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철서구>(왕삥, 2003)
영화를 많이 봤었나? 당신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하루같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비록 시네마의 역사가 겉으론 매우 풍부해 보이지만, 또한 상당히 단순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즉, 처음에 당신은 여러 영화제작자, 학교, 국가적인 전통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식으로 그 분야를 검토하면, 그것의 전반적인 풍경에 대해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사는 매우 짧은 반면, 예술사는 매우 길다.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닌 시네마는 오래된 형식이 아니다. 거기다, 활동사진motion pictures이 탄생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형식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인 문화에 침투해 들어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네마는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그 영향의 정점에 다다랐다. 여러 학교와 전통이 생겨났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소련. 각각은 상대적 환경과 사회적 문맥에 따라 형성되었다. 각 사회의 시네마에는 고유한 기능과 필요조건이 있었다. 가령, 미국에서 영화가 재빨리 상업적 이익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반면, 소련에서 영화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라별로 실험과 탐구는 상이했다. 시네마 혁신─형식적. 예술적 특성과 기술적 진보 모두에 있어서─이 취한 방향들은 지역의 사회문화사와 연관되어있다.
학우들과의 논의에서, 당신은 촬영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물음들에 집중했었나, 아니면 이미 대개 영화제작으로 관심이 바뀌어 있었나?
단지 촬영기법만 한정하진 않았다. 시작부터, 우리의 관심은 특정한 측면 대신 전체를 쥐어 잡는 것에 있었다. 첫 해는 진정 시네마─역사, 동시대적 발전, 그리고 여러 국가의 전통에 대해─에 대해 배웠다. 요컨대, 목표는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였다. 꼬박 일 년 동안 이 방식으로 작업한 후에,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기본적인 요약과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향성은 점차 명료해졌다.
당신이 영화제작에 눈을 돌렸던 90년대 중반, 중국 감독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 시네마가 당신의 생각의 영향을 주었나?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당시 영화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제작자 개인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비록 몇 편의 영화들이 1980년대 이후로 국제적 권위의 상을 받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매우 황량했고, 세계적인 예술의 특성인 풍부함과 예측불가능성이 결여되어있었다. 모던 아트는 삶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포함하지만, 당시 영화들에 그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문화적 표지cultural markers 또는 이정표의 문제에 더하여, ─내가 보기에─PRC 1의 체제establishment 하에서 지속된 영화 제작이 주된 문제였다.
1990년대에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 없이 해외로 몰래 작품을 반출했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더 이상 제도적 체제institutional establishment 속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지 않나?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내가 체제 속의 영화제작이라고 말할 때, 누구라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뭘 의도한 거냐고? 간단하다. 체제의 영화들은 동시대적 문화와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몇몇 고유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체제의 관점은 여전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직 동시대적이지도, 진정으로 현대문명의 작업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 또한 이건 중국 시네마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철서구>(왕삥, 2003)
이 말은 당신이 이른 20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영화들을 봤고 동시대 영화를 그 당시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영화들을 봤다. 당신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면, 영화는 당신의 삶이 되므로 당신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작업을 해왔다. 여전히 매일 영화를 본다. 이건 영화제작자로서 내 삶의 일부다. 중국의 영화사를 보면, 영화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건 마치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다. 영화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했고, 그들 또한 영화에 대한 의식을 형성했다. 중국인들은 시네마가 새로운 문명을 대변한다고 받아들이지도, 또 다른 문화적 형식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을 연구한다면, 당시 중국인들에게 시네마는 그저 장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화는 주로 이 새로운 장난감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걸 발견한 몇몇 부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시의 자료는 랜덤 저글링random juggling이나 무대 공연 쇼트들이 전부다. 이건 유럽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영화는 아주 강력한 시네마 문명으로서, 새로운 문명─중국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이 초기 국지화localization가 수행된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시네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 유럽과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모로 변화했다. 중국인들은 영화가 단지 갖고 노는 새로운 장난감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또한 중국 자체가 매우 급속히 변화하고 있던 시기와 겹쳤다. 정치와 경제의 발전은 중국 시네마의 역사와 함께였다. 오늘날 통상의 표현은 이 시기를 ‘좌파 시네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정의내리긴 어렵다. 1949년 이전 상하이에서 발전한 시네마는 중국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시기였다. 당시 영화들을 세심히 보면, 교과서에서 봤던 버전과는 달리, 씬 뒤에서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역사적 문제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차분하고 조리정연한 눈으로 보는 것은 쉬울 것이다. 내 눈에 이 시기의 영화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헐리우드를 표방한, 상업적이고 스타 중심적인 작품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지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도 있다. 영화를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몇몇 요소들이나, 과거 지식인들의 윤리적 표현들, 그리고 동시에 지배적인 스타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도시 아방가르드적urban avant-garde이고, 어떤 영화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리얼리즘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는 혼합되어있다. 영화의 여러 스타일은 보통 감독들의 다양한 배경 때문에 생긴다.
