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다. 그야말로 뼈아프게 졌다. 최근 논란인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야권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 정당들은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 4곳 모두에서 모두 참패했다. 선거를 앞두고 야권은 내심 자신했을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몇몇 중진 의원들을 비롯해 지역단체장, 심지어 현직 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까지 리스트에 올라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다. 대표적인 새정치연합 텃밭이었던 ‘광주(서구을)’는 물론, 지난 27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야권 세력이 승리했고 불과 얼마 전까지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이 있던 서울 ‘관악을’에서마저 패배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그 귀추에 여야의 이목은 더욱 집중됐었다. 바로 내년에 있을 총선의 결과를 미리 가늠해볼 ‘바로미터’ 역할의 선거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고 제1야당이라는 새정치연합, 그리고 정의당을 비롯한 군소정당들의 존폐 위기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29103&m_no=2&sec=7

 

새정치연합이 내세운 선거 구호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정권심판론’이었다. 선거 직전에 터진 ‘성완종 리스트’에 기대를 걸었지만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표를 행사하는 데 있어 냉담했다. 더구나 새누리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언론들의 노무현 정권과 연관 짓는 물 흐리기 전략으로 기사 면을 도배하는 통에 대다수 국민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애초에 이번 재보궐선거는 시작 전에 정치 구도상 야권에 불리했다. 헌법재판소의 무리한 통진당 해산판결로 인해 치러지게 됐고, 이미 야권을 향해 ‘종북’이라는 근거 없는 낙인을 찍는 여론이 형성된 이상 중간층의 민심은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는 부당한 정당해산판결에 반대하여 야권이 한 마음으로 ‘前 통진당’ 후보들에게 양보하고 연대하여 다시금 후보로 나서게 해주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었다. 통진당의 해산판결은 곧 야권 전체의 위기를 몰고 올 수 있을 만큼의 무서운 사건이기 때문에 그 부당함에 정면돌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거에 도의란 물론 중요한 요소이지만 도의만으로 선거를 치를 수 없는 노릇일 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확신 없는 희망을 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운 이유들을 극복하길 바라는 심정에서라도 야권이 더더욱 승리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제1야당이란, 야권의 큰형님을 자처하는 새정치연합은 이번 선거에서도 무능력한 형님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4곳에 불과한 ‘미니’ 선거였지만 정권심판론을 외치는 것뿐만이 아닌 정책과 비전 있는 선거를 내심 기대했었다. 예전과 달리 국민들은 이제 선거를 임하는 데 있어 더 신중해지고 성숙했다. 결코 ‘못 살겠다, 갈아보자’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만 외치는 선거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오늘날 유권자는 이념과 정당에 상관없이 진정 자신의 삶을 더 희망적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정책을 내놓는 후보를 지지한다.

 

오마이뉴스 고정미

 

결국 이번 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은 ‘야당심판론’이란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새정치연합의 그동안의 오만함과 무능함을 국민들이 오히려 심판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나 야권 텃밭인 호남의 결과는 그 민심의 심각성을 더욱 또렷이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오히려 총선이 아닌 재보궐선거에서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이 다행일 수 있다. 총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개선의 여지가 주어진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물론 야권 분열이 참패의 원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몇몇 야당 관계자와 지지자들의 입장을 보면 답답하고 화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음 제20대 총선이 1년도 채 안 남았다. 그래서 지금 야권들에게 4.30 재보선 성적표를 들여다보면서 더욱 ‘처절히 절망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야만 자신을 더욱 되돌아보고,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치열한 전략과 정책을 세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 총선은 야권 진영의 운명을 가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이듬해엔 대선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사활을 걸고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2010년 국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획기적인 정책들이 펼쳐지는 지방선거를 경험했고, 아직도 잊히지 않을 만큼의 강한 인상을 느꼈었다. 이제는 야권 세력들에게 그 저력이 아직 남아있음을 국민들께 다시금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때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대외적 전쟁과 내적 착취로 인해 발생한 종주국과 식민지의 종속적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 등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배제의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한 것들로 점철된 것을 보며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데 그러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왜 이기적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집단에 속한 인간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일제 강점기 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헌병대에 근무하는 어떤 일본 장교는 심성도 착하고 친구들에게 더없이 믿음이 가는 벗이며 부모에게 효도도 하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요, 아내에게는 더없이 든든한 남편이다. 하지만 그는(그가 속한 일본이라는 국가, 헌병대라는 조직의 입장에서) 조선인 불순분자 사범을 대할 때만큼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고문을 자행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그 일본 장교는 과연 선한가? 악한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1920,30년대 독일은 실업률도 높고 국민은 빈곤에 빠져 있었다. 변변한 자원도 없고 식민지도 없었던 독일인들이 ‘살기 위해’ 내린 ‘합리적인 선택’은 아이러니하게 ‘전쟁’이었다. 합리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기껏 선택한 결정이 전쟁, 즉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1899년 발발한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계 이주민인 보어인과의 전쟁 당시 영국군은 보어인들의 조직적인 게릴라전에 맞서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불태우고 보어인 여성과 노약자를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가혹하게 다루었다. 무고한 보어인 부녀자를 발로 차는 걸로 묘사된 영국군의 모습과 달리, ‘집단의 범주가 아닌 개인 단위로서의 영국군’은 아마 선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출처: https://teachwar.files.wordpress.com/2013/05/boerwar_camp.jpg)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 집단에 속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개인은 선하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비도덕적일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우리에게 답한다. 그리고 그 주요원인은 ‘이성의 한계’와 애국심과 같은 ‘집단의 생존 욕구’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의 한계’는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현실적으로 압도하는 ‘사회조직의 가치와 집단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사회조직이 국가일 때 이성에 입각한 개인의 이성과 양심 표현은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현실에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성과 양심은 생각보다 집단적 이기주의와 환상 앞에 쉽게 굴복한다. 계급투쟁과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브리앙(Aristid Briand, 1862~1932, 프랑스의 정치가)도 정권을 잡자 ‘사회의 생존권’을 앞세워 노동 계급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들에게 충성심을 강요하였다. 애국심은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한편, 국민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이타주의적 미덕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포장된 이타주의는 어느새 ‘국가의 생존’이라는 미명하에 국가 이기주의의 형태로 변질된다. 앞서 예시를 든 일본 장교의 경우, 타인의 신체에 대한 고문과 억압은 개인적인 행위로는 분명 비인간적이지만 국가에 충성하고 안보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조직적 정당성의 외피를 입는 순간,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본받아야 할 애국심으로 돌변한다. 이렇듯 국가이기주의는 여러 비도덕적 행위를 국가의 이름으로 면죄한다.

 

 

"레벤스라움(Lebensraum)",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생활권 확대’(Lebensraum)를 주장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히틀러와 독일인들은 전쟁을 통한 침략 행위마저 정당화했다.
(출처:http://constitutionalistnc.tripod.com/hitler-leftist/id9.html)
 
그렇다면 애국심은 왜 필연적으로 국가 이기주의로 변하는가? 첫째로 국가는 여러 개인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의무를 이행한다는 측면에서 개인보다 도덕적 의무감에서 자유롭고 두 번째는 국가 간 관계는 사실상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에 국가의 폭주를 제재할 실질적 제도와 장치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집단의 생존 욕구에 기인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존욕구가 국가적 차원으로 응집되면 그 생존 욕구는 더욱 절실해지고 이에 따라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집단에게 있어 ‘자기보존욕구’는 곧잘 이기적 충동으로 변하기 쉽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집단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술했듯이 사회와 달리 국가 간 분쟁을 조정해주는 상위 기관이 부재하기 때문에 국가는 타국에 대한 침략적 행위도 생존권 확보를 명분으로 정당화한다. 아울러 양보와 소극적 태도가 상대 국가에게 곧 나약함과 군사력 부재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국가 간의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가진 자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시혜적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이러한 생존의지(will-to-live)가 쉽게 권력의지(will-to-power)로 전환된다는데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힘을 낮출 때 까지 몸을 낮추는 전략)와 같은 방어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과거 중국의 외교정책이 오늘날 아시아에서 주변국과 영토분쟁까지 각오하며 패권을 겨루는 ‘적극적 민족주의’로 쉽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그들은 ‘중국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항변한다. 상대국의 존재 자체가 자국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내 것만 잘 지키면 생존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기준점은 통용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남의 것을 먼저, 그리고 최대한 뺏어야 그것이 곧 자국의 생존권을 지킨다는 자기보존 논리가 팽배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힘의 대결장’이었고 내가 살기 위해 먼저 남을 침략하는 ‘예방적 성격의 전쟁’(preventive war)이 빈번하였으며 오늘날 서구 선진 산업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는 주변부를 착취하여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이기심에 ‘적정함’이란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필요 이상의 욕구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존과 권력의지가 교묘하게 섞인 애국심 앞에서 지성인의 이성과 양심은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성인과 조건 없는 자애심을 강조해온 종교적 지도자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국가에 만연했을 때, 오히려 체념 내지 편승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20년대 바티칸과 교황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방관하였고 1930년대 독일의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은 나찌의 팽창을 전혀 견제할 수 없었다. 그들도 이성에 입각한 정의로움보다는 우선 ‘국가의 생존’을 ‘사회와 개인의 보존’으로 동일시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자기보존욕구에 부분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체로 애국심은 이성과 논리의 메커니즘의 통제를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맹목적으로 추동된다. 헌신적인 충성의 맹목적인 성격이야말로 국가 권력의 기초이며 도덕적 제한을 전혀 받지 않고 무한대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 토대이다.

