—for the twenty-first century. The fact that some of its services are a bit better protected from spying than Apple counterparts doesn’t address that concern. I’m no longer persuaded by the idea that open-source software offers a kind of transnational way of escaping the grip of the American behemoths. Though I would still encourage other countries or governments to start thinking about ways in which they can build their own, less compromised alternatives to them.


Since Snowden, a lot of hackers are especially concerned with government spying. For them, that’s the problem. They’re civil libertarians, and they don’t problematize the market. Many others are concerned with censorship. For them, the freedom to express what they want to say is crucial, and it doesn’t really matter if it’s expressed on corporate platforms. I admire what Snowden did, but he is basically fine with Silicon Valley so long as we eliminate firms that have weak security practices and install far better, tighter supervision at the nsa, with more levels of transparent control and accountability. I find this agenda—and it’s shared by many American liberals—very hard to swallow, as it seems to miss the encroachment of capital into everyday life by means of Silicon Valley, which I think is probably more consequential than the encroachment of the nsa into our civil liberties. Snowden’s own proposals remain very legalistic: if we can only establish five more stages of checks and balances within the American juridical system, and a court that is better controlled by the public, everything will get better.


These debates don’t touch on issues of ownership or bigger political questions about the market. In my more recent work, I’ve argued that we don’t yet know how to address these. The data extracted from us has a giant value that is reflected in the balance sheets of Google, Apple and other companies. Where does this value come from, in a Marxist sense? Who is working for whom when you view an ad? Why should Google or Apple be the default owners? To what extent are we being pushed to monitor, gather and sell this data? How far is this becoming a new frontier in the financialization of everyday life? You can’t address such matters in terms of civil liberties.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6/Evgeny_Morozov_at_re-publica10.jpg

  1. 이란의 녹색 운동은 시위자들이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의 퇴진을 요구하던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 이후에 발생한 정치적 운동을 일컫는다. (옮긴이) [본문으로]
  2. 어떤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 필요한 소스나 설계도를 누구나 접근 해서 열람 가능하도록 공개하는 것. 보통 소스가 공개된 소프트웨어를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고 하며, 소프트웨어 말고도 개발 과정이나 설계도가 공개되는 경우 하드웨어에도 오픈 소스 모델이 적용 가능하며, 글꼴과 같은 데이터에도 오픈 소스 개발 모델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옮긴이 – 엔하위키 미러) [본문으로]
  3. 익스플로잇 공격exploit: 기술적 버그나 취약성을 이용하는, 예를 들어 겨냥한 장비를 장악하는 기술을 나타내는 컴퓨터 보안 용어. [본문으로]
  4. 여기서 ‘해커’라는 용어 사용은 DIY 실험주의의 함축적 의미를 지닌, 기술적 하위문화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 용어는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으로 엑세스하는 ‘크래커들crackers’을 의미하는 팝문화적 사용과 구별되어야한다. (쉽게 말해 해커는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크래커는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다. - 옮긴이) [본문으로]

광고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만한 지식은 고사하고, 과제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매력 있는 전공입니다. 

한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광고는 무엇일까요?”

 

누구는 표현이라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예술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광고는 프로포즈(Propose) 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브랜드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 자고 일어나면 경쟁사가 아메바처럼 늘어나는 그 세상에서 광고는 시청자에게 애절하게 “Buy me" 혹은 “Use me"라는 프로포즈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기구한 운명입니다. 15초 안에 혹은 흑백 지면 안에서 누군지도 모를 이에게 설득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광고는 그 운명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광고는 그 ‘프로포즈’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TV와 신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보면 억척스럽기까지 합니다.

 
광고를 보다 보면, 앞서 말씀드린 ‘프로포즈’를 공공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의 냉장고 광고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90년대 후반까지 냉장고 광고는 주로 ‘우리 기술이 최신식 기술이다.’ 혹은 ‘우리가 제일 잘 만든다.’라는 어필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 대우는 ‘탱크’라는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탱크처럼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보겠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 대우의 광고는 유수의 석학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증명인 셈이죠. ‘이렇게 박식한 전문가가 직접 우리 냉장고를 만든다.’라는 메시지로 시청자에게 품질의 신뢰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 같습니다.


