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뉴스를 접했을 땐 사람들이 왜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둑놈이 훔쳐온 장물은 그에 맞게 처리해야하는데 문화재 환수 문제로 돌려주지 말자는 여론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2013년 초 대마도에서 도둑놈이 훔쳐온 불상 2구는 지금도 대마도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에 남아있다.

 

출처 : 연합뉴스

 

흔히 ‘대마도 불상’이라 부르는 불상 2구는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일본 중요문화재)과 고려 금동 관세음보살좌상(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이다. 두 개의 불상은 처리 방식에서 행보가 갈렸는데 그 이유는 금동 관세음보살좌상에서 ‘고려국 서주 부석사’라고 쓰여 있는 복장 유물(불상 속에 있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고 충남 서산군에 있는 부석사는 불상이 서산 부석사 소유라고 주장하였고 2013년 2월 대전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시 대전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정확한 유출경로를 따져볼 것’이라는 판결을 냈다. 이 때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다. 가처분이 받아들여지자 힘을 얻은 서산 부석사 측이 법률을 오해하고 행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산부석사금동관세음보살좌상제자리봉안위원회(이하 봉안위)는 올해 초 성명을 내고 ①정부가 관세음보살상을 몰수품으로 취급하지 말고 성보로서 예의를 다하고 ②본래 자리인 부석사에 봉안하게 하며 ③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일본 측이 소장경위를 밝히기 전에 환부조치 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솔직히 말해 이 3가지 주장은 모두 논리의 파탄을 안고 있다. ①정부가 관세음보살상을 몰수품으로 취급하지 말고 성보로서 예의를 다하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도둑놈이 훔쳐온 장물을 몰수하여 3개월 이내에 환부 조치해야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에 맞는 이치다. 이 주장대로라면 정부는 법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법을 넘어 월권행위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② 본래 자리인 부석사에 봉안하게 하라와 ③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일본 측이 소장경위를 밝히기 전에 환부 조치하지 말라는 소리도 가처분 신청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주장하는 소리다.

 
가처분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어떠한 물건을 현재 상태로 보전하기 위해 법원에 의뢰하는 행위를 말한다. 봉안위가 가처분을 낸 것은 도둑이 훔쳐온 장물이 국가에 몰수 된 뒤 대마도로 가게 되는 것을 임시적으로 막아놓고 그것이 왜 서산 부석사의 불상인지 법원에서 밝혀야 하는 것이지 가처분을 냈다고 불상을 도난당한 관음사가 불상을 어떻게 취득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만약 봉안위의 말대로 가처분이 진행된다면 ‘우리 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노트북이 내가 몇 년 전에 도난당한 것이니 법원에 가서 당신이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시오’라고 하면 정당하게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도 무조건 법원에 나가서 이 노트북이 내 것임을 증명해야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봉안위는 사유재산제도에 대해서 철저히 무시하고 있으며 법률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가처분 신청은 신청을 낸지 3년 뒤에 풀리게 돼 있다. 2016년 2월이면 가처분이 풀린다. 봉안위는 하루빨리 변론기일 또는 심문 기일을 열어 불상이 왜 부석사 소유인지 밝혀내야한다. 이것을 망각한 채 일본보고 따져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서 ①번의 주장처럼 법률을 무시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의 경우엔 복장유물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것이 우리 것이라 주장하는 한국에 학자는 대마도에서 ‘신공왕후가 한반도에서 가져갔다’라고 기록된 책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더 위험한 주장이다. 신공왕후가 누구인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신공왕후의 임나 정벌을 이야기하는 사람 아닌가? 불상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꼴이 된 셈이다. 이것이 학자로서 할 주장인가?

 

출처 : 본인촬영

 

필자는 비영리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라는 곳에서 4년째 근무 중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47책, 일본 궁내청(이른바 천황궁)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 1205책, LA카운티박물관으로부터 문정왕후어보 반환결정을 이끌어냈으며 2014년 4월 25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대한제국 국새 및 조선왕실인장 9점을 반환하게 한 단체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많이 욕을 들었던 것이 동조여래입상을 일본으로 반환하라고 이야기 했을 때였는데 7시간 만에 4800개의 악성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당시 기자회견은 강제징용 전문 최봉태 변호사,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문화재환수운동가 혜문이 가졌다.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워 성과를 내본 세 사람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마도 불상을 돌려주라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문화재환수는 정확하게 약탈된 증거를 갖고 진행해야한다. 문화재환수는 식민지 시기나 6.25전쟁 당시 부당하게 약탈당한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옴으로써 우리가 당시에 잃어버린 민족의 정신을 찾는 운동이다.


대마도 불상을 보면 일단 부당하게 반출됐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모두 추론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추론하여 떼쓰게 되면 어떤 문화재가 어떤 의미를 갖고 돌아 올 수 있을까? 떼써서 돌려달라는 것은 그저 그 문화재가 탐이 나서 하는 행위가 아닐까?
  
대마도 불상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최근 자신의 SNS에 대마도 불상은 우리 것이라며 쓴 글을 보고 필자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 불상은 우리 것이니 대마도 탐방을 가지 않겠냐며 여행상품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 특히 문화재 문제는 민족 감정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 감정을 갖고 이 사건에 임한다면 앞으로 일본과의 모든 문화재 반환 운동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강제징용 문제, 문화재 문제는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되면 생각해보겠다.’라는 일본인의 핑계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판단 실수로 일본에게 너무나 좋은 회피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이로써 모든 과거사 문제가 대마도 불상 문제 때문에 중단된 지 벌써 2년 반이 돼간다. 
  
이제라도 가짜 문화재 환수운동가들의 거짓 이야기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해야하지 않을까?