 

국제질서와 교육으로 집단이기주의를 막을 수는 없을까?

 

국가 간에 항구적인 평화 마찬가지로 불가능에 가깝다. 혹자들은 과거 베르사이유 체제나 냉전시대의 데탕트, 오늘날 각종 군축 협상과 UN과 같은 국제기구의 활성화로 국가 이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평화는 신사적인 압제(?)를 통해 불만이 가까스로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현실에 더 가깝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국제 사회에도 불평등과 이에 따른 군소 국가들의 불만이 존재한다. 2차 대전 승전 5개국(미,영,프,중,러)이 상임이사국이라는 감투를 쓰고 과거의 패배자들과 신생 약소국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 그들의 불만을 은폐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평화란 어느 경우에든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러한 직접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있는 바로 그 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체제에 대한 반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증오심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영구적인 긴장 상태, 혹은 잠재적인 전쟁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으로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정책으로 ‘교육’을 구제 수단으로 내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이러한 교육가들과 도덕주의자들은 개인에게 적절한 도덕 교육과 사회 교육을 보장하고, 적절한 이성과 지성의 개발을 통해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방안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이 사회 정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인간 자체로서의 선의지를 촉진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교육마저도 국가, 혹은 국가를 움직이는 특권 계층에 의해 자신들 본위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론의 배양이 곧 행동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의 시위대와 전경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마저 타협과 조정의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결국 ‘억압에 상응하는 실력행사’도 병행하여 구사해야 쟁취할 수 있을까 말까다.
(출처: http://blog.daum.net/bando21/10934446)
 
조정을 통한 해결 방식 역시 완벽한 해결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정이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논리간의 대결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나의 것을 내어주고 남으로부터 내 것을 얻어온다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흥정'(bargaining)에 가깝다. 또한 어제의 양보가 다음 날 상대방의 더 큰 요구로 귀결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대개 교육 혹은 조정과 대화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상주의에 기반을 둔 중산층 마인드의 편견에 익숙하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으며, 집단 이기주의와 그것을 위시한 특권 계급의 이기심에 대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개 한 사회의 집단적 힘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고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할 현실적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 억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 여성의 참정권 획득, 민족의 독립,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으로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은 이성에 입각한 대화와 토론보다는 소극적 저항, 적극적 투쟁이 적절히 혼합되어 만들어진 ’행동하는 양심의 결과물‘이었다. 특권계급과 집단적 이기주의에 ‘그들의 선의에 기댄 양보와 도덕적 강요’만으로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피지배층이 바라는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그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발칙한 요구’였던 게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 허풍떨기를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집단 이기주의의 무자비함을 설명하였고 또 그 해결책으로 집단 이성이나 종교적 자애심은 부족하다고 설명하였다. 꽤나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전망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니버와 필자의 답은 이렇다. “허풍떨기를 그만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를 막기에 앞서 도덕적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충분히 이기주의적일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개인의 양심과 지성에 앞서 우선 자신이 속한 계급적, 계층적, 민족적 시각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한다. 그렇다고 이성과 양심을 활용하지 말자는 건 결코 아니다. 이성과 도덕적 의무감을 키워주는 교육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제국주의적인 부당한 폭력이고 어떤 것이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폭력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대화와 조정의 방식 역시 어떠한 사회적, 계급적 제약 없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대안들을 모두 펼쳐 보일 수 있는 타협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왜 집단 이기주의가 현실에서 집단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덕적 죄책감 없이 너무나 쉽게 폭력의 형태로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표출되는지 설명, 해결하기에는 이성과 도덕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너무 무기력해 보인다. 이기적 충동은 개인의 차원보다 집단의 차원으로 갈수록 그 속성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인정하는 한편, 집단 이기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만큼 제어할 수 있는 고도의 사회적 통제력이 필요하다. 결국 그러한 사회적 통제력은 민족적 애국심, 계급적 투쟁 등 종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공유를 통해 객관적 통찰력과 정당성을 확보해야하는데 아직 그러한 고차원적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일본 가마쿠라현 가마쿠라시에는 ‘고토쿠인(高德院)’이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 궁궐에 건물로 추정되는 ‘관월당(觀月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 왕실의 건물이 일본에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왕실은 1924년 조선 척식은행에 ‘관월당’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 이 후 조선척식은행은 재정이 어려워졌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 스기노 키세이라는 일본의 자산가에게 돈을 빌리며 파산을 면하는데 이 때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관월당을 넘겨준다. 답례품이 된 관월당은 스기노 키세이의 별장으로 옮겨졌다가 고토쿠인이라는 사찰에 기증되어 현재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며칠 전 관월당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가마쿠라에 있는 고토쿠인을 찾았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높이 13.4m의 가마쿠라 대불을 지나자 관월당을 만날 수 있었다. 
관월당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환수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원형에서 너무 많이 변형됐다. 관월당의 옆면은 돌판으로 메워졌고 지붕의 모양도 전통 궁궐양식과는 달랐다. 의도된 변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일본식 건물 같아 보이는 관월당을 보고 더 이상의 자료조사 및 연구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데 찾아와야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그것을 찾아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찾고 싶지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문화재 환수운동은 강제로 빼앗겼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와 혼을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찾는 작업이다. 해방 100년을 맞이하는 해에 맞춰 진행된 문화재 환수운동은 식민지 사과의 의미로 당시 일본 칸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통해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게 하였고 정전60주년을 맞는 해에 진행된 문화재 환수운동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조선왕실의 인장 9점을 정상회담 때 직접 반환하게 하였다. 
이처럼 문화재 환수운동은 그 의미가 분명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사건이다. 명성황후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궐 안에 세운 법당으로 추정하고 있는 관월당을 환수해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환수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두 번째 이유는 관월당을 사들이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데 있다. 문화재환수운동은 잃어버린 민족정신을 찾는 운동이기에 절대로 문화재를 사들이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문화재를 사서 국내에 가져오는 것이 문화재 환수운동이라면 국내 최고의 문화재 환수운동가는 리움박물관의 소유주 이건희 회장일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작년에 문화재 경매를 담당하는 회사에서 ‘우리는 문화재 환수를 위해 문화재 경매를 실시한다.’라는 마케팅을 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은 엄연히 구분해야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화재 환수에 돈을 쓰지 않는 것도 비현실적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문화재환수를 위해 힘쓴다는 문화재청 산하 재단 이사장이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을 구분 못하는데 일반 국민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문화재계에 있는 지식인들이 문화재 환수운동을 ‘문화재’에만 초점을 두어 진행하기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환수의 문제로 다가서지 않고 구입을 해서라도 ‘관월당’을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월당 구입 및 이사 비용과 국내에 들어왔을 때 활용가치를 따져보겠다.
비용 문제부터 살펴보자면 일단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관월당’ 건물의 가격보다 이사비용이 최소 3배에서 10배 이상 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월당을 돈을 주고라도 사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국내 기업이 그 정도의 기부금은 내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기업이 비용대비 효과가 적은 일에 발벗고 나서겠는가.  
문제는 또 있다. 비싼 비용을 내고서라도 찾아온다한들 궁궐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이기에 한국에 와도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관월당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관월당을 환수해야한다고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자료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남이 한 이야기를 듣고 앵무새처럼 언론에 나와 떠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하지 않고 환수문제를 거론한 지식인들의 뻔뻔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담보로 잡혔던 물건을 다짜고짜 빼앗긴 문화재라고 주장하던 자칭 지식인들이 왜 그런 오류를 범했는지 알 수 있었다. 1차 자료에 대한 조사 없는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러한 가짜 지식인들의 거짓말에 관월당을 환수해야한다고 방송사 프로그램까지 취재를 하여 보도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렇다면 관월당의 활용가치는 얼마나 될까? 경복궁으로 돌아온 자선당 유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찾아와야한다며 가져왔던 경복궁 자선당 유구는 훼손이 심해 용이 불가능하여 자선당 복원당시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 이후 현재까지 경복궁 북쪽 건청궁 뒤뜰에 방치돼 있다. 
자선당 유구를 활용하기 위해 복원에 사용은 못했지만 옆에라도 둬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여론에 경복궁 북쪽 건청궁에서 경복궁 동쪽 자선당까지 이동하는 안이 제시 된 적도 있다. 그러나 건청궁에서 자선당 앞으로 이전하는 비용이 전문가 추산 1억원이라는 결론이 났고 이전 안은 폐기됐다. 비용 문제로 인해 앞으로도 상당기간 자선당 유구는 건청궁 뒤뜰에 자리할 예정이다. 자선당 유구가 경복궁 안으로 돌아올 당시 삼성문화재단은 상당한 비용을 내고 자선당 유구 이전을 도왔다. 그러나 활용가치가 없는 문화재를 환수하는데 헛돈을 썼다며 아직까지도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상태다. 
앞선 사례를 비추어 볼 때 관월당의 국내 활용도가 가늠될 것이다. 자선당 유구의 경우 돌아올 자리라도 분명했지만 관월당은 돌아온다고 해도 어디로 돌려놔야할지 알 수 없는 문화재다. 그렇기에 국내에 들어와도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월당 문제를 조사하면서 필자는 사실 한국의 지식인에 대해 무척이나 많이 실망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말로만 하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신중을 기해야하는 환수 문화재 선정 작업부터 오류가 나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식인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재 환수문제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무턱대고 환수작업을 시작하니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을 혼동하는 지식이들이 환수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앞으로 이런 지식인은 건전한 사회가 거르기를 소망해본다.

