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안동에 도착하니 낮 열두 시였다. 다른 도시에 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친가가 있는 이천과 외가가 있는 속초를 제외하곤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화를 한 뒤 시내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등산용 가방을 들고 안동시내 지도를 든 채 서성거리는 나는 영락없는 여행자이자 외지인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간고등어 정식과 찜닭집이 있었지만 내가 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에 나보다 먼저 여행을 간 동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집에 돌아온다. 동생 역시 안동을 첫 방문지점으로 잡았다. 두 시 열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니, 내가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걸었을 땐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는 왜 안동까지 와서 그런 걸 먹어, 동생의 웃음 섞인 핀잔을 뒤로한 채 다음 주에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스호스텔이나 콘도에서 밖에 외박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정집같이 생긴 그곳의 작은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곳의 매니저라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 이용에 관한 설명과 안동 주변지역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숙소를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었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중앙의 젊음의 거리를 돌고나서 구 시장 거리까지 나아갔다.


<젊음의 거리에 있는 조형물>


아쉬운 점은, 이런 거리구 시장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속초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던 포항. 그곳에서 보아왔던 시장거리와 젊음의 거리. 그 거리들의 생김새와 안동의 그것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투리와 가판대에서 주로 판매되는 것이 찜닭재료인 닭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속초든 포항이든 안동이든 모두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가. 같은 문화생활권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수산물 대신 팔고 있는 찜닭이 이곳이 안동임을 알려주는 자그마한 특징이자 차별거리였다. 외려 안동에서 이미 예전에 현대생활로 편입되어버린 구시대적 풍경이나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바랬던 내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 갔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시내에 있는 유적. 고려 개국공신들을 모신 곳이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물>


시장 거리를 돌아본 다음에는 시내 오른쪽 위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았다. 아마 마을 프로젝트로 조성했을 안동의 벽화마을은 그럭저럭 산책코스로 괜찮았다. 하지만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도 잘 되진 않는지 또 와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을 돌았는데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젊음의 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빵 두어 개를 사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젊음의 거리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잠시 사색에 빠졌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엔 처음 보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이따금씩 재미있는 상호 명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과거의 이곳을 유추해보고 미래의 이곳을 상상해본다. (2015年 7月 17日)

 


 

2일 차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게스트하우스 정숙시간이 24:00 ~ 7:00 인 탓에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숙소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 돌아온 후엔 여덟 시부터 야경투어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도 따라 나갔다. 허름한 봉고차에 열댓 명이 타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동강변에 설치된 음악분수였다. 여덟시 정각이 되자 음악이 나오며 분수가 작동을 시작했다. 분수에 설치된 조명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졌다. 음악의 강약에 따라 조명의 색깔과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세기가 달라졌다. 마치 컴퓨터에서 음악파일을 열면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져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엔 월영교로 향했다. 월영교 근처에는 안동댐 상류에서 가져온 초가집 몇 개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모셨던 숙소, 그리고 석빙고도 있었다. 운전기사로 같이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소개를 곁들이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동은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상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북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석빙고는 시원했다.

깨끗했던 날씨 덕분에 월영교는 그대로 검은 강물에 반사됐다. 올해도 지어진 지 12년 된 월영교는 안동시내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야경이었다. 구도만 잡아놓고 찍으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진 사진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열 시 즈음이었다. 같이 야경을 본 사람들 중중에 같은 방에 배정된 사람들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가 거실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눴다.

 

<음악분수.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외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에 예정된 아침 관광투어를 통해 도산서원과 제비원을 둘러봐야 했지만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을 했지만 안동의 거의 모든 사적지는 시내에서 버스를 최소한 사십 분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시에 오후투어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열두 시까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유적지로 가는 버스들은 열 시부터 운행을 했고, 나는 관광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배로 더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어제 갔던 월영교를 넘어 민속촌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여행을 왔으니, 내 두 다리로 어딘가를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생수 한 통을 사고 자전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중간에 석탑 하나를 보고, 월영교도 지나갔다.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이클 복장을 갖추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만을 봤을 뿐. 월영교로 가는 아침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목적지였던 안동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안동댐은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반환점부터 갑자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했다. 일천 원의 관람비는 꼭 일천 원정도의 값을 했다.

민속촌을 나온 뒤엔 낙동강변을 따라 건너편으로 걸었다. 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강물이 왼쪽엔 숲이 울창했다. 숲과 물이 양쪽에 있으니 시원했다. 세 시간 가량을 걷고 나니 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낙동강변을 걸으며>

 

오후엔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나갔다. 상대적으로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동역 초입에서 게스트하우스 차를 타고 사십 분 쯤을 달리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서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봉고차는 신음소리를 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했다. 서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풍경만큼은 예뻤다. 적재적소에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함으로써 멋을 풍겼다. ‘만대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개방되어있었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이용하는 탓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써져 있었다. 비록 만대루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마당의 백일홍과 만대루는 멋진 조화를 이뤘다.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산들의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아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았더라했다. 안동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임진왜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고향이 안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자리를 옮기고 운영(?)했던 병산서원을 와보고 싶었다. 서애 선생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 이곳으로 서원을 옮겨올 때만 해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 줄기는 계속해서 그 흐름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병산서원>


 서원을 나온 뒤엔 바로 하회마을로 향했다. 아마도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풍산 류씨 집성촌인 이 곳 하회마을이 아닐까. 허씨와 이씨가 이곳을 자신들의 터로 잡으려고 했지만 최종 주인은 류씨로 결정이 났다. 하회마을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 있었다. 탤런트 류시원의 젊은 시절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민속과는 다르게 하회마을인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했다. 예전엔 개방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후 관람객이 늘어난 탓에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만 개방됐다. 마을 초입엔 하얀 연꽃들이 펼쳐졌다. 장미꽃처럼 향기롭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엔 초가집과 기와집 두 종류가 있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집이라고 문화해설사가 말해주었다. 기와집들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나 그 유명한 풍산기업 소유자들의 집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과거에 양반들이 가마를 소유했다면 이십일 세기로 바뀐 지금, 그들은 가마 대신 외제차를 몰고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명패는 모두 씨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엔 柳時元이라고 적혀진 명패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서애 선생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충효당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후투어만큼은 시간을 지켜 사람들과 같이 이동해야 되는 터라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회마을은 河回마을이다. 강물이 마을을 온전히 돌아나기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라는 평을 듣는 이 마을의 유일한 허점은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하회마을을 원의 형태라고 보았을 때)부분만 강 건너에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애 선생의 형이었던 류운룡은 풍수지리에 아주 능숙했고, 산이 없는 그 부분에 소나무 만 그루를 심어 그곳으로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 시절, 재력가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송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직도 이 나무 앞에서 굿을 하고 탈춤을 춘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 해설사는 강 위에 뜬 연꽃 같다고 비유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오십 미터도 안되는 강을 건너는데 삼천 원을 내야했다. 요금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하회마을은 풍산기업에서 운영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터라 국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편에 내린 뒤 이런 불평을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연정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집필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애 선생은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풍경은 조용했다. 그 옛날, 하회마을을 찾아온 보부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부용대에서 잠시 쉬어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가장 안동적인 것들을 본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던 일, 하회마을의 이면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오늘 보지 못한 것은 다음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2015年 7月 18日)

 


 

MEMO

*18일 부로 경북지역의 메르스 경보가 없어졌다. 마지막 자택격리자의 격리 일자가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강이 아닌 다른 강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기차역 바로 뒤로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한강의 이분의 일 정도였다. 첫 날 저녁 하류를 보고, 병산서원에서 막 산에서 내려온 중류를 보았다. 그 중류는 하회마을을 돌고 낙동강 댐을 지나 시내로 흘러내려간다.

*병산서원은 서재와 동재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를 구분해서 방을 쓰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과거科擧에 초시였던 사람과 재시, 삼시를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면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②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③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는 동안, 당신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 <이름 없는 남자>(2009)를 찍었다. 그 영화는 고립과 고독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의도했던 것인가? 형식적으로 말해, 영화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녹음한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대조적으로, <이름 없는 남자>에는 대화가 전혀 없다.