 

 

 

누군가 어벤져스에 대한 감상평을 묻는다면 본 후에 같이 얘기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에는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있고, 재미의 개인차가 있으니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먼저 밝히자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번 어벤져스 시리즈를 재미있게 감상했다. 캐릭터도 좋아할뿐더러 우리나라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시원시원한 스케일이 좋았다. 울트론이나 비전과 같이 인간이 아닌 캐릭터들도 나쁘지 않았고, 한국의 수도인 서울까지 등장하는 등 실로 볼거리도 많았다. 그러나 그 볼거리는 너무 과한 측면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볼거리가 넘쳐나서 관객의 시선은 분산되어 혼란스럽고, 생생함을 위해 3D 버전을 선택했다면 그 시선 분산의 정도는 빈번하다. 큰 스케일과 화려한 액션, 스크린에 가득 찬 볼거리들, 많은 캐릭터의 등장 등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를 정도다. 물론 그것이 어벤져스라는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치임에 틀림없다. 필자 역시 그런 장치를 좋아하는 편이고, 그런 화려한 장치들로 구성된 영화를 종종 감상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시리즈에 이어 이번 영화에까지 그런 요소들이 복제되듯 등장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적어도 이번 시리즈는 어벤져스1(편의상 1, 2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지칭한다.)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영웅들이 하나의 팀으로 적과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말았어야 했다. 단결력 있는 하나의 팀,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웅들의 모습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벤져스2는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캐릭터는 여전히 개인적으로 행동하고, 새롭게 등장한 영웅들 역시 팀 어벤져스에는 아직 어색해 보인다. 사실 캐릭터의 이러한 행보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토르와 아이언맨만 놓고 봐도 장르가 신화와 SF로 거의 반대의 장르에 속하지 않는가. 한 영화 안에 여러 캐릭터들을 모아 놓았으니 개별적으로 행동하고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벤져스1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팀워크 구축의 상황으로 회귀한 어벤져스2의 내용이 관객에게 마냥 반가울 리가 없다. 두 발 전진을 위해 한 발을 물러섰다고 하기에는 아쉬운 포장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환영이라는 장치를 삽입해 캐릭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까지 하니 지켜보는 관객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선은 여전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하고, 3D와 스케일로 인해 점차 피로해진다.

 

이러한 피로감을 무릅쓰고 모두가 기대했을 한국 배경에 대해 언급하자면,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한국 관객들이 열광할 만한 한국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얘기해주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영화에서 한국이 등장한다는 점은 자국민으로서 기쁜 일이지만, 이 영화에서 과연 한국이라는 배경이 등장할 필요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문, 헬렌이 한국계이기 때문에 한국을 선택했다? 헬렌의 혈통만으로는 영화의 배경의 하나로 서울을 선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그녀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 울트론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 헬렌은 굳이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외국어와 첨단 기술에 능통하고 이 때문에 다른 인물들이 조언을 구하는 대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첨단 과학의 중심지로 서울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액션신이 등장한 강남 일대가 참 평범하기 그지없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네티즌들이 합성해서 올린 배경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물론 촬영을 빌딩숲 한 가운데에서 진행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첨단 과학을 보여줄 만한 배경을 선택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본 적 없는 전철의 등장신이나 다리 위에서의 액션신보다 그런 필연적인 구체적인 배경이 먼저 설정되었어야 했다. 그런 설정 없이 서울을 등장시키다보니 필요 없는 전철의 질주신이 등장하고 다리 위에서의 액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점점 따지다보니 이 영화에서 한국의 도시 서울이 등장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번 어벤져스2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를 높이고 싶은 마블의 노림수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마블사에서 최근 개봉했던 영화 중 킹스맨의 한국 흥행을 눈여겨본 결과일지도 모른다.

 

 

추가적으로 헬렌의 첨단 과학 연구소는 한국인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서울의 인공섬(세빛섬)에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서울시가 어떤 홍보효과를 누리고 싶었다면 이 역시 실패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인공섬을 가보고 싶은 장소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으며 이를 활용한 홍보도 역시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고 삼각지역 근처를 지났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어벤져스의 촬영지를 언급하는 방송 내용을 들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어벤져스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잘 들리지도 않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 여기가 그 인공섬 근처인가보다.’ 정도일 것이다. 한국인에게도 그렇다면 외국인에게는 오죽할까. 만약 홍보 효과를 노린다면 한국인도 잘 모르는 섬을 외국인에게는 어떻게 설명하고 홍보해야할지 고민을 해봐야할 문제다. 물론 여전히 그만큼의 홍보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 다음으로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어벤져스는 영웅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답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관객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인물에 집중 된다. 사실 이전 시리즈보다 어벤져스2에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인물들은 팀 어벤져스에는 어색해보였을지 몰라도 인물 자체만으로 보면 의외로 자연스럽게 영화 안으로 녹아드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비전이 제일 좋았다. 그 특유의 인간인 듯, 인간 아닌 표정이라든가, 펄럭이는 망토가 왠지 모르게 정겨웠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울트론과 대조되는 그의 인간미(그것을 인간미라고 할 수 있다면)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 포스터에서 그를 보니 왠지 더 친근하고 반갑기까지 했다.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는 쌍둥이 남매의 경우도 같은 팀으로 합류하게 되는 스토리의 개연성 측면에서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 자체의 캐릭터로는 나쁘지 않았다.(나중에 그들이 다른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라는 것을 알았으나 어벤져스2에 등장하는 그들은 그런 배경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남매는 둘 다 어벤져스에 계속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퀵 실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남매의 활약을 한 번 밖에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부분은 예상치 못한 전개라 다소 신선하기도 했다. 특히 스칼렛 위치가 어벤져스 팀에 계속 잔류하게 되는 강력한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한참이나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들의 비중이 기존의 어벤져스만큼, 혹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게도 이번 시리즈에서 기존의 캐릭터들은 그 이전 시리즈의 임팩트가 없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상처입고, 갈등하고, 어딘가로 떠나기까지 한다. 신이라는 토르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환영을 조심하라고 다른 이들에게 경고하는 와중에도 본인도 환영에 당한다. 그 뿐인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알아볼 것이 있다며 훌쩍 떠나기까지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웅들이 이렇게 책임감이 없었나? 내가 마블의 세계관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영웅들을 쉬게 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하기에는 관객에게 너무 불친절하고, 책임감이 없는 처사다.

 

심지어 어벤져스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호크아이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은 더더욱 그렇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나무를 하는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신선해보였을지 몰라도 나는 전혀 재미의 요소를 느끼지 못했다. 호크아이가 가정을 이루고 따뜻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호크아이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장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제작진이 영웅들의 인간미와 은퇴를 위해 이를 설정한 것이라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번 영화 한 편을 보고 어벤져스1에서 환호했던 영웅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시들해졌고, 그 영웅 중 일부의 은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어벤져스1보다 더 심화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의 힘을 조금 뺀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물론 그런 심화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마블에서도 가벼운 농담만으로 영화를 채우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영화 관련 키워드 중에는 분명 사람, 인공, 도덕과 같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그런 키워드를 다뤄보고 싶어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블이 그런 것들을 전혀 하나로 묶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사람과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다면, 이는 울트론과 아이언맨을 중심으로 좀 더 극대화시켜서 표현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둘은 비슷한 존재에 대한 라이벌 의식 정도로만 표현된다. 정체성이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각자의 내면적 갈등만이 아니라 좀 더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던가, 쌍둥이 남매가 기억하는 스타크 사의 폭탄과 같은 문제를 좀 더 다뤘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다룰만한 요소들은 그저 스쳐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이를 위해 캐릭터의 힘을 뺐다고 하기에는 힘이 빠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쯤 되니 어벤져스2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만 다룬 것 같은데, 혹시 누군가 오해할까 싶어 다시 언급하자면 필자는 사실 어벤져스2를 꽤 재미있게 감상했다. 원래 좋아할수록 더 아쉬운 점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지적할 것이 더 많았을 뿐이다. 필자는 어벤져스 시리즈를 계속해서 보고 싶고, 그를 위해서는 어벤져스2의 아쉬움을 보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은 칭찬보다는 지적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다룰 이야기는 꽤 중요하다.

