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생일이 지나갔다.

 

크게 특별하지 않은 날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었고 생일을 축하받았다. 3을 강조한 선물을 많이 받았고, 서른에 관련된 책은 두 권이나 선물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서른 줄에 들어섰음을 강조하는 것 같아 잠시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 10대의 마지막 생일에는 싱그러운 20대 청춘을 꿈꾸며 기대에 가득 찼었던 것이, 10년의 차이를 두고 이렇게 바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아쉽기만 했다.

 

4월 둘째 주인 생일 주간은 애매한 기간이다. 학생 때는 대부분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직장에 와서는 대부분 가장 바쁜 기간이라 대충 챙길 때도 많았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일주일을 차이로 마냥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애매한 주간이 되었다.

 

5년 전 4월의 어느 날은, 내가 일하느라 한창 바쁘던 시기였고 동생이 제주도 수학여행을 일주일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야근을 일삼던 일이 갑자기 중단되어 무슨 일인가 싶어 뉴스를 보며 집으로 가던 퇴근길도 아직 생생하기만 하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전부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모처럼 편안하게 일찍 잠에 들었던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악몽처럼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 차가운 물에 배의 마지막 조각이 안쓰럽게 잠기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먹고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삶은 얼마나 슬픈가. 그런 큰 사고에도 불구하고 더 슬퍼하지 못한 채로, 나는 일 중단으로 인해 일당을 주지 못함을 다른 근로자에게 설명해야 했고 항의를 받았다. 자본이 인간성에 흠집을 내는 매 순간을 내가 익숙하게 살고 있었다.

 

 

슬픔의 감정은 조금 늦게, 매 순간 다가왔다. 동생의 수학여행이 취소되었을 때, 고3이 되었을 때, 졸업과 입학을 했을 때, 새내기가 되었을 때. 동생 같은 그 아이들이 제때 구조되었다면 그들에게도 똑같이 흘러갔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에 많이 미안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더 노력했지만 그 미안함의 조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또한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비슷한 모양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5년이 지나 공영방송에서는 오보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며, 앞으로의 역할을 다짐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또 반대에선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을 비웃고, 이용할 궁리를 하고 있다. 타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냉소를 보내기 전에 그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줄 수는 없을까. 슬픔의 무게마저 진영의 잣대 위에 올리는 세상인가 그러한가 싶어 못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죽이는 거야”

 

최근 종영한 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흑화 하면서 뱉은 한 마디를 들으며, 문득 다른 장면을 하나 더 떠올려본다. 그것은 작년 늦가을이었고, 11년 만의 삼성의 사과였다. 나는 현장에서 터지는 많은 플래시 속에서 약간의 슬픔과 안도, 안타까움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당연했어야 할 일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지난 11년이 유가족과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故황유미씨의 아버지는 그렇게 서글프고 푸른 미소를 지었더랬다.

 

그들의 죽은 세상이 여전히 그곳에 살아 있었다.

 

사무실로 복귀하며 핸드폰의 반짝임을 위한 수많은 죽음과 피를 생각했다. 한 사람의 죽음 너머에 놓인 그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메탄올, 시안화수소 등 유해물질의 위험성을 미리 고지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사람들과 산산조각 난 그들의 세상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젊은이의 청춘을 뺏은 많은 일들은 또 어떠한가. 그런 조각난 누군가의 세상을 마주하며 사는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먹고 살기 위해’라는 이유로 늘 이 ‘익숙함’의 핑계를 대지 않았던가. 세월호에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슬프다. 나의 오늘이 이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어느덧 이러한 일상과 감정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내 세상에서 분노와 슬픔마저 그러해서.

 

우리 사회의 상흔이 보다 옅어지고, 그 위에 새싹이 돋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지 여전히 가늠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선득거린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 세상이 더 이상 ‘익숙함’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기를 바라본다. 익숙해지지 않는 서른처럼 다섯 번째 혹은 열 번째의 많은 것들도 그러할 수 있기를.

 




책의 향기를 좋아한다. 처음으로 펼쳤을 때의 그 사각거리는 느낌과 손이 기억하는 각 페이지를 만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설레는 여행과도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동안 일이 많아 책의 향기를 맡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많이 읽어야만 쓸 수 있다는 글은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빅힙(Big Hip)’의 조합원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일도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시작한 글들은 여러 건이었지만 이들은 시의성에 맞지 않거나 흥미가 떨어졌고, 더 이상 써지지 않았기에 완결을 지을 수 없어 뜨다 만 목도리처럼 남아있었다. 목도리가 필요치 않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다른 전환점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 이런 상황에서 문득 나에게 있어 ‘글’이 어떤지 더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한동안 Q&A북이 유행한 적이 있다.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이 있을 때 그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그 답을 찾고는 하는. 나는 이것의 또 다른 형태로 무작정 눈에 닿는 책을 주문하거나 구입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답을 찾았다.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사실 이 두 권의 책은 읽는 중이다. 책을 읽고 난다면 더욱 깊은 맛이 나는 감상기를 쓸 수 있을 테지만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글 또한 재미있게 여겨졌다. 동시에 ‘빅힙’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낙서협동조합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처음으로 낙서 같은 글을 흘려 쓰고 있다. 물론 세상에 이렇게 긴 낙서가 어디 있겠느냐만 어쨌든 나는 지금 즐거운 낙서질 중인 것이다.


다시 돌아와 글을 쓰라는 책의 암묵적인 지시에 맞춰 나는 ‘글’을 다시 생각해보면, 글은 오랜 시간 동안 도피처와 같았다. 집과 학교를 나와 갈 수 있는 한정적인 공간이었던 도서관, 그 심리적인 불안을 묵묵하게 눌러준 낡은 사그락거림, 그리하여 흘러가던 시간들의 연속. 내가 없는 삶에서 유일하게 그 사그락거림만이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냈고, 유일하게 색채가 생생한 순간인 것 같았다.


운명처럼 처음으로 해본 과외도 독서와 토론이었고 학창시절 내내 편집부와 문예부에서 활동했다. 간혹 동생처럼 요트를 타거나 UCC를 제작하는 등 동적인 활동을 꿈꿔보기도 했으나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글이었으므로 다시 정적인 활동으로 숨어들어가곤 했다. 


숙명처럼 그런 학과로 진학해 장난 같은 글쓰기를 지나 다시 운명처럼 정착한 직장에서도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은 하고 싶은 글이기도 했으며 그렇지 않은 글이기도 했다. 숨어지지 않는 글을 나열하며 한동안은 모든 것을 날린 디스켓처럼 허망했고, 보잘 것 없음에 슬퍼했다. 그렇다, 무려 디스켓이다. 고작 2메가도 되지 않는 1.44메가 짜리의 보잘 것 없음에 나는 종종 괴롭고 혼란스러워했다.


흘려 쓰고 싶어 시집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본다. 무려 제목이 「꿈과 꼬리」.



 사라지는 꼬리 속에 있었다. 바닥으로 긴 동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닥 없는 바닥이었다. 흔적 없는 흔적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꼬리 속에서 고개를 돌리는 꿈속이었다. 꿈은 번지고 뒤늦은 자리는 허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음을 따라 사방으로 나아갑시다.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오늘을 놓아둡시다.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쓴 것들』 중 「꿈과 꼬리」



활자로 위안을 받는다는 것은 오묘한 일이다. 사람의 스킨십과는 다른 따뜻함이며, 다른 종류의 위안이었다. 오롯이 책과 나만 존재하는 작고, 낡은 나의 도피처 속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그리하여 또 시간이 흘러갔고, 부정적인 감정 또한 사그락거림 속에서 사그라들곤 했다. 그리고 비로소 사부작거릴 마음이, 엉덩이를 들썩거릴 욕구가 생겨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흘려 쓴다. 가는 바람에도 이는 잎사귀마냥 자연스럽게.


재미있게도 또 다른 책의 첫 시작은 ‘민들레씨를 불어라’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시작하면 된다는 것. 민들레씨를 부는 일은 사소하지만 그 씨앗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 다른 꽃을 피울 것이다. 내 삶이 달그락거리는 중에서도 계속 사그락, 사부작대며 살아왔듯이. 



한 번도 살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살아도 좋지 않을까요. 사라지는 꼬리 속에 있었다. 울지 않는 얼굴들이 사라지는 꿈속이었다.

-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쓴 것들』 중 「꿈과 꼬리」



실체가 없는 어둠 속에서 발을 잘못 디뎌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불안정한 꿈을 종종 꾸곤 했다. 행복한 글을 쓰지 못해서 작품에서 인물은 종종 죽음을 맞이하곤 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시는 결국은 아무도 이해시키지 못했고, 한동안은 또 글을 쓰지 못한 채 같은 꿈을 꿨다.



이제 다시 민들레씨를 분다.

언젠가는 내가 쓴 글의 사그락거림에 위안 받는 내가 있었으면 한다는 꿈도 같이 불어넣으며, 아주 긴 한숨을 담은 글을 흘려 쓴다.








실제로 파이를 굽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선거를 알아갈수록 이상한 것들이 많다. 단편적인 경험을 일반화시켜 말하기는 조심스러운 일이라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밝힐 수 없지만, 공천과 경선 과정은 매번 불투명하게 진행되기로 유명했고 이번 공천과 경선 역시 그러했다.


공천 유무는 정치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이를 위해 4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며 공을 들여 준비하기도 한다. 공천은 그 중요성 때문에 곧 권력이 된다.


당에서는 전 지역의 상황을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는 일이므로, 각 지역의 위원장(당협위원장, 지역위원장으로 지칭되나 당별 명칭에는 차이가 있다)의 의견을 중점적으로 참고한다. 위원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의견을 전달하면 가장 좋겠지만 간혹 이를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위원장이 있을 수 있다. 당에서는 공천심사위원회와 재심사위원회를 두어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위원장이 특정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경우 이를 적극적으로 제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제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이와 관련해 공천 파열음이 발생했고, 각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간 다툼도 꽤 지속되기도 했다.