대우냉장고의 광고 ‘탱크주의’ [1994-1995]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고등어 지못미ㅠㅠ) 삼성냉장고 ‘문단속’ [1995] (출처 : 네이버블로그)


삼성전자도 맥락은 비슷합니다만, 얼핏 보면 품질에 안달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회전냉각방식’이라는 신기술을 어필하긴 했지만, 도입부부터 한가롭게 고등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여유롭기까지 합니다. 명색이 삼성전자니까 여유를 부려본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마지막 컷이 반전입니다. ‘세계 1등 제품만 만들겠습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삼성전자 로고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이제는 국내에서 더 나아가 세계에서도 1등을 하겠다는 포부를 한 문장에 다 담은 것입니다. 이미 브랜드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상태이기에 획기적인 새 시도보다는, 이미 각인된 브랜드를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한 것이죠. 더욱이 반도체로 자사 이름을 날리던 시기이기에 ‘기술’이란 키워드에 더욱 자신감을 내보였습니다. 이렇게 맥락은 조금씩 달라도, 공통적인 결론은 ‘우리 냉장고는 다른 데보다 튼튼하니까(좋으니까) 한번 써봐’라는 프로포즈였던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런 식의 프로포즈도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냉장고 이야기를 계속해보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냉장고 광고의 주인공은 ‘주부’가 아니라 ‘여성’으로 전환이 됩니다. ‘신선해요’, ‘기술이 좋습니다’ 이런 컨셉에서, 한 여자의 삶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카피도 이때 쯤 등장합니다.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 (2000, DIOS)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냉장고가 이제 음식의 신선함만이 아니라, 여성의 삶까지도 안락하게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잘 만든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기술로 어필하느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자는 계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냉장고의 타겟을 주부라는 것에만 주목했던 과거와 달리, 가정의 주부에서 벗어나 개인이자 여성이라는 점을 내세운 점은 시대에 잘 부합한 광고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대부분의 냉장고 광고 모델은 지금까지도 화려한 여배우를 기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프로포즈에서의 경쟁에서, 누가 그 시대 소비자의 마음을 빼앗느냐가 승부가 갈리는 것입니다.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경쟁하는 광고는, 어찌보면 치열한 일종의 스포츠 경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시에 자본 간의 경쟁에서 꽃피운 하나의 예술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네요. 그 치열한 이야기, 혹은 주목 받지 못했지만 개성 있는 광고들을 이제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딱딱한 전공서적을 볼지언정, 여러분들에게는 재밌는 광고들을 전달해드리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주로 한국 광고(TV-CF, 신문 지면광고)들에 대한 컨텐츠를 전할 생각입니다. 이유는 여러분들이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이면서, 광고와 함께 당시 시대상과 사회 모습을 곁다리로 짚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광고라고 쓰겠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스쳐간 추억으로 읽을 수 있는 글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밌는 광고는 많습니다. 그걸 찾아서 재밌게 ‘썰’을 풀어내는 게 저의 몫이겠죠.
조만간 다시 글로 뵙겠습니다. 그저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봄의 시작은 으레 우리들에게 설렘과 기대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청소년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에게 봄은 곧 새 학년, 새 학기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몇 반이 될까,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될까, 또 어떤 선생님이 내 담임 선생님이 되실까. 아이들은 이런 설렘을 안고 3월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더구나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있어서 기대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급식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에게 점심시간 1시간 남짓은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청소년들에게 없어선 안 될 ‘점심’을 놓고 경상남도에선 논란이 한창이다. 작년 11월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그동안 실시했던 무상급식을 중단한다는 입장 발표에서 불거졌다. 당시 홍 지사는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무상급식은 포퓰리즘 정책”, “나의 초중고 시절에는 물로 배를 채웠다”라며 개인적 경험을 섞어 비난했고, 또 “학교는 밥을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비난도 퍼부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을 하나하나 따져보도록 하자.

 

먼저 홍 지사와 경남도청은 경남의 열악한 지방재정을 무상급식 중단의 이유로 들었다.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경상남도는 지난 3월 1일 재정공시 발표에서 무려 1,561억 원 ‘흑자’라고 밝혔다. 이는 전국 광역도의 평균 흑자 규모가 89억 원인 것을 감안하면 경상남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재정 흑자 규모를 자랑하는 수준인 것이다. 또 2015년 올해 기준 경남 지역 무상급식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비용 1125억 원 중 경남도청이 부담할 액수는 257억 원에 불과했다. 이에 따르면 홍 지사의 열악한 지방재정 때문에 중단한다는 주장은 결코 앞뒤가 안 맞는다. 흑자 규모로만 놓고 보면 경남도청이 전부 무상급식을 부담하고도 남는 상황에서 홍 지사와 경남의 그러한 주장은 속이 뻔히 보일 정도로 얄팍하다

 

<지난 2010년 경기도의 한 초등학생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 유성호 오마이뉴스>

 

다음으로 홍 지사는 무상급식이 포퓰리즘 정책이라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먼저 ‘무상급식’이라는 용어의 수정이 필요하다. 현재 시행하는 무상급식은 말 그대로의 공짜 점심이 아니다. 우리들이 납부하는 세금에서 그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초중고 의무교육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 누구라면 교육 받을 의무가 있다. 그래서 의무적인 교육현장에서 ‘의무(적인) 급식’은 필수로 따라오는 것이다. 학생들이 집 외에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학교다. 그런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건 국가와 정부의 책무 아니겠는가. 이렇게 당연한 것을 두고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을 운운하며 정쟁으로 이끄는 건 아이들 앞에 부끄러운 짓이고, 또 타당한 이유도 될 수 없다. 무상급식은 학생들의 복지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낱 표 하나 얻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 아니다.