 

 

마블의 열혈 팬들에게는 어쩌면 적용되지 않을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많은 아쉬운 점들과 더불어 어벤져스2를 접하는 필자와 같은 일반 관객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이 영화 하나에 많은 이야기들이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마블이 그리는 큰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필자는 종종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다. 사전에 어벤져스2에 연관된 영화를 전부 보지 않았고, 봤다 할지라도 그 순서가 뒤죽박죽인 탓이었다. 그러니까 마블영화의 특징인 쿠키 영상에  이야기하자면, 이전 쿠키를 먹지 않으면 나중에 먹는 쿠키의 맛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먹어도 맛을 알 수 없는 쿠키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전작보다 어벤져스2는 마블영화 초보자에게는 더 불친절한 영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도 더 심화될 것만 같다. 마블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이상 마블의 세계관을 정독하지 못한 관객들은 점차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다른 영웅들이 등장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 머리가 아픈 문제다. 이에 대해 마블은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족하면 니들이 찾아보든가.’라는 식의 태도로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며 전작보다 더 불친절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태도는 새로운 마블 초보들이 마블 영화에 입문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기존의 마블 팬들을 더 오타쿠스럽게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일부 마블의 열혈 팬들은 더 즐길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나올 시리즈를 감안했을 때 이는 결코 발전적인 방향이 아니다. 영화가 그들만의 축제가 되어버리면 마블 시리즈는 그저 팬픽 문화 이상으로 발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팬픽 문화 수준에 머무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세계관을 이해하는 팬들만 존재할 경우 마블 시리즈는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마블은 팬픽 문화 수준에 머무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모두가 이해하는 것을 더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블은 마블만의 세계관을 더 정교하게 짜고 싶다면 열혈 팬들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일반 팬들을 위한 통로를 반드시 열어두어야 한다.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가 팬픽 수준으로 고착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노력 없이는 앞으로의 마블 시리즈는 점점 그들만의 축제가 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것이다.

 

물론 찾아볼 수 있는 연결 영화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일이다. 그런 면에서 연결 영화가 많은 마블은 참고할 영화가 많아 좋지만, 좋은 영화라면 한 편의 내용만으로도 초보 관객까지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마블 영화를 보며 얻은 교훈은 있다. 적어도 새로운 마블 쿠키를 맛보기 전에 이전 쿠키들을 순서대로 다 맛봐야 그나마 맛을 알 수 있다는 것. 필자는 다음 쿠키를 위해 이번에는 이전 쿠키들을 맛보고, 우유도 마시며 다음 쿠키의 맛을 최대한 느껴볼 예정이다. 아마 다른 관객들도 필자처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블에서도 이를 감안해 좀 더 친절하고 맛있는 쿠키를 만들어주길 기대해 본다.

 

 

내 나이 스물여섯. 무언가에 쫓기듯 재빨리 대학과정을 수료했고, 그 덕분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백수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은 이것저것 참 준비들을 많이 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몸과 마음 모두 한량이나 다름없다. 간간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신문과 책을 읽는 걸 제외하면 딱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기껏해야 1주일에 한 번씩 축구하는 걸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나태다. 비록 몸은 집이라는 공간에 있지만 정신은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 쉽게 말해 나는 방황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의 방황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나?

돌이켜보면 내게는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방향이 없었기에 뒤늦은 방황은 필연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껏 큰 사건 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냐 하면, 그것도 의문이다. 고백하건대 사실 내게는 사춘기도 없었다. 일단 충돌이 일어나면 비켜가는 스타일 때문이라는 내부의 원인도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원인으로 사건 자체가 많지 않았다.

 

찢어진 축구화와 증발해버린 꿈

그러나 내게도 기억될만한 사건 하나는 있었다. 굳이 방황의 근원을 찾자면 유년시절을 꼽을 수 있겠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축구선수를 꿈꿨다. 당시 축구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또 지금도 왜 축구를 끊지 못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이끌리는 데에는 반드시 이성만이 작용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간에 중요한 건 내 꿈이 좌절됐고 그 과정에 스스로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학원에 가지 않고 몰래 운동장에 공을 차러 나갔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이성을 잃었다. 이내 내가 가장 아끼던 축구화를 가위로 오려냈다. 그때 나는 저항했어야만 했다. 멍하니 찢어진 축구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이내 학원을 갔다. 그날 이후 축구선수라는 꿈은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한 가지에 ‘올인’한 적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법칙도 있는데 그 이론이 사실이라면 나는 성공하기 글렀는지도 모른다. 한 우물을 파는 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았다. 축구선수라는 꿈이 좌절된 후, 내게는 경찰, 검사, 사회복지사, 기자 등의 꿈이 다시 등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준비하지 못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꿈은 있지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이내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오는 변덕 마다하지 말자

쉽게 말해 나의 병은 변덕이다. 변덕은 무서운 병이다. 이 병은 환자가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진득하게 앉아보려 해도 도무지 좀이 쑤셔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병을 치료할 약을 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스운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변덕을 고치려면 변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어차피 변덕 부릴 거, 좀 더 주체적(?)으로 부리자는 거다. 오는 변덕 막을 수 없다면 마다하지 않고 변덕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변덕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다방면의 분야에 얕은 지식이라도 쌓아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나가는 것. 현재 내가 지향하고 있는 길이자 끝없는 방황에서 내린 결론이다. 변덕에 이용당하느니 주체적으로 변덕을 활용하는 게 사실상 같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심적으로는 안정감을 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방황하는 삶에도 근사한 점은 있다. 새로운 일에 잠시나마 고무되어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한쪽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다른 쪽 일을 추진함으로써 불안감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무력과 불안에서 벗어난다고 그것이 곧장 행복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극이 없으면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방황하는 이들의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정리하자면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중간항의 상태. 그런 상태가 방황하는 이의 처지다. 아이러니하게도 방황을 그만두는 순간, 행복과 불행은 온다. 함께 혹은 잇따라 찾아올 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둘(중 하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진: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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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9 재보선 참패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요즘 초상집 분위기를 넘어 난장판의 지경에 처해있다. 새정치연합 내부에선 의원들이 서로 간의 패배 책임을 놓고 공방을 계속 벌이며 지켜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지난 5월 8일 새정치연합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주승용 의원이 친노 패권주의를 운운하며 문재인 대표체제에 패배의 책임을 돌리자, 이에 정청래 의원은 ‘사퇴 공갈’ 발언으로 맞받아쳤고 격분한 주 의원은 사퇴 선언을 하며 문재인 대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릴 박차고 나갔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 자리에서 유승희 최고위원은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 파악 대신 새정치연합 한심스런 처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데 일조했다. 이를 지켜 본 시민들은 한 편의 ‘붕숭아학당’을 본 기분이라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비꼬아 표현하기도 했다.