혹자는 경선이 해답이 될 수 있지 않느냐며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산점을 두는 등의 경선 방식을 두고도 여러 다툼이 있을 수 있을 수 있고, 지난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당원이어도 후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 그 신뢰도에도 의문이 남을 수 있다. 또한 대부분 ARS로 진행되는 경선이 특정 기간을 두고 기간 내에 응답한 경우만 유효 결과로 보는 현 시스템이 지역 당원 과반수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라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모든 선거가 유권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해야 하지만 지방선거는 특히 지역주민과 더 밀접해있기에 그 의사가 더욱 정확하게 반영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몇몇 전략 공천 사례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그간 당을 위해 헌신해온 여러 사람을 제치고 꽂은 전략 공천의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고, 덤으로 지역주민의 원성까지 샀다. 실패한 전략으로 잃은 신뢰를 다시 쌓기는 수년간 쉽지 않을 것이다. 


파이를 굽고, 맛보는 것은 오롯이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파이를 만지작거리고 있고, 맛보다는 다른 것들을 고려하는 이상한 파이 장사는 언제쯤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예뻐서 산 것이 아닌 파이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빵집에서 예쁜 빵을 고르는 습관이 있다. 왠지 완벽하게 생긴 모양새는 다른 빵보다 더 맛이 좋을 것만 같다. 파이는 더 완벽하게 생긴 것을 고르고 또 고른다. 그런 파이만이 첫 한입부터 마지막 한입까지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다시 글로 돌아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의 ‘파이’를 다시 이야기해보자. 이번 지선 파이를 고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한 말이 있었다. 구어체로 옮겨보자면 대략 이런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응~ 파이 예뻐서(혹은 맛있어서) 산 거 아니야~ 유행이라 산거지~”


그 어느 때보다 쉬운 파이 장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유행의 바람은 브랜드를 더욱 빛냈고, 경쟁사들은 위축된 시기였다. 사람들은 필자의 습관처럼 예쁜 파이를 굳이 고를 필요가 없었고, 일괄적으로 파이를 구입했다. 오랜만의 불고 있는 이번 유행의 바람이 기쁘면서도 우려스러운 이유다.


유독 인력난에 시달린 선거였다. 한 쪽은 너무 많은 사람들로 제대로 검증되지 않아서, 한 쪽은 너무 사람이 없어 인원조차 채우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파이는 멀리서 보기엔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러 조각으로 쪼개진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가까스로 유지한 이 형태는 또 어느 바람에 흩어지게 될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정말 더 잘해야만 하는 시기일 수밖에 없다.


각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이번 지선을 돌아보며 제대로 된 인력 양성의 필요성도 다시 한 번 느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에서 그들만의 리그는 이미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고, 새로운 인력이 유입될 확률은 정말 낮다. 이번 선거의 당선자들 역시 이미 오랫동안 활동해오던 사람들이 대다수다.


유입될 확률이 낮은 곳에서 이들은 그 이전 사람들을 답습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의적‧타의적으로 떠났다. 정신적인 유전자가 동일한 사람들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같은 결과는 반복되었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지선을 도운 새로운 사람들은 많았는데 그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제대로 된 동력을 가진 좋은 바람이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인지 못내 궁금하고 아쉬워진다.


* 이 글에서 ‘파이’는 넓은 의미의 정치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었음을 밝힙니다.




<참고> 파이 주문지(투표지)의 이동경로


투표 시스템은 나날이 발전한다. 투표를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투표일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사전선거가 생겼고, 개표 시스템은 더욱 정확해지고 있다.  


개표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개봉된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지는 사람의 손을 거쳐 종류별로 쌓인 후(1차) 분류기에 넣어져 각 후보의 투표지를 분류한다(2차). 긴 투표지는 분류과정에서 쉽게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는데, 후보자나 정당이 많을 경우 이 분류 작업이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도 한다. 컴퓨터에 입력된 분류 결과와 실제 투표지의 개수가 동일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면 여러 차례의 확인 후 다음 과정으로 넘어간다. 분류된 후보자별 투표지는 다시 확인 작업을 거쳐 컴퓨터의 결과와 투표지 개수를 다시 검증한다(3차). 최종 확인을 마친 마지막 검수자는 결과를 보고하고(4차), 결과를 보고받은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관계자는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인쇄물을 결과란에 부착한다(5차).


개표 참관인은 투표지의 이동에 따라 개표 전 과정을 감시하며 경우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거나 재검을 요구하기도 하고, 지역구별 결과를 캠프에 실시간으로 전달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중앙선거위원회(이하 중선위)가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결과보다 더 빨리 확인할 수 있는 이 결과를 통해 각 캠프 본부에서는 후보의 당락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만약 특정 지역의 개표현황이 평균보다 많이 낮다면 기계 오작동, 혹은 참관인의 이의 제기나 재검 요구로 지체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언젠가의 겨울과 여름을 생각하며




어쩌다보니 5번째 선거판에 직‧간접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다. 심지어 3년을 연달아 치른 선거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표를 받았다. 선거라는 영역을 단순한 승패의 문제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길 것으로 생각되는 캠프라는 소속감은 구성원들을 한껏 북돋았고, 나 역시 그런 분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즐기는 구성원들, 열정적인 후보, 여러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내가 속한 캠프는 물론 여당은 예상보다 더 압도적인 결과표를 받을 수 있었다. 


문득 몹시 추웠던 2012년의 겨울, 내가 서 있던 그 광화문 광장이 떠올랐다.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다처럼 너울거렸고, 모두가 후보의 이름을 연호했으며,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있음을 그 어떤 때보다 뜨겁게 느낀 겨울이었다. 비록 지지했던 후보는 당선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 정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제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겨울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어느 식당에서 부둥켜안고 울었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밤새 술을 마셨다는 그런 기억의 단편이 남아있는 계절이었다. 함께 나눈 즐거움의 크기만큼이나 상실감과 괴로움의 크기도 큰 그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의 시계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렸다.


우리는 그 해 여름부터 국정교과서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웠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추적했으며, 마침내 촛불로 가득한 뜨거운 겨울을 광화문에서 다시 맞이해야만 했다. 정말 많은 이상한 일이 있었던 2015년이었고, 그 해답을 찾아가던 2016년이 있었으며, 또 다른 시작점이 된 2017년이었다. 간혹 이 시간을 기억하는 누군가와 함께 우리가 다른 곳에 있었어도 이처럼 뜨거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곤 한다. 결론은 대개 비슷하다. 다른 모습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걸음은 왠지 같은 방향을 향했을 것이라는 것.



△ 투표함에서 쏟아지는 투표 용지들 (사진 - 뉴시스)



새내기의 시선으로 보는 선거의 흔적


선거는 흔적을 남기기가 참 어려운 영역이다. 어느 캠프에 속해 있던 깊숙이 개입할수록 표면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은 수면 아래로 묻어둘 수밖에 없다. 또한 캠프마다 스타일이 다르기에 그동안 봐왔던 몇 번의 선거판으로 일반화시키기가 어렵고,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나의 경우는 비슷한 연령대 가운데에서는 적지 않은 선거경력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작 몇 번의 선거를 겪어본 새내기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새내기의 시선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 간단하게나마 이번 선거에 대한 단상 몇 가지를 남겨보려고 한다.



파이가 클수록 정작 내 파이는 더 찾기 힘들다


학창시절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정치였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그 학문 자체가 흥미로웠다. 먼 고대부터 시작된 이상적인 토의의 장, 정치적 이론과 학설들, 선구안을 가진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학문으로서의 정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고 덜 매력적인 부분도 많았다.


이론적으로는 전문성을 갖춘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가 모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일임하는 것이 ‘정치’이지만 정작 이렇게 하고 있는 대표는 몇이나 되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이번 선거는 ‘지방선거’로 그 어느 때보다 후보도, 당도 많은 선거여서 이 아쉬움은 더욱 컸다.



 지방선거 후보자 공보물을 정리하는 선관위 직원들(사진 - 뉴시스)


아주 단적인 예로, 이번 선거에서는 지자체 장을 뽑을 선거를 제외하고는 나조차도 우리 동네를 대표해 나온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출퇴근길에 바닥에 떨어진 명함과 어딘가에 붙은 현수막 속 사진을 보며 저 사람이 후보겠거니 생각한 것이 다였다. 선거운동 기간이 짧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선거에 비해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 뿐 아니라 당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공약을 내걸어 후보별의 특색을 찾기도 어려웠다.


특히 구‧시‧군의회의원 선거의 경우는 블로그나 SNS를 활용하지 않는 후보도 많아 공보물에만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블로그나 SNS를 사용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관리해오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특히 초선의 경우 대체적으로 선거를 대비해 신설한다) 온라인을 통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이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관할하는 지역이 크지 않아 직접 돌아다니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후보들의 연령대가 높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각 정당에서 공천 면접 시 그 어느 때보다 청년과 여성을 우대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인들의 연령대는 생각보다 더 높았다.


실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서울특별시의 구‧시‧군의회의원 당선인 통계를 대표적으로 살펴본 결과 전체 당선인 369명 가운데 가장 많은 연령대는 50.7%(187명)를 차지한 50대였으며, 60대 이상 당선인은 26.3%(97명)였다. 50대 이상 당선인은 무려 77%(284명)인 반면 30대 미만은 0.5%(2명)였고, 30대의 경우는 8.4%(31명)에 불과했다.