 

 내가 이 남자와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우리는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다 잠시 쉬고 있었고, 한 친구가 나를 황무지 근처로 안내하고 있을 때, 어디서인지 이 남자가 나타났다. 별안간 나는 그가 살고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그의 삶의 경험을 전해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한 사회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커져가는 시간에 살고 있다. 그건 비대해진 욕망의 시간이다. 그리고 여기 가장 가난하고, 외로우나 또한 가장 소박하며, 자발적이고 자급자족하는 존재가 있다. 그는 다른 이들과의 접촉 없이 황무지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그는 여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메마르는 풀처럼 자연의 상태에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움직인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를 찍는 동안, 나는 실제로 언어가 영화를 유지할 수 있는 극한을 탐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에서 대화를 쓰지 않은 이유는 꽤 단순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그에 대한 영화를 찍어도 되는지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의사소통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존재 상태를 찍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주제는 당신의 최근 다큐멘터리 <세자매>(2012)에서도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이 세자매를 우연히 만났다. 어딘가에서 당신은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雲南省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러 갔을 때 그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어떻게 그들과 친구가 되었나?

 

그 작가의 이름은 쑨 시샹Sun Shixiang이다. 솔직히 나는 그가 2001년 31살에 요절하기 전까지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와 나는 같은 세대에 속해 있다. 그는 그의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에 대한 회고를 소설화했고, 2004년 사후에 출간된, 『셴시神史』(신의 이야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소설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있다. 소설은 쑨 시샹이 목격한 인간 삶의 모든 양상들로 풍부하다. 그만의 이야기에 더하여, 그는 그의 부모, 조부, 이웃, 친족들의 이야기를 한다. 내 생각에 그는 나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거기다, 그가 소설에서 형상화한 삶을 나도 살았다고 느낀다. 그는 유년기부터 성숙한 뒤까지 효과적으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건 정신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작가나 문학 비평가는 아니지만, 『셴시』야말로 동시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라 생각한다. 동시대 문학을 여러 편 읽었지만, 대다수는 우리 삶에서 동떨어져 있다. 개인적인 삶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이 역사적 시기에, 이 국가 사회적 (진행) 과정에서 겪고 있는 삶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강렬하지만 종종 풍부하고 강력한, 이 생동하는 집단적 경험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내게 이 작품들은 그저 너무 나이브하다. 나는 <바람과 모래> 작업을 하는 동안, 쑨 시샹의 소설을 매우 빨리 읽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촬영하느라 바빴기에 <바람과 모래>가 완성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내게 그건 무덤을 방문해 경의를 표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거기서 어떻게 세자매를 만나게 되었나? 당신의 필름이 보여주듯, 그들은 돌봐주는 부모 없이 대부분 스스로 생활하고 있다.

 

쑨 시샹의 무덤은 고산지대에 있다. 언덕에서 돌아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차를 멈추고 길가에 있는 세 아이들을 봤다. 첫째 언니 잉잉Yingying이 일곱 살이어서 아직 학교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 년 전이었다. 영화를 찍기 시작해씅ㄹ 때, 잉잉은 열 살이었고, 두 동생들은 대략 여섯 살, 네 살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얘기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감자로 요리를 해줬다. 그건 시골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시골 생활 방식에 익숙하다. 이상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서 낯선 이의 집에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 아이들의 삶이 당신의 유년시절을 상기시켰나?

 

내가 1970년대에 성장할 때, 중국에서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전국 모든 곳에서 먹을 음식은 충분하지 않았고, 입을 옷도 없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물질적 빈곤은 우리 기억에 세세히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80년대부터 중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가난에 찌든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이런 문제는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빈곤이란 어느 정도 기억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고산지대에 간다면, 갑자기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진 동일한 빈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빈곤이 팽배해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부모들이 자립하기 위해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는 게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맞다. 그건 과거와는 매우 다른 시기에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사람들이 항상 행복한 가족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차라리, 높은 확실성의 수준에 대한 말이다. 사람들의 사적인 생활은 사회에 의해 제한받았다. 당신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쉽게 이혼하거나, 가족을 떠날 수 없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활동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는 만약 당신이 아내, 혹은 남편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떠나버리는 몽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실제로 불가능했다. 당신의 개인적 삶을 위한 자유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이는 별개의 문제다.

 

<세자매>(왕삥, 2012)

 

이런 문제들은 지금도 발생하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건 상당 부분 경제적 발전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과 더불어, 경제적 관계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보다 훨씬 더 강한─지배력을 발휘한다. 왜냐고? 간단하다. 이 작고 가난하고 외진 마을을 보자. 일할 수 있는 모든 젊은 노동자들은 이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곳의 경제는 더욱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름끼치게도, 경제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착취한다.

 

<세자매>는 여러 롱 쇼트들을 통해, 주로 제한된 대화와 내레이션 없이 아이들의 일상을 좇으며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들은 매우 강렬해서, 사람들로 가득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하나로 관통하였다. 이런 점들로 미뤄봤을 때, 그런 이미지가 관객을 연결시켜주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그 영화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90분짜리로,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TV에 방영되는 영화(다큐멘터리 프로를 말하는 듯 - 옮긴이)는 대략 50분이므로, 90분은 이미 충분히 길다. 또 다른 버전은 영화관 상영을 위해 만들었고, 150분짜리다. 이미 말했듯,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의 접점을 형성한다. 이미지들이 반드시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울 필요는 없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영화제작자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계속 보고 있을 때, 당신이 무엇인가에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을 때, 왜 당신은 그것을 보고 싶어하며, 그리고 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가? 사람들이 신경 쓰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소녀들의 내면적 충만함, 그들 삶의 모든 디테일들 ─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관객들에겐 이 확대되어가는 복잡함을 반성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친절함을 베푼다. 심지어 막내 아이조차 돼지와 염소 모이를 주는 데 동참한다. 그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매우 슬프면서 단순한 관계다. 이 영화에서 많은 것들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들의 삶과 감정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의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충만한 영화는 광고가 아니다. 충만한 영화는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우리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세자매>는 궁핍한 환경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영화 전체는 빈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소녀들의 생동하는 실존에 대한 것이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의 영화가 보여주듯, 도시에 일하러 나간 세자매의 아버지는 매년 토마토와, 주식을 심으러 마을로 돌아온다.

 

그렇다, 그리고 명백히 그는 문제가 있다. 이 지점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발생한 새로운 이슈를 제기한다.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갔지만, 그들의 노동이 도시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임금과 생활수준은 여전히 낮으며, 그래서 시골은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 이 어린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음식, 숙박 등의 생계를 위한 지출을 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시골로 돌아왔을 때, 뼈 빠지게 노동했음에도 가져오는 것이 거의 없다. 소녀들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 않으나, 만약 혼자였다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세자매가 있으니, 그는 도시에서 아무 것도 저축하지 못하므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또한 외로움에 대한 것은 아닌가?

 

<세자매>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이들의 일상에 어떠한 부분도 차지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몇 년 동안 아이들을 남기고 떠난 상태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와 집 주위에서 몇몇 사람들을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세 명의 외로운 어린 아이들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경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경제는 우리 모두를 납치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인간  관계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관계다. 경제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할당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채찍질한다(reinforce의 의역 – 옮긴이). 결국 이러한 위치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원유>와 <석탄, 화폐>에서 논했던 것과 상응하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오늘날 중국의 불특정한 사회적 관계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이 보기에 세자매 같은 아이들이 자라면, 그들 또한 도시를 갈망할 것 같나?

 

아이가 도시를 갈망하진 않을지라도, 중국의 경제는 도시에 집중되어있다. 도시들은 마치 자석과도 같다. 그건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의 문제다. 실제로 과거에는 중국의 경제가 시골에 집중되어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골 경제, 도시 경제 그리고 하찮은 산업 사이에는 심연이 있었다. 이제는 무거운 경제적 힘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도시는 엄청난 부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고, 기회를 찾기 위해 이 부에 이끌린다. 자석의 에너지는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범위를 결정한다.

 

언젠가 당신은 중국에서 오직 상하이만이 도시 문화를 갖고 있으며, 다른 곳은 ─ 예컨대, 베이징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치 문화다. ─ 그렇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도시들이 그런 자석이 되어가고 있다면, 이는 도시 문화를 성장시키겠는가? 혹, 반대로 문화는 후커우戶口[각주:1] 거주자 등록 시스템에 의해 좌절되겠는가?