 

ⓒ아이엠피터

 

재보선 참패 후 문재인 대표를 향한 비판의 화살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당대표로서 선거의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아무리 야권의 열세였던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패했다 할지라도 박빙의 결과가 아닌 완전히 수세로 밀리는 결과가 나왔다면 지도부의 공천과 선거전략 상의 미진함이 큰 원인이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 내에서 벌어지는 비판의 정도는 현실적인 대안과 성찰의 요구가 뒷받침된 비판이 아닌, 오로지 국민들이 체감할 수도, 실체를 파악할 수도 없는 패권주의에 입각한 무조건적인 사퇴론만 외쳐대고 있는 실정이다.

 

ⓒ연합뉴스

 

과연 이번 재보선의 참패가 문재인 대표와 친노 패권주의의 탓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친노 패권주의가 있기나 한 걸까? 각 계파들이 실체도 궁금한 친노 패권을 들먹이며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크나큰 의문이 든다. 얼마 전,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그간의 침묵을 깨고 문재인 대표에게 ‘호남 외면’과 ‘친노 패권’을 거론하며 적극적으로 사퇴를 종용했다. 그런데 김한길 전 대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자. 2013년 당대표 당선, 2014년 새정치연합 합당 이후 당 강령의 개정을 강행하며 ‘민주정부 10년’과 ‘광주 5.18 민주화운동(처음에 빠졌다가 이후 반발에 다시 삽입했다)’, 그리고 ‘경제민주화’, ‘반값등록금’ 등의 주요 항목을 삭제한 바람에 민주당(현 새정치)의 노선과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이에 호남 지역뿐 아니라 본래 지지자들의 전국의 민심마저 저버리며 들끓게 만들었었다. 또 새정치연합으로 급작스러운 창당(또는 합당) 이후 작년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당시 안철수 공동대표 계파와의 지분 나눠먹기식의 무리한 전략공천으로 인한 당내 파동을 일으켰고, 무려 텃밭이었던 전남 순천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지경까지 이르게 한 과오가 있는 자가 바로 김한길 전 대표이다. 결국 이번 재보선을 앞두고 천정배 전 장관이 탈당하여 무소속 후보로 나와 승리하게 된 것도 안철수 전 대표 측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당시 권은희 경정을 천정배 전 장관 대신에 전략공천 한 과오의 연장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4.29 재보선 때에도 마찬가지다. 호남과 당내 동교동계를 대표하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지난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선거에 패한 이후 나서지 않다가 문재인 대표와의 선거에서 벌인 공방의 악감정 때문인지 광주 서구을 선거에조차 뚜렷하게 지원유세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앞서 말한 김한길 전 대표, 안철수 전 대표 등 비노계 인사들은 아예 선거유세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선당후사’란 말이 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하기보다 당을 먼저 생각하다”란 뜻이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결집하는 새누리당과 다르게, 새정치연합은 항상 선거 전에 계파들 간의 분열하는 모습만 국민들에게 내보이며 실망감을 안겨줘 왔다. 정당은 일반 이익집단과 달리 자신들의 이익만을 ‘표출’하는 집단이 아닌, 외부의 여러 사람들의 이익을 ‘집약’하는 집단이다. 지금처럼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의 인사들이 국민들의 바람을 귀 기울여 정책으로 보답하지 않고, 개개인이 정당이란 특성을 악용하여 정치적인 생존을 꾀하는 모습만을 계속적으로 보여준다면 그 정당의 미래는 없다.
        

ⓒ뉴스핌

 

현재 당내 각 계파 인사들의 너도나도 문재인 대표 흔들기는 절대 바람직하지 못 하다.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기 이전에 본인들 스스로가 선거를 위해, 당을 위해 무엇을 해왔는지 자성하는 태도가 당위적으로도, 순서로 봐도 옳다. 내가 본 문재인 대표는 그랬다. 선거 때만 되면 계파의 입장에 관계없이, 큰 선거든 작은 선거든, 강한 후보든 약한 후보든, 그 후보가 ‘친노’든 아니든 간에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전국 각지의 힘을 보태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선거 지원 유세를 다녔다. 선거철만 되면 지원유세자로 빠짐없이 언론에 노출된 사람도 문재인 대표였다. ‘친노’ 계파만 위하는 수장이라고, 당내 분열의 원인이라고 힐난하는 이들의 말이 맞았다면 저런 ‘헌신과 노력’의 행보를 보였을까. 지금 위기의 새정치연합을 재정비하고, 당의 발전과 국민들의 바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헌신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그에 가장 알맞은 인물은 바로 문재인 대표라 생각한다. 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현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이처럼 청렴하며, 약자를 위해 살아온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문재인 대표는 이럴 때일수록 주변의 ‘흔들기’에 주저하면 안 된다. 수많은 당원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덕분에 당선된 한 공당의 대표의 신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좌절 말고, 자신의 뜻을 통해 당의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강단 있는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새정치, 이제 그만 싸워라. 지지자들은 계속되는 참패보다 싸우는 모습에 실망감을 느끼고 지쳐서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고 외면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비극도 없을 것이며, 또 이런 비극 자체가 생기는 걸 원치 않으리라 믿는다. 새정치연합의 개개인과 각 계파들은 정치 야욕을 던져버리고 앞으로 당의 환골탈태와 혁신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새정치연합이 전적으로 마음에 들어서 지지하려는 사람은 결코 소수에 불과하다. 보기에 불쌍할 정도로 기울어져있는 정치지형과 절망 수준의 진보 정당 및 단체를 향한 이념적 탄압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마땅한 대안 정당이 없기 때문에 지지해줄 뿐이다. 이제라도 치열하게 성찰하여 국민들의 바람에 귀 기울이고 그에 걸맞은 결과물을 보여주며 민심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것이 곧 정치인이 남을 비판할 자격을 얻는 조건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정치는 결국에 대다수 국민을 상대로 하는 마케팅이고 세일즈다. 정치인은 영업사원의 정신으로 손님이라 볼 수 있는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발 벗고 누비며 경청하고 소통하고 그들의 고통을 정책을 통해 보듬어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런 한심스런 상황에서도 내년 총선에서 과연 새정치연합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하는, ‘울며 겨자먹기’의 심정으로 희망고문을 당해야 한단 현실은 기대감보단 절망감을 더 느끼게 만든다.