 

* 관월당은 2010년 국내로 들어올 뻔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협상이 파기됐다고 한다.


 

 

할머니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속에 묵혀있던 응어리가 시한폭탄처럼 때 맞춰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 6년 전 병상에서 할머니는 웃으면서 나를 맞이하셨다. 수능 성적에 대한 걱정과 앙상하게 마른 할머니의 모습에 대한 이질감으로 나는 할머니에게 살갑게 하지 못 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5살까지 엄마 대신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였다. 당시 그 사실을 잊은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부러 할머니를 멀리했다. 그리고 사흘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가족들은 펑펑 울었다. 줄곧 강하기만 하셨던 엄마는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런데도 내겐 눈물이 맺히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슬픔에 슬픔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할머니는 점점 내게서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랬던 할머니가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일은?”이란 질문의 답으로 나타났다. 면접을 준비하다가 질문에 자연스레 대답을 찾던 중 할머니는 등장했다. “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5살 때까지 키워주셨고 잘못을 해도 혼을 내기보다는 귀여워해주셨는데 병상에 누워계실 때 제대로 찾아뵙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뒤에도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면접에 질문이 나왔더라면 난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시했다. 나는 왜 지금에 와서야 외할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가, 지금에서야 이런 죄스러운 감정을 가진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그저 나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아 외할머니를 호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과 잡념들. 고민의 종착역은 만약 그랬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이었다. 내가 만약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 좀 더 살갑게 대했더라면, 장례식장에서 일가친척이 슬퍼하듯 마음껏 눈물을 흘렸더라면 지금의 이 죄스런 감정은 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굳이 가정을 해본다면 아마도 죄스러움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지금 내가 할머니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상에서 좀 더 살갑게 대하고,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더라면 할머니는 이 글에도 내 기억에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명이든 합리화든 그것은 가정에 대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슬퍼할 때 온전히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평생 동안 이따금씩 내게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퍽 싫지만은 않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난 항상 다락방에 숨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다락방에 숨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손자의 재미를 우선시했다. 온 집안 식구들의 걱정을 저당 잡은 채 말이다. 다락방에서 나올 때면 언제나 엄마는 내게 화를 냈는데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먼지를 털어주셨다. 내가 만약 장례식장에서 온전히 슬퍼했다면 이따금씩 기억 속에서 나타나는 할머니도, 할머니와의 추억도 사라졌을까.

 

*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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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의 가장 큰 고용주인 월마트가 50만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한다는 발표를 했다. 다수의 노동자가 얻는 것은 미미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발표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우선, 여파가 있을 것이다. 월마트는 매우 큰 기업이기 때문에 월마트의 행위는 아마 다른 기업들에 고용된 수백만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로,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건, 월마트의 행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다. 즉, 저임금은 정치적인 선택이고,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

 

배경지식을 좀 살펴보자. 보수주의자들은─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여러 경제학자들의 지원 하에서─보통 노동시장이 다른 어떤 시장과도 같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들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임금수준을 결정하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 법칙에 반항하는 이를 처단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관점은 임금을 상승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에는 실패하거나, 나쁜 결과를 낳을 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최저임금 설정은 농산물 가격의 안정을 위한 시도가 버터 산(山), 와인 호수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고용을 줄이고 노동자 잉여를 창출할 것이다. 고용자들에게 지출을 압박하거나,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을 장려하는 것도 같은 효과를 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소일렌트 그린Soylent Green─즉, 노동력─은 사람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금은 사실상, 버터의 가격과 같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얼마를 받느냐는 단순한 노동과 공급보단 사회력과 정치적 권력에 달려 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첫째, 최저임금이 증가했을 때, 실제로 어땠는지를 보자. 여러 주들은 연방 수준보다 높게 최저임금을 책정했고, 임금을 높인 주와 그렇지 않은 인접한 주를 비교할 때 무엇이 발생했는지(최저임금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 옮긴이)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을 높인 주가 많은 수의 일자리를 상실했을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다.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s으로부터 도출된 압도적인 결과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점진적인 증가는 고용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혹은 아예 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가 있다. 우리가 보통 속한 중산층 사회는 비인격적인 시장력의 결과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적인 행위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 형성되었다. 미국은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불평등한 사회였지만, 1950년에 극적으로 소득 격차가 줄어듦으로써 바뀌었고, 이를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로버트 마르고Robert Margo는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 이름 붙였다.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던 것일까?

 

해답의 일부는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정부의 임금결정 당국(우리나라의 최저임금위원회라고 생각하면 될 듯 – 옮긴이)이 최고 임금과 최저 임금의 격차를 줄이고자 했을 때의 직접적인 정부의 개입이다. 또 다른 해답은, 물론 노조 형성의 급격한 증가였다. 다른 해답으로는 전쟁 기간의 완전 고용 경제였고,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매우 강력한 수요를 창출해냈으며, 노동자들에게 보다 높은 임금을 좇을 수 있는 권한을 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압착기’가 전쟁이 종결되자마자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완전고용과 친(親)노동자pro-worker 정책은 보수 기준을 바꾸었고, 강력한 중산층은 한 세대를 넘어 지속되었다. 오, 그리고 전후 수십 년은 또한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으로 점철되었다.

 

나를 월마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매업자의 임금 상승은, 비록 훨씬 약한 형태일지라도, ‘대압착기’로 이어졌던 것과 같은 힘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월마트는 노동자의 상당수가 식품 할인 구매권으로 살아가고, 저소득층 의료 보장 제도의 관할 하에 있는 원인으로서 매우 낮은 임금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을 받고 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안 좋은 직업을 그만 두려는 의지가 증가하는 데서 드러나듯, 개선되는 노동 시장 덕분에 점차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아직까지─아직 월마트는 어쨌든 임금을 올릴 준비가 되어있다.─이러한 압력이 그렇게 심각해보이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보에 대한 월마트의 합리화는 월마트의 저임금 정책에 대한 비판이 몇 년 동안 말해왔던 것을 반복한다.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더 많이 주는 것은 이직률을 줄이고, 사기를 고취시키며, 생산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인 수천만 인구의 중요한 보수 증가를 획책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암시하는 것보다 거의 확실하게 쉽다는 것이다. 상당 정도 최저임금을 증가시키기.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그들이 조직화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하기. 갑작스레 바이마르 독일처럼 전락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경제를 침체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반하여, 완전 고용을 지향하는 직접적인 통화, 재정 정책. 이런 것들은 행하기 어려운 리스트가 아니다.─그리고 이런 것들을 행한다면, 우리 대다수가 살고 싶어 하는 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주요한 진일보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극도의 불평등과 미국 노동자들의 감소하는 재산은 선택의 문제이지, 시장이라는 신에 의해 점지된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원한다면 그러한 선택을 바꿀 수 있다.

 

 

Walmart’s Visible Hand - NYTimes.pdf


사진출처:
http://image.newstomato.com/newsimg/2013/2/16/335160/1.jpg

 라면 좋아하시나요? 종류도 많고, 어딜 가든 라면 파는 곳은 꼭 있습니다. 며칠 전, 한 조사에서 우리나라가 라면 소비 세계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참 별걸 다 1등 하는 나라입니다) 국민 1인당 1년에 74개를 먹는다고 하니, 짐작되시나요?

뜨끈한 붉은 국물에 노란 면발로 우리의 ‘해장’ 혹은 ‘허기’를 단박에 해결해줍니다. 그 국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매운 군침을 삼키게 됩니다. ‘얼큰한~’, ‘매운~’ 과 같은 컨셉이 절대다수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단아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전해드릴 이야기, 바로 ‘하얀 라면’입니다.

 

 으레 라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붉은 국물입니다. 1963년, 라면은 국내에 도입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맵고 얼큰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마케팅도 그렇게 진행해왔죠. 우리의 입맛이 매운맛의 선호가 강하여, 이에 따른 시장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라면은 ‘맵다’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릴 때쯤 틈새를 파고든 것이 바로 ‘하얀 라면’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1988년 출시된 농심의 [사리곰탕 면]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매운맛이 아닌 구수한맛이 일품이죠. 출시된 연도를 보니, 생각보다 꽤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시장에 굳건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답은 광고에 있습니다.


사리곰탕 면, '하얀 라면' 시대를 열다



“아침 굶지 마세요. 농심 사리곰탕면”(1988, 농심)

 

 제품 출시 직후에 만들어진 광고입니다.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아침’이라는 말이 6번이나 들어갑니다. 맛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습니다. 광고에는 바쁜 가족이 아침 식사를 사리곰탕을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포지셔닝(Positioning)의 묘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굳이 국역하면 ‘위치 잡기’랄까요? 시장에서 혹은 소비자의 마음의 적절한 한구석을 고유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말합니다. 소비자 뇌리에 잘 인식되기 위한 자리 잡기인 셈이죠.
이미 달아오른 기존 라면 시장에서 사리곰탕은 새로운 포지셔닝을 시도한 것입니다. 라면은 더 이상 기호식품이 아니라, 바쁜 현대인에게 건강을 위한 아침밥 대용 식사. 자극적이지 않고, 설렁탕처럼 든든한 한 끼를 제공하겠다는 어필이었죠. ‘사리곰탕’은 그렇게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비슷한 제품들이 출시되었지만,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 광고 이후로, 사리곰탕 광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추가적인 광고 없이도 이미 소비자의 뇌리에 굳혀졌다는 방증인 셈이죠.