 

그게 그러한 경향을 늦출 거라 생각진 않는다. 그 말은 중국 시네마에 대한 논의 중에 나왔다. 국가로서 중국은 농경 문명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사회 이데올로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그러한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 문화가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 살 때 등장했는지 ─ 혹은 어떻게 등장했는지 ─ 의 여부는 미래를 위한 문제다. 하지만 도시들은 성장을 지향할 것이고, 시네마 또한 도시 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 삶의 모든 다른 부분까지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의무 또한 있다.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걸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

 

그 말은 당신이 영화는 그만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영화는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 변화할 것이다. 우리 세계는 점점 더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해가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아한다. 과거에, 비록 우리는 문자 언어에 기반을 둔 풍성한 문화를 향유했음에도, 이미지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작곡법, 어휘 게임, 서사 장르, 풍속에 대한 묘사 등 모든 것들은 문자 언어를 응용해서 창조한 문화의 구성요소였다.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예술의 역사는 훨씬 짧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다. 동시대 시네마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시네마는 오래 전부터 우리 레퍼토리에 축적되어온 것에 제한받지 않을 것이다.

 

- 끝 -

 

<원문 p. 129-13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1. 중국의 후커우(戶口, 호적) 제도는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 본적제도와 비슷하지만, 후커우의 이동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즉, 현행 후커우 제도는 정부가 국민들의 거주지 이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옮긴이) [본문으로]


(출처: 고시텔 닷컴, http://www.gositel.com)

"대학생 주거 문제는 빈곤 그 자체일 뿐이다"

은 최저임금과 높은 주거비를 감당하며 가지게 되는 집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부모비동거 대학생들은 방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방에 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시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부모님도 이 사회도 그리고 그들마저도 이렇게 방에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한 개인이 아니라 과반의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유지했기 때문에 더욱 문제될 것 없이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제적 이유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고 하나,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가지는 문제라면 이것은 사회적 문제로 치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생의 주거는 왜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을까.


대학생의 주거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한시적 문제로만 치부됐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충분히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존재로 평가됐다. 대학생의 주거문제는 언제가 극복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됬다. 그리고 대학생 그들 스스로도 언제가 취업을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돈을 모아 자신의 집을 가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원룸은 진정 ‘한시적’ 주거인가 생각해 봐야한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승진을 하고, 대출을 끼고서라도 전세로 수도권에 아파트를 얻기까지 그 과정들이 모두 쉽사리 이루어질거라고 낙관할 수 있는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세대이다. 우리는 과거세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러한 집에서 살게 되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서울의 1인 청년가구 주거빈곤 비율은 36%였다. 1인 청년가구는 시설미달, 면적미달, 반지하, 옥탑등 최저주거에 미달되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최저임금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면서도 인간으로서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에 놓인 것이다. 쪽방 속의 삶들은 이제 과정이 아니라 ‘빈곤’ 그 자체로 치부되어야 한다. 대학생과 빈곤이라는 단어가 당치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빈곤’이다. 더 이상 젊음을 이유로 대학생의 주거 문제를 ‘견뎌낼만한 일’로 사회가 치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그 다음세대가 더, 다음세대보다 그 다음세대가 더, 이 작은 쪽방에서 더 오랜 시간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주거문제는 한시적 문제도 아니며 우리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학생들이 새로운 주거 공동체와 문화 속에서 삶의 질을 높이고 안정감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대학생의 주거문제가 사회적 패배감과 미래에 대한 비관으로 이어지지 않게 주거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이 필요하다. 한국과 비슷한 사회정서와 주거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1인가구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한 일본에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셰어하우스’이다. 우리나라에는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주거 형태이다. 셰어하우스란 한 집에 살며 거실과 주방, 화장실등은 공유하되 방은 따로 쓰는 주거양식이다. 주거비가 높아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도시인들이 집에 살며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기존의 고시텔과 하숙과는 다르게 취미나 생활양식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정서적 사회적 교류가 존재한다. 일본의 뉴스에 따르면 독립적인 1인가구보다 임대비용은30∼40% 저렴하지만, 생활의 만족도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셰어하우스 주거 문화에 대한 일본 내 통계조사에 따르면, 셰어하우스 거주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주거비 절감 때문이었으며 거주자의 62% 이상이 장기거주계획은 없었으나 다른 거주자와 함께 생활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도로 인해 장기거주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1인가구 증가추세와 한국과 일본이 비교적 비슷한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향후 우리나라도 셰어하우스가 보편적 주거의 형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대학생을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낮다.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셰어하우스가 확산된다면 비정상적으로 치솟아있는 주거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방’이 아닌 ‘집’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평균 1400만원대의 높은 보증금이다. 일본의 셰어하우스를 벤치마칭해 한국에 도입한 셰어하우스들은 지금 ‘두달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측정하고 있다. 월세가 40만원정도일 경우 보증금은 80만원인 것이다. 천만원대의 보증금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현저하게 낮아지는 것이다. 또한, 거실과 부엌, 화장실등 공유공간을 여러명이 나눠씀으로 인해 오는 임대료 절감 효과도 있다.

다음편에서는 대학생 주거 문제 해결방안으로서 셰어하우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사회적경제. 먹는건가요?

‘사회적경제’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법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사회주의를 떠올리거나 잘 모른다. 그렇다면 사회적경제에 대해 활동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 마디로 정의하고, 공통적 정의가 있을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다. 사회적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조직들과 기업들의 특징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에 여러분이 직접 경험해보면서 알아가길 바란다. 무책임한 대답일 수 있지만 사회적경제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가면서 좀더 명확한 공통 정의가 제대로 확립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필자가 느끼고 배운 사회적경제를 이 글에서 전달하고자 한다.

사회적경제를 알게 된 당시를 돌이켜보자면, 나름 괜찮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던 생활 속에서 나에게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공허함이 다가왔었다. 매번 마주했던 그 감정이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간파하지 못했다. 분명 나는 돈 주고 사서 나름의 합리적 선택으로 좀더 편리한 것을 취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경제행위는 따뜻한 무언가 빠져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집근처 대형마트에 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값싼 물건을 사와서 나 혼자 먹고 있다고 하자. 값싼 물건을 샀다는 경제적 효용에 대한 만족감은 집에 가는 길에도 계속 갈까요? 물론 몇몇의 사람들은 경제적 효용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나는 집에 도착했을 때 마트에서 누굴 만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격만 기억이 났다. 나와 마트 직원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반복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만났음에도 오로지 돈과 바코드로만 이야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마트에서 나의 경제행위 안에서 나-마트직원의 관계를 포함하지 않았고, 오로지 시장에서 효율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관리비용에 가치를 뒀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 많이 비추어지듯이 세련되고 도외적인 우리의 삶과 생활방식으로부터 내가 그때 느끼고 불편했던 감정이 초래되고 있었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향하는 경제생활은 우리의 모든 삶을 가격과 돈으로 표현되어야만 인정받고 우리가 보지 못한 소중한 것들이 외면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경제적 효용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가지고 ‘경제라는 건 화폐와 가격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효율성을 위한 로봇도, 경제적 수단도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누군가의 노동과 관계를 오로지 물질적 숫자로만 반영해서 바라보고 있는 경향이 크다. 어느 순간 이런 상황이 경제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졌고 당연하다고만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밥상과 이웃의 부지런함으로 깨끗한 길처럼 누군가의 관계를 위한 배려와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가격표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무가치하다고 치부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적 가치가 존재하고 사회적경제에서 중시하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내가 공허하게 느낀 이 감정은 바로 자본주의경제에서 외면하고 있었던 관계와 사회적가치로 인한 것이었다. 나는 구멍가게라도 동네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아는 동네사람들이 생산하는 푸드를 소비할 때 행복했다. 이 경제행위 속에 가격엔 포함되지 않는 따뜻한 관계와 사회적으로 가진 의미가 더 중시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우리는 경제적 욕구외에 사회적 욕구가 존재하듯이, 경제행위에서도 사회적 자본을 기반으로 한 행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이뤄가는 경제생활들이 바로 사회적경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경제는 우리가 하는 경제생활이 우리를 도우면서도 돈이 소수의 주머니로만 돌아가는 세습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가 아닌, 지역사회에서 순환하여 일자리가 생겨나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적경제 모습은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마을공동체의 확대판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에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행위와 경제생활이라고 느꼈다.