중국의 영화제작자와 평론가 대부분은 국가(중국 – 옮긴이)의 영화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그건 중국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학자들이 왕왕 중국의 시네마에 대해 논쟁하지만, 중국사회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로는 비록 그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자세한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대조적으로, 그들은 방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당면한 문화역사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자국의 시네마를 연구하는데 투자한다. 국가의 영화사는 이런 종류의 연구로 출현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와 같은 작업이 없다. 우리의 영화사를 정초하려는 노력─신중하고, 명확하며, 합리적인 노력─이 결핍되어있다. 물론 세계의 영화사와 다른 나라들의 영화사를 이해해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사회문화적 질서와 동시대적인 영화제작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본질을 무엇인가? 지금 시네마의 실정은 어떠한가? 영화제작자로서 보건대, 자기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인내력을 가져야 한다. 나의 관점은 이렇다.
<원유>(왕삥, 2008)
당신은 90년대 말에 북동쪽으로, 선양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사양화한 지구의 철거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을 찍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테마로 결정했나?
나는 베이징에서 때로 텔레비전 시리즈 작업에 참여하거나 카메라맨으로 일하면서 삼년을 보냈다. 이후 <철서구>를 찍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톄시(铁西) 산업지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양에서 컬리지에 다닐 때, 주말이면 종종 그곳에 사진을 찍으러 가곤 했다. 그곳의 공장들, 노동자들과 거주자들. 나는 그 장소에 익숙해졌다. 반면에, 그 결정은 또한 우리네 시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왔다. 내게 톄시 지구를 상기시키는 고적감desolation─중요하던 역사가 이제 점차 우리 눈 앞에서 쇠퇴해가고, 와해되어가고 있다는 감정─이 있었다. 그 이후, 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런 테마와 수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공단과, 그곳의 생산 일과routine,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는 것도 포함되었나?
물론이다. 어떤 테마를 정한 뒤에, 모든 영화제작자는 여러 기술적인 접근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기술 장비들을 실행 가능하도록 배치하는 법을 고려하는 것, 그게 전부다. 많은 이들은 왜 첫 영화의 러닝 타임이 9시간인지 물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개인적으로 그건 내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는 전혀 특이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관객들로부터의 저항resistance(저조한 관객수를 말하는 듯 – 옮긴이)을 예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 제작에 있어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나?
저항?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완성할 때까지의 계획을 자각하며 영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 내 직업은 완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현시presentation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주로 나날의 실제 작업과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나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노동자들과 사귀는 것 등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모든 건 참으로 간단했다. 영화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이다. 매일같이 찍고, 매일같이 수많은 세부사항들을 다뤄야 한다. 작업에는 물적 자원의 지속적인 투입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내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지원해줬다.
<원유>(왕삥, 2008)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잠재적인 관객들의 저항을 고려하지 않았나?
뭐라고? 영화의 비용은 박스오피스 수익과 다른 문제다. 둘은 연관이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박스 오피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뒤얽혀있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지는 둘은 서로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자 – 옮긴이). 그건 명백히 큰 이윤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믿는 한, 계속해야 한다. 그건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이후 당신은 <철서구>의 테마를 잇는 듯한, 다큐멘터리 두 편 <원유Crude Oil>(2008)와 <석탄 가격Coal, Money>(2010)을 더 찍었다. 엄동설한에 중국 북서쪽 칭하이靑海성의 황야에 있는 유전에서 노동자들을 기록한 <원유>의 러닝타임은 14시간이다. (<원유>는 – 옮긴이)로스 엔젤레스에서 관객들이 임의로 들어오고 나가는 전시관에서 상영되었다. 사실상, 거기 앉아서 영화 전부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설치미술 같다. 의도했었나?
그랬다. 로테르담 영화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설치 시네마 섹션을 원했다. 그들은 내게 요청했고, 나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영화는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익은 별로 없었다. 당시 나는 북서쪽에서 작업하고 있었으므로, 편의를 위해 유전을 찍기로 결정했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중공업이나 에너지 산업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원유>에서는 노동자들의 휴게실에서나, 바깥 리그rig(굴착 장비 – 옮긴이) 옆에서나, 대화나 행동이 거의 없다. 영화에 대한 단일한 인상은 심지어 그들이 말을 하거나 주위를 돌아다닐 때에도 끊기지 않으며, 보통 몇 분여간 지속되는 롱 쇼트들은 그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이건 관객들이 집단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공동체와 삶lived life에 대한 강렬한 감상을 품는 <철서구>와는 상반된다. 그러한 대조는 지역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중국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공장들에는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공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의 정규직 노동자라면, 노동 현장에 대한 소유 중 일부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유사하게, 사람들의 일상은 공장에서 그들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옮긴이) 이는 오늘날의 생산시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디든지 계약-노동 시스템으로 이뤄져있다. 그건 고용이라는 단순한 관계이며, 보통 일시적이다. 유전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계약 시스템에 속해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 현장은 더 이상 당신의 삶과 관계가 없다.
<원문 p.119-12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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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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