 

 ‘하얀 라면’ 시장을 개척하고 제패한 사리곰탕에게,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아성을 넘을 도전자가 나타납니다. 마치 오랜 한나라 천하에서 위, 촉, 오의 세력들이 등장한 삼국지처럼, 삼양의 [나가사끼 짬뽕]과 팔도의 [꼬꼬면], 그리고 오뚜기의 [기스면]이 속속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2011년, 이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하얀 라면’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이 세 라면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하얀 라면’이면서, 동시에 칼칼하다(혹은 시원하다)라는 어필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얀 라면은 맵지 않다’라는 관념을 도전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광고를 통한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각기 다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나가사끼 짬뽕, 세밀한 소비자 중심 광고



“입맛은 정직하다. 나가사끼 짬뽕”(2011, 삼양)


 기존 ‘하얀 라면’ 시장에 가장 먼저 나타난 도전자는 삼양사의 ‘나가사끼 짬뽕’이었습니다. 일본의 중화풍 음식 ‘나가사키 짬뽕’을 우리 입맛에 맞게 나온 제품입니다.(원래 나가사키 짬뽕은 맵지 않다고 합니다) 광고는 시리즈로 4편이 제작되었는데, 모두 일반인이 광고 모델로 등장했죠. 경쟁사 사이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을 모델로 썼다는 것은 다소 파격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유명인 모델을 기용한 광고가 소비자에게 제품 브랜드 인식이 좀 더 빠르 때문입니다. 브랜드가 모델의 인기에 쉽게 편승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꼬꼬면’과 ‘기스면’은 광고에 유명인을 등장시키는 것도 소비자에게 브랜드 인지를 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광고에는 일반인이 메시지에 다가가는 유일한 연결고리입니다. 라면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죠. 그러니까 곧 광고를 마주한 우리도 그 ‘누구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고에서 ‘누구나’에 해당하는 평범한 이들이 ‘입맛은 정직하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입맛은 정직하니까, 그 입맛은 거짓 없이 맛있는 것을 고르니까, 이 라면을 많이 먹는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소비자의 입장을 등장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제품과 연결하는 점이 절묘합니다. 소비자의 생각을 파악한 광고가 아마 많은 이들의 점심을 매혹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스타 마케팅의 표본, 꼬꼬면


 [나가사끼 짬뽕]이후 한 달 후에 출시된 것이 팔도 [꼬꼬면]입니다. 연예인 이경규 씨의 솜씨가 돋보인 라면이죠. 꼬꼬면은 솔직히 광고의 입장에서 다룰만한 점이 많이 없습니다. 광고보다는 입소문이 큰 위력을 발휘했고, 스타마케팅으로 이미 라면 시장에서 거대한 공룡이 되었으니까요. 출시 한 달 만에 1천만 개가 팔렸고, 판매사 팔도는 업계 2위까지도 넘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고 하니 상상이 가시나요. ‘없어서 못 팔정도’로 대단한 기세였기에, 오히려 광고는 솔직히 ‘뻔했다’라는 느낌이 다분합니다.

 



“담백, 칼칼 꼬꼬면”(2011, 팔도)


 스타마케팅의 가장 큰 장점은 브랜드를 소비자에 효과적인 각인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꼬꼬면은 ‘이경규가 직접 만들었다’라는 특수성까지 붙습니다. 이렇게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제품이기에 장황한 수식이 필요 없겠죠. 단지 광고 시리즈마다 분명한 메시지를 하나씩 심어놓습니다. 게시한 위 광고에서는 이경규 씨의 전문성을 은연히 잠재해놓았습니다. ‘4분 끓이고, 물은 500ml 넣을 것’이 별반 특이한 게 없어 보이지만, 개발자 이경규 씨가 멘트로 꼬꼬면에 특수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위의 광고보다 앞선 티저광고도 있었는데 메인카피는 ‘라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기존의 라면과는 다른 새로운 라면임을 부각하였는데요. 어쩌면, 맛에 대한 자부심과 탄탄한 팬덤이 있었기에 가능한 광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본질에 충실한 광고, 기스면



“청양초 맑은 라면, 기스면”(2011, 오뚜기)

 

 ‘하얀 라면’이 인기를 끌자, 후발주자로 들어온 제품이 바로 오뚜기의 [기스면]입니다. 이전 라면들은 다 여름에 출시되었다면, 이 라면은 11월, 겨울 무렵에야 출시되었습니다. 광고를 보면 아시겠지만, 처음부터 ‘하얗다’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도 하얀 라면이야’라는 점을 어필한 것 같습니다. ‘나가사끼 짬뽕’과 대조적으로, 여기는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씁니다. 그것도 JYJ의 박유천 씨를 모델로 기용했네요. 아마, 10~20대 초반의 여성을 타깃으로 한 듯싶습니다. 이 광고에서는 제품 특징, 그러니까 맛에 대한 어필을 강하게 합니다. ‘맵다’, ‘맛있다’, ‘깔끔하다’ 등 30초 동안 맛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참 솔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광고의 정의를 ‘정보 전달’과 ‘설득’이라 배웠는데, 이 두 개념을 오롯이 담아낸 광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소비자를 얼마나 자극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머리에 맴도는 카피나 메시지가 부족하다고나 할까요. ‘기스면은 이런 라면이다’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렇게 라면 시장은 계속 변화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얀 라면’이 이제야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를 잡았는데, 요즘은 ‘굵은 라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싸움을 관망하던 농심사가 주도권 회복을 위해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는데요. 여기서 또 어떤 경쟁자가 나타나고,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습니다. 승부를 판단해 줄 소비자는 그저 제 입맛대로 사 먹겠죠.

 

긴 글을 마치니, 이제 배가 고픕니다. 모니터로만 라면 광고를 연달아 봐대니 정말 미치겠습니다. 저는 김치에다가 라면 한 사발 해야겠네요. 여러분은 무슨 라면 드실 건가요?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③

 

 


핵심적인 이슈는 이 영역에서 독점화의 정도 혹은 비율이 아닌가? 이 기업들은 전임자들보다 훨씬 크게, 그리고 빠르게 성장해왔다. 자동차나 항공기 산업에서 과점체제의 출현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구글은 겨우 1996년에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같은 기업들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나 네트워크 효과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할수록, 그것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며, 각자 2천만 명의 유저를 거느린 채 경쟁하는 다섯 개의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건 결코 말이 안 된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플랫폼에 있기를 바랄 것이다. 검색 엔진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글을 사용할수록, 모든 검색은 어떤 점에선 해당서비스의 개선이자 수선tinkering이기 때문에 구글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글이 다른 도메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매우 빨랐다. 현재 그들은 온도 조절 장치, 자율주행차, 건강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구글과 페이스북은 소위 제3세계 국가들에의 연결도 추진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모든 이들이 온라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데, 추가되는 3, 4십억의 눈알들이 광고비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구체적인 조건 하에서under very specific terms 고객들을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한다.

 

빈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온라인에 접속할 것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은 이동통신사를 파트너로 삼는다. 유저들은 그들이 접속하고 다운로드 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만,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진 않는다. 페이스북은 무료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상당한 비용이 든다.─그건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에 아마 긍정적일 것이다. 결국 다른 모든 서비스들은 페이스북에 게재되어야 하고, 따라서 페이스북은 콘텐츠가 유저들에게 제공되는 병목이자 관문이 된다. 그래서 만약 아프리카 학생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싶다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페이스북을 통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마침내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에 대한 데이터가 민간 기업에 의해 수집되고, 그들의 여생 동안 광고로 쓰이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전에는 오직 시장력에 의해 제한된 정도로만매개되었던 관계가, 페이스북이 사람들이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는 인프라의 제공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작스레 미국의 세계적 기업에 의해 점유된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론은 단지 페이스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반대론이다. 현재 꽤 유행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 대한 공격은 마치 실리콘밸리가 다른 모든 것들과 철저히 분리되어있는, 스스로의 역사력historical force인 것 마냥 다룬다. 유럽에선, 실리콘 밸리를 공격하는 많은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오랜 유형을 대변할 따름이다. 출판회사나 은행 등.

 

눈앞에 벌어진 이 모든 것들에 시대구분을 했을 때, 당신은 인터넷의 짧지만 빠른 역사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를 무엇으로 보며, 그것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석적인 변별점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 나는 ‘인터넷’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이 불만이다. 5, 60년대 이후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네트워크에서는 독립적이고 유사한 국면이 있었다. 만약 70년대 후반의 상황을 돌아본다면, 세계를 연결하는 12개의 네트워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불 네트워크payments network, 여행예약 네트워크travel-reservation networks 등. 종국에 인터넷이 되었던 그 네트워크는 지배 시스템이 명확하지 않았을 당시에 등장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규격 위원회Standard Committees에서, 그리고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의 수준에서─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또한 스마트폰 앱과 같은 개발이 있었는데, 구글과 같은 거대 기업이 생산하는 플랫폼에서 운영되기에 우리는 그걸 인터넷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지만, 인터넷네트워킹의 역사보다는 소프트웨어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 모든 역사들이 두서없이 ‘인터넷’이라는 용어로 집중됐던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이다. 만약 1993년에서 1997년 사이의 논쟁을 공부한다면, 이 단어(인터넷)는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였다. 