마음 속 쇠사슬을 벗어나, 사회적경제

사회적경제는 말은 쉽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우리가 쇠사슬을 끊지 못하는 서커스단 코끼리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충분히 사회적경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서커스단 코끼리는 어렸을 적 받았던 학대와 쇠사슬의 무게로 인한 마음 속 편견으로 인해 평생 쇠사슬에 묶여 지낸다고 한다. 우리도 마음 속 쇠사슬로 인해 경제를 편향적으로 어렵고 차가운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주류경제 메커니즘은 만인이 행복해 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우리는 어느 순간 효율성과 경제적 효용만 생각하는 행위를 하고,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돈을 가진 소수의 부 증식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직면한다. 돌고 돌아야 하는 돈의 종착지는 ‘돈을 가진 자’가 되어버린 상황이고, 누구나 잘 살기 위해선 치열하게 '돈을 가진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하는 경제행위가 나를 돕고 내 이웃에도 도움이 되어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나아지도록 하는 방식의 경제를 만들 수 있다. 마음의 쇠사슬을 끊고 서커스단 코끼리가 아닌 자유 코끼리가 될 수 있듯이 인드라망처럼 관계로 연결된 사회를 반영한 ’사람 중심의 경제’ 사회적경제를 만들어가고 이루고자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우리도 될 수 있다.

서커스단 코끼리가 비참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선 쇠사슬을 끊을 만한 위대한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 처음 겪는 상황에서 계속 해서 연습하고 실천하다보면 코끼리는 쇠사슬을 벗어나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경제 속 사람들의 모습도 코끼리가 마음 속 쇠사슬을 벗어났듯이 움직이고 있다. 사회적경제 영역 안에서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공정무역 외 다양한 섹터의 주체들이 활동하고 있고 협력해서 사회혁신을 이끌어내려 노력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고 계속 연습하는 작업처럼 사회적경제 내 많은 사람들이 ‘사람 중심 경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민주주의 원리, 협동가치, 사회적 가치 등을 실천하고 연습해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대안이라고도 보는 시각도 있지만 사회적경제는 사람들이 '사람중심 경제'로 좀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과 편견을 이겨내면서 삶으로 실천하고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장이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자본주의 경제의 쇠사슬을 벗어나, 사람중심 경제를 믿고 사회적경제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중요한 ‘한 사람이자 주체’로서 경제와 사회를 바라보고 오늘부터 나의 소비와 생활방식을 조금씩 변화시켜 보는 건 어떨까요?



꺼내 먹어요. 사회적경제

미리 자이언티 노래 관계자와 자이언티 팬들, 오글거려서 힘들어 하시는 독자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자이언티-꺼내먹어요 노래를 들으며 사회적경제도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아래 가사를 읽어보길 바란다.

안녕! 쉽지 않죠? 바쁘죠?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죠?
바라는 게 더럽게 많죠? 그렇죠.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뭔가 포근하고 사람냄새 나는 사회적경제라는)집에 가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사회적경제)를 아침사과처럼 꺼내 먹어요
(사회적경제는 너의 생활를 신경쓰니) 피곤해도 아침 점심 밥 좀 챙겨 먹어요.
그러면 이따 내가 칭찬해줄게요

(사람들을) 보고 싶어. (사회적경제는 사람을) 많이 좋아해요
(사회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더 많이 안아주고 싶어요.
사랑, 사랑 비슷한 걸 해요. 어쩌면 정말 사랑해요.

(지금 삶이) 힘들어요?
(사회적경제는) 아름다워서 알아봐줘요 나를
(사회적경제는) 흘려 보내지 마요 나를
사랑해줘요. 놓치지 마요. (사회적경제를)


사회적경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강대교를 걷게 되면 볼 수 있는 글귀처럼 내일이 생각보다 괜찮을 거라는 마음으로 변화를 실천해보고 사회적경제의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 좀 더 나은 삶의 방식으로 변화하기 위해 함께 믿고 실천하면서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경제이다. 우리도 지금부터 친구들,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며 마을 안에서도 진행할 수 있고, 좀 더 넓은 공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 사회적경제는 언제든 꺼내먹을 수 있는 초콜릿처럼 우리 삶에 가깝게 존재한다.

# 꺼내먹어요. 사회적경제



포털 사이트 메인에 핑크색 의자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시는 기존에 엠블럼 스티커만 부착돼 있던 배려석이 크게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배려석에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좌석과 등받이, 바닥까지 '분홍색'으로 연출키로 했다는 것이다.



사진 = 서울시


이 사진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아, 이제 저 자리는 정말 못 앉겠다.”싶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임신부들은 핑크의자를 매우 반기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저 사진을 보자마자 ‘이제 나는 노약자석에 더는 갈 수 없으며 일반 승객들의 눈치를 더 봐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6개월, 임신부라는 티가 배로 확 나서 누가 봐도 임신부일 때 전철을 타게 됐다. 3호선을 타고 2정거장만 가서 1호선을 갈아타려했기에 의자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전철에 탑승했다. 그런데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홍해 갈라지듯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내가 자신의 앞에 가서 서 있을까 두려운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그 장면을 보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었기에 내 시선을 외면했을 것이다. ‘아.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그 후 일주일 뒤에 똑같은 코스로 전철을 타게 됐다. 이번에 탑승한 전철에서는 한 명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게 나를 쳐다봤다. 젊은이 한 명을 빼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앉아 있던 젊은이는 내가 멀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2정거장을 앉아갔다. 내가 내리는 순간까지 매우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더 불안했다. ‘아.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전철을 탈 때마다 걸어 다니는 폭탄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임신부들은 전철을 타면 일부러 임신부가 앉아 있는 앞에 서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오늘 서서 갈 힘이 있으니 앉아 있고 싶은 분들은 제 눈치 보지마시고 앉아가세요~라는 무언의 뜻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씩씩하게 서서가도 괜찮았던 나에게도 고비가 왔다.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서서가는 것이 너무도 버겁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노약자석에 엄청난 눈총을 받으며 앉아가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좀 봐줘야 돼, 양보 이런 게 없어’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비난이 시작됐다. 조용히 말씀하지도 않으신다. 전철 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앉아갔다. 


한 번은 노약자석 3석이 다 비어있어서 봉을 잡고 일어날 수 있는 끝 쪽 의자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어떤 할머니가 나를 세차게 밀친 적이 있었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2자리가 남아있는데도 만삭의 임산부를 밀수가 있는지 어이없는 시선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임신했는지 몰랐지, 이 자리 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 관리가 너무 안됐다. 끝자리가 뭐라고 임신부를 밀면서까지 저 할머니는 저 자리에 앉으려했을까. 임신부가 아니더라도 젊은이는 밀고 앉아도 된다는 할머니의 생각에 너무 화가 났다. “됐어요, 그냥 앉으세요.”라는 말을 내뱉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 도쿄에서 전철 탈 일이 있었다. 전철을 타고나서 노선도를 확인하기 위해 전철문 위에 걸려있는 노선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내가 외국인으로 보이고 길을 모르는거 같아서 자꾸 쳐다보나 했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말씀하셨다. 
“아,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이 임신한 걸 내가 한 번에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 앉아서 가세요.” 그 말을 듣고 괜찮다고 고개를 젓고 아니라고 손을 흔들었는데도 아주머니는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최대한 나와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서 계셨다. 내가 미안해할까봐 아예 멀리 가버린 것이다.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문자로 그 상황을 전할 정도였다.   