 

오늘날 무상급식은 지난 2010년 지방선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돼 왔다. 당시 선거에서 무상복지(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는 최대의 화두이자 획기적인 정책의제였다. 이 공약을 내세운 많은 야권의 광역단체장(각 도지사, 시장)과 교육감 후보들이 당시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었다. 국민들이 얼마큼 소득의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고 있고, 또 그로 인해 얼마나 복지의 필요성을 느끼는지 알게 해준 선거였다. 복지가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는 걸 당시 선거 결과가 증명해준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 이듬해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시행을 놓고 당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과의 입장 차이와 이견 마찰 때문에 결국 서울에서는 주민투표까지 실시하게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지만, 33.3% 이상의 투표율을 기록하지 못 하여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 하고 끝나버렸고, 오 시장은 약속대로 시장직을 내려놓았다. 만약 선거 이후 1년이나 지난 그 시점에서 무상급식에 대한 불만 여론이 대다수 시민들에게 존재했다면 고작 투표율이 그만큼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경남의 경우도 그렇다. 지난 3월 중순 경남CBS와 리얼미터가 ‘경남 무상급식 중단’과 관련해 경남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잘못한 결정이다’란 의견이 59.7%로 ‘잘한 결정이다(32.0%)’란 의견보다 두 배 가량 높은 것으로 나와 무상급식 중단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홍준표 지사는 이런 결과와 대다수 주민들의 직접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도민들에게 ‘종북’이라 표현까지 쓰며 비난하며 주민들의 바람을 어긴 채 독단적인 행정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종북이라니,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두고 종북으로 매도하는 행정가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도지사선거에 나와 무상급식에 대한 찬성 입장을 내비췄고, 취임사에서도 무상급식에 대한 당위성과 타당성을 주장했던 사람이 저렇게도 비열하게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변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경남의 무상급식 중단 결정을 전해들은 함양의 한 초등학교 4학년생이 쓴 일기가 화제다.
ⓒ 경남도민일보>

 

결국 4월 1일부터 경남은 도의회 의결을 거쳐 전면적인 무상급식 중단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많은 학생과 다자녀 가정이 당장의 예상치도 못 한 심적, 금전적 부담을 지게 생겼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일기 하나가 있었다. 경남의 한 초등학교 4학년생이 쓴 것으로 그 내용엔 무상급식 중단으로 고통 받을 부모님에게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그 일기를 들여다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 이제 급식비를 내야한다. … 계속 그 생각을 하면 부모님께 되게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하루하루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다. 나라도 안 태어날 걸...... … 엄마, 아빠한테 미안해서 잘 때도 편히 못 자고 그래서 너무 마음이 힘들고 속상하다. 어떨 땐 난 내가 죽고 싶기도 하다. 너무 힘들다.”라고. 나의 고등학생 시절 급식 지원 대상자였던 나와 내 친구들이 수업 도중에 담임선생에게 복도로 불려나가 일렬로 세워진 채로 가난을 증명할 서류를 준비해오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비참함과 창피함의 순간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저 아이는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급식비 부담 때문에 인생의 좌절감을 느낀 것이다. 왜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고작 이런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게끔 만들어야만 하는가.

 

