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속에 묵혀있던 응어리가 시한폭탄처럼 때 맞춰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 6년 전 병상에서 할머니는 웃으면서 나를 맞이하셨다. 수능 성적에 대한 걱정과 앙상하게 마른 할머니의 모습에 대한 이질감으로 나는 할머니에게 살갑게 하지 못 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5살까지 엄마 대신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였다. 당시 그 사실을 잊은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부러 할머니를 멀리했다. 그리고 사흘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가족들은 펑펑 울었다. 줄곧 강하기만 하셨던 엄마는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런데도 내겐 눈물이 맺히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슬픔에 슬픔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할머니는 점점 내게서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그랬던 할머니가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일은?”이란 질문의 답으로 나타났다. 면접을 준비하다가 질문에 자연스레 대답을 찾던 중 할머니는 등장했다. “저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5살 때까지 키워주셨고 잘못을 해도 혼을 내기보다는 귀여워해주셨는데 병상에 누워계실 때 제대로 찾아뵙지도 않았고 돌아가신 뒤에도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번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면접에 질문이 나왔더라면 난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시했다. 나는 왜 지금에 와서야 외할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가, 지금에서야 이런 죄스러운 감정을 가진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그저 나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아 외할머니를 호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과 잡념들. 고민의 종착역은 만약 그랬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이었다. 내가 만약 병상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 좀 더 살갑게 대했더라면, 장례식장에서 일가친척이 슬퍼하듯 마음껏 눈물을 흘렸더라면 지금의 이 죄스런 감정은 사라졌을까.

 

그랬더라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굳이 가정을 해본다면 아마도 죄스러움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지금 내가 할머니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상에서 좀 더 살갑게 대하고,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더라면 할머니는 이 글에도 내 기억에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명이든 합리화든 그것은 가정에 대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슬퍼할 때 온전히 슬퍼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평생 동안 이따금씩 내게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퍽 싫지만은 않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난 항상 다락방에 숨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다락방에 숨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손자의 재미를 우선시했다. 온 집안 식구들의 걱정을 저당 잡은 채 말이다. 다락방에서 나올 때면 언제나 엄마는 내게 화를 냈는데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먼지를 털어주셨다. 내가 만약 장례식장에서 온전히 슬퍼했다면 이따금씩 기억 속에서 나타나는 할머니도, 할머니와의 추억도 사라졌을까.

 

*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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