전철을 타면 나오는 안내방송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는 소리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타고 있다가 노약자가 오면 양보해달라는 방송이 나온다. 앉아있어도 되는 좌석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에 박카스 CF에서 노약자석에 앉자는 친구의 권유에 “우리자리가 아니잖아”라는 말로 젊은 남성 두명이 서서 가는 장면이 방영됐다. 그 때부터 노약자석은 앉으면 안되는 곳이 되었다. 앉으면 안되는 곳이 되다보니 그 곳은 노약자만 앉을 수 있게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불편하거나 임신부도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노인만 앉아야 된다는 노인들의 전용 좌석이 돼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한 칸당 최대 12석까지 자리가 비어있어도 절대 앉지 말라며 쉴 곳을 빼앗아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핑크색으로 도배된 자리는 일반석 양 끝 좌석이다. 임신부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된다는 생각을 노인에게 심어주기는커녕 이제 임신부는 일반석 끝에만 앉아라라는 뜻으로 노인들이 받아들일까. 그리고 일반석에 앉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눈칫밥을 먹으며 일반석에 못 앉아 가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좌석을 더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어디서 시원한 바람이 내 배 쪽을 향해 불어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봤더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미니 선풍기를 손에 쥐고 내 배를 향해 바람을 날리고 있었다. 아이가 왜 그러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쳐다봤더니 더운 여름날에 뱃속에 있는 아이가 더울까봐 바람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양보와 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받는 사람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내 배가 지치고 힘든 직장인에게 ‘너 당장 일어나서 양보해!’라는 뜻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곳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핑크 의자가 반갑지 않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리도 각박해져서 임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며 핑크색으로 압박해야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 Shield of Straw, 2013년, 감독 미이케 다카시)에는 희대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기요마루가 등장한다. 힘없는 여자아이를 범행대상으로 삼아온 그는 어느 날, 일본 재계 거물인 니나가와의 손녀딸을 무참하게 죽인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니나가와는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신문사와 방송사를 움직여 기요마루를 죽이는 자에게 현상금 10억 엔을 준다는 TV방송과 신문 광고를 전면 게재한다.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은둔하다가 전국적인 광고로 인해 모두의 표적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요마루는 아이러니하게 경찰의 보호를 받고자 자수하게 된다.

메카리 경부보는 현상금을 노리는 시민들로부터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보호하여 도쿄로 압송하라는 아이러니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출처: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 Shield of Straw, 2013) 캡처.

 

일본 경시청 수뇌부는 기요마루를 기소하여 법정에 세우기 위해 최정예 경호 요원(메카리, 시라이와)을 파견하여 또 다른 두 명의 형사와 함께 기요마루를 후쿠오카에서 1200km나 떨어져 있는 도쿄로 압송해오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현상금에 눈이 먼 시민들 (심지어 경찰까지도)의 습격으로 비행기와 기차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상황에서 4인의 주인공들 내부에서도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눈물겨운 직업정신을 가지고 있는 메카리와 시라이와조차도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자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살인마를 보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하나 보호하려고 주인공들이 고군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면서‘살인마조차도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법은 정말로 비인간적인 범죄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저런 범죄자는 법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극도의 고통을 주어 피해자가 당한대로 갚아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호순의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 오원춘 토막살인 사건, 조두순의 여아 성폭행 사건, 고종석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과 이에 준하는 경악스러운 범죄들에 대해 대한민국의 법은 누가 보기에도 다소 미흡한 처벌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러한 솜방망이 판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저런 살인마의 인권은 존중해서는 안 된다, 혹은 극도의 고통을 주면서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과거‘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대한 향수는 피해자의 자력구제(복수)를 금지하고 사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벌하는 오늘날 의 법치제도에 대해 국민들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범죄행위의 대가로 소중한 생명을 뺏는 건 부당하다라든지, 과도한 처벌은 범죄감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제 폐지조차 전 세계적 대세로 되어가는 21세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응보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영화 테이큰, 아저씨, 세븐 데이즈 등 국내외를 막론한 액션 스릴러를 보면 범죄자를 엄벌해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경찰, 사법집단이 정의를 세우기는커녕 무능함과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법당국의 무책임에 대해 분노하고, 주인공의 사적인 복수로 인해 권선징악이라는 원초적 정의가 회복되는 순간, 시청자들은 극도의 희열감을 느낀다. 물론, 주인공은 복수를 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법구금, 불법감청, 인명살상, 공공기물파손 등 수많은 불법범죄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비용으로 용인되고 주인공의 행위는 정당화된다. 적어도 원칙과 절차를 따지다가 피해자를 구할 시기를 놓치는 등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답답한 관료주의가 몸에 배어있는 영화 속 무능한 경찰, 사법 당국보다는 나으니까.

이와 같은“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상관없다.”는 논리는 필자가 고3때 즐겨봤던 만화 ‘데스노트’(쓰구미 오바, 타케시 오바타 作)에도 드러난다. 정의감이 넘치는 주인공 라이토는 법의 허점을 교묘히 빠져나오거나 법으로도 교화할 수 없는 극악 범죄자들을 사신 (死神)이 준 데스노트(여기에 이름을 적힌 사람은 무조건 죽는 노트)로 처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살인행위를 정당화한다. 라이토의 행동을 막기 위해 투입된 사설탐정 L은 라이토에게 법이 정의를 확립하고 범죄를 줄이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가 너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당시에 나는 라이토 편이었다. 어떤 처벌과 교육으로도 교화되지 않는 본성, 그 자체로서의 악을 가진 존재는 인권보장과 법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거리낌 없이 사회에서 ’청소‘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데스노트’에서 주인공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통해 범죄자를 직접 처단하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출처: http://www.gaiaonline.com/profiles/kawaii-anime-cosplayer/8490743/

그렇다면 현대의 양형제도는 정말 정의를 바로 세우기에 부적합한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 세계는 전근대적인 처벌, 고문 제도에서 탈피하였다. 범죄에 따른 대가로서 ‘생명의 박탈’보다는 ‘신체의 구속’이라는 감금형을 선호하였고 인간을 교화의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세련된 양형제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죄에 따른 처벌제도가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피고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불공평하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직 원시적 형태의 응보적 정의에 따른 법이 존속되고 있는 중동과 인도 일부의 관습법에 대해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부러움을 표시한다. 범죄자를 광장에 꿇려놓고 주민들이 번갈아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는 투석 형이라던가, 살인자는 그가 살인을 저질렀던 방식 그대로 처형하고, 강간범은 거세해버리며, 팔을 부러뜨린 자는 똑같이 팔을 부러뜨리는 방식들 말이다. 어쩌면 응보적 정의에 대한 향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평등주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한만큼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아직 존재하고 있는 이란의 투석 형에 대해 반대하는 퍼포먼스.

출처: 연합뉴스

하여튼, 현대의 사법제도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야만성을 억제하고, 처벌보다는 범죄의 근본적인 예방과 교화를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판단에 대한 한계를 체감해왔기에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하고자 번거로워 보일수도 있는 여러 견제 장치를 고안해왔다.(삼심제, 묵비권, 무죄추정의 원칙 등). 기본적인 틀은 성문법 체계이지만 판단여지에 따른 재판관 개인의 재량권도 인정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 필요한 법적 유연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치불신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아마‘공감의 부족’일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처벌기준이 범죄의 정도에 비해 모자라다고 분노한다. 아마도 피해자의 절박한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하려는 재판부의 진정성과 공감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재판관의 선고가 마치 수학자처럼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공식을 이용하여 요소를 투입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구나 사법부는 삼권분립을 이루고 있는 요체 중에서 유일하게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태생적인 결함 때문에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법적 판단이 과연 다수 국민의 이성과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들은 건전한 다수 국민의 상식과 괴리되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민주적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고 가끔 ‘뻘짓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권한을 박탈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범죄자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법이 아무리 허점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최소한 21세기 인류가 갖춰야 할 이성과 명예, 합리적인 사리판단, 냉철한 Legal mind에 입각한 정교한 법치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과, 성선설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2014년 3월, 시리아의 무장 단체 ISIS가 통치하는 한 마을에서 절도범을 율법에 따라 손목 절단형에 처한 사건이 벌어졌다. 전근대적인‘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처벌 방식을 오늘날까지 고수했음에도 왜 저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범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까? 더 엄하고 잔인하게 처벌하지 않아서였을까?