 


2014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훈민정음 국보1호 지정을 위한 10만인 서명운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동안 한글관련 단체가 같은 주제로 서명운동을 벌였으나 번번이 실패한 운동에 문화재 관련 단체가 도전한 것이다. 문화재 관련 단체가 주장한 내용은 ‘숭례문이 국보1호로써 자격이 있느냐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1996년 김영삼 정권, 2005년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보1호 숭례문과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호를 교체하려 했던 정책을 다시 추진하자.’였다. 


서명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됐는데 국민의 호응을 얻어 서명운동 마감일인 2015년 1월 11일까지 총 11만 8405명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종료됐다.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학생, 주부 및 정치인까지 많은 이들이 호응한 서명운동으로 조명 받았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서명운동 종료 당일 저녁에 문화재청은 보도 자료를 배포해 국보 및 보물 등의 번호를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국가문화재 관리 체계 재조정을 위한 기본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국보 번호를 폐지하는 것을 전제로 여러 가지 안을 마련한 뒤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안을 결정한다고 한다.

 


서명은 국보1호 숭례문과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호를 바꿔달라는 운동이었는데 문화재청은 왜 모든 국보 번호를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일까?


문화재청은 국보 1호는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이지, 국보의 가치가 으뜸이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보1호와 국보70호의 번호를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재청이 말하는 변명에 불가하다.


국보 1호가 무엇인지는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다. 그 이유는 교과서에 수록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보 1호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는 외국인이 한국에 귀화할 때 보는 시험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문화재 해설 및 관광 관련 자격시험 문제 등 역사와 관련된 시험에 단골문제로 출제되고 있다. 또한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언론은 ‘국보1호’가 불에 탔다고 집중 조명했으며 2013년 숭례문 복원 당시 문화재청에서 ‘국보1호’를 복원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미 국보1호는 대한민국 문화재의 대표자리를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문화재청은 말한다.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를 국민들이 문화재 중요도 순위로 오해하고 있어서 생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재청이 매번 말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당장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국보2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답하지 못한다. 국보를 문화재 중요도 순서로 인식했다면 국보 5호까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국보1호 숭례문을 국민이 기억하는 이유는 1호의 상징성 때문에 그것이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표상이 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의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은 1996년과 2005년. 정부가 국보1호와 국보 70호의 번호 교체문제를 진행했다는 것으로 이미 드러나 있다. 국보1호의 상징성은 이미 예전부터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사안인 것이다.


두 차례 실패한 정책 이야기가 2015년,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015년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일제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와 최근 복원된 숭례문이 부실과 비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국보 자격 박탈문제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1934년 조선총독이 보물1호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양의 교통흐름에 방해된다며 아다치 겐조우가 숭례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군 사령관은 대포로 쏴서 파괴하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 폭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문이므로 남겨 놔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침략의 증거로서 숭례문은 살아남았고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들어온 흥인지문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식민통치에 의미 없는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은 철거당했다.


그 후 1934년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하여 보물1호는 숭례문, 보물2호는 흥인지문으로 정했다. 국보1호 숭례문이 일제잔재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이것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은 식민지이기에 국보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보물 번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또 변명한다. 국보지정 당시 이 문제가 거론됐지만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시켰기에 일제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는 보물 지정 당시 고적도 지정했는데 당시에 고적 1호로 지정한 문화재는 경주 포석정이었다. 일제는 교묘하게 보물과 고적에 망국의 의미를 담은 문화재를 1호로 지정한 것이다. 보물을 국보로 격상시키며 일제잔재를 털어냈다면 고적1호는 왜 그대로 지정한 것일까? 숭례문은 일제잔재가 아니기에 국보1호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나오는 문화재청의 논리 없는 변명일 뿐이다. 


문화재계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문화재와 관련하여 일하고 있는 지식인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집착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일 뿐인데 잘 모르는 국민들이 오해한 것이다라며 이야기 할 때마다 그들은 왜 상징과 표상은 이해하지 못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현재 국보에 번호를 부여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북한 밖에 없다. 해외사례 중 국보에 번호를 부여하는 경우가 없고 일본도 최근에 없앴으니 우리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필자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쉽고 간편한 방법을 갖고 있다. 바로 문화재 국보번호 시스템이다. 이러한 좋은 상징 제도를 왜 없애려하는가.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문화재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하겠다며 국민들이 지지하는데 번번이 문화재 위원회만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징과 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재위원들이 있는 한,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채 고집과 아집으로 버티는 문화재위원들이 있는 한, 문화재계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을 상징할 수 있는 좋은 체제도 잃어버릴 것이다.


풍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 딱 감고 바늘로 푹 찔러 내 안에 차올랐던 모든 감정들이 말끔히 빠져나가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누군가에게 부탁해 고이고이 접어 서랍 안 쪽에 넣어달라고 하는거다. 그렇게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이유모를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우린 종종 계절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나 봄타나봐.’, ‘나 가을타나봐.’ 하지만 정말 계절만이 이 이유모를 우울감의 원인인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은 이유가 너무 많아서 마치 여러가지 색의 실타래가 뒤엉켜 어떤 색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뒤엉킨 색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돈된 실타래의 색들을 확인하고 심지어는 예쁜 팔찌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우울증, 또는 때때로 찾아오는 이 우울감의 상태에서는 무기력해진다는 함정이 있다. 속은 공허하고, 의욕은 상실되고,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매력적인 글귀와 명언을 보아도 예전처럼 가슴이 요동치지 않는다. 페이스북을 보면 다들 멋지게 살고 있는데 나만 정지해 있는 것 같다.

 

안다. 힘들다는 것. 하지만 단순히 ‘봄 타는 것’으로 책임을 떠넘겨서는, ‘언젠간 괜찮아지겠지.’하며 방관해서는 지금 이 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의 자아정체성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할아버지가 하고, 아버지가 했던 일을 이어받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체성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터넷, 스마트폰, 미디어의 발달로 시공간의 구분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보의 양과 경험으로 다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때 우리 안에 형성된 각각의 정체성은 서로 모순되어 충돌하며 자아를 분열시킨다.