 

90년대의 대부분, 당신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종다양한 기대와 불안, 해석, 비전과 그것을 나타내는 수많은 경쟁적인 용어들─가상현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인터넷─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 매체로서 인터넷이 그 모든 것들을 앞질렀고, 다른 용어들이 사라져갈 때 인터넷은 조직하는 메타카테고리organizing metacategory가 되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다. 인터넷은 영원하거나 문제가 없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그것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주정부 지원하의 인프라, 인프라의 민영화에서) 이 모든 유사한 역사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역사적 문맥을 빼앗고 전형적인 근원설a typical origin story을 만들어낸 분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발명─빈트 서프Vint Cerf와 다르파DARPA─이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의 역사와 함께 이 매력적인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각주:1]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재 우리의 인터넷 담론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담론들의 통합에는 하나의 객관적인 기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러한 기존의 네트워크가 각각 존재할 당시에, 기본적인 인터넷 프로토콜─TCP/IP[각주:2]─이 그들 모두가 단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현상에 등장하지 않았나?

 

나는 TCP/IP 프로토콜의 현실성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용어로서 인터넷의 산만한 통합은 거부한다. 내 걱정은 사람들이 이 구조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일련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마치 인터넷에 게재된 서비스들이 기업들에 의해 운영되거나 정부에 의해 감시되지 않는 것처럼 가정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끝장낼 거야.”, 혹은 “인터넷은 실패할거야.”, 또는 “인터넷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거야.” 이런 식의 말들은 거의 종교적이다. 나는 심지어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내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컴퓨터에서 이용하는 것과 인터넷 이전, 그러니까 40년 전에 몇몇 도서관에서 운용되던 정보체계 사이에는 대다수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암시하는 것보다 연속성이 훨씬 강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다 날카로운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이러한 국면을 바라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60년대에 MIT나 다른 어떤 곳의 엔지니어들은 현대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공익사업으로서 컴퓨터 사용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MIT 같은 장소에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사람들의 집에서 전기나 물을 쓰듯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한 장소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세서를 돌릴 필요가 없거나 자신만의 하드웨어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 IBM같은 거대한 컴퓨터 회사들은 대부분 큰 사업체의 중앙 컴퓨터를 공급하고 있었다. 개인 유저들, 가족들, 소비자들에게는 공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70년대 반문화와 반제도적anti-institutional 풍조 덕분에, 애플 같은 기업들이 이러한 거대 회사들의 지배구조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고, 컴퓨터가 단지 관료제와 공격의 기계가 아니라, 해방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데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과 <지구백과Whole Earth Ctalog>[각주:3] 같은 간행물의 지적인 조력자들─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이 DIY 패러다임을 고취시키고 있던 반문화 진영─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상호연결─당신은 상호연결된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되어있는지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 당신에게는 그저 대학들이 있었고, 개인 컴퓨터 사용을 향한 이동이나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클라우드 컴퓨팅으로의 이동은 그러한 초기의 수사rhetoric─물론, 이제는 인프라의 공적인 운영과 관리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공익사업에 대한 어떠한 비유도 거부하는 것을 제외한다면─를 반복하고 있다.

 

중앙 집중화된 ‘빅 데이터’라는 현재의 현상은 이 유구한 역사 위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겠는가?

 

‘빅 데이터’는 지난 몇 년에만 해당하는 특유의 것이 아니다. 이 데이터 수집을 추동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터넷 논쟁은 잊고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액시엄Axiom(Acxiom의 오기인 듯 - 옮긴이)이나 엠실론 같은 기업들에 정보를 파는 데이터 은행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들은 데이터를 누구에게 파는가? 은행, 보험 회사, 사설 탐정 등등에게다. 60년대 후반 미국에선 데이터 은행의 역할과 잠재적 남용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빅 데이터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국립 데이터 은행을 운영하고 연방 기관이 수집한 모든 정보들을 모든 개개의 기관이나 대학이 접근할 수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통합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의회를 포함하여 엄청난 논쟁이 일었다. 결국에 그 아이디어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부결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과학자들과 기업들은 데이터가 수집되어온 이래로, 암에 대한 치료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에─정확히 현재 빅 데이터와 관련된 수사와 같은 종류다─다른 연구자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핸드폰, 스마트기기, 또는 컴퓨터를 통해 추적되고, 점차 그 양이 증폭되고 있으므로, 정보는 훨씬 더 쉽게 생산된다. 이제는 수집된 양이 상당히 많아졌으므로, (이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터넷 논쟁은 모든 것을 추상적인 기술의 역사의 일환으로 이야기하는, 일종의 기억상실증과 함께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구글의 메인 랭킹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사실상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정보 과학과 색인 작업indexing에 투자한 작업의 결과였다. 어떤 아이템이 연관되었고 그렇지 않은지─누가 무엇에 연결되어있는지, 인용 패턴 등을 살펴봄으로써─를 결정하는 데 구글이 사용하는 메커니즘은 학계 논문에 대한 색인 작업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했다. (즉) 그들만의 개발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보 과학에서의 발전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절대 추측할 순 없을 것이다. 유사하게, 오늘날 ‘온라인 공개수업massive open online courses’[각주:4]을 듣는 이들은 5, 60년대에 B. F. 스키너Skinner같은 사람들이 말했던, 강사를 없앨지도 모를 ‘교수기계teaching machine’[각주:5]를 촉진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모른다. 교육을 자동화하려는 전통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여러 스타트업이 같은 영역에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초기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모든 분야─교육, (‘자가측정quantified self’[각주:6]와 함께) 의료, 그리고 모든 나머지들─에 퍼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되고, 그 외의 다른 권력이나 대의명분이라고는 없는, 멍청한 역사로 끝나버릴 위험에 처해있다.

 

당신은 지난 10여 년간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집중화로의 이러한 추동이 얼마나 불가피하다고 보는가?

 

경계를 넘어서 집중화로 향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또한 특정 속도를 도메인과 레이어 각각에 부여하는 산업 역학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데이터에 발생하는 것은 핸드폰 제조에서 발생하는 것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구글과 페이스북은 그들이 지식과, 지식이 통과하는 출구를 만들어내는 센서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세계의 지식을 조직하는 사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속담이 그러하듯 ‘무더기’를 조작하기 위해 그들이 모든 층위─운영체계, 데이터, 색인 작업─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재의 역경향을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구글의 목표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조직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 대한 근원적인 정보 인프라를 운영하는 것이라면, 구글이 그들 모두를 붕괴할 좋은 위치에 있게 될 거란 사실을 더 많은 산업과 기업이 깨닫게 되면 긴장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현재 국영 기업들─종종 당연하게도 구글이 자동차 산업을 인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독일 자본─에 의해 유럽 정책 입안자들은 구글을 와해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독일의 거대한 빅 미디어 기업들에도 구글을 염려할 까닭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산업 내 경쟁은 속도가 늦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시민들에게 그렇게 유리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구글과 페이스북은 자연독점으로 보이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와해시키려는 유럽의 미미한 압박에는 경제, 정치, 혹은 생태적으로 어떠한 대안적 비전도 없다.

 

 

<원문 p. 56-60>

 

Isn’t the key issue the rate and degree of monopolization in this area? These companies have grown much bigger and faster than their predecessors. It took a lot longer for oligopolies to emerge in the automobile or aircraft industries. Google only started in 1996.

 

That’s a function of the nature of the service and the network effects in companies like Google and Facebook. The more people are on Facebook, the more valuable it becomes, and it doesn’t really make sense to have five competing social networks with twenty million people on each; you want all of them on one platform. It’s the same for search engines: the more people are using Google, the better it becomes, because every search is in some sense a tinkering and improvement in the service. So Google’s expansion into other domains has been very fast. Right now they do thermostats, self-driving cars, health. Google and Facebook are even trying to bring connectivity to so-called Third World countries. For them it’s important to get everyone in Africa and Asia online, because that’s the next few billion eyeballs to be converted into advertising money. But they get their customers online under very specific terms.


Facebook takes mobile operators as partners, since in poor countries most people will get online through their mobile phones. Users pay for what they access and download, but don’t have to pay to access Facebook. Facebook comes free, and everything else is at a price—so that’s supposedly positive, because it’s better than paying for everything. The result is that all other services have to establish a presence on Facebook, which thus becomes the bottleneck and gateway through which content is fed to users. So if you wanted to provide education to students in Africa, you’d be better off doing it through Facebook, because they wouldn’t have to pay for it. You would then end up with a situation where data about what people learn is collected by a private company and used for advertising for the rest of their lives. A relationship previously mediated only in a limited sense by market forces is suddenly captured by a global American corporation, for the sole reason that Facebook became the provider of infrastructure through which people access everything else. But the case to be made here is not just against Facebook; it’s a case against neoliberalism. A lot of the Silicon Valley-bashing that is currently so popular treats the Valley as if it was its own historical force, completely unconnected from everything else. In Europe, many of those attacking Silicon Valley just represent older kinds of capitalism: publishing firms, banks etc.

 

In a periodization of how all this came about, what do you see as the critical turning points in the short but fast history of the Internet, and what are the most important analytical distinctions to be made within it?