출처: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301601006

극악 범죄에 대해 국민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제도가 부활한다면 경각심으로 인한 일시적인 범죄 감소 효과는 있겠지만(물론 효과가 지속적이진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하여 신체적 고통으로 되갚는 행위를 반복한다면 우리는 용서와 포용, 죄책감과 같은 인간성을 서서히 상실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본능을 추구하는 짐승의 그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양형을 엄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범죄율 감소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잔인한 형태의 인과응보 식 형벌 시대’로 회귀하자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또한, 법에 명시되어 있는 피고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권리는 결코 범죄자를 옹호하는 수단이 아니다. 만약에 있을 사법부의 오판을 대비하고 냉정한 이성에 입각하여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의해 범죄자를 엄벌하는 ‘최소한의 질서’를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영화 짚의 방패의 중반부쯤에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민들에게 중계되자, 동료인 칸바시 경사는 3년 전 음주운전 상습범의 뺑소니 살인으로 인해 아내를 잃은 주인공 메카리 경부보를 의심하게 된다. 메카리가 범죄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같은 살인범인 기요마루를 용서하지 못하여 그의 위치 정보를 대중에게 누설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울분을 가다듬고 잠시 후 냉정을 되찾은 메카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물론, 그 살인범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정말 몇 번이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죽인다고해서 이미 죽은 아내가 살아서 돌아오는가?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②

 

 

<중국 여인의 연대기>(왕삥, 2006)


그렇다면, <원유>에서의 노동자들의 계약이 올해 혹은 내년에 끝날지도 모르는 건가?

 

오늘날의 실제 생산관계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시스템은 단지 작업장에서의 경제적 관계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측면에서 바뀌어왔다. 한 회사가 당신을 고용하고자 결정한다면, 그건 두 달, 세 달, 일 년, 혹은 삼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회사는 당신이 일한 만큼 임금을 지불할 것이다. 영화 자체는 이것을 기록한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려하지 않았다. 영화를 본 뒤, 당신만의 판단을 내릴 수 있으나, 그건 관람자로서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석탄, 화폐Coal, Money>에서 당신은 산시성에서부터 항구도시 톈진天津까지 석탄을 운송하는 트럭을 따라다니며, 석탄 광산 근방에서부터 길 위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손을 거쳐 석탄을 화폐로 바꿀 기회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의 풍경을 포착했다. 이 또한 우리 사회적 현실의 한 단면으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포착하려는 목적이었나? 

 

영화 <석탄, 화폐>는 불완전한 프로젝트다. 당시 우리는 매우 많은 장면을 찍었다. 하지만 영화는 유럽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되었고, 내겐 그저 5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프랑스 제작사는 사실 그 문제를 이해했다. 이후 그들은 내게 완전한 버전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가서 다시 작업할 시간이 없었다. 50분 안에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서술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완성된 작업이 아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할 때, 이 영화 속 사람들이 훨씬 생동적이고, 종종 주도적이라는 데 동의하는가?

 

그렇다. 우리네 시간의 본성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중국이 내가 <철서구>를 찍던 당시와 완전히 같진 않다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서 고난을 엿볼 수 있지만, 또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창조성, 에너지, 그리고 활력이 존재한다. 낙후된 경제, 단순 생산 방식과 시스템의 제약이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시대의 삶이 흘러간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왕삥, 2006)

 

연대기적으로 <철서구> 이후 당신의 작품은 <중국 여인의 연대기He Fengming>(2006)이었다. 주제적으로 봤을 땐, 이 작품은 장편 극영화 <바람과 모래The Ditch>(2010)과 연결된다. 두 작품 모두 중국 북서쪽에 위치한 강제 노동 수용소 지아비앙고Farm Jiabiangou에 대한 것이다. 그 수용소는 1957년 ‘우익인사들’을 잡아두기 위해 설치되었고, 1958년에서 60년의 대기근 당시 3000명 이상의 죄인 중 대부분이 그곳에서 굶어죽자 폐쇄조치했다. 1961년 초 당시 정부는 모든 억류자들에게 귀향하라 명령했고, 단지 몇 백 명만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이건 우리가 방금 논의했던 영화와 비교해 전혀 다른 주제가 아닌가?

 

사실 나는 <철서구> 직후, 2004년에 일찍이 지아비앙고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원유>와 <석유, 화폐>를 찍는 와중에 (지아빙고에 대한 – 옮긴이) 각본의 초안을 쓰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지아비앙고에 있었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바람과 모래>를 완성하는 데 까지 7년이 걸렸다. 다른 영화들은, 어쨌건 여가 시간에 만든 부산물이었다.

 

왜 그러한 주제를 선택했으며, 그 영화에 그렇게 많은 힘을 들인 까닭은 무엇인가?

 

양샨휘杨显惠의 책 『지아비앙고로부터의 이야기Stories from Jiabiangou』에서 처음 그 수용소에 대한 것을 들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후 나는 그와 만나려 했다. 그동안, 더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읽고, 인터뷰를 했다. 2005년에 양샨휘는 내게 허펭밍和凤鸣을 소개해줬다.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지아비앙고가 중국의 근대사에서 비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선, 국제공산주의운동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중국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 전체를 통틀어 그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괄목할만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등,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지아비앙고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지아비앙고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독특한 의의를 내포한다. 수용소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당신의 다큐멘터리에서, 허펭밍은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녀는 혁명에 가담하려는 열망이 가득했던 열광적인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불과 10년도 안 돼,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우익인사’라는 낙인이 찍혔고, 각자 다른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지아비앙고에서 남편이 굶어 죽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를 마지막으로 찾아갈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 기에 자식들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이전에 썼던 모든 기록들을 없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1세기에 회고록을 출판할 수 있었다. 영화는 눈길 위에서 허펭밍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 카메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는 또한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있지도 않는데, 인터뷰어의 질문이 녹음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전체는 기본적으로 불을 켜기 위해 일어날 때 등 일부 예외적 순간을 제외하면, 의자에 앉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건네는 허펭만 그 자체다. 의도한 것이었나?

 

실제로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 방식은 우리가 처음 허펭만과 만났을 때부터 결정되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실제 촬영은 훨씬 더 길었지만, 형식은 같았다. 나는 보통 영화가 디자인된 방식을 관객들이 받아들일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당신이 영화제작자라고 해보자. 납득할만한 영화를 만드는 게 당신의 직업이다. 관객들을 걱정하는 대신, 당신은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내게 그건 이 특정 작업을 하는 데 있어 당신의 필요에 맞는, 잠재적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거나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당신의 영화는 그 주제의 생생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바람과 모래>(왕삥, 2010)

 

카메라는 허펭만에게서 상당히 멀리 고정되어있다. 그녀를 어느 정도 클로즈업해서 잡을 생각은 없었나? 혹시 카메라 자체가 그녀의 주의를 잡아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나?

 

내 생각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영화제작은 다양한 전략을 동원할 수 있다. 클로즈업 혹은 롱 쇼트, 드러나는 카메라 혹은 숨겨진 카메라, 의식적인 행위 혹은 자연스러운 반응 등. 이것들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영화에서 선택한 기술과 스타일은 주제에 적합해야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화의 주제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카메라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를 찍을 때 이러한 관계에 대한 나의 주된 관심은 그 관계를 억제─눈치 채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따분하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찍는 것은 단지 각각의 이야기, 캐릭터가 아니라 역사를 연결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건 당시에 사회적 현상이었다. 당시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회고를 기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왜냐고? 우리의 주류 문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들의 삶을 인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반복적으로 물어왔던 또 다른 질문은 ‘왜 사람들이 그 늙은 여인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이다. 내게 이건 절대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진실하다고 여겼고, 그게 전부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관계의 약화다. 주요 사건들에서부터 나날의 만남들까지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느끼는 환경으로 진화해왔다. 하지만 내게 이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의심을 갖고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그녀와 진실한 관계를 형성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내게 그녀를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왜 우리는 그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가? 최소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또 다른 인간에 대해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같은 이야기의 극영화, <바람과 모래>를 만들었나?

 

이미 언급했듯, 나는 지아비앙고 수용소가 중국 근대사─반면에, 역사로서 그곳은 과거의 일부분이고 더 이상 현재에도 존재하는 양상은 아니다─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대신 극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개인적 선택이었다.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압력을 받고 있긴 하지만, 우리에겐 또한 공간과 자유─그건 가능성들을 탐험하는 문제다─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극영화로 만들어서는 안 될 이유란 없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바람과 모래>의 서사화 괴정에서, 시나리오에서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개인들의 실제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들이 드러나는 방식 사이의 갈등에 어떻게 접근했는가?