무상급식, 아니 의무급식의 시행의 유무는 고작 액수나 정치적인 이해타산으로 결정할 부분이 아니다. 의무급식 하나로 인해 많은 학교-학생 사회에 비용 이상의 긍정적인 효과를 안겨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과 친구들 사이의 차별이 사라지고 동등한 관계가 되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급식을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가난을 증명해야 했던 학생들에게 의무급식이라는 좋은 제도가 그들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보듬어줄 것이다. 또 가난이란 낙인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의무급식이 지금의 학생들에게 학생으로서의 권리란 측면에서 더 나아가 미래에 국가로부터 마땅히 권리를 보장받을 사회의 주체라는 인식 또한 심어줄 것이라 기대해 의심치 않는다. 이처럼 의무급식은 단순히 밥 주는 것, 밥 먹는 것의 이상의 교육적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초, 중, 고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그마한 교실에서 고생하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편히 먹는 밥 한 끼는 큰 위안과 행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결국 무상급식(=의무급식)을 중단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의무급식이 갖게 될 의미와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의무급식은 복지가 더 이상 국가가 가난한 이들에게만 베풀어준다는 시혜적 개념이 아니라, 국가가 차별 없이 동등하게 전체 구성원들에게 마땅히 지급하고 국민들은 마땅히 누려야하는 ‘권리’의 개념으로 인식의 저변 확대를 이끌어내는 데 제 역할을 해줄 것이라 본다. 이제 홍준표 지사처럼 사회적으로 철 지난 정치이념적, 성장론적 복지논쟁을 일으키는 건 그만두어야 할 때다. 실질적인 복지는 행정가와 정치가들이 얼마큼의 의지와 철학의 밑바탕을 갖추느냐에 따라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앞서 말했듯이 보편적, 제도적 복지는 우리나라에서 역시 시대적 요구이자 권리로서 자리해나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홍 지사의 본래 입장대로 도정 예산이 부족한 것이 무상급식 중단의 이유라면, 중앙정부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경남도민들의 복지 권리를 위해 재정문제와 지방분권을 놓고 맞서 싸워야 할 일이지, 오히려 도민들의 권리를 합의 없이 빼앗는 건 행정가로서 절대 옳지 못 하고 비겁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는 홍준표 지사가 경남도민들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고품격’의 도지사인지, 또는 ‘싸구려’ 도지사인지 둘 중 어떻게 평가 받느냐는 온전히 본인의 올바르고 현명한 결단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난 우유를 좋아하지만 두유도 좋아해. 어쩌면 두유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카스텔라, 쿠키와 함께 먹는 우유는 정말 맛있지만, 마시고 나면 입안에 끈적끈적한 것이 자꾸 입 안에 맴돌아. 배가 살살 아픈 날에 차가운 우유를 마시면 몇 시간동안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고생을 하지. 하지만 두유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아. 우유보다 고소한 맛도 나고, 마시고나서 입 안에 남는 것도 없고. 사람들은 우유와 두유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식품이라고 생각할 진 몰라도 사실 그 둘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어. 우유牛乳는 소젖을 짜서 얻는, 한자 그대로 ‘소의 젖’이야. 하지만 두유豆乳는 물에 불린 콩을 다시 물과 갈아서 만든 음료지. 우유가 동물에게서 얻는 다면 두유는 식물에게서 얻는 거야. 그런데 이상한 건, 두유가 영어로 소이밀크라는 거지. Soy-Milk. 콩-우유. 나는 그래서 두유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어. 두유는 콩의 젖을 짜서 얻는 게 아닌데 왜 milk라는 어미가, 乳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는 걸까. 콩을 짜냈으니 두유豆油가 맞는 것 아닐까? 처음에 두유를 만든 누군가가 소이밀크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실수였던 게 분명하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인디언, 이라고 불렀듯이 말이야.

 

채식주의자들은 두유를 더 좋아해. 내가 알기로는 채식주의자는 종류가 둘 있는데, 세미(?)채식주의자들은 계란이랑 우유까진 먹어. 하지만 프로(?)채식주의자들은 계란이랑 우유조차 먹지 않아. 고등학교 때 원어민 영어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프로채식주의자였어.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을 안 먹고 늘 빵과 샐러드로 점심을 싸와서 먹었지. 하루는 그 사람이 빵을 먹고 있을 때 우리 반 여자애가 그 선생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점수를 잘 받을 요량이었을 런지는 몰라도 딸기우유를 하나 매점에서 산 뒤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고 있던 그에게 우유를 내밀었어. 하지만 그 교사는 우유팩에 적인 ‘milk’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손을 내저으며 단박에 거절을 하더라고. 여자애는 자신이 사온 딸기우유의 빛깔처럼 얼굴이 빨개졌지. 수업시간에 좀 더 집중을 했더라면, 그 원어민 교사가 첫 시간에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하는 걸 들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민망해져 있는 여자애를 뒤로 세우고, 내가 쉬는 시간에 마시려고 사두었던 두유를 내밀었어. 그리곤 이렇게 말했지. “하우 두유 두?”

 

나는 두유종류를 많이 알아. 이십 년 전에 처음으로 두유라고 인지하고 먹었었던, 가위로 모퉁이를 잘라낸 뒤 그 사이에 작은 빨대를 꼽아 마셨던 삼육두유, 목욕탕에서 아빠와 나오면서 사먹었었던 순두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구가 사온 고소한맛이 진했었던 검은콩 두유, 그리고 베지밀. 특히, 베지밀은 종류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플레인 요구르트같이 담백한 맛이 나는 베지밀 에이가 있어. 이건 아침에 식사대용으로 바나나랑 같이 갈아서 마시면 맛있지. 그냥 마시기엔 좀 밋밋하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유인 베지밀 비. 에이와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달콤한 맛이 나는 그 두유에는 분명히 당성분이 추가적으로 들어갔을 거야.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온장고에 있던 베지밀 비를 천원을 주고 사마셨을 때, 나는 아직도 그때의 따뜻함을 잊지 못해.