I’m dissatisfied, as I’ve said, with the ambiguity of the term ‘the Internet’. From the fifties or sixties onwards, there were separate, parallel developments in software, in hardware, in networks. If you look back at the situation in the late seventies, you find a dozen networks connecting the globe: the payments network, the travel-reservation networks and so on. That the network which eventually became the Internet would emerge as the dominant system was not obvious. It took a lot of effort—in standards committees, and at the level of organizations like the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to make that happen. There were also developments such as smartphone apps, which we now perceive as part of the Internet because they run on platforms produced by giant companies like Google, but which make more sense within the history of software than that of internetworking. The fact that all of those histories discursively converged on the term ‘Internet’ is itself a significant historical development. If you study the debate between 1993 and 1997, this wasn’t the most popular term to talk about these issues; that was ‘cyberspace’.


For most of the nineties, you still had a multiplicity of different visions, interpretations, anxieties and longings for this new world, and a lot of competing terms for it—virtual reality, hypertext, World Wide Web, Internet. At some point, the Internet as a medium overtook all of them and became the organizing metacategory, while the others dropped away. What would have changed if we had continued thinking about it as a space rather than as a medium? Questions like these are important. The Net isn’t a timeless, unproblematic category. I want to understand how it became an object of analysis that incorporates all these parallel histories: in hardware, software, state-supported infrastructures, privatization of infrastructures, and strips them of their political, economic and historical contexts to generate a typical origin story: there was an invention—Vint Cerf and darpa—and it became this fascinating new force with a life of its own.6 Essentially, that’s our Internet discourse at present.

 

But isn’t there at least one objective basis for the unity of these discourses about the Internet: that, while all these previous networks existed separately, once the basic Internet protocol—tcp/ip—came onto the scene they all tended to converge into a single integrated structure?


I’m happy to accept the reality of the tcp/ip protocol, while also rejecting the discursive unity of the Internet as a term. My concern is that people assume there is a set of facts which derives directly from this architecture, as if the services that are built on it are not operated by companies or monitored by states. They start saying things like: it will break the Internet, or the Internet will fail, or the Internet will not accept it. This kind of talk is almost religious. I might even say that the Internet does not exist. This is not to deny that there is something which I use every day; but there’s much more continuity than many of these narratives suggest between what I use on my computer and an information system that ran in some library forty years ago, before the Internet.


So how might we begin looking at these developments in a sharper socio-historical perspective?


In the sixties, engineers at mit and elsewhere had a vision of computing as a public utility that looked very much like contemporary cloud computing. Their idea was that you would have one giant computer in a place like mit, and then in people’s houses you would get computing
just as you do electricity or water. You wouldn’t need to run your own processor or have your own hardware, since it would all be centralized
in one place. At that time the big computer companies like ibm were mostly supplying mainframe computing for big business—they didn’t cater to personal users, families, consumers. Thanks in part to the anti-institutional climate and counterculture of the seventies, companies like Apple challenged the dominance of those big players. It took a lot of effort by people like Steve Jobs, and their intellectual enablers in publications like the Whole Earth Catalog—Stewart Brand and the countercultural wing that was promoting this do-it-yourself paradigm—to convince consumers that computers could be owned and operated by individuals; that they were creative new tools of liberation, and not just machines of aggression and bureaucracy.


Unless you understand this, it’s hard to see how everything got interconnected—you needed something to interconnect. At the beginning you just had the universities, and it would have stayed that way if there had been no change of mentality, no shift towards personal computing. Today the move to cloud computing is replicating some of that early rhetoric—except, of course, that companies now reject any analogy with utilities, since that might open up the possibility of a publicly run, publicly controlled infrastructure.


How should the current phenomenon of centralized ‘big data’ be located in this broader history?


‘Big data’ isn’t something unique to the last few years. To understand what’s driving this data collection, you need to forget Internet debates and start focusing on the data banks selling information on the secondary market—companies like Axiom and Epsilon. Who are they selling their data to? To banks, insurance companies, private investigators and so on. There was a debate in the late sixties about the role and potential abuse of data banks in America, which was not all that different from the big data debates today. At stake was whether the us should run national data banks and aggregate all the information collected by federal agencies into one giant database accessible to every single agency and every single university. It was a huge debate, including on a Congressional level. In the end the idea was killed because of privacy concerns. But a lot of scientists and companies made a case that since the data had been collected, it ought to be made accessible to other researchers, because it might help us to cure cancer—exactly the sort of rhetoric you hear now with Big Data. Nowadays the information can be produced far more easily because everything we do is tracked by phone, smart gadget, or computer, and this amplifies its volume. So much is now gathered that you can argue it deserves a new name. But these Internet debates tend to operate with a kind of amnesia, narrating everything in a kind of abstracted history of technology.

 

There’s a story to be told even about Google’s main ranking algorithm, which actually comes out of decades of work on information science and indexing. The mechanism that Google uses to determine which items are relevant or not—by looking at who links to what, citation patterns etc—was developed in relation to the indexing of academic literature; it’s not their own invention. But you would never guess that without knowing something about developments in information science. Likewise, people looking at these ‘massive open online courses’ today don’t generally know that in the fifties and sixties people like B. F. Skinner were promoting what he called ‘teaching machines’ that would dispense with an instructor. There’s a continuous tradition of trying to automate education. The fact that a bunch of start-ups have now moved into the area does not erase those earlier developments. Now that ‘the Internet’ is spreading into everything—education, healthcare (with the ‘quantified self’), and all the rest—we’re in danger of ending up with a kind of idiot history, in which everything starts in Silicon Valley, and there are no other forces or causes.


How inevitable do you regard this drive towards technical and organizational centralization over the last decade or so?


There are tendencies towards centralization across the board, though there are also industry dynamics which lend a specific tempo to each domain and layer. So what is happening with data should be distinguished from what is happening in phone manufacturing. But Google and Facebook have figured out that they cannot be in the business of organizing the world’s knowledge if they do not also control the sensors
that generate that knowledge and the gateways through which it passes. Which means that they have to be present at all levels—operating systems, data, indexing—to establish control over the entire proverbial ‘stack’.


Can we perceive any counter-tendencies at present?


Tension may arise when more and more industries and companies realize that, if Google’s aim is not only to organize all of the world’s knowledge, but also to run the underlying informational infrastructure of our everyday life, it will be in a good position to disrupt all of them. That may generate resistance. At present there is pressure on European policy-makers to break up Google, driven by national firms—often German capital, which, understandably, is fearful that Google could take over the auto industry. The big media empires in Germany also have reason to be worried by Google. So this kind of intra-industry fight might slow things down a little. But I don’t think it will benefit citizens all that much, since Google and Facebook are based on what seem to be natural monopolies. Feeble calls in Europe to weaken or break them up lack any alternative vision, economically, politically, or ecologically.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www.ted.com/talks/evgeny_morozov_is_the_internet_what_orwell_feared?language=ko#t-20261

 


  1. DARPA: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펜타곤의 한 기관. 빈트 서프는 그곳의 핵심 인물이다. [본문으로]
  2. TCP/IP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핵심 프로토콜이다. 인터넷에서 전송되는 정보나 파일들이 일정한 크기의 패킷들로 나뉘어 네트워크상 수많은 노드들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경로들을 거쳐 분산적으로 전송되고, 수신지에 도착한 패킷들이 원래의 정보나 파일로 재조립되도록 하는 게 바로 TCP/IP의 기능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지구백과 Whole Earth Ctalog(WEC)>는 미국의 반문화 잡지였고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도 하에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그리고 이후 1998년까지는 간헐적으로 발간되었다. 잡지는 에세이와 기사를 특징으로 했지만, 주로 제품 리뷰에 집중했다. 편집 방향은 자급자족, 생태학, 대안교육, DIY, 전체론holism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도구에 대한 접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WEC는 광범위한 제품들(옷, 책, 도구, 기계, 종자 등)을 나열하고 리뷰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직접적으로 판매하진 않았다. 대신에, 판매자의 연락처를 아이템과 리뷰 옆에 기재해놓았다. 비록 정기적으로 간행되진 않았으나, 다양한 형식으로 수많은 판본과 최신판이 있었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4. 웹 기반의 온라인 공개 강좌. 정규 교육의 보조 수단에 머물지 않고 수업과 시험 등의 교육 체계를 갖춘 대학 강좌를 가리킨다. 여러 사람에게 강좌를 널리(massive) 공개(open)하기 때문에 기존 대학 교육 체계를 크게 바꿀 태세다. 미국 유명 대학이 앞서 시작했으며, 일본의 주요 대학도 2014년부터 인터넷으로 강좌를 제공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케이무크(K(Korea)MOOC)가 추진된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5. 행동주의적 학습원리를 교육의 실천 분야에 응용한 것으로 학습자가 개별적으로 자기속도대로 학습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된 자동학습장치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6. 자가측정이란 개인 일상에 있어서 투입(음식 소비, 주변 공기의 질), 상태(기분, 각성, 혈류 산소 수준), 그리고 행위(정신적이고 육체적인)의 측면에 대한 데이터의 습득과 기술을 통합시키는 움직임이다. (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우회전愚回傳, 비보호雨保護 ①

 

 

 

 