물론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열정적인 의정활동을 펼쳐왔고, 펼쳐갈 당선자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프라인에만 한정될 경우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의정활동 정보를 접할 수 없고, 당선자들 또한 이들의 의견 수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분을 감안한 것인지 각 구‧시‧군의회의 홈페이지에는 의원들의 개인 연락처를 공개해놓고 있다. 명시된 것이 업무용 연락처일지라도 직접 연락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고,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의정활동을 확인할 수 있어 유권자들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홈페이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발언, 의안발의 등 기본적인 의정활동만 관리되더라도 좀 더 촘촘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그래도 특정한 당의 후보자가 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후보로 확정되면 선관위에 의무적으로 재산, 병역 등 각종 내용을 신고해야 하고 공보물도 제출해야하기 때문에 유권자는 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최소한의 1차 필터링이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그 앞전의 공천과 경선 과정이다. 당에서 심사하는 공천의 경우 유권자는 물론 당원에게도 공천의 심사내용은 공개되지 않는다. 물론 공천 대상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소 어떤 사람들이 공천 심사대상이 되었는지 일반 유권자는 물론 대다수의 당원이 약력조차 알 수 없다. 공천을 통해 경선을 거칠 후보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당원의 경우 경선 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니 ARS에 녹음된 몇 개의 약력을 들을 수 있어 미당원인 유권자들보다 약간 낫긴 하지만, 몇 개의 약력으로 그 사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1차 필터링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높았던 만큼 유권자들과 당원들의 관심이 높았지만 이에 비해 시스템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 않았나 싶다. 파이가 커졌음에도 오히려 내 파이를 찾아먹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크고 많을 거라던 내 아름다운 파이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굿바이 지선②에서 내용이 이어집니다.)



컨택트(Arrival, 2016)


<컨택트>의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 Contact with Arrival 도입과 접촉하다 ]

 

컨택트의 영어 제목은 "Contact"가 아니다. 바로 “Arrival”, 도착이라는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 제목을 검색해보니 잘못된 번역의 예라는 평가가 많았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었기에 외계인의 도착을 뜻한다면 맞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는 확실히 잘못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창에 영어제목을 다시 검색해보니 몇 가지의 의미가 나왔다. 도착, 도착한 사람 그리고 도래, 도입. 정확하게는 3번째의 뜻이 이 영화와 가장 부합하는 키워드였다.


Arrival

1.도착 2. 도착한 사람 3. 도래, 도입

 

여러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한 키워드가 아닐까. 우선 이런 종류의 SF에 도착한 나에게 접목시킬 수 있을 있을 것 같다. 사실 문과-인문계열로 이어진 평범한 내 인생에 SF는 참 어려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에일리언과 같은 독보적인 외형을 가진 외계인에 대해서는 이질감이 참 큰 편이라 그간 큰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했던 적은 없기도 했고, 우주영화에 등장하는 수학적인 부분은 대체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오는 영화라니, 어렵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SF영화치고는 특이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인문학도를 위한 우주영화’, 혹은 문과판 <인터스텔라>’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주와 외계인이 나오는데 인문학이 붙는다니,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이 영화도 기---사랑으로 이어지는 결말인걸까.

 

영화를 보고 나니 사람들이 표현한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략적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컨택트>의 영어제목이 “Arrival”인 것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Arrival”은 영화 안에서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 그 자체다.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헵타포드어'를 분석중인 '루이스'와 '이안'의 모습 (출처: 네이버영화)


 

<컨택트>의 외계인들은 오징어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징어란 잘생긴 사람 옆에서의 그 오징어가 아니라 진짜 오징어다. 먹물을 사용해 주인공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 또한 오징어스럽다. (영화를 본 후 오징어가 땡겼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먹물 언어라니,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다. ‘헵타포드어라고 불리는 이 먹물 문자는 단순한 원형 같지만 처음과 끝이 닿지 않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어딘가에 도착한다던지, 어떤 순간이 도래한다는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는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삶과 죽음의 순환과도 닮아있다. 삶과 죽음 역시 끝맺음과 새로운 시작이 존재하는 순환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이 외계인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 같은 회화문자인 헵타포드어를 사용하는데, 이 문자는 다소 수학적이다. 모양의 각도를 분석해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주연 배우루이스는 이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다소 신선한 발상을 행동에 옮긴다.

 

의사소통의 과정은 영화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많은 단어를 뜻하는 행동과 시각자료가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외계인이라니 꽤나 재미있는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어가 모든 문명의 초석이다.”

 

천체물리학 전문가인 이안루이스와의 첫 만남에서 루이스가 쓴 책의 서문인 이 문장을 읽어주는데 이 장면이 어쩌면 전체를 아우르는 복선이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의 운명에 있어서도 언어는 또 다른 초석이 되었으니 꽤 그럴싸하다. 영화를 본지 시간이 좀 흐른 후 생각해보니 이 언어의 이름은 헵타포드일 수도, ‘한나일 수도 있겠다.

 


 

[ H-A-N-N-A-H 한나 ]

 

의미 없다고 생각한 먹물의 문양이 언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왜 오묘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필자 스스로 언어란 이래야한다, 라고 생각해오던 어떠한 벽(마치 헵타포드를 만나는 공간에 놓인 그 투명한 벽과도 같다)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외계, 우주의 환경에 따라 생명체의 모습도 다를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처럼 언어도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간 간과해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막연하게 <E.T.>의 한 장면처럼 필자는 외계인은 우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생명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의사소통의 과정이 필요한, 삶과 죽음을 겪는 어찌 보면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헵타포드중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헵타포드는 그 순간 인간과 동등한 선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마치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인종인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기에 하나 더, 영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또 다른 존재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스미스소니언전에 전시된 사진 '금환일식을 바라보는 구경꾼' (출처: 한국정경신문, Colleen Pinski. all right reserved.)

 

영화에서는 개기 일식의 한 장면처럼, 어떤 흔적을 남기는 찰나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은 영화의 도입부로부터 시작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더욱 빈번해진다. 그 찰나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름은 한나’, ‘루이스의 딸이다.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았을 때 도입부에 등장했고, ‘루이스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그녀는 과거형 혹은 현재형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한나는 더욱 빈번해진다. 어린아이에게 어떠한 글자와 의미를 가르치듯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루이스에게, ‘한나의 존재는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한나헵타포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라고도 볼 수 있다. [루이스-한나]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인간-헵타포드]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를 배우는 헵타포드는 마치 아이와도 같아서 어떤 한 단어를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르쳐야 한다. ‘루이스와 같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교감형 부모가 있는 반면, ‘서툰 부모중 일부는 전쟁을 선포하며 과격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육아의 과정 중 일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한나의 존재는 여전히 매우 모호하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이미 한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관객에게 그녀는 이미 과거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같은 선상에서 한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루이스는 아이를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진 엄마라고 생각되며, ‘헵타포드에 대한 애정은 모성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읽히기 쉽다. 필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고, 이 사실을 관객이 범하기 쉬운 오류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만큼 연출은 아주 자연스럽다.

 

언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듯이 루이스헵타포드어를 이해하며 한나의 이미지와 자꾸 마주친다. ‘한나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루이스의 태도는 관객에게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이해의 포인트는 바로 시간이다. ‘헵타포드에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개념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헵타포드어와 같이, 멀리서 보아야 전체적인 그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한나의 존재 역시 그렇다. 그녀는 과거이자 현재, 동시에 미래다. ‘한나의 영어이름은 H-A-N-N-A-H’, ‘헵타포드어와 비슷한 구조로 나열된 원형 문자임과 동시에 끝이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의 존재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의 만남과도 같은 것이다. ‘헵타포드어로 해석이 가능한 미래의 존재.

 

언어와 시간을 끌어와서 만든 영화 <컨택트>는 이렇게 문과판 <인터스텔라>가 되었다.

 


 

[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

 

한나의 존재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다. ‘헵타포드어는 미래를 예측하는 신비한 언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함인가?

 

이 답은 죽음을 앞둔 한나에게 루이스가 속삭이는 한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생각에 잠긴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다소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시작과 끝. 그러니까 영화는 루이스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도 한다.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게 된 루이스가 미래의 시간을 통해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 자유의지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두고 이안루이스의 선택이 갈린 것처럼 인간은 같은 선택지를 두고도 종종 다른 선택을 하곤 한다. 어쨌든 서로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삶은 헵타포드어처럼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기에 선택하지 않는 삶은 과연 행복한가? 딸의 죽음을 미리 알게 된 이안루이스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영화는 미래를 알게 된 인간의 선택과 그로 인한 나비효과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루이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그 사소하고 따뜻한 장면을 비출 뿐이다. ‘루이스를 미워하는 그 순간마저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삶들을. 그리고 그런 순간을 만났음에 감사함을 느끼게끔.

 

이안의 미래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왠지 루이스의 삶이 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삶이 죽음으로 흐르는 그녀의 시간 속에서 한나를 만난 것만큼 루이스에게 의미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결말을 보고 어쩌면 <컨택트><인터스텔라>처럼 결국은 사랑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문과판 <인터스텔라>로 불리는 이 영화의 가치는 곳곳에 숨어든 여백에 있다.

 

왠지 모르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헵타포트어의 여백을, 영화의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여백들을, ‘루이스의 선택을, 나의 삶 어느 지점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 어딘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나의 한나는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당신은 종종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쨌든 그 결말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그 선택이 무엇이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나의 존재를 내가 이해한 문장으로 당신에게 여백으로 남겨둔다.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 과정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이다.





 

 

- 바비(Barbie), 이상우, 2012

 


01. 2016년의 첫 낙서를 시작하며

바비.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이 이름을 들이밀며 과연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해보니 역시나, 연예인의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 영화에 대해 검색을 좀 해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영화 바비’로 검색해보기를 추천한다.

 

이번에는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여본다. 2015년 첫 낙서를 시작할 때 나름대로 낙서의 규칙을 정하고 시작했다. 달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갓 개봉한 따끈한 영화들을 그대로 전달해주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사람의 삶은 영 녹록치 않은 것이었다. 점점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아졌다. 2015년에 약속했던 규칙은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필자의 상태 역시 점점 깨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응원을 해주었던 에디터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어쨌든 2015년의 규칙은 깨진 채로 새로운 2016년이 시작되었다.