 

그런 갈등이 나의 작업을 지연시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우선, 오늘날 당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볼 때 개인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나 같은 경우는 영화제작 연습을 통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바람과 모래>의 제작 과정과 촬영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을 다루고, 복잡한 서사를 엮어내고, 해당 시기의 풍부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역사영화에 익숙하다. 하지만 내 접근 방식은 달랐다. 나는 시간과 서사를 다루는 방식을 포함하여 영화와 역사를 보는 것을 다시 사유하길 원했다. 나는 이야기를 그것의 전체로서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담았던 것은 훨씬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과 모래>는 매우 단순하다. 아마 몇몇 관객들은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우 만족한다.

 

<바람과 모래>(왕삥, 2010)

 

<바람과 모래>는 1957년의 ‘반우익인사’ 운동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전달하지 않고, 노동 수용소의 기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1960년 겨울에 수용소에서 ‘우익인사’들이 보낸 길고 끔찍한 나날들을 다룰 뿐이다. 유사하게 영화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배경 정보의 파편들을 제시하는 것을 제하면, 중심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서사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역사 영화에서 시간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생각하였나?

 

오늘날 역사를 복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의 존재는 감각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에서 작은 파편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역사는 이렇게 흩뿌려진 기억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 영화는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부분은 어떤 캐릭터에 있고 저 부분은 다른 캐릭터에 있다. 이 남자의 에피소드와 다른 남자의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그 에피소드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한 달 안에 발생한다. 이들은 서로 공생하면서 모두 연관되어 있고, 시간의 일치는 모두가 공유한다. 우리는 캐릭터의 개발 또는 완전한 서사를 구축하려하지 않았다. 또한, 지아비앙고 노동 수용소가─결국, <바람과 모래>는 지아비앙고 역사의 오직 일부분만을 보여줄 따름이다─영화의 주된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영화는 수용소의 역사 전반을 다루려는 목표로 하지 않으며, 어쨌든 나는 그런 거대 규모의 작업을 할 자원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흥미로워하는 시간의 작은 부분을 찍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해당 역사적 시기를 어렴풋이 볼지도 모른다.

 


<원문 p.125-129>

 

 

 

FILMING A LAND IN FLUX(WANG BING).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내게 신호를 꼭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로에 차가 있거나 없거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신호등은 하나의 약속이자 원칙이었다. 처음 들인 습관 덕분일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신호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물론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참 지루한 일이지만 말이다. 특히 방금 막 빨간 불로 변해버린 신호등 앞에 설 때면 그 기다림의 시간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몇 분 남짓의 시간이 내게는 매우 소중하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멍하니 서 있는 순간, 그 찰나에 나는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전화기를 꺼낸다. 통화 연결음을 듣는다. 음이 울리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만 해도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는데 이내 긴장감이 눈 녹듯 풀린다. 잡생각을 멈추고 전화기에 귀를 바짝 댄다. 경쾌한 사운드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음악은 적막으로 뒤바뀐다. 마치 깜박이던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 것처럼. 마음속 평온은 불안으로 전복된다. 이때부터 추측과 공상이 이어진다. 상대방이 나를 부러 피하는 것인지, 혹여 너무 늦은 시각에 전화한 건 아닌지, 갖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상대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경우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잠자코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껏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잘해왔다고 자부한다. 그게 신호를 잘 지켜서인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보 짓 좀 그만 해” 맞다. 백번 타당한 지적이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일 테니 말이다. 그들은 내가 좀더 과감히 행동하거나 다른 대안을 찾길 바란다. 적어도 가만히 기다리는 일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나를 설득한다. 잠깐의 망설임이 뇌리를 스친다.

 

상상을 해본다. 신호를 무시한 채 길을 건너가거나 다른 길로 우회해본다. 확실히 목표지점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내게 남는 건? 평소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족감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잃어버린 건? 충분히 기다린 후에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성취감 또는 끝내 신호가 바뀌지 않을 때 느끼게 될 좌절감일 것이다. 성취감이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은 곧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자존감으로 환원될 것이다. 잠깐의 자족감을 얻기 위해 자존감을 잃어버려야 하는 건가.

다시 신호등을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초록불은 아니다. 빨간불이 유난히도 붉다. 언제쯤 초록불이 들어올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적어도 내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가능성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아니니까. 설령 초록불로 변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기다림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마땅한 이유가 없으니 기다림을 멈추기도 어렵다. 끝이 있는 기다림이었다면 애초부터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기다림의 시간은 어차피 상대적이니까.

 

기다림의 성공이나 실패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다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도 신호등 앞에 서는 이유다.

'라커의 [무념유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박3일의 부산국제영화제가 남긴 것들  (0) 2015.10.11
공상한다는 것  (0) 2015.08.26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  (0) 2015.06.29
철학하기의 어려움  (1) 2015.06.15
특별한 사람을 찾아서  (0) 2015.06.03


나는 27살이다. 대학원생이고 아직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해 본 경험은 없다.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취직을 했고, 대부분 이름 있는 직장에서 일하거나 기자나 PD등 이름 있는 직책을 맡고 있다. 얼마 전 오빠가 결혼했는데 내 새언니는 나랑 동갑이다. 착한 새언니는 돈 없어 쩔쩔매는 나를 위해 가끔씩 용돈(?)을 주기도 하고, 선물을 사다주기도 한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어른이고 나는 아직 철없는 애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느리지만 내가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신중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깐 말이다. 그런데 이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전이었다. 등록금 벌이로 과외를 하는데 한 학생이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다. 오랫만에 알바사이트를 뒤지던 중 몇몇의 경우 나이제한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은 충격이었다. , 그렇지. 사회에서는 여자나이 27이면 당연히 취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머지않아 결혼을 할거라고 생각하지.

 

A: 몇 살이세요?

: 27살이요.

A: , 그럼 지금 무슨 일하고 계세요?

: 저 대학원생이예요. 영화이론 공부하고 있어요.

A: 아아.. 멋있네요. 감독되려고 하는거예요?

: 딱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생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어요.

이것저것 재밌는 것들을 많이 찍고 싶어요.

A: 그럼 직업은요? 어느 쪽으로 일하실 생각이세요? 그 분야 되게 힘들잖아요.

: .. , 맞아요. 글쎼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 들어왔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나는 대화의 전형적인 레파토리다. 내 인생의 스펙트럼을 스스로 설계하며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나에게 종종 사회의 기대감으로부터 오는 괴리감은 나를 비정상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말하자면 나는 탄탄한 포장도로 옆 샛길로 굳이 험난한 길을 택하고 있는 정상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다. 어떨 때는 아직 현실을 모르는 애라며 질타를 받기도 하고, 어떨 때는 멋있다. 부럽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분열적인 시선을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 좋아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그냥 아무거나 일단 시작해서 꾸준히 해보는거야. 그러다보면 그 일이 좋아지는거지. 너 같은 애를 피터팬증후군이라고 하는거야. 취직을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공부하고 싶어서가 이유라니. 그것도 인문학을.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런가? 나는 피터팬 증후군인가?

 

하지만 영화과를 선택하고, 여행을 다니고, 완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다른 분야의 것을 공부해보기도 하고, 대학원에 들어오고, 다시 공부를 하는 지난 날의 나의 발자국에.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 나갈 내 발자국들에 나는 한 치의 후회도 없다. 당신의 말은 단 몇 초의 고민으로 내밷은 걱정이겠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24시간 내내 나에 대한 생각과 고민으로 선택한 후회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답만을 원하고,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어쩌면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는 서술형식 삶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나를 다독이고 당신을 다독이고 싶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시간이 존재한다. 철수는 철수의 시간을. 영희는 영희의 시간을. 나는 나의 시간을 말이다. 그러니 걱정말자.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당신의 시간을 살면 된다.

나는 조금 느리다. 그리고 느린 만큼 오래 살거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AP통신>


 

<채권단의 긴축재정안을 반대하는 그리스 국민들 프레시안>

 

그리스 사태가 결국 일단락되어지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리 편치 않다. 그리스는 지난달 30(현지시간)까지 국제통화기금(IMF)에 채무를 갚지 못 하면서 사실상 디폴트(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 유럽채권단은 이에 긴축재정을 조건으로 하는 구제금융안을 그리스 정부에 제시했지만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반대의사를 표하며 국민투표에 부쳤고, 그 결과 6139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민들 또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치프라스 총리는 며칠 뒤 기존 협상안보다 무려 50억 유로나 더 긴축하는 내용의 파격적인 재협상안을 채권단에 제시했다. 은행의 붕괴와 유로존 탈퇴(그렉시트)의 우려로 마련한 긴급 강구책이란 판단이었다. 결국 그리스 의회의 승인을 받아낸 이 안은 유로존 정상회의에 회부되어 13(현지시간) 그리스 3차 구제금융에 대한 결정을 이끌어낸 상태다.


