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가 돈이 많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욕심이 문제지. 교회도 크게 짓고 돈도 많이 모아서 지역사회에 공헌하면 좋은 일이지 않아?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크게 감당하기위해 건물을 짓는 것일 뿐이야”



 필자가 들은 신학교 학생들의 말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간파한 책이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한자 한자 읽어나가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도리어 ‘노이즈마케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의 제목을 말하는 것도,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역시 잠시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여전히 잘못된 환상으로 신앙을 왜곡하는 교회에 대해 분명히 알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함께 재물의 신이라고 불리는 ‘맘몬’이라는 두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미진 저 「왕의 재정」


 위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의 달콤한 유혹과 그 함정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럴듯한 저자의 간증, 그리고 그런 신앙에 재물에 대한 축복이 어우러져 같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보다 더 좋은 믿음의 생활은 없게끔 만든다. 소위 말하는 ‘깨끗한 부자론’을 추구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마지막에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우리에게 가장 도전되는 삶은 90퍼센트 기부하고, 나머지 10퍼센트도 넉넉하여 모든 것에 넘치는 삶이다.” 심지어는 기부, 저축 그리고 소비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몇 퍼센트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지도 규정해주고 있다. 과연 이 책이 기독교인들의 물질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책인지, 효율적인 재테크를 위한 책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다. 이런 책이 현재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지침서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이러한 돈에 대한 입장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돈과 인간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는 우리가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재물을 구하는 것이 문제이며, 이것을 ‘기복신앙(복을 목적으로 믿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반면에 우리가 재물을 모아 일정부분을 타인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서 정당한 자신의 필요를 구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자 오히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적인 축복을 더해주신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재물이 많을수록 더욱 교회의 일을 크게 할 수 있고 하나님나라의 역할을 감당하기가 수월해진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심어지게 만든다. 얼핏 들으면 위 저자의 주장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맘몬의 교묘한 함정이다. 


필자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크게 두 가지부분에서 위 책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첫 번째는 이와 같은 물질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한 것 일뿐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물질이 뒷받침되어야 더욱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가르침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는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거부한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후 많은 이들이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자 할 때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양식을 구할 것을 이야기하신다. 책에 주장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이들을 구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을 걷어찬 어리석고도 실패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돌을 떡으로 만들고 왕이 되어서 많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맘몬의 힘과 인간의 연약함을 간과한 것이다. 저자는 줄곧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우리의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맘몬은 우리가 그것을 노예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맘몬의 노예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할 만큼 약하지 않다. 반면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자각해야한다. 돈을 이용해서 타인을 돕고 베푸는 신앙생활이 처음에는 반듯하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행동이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물질로써 베풀고자 하는 행위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우리를 탐욕스럽고 교만하게 만든다는 것 또한 깨달아야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을 돕는 행위가 나의 공로를 자랑하고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맘몬의 힘이자 그것이 지닌 거대한 함정이다. 왜 하나님은 맘몬과 자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재물을 신의 경지로 빗대어 말씀하셨을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얼마를 기부해야 하고 또 얼마만을 나의 몫으로 정하고 사용해야하는지 규정하는 것 역시 우리를 더욱 맘몬신앙으로 이끈다. 설령 저자의 말처럼 90퍼센트를 기부하고 10퍼센트를 내 몫으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 10퍼센트 안에도 맘몬의 힘은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우리는 10퍼센트를 사용하면서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10퍼센트의 양을 더욱 늘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때에 맘몬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의 이성과 신앙을 흔들어 놓을 만큼, 그만큼 맘몬은 강력하다. 결코 나약하지 않다. 맘몬은 우리가 노예로 만들겠다고 다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탈출해야할 대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JTBC


 물론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기독교인은 무조건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이웃에게 베풀지 말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고는 우리에게 맘몬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함께 나의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점점 더 크게,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내 마음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면밀히 성찰해 보아야 한다. 가난하더라도 충분히 교회의 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 아니, 부유한 사람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부자가 되어서 많이 베풀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연합하여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 속에 사랑이 자리를 잡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와 같이 개교회주의에 물들고 재물을 통한 확장을 추구한다면 입으로는 예수를 찾고 믿음을 이야기할지 모르나 실상은 예수보다 물질을 쫓는, 맘몬에 종속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가치는 당연히 사랑이다. 따라서 현재 무한한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속에서 사랑의 원리를 점점 잃어버리는 교회의 현실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고민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이 되어야 한다. 교회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그런 스스로를 속이는 신앙을 강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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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핵? 선한 악마?  (0) 2016.01.21

 

평화의 핵? 선한 악마?

새해가 밝은지 보름이 지났다. 새해 소망과 다짐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우리 사회분위기는 냉랭한 듯하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남북관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대북제재에 대한 뉴스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며, 우리 정부 또한 대북방송을 하는 등 새해부터 남북관계에 희망은커녕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와 불필요한 긴장감만이 맴돌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총선을 앞두고 위안부문제 등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어수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우선 남북관계에 대해서 먼저 글을 쓰고자 한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군인들은 외출과 외박이 통제되는 등 지난해 8월 이후 또다시 비슷한 남북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국제사회는 대북제재 강화방안을 논의하고 있고, 정치권에서는 며칠 전 여당 원내대표가 우리 또한 자위권 차원에서의 핵을 만들어야 한다며 평화의 핵을 주장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핵무기와 사드 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야당에서는 일부 비판에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상황이다.

                                              <출처 : 네이버>

이와 같이 아직도 핵과 같은 무력적인 힘으로 안보가 굳건히 지켜지고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시각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분단국가에서의 국방력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평화의 핵이라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선한 악마, 악한 천사란 말이 맞지 않듯이 평화와 핵은 공존이 가능하지 않은, 굉장히 모순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핵,무기라는 것은 그 자체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 근본적인 목적은 누군가를 굴복시키고, 무언가를 파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무기를 생산하고 전쟁을 함으로써 서로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멸하는 길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핵과 같은 무기를 만들어서 전쟁을 사전에 억제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서로 등을 돌리는 냉소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안보라는 문제에 있어서 힘을 이야기하고, 맞서서 무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환호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분위기를 잘 이용하는 것이 정치인들일 것이다. 몇 일전 여당 원내대표와 같이 핵무장을 이야기 하면 분명 그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올바른 정책이고 지켜야 할 가치관인지 냉철하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 북한이 왜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강력한 힘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안보와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서로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그런데 일부 우리 정치인 및 시민사회는 핵무장을 주장하는 등 북한과 같은 모습을 보이려 하는데 이것은 매우 옳지 못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책도, 가치관도 아닌, 단순한 인간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일부 이러한 생각이 마치 하나의 올바른 정책처럼 또는 정당한 이론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정도에 따라서 누군가의 애국심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평화를 불러오는 것, 어떤 대상간의 화해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오랜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기에 진정한 안보, 평화란 쉽게 얻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평화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적대시하는 마음을 비추지 않는 사람이나 정치인들은 오히려 정책이 없다는 평가와 더해서 사상적인 의심을 받고 정치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과연 진정한 안보와 평화는 어디서 오는가? 정말 우리도 맞서서 핵을 만들고 무력이나 정치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한반도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지, 평화의 핵이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말인지 필자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의 문제는 더 이상은 남과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요한 해결과제 중 하나가 된 만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는 무력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진정한 평화로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안 쏘는 탱크는 없다. 탱크는 쏘자고 만드는 거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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