 

이제 필자는 첫 낙서를 시작하며 2016년의 새로운 낙서 규칙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일단 고집부리며 끌어왔던 영화 영역에만 치중했던 낙서의 벽을 좀 허물 예정이다. (사실 필자의 취미는 여러 문화 활동에 걸쳐져 있어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그동안 꽤 있긴 했다.) 물론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문화 활동은 영화이므로 여전히 비중은 좀 높겠지만 많은 실험적 시도를 거칠 한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사실 2015년 낙서도 역시 실험적이긴 했다.) 두 번째로는 ‘갓 개봉’에 너무 심취하지 않으려고 한다. 갓 개봉! 이 단어에 묶여 내뱉지 못했던 많은 낙서들을 올해는 좀 더 용감하게 공개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Light라는 이름에 맞는 좀 더 가벼운 낙서들로 채워보고자 한다.

 


02. 영화 <바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영화 <바비>는 제42회 지포니국제영화제(유럽 최대의 국제청소년영화제로 손꼽히는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고,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젼’부분 초청 화제작이다. 사실 이 부분은 포스터를 확인한 후에나 알 수 있는 내용이고, 이 영화가 가장 주목받은 이유에는 김새론-김아론 자매가 영화에서도 자매로 등장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김새론-김아론-김예론 자매는 한국판 패닝 자매로 불리며 일찍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직 어린 두 동생이 김새론의 연기를 따라오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동생들의 정형화되지 않은 연기는 꽤 주목해볼만 하다. 연기분야에서는 아직 한국판 패닝 자매가 따로 없는 만큼, 이들이 앞으로도 크게 성장해 한국의 패닝 자매가 될 가능성도 열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03. <바비> 거울 속의 욕망을 비추다
영화 자체를 현실을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했을 때 영화 안에서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거울’이 존재한다. 영화 안에서는 거울이나 창문, 문의 이미지가 유독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비춰지는 인물, 창 밖에서 인물을 비추는 카메라의 위치는 거울이나 창문의 이미지와 겹쳐져 분리된 이미지를 형성한다.

 

왼쪽부터 동생 순자, 아버지 망우, 언니 순영 세 가족의 단란한 모습.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얼굴은 순영과 순자의 얼굴이다. 순자의 얼굴은 화장대에서부터 이미 거울의 이미지에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비 인형이 되고 싶어서 화장을 하고, 꾸미는 순자의 모습은 순진한 아이에서 점차 멀어진다. 아이에 머물러 있는 언니 순영과 점차 변해가는 동생 순자의 얼굴은 거울을 기점으로 점차 달라지고, 그들의 운명 역시 갈린다. 그들이 자매라는 점 또한 거울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아이로서, 하나의 존재 같아 보이던 자매는 미국 입양을 기점으로 점차 멀어지며 분리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서로 다른 욕망과 이를 둘러싼 인물들의 입장 또한 분리와 투사를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관객은 어느 순간 영화를 현실의 어느 이야기로 착각하게 된다. 완벽한 거울 속의 이야기의 시작인 것이다.

 

때문에 영화 <바비>는 불편하다. 인물들의 욕망과 질투가 뒤엉켜 너무 현실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주요한 욕망으로는 역시 순자와 순영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순영은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반면에 순자는 언니와는 정반대로 욕심도 많고, 바비 인형을 동경하며, 바비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삐뚤어진 순자의 욕망은 순자를 점점 변하게 만든다. 아이의 가식, 생각보다 매칭이 잘 되지 않았다.

 

어느새 두 자매 앞에 바비라는 미국 소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바비의 아버지 스티브와는 달리 바비는 처음부터 순영에게 순수한 호감을 가진다. 바비는 순영을 입양하기를 바라지만, 입양의 이유가 동생을 치료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아버지의 입양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순영에 대한 호감보다는 동생의 생존에 대한 욕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스티브에게 펩시콜라를 내미는 순자.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욕망과 비슷한 어른들의 욕망도 등장한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버지 망우는 순영을, 이익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망태는 순자를, 바비의 아버지 스티브는 바비를 거울의 이미지처럼 그대로 투사, 발전시킨 인물형이다. 망우는 순영처럼 가족의 행복을 욕망하고, 어떻게 해서든 두 딸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망태는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조카를 이용한다.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에게 언어와 장애로 인한 소통의 부재는 기회로 작용한다. 스티브 역시 자신의 또 다른 딸을 위해 다른 아버지의 딸을 빼앗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인물들은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분리되고, 엉키기를 반복한다. 제 3자인 관객은 이 모든 인물들의 뒤엉킨 욕망의 방향을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지켜본다.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많은 이기적인 사건들을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04. 분리되는 가족 <바비>

 

순영과 바비. 그 사이엔 역시나 거울이 있다.


<바비>에서는 또한 분리되는 가족의 모습이 등장한다. 순영과 바비의 가족은 비슷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가족들에서 가장 먼저 분리되는 것은 여성상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존재는 부재하고, 어린 장녀가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다. 어린 소녀인 장녀가 맡은 어머니의 위치는 주변 어른들에 의해 자꾸만 위협 당한다. 결국 불완전해진 어머니의 자리는 가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삐뚤어진 욕망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한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면, 이미 우리나라의 드라마의 전개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고전소설인 <장화홍련전>부터, 최근 드라마까지 저런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불편하면서도 익숙했다. 결과까지도 예측 가능할 정도로.

 

순영과 순자를 안고 신이 난 아버지 망우.

 

<바비>에서 등장한 인물상의 분리 역시 모든 가족이 결국 해체되게 만들 것이다. 순영의 집에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순자가 미국으로 떠나고, 직접적으로 기존 가족 구성원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또한 순영이 가족 구성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망태가 한 짓을 알게 되면 그 역시도 가족 구성원이라는 연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바비의 가족 또한 그와 같을 것이다.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 바비는 정서적으로 아버지와 멀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바비가 싫어하는 순자의 심장을 이식받게 될 슈는 바비에게 새로운 이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결국 바비의 가족 또한 해체되게 될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이 해체를 막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어머니의 위치를 가진 소녀들은 갖가지 노력을 한다. 순영은 타이름의 방식을 포함해 간접적으로 저항을 하고, 바비는 아버지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소녀들은 이내 순응하고 만다. 불완전한 어머니의 위치는 오히려 가족을 더 위태롭게 만들 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소녀들은 순응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해체로 이어진다. 결국 이들의 가정이 분리되지 않을 방법이란 애초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필자는 영화가 매력적이라고 생각 이유 중 ‘삶과의 밀착성’을 가장 큰 요소로 생각해왔다. 물론 여기에서 지칭하는 ‘밀착성’은 필자에게 즐거운 유희의 측면에서 작용하는 것이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좀 경우가 달랐다. 현실을 직시하는 하나의 창, 거울에서 불쾌한 밀착성을 발견한 것이다. 가족의 해체, 불법 입양. 불쾌하게도 우리 현실의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다. 오늘 가방에 넣어온 출퇴근길용 책의 제목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장르는 범죄 및 스릴러물이다. 가장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싶다>이고, 한때의 꿈은 프로파일러였다. 프로파일러의 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남들이 잘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종종 읽곤 했다. 혈흔으로 타살 방법을 추리하는 내용의 책이나, 곤충을 통해 사인을 추리하는 책 등등. 하루는 불 하나만 켜놓고, 시체 사진이 가득한 책을 보는 필자의 모습에 엄마가 놀란 적도 있다.


이렇게 몇 가지를 나열하고 보니 최근에 본 영화의 제목이 <성난 변호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이 영화가 추리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은 <성난 변호사>였고, 지하철역 안에서 울리는 몹시 억울한 이선균의 목소리는 법정물에 등장하는 흔한 주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확인하는 필자에게는 이 영화는 당연히 법정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영화를 보기 전 몇 개의 한국형 법정물을 떠올리고 영화의 내용을 대충 추측해보았다. 가장 먼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등장한 감동적인 역전의 재판장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재판장면들이 생각났다. 뭐, 그렇고 그런 재판장면과 검사와 변호사들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진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화 내용은 의외로 진부하지 않았다. 일단 표면적인 모든 사건이 다 가짜다. 그런데 그 가짜로 포장된 것이 꽤 리얼해서 관객은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관객과 변호성(이선균) 변호사의 눈에 영화 속의 살인사건은 아주 간단해보인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는 스토커 김정환(최재웅)뿐이고, 그를 목격한 목격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혈액과 용의자의 지문이 묻은 증거물까지 있으니 이 사건의 용의자는 곧 범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건을 맡지 않으려던 변호성 변호사는(이하 변변으로 칭함)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맡게 되지만, 김정환의 결백을 믿지 못하고 재차 묻는다. “시체 어디로 숨겼어요?”  그래, 필자도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하셨어요?