 

그러니깐 당연한 것이다. 우울하다는 것은.

 

그래서 나는 또 안다. 지금의 이 무기력함에서, 이 공허함에서, 이 우울감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것이라는 걸. 그리고 또 언젠간 찾아올 것이라는 걸. 사람마다 이에 대처하는 법은 다르겠지만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나만의 ‘발버둥침’을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글로 쏟아내기 그리고 마지막은 긍정적인 문장으로.

 

엉켜진 실타래를 풀어 내는데는 반드지 글로 쏟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도대체 이 감정은 뭐지?’, ‘우울한데 이유를 알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지금 느껴지는 감정들, 생각들, 내가 처한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긴다. 한 편의 멋진 글을 써 내는게 아니라 단순히 내 안에 엉켜있는 생각과 감정의 실들을 빼내는 것이다. 그러니깐 글쓰기에 대한 부담은 없어야 한다. 부담이 생기면 꾸며 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호했던 감정들이 언어로 구체화되면 내 상태가 스스로 진단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은 항상 긍정적으로 끝내는 것이다. 마지막 긍정적인 한 줄이 치료법이다. 부정적인 문장에서 끝나면 내 감정 또한 부정적인 것에 머물러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느 날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외로움이 사무쳤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써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서 온전히 그 감정을 느끼도록 노력했다. 가끔씩은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보다 정면으로 맞서보는 것도 방법이다. 

 

움직이기.

 

우울할 때는 운동을 하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운동을 통해서 몸을 일부러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움직임’은 몸을 움직이는 것  뿐만이 아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움직이자. 또는 평소에는 안하는 퍼즐 맞추기라던가 그림 그리기를 통해 손을 움직여 보자. 아무 생각없이 재밌는 예능프로를 보며 하하 웃으며 표정을 움직이기도 하고,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뇌를 움직여보기도 하자. ‘움직임’은 내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사소한 성취감 느끼기

 

갑작스런 우울함이 밀려들어올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 시기에 스케쥴러는 텅텅 비어있다. 연말이 되어 지난 1년간의 스케쥴러를 되돌아보면 그 여백을 통해 인생의 여백의 시기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채우려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루하루 성취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을 적는다. 예를 들면 그 동안 쌓아놨던 책상의 책들을 정리한다던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시간 내어 본다던가, 혼자 밤에 산책을 한다던가 등의 그런 사소한 것들.

 

 

사실 이 글은 나에게 쓰는 조언정도가 될 듯싶다. 어쩌면 이 글을 통해 나는 글로 쏟아내기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풍선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왕이면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는 풍성한 풍선이고 싶다.

 

나는 일상에 지쳐 여행 떠나고 싶어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추운 겨울에 제주도에 갔었던 적이 있다. 그때 명창으로부터 배운 노래가 바로 ‘너하고 나하고, 너랑나랑’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방언인 ‘느영나영’ 제주도 민요이다. ‘느영나영’민요(한번 들어보시길)를 연신 따라 부르던 당시 나의 모습을 회상해보면, 여행이라는 낭만에 젖어 ‘김종욱찾기’ 영화속 이야기 같은 사랑과 뭔가 새롭고 다르고 완벽한 유토피아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에 계속 해서 혼자 도피하듯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중이었다.그때 ‘왜 나는 내가 살아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홀로 해결하려고 돌파구를 찾아 해매고 있나’ 하는 물음이 생겼었다. 요즘 다들 힘들다는데 내 고민을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 지금 지내고 있는 곳에서 당신는 함께 잘 살고 있나요?


느영나영 사는 세상: 분절화된 개인과 냉혹한 경제


고향 떠나온 난 도시에서 모든 걸 돈으로 부담하고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느꼈다. 무엇을 할 때마다 돈돈돈 할 수 밖게 없었고 소비를 해야만 삶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었다. 살다보니 어느 순간 마을시장에서 단골가게를 가서 관계를 형성하며 하는 소비보다 대형마트가서 싸고 깨끗해보이는 플라스틱 그릇에 들어있는 걸 사는 게 더 익숙해졌다. 밥한끼 제대로 챙겨먹기 보다는 어딜 가든 있는 편의점에서 손에 있는 돈에 맞춰 저렴한 가격에 한끼 떼우는 게 편해졌다. 또, 기업들이 찍어내는 제품트렌드에 따라 TV와 인터넷에서 소문난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고, 내가 세일해서 산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이야기한다. 그런 일상 속에서 뭔가 모르는 공허함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다. 또 나는 뭔가 허전한 마음을 휴대폰과 카드로 소비하며 해소하려 한다. 내가 쓰는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가고, 내가 쓰는 이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의 노동력이 들어가고 어떤 환경적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제품의 정보에 관해 잘 모른다. 지금 하는 소비의 의미에 대해 무관심한 채 일시적 내 효용과 만족감을 위한 소비만 하는 내 자신을 문뜩 발견한다. 모두가 이런식으로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분절화된 개개인되어 홀로 합리적이고 경제적 선택이라고 믿는 소비를 하고 있다. 개인이 쓴 돈이 소수의 누군가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 소비가 될 수 있고 누군가의 노동과 소중한 자원에 대한 고려 없이 계속해 소비를 해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 소비자로서 비대칭한 정보로 잘 알지는 모르지만, 뭔가 소모적이고 일시적 소비를 하는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게 가능할까? 화폐적으로 나만을 위한 소비가 아닌, 사회적자본로 이루어진 소비로 지속가능하고 좀더 따뜻한 경제가 될도록 우린 할 수 있다.