 

이렇게 나는 좋아하는 두유가 많지만, 그래도 내가 우유를 찾는 이유는 내가 두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 하나와 관련이 있어. 두유는 왜 우유처럼 여러 가지 맛이 없을까? 더 이상 다른 맛은 낼 수 없는 걸까? 그게 제일 걱정되고 궁금해. 우유는 초코, 딸기, 바나나, 메론, 커피... 이 밖에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두유는 기본 맛, 달콤한 맛, 검은콩 딸랑 세 가지 밖에 없더라고. 언젠가 두유계의 에디슨이 나와서 맥주 종류만큼이나 많은 두유를 맛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Prologue : 이마트에서 쿨피스 파인애플 맛을 산 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파인애플 우유는 없을까? 포도 우유는 왜 없으며 딸기 두유는? 그리고 커피 주스는 왜 없는지. 그러다가 정류장 옆으로 외국인이 다가왔다. 그는 일 리터짜리 베지밀 두유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 사진출처: 구글 검색(http://www.seehint.com/r.asp?no=11301)


 

그저 세상이 이래야 한다고 혼자만의 틀에 갇혀 공상만 하다가 내가 그리는 세상을 칼럼으로서 표현할 소중한 기회를 또 얻게 되었다. 전에 활동하던 연구소에서 는 10여 편의 칼럼을 썼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가진 자들의 기득권에 자발적으로 추종하는 일부 20대의 '기득권 코스프레'를 우려하였고, 싸가지와 버르장머리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논리적 결함, 천박한 지적수준을 만회하려는 사람들이 줄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싸가지 없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복지수혜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아직 농경시대에 머물고 있는 가족의 개념을 재정립할 것을 외쳤으며 취업이나 공무원 채용에서 역차별 받는 서울 젊은이들을 위해 수도권 역차별을 역설하였고, 이 시대 마지막 남은 '공정한 사다리'인 행정고시를 지키기 위해 펜을 들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비핵화를 주장한다지만 실상은 핵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패권체제를 유지하려는 핵 강대국들의 기만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명하에 국제 스포츠계의 부당한 권력관계와 지구촌의 인권침해와 인종차별에 침묵하는 올림픽의 위선을 꼬집었다. 이외에도 여성, 대학, 법, 언어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최대한 객관적인 프레임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려는가?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심각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재미있으면 장땡이니 진지빨지마라?”

 

'국제시장'이나 '엑소더스'같이 민족 간의 과거사 문제, 한 국가 안에서 세대와 이념 갈등을 촉발시킬 수 도 있는 소재가 영화에 표현되어 각 집단 간의 대립이 심화되어가는 요즘이다. 갈등과 대립에 신물이 난 누군가는 '영화는 영화로만 보자고 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왜 사람들이 ‘한낱 영화’를 가지고 다양한 집단이 치열한 대립을 하는지, 대립의 원인을 제공한 영화 속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무관심이 깔려있다. 객관적 조망자를 빙자한 무관심, 냉소주의는 이성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좀 더 깊이 보고자하는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킨다. 만들어진 과잉합의는 더 깊은 갈등만을 예고할 뿐이다. 스포츠도 스포츠로만 즐기자는 의견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EPL’(England Premier League)은 외국의 자본과 용병의 과도한 유입으로 인해 자국 유망주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또한, 지역 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의식과 순수한 팬心으로 유지되던 구단들은 팀의 전통과 정체성이 외국인 갑부 구단주의 입맛대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해당 지역 골수팬들은 시장논리에 어느덧 이전보다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고장 팀의 경기관람을 소비할 수 있다. 이렇듯 그럴싸해 보이는 외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 이면을 들추어 내는데는 적지 않은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한다. 스포츠를 이렇게 정치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분석한 기사에는 으레 “어쨌든 EPL이 제일 재미있으니 장땡이다.” 따위의 댓글이 수두룩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면을 들추는 데는 귀찮으니 진지하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지적한 문제에 대해 갈등과 반론을 부담스러워하는 풍토속에 정상적인 비판과 대화의 순기능은 상실된다. 그 자리를 흥미로 대변되는 엔터테인먼트 적 요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냐?”식의 문화상대주의를 빙자한 방관, “그런다고 어쩔 건데?”류의 냉소주의가 메운다. 그저 "그냥 나에게 이득이면 그만인 거고, 내가 볼 때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것이다. 재미와 흥미라는 쾌락적 요소에 결국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과 우리가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회문제는 등한시된다. 사실에 기반을 둔 정교한 논리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을 치밀하게 가려야 할 문제들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대세 앞에 그러한 행위는 “정치적이다, 혹은 아는 체한다.”라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소위 "진지빠는 사람은 성가신 존재,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심지어 X선비'라는 저급한 표현도 감수해야한다. 하지만 문제의 어두운 이면을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장차 우리가 당면할 잠재적 사회 문제들이 당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이것은 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도망가거나 맞서기는커녕,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서 머리만 땅 속에 처박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부정하려는 타조의 습성과 같다. 눈을 감고 위기를 애써 부정한다고 해서 눈앞의 사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진지빨고" 세상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지 빨길 거부하는 집단, “우리는 너무나 안녕하다.”