어쨌거나 멍한 상태의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변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 그리고 용의자의 결백이 입증되려는 순간, 용의자의 입은 마침내 열린다. “제가 죽였습니다.” 그 순간의 얼빠진 변변의 표정은 꽤 볼만하다. 지하철 역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왜 이래!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엔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얼이 빠지는 필자도 존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변의 추리에서 김정환은 유일한 용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공범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해도, 단독 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김정환이 자신의 죄를 시인함과 동시에 사건은 또 다른 흐름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이 사건은 예측하기 힘든 형태가 되어버린다. 변변은 하루아침에 증거를 조작한 변호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더 이상 사건을 맡기 힘들어진 변변에게 로펌의 대표는 연예인 마약사건을 맡긴다. 평소 같으면 콧방귀를 꼈을 B급 연예인의 마약사건이지만, 마지못해 수락한 변변은 마약 혐의를 받고 있는 연예인을 만나 감형을 위해서는 같이 마약을 한 친구들을 쓰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정확하지는 않지만 4명을 적으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의리의 연예인 납셨다. 연예인은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면서 인원은 정확하게 얘기해준다. 딱 변변이 적으라고 한 인원에서 1명이 모자라는 인원수다. 변변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아무나 적으면 된다고, 라이벌이나 뭐 그런 사람들. 필자의 귀에는 이 말이 장애물처럼 여겨지는 사람 아무나 적으면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다시 살인사건으로 돌아와서 변변은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이번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한 번 끊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여기까지의 변변은 여전히 이번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인물이고, 그저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속물변호사이다. 그러나 살인사건을 계기로 그는 돈과 권력에 더 빠져 속물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문지훈(장현성)의 충실한 법률적 문제 처리반 개가 된다. 사실 이것도 전부 가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영화 내용이 전부 가짜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법하지만, 사실 큰 틀에서 보면 <성난 변호사>의 일련의 사건과 스토리들은 한 장의 조각보처럼 잘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므로, 모든 영화를 관람할 때 일어날 일을 대충이나마 추리하는 일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인정했듯이 이런 추리 영역은 오랜 습관으로 더 발달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추리 습관은 영화의 재미를 종종 반감시키기도 한다. 특히 법칙이 있는 영화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범죄 및 스릴러 장르만큼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공포인데, 이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고 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신이나 알 수 없는 존재가 튀어나올 장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 등이 대충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장소에서 필자는 오히려 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가장 예측이 안 되는 것은 관객들의 비명시점과 비명의 데시벨 정도다. 필자는 그게 더 무섭다.(악취미 같지만 공포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관객의 비명소리이므로, 영화가 너무 재미없을 때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감상하기도 한다.)


무튼 이렇게 습관화된 추리를 즐기는 필자에게도 <성난 변호사>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으니 얼떨떨하면서도 영화가 한층 재미있어졌다. 사실 이런 스토리임을 미리 암시해주는 복선 장치들은 쓰다 남은 천 조각처럼 영화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어서, 필자보다 더 촉이 좋은 사람이라면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 없이 감상할 수도 있다. 아마 없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 천 조각들을 잘 주워 조각보를 만들어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100% 가능하다. 이번엔 필자가 찾은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필자 역시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야 다시 천 조각을 줍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


- 영화에서 변변이 맡은 사건들 : 영화 초반부에서 변변이 맡았던 약의 부작용 관련 소송은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져온다. 관객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소송은 조각보의 바탕색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변변이 맡은 B급 연예인의 마약 사건은 데스노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냥 적으라고 내뱉을 때조차 변변은 자신의 이름이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0.1%도 의심하지 않았다.

- 사라진 시신 : 시신이 없는 사건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신은 애초에 시신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른 시신이 등장한다면? 바꿔치기할 가능성도 덩달아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체 바꿔치기는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바꿔치기했다면 두 번 바꿔치기도 가능하다.

- 덤앤더머 같은 용식(배유람)&갑수(민진웅) : 무식 혹은 생각 없음 사이에 있는 그들을 변변은 자기 아래에 있는 인물들로 생각하지만, 이런 그들이 변변의 위로 올라서는 순간이 가장 큰 위협이자 반전이 된다. 물론 변변은 곧 이들의 무식 혹은 생각 없음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돋보이는 변변의 덤앤더머 농락 장면은 지하철 씬이다.

- 문지훈의 개 : 문지훈의 대저택 내부에서 변변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개였다. 이중 이 개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주목해야 한다. 문지훈의 개는 저택 안에서의 변변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증거물 확보의 1등공신이다.

- 로맨스의 위치 : 로맨스의 위치는 관객이 가장 잘 속을 수 있을만한 지점에 있다. 보통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로맨스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변호사-검사, 변호사(혹은 검사)-조력자, 변호사(혹은 검사)-피해자 안에 하나에 속하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주요 로맨스의 위치를 진선민 검사와 변변에 두고, 서브 로맨스로는 변호사-조력자 구도의 브로맨스를 생각했으나 로맨스의 결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용의자-피해자의 로맨스, 그리고 서브로는 또 하나의 브로맨스)


이 외에도 세부 천 조각들이 존재하며, <성난 변호사> 관객은 이를 통해 전혀 다른 느낌의 조각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천 조각을 지나친 것 같다면 필자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주워도 무관하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위해 친절한 설명까지 놓치지 않는다. 놓친 관객은 설명을 참고해가며 다시 천 조각의 위치를 찾아나가도 무관하다. 자, 이제 각자의 조각보가 완성이 되었다면 잘 접어서 머리 한 켠에 넣어두기를 추천한다. 한국형 추리물 치고는 꽤 쓸만한 조각보일테니 말이다.




* <성난 변호사>의 용의자 김정환(최재웅)은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 등장한 아가씨와 동일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그는 씬스틸러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몹시 다른 매력을.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첫 번째 암살 대상 : <암살> 디지털 스포일러


매체에서 계속해서 언급하던 영화 <암살>을 드디어 감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재미있었다. 그리고 하필 본 날이 광복 70주년의 광복절이어서 작품 그 이상으로 의미 있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애국심이 끓어오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고, 배우진 역시 화려했다. 무엇보다 독립군 여자 저격수인 안옥윤에 눈이 갔다. 전지현이라는 배우가 여자 저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영화 내내 그녀의 행적에 눈이 갔다. 같은 여자가 봐도 결혼식장 씬은 아름다우면서도 멋졌다. 색의 대비가 명확한 장면으로 구성되었던 것처럼, 안옥윤 자리에 전지현이 있어야 할 당위성은 명확해보였다. 나머지 배우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감초 같은 역할과 대사는 필자를 139분 동안 홀린 사람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총 평을 먼저 언급하자면 필자의 의견은 ‘아쉽다.’에 가깝다. 일단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예고편은 물론이거니와 뉴스, 네티즌의 평가 등등을 접하며 이미 영화가 너무 익숙해져 정작 본 영화에서는 영화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은 분명 이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이런 디지털 스포일러를 당할 때마다 인터넷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정말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감상평이나 원작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 것을 감상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암살>을 보기 전에는 이 원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뉴스, 인터넷 할 것 없이 <암살>의 열기로 들썩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암살>에서 많은 장면들을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었고, 딱 그만큼 재미없었다. <암살> 디지털 스포일러를 암살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300불이면 뭐든 다 해준다는 그 남자에게 의뢰하고 싶다. 현재 환율로 300불은 35만 2,380원(15.08.16 기준), 이 돈으로 스포일러를 없앨 수 있다면야 투자할 만한 가격 아닐까. 도와줘요, 하와이 피스톨!



문득 영화관에서 영화를 처음 감상했던 때가 생각났다. 무려 15년 전 이야기다. 가족 대부분이 집을 비운 더운 여름 오후였고, 필자는 퇴근한 아버지와 함께 지금은 사라져버린 모 영화관으로 향했다. 당시에 고소하고 짭짤하던 팝콘의 맛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시선을 끌어당기던 <반지의 제왕>의 예측할 수 없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지의 제왕>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었던 필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상상했고, 예상치 못한 방향의 전개에 흥분하기도 하며 온 몸으로 영화를 즐겼다. 솔직히 3D, 4D가 넘쳐나는 지금보다 그 당시에 감상한 영화가 더 생생했던 것 같다. <암살>에서도 이 정신적인 3D, 4D를 즐길 여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더 생생하고 즐거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 두 번째 암살 대상 : 비슷한 영화 스타일과 굳어진 흥행 공식



아쉬운 느낌을 보탰던 것은 또 있다.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많이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살’이라는 주제는 많이 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 많았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가져오는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물들이 아주 낯익다는 것이다. 감초 역할로 종종 등장하는 배우 오달수는 물론이고, 하정우-전지현-이정재의 구도는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도둑들>과 <베를린>이 생각난다. 확인해보니 이 두 영화 중 <도둑들>과 <암살>의 감독(최동훈)은 동일인물이다. 또 다른 작품인 <베를린>의 감독은 현재 인기리에 상영 중인 <베테랑>의 감독 류승완이다.


굳이 영화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모르고 넘어갔을 것 같다. 그만큼 연상된 영화들이 차별화된 자체 영화스타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 영화의 시대상, 줄거리 등을 제외하고 영화만의 차별화된 스타일은 무엇이 있었는지 필자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통점은 몇 가지 이야기할 수 있다. 세 영화 모두 화려한 액션과 장면이 긴장을 이끌고, 감초 배우의 대사는 간간히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며 분위기를 이완시킨다. 자연스러운 반전은 관객을 별로 놀라게 하지 않는다. 다음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죽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던 인물의 대부분은 죽고, 소수만이 살아남아 다음 일을 도모한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영화들이라서 그런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흐름이 너무 비슷해 보인다.


사실 최근 상영하는 한국 영화들을 보면 이 같은 느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특정 타겟이 있는 컨셉형 영화이거나 화려한 액션 영화다. 두 가지 공식을 벗어난 영화는 대체적으로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극장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사와 배급사는 잘 팔릴만한 영화를 찾고, 감독 역시 잘 팔릴만한 영화 제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팔릴만한 영화는 보통 잘 팔렸던 영화와 비슷하게 제작되고, ‘잘 팔리는 영화’는 마치 수학 공식처럼 굳어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세 영화 역시 ‘잘 팔리는 영화’의 공식에 맞춰 충실하게 내용을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굳어진 공식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화에서 관객이 호응할 만한 공식은 이제 어느 정도 나와 있고, 그 익숙함이 주는 재미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이 암기 과목이 아니듯, 영화 역시 공식의 반복 나열에 지나서는 안 된다. 공식을 토대로 응용이 가능해야 한다. 다른 영화와의 차별성은 분명 그 응용 과정에서 드러난다.