사회초년생인 나는 나름 희망차게 사회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지만 구조적으로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매번 증명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을로서 살아가는 위태로운 고용형태이기에 내가 일하는 만큼 노동의 대우를 받나 의문이 들지만, 이 일마저 없어지면 안되기에 야근도 하며 버틴다. 많은 직장인들이 ‘미생’이기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질 것이고,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있는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어 착실히 일해서 노동소득으로 좀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나와 나의 가족들, 나의 사람들의 안정적 생활과 삶을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경제체제에서 우리는 노동이 아닌 돈으로 돈을 벌기 쉬운 세상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고도로 발전되고 있는 금융시장에 진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출근하면 보는 저 빌딩 맨 꼭대기층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노동을 하기에 저렇게 높은 월급을 받고, TV 속 고발뉴스에 나오는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기에 저렇게 많은 돈으로 더러운 짓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진정 금수저를 물고 나오듯이 고소득자 자식이나 신의 직장을 갖아야만 세습자본주의에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그래도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공부로 충분히 미래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일터와 닭장 같은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사회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 걸 안다고 계속 지금처럼 버티고 동아줄 같은 희망을 기대하며 일하고 공부한다면 과연 미래는 나아질까? 좀더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내 노동력을 존중해주고 기업과 경제를 우린 만들 수 있다.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매스미디어에 익숙해져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기 보다는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면서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때도 있어 가끔 내 자신이 무섭기도 하다. 하극상 이야기를 들으면 사회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론은 사회구조와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고 뻔한 답으로 끝나는 것 같다. 묘하게 우리 안에서 사회문제는 우리가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저 멀리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문제들은 바로 우리 옆집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아 모르고 있고, 보호해줄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과 사회적 관계가 없어 낙오되고 배제되면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도우면서 문제를 풀어 나갔지만, 지금은 분절화된 우리모두가 소시민으로 홀로 냉혹한 경제와 돈의 앞에 서서 해결해 나가면서 사회문제가 더 발생한다고도 볼 수있다. 그렇다면 구조적 노력을 하면서도 사회문제를 함께 모여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시작해서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지역사회문제부터라도 고민해 조금씩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

 

 

 

느영나영 함께 사는 세상: 사람중심 경제


나는 밤 늦게 집에 들어가는 길에 모던한 야경을 보며 갈 때 ‘이 곳에 나 혼자 뿐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왜 난 혼자만 아등바등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나의 성향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다르게 보니 ‘주변이야기를 너무 곧이곧대로 듣고 살아온 삶의 태도’가 문제였다. 학교 다니며 교수님과 선생님들은 항상 ‘사회’라는 곳이 얼마나 냉정하고 직장생활을 비롯해서 모든 공간에서 모두가 경쟁하고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이야기해준다. 마치 잔혹동화 같은 세상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들어오면서 컸던 나는 긴장해서 잔뜩 어깨에 힘주고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해가며 살아왔다. 가만히 보면 모든 사회생활의 무서운 이야기에는 “혼자” 살아가기에 더 힘들고 지치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모든 것에 ‘혼자’ 맞섰던 분들이 무진장 겁을 주고 “세상살이는 말이야. 경쟁해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한다 말이야” 라고 한다. 나는 혼자 잘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방향만 보고 들어왔지. 어디서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이나 협력해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잘 듣지 못하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다.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자본의 법칙에 따라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동력을 취급하고, 그 안에서 사람을 마치 하나의 부품처럼 취급받는다. 그런 취급에 익숙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부가가치를 많이 낼 수 있는 요소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체제와 사회구조가 개개인들에게 혹독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고 혼자서 살아남는 이야기만 전해져 올 뿐이었다. 정녕 냉혹한 경제와 사회 속에서 홀로 버텨 살아남는 것만이 답일까?


‘느영나영’ 우리가 협력해서 함께 나은 삶이 가능하고 좀더 인간적으로 운영되는 경제인 사람 중심 경제를 형성한다면, 회색의 어두운 현실이라는 잔혹한 세상동화를 핑크빛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사람중심 경제를 꿈꾸며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경제(Social Economy: SE)를 형성해가면서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려 노력하는 사람들과 조직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봐도 ‘좋아보여 잘지내나봐” 라고 말할 수 있는 함께 사는 세상, 사람중심 경제의 구성원이 되길 바라고 응원합니다. ‘느영나영’ 함께 사는 세상인 사회적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너 요즘 잘지내_느영나영


# 사람중심 경제_느영나영 함께 사는 세상


# 좋아보여 잘지내나봐_느영나영

 


*이 글을 읽을 시 유의사항*


필자는 엄청난 학식과 경험이 없다는 점에 유의하고, 동네 한량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야기와 사회적경제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만약 독자님들이 잘못된 정보와 마음에 안드는 의견을 올린다고 이야기해주면 지속적 대화로 함께 풀어가시면 됩니다. 무엇보다 가끔 까칠하고 단정적인 어조나 사투리, 이상한 개그와 비유는 지극히 개인적 취향임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③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④

 

 

 

 


당신은 구글에 대한 유럽의 저항이 단지 새로운 기업에 대한 기존 기업의 반대라며 묵살한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모든 신자유주의 소들이 밤에는 똑같이 검다는 이유로 당신이 사람들에게 단념하고 좇으라고 말하는, 미국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깔린 길 위 현실에 존재하는 조약돌(걸리적거리는 정도의 장애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 – 옮긴이)이 아닌가?  

 

유럽식 구글을 개시해야 한다는 지역 정치가들의 지속적인 요구, 그리고 베를린이나 브뤼셀에서부터 나오는 다른 제안들 대다수는 길을 잘못 들었거나 섣부르다. 유럽식 구글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오늘날 구글은 검색 기업 그 이상이다. 구글은 핸드폰 운영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곧 다른 스마트 기기, 브라우저, 이메일 시스템, 그리고 심지어는 꽤 많은 케이블과 광대역 인프라의 운영체계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활동들을 넘나드는 것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유발한다. 아무리 대학에 12억 달러를 쏟아 붇고 구글을 능가할 만한 더 나은 검색 알고리즘을 개발하라고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도전자들이 구글과 똑같은 기초적인 유저 데이터를 소유하게 되지 않는 한, 구글은 지배적인 위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개선된 알고리즘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럽이 타당성을 유지하려면, 데이터와 그것을 생산하는 인프라(센서, 핸드폰 등)가 갈수록 경제 활동의 핵심 영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구글의 진입을 허용하고 몇몇 무료 서비스의 대가로 이 모든 것을 움켜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유럽이 진정 심각했다면, 데이터의 판매를 엄금하는 별개의 법적 체제를 수립했어야 했고, 이후 보다 작은 기업에게 그런 식으로 보호된 데이터 위에서 (검색에서부터 이메일에 이르기 까지) 해결책을 고안하도록 해야 했다.