 

이성이 통하는 보통 시민사회에서 논리나 팩트를 충족하는 주장으로 상대방을 설득한다면 언젠가는 내 주장의 반대자들도 수긍할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성과 논리의 잣대로 누군가를 그럴듯하게 설득하기는 몹시 어렵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때문에 정부의 복지 지출이 축소되고 최저임금이 동결되거나 누군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우리 모두가 매스 미디어의 횡포에 맞서 궐기해야한다고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기는커녕 그런 자들을 염세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자신은 지금도 인생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너무나 안녕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녕한 사람들’이 정말 풍족한 삶을 살고 있거나 이미 달관하여 분수에 맞게 안분지족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시대의 변화가 가져오는 위기에 둔감하거나 거시적인 담론 혹은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어떤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해도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자기는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호언장담하는 ‘지나친 자조주의자’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후자 유형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위적 슬로건에 진저리를 친다. 작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에 맞서 “우리는 안녕하다.”로 응수하던 무리들이 전부 다 골수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정교한 논리와 만만치 않은 식견으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고 진지하게 반박한다면야 의견은 다를지언정 그 사람은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은커녕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왜 분출되었을까 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들이 진지빨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그저 단순히 치기어린 한 때의 철부지 행동으로 단정지어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이 누군가에게는 소위 잘난 체 하는 ‘깨시민 코스프레’를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지한 주장에 대해 저급한 비아냥거림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의 주장이 누군가의 타당성 있는 반론으로인해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되고 결국 사회는 진보하게 된다.’는 정반합 적 사회의 발전경로를 무시하는 반이성적 행위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인류 정신문명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거만한 태도로 지나치게 아는 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 역시 그다지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진지빨며 끊임없이 따져라, 요구하라, 개겨라.”

 

스물아홉, 주변으로부터 번듯한 직장과 현실적인 인생관을 갖추길 기대하는 나이이다. 누군가는 이제 뻘소리 그만하고 철좀 들라고도 한다. 철 들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부당함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철 든다는 것이라면 정중히 거절하겠다) 사회의 때 묻은 관행들에 익숙해져버려서 젊었을 적 순수한 열정이 넘쳤던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변절해버린 일부 386 선배들처럼 나도 어쩌다 출세의 동아줄을 잡을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먼 훗날 잘 나가는 어른이 되어 시대의 요구에 둔감해버린 흔하디흔한 아저씨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실이라는 명분으로 잘 포장해놓은 불의보다는 내 양심에 귀 기울이고 싶다. 현실이라는 날 선 사시미 앞에서 갓 내놓은 활어처럼 파닥파닥 거리며 보란 듯이 개기고 싶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잘 보이려고 쩔쩔매는 사람은 눈에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보다는 ‘잘 보이려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쉽다. 그리고 썩 매력적이지도, 진정성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어렵다. 그저그런 사람으로 잊혀지기 마련이다.

 

친하지 않아 어색하거나 혹은 너무 소중해서 조심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조심스러웠고, 잘하려고만 했고, 그래서 서로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모든 조심스러움은 상대방에게 편한함을 주기 힘들다. 그래서 결국 나라는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조금씩 착한 사람으로 비춰져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착하다는 말은 진정 칭찬인 걸까.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맞춰주는 것이 정답인 걸까. 상대방과의 관계는 중요한 것이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적당한 배려는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나라는 사람이 존재해야 배려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배제된 배려는 그저 감정의 소모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지는 게 먼저다. 화가 날 땐 화를 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마음에 이미 ‘화’가 나있음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배출하지 못하고 억누르는 것은 좋은 해결방안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을 듣기위해 자신의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나 자신이 정말 화가 나지 않은 건지, 화를 낼 용기가 없는 건지 생각해 봐야한다.