평균을 유지한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나라 관객의 수준은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관객이 수준이 우리나라 영화 수준의 평균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사실 지금도 약간 넘어선 것 같다.) 2015년도 상반기의 흥행작이 주로 웰메이드 외화였다는 사실과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흥행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한국영화는 흥행성을 버릴 순 없을지라도 차별성은 꼭 챙겨 가야 한다. 동시에 이 문제는 제작 및 배급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관객이 있어야 더 다양한 영화도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 번째 암살 대상 :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상



<암살>은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평했듯이 필자 역시 이 영화가 볼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여자 저격수가 대장이자 히로인인 까닭에 전지현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볼거리가 많았다. 독립군 부대를 나오며 어둠 속에서 일본군을 저격하는 장면이나 까페 미라보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며 하와이 피스톨을 만나는 장면, 깨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위해 백화점에 등장하는 장면 등. 특히 잠깐 나온 백화점은 많은 블로거들도 언급할 만큼 꽤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전지현을 중심으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 또한 볼거리를 넘어 생각할거리다. <암살> 이전까지의 독립운동가는 주로 남성으로 표현되었고,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소 수동적인 여성으로 등장했다. 독립군의 식사와 바느질을 맡아 하거나 심부름, 혹은 정보원 역할을 하는 등 일부분을 담당할 뿐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주로 술집 마담이거나 술집 아가씨(혹은 기생)였으며, 전통적인 밥 짓는 여성상 혹은 남성을 홀려 정보를 빼내는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필자 역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단 매체를 통해서 접해본 적이 없었고,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늘 수면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살>에서는 대장인 안옥윤이 등장하고, 친일파인 강인국의 아내이자 안옥윤의 어머니인 여성 독립운동가 안성심이 등장한다.(그러고 보니 안성심으로 등장한 배우 진경은 영화 <베테랑>에도 출연한 인물이다.) 안성심의 존재는 초반부에 반짝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친일파인 강인국 앞에서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독립군을 숨겨줬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밝힌다. 또한 신고를 하겠다는 남편을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 뿐인가? 독립운동가의 도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보하기도 한다. 아주 담력이 큰 여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성심 역시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벗어나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옥윤은 안성심에서 더 나아간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안옥윤은 4발의 총알로 4명의 일본군을 맞추는 명사수로 등장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임무를 받아 그녀는 당당히 대장격을 맡기까지 한다. 작전을 세우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였다면 다른 남성 독립운동가의 작전을 수용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였겠지만 안옥윤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아가 작전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멤버인 황덕삼과 속사포가 초반에 망설이거나 생계형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적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을 부각시키기 위해 초반부에 굳이 남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속사포와 황덕삼을 낮춘 것은 아쉽다. 물론 그들은 영화 내에서 감초 같은 역할이므로 콩트 같은 상황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두 남성 독립운동가를 희화화해 상대적으로 높인 안옥윤의 여성 독립가로서의 입지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 다시 내려가고 만다. 하와이 피스톨과 염석진 옆에서의 안옥윤을 보라. 그녀가 변장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해도 존재감은 한층 작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의 입지가 기존과 비교했을 때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거짓 고백 앞에서 흔들리다 결국 아버지를 쏘지 못하는 안옥윤의 모습을 보라. 결국 강인국을 처단한 것은 하와이 피스톤이다. 치렁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부케총을 쏘는 모습은 또 어떤가. 강렬한 색채의 효과와 예술적인 장면은 분명 좋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남성 독립운동가의 몫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의 위치가 부각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아쉽다. 그래도 안옥윤이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등장과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상에서 더 발전했다는 점에는 큰 의의를 두고 싶다.




* 네 번째 암살대상 : 안옥윤과 미츠코 사이에 선 나, 혹은 누군가


필자는 <암살>를 보고 나서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필 70주년 광복절에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쌍둥이인 안옥윤과 미츠코라는 인물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안옥윤-미츠코 자매는 얼굴만 같을 뿐, 그 외의 공통점은 없다. 그런데 문득 그 둘에게서 필자 스스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얼굴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다음 대사를 살펴보자.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었다고.”(안옥윤)

“나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좋아해. 그런데 넌 안했으면 좋겠어. 경성에선 다 이렇게 살아.”(미츠코)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과 친일파 아버지를 둔 부르주아 여성 미츠코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반된 입장차를 보인다. 그러나 닮은 외모 때문인지 두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각각의 인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두려움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안옥윤과 독립운동을 지지하지만 동생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미츠코. 사실 크게 보면 두 사람은 외모만큼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락한 방향을 꿈꾼다. 필자 역시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역사는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안옥윤과 미츠코 사이에서 필자는 어디쯤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광복 70주년, 대기업의 건물에서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TV에서는 관련 다큐가 수시로 방영되고 있다. 사실 그래서 광복 70주년에도 달가운 마음보다 슬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로 사실 역사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필자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층 더 부끄러워졌다. <암살>의 후반부는 그런 필자,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는 것만 같다. 바로 김원봉의 대사였다.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잊음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필자 스스로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새삼스럽게 더 두려워졌다. 지금 잊혀져가는 역사는 얼마나 많은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필자에게는 가장 아픈 역사인 위안부 문제는 또 어떤가. 필자나 그 누군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문제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그것이 점차 현실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김원봉의 재조명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일본인의 존재 역시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나 필자는 안옥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기에 위 글에서는 생략했음을 밝힌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솔직히 쉬운 영화는 아니다.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간혹 지루하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의 깊게 우러나는 맛을 좋아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큰 결심을 하고 봐야 할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까지는 일반 관객의 시선에서 본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첫 소감이다.

 

그러나 196분의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을 더 관람한 필자의 소감은 그럼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이다. 일단 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예술이다. 영화 곳곳에서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고전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벽에 걸린 그림과 포스터는 실제 단편에 들어간 삽화이거나 연극 포스터이며, 전직 연극배우인 주인공 아이딘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에 나오는 양심에 관한 대사의 인용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운영하는 호텔의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명에서 따온 오셀로일 정도니 감독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그 깊이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는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인데, 안톤 체호프의 엄청난 팬인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은 무려 15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영화 <윈터슬립>을 제작했다고 한다. 편집 기간에만 6개월을 투자한 이 영화는 체호프의 문학을 영화로 옮긴 가장 뛰어난 작품”(시카고 트리뷴)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앞서 밝혔듯이 윈터슬립은 196분의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다. 그러나 영화 안에 들어있는 여러 메시지에 비해 복잡한 편은 아니다. 영화가 연극처럼 두 인물의 대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정된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인물간의 대화 양상에 따라 에피소드 별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으므로, 만약 이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인물간의 대화 별로 나누어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화 별로 나누어 정리한 후 영화의 중심 소재인 으로 각 장면을 다시 재정리하는 방법으로 감상했다.

 


황량한 들판을 걸어오는 아이딘


 

영화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오셀로호텔의 주인인 아이딘은 고립되어 있는 호텔처럼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인터넷을 통해 지역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방법뿐이다. 그는 이 칼럼 작성을 위해 다른 것들은 남에게 맡겨 두고, 타인의 을 절대 넘보지 않는다. 나머지 일은 타인에게 맡기고 잠재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모든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을 닫아둔다. 이 모습은 영화 초반부의 첫 장면에서부터 연상이 가능한 내용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이딘은 황량한 곳에서 걸어오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놀러온 관광객 무리가 멀리서 웅성거리는 모습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 첫 장면부터 고독감이 시야를 강타하기 시작한다. 아이딘의 코트는 황량하게 펄럭이며,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을씨년스러움을 강조한다. 그는 모든 장면에서 온 몸으로 그의 고독감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그럴수록 고독감은 더욱 강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아이딘을 제대로 응시하는 인물이 초반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고립된 호텔과 방 사이를 부유할 뿐이다.

 


아이딘을 응시하는 일리야스



이런 아이딘의 고독감이 초반부에 강조되었기 때문인지 돌을 던지기 전의 일리야스의 시선은 강렬하게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일리야스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의 수면처럼 고요하고도 강렬하게 빛난다. 관객의 불안한 느낌은 적중해 일리야스는 아이딘이 탄 차창 쪽으로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창문은 여러 조각으로 균열이 일어난다.

 


아이딘이 탄 차의 창문에 일어난 균열


 

이 순간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일 것이다. 아이딘이 닫아놓은 에 균열이 생기는 첫 장면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는 이 균열의 틈을 통해 타인의 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이 장면은 관객이 균열의 틈을 통해 영화 속 인물들의 이중성을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관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필자도 이 부분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과연 타인이 보는 모습과도 일치하는가? 나의 선함, 혹은 악함은 타인에게도 똑같이 인식되는가? 어쩌면 필자도 아이딘처럼 나만의 에 갇혀 그동안 많은 것들을 무지 혹은 선악으로 나누어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함께 지옥은 타인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영화 속 아이딘의 모습을 통해 구현된다.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딘은 극도의 고독감에 빠져든다.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아이딘 본인과의 관계에도 적용되어 아이딘은 이중의 고독감에 빠진다. 그야말로 타인이라는 지옥에 빠진 셈이다. 특히나 아이딘에게는 잘 안다고 생각했던 본인의 모습조차 타인처럼 인식되는 순간이 더 외롭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는 균열의 틈이 벌어질수록 더욱 심화된다.

 


균열의 틈을 응시하는 아이딘


 

그렇다면 이 균열의 틈은 영화 안에서 각 인물들의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과연 부정적인 결과만을 불러오는가? 필자는 이 의문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균열의 틈을 통해 타인의 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엿보기로 했다. 추가적으로 영화의 개봉관이 적어 많은 사람이 접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스토리를 세부적으로 서술했음을 밝힌다.

 

 

* 아이딘 측 인물과 이스마일 측 인물 사이의 균열의 틈 - 빈부와 자존심 사이

 


이스마일과 히다예의 대화장면


 

영화 전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균열의 틈은 단연 아이딘과 이스마일의 집안의 대립이다. 외면적으로 크게 부각되는 문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아이딘은 이스마일의 집이 몇 달째 집세를 밀렸다며 집사 역할을 하는 히다예에게 투덜거린다. 그러나 아이딘은 이 집세 문제가 본인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히다예와 변호사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정확히는 위임하는 이다. 왜냐하면 히다예는 모든 문제를 아이딘과 상의하여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딘은 이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무지의 영역으로 취급하고 철저히 무시한다. 타인의 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 집주인과 세입자의 갈등은 이스마일의 아들인 일리야스가 아이딘의 차창에 균열을 낸 후에 더욱 심화된다. 일리야스를 잡은 히다예는 일리야스를 집에 데려다주며 깨진 차창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는데, 이때 이스마일이 날카롭게 응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스마일은 처음엔 자신의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히다예에게 당당히 맞서다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아이의 뺨을 때린다.