시험 날 아침, 나는 열 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늦은 아침을 챙겨먹었다. 운전하기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는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 까진 아니더라도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험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시험 순서는 무작위였다. 한 시가 되자 감독관들이 들어오고 시험 순번을 정해주었다. 나는 여섯 번째였다. 내 앞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시험이 다 끝난 두시가 돼서야 나는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험은 둘 씩 짝지어서 봤는데, 나는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와 뒷자리에 동승했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 스키니진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지점에서 여자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여자의 코스는 D가 나왔다. 시험 감독관은 나에게 동석자 사인을 받았다. 여자가 안전벨트를 맸고, 나 역시 뒷좌석의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D코스는 이백 미터 정도 직진을 하다가 중랑천을 끼고 우회전을 하는 코스였다. 여자는 덜덜 떨며 첫 번째 우회전 코스를 지나갔다. 다음 우회전 까진 길을 따라 직진을 하면 됐다. 하지만 그 직진코스에서 여자는 실수를 했다. 2차선에 맞추어 가고 있던 차는 별안간 1차선으로 표시등도 켜지 않은 채 이동했다. 하마터면, 뒤따라오던 1차선의 마티즈와 사고가 날 뻔했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마티즈의 빵ㅡ하는 경적소리와 함께 실격이 나왔다.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돼 일어난 일이라 여자는 망연자실했다. 감독관은 바로 옆길에 차를 세우라고 말했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왔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무작위로 선택된 코스는 D. 여자와 같은 코스였다. 나는 차분하게, 교육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벨트와 기어와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 이번엔 파랑색 트럭 뒤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첫 번째 교차로를 맞이했다. 우회전이라 신호를 받지 않아도 갈 수 있었다. 마침 왼쪽 차선은 정지 상태였고, 반대편에서 오는 좌회전 차량만 존재했다. 나는 진행했던 차선의 횡단보도에 걸친 상태로, 좌회전 차량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직 초보인 나에게 끼어들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고 끼워들기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사고위험이라는 이유로 실격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맞은 편 차들이 모두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차량은 듬성듬성 왔고, 나는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신호가 바뀌어서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하면 어떡하지? 그리고 곧, 그 상상은 도로 위에서 현실로 바뀌었다. 신호가 바뀌고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걸쳐 있었던 횡단보도의 등도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보행자 보호 위반으로 실격입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허탈했다. 분명히 도로 위엔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넓은 곳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이 분만에 시험 비용 오만 오천 원을 길가에 버린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길바닥에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母子가 나를 향해 비웃고 있었다.
 
그날 내내,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밖을 돌아다녔다. 괜찮아, 애매한 상황에 걸린 거야. 나도 아마 실격 당했을 거다.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아버지는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줬지만, 바보처럼 우회전을 한 나에 대한 화, 맞은편 좌회전 차들에 대한 화 그리고 전자 교통신호 시스템에 대한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정말로, 우愚회전이었다. 나는 외투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었던, 다음 시험 일정과 응시료가 적혀있는 종이를 지갑에 끼워 넣으며 오지 않는 잠을 취기와 함께 억지로 청했다.

 

첫 번째 시험 실격에 대한 화가 가라앉을 무렵, 두 번째 시험 날이 찾아왔다. 이번 주 초부터 뉴스에선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왔지만, 이미 잡아놓은 시험 일정을 교체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될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시험일을 고수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완연한 봄비였다. 가벼운 비의 강하속도는 느렸고,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이 정도라면 시험을 볼 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3호선과 4호선을 타고, 마지막으로 1호선으로 환승했다. 유일하게, 1호선만 지상으로 올라갔다. 창동역에서 녹천역까진 한 정거장이었지만, 그세 지하철 차창에는 비가 흩날려 생긴 빗살무늬가 생겼다.

 

학원 입구에 상호명이 적혀진 녹색 천막 아래로 비가 흘렀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천막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다. 기압이 낮은 탓인지 연기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깔린 채 갖가지 종류의 연기가 섞여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장내방송으로 시험응시자들을 부르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세 번째 순서였고, 앞의 두 사람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삼십분 가량을 기다렸다. 그 삼십 분의 간극동안, 아침에 시작된 비는 내가 시험을 본 시각에 절정에 달했다. 소나타 뒷좌석엔 나와 짝으로 시험을 같이 볼 여자와 내가 앉았다. 여자의 가방 옆엔 아직 마르지 못한 3단 우산이 시트를 적셨다. 내가 먼저 운전석으로 옮겨 탔다. 코스는 C가 걸렸다. D다음에 C라, 도로주행 시험의 코스 순서가 떨어질 때 마다 D, C, B, A순으로 되는 건 아닐까. C코스는 경찰서 앞까지 직진이었다. 왼쪽 지시등을 켜고, 나는 도로위에 올라탔다. 비가 오는 탓에 와이퍼를 움직이니, 신경이 쓰였다. 비가 오면 수막현상 때문에 위험하지, 나는 필기문제집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며 저속주행을 했다. 이윽고 좌회전을 하는 교차로에 들어섰다. 앞에 차가 다섯 대 쯤 있었는데 파란불이 켜지자마자 출발할 기세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교차로의 신호는 앞의 차 때문에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파란색 바탕의 흰 글씨로 비보호 우회전, 이란 글씨가 써져있었다. 우회전, 잊고 싶은 단어였다. 오늘은, 저번 주와 같은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동시에, 비보호非保護란 단어의 ‘비’자가 비雨로 보였다. 난 먼 옛날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비에게 오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 빌었다.

 

내 바로 앞차의 후미 등이 점멸된 것을 본 나는, 기어를 D에 놓고 뒤따라갔다. 내가 핸들을 돌리려는 찰라, 옆에 있던 감독관이 입을 열었다. 신호 보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올렸다. 황색불이 점등되고 있었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속도가 붙었으니, 앞차를 따라가는 게 맞지 않을까? 혹은 이미 황색으로 바뀌었으니 서야하나? 그때 필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했던 것이 생각났다. 도로를 지나갈 때, 황색등이 켜지기 전 운전자가 도로를 통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구역을 무엇으로 부르는가? 정답 : 딜레마 존(Dilemma Zone)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엑셀을 밟고 있는데, 차는 나가지 않았다.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고장 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신호를 받고나서야 나는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우회전을 해야 하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나는 뒷자리로 유배되었다. 다시 출발지점에 돌아오고 이번엔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시험을 시작했다. 룸미러로 보라색 아이라이너로 깊게 패인 여자의 두 눈이 보였다. 여자는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의 주행은 불안했다. 옆 차선을 몇 번이나 침범하고, 지시등을 켜도 옆 차로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십 분 가량의 시간동안 그녀는 C코스를 실격 없이 완주했다. 감독관은 수고했다는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학원으로 다시 돌아온 후, 감독관이 뒷자리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실격하신 분은 다시 사무실 가셔서 시험 일정 잡으시고 여자 분은 평형주차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렸고, 여자를 태운 차는 장내 도로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 다음 시험 일정을 잡은 뒤, 장우산을 핀 채 나는 녹천역으로 향했다. 녹천역 천장 플레이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후두둑, 후두둑. 전철은 세 정거장 전이었다. 열차가 점점 다가올수록 비는 그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비보호, 는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나. 아마 그녀는 지금쯤 평행주차 시험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열차는 도착하고 나는 문이 닫히기 바로 전, 열차에 올라탔다. 지하철을 운전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창동역으로 향하는 1호선 열차는 객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고 다시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다.

 

- 끝 -


사진출처:

http://www.ygosu.com/community/?m2=real_article&bid=yeobgi&rno=816829&page=0&frombest=Y

 

 

구분짓기는 왜 생겨난 것일까. 모든 구분짓기는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만들어 낸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구분짓기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짓기들이 정당하고 사회적으로 보편화 될 수 있도록 전파시킨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역사과 담론들은 약자의 논리가 아니라 강자의 논리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차이와 차별을 양산한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차이’ 라는 것은 다분히 사회적인 약자와 강자를 ‘구분짓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야만이 자신들이 통치하는 사회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 대한 억압은 기득권이 자신들의 계급을 유지하는 통치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한 것들은 사회가 더 나은 사회로 변화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중간계층에게 남의 일로 평가되지만 그 여파는 사회전체로 돌아가게 된다. 그 억압과 차별은 체제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계급이동을 불가능하게 한다. 


국가라는 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체계가 필요하다. 무질서한 변화들은 국가의 혼란을 야기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질서가 존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은 이성애적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라는 것은 기초 논리가 사람의 존엄성보다 시스템의 안정을 중시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준선상에서 도태되는 집단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회에서는 그 구분이 아주 기초적이고 그 어떠한 사회적 의미와 권력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사회적으로 당연시 될수록 다른 차별들도 차이에서 비롯된 당연한 것으로 평가된다. 모든 차별들은 그 시대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그것은 어떠한 ‘사회적 차이’에서 발현된 차별이었다. 현 시대에 가장 보편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것 자체가 권력관계가 투영된 구분짓기 였기 때문에 이 개념자체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그것에 대한 차별을 없앨 수 없다.