 

거짓말 하는 것만이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다. 자신을 포장하는 행위도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나 자신의 어느 부분을 숨기는 행동이다. 숨기려고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이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잘 포장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어쩌면 호감을 살 수 있을 까’, ‘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면 사랑받지 못하지 않을까’ 이러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들이 삶을 가로막고 있다. 사실 자신을 적당히 포장하는 것은 쉽다. 나인채로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감정들을 남의 기분에 맞춰 적당히 흘려보내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착한 척, 괜찮은 척 시간을 보내다 보면 상대방은 ‘쟤는 이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지나친다. 자신의 마음을 곪아가고 있는데 상대방은 아무 일 없는 줄로만 까맣게 모르게 되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굳이 집요하게 알아줄 사람은 없다. 말을 꺼내야만 자신의 감정 또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고, 착한 게 중요한 것처럼 배우고 자란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와 상황에 따른 배려’ 만이 존재하면 된다. 착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착하다는 말을 들으며 남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얻는 것이다. ‘착함’은 용기 없는 사람이 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속에서 화를 삭히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나의 감정이다. 표현만이 진정한 자기 위안이 된다.

 

몇 년 전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난 착한 게 아니라 나빠질 용기가 없는 거지.’ 라고. 그때 난 이렇게 생각했다. 그 ‘나쁨’ 이 화낼 때 화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이라면 ‘나쁜 너도 나는 좋다’ 였다. 서로가 마음에 조용히 화를 담아두면 조용히 멀어진다. 그 보다는 관계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건강한 방식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만남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영화 <화장>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주관적인 영화 감상을 즐기는 나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평에도 불구하고(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젊은 여성과의 불륜 영화로 착각하고 있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시사회 당첨 문자를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원작 단편이 들어있는 김훈의 <강산무진>의 구입이었는데, 보통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원작을 감상하던 나로서는 책을 먼저 읽고 간다는 것은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다른 단편보다 먼저 <화장>을 펴서 읽어 보았는데 소설은 담담하고, 깊은 맛을 내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의 표지는 고서를 생각나게 하는 황색이었고, 그 영향과 문장 때문인지 단편을 읽으며 잘 우러난 황차 한 잔이 계속 생각났다.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죽어가는 아내에 관련된 ‘화장(火葬)’과 젊은 여사원에 관련된 ‘화장(化粧)’에 대한 중년 남성의 시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단편을 읽고 나니 기대했던 고소한 황차의 느낌보다는 씁쓸한 황차의 느낌이 강했다. 약간의 먹먹함과 함께 죽음과 삶이라는 다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다가 영화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담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사회에서 감상한 영화 <화장>은 기대 이상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너무 충실한 나머지 일반 관객들은 밋밋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영화보다 소설 <화장>을 훨씬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영화와 소설이 보여준 두 가지 방식에 다 만족한다. 소설은 소설대로 텍스트와 장면을 상상하며 읽는 맛이 있었고, 영화는 영상미와 더불어 소설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상세한 내용까지 덧붙여서 다뤄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맛이 있었다. 유난히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많았고, 소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작은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다뤄지면서 나는 텍스트에서 느낀 먹먹함과는 또 다른 먹먹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다뤄지는 오 상무보다 영화에서 다뤄진 오 상무가 더 공감이 갔고, 왠지 모를 여운까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중점으로 뽑은 몇 가지 키워드로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려고 한다.

 


* 오 상무의 시선

 

[추은주를 응시하는 오 상무]


영화나 소설을 통틀어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 상무의 시선이었다. 삶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두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오 상무는 죽음의 가까운 삶을 사는 아내를 간호하며 화사한 추은주를 종종 응시한다. 누군가는 관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나는 오 상무의 이 시선을 응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응시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는 말 보다는 동경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선은 추은주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다소 감정적으로 변한다. 꿈과 환상 속에서 오 상무는 추은주를 응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시선과 태도로 그녀를 찾아다닌다. 물론 이것은 꿈과 환상 속일뿐 현실에서 오 상무는 부하 직원인 추은주의 점심 걱정을 하며 초콜렛을 챙겨주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오 상무의 시선 때문인지 추은주는 연신 아름다운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추은주를 연기한 김규리라는 여배우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생각이 연신 들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를 위해 촬영 감독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반대로 병중에 있는 아내의 모습은 자꾸만 바래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 역시 오 상무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로 오 상무는 점차 모든 일상에서 추은주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영화에서 추은주와의 회상 씬이 등장하는 장면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초기에 건강한 아내와의 장면도 많이 나오던 것과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아내는 병자의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오 상무의 상념 깊은 시선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상을 드나든다. 최근에 본 샘 에스마일 감독의 <코멧>이라는 영화에서도 시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일지도 모를 어느 시점을 드나든다. 그러나 표현의 방식에 있어 <코멧>은 누구의 시점에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어 관객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특유의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나는 그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반면에 <화장>에서는 오 상무의 시선으로 장면이 회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으며 오 상무라는 인물에 점차 동화되어 간다. 사실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이러한 효과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 경관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점차 동화시키며 연출하는 그의 기법이 인물의 시선에도 적용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타 인터뷰에서 감독은 실내에서 주로 촬영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걱정스러웠다라고 밝혔지만, 오히려 그의 기법이 공간에서 벗어나 시선에도 적용되었기에 새로웠고 더 좋았던 것 같다.