 


일리야스의 뺨을 때리는 이스마일


 

이 장면은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다. 사실 이스마일은 본인이 할 수 없었던 강자(아이딘)에 대한 항의를 한 아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아들과 닮은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강자 앞에서 그는 아들을 혼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야하기에 아이의 뺨을 때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스마일의 이중적인 입장은(여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인물의 이중성이 등장한다.) 아이와 이스마일의 사이를 휘감는 바람소리에 의해 더욱 쓸쓸하게 부각된다. 가난하기에 드러낼 수 없는 자존심이 그의 마음에 바람처럼 불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집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장면은 아이딘의 균열의 틈을 더 벌려놓는 사건이 된다.

 

이 장면 외에도 아이딘 가족의 식사 시간에 등장한 이스마일의 동생 함디와 일리야스의 등장은 빈부와 자존심에 대한 물음을 다시 야기한다. 아이딘의 가족은 식사시간에 등장한 불청객(함디와 일리야스)을 식탁에 앉아 응시한다. 위에서 아래를 향한 응시는 불편하다. 특히 자선 사업을 하는 아이딘의 아내 니할의 계속되는 질문은 그런 점에서 더욱 불편하다. 차창을 깬 것에 대한 사과를 핑계로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함디는 본인의 의중을 숨긴 채(역시 이중성이 등장한다.) 일리야스에게 사과를 강요한다. 아이는 억지로 사과를 하려고 하지만,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사실 일리야스는 영화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사이에서 가장 깨끗한 을 가진 인물이다.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행동 또한 감정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을 가진 일리야스의 행동은 모든 어른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일리야스의 돌을 던지는 행위, 뺨을 맞는 장면, 쓰러지는 장면 모두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일리야스의 맑은 은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쓰러진 일리야스


 

그렇기 때문에 일리야스의 쓰러지는 장면은 니할의 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감독은 이를 장면의 교차 편집을 통해 표현하는데, 일리야스가 쓰러지는 장면과 교차되는 니할의 놀란 표정은 효과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때 니할의 에 일어난 균열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스마일 집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리야스가 인상 깊었던 니할이 남편이 부재중인 틈을 타 이스마일의 집에 방문해 큰돈을 건넸던 것이다. , 이 얼마나 오지랖이 넘치는 상황인가! 니할이 이스마일에게 돈을 건넴으로서 이스마일 집안의 가난은 그녀가 심심풀이로 하는 자선사업의 하위 개념으로 추락하고 만다. 물론 가만히 있을 이스마일이 아니다. 이스마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니할이 건넨 큰돈을 불길 속으로 던져버리고 만다. 이에 니할은 일리야스의 기절 때 그랬던 것처럼 깜짝 놀라며 이스마일의 집을 뛰쳐나오고 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운전대를 잡은 니할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결국 선의라고 생각했던 니할의 행동은 이스마일에게는 선의의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 속의 인물들은 자신만의 에 갇힌 채 자신의 행동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특히 아이딘측 인물들의 경우 이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의의 행동들은 타인에게는 선의의 행동이 아닐 수도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단지 부자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아이딘의 집안과 대비되는 집안인 이스마일의 집안은 선의의 행동만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 앞에서 자존심만 세우는 이스마일의 모습, 모든 것을 확실히 맺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함디의 모습 역시 옳은 행동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그들 모두가 타인의 을 무시한 채 본인의 안에서만 머물렀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 아이딘 집안의 균열의 틈 - 도덕과 위선 사이

 


아이딘 집안 사람들이 식사하는 장면


 

빈부의 키워드를 제하고 나면 이제 주목해볼 것은 아이딘 집안 인물의 균열의 틈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균열의 틈 역시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아이딘의 경우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칼럼을 통해 본인이 도덕적인 사람임을 어필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글을 써가며 본인 스스로 도덕적이고,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세입자와의 문제를 회피하고, 아내의 권태를 못 본 척 하며, 여동생의 불행도 무시하기 일쑤다. 이스마일의 집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던 그는 호텔로 돌아온 후에는 이스마일의 집 살림살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이를 칼럼의 소재로도 사용한다. 강력하게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여동생 네즐라 앞에서 그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물론 발끈하며 자신의 말을 계속 내뱉기는 하지만 여동생을 등진 상황에서 여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그의 행동을 대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사실 그와 여동생의 대화 패턴은 늘 이처럼 일방적이다. 둘의 대화는 대부분 소통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로를 응시하는 니할과 아이딘


 

그래도 아이딘이 강자로 군림하는 관계는 있다. 바로 아내 니할과의 관계이다. 니할의 모든 것은 아이딘의 재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본인을 강자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딘은 본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니할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한다. 니할은 이런 아이딘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아이딘의 물질적인 안락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니할은 이 권태의 늪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선사업을 추진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순종적인 편이던 니할은 자신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자선사업에 관여하려는 아이딘을 못 견뎌한다.

 

만약 니할의 자선사업이 정말 도덕적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이었다면 니할의 태도는 공감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자선 사업은 타인을 향한 진정한 자선 사업이 아니다. 자신의 권태를 잊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줄 방법일 뿐이다. 아이딘은 이런 니할의 태도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비판한다.(이와는 반대로 네즐라는 니할의 자선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니할은 결국 이스마일에게 돈을 건네는 자선 행위를 통해 극단적으로 아이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이 자선 행위는 오히려 위선으로 변질되고, 결국 그녀는 그녀 스스로 경멸하던 남편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니할과 대화를 나누는 네즐라


 

그렇다면 네즐라는? 역시 자신만의 에 갇힌 인물이다. 그녀는 식사 자리에서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요지는 선이 악에 대항하지 않음으로서 악을 이긴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선악 키워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네즐라의 본인만의 고립된 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네즐라의 이 논쟁은 아이딘 집안의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을 점점 닫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네즐라는 본인의 결혼생활을 정당화하기 위해 꺼낸 이 논쟁을 정작 실제로 적용하는 단계에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본인이 아끼는 컵을 깬 가정부를 어떻게 벌을 줘야하나 니할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아이러니는 더욱 돋보인다. 그녀는 모든 문제에 있어 자신만의 논점이 옳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문제는 정당화시키고, 타인의 문제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마치 본인의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처럼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딘과 다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다음 대사를 보자.

 

난 삶의 방향을 설정할 열정도 없지만 그러는 오빠는? 오빠랑 상관도 없는 일에 좋은 시절 다 날렸잖아. 연금술사처럼 무모하게 사는 거 지겹지도 않아? 오빠 문제가 뭔지 알아? 고통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야. 토 달지 마. 내 말 인정해. 용감하게 진실에 직면해야 해. 더 사실적인 걸 찾고 있다면 파괴적이 돼야 해.”

 

네즐라는 본인도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모순적인 논쟁으로 속이면서도 오빠에게는 사실적인 걸 찾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파괴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도덕과 위선 사이에 선 네즐라는 아이딘의 집안 인물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한 존재, 아이러니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딘 집안의 인물들은 도덕과 위선 사이에서 도덕을 지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위선에 가까워지고 만다. 역시나 원인은 타인의 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의 고립이다.

 

 

* 아이딘 스스로의 균열의 틈 - 본인과 타인 사이

 


창 너머를 응시하는 아이딘


 

이제 가장 내부 균열의 틈이 남아있다. 바로 아이딘 스스로의 균열의 틈이다. 이는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일리야스가 던진 돌에 의해 생겨난 아이딘의 균열은 영화 속에서 여러 인물과 부딪히며 점차 벌어져간다. 그는 점차 타인의 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이 과정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타인의 균열의 틈에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이스탄불로 떠나던 아이딘은 기차역에서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아이딘은 창문 너머의 니할을 응시하며 독백한다.

 


기차길에 서 있는 아이딘


 

니할, 나 안 갔어. 못 갔지. 늙어서일 수도 있고 미쳐서일 수도 있고 내가 달라져서일 수도 있지만 좋을 대로 생각해. 나도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내 안의 새로운 내가 나를 놓아주지 않네. 나한테 가라고 하지 마. 이스탄불에 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았어. 가 봤자 모든 게 낯설 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알아줘. 내겐 당신뿐이라는 사실.”