 

그리스가 그놈의 복지병때문에 망했다?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선 언론들의 다양한 원인 분석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아니나 다를까 그리스 사태의 원인을 과잉복지’, ‘복지병인 것 마냥 그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 기사를 내놨다. <지원금 300조원도 탕진공짜복지 좋아하다 이 지경까지”> 실제 조선일보 지면에 실렸던 제목이다. 과연 그리스가 복지때문에 망하게 된 걸까? 먼저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GNP) 대비 정부 복지지출 비중은 21.3%로 유로존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복지로 유명한 스웨덴은 27.3%, 덴마크는 26.1%, 핀란드는 24.9%(2012년 기준). 복지지출이 많아 그리스가 저 지경이다? 망했다면 저 북유럽 국가가 먼저 망해야 옳다. 결국 애초 사실관계부터 틀린 것이다. 다음 과도한 연금수령액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의 노년층이 받는 연금의 비율은 2011년 이후 3차례의 채권단의 긴축 요구에 의해 무려 40%이상이 삭감되었다. 또 그리스 연금수령자의 45%는 빈곤선인 월665유로(83만원) 미만의 연금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 전체 가구의 49%의 주 소득원이 노인연금에 의지하고 있단 사실은 그리스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연금이 곧 생계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과잉복지라 칭하고 또 탓할 수 있는가?

 


<한국일보>

 

그 다음 이런 과잉복지로 인한 그리스 국민들의 나태함을 이유로 많이들 꼽는다. 그러나 그리스는 연간 노동시간이 OECD국가 평균(2013년 기준) 1,770시간보다 훨씬 많은 2,037시간으로 멕시코, 한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나라로 기록돼있다. 유럽에서 2,000시간 이상 일하는 나라는 그리스가 유일하다. 이처럼 그리스는 우리가 터무니없이 걱정하는 만큼 복지가 과하지도 또 나태하지도 않다. 우리나라처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에 걸맞은 복지 권리는 누리지 못 하고 있는 처지다.

 


죄지은 금융자본과 부패정권, 탈세자는 쏙 빠진 채, 애꿎은 국민들만 벌 받으라고?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구제금융을 받는 동안 유로존 정상들 특히 그리스 채권 비중이 높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채권단은 그리스에게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요구했고 또 그리스는 성실히 이행해왔다. 재정지출을 줄였고, 빚도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가 됐다. 하지만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실업률이 25%로 치솟았고, 2009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GDP(국내총생산)22%나 감소했으며, GDP대비 부채비율도 35%나 증가했다. 부채규모는 갈수록 증가해 20113,559억 유로로 최고치를 찍었고 2015년 현재 3,127억 유로(400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말 당시 1,00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었다. 하지만 현재를 미뤄보면 구제금융이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데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 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는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애초에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의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2001년 당시 그리스 전 정권과 미국 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의 국가채무 은폐 작업을 통해 무리하게 가입했던 것이 원흉이었다. 한 마디로 국채 사기를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는 각종 공공재 수입을 담보로 28억 유로를 골드만삭스로부터 빌렸었다. 유로존 가입만 하면 장밋빛 미래를 예상했던 그리스는 점차 수출경쟁력 하락과 경기침체에 빠지자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금융회사들의 검은 손을 잡아버렸다. 이후의 구제금융이 실질적 경기진작 효과를 거두지 못 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은 금융자본의 채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또 그리스와 유럽연합 내부 역시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람들도 가득 차 있어왔다.

 

탈세 또한 빈번하고 그 액수도 어마어마하다. 연간 세금 청구액의 불과 20%만이 세입 되고, 나머지의 절반인 40%는 탈세, 또 절반은 뇌물로 바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해운업이 강세인 그리스에선 해운재벌들이 사업등록지 이전 등의 방법으로 연 2000~3000억 유로의 탈세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2009년 그리스의 탈세액은 약 2000~3000억 유로로 당해 재정 적자의 3분의2에 달하기도 했다.

 

이렇듯 부정부패와 금융자본주의의 결탁이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유럽채권단의 그리스 국민들을 향한 긴축재정 요구는, 죄인은 가만둔 채 애꿎은 이들에게 벌 받으라 강요하는 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스인의 입장에선 가혹하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SBS>


 

차라리 그렉시트(유로존 탈퇴)가 기회일 수 있다.

 

법률적인, 또 도덕적인 관점에서 그리스가 긴축재정으로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채무이행의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유로존의 시스템은 그리스와 그 국민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IMF 등 국가재정 및 개발원조 업무를 맡았던 엘리엇 모스 박사에 의하면 자국 통화를 쓰는 국가들은 무역수지가 악화되면 통화 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유로존 국가는 통화가치를 독자적으로 낮출 수 없어 무역적자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무역적자의 증가는 정부부채 증가 및 경제성장의 둔화로 이어진다. 그리스 위기도 이런 과정에서 발생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는 제조업 비중이 5.7%로 매우 낮으며, 관광 및 해운업 등 서비스업의 비중은 무려 90%에 이른다. 그런데 자동차, 가전제품 등 대부분 소비재는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결과 무역수지가 적자 구조인 것이다. 근본적인 경제 산업구조의 개편이 선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구제금융을 통해 유로존에 남아있다 한들 과연 그리스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애초에 유로존의 회원국가간의 경제규모가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유로존의 존재이유와 시스템 문제, 그리고 단일통화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시적인 유로존 탈퇴를 통해 자국 경제의 흐름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살피고 체감해보는 것도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은 공존의 길이다.

 

유로존은 경제도 그렇지만 철저히 정치적 연합체에 가깝다. 경제규모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국 패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견제하고 협력하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그렉시트(유로존 탈퇴)를 선언했다면, 그리스와 같은 부채와 경기침체에 시달리는 나머지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G는 그리스다)국가들 또한 연달아 유로존 탈퇴를 염두에 둘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훗날 유로존의 영향력 상실과 나아가 붕괴까지 이어질 수 있기에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체제 유지를 꾀하는 유로존 강대국인 본인들로서는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올해 초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치프라스 총리는 이미 공약으로 구제금융 재협상 카드를 들고 나왔었다. 국민의 삶 개개인을 파괴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제금융 협상안은 일정 부분 제외하면서, 채무의 30억 유로 정도의 헤어컷(채무탕감)을 요구해왔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채무이행에 대한 책임감과 의지를 가졌던 사람인 것이다. 기존에 정치적으로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 사태의 책임자로 몰고 비난하는 이들은 이 같은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리스 채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전쟁보상금을 추징당했지만, 1953년 런던합의를 통해 채무탕감을 받은 전례가 있다. 그로 인하여 경제위기에서 타개했고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일 역시 이제는 자신들의 예전 기억처럼 위기의 그리스에게도 그와 같은 선처와 배려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체제 공고화를 위해서 말이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이후 갑작스레 구제금융 재협상안을 제시했을 때 대다수의 국민의 반대의사를 무시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치프라스는 국민투표의 결과가 곧 긴축재정안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 뿐이지, 그렉시트의 의미는 아니란 걸 먼저 깨달았다고 본다. 또 그의 협상안 내용을 보면 긴축재정 액수를 늘린 것은 불만일 수 있겠지만, 채무 만기 연장과 법인세 강화, 채무탕감 요구 등을 제시했다. 자국의 탈세문제 같은 부정부패 해소와 더불어 채무탕감을 직접 요구함으로써 유로존의 시스템 문제를 건드리며 온전히 자신들만의 문제 때문이 아니란 것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결국 본래 예상 밖으로 탈 없이 그리스 3차 구제금융안이 유럽정상회의서 장장 17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타결됐다. 그리스는 기존 요구액보다 108조원이 많은 86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얻게 됐다.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던 독일과 그리스는 공존의 길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에 그리스를 긍정적으로 예견하기는 힘들다. 삐걱거리는 유로존 시스템의 한계와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언제 그리스를 잠식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치프라스 본인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걸 바라보는 현재의 그리스 국민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그리스의 행운을 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