 


* 죽음과 삶 사이에 선 오 상무의 존재

 

[추은주의 캐릭터 포스터와 오 상무의 아내 캐릭터 포스터]


오 상무의 시선은 항상 삶의 에너지로 가득 찬 추은주에게로 향해 있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병자를 간호하는 남편에 불과하다. 죽음을 아내, 삶을 추은주라고 생각한다면 구도는 간결하다. 오 상무는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과 삶이라는 잣대를 놓고 봤을 때 오 상무의 위치는 어느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사실 죽어가는 아내의 옆에 있는 오 상무는 종종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관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스크린에서도 아내와 추은주는 여러 방면에서 대조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오 상무는 아내를 응시하기 보다는 추은주를 더 많이 응시한다. 건강한 아내도 응시하던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추은주에 대한 응시와 상념은 증가한다. 삶과 죽음의 구도에서 아내의 옆인 죽음 쪽에서 슬슬 삶의 쪽으로 기우는 것도 같다. 그러나 아내의 화장(火葬) 후 삶의 구도로 치우쳐야 할 오 상무의 위치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추은주에게 향할 것 같던 그의 발걸음은 또 다른 길로 향한다. 여기에서 나는 내 생각의 오류를 발견했다. 죽음(아내)-인간(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인 것 같던 세 인 물은 사실 죽음(아내)-또 다른 삶(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도는 어떤 극단적인 양 방향을 두고 있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 환원하는 원형의 구도였다. 결국은 살아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식사 중인 오 상무와 추은주]


그렇게 생각 하면 ‘사랑’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 영화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인 에로스-타나토스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은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것이라면 이 영화는 참 똑똑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키워드, 살아가는 이야기에 이어 오 상무라는 인물의 캐스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단 김규리와의 베드신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점이 그랬고(그는 많은 배역에서 정중하고 신사다운 역할을 많이 맡았기에 관객은 그의 베드신을 기대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그 베드신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추은주를 보는 그의 시선은 혹자에게는 관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섹시한 맛이 있다.), 작은 동작과 낮은 목소리로 연기한 점이 그랬다. 안성기라는 배우는 오히려 더 깊고, 무거운 것을 표현하며 관객의 깊은 곳까지 닿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 내가 이 영화는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도 그의 역할이 꽤나 중요했다.

 


* 와인과 슬리퍼 그 사이에서, 오 상무 그리고 나

 

위에서 언급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동경은 아내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한 쪽의 대조점을 잃은 추은주로 대표되는 삶은 오 상무가 다가가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 상무는 결국 또 다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다만 이 부분에서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소설에서 오 상무와 추은주의 관계는 일방적인 오 상무의 응시와 추은주의 퇴사로 끝이 난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오 상무는 추은주의 이직을 위한 추천서를 써줄 만큼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려 별장으로 찾아오는 추은주의 모습까지 등장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소설에서 이뤄지지 못한 사이가 영화에서는 이뤄지길 바랐다는 가벼운 이야기까지 했으나 영화에서도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다만 오 상무의 약간 미련 섞인 마음은 투영되었는지 그는 별장 안에 추은주를 위한 와인상을 차려놓은 채 자리를 비운다.


자리를 비운 오 상무는 별장 마당을 지나쳐 흙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애마저 느껴졌다. 그렇다. 어쨌거나 인간은 아름다운 것들을 버리고 종종 현실로 돌아와 다시 살아가야 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늘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오 상무의 아내도 오 상무의 현실이 되기 전에는 추은주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오 상무로서는 추은주를 붙잡지 않는 것이 그녀를 아름답게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이 때로는 이상으로 남겨져 있어야 더 아름다운 것처럼.


그래서일까, 오 상무가 걸어가는 길을 추은주가 탄 차가 지나쳐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잠시 오 상무는 멈칫 하며 걸음을 멈춘다. 동시에 내 시선도 스크린에 멈췄다. 어쩐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는 오 상무의 모습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내가 머무는 길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이상과 현실, 그리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또 다른 나의 오 상무가 다시 걷는 장면이 재생된다. 아직 그 결말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오 상무 역시 영화 속의 오 상무처럼 길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은 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만 그가 조금 덜 건조하기만을 바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응시할 뿐이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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