 

놀랍게도 일련의 사건들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아이딘의 의 균열의 틈을 벌리며 을 점점 열리게 만든다. 이제 아이딘의 균열의 틈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재탄생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니할에 대한 사랑으로만 언급되며 끝난다는 점은 아쉽다. 아이딘은 니할을 향한 독백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으나 그 실체를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 역시 아이딘과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은 여러 메시지를 통해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만 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열린 메시지는 관객의 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화의 결말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하나의 생각이나 메시지로 정리되며 끝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윈터슬립>의 경우는 꽤어렵고 아쉽다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그가 윈터슬립’, 드디어 겨울잠에서 깨어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아이딘의 고독한 은 마침내 어느 봄날에 활짝 열릴 것이다. 그리고 아이딘의 열린 은 외부에도 영향을 미쳐 타인의 까지도 열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관객들의 차례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은 아이딘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을 엿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을 열 준비가 이미 되어있기 때문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누군가 어벤져스에 대한 감상평을 묻는다면 본 후에 같이 얘기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에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있고, 재미의 개인차가 있으니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먼저 밝히자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번 어벤져스 시리즈를 재미있게 감상했다. 캐릭터도 좋아할뿐더러 우리나라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시원시원한 스케일이 좋았다. 울트론이나 비전과 같이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도 나쁘지 않았고, 한국의 수도인 서울까지 등장하는 등 실로 볼거리도 많았다. 그러나 그 볼거리는 너무 과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볼거리가 넘쳐나서 관객의 시선은 분산되어 혼란스럽고, 생생함을 위해 3D 버전을 선택했다면 그 시선 분산의 정도는 빈번하다. 큰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 스크린에 가득 찬 볼거리들, 많은 캐릭터의 등장 등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를 정도다. 물론 그것이 어벤져스라는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치임에 틀림없다. 필자 역시 그런 장치를 좋아하는 편이고, 그런 화려한 장치들로 구성된 영화를 종종 감상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시리즈에 이어 이번 영화에까지 그런 요소들이 복제되듯 등장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적어도 이번 시리즈는 어벤져스1(편의상 1, 2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지칭한다.)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영웅들이 하나의 팀으로 적과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말았어야 했다. 단결력 있는 하나의 팀,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웅들의 모습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벤져스2는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캐릭터는 여전히 개인적으로 행동하고, 새롭게 등장한 영웅들 역시 팀 어벤져스에는 아직 어색해 보인다. 사실 캐릭터의 이러한 행보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토르와 아이언맨만 놓고 봐도 장르가 신화와 SF로 거의 반대의 장르에 속하지 않는가. 한 영화 안에 여러 캐릭터들을 모아 놓았으니 개별적으로 행동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벤져스1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팀워크 구축의 상황으로 회귀한 어벤져스2의 내용이 관객에게 마냥 반가울 리가 없다. 두 발 전진을 위해 한 발을 물러섰다고 하기에는 아쉬운 포장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환영이라는 장치를 삽입해 캐릭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까지 하니 지켜보는 관객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하고, 3D와 스케일로 인해 점차 피로해진다.

 

이러한 피로감을 무릅쓰고 모두가 기대했을 한국 배경에 대해 언급하자면,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한국 관객들이 열광할 만한 한국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얘기해주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영화에서 한국이 등장한다는 점은 자국민으로서 기쁜 일이지만, 이 영화에서 과연 한국이라는 배경이 등장할 필요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문, 헬렌이 한국계이기 때문에 한국을 선택했다? 헬렌의 혈통만으로는 영화의 배경의 하나로 서울을 선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그녀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울트론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 헬렌은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외국어와 첨단 기술에 능통하고 이 때문에 다른 인물들이 조언을 구하는 대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첨단 과학의 중심지로 서울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액션신이 등장한 강남 일대가 참 평범하기 그지없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네티즌들이 합성해서 올린 배경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물론 촬영을 빌딩숲 한 가운데에서 진행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첨단 과학을 보여줄 만한 배경을 선택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본 적 없는 전철의 등장신이나 다리 위에서의 액션신보다 그런 필연적인 구체적인 배경이 먼저 설정되었어야 했다. 그런 설정 없이 서울을 등장시키다보니 필요 없는 전철의 질주신이 등장하고 다리 위에서의 액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점점 따지다보니 이 영화에서 한국의 도시 서울이 등장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번 어벤져스2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를 높이고 싶은 마블의 노림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마블사에서 최근 개봉했던 영화 중 킹스맨의 한국 흥행을 눈여겨본 결과일지도 모른다.

 

 

추가적으로 헬렌의 첨단 과학 연구소는 한국인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서울의 인공섬(세빛섬)에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서울시가 어떤 홍보효과를 누리고 싶었다면 이 역시 실패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인공섬을 가보고 싶은 장소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으며 이를 활용한 홍보도 역시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삼각지역 근처를 지났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어벤져스의 촬영지를 언급하는 방송 내용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어벤져스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잘 들리지도 않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 여기가 그 인공섬 근처인가보다.’ 정도일 것이다. 한국인에게도 그렇다면 외국인에게는 오죽할까. 만약 홍보 효과를 노린다면 한국인도 잘 모르는 섬을 외국인에게는 어떻게 설명하고 홍보해야할지 고민을 해봐야할 문제다. 물론 여전히 그만큼의 홍보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 다음으로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어벤져스는 영웅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답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관객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인물에 집중 된다. 사실 이전 시리즈보다 어벤져스2에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들은 팀 어벤져스에는 어색해보였을지 몰라도 인물 자체만으로 보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영화 안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비전이 제일 좋았다. 그 특유의 인간인 듯, 인간 아닌 표정이라든가, 펄럭이는 망토가 왠지 모르게 정겨웠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울트론과 대조되는 그의 인간미(그것을 인간미라고 할 수 있다면)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포스터에서 그를 보니 왠지 더 친근하고 반갑기까지 했다.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쌍둥이 남매의 경우도 같은 팀으로 합류하게 되는 스토리의 개연성 측면에서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 자체의 캐릭터로는 나쁘지 않았다.(나중에 그들이 다른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알았으나 어벤져스2에 등장하는 그들은 그런 배경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남매는 둘 다 어벤져스에 계속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퀵 실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남매의 활약을 한 번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부분은 예상치 못한 전개라 다소 신선하기도 했다. 특히 스칼렛 위치가 어벤져스 팀에 계속 잔류하게 되는 강력한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한참이나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들의 비중이 기존의 어벤져스만큼, 혹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이번 시리즈에서 기존의 캐릭터들은 그 이전 시리즈의 임팩트가 없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상처입고, 갈등하고, 어딘가로 떠나기까지 한다. 신이라는 토르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환영을 조심하라고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는 와중에도 본인도 환영에 당한다. 그 뿐인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알아볼 것이 있다며 훌쩍 떠나기까지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웅들이 이렇게 책임감이 없었나? 내가 마블의 세계관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영웅들을 쉬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하기에는 관객에게 너무 불친절하고, 책임감이 없는 처사다.

 

심지어 어벤져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호크아이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은 더더욱 그렇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나무를 하는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신선해보였을지 몰라도 나는 전혀 재미의 요소를 느끼지 못했다. 호크아이가 가정을 이루고 따뜻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호크아이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장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제작진이 영웅들의 인간미와 은퇴를 위해 이를 설정한 것이라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번 영화 한 편을 보고 어벤져스1에서 환호했던 영웅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시들해졌고, 그 영웅 중 일부의 은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어벤져스1보다 더 심화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의 힘을 조금 뺀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물론 그런 심화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마블에서도 가벼운 농담만으로 영화를 채우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영화 관련 키워드 중에는 분명 사람, 인공, 도덕과 같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런 키워드를 다뤄보고 싶어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블이 그런 것들을 전혀 하나로 묶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사람과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다면, 이는 울트론과 아이언맨을 중심으로 좀 더 극대화시켜서 표현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둘은 비슷한 존재에 대한 라이벌 의식 정도로만 표현된다. 정체성이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각자의 내면적 갈등만이 아니라 좀 더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던가, 쌍둥이 남매가 기억하는 스타크 사의 폭탄과 같은 문제를 좀 더 다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다룰만한 요소들은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이를 위해 캐릭터의 힘을 뺐다고 하기에는 힘이 빠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니 어벤져스2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만 다룬 것 같은데, 혹시 누군가 오해할까 싶어 다시 언급하자면 필자는 사실 어벤져스2를 꽤 재미있게 감상했다. 원래 좋아할수록 더 아쉬운 점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지적할 것이 더 많았을 뿐이다. 필자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계속해서 보고 싶고, 그를 위해서는 어벤져스2의 아쉬움을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칭찬보다는 지적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다룰 이야기는 꽤 중요하다.

 

 

마블의 열혈 팬들에게는 어쩌면 적용되지 않을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많은 아쉬운 점들과 더불어 어벤져스2를 접하는 필자와 같은 일반 관객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이 영화 하나에 많은 이야기들이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블이 그리는 큰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필자는 종종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다. 사전에 어벤져스2에 연관된 영화를 전부 보지 않았고, 봤다 할지라도 그 순서가 뒤죽박죽인 탓이었다. 그러니까 마블영화의 특징인 쿠키 영상에  이야기하자면, 이전 쿠키를 먹지 않으면 나중에 먹는 쿠키의 맛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먹어도 맛을 알 수 없는 쿠키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전작보다 어벤져스2는 마블영화 초보자에게는 더 불친절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도 더 심화될 것만 같다. 마블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이상 마블의 세계관을 정독하지 못한 관객들은 점차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다른 영웅들이 등장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 머리가 아픈 문제다. 이에 대해 마블은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족하면 니들이 찾아보든가.’라는 식의 태도로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며 전작보다 더 불친절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태도는 새로운 마블 초보들이 마블 영화에 입문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기존의 마블 팬들을 더 오타쿠스럽게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일부 마블의 열혈 팬들은 더 즐길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나올 시리즈를 감안했을 때 이는 결코 발전적인 방향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만의 축제가 되어버리면 마블 시리즈는 그저 팬픽 문화 이상으로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팬픽 문화 수준에 머무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관을 이해하는 팬들만 존재할 경우 마블 시리즈는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마블은 팬픽 문화 수준에 머무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모두가 이해하는 것을 더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블은 마블만의 세계관을 더 정교하게 짜고 싶다면 열혈 팬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일반 팬들을 위한 통로를 반드시 열어두어야 한다.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가 팬픽 수준으로 고착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노력 없이는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는 점점 그들만의 축제가 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것이다.

 

물론 찾아볼 수 있는 연결 영화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다. 그런 면에서 연결 영화가 많은 마블은 참고할 영화가 많아 좋지만, 좋은 영화라면 한 편의 내용만으로도 초보 관객까지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마블 영화를 보며 얻은 교훈은 있다. 적어도 새로운 마블 쿠키를 맛보기 전에 이전 쿠키들을 순서대로 다 맛봐야 그나마 맛을 알 수 있다는 것. 필자는 다음 쿠키를 위해 이번에는 이전 쿠키들을 맛보고, 우유도 마시며 다음 쿠키의 맛을 최대한 느껴볼 예정이다. 아마 다른 관객들도 필자처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블에서도 이를 감안해 좀 더 친절하고 맛있는 쿠키를 만들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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