이 모든 방향성이 뒷 받침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엄성을 인정받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하며, 헌법에서도 명시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현 시대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강자와 약자가 나뉘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고 삶을 더 효율성과 상품이 강조된다. 인간도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며 경쟁력 없는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로 받아드려진다. 상품화 가치가 없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이 자본주의 사회가 빈부격차를 넘어서서도 경쟁사회로서 ‘차이’, ‘차별’을 명명하는 것에 익숙하다. 이러한 체제들이 다름을 다름으로 보지 않고, 무언가를 우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누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개인에게 세뇌를 시키는 것이다. 결국 체제는 차이와 차별을 반복시키며, 그 논리를 더 단단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사회속에서 기득권의 담론들을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얼마나 무분별하게 받아드리고 있는 지에 대한 인식과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침에 시작된 비는 내가 시험을 본 시각에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나는 도로주행시험에서 두 번째 떨어졌다. 운전석엔 내가, 조수석엔 감독관이, 그리고 뒷좌석에는 나와 같이 짝으로 시험을 본 여자가 앉아있었다. 첫 번째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는 찰라, 황색등이 켜졌다. 나는 교차로를 빠르게 통과하려고 엑셀을 밟았지만 순간 옆 자리에 있는 감독관이 역시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황색등이면 좌회전 차량은 가면 안 돼요. 직진만 허용됩니다, 라고 감독관은 말했다. 채점용 테블릿 PC에서 실격이라는 전자음이 나왔고 조용한 차 안에서는 와이퍼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저번 달 부터 녹천역에 있는 운전 전문 학원을 다녔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지하철로 삼십 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깔끔한 건물과 매끈한 노면을 기대했던 나에게 컨테이너 박스로 되어있는 학원의 가건물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기능시험을 위한 도로 역시 곳곳이 파지고 노란선과 흰 선은 몇 번이나 덧칠해졌는지 옅은 노랑 빛을 띠고 있었다. 도로 곳곳엔 ‘운전면허시험용’이나 ‘도로주행’이라고 써진 노란색 자동차가 줄줄이 주차되어있었다. 그것들을 보니, 어렸을 적 봤던 만화 ‘꼬마자동차 붕붕’이 생각났다. 석유를 마시면 힘을 냈던 그 자동차는 이제 ‘꼬마 버스 타요’와 ‘로보카 폴리’에게 제 자리를 넘겨준 지 오래였다. 사무실로 들어간 나는 학원 등록비로 삼십 칠만 오천 원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운전면허를 취득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 첫 단계는 필기시험이었다. 학원에선 필기시험 예상문제집을 등록할 때 무료로 하나 나눠주었는데, 문제은행식이라 거기에 나오는 문제 중 무작위로 40문제가 출제 된다고 했다. 학원에서는 필기시험을 위한 강의를 따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교시동안 동영상을 봐야 했는데, 필기시험에 붙고 난 뒤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안전교육을 미리 듣는 것이라고 했다. 난 업무가 끝난 뒤 삼일 정도를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가 빔 프로젝터로 한물 간 개그맨들이 나오는 시시콜콜한 영상을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두 시간 씩 쪼개서 봤다. 그 주 주말에 나는 필기시험을 봤고, 어렵지 않게 92점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기능시험이었는데, 예전에 비해 훨씬 간소해 졌다. T자 코스나 S자 코스, 언덕 위에서 멈춰야 했던 예전 시험과는 달리 시동을 키고, 전조등을 켜고 와이퍼를 조작한 뒤 오십 미터를 전진하는 것뿐이었다. 기능교육부턴 강사가 붙었는데, 나를 맡은 강사는 오십 대에서 육십 대 사이로 보이는 여자였다. 자신을 원래 도로주행 강사라고 소개한 여자는, 교육시간동안 간소하게 바뀌어버린 기능시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시험이 쉬워지니 요새 도로가 개판이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옆에서 이렇게 떠들든 말든, 기어를 D에 놓고 저속주행을 했다. 엑셀을 밟지 않아 차의 속도는 시간당 십 킬로미터를 유지했다. 직진은 쉬웠지만 코너링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 나는 강사에게 좌회전과 우회전을 할 때 핸들을 돌리는 것에 대한 이론 같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여강사는 그건 ‘감’의 영역이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혼란한 내 머릿속에선 기어 변속과 핸들 조작으로 인한 자동차 내부 기어의 토크Torque와 앞바퀴의 각속도가 맴돌았다. 교육이 끝나자 십 분 간의 쉬는 시간 후에 바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강사가 가르쳐준 대로 전조등을 켜고 와이퍼를 움직였으며 방향 지시등을 능숙하게 껐다. 오십 미터를 간 뒤 브레이크를 밝았다. 기어를 P로 놓고 핸드브레이크를 올린 뒤 시동을 껐다. 내가 탄 차의 번호가 불리면서 합격, 이라는 장내방송이 들렸다.

 

이제 남은 것은 여섯 시간의 도로주행 교육과 시험뿐이었다. 밤에 차를 가지고 나가 몰고 싶지 않은 탓에, 도로주행 교육은 평일이 아닌 주말 낮으로 잡았다. 월 초에 학원에 등록하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동영상을 볼 때만 해도 추웠었는데, 주말이 되니 날씨가 포근해졌다. 면허시험 뒤 쪽에 있는 작은 동산에서도 꽃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덟 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나는 도로주행교육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컨테이너 바깥에서 담배를 다 태운 강사들이 들어왔다. 열 댓 명이 넘는 강사 중, 체구가 아담하고 안경을 낀 구수한 인상의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사의 지시를 따라 나는 2010년형 아반떼에 올라탔다. 첫 두 시간 동안은 장내에서 엑셀을 밟고 코스를 돌았다.
  
장내에서의 두 시간이 끝나고, 강사는 나는 서로 자리를 바꿨다. 평소엔 아버지가 운전 하는 것을 보고 있어도 부러움이나 선망이 느껴지진 않았는데, 기어를 능숙하게 바꾸고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강사를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작아보였던 그가 갑자기 대단하게 느껴졌다. 강사는 학원을 빠져나간 뒤 긴 직선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바로 옆엔 시동이 꺼진 덤프트럭과 땅을 파다가 멈춰버린 포클레인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모든 도로주행 코스의 시작점이었다.

 

도로주행 코스는 A, B, C 그리고 D 네 가지가 있었다. A와 C코스가 비슷하고, B와 D코스가 비슷했다. A, C코스는 직진코스가 길지 않은 탓에 자주 회전을 해야 했다. 경찰서 앞에서 좌회전을 하고, 횡단보도가 있는 왕복 이차선 도로로 우회전을 하는 것이 특히 신경 쓰였다. 이에 반해 B, D코스는 시작 후 전방 이백 미터 앞에서 중랑천을 끼고 우회전으로 건너는 것이 전부였다. B코스는 무지개다리가 있는 교차로에서 유턴이었고, D코스는 장미아파트 앞에서 유턴을 하면 됐다. 코스를 외우는 것이 좋다싶어 나는 각 코스의 포인트들을 계속 되뇌었다. 경찰서, 국민은행, 무지개다리, 장미아파트, 좌회전, 우회전, 직진, 유턴. 자, 이제 교육을 시작합시다. 나는 강사와 다시 자리를 맞바꿔 운전석에 앉았다.

 

시트위치를 조정하고 안전벨트를 맨 뒤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P에서 D로 놓고, 핸드브레이크를 내렸다. 나는 좌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사이드미러로 뒤쪽에서 오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도로정규속도로 달리는 차들 사이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 대 쯤을 먼저 보네고 나서야 검은색 소나타 뒤를 쫓아 2차로로 진입했다. A코스부터 시작할게요. 엑셀을 좀 더 밟아요. 강사가 주문했다. 장내에선 이십 킬로미터밖에 밟아보지 못했는데, 엑셀을 밟는 발이 부르르 떨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기판은 어느새 시속 사십 킬로미터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전에, 가장 빠르다는 육상선수인 칼 루이스의 속도가 삼십육 킬로미터였다. 딱 일 초에 십 미터를 달린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페달 하나를 밞는 것만으로 그를 추월해버렸다. 이상하게도, 한 번 경험해본 속도는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속력에 대한 역치 값은 기어를 고단으로 바꾸는 듯 계속 올라갔다.

 

두 시간 가량의 교육동안 나는 A, B, C코스를 돌 수 있었다. 중간의 쉬는 시간 20분 정도를 제외하면 한 코스 당 삼십 분쯤 걸린 셈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다리 힘이 풀렸는지 문을 열고나올 때 몸이 휘청거렸다. 그렇게 첫 도로주행이 끝났다. 직선코스는 괜찮았지만, 아직 회전은 익숙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눈을 감은 채 방금 달렸던 코스를 상상했다. 두 손을 움켜쥐고 마치 핸들을 돌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옆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더라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어서 그것을 알 순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도 학원에 나와 남은 두 시간의 교육을 받았다. 전 날보단 실력이 늘었는지 두 시간 동안 D, A, B, C 순서로 모든 코스를 다 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시험에 붙을 수 있겠죠? 내가 능청스레 물어보았지만 강사는 대답을 피했다. 외려, 시험 볼 때는 또 달라요, 라며 말했다. 이왕 물어본 거 기분 좋게 붙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해주면 덧나나. 나는 우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주행이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사무실로 들어간 나는, 시험 일정을 잡았다. 다음 주 금요일이 좋아보였다. 시험응시양식에 맞춰 종이를 작성하고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온 나는, 도로에서의 무용담을 아버지에게 늘어놓았다. 이제 곧 차를 몰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득 내가 읽었던 연작소설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절에서 생활하던 절필작가가 어느 날 밤 집에 잠시 돌아왔는데, 고등학생인 자신의 막내아들이 엘란트라를 타고 집을 나서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조수석에 앉는다. 아들은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차의 속도를 올린다. 이럴 때, 정말 기분이 좋아요. 어디까지 갔다와봤니. 김포까지 간 날도 있어요. 아버지는 무면허인 고등학생 아들이 엘란트라를 몰고 밤의 도로를 질주 하는 것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무용담을 늘어놓는 나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 사진출처: http://dizin.co.kr/18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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