 

『넷 딜루전』 이후 당신의 정치적 진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음, 원래 나는 스스로를 실용적 영역의 중심에 서있으며, 다소간 사회 민주주의적 관점을 지녔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방향은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종류의 질문들이 확장되어가는 과정 중에 재설정되었다. 그래서 5년 전쯤의 내가 페이스북과 구글과 같은 부류를 규제할 수 있는 더 낫고 효과적인 방식을 찾는 데 만족했었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그러한 활동에 시간을 그다지 많이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인프라와 그것을 통해 운영되는 모든 데이터를 누가 운영하고 소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이러한 모든 서비스가 시장에 의해 조달되고 단지 사후에 규제되어야 한다는 걸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그것을 두서없고 유물론적인 관점 양측 에서 쓰는 것은 도전이다─의 역사에 대한 나의 계보학적 연구의 과정에서 나는 적잖은 시간을 실리콘 밸리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지를 이해하려는 데 투자했다. 실리콘 밸리 그 자체를 어떤 더 광범위의 역사적 내러티브─생산과 소비에 있어서의 변화, 국가 형태에 있어서의 변화, 감시 능력의 변화와 미군의 요구에 대한─ 위에 위치시키지 않으면, 어떤 그럴 듯한 이야기도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선 맑시스트의 역사 기록학[각주:1]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많다. 특히 ‘인터넷’의 기존 역사 대부분이 자본과 제국에 대한 의문은 등한시 한 채, 관념적인 엉뚱함ideational irrelevance에 빠져있을 상황에서 말이다.

 

2013년 여름 혹은 가을에 나는 점증하는 개인 데이터의 상품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실래콘 밸리─스마트 침대, 스마트 차, 그리고 스마트한 모든 것─에 의해 중개되는 하나 혹은 다른 방식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로 (또한, 짐작건대 자고 있을 때에도) 보내는 모든 순간들을 포착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데이터 포트폴리오를 관장curate하는 데이터 사업가로 초대된다. 분석적으로 봤을 때, 모든 것에 대한 데이터화는 일상의 금융화라는 광범위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는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을지 등의 의문들에 대한 답변이 기술보다는 정치에 더 밀접하다는 것이 어떻게 명백해질지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또한 내가 아무리 대안적 정책을 계속해서 제안할지라도,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것도 깨달았다. 유럽이 실리콘밸리를 대체할 만한 프로젝트들을 형성하는 데 그렇게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유럽의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단지 그로 인해 발생할 개입들─미국 기업에 대한 의존 줄이기, 경쟁력이나 기업가 정신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창업initiatives을 장려하기, 시민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인프라에 투자할 자본 모으기─이 현재 신자유주의적 유럽이 견지하는 입장과 명백히 대치되기 때문이다. 브뤼셀에서 거대 기술 기업들을 대표하는 로비스트들이 그러한 논쟁을 주도하는 상황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다른 말로 하면, 유렵이 ‘인터넷’을 다루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아니라 유럽을 역사화하는historicizing Europe 편이 훨씬 낫다. 한때 나는 가장 기초적인, 심지어는 피상적인 수준─예를 들어, 유럽의 반독점 및 경쟁촉진 법antitrust and competition law의 진화, 혹은 ‘사회적 혁신’이라는 순진한 이름 하에서 제3의 길[각주:2]과 뜻을 같이 했던 다양한 아이디어의 보급을 살핌으로써─에서 몇몇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스스로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안주함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이 모든 것으로 퍼지는 것과, 거대하고 중앙 집중적인 데이터수집의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기술 기업들은 모든 종류의 정치적 어젠다를 법령화 할 수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그 우세한 어젠다는, 추방된 이민자나, 부채를 변제하지 못할 것 같은 빈민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중앙 집중적 데이터를 이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긴축austerity[각주:3]을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적절한 제도적─이로써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치적─설립에 있어서 거대한 긍정적 잠재력을 내포한다고 믿는다. 당신이 내 활동의 일부를 관찰한 뒤 내게 그것에 대해 제안하거나 예견할 때, 만약 나의 다른 활동 또한 관찰다면 서비스가 훨씬 더 나을 것이라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구글이 나의 웹 검색, 이메일, 위치를 관찰한다는 사실은 이 카테고리들 각각에 대하여, 만약 그들 중 단 하나만을 관찰했을 때에 비해 훨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이러한 논리를 견지하면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 200개의 다양한 정보 서비스 공급자─규모 효과scale effect(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로 이해하면 될 듯 – 옮긴이)로 이용자들은 편리해지므로, 당신은 단 하나의 공급자를 원한다─를 원하지 않으리란 것은 명백하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공급자가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어야 하는지, 혹은 정보국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데이터 공유 협약에 도달할 수 있는, 연합되어 공적으로 운영되는 서비스들의 집합이어야 하는지다.

 

대중교통은 때로 손님을 하나도 태우지 않는 기차도 운행되는 현재의 엄격한 체계에 비해, 만약 어디서 사람들을 태워야 할지에 대한 예측분석 등으로 모든 사람들의 위치에 근거하여 조정될 수 있다면 훨씬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그건 단지 비용을 절감해줄 뿐만 아니라, 환경 친화적인 인프라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이가 전자 팔찌(범죄와는 전혀 상관없다 – 옮긴이)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그러한 장비들은 주(州) 차원─국제적일 필요는 없다─에서 작동되어야겠지만, 나는 그런 장비들을 감시하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신이 비(非)-신자유주의적 체제가 21세기에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환경과 기술 모두에 여전히 건설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종류의 문제를 붙들어야 한다. 그 문제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 당신은 단지 어떤 회사가 공급할 수 있는 서비스들보단, 우리의 공동체 생활을 위한 전반적인 정보 인프라에 대해 생각하고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괜찮아, 우리가 사기업들이 그렇게 하도록 규제할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타당하지 않다. 지금 이 시점에 구글을 규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리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에게, 구글을 규제하는 것은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좋다, 구글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자.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 그 순간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붙들 힘과 자원을 갖지 못한다. 유럽에는 필수적인 대안적 비전을 발전시켜나갈 정치적 의사가 없다. 상황은 바뀔지도 모른다. 내년에 포데모스Podemos[각주:4]와 시리자Syriza[각주:5]가 선거에 승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비-신자유주의적이지만 기술친화적인 세계의 유토피아적인utopian 비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립하리라 예상하는 상대적으로 양호한benign 중앙 집중적 ‘빅 데이터’ 배치를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찬양을 늘어놓지 않는 정부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민간 기업들이 이러한 것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또한 내기에 응하여, “우리는 개인들의 프라이버시를 믿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감시받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데이터에 대한 모든 요청사항들을 되돌리는 강력한 법적 체계를 갖출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프라를 좀먹는 너무 과도한 율법주의로 역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좀 까다롭다. 문제는 어떻게 실제적으로 시민들을 위한, 심지어는 검색 엔진의 경쟁에도 호의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강력한 기업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주로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 때문이었고, 그 힘을 억제할 유일한 방법은 그 데이터를 완전히 시장의  영역에서 빼와서 어떤 회사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데이터는 시민들에게 생길 것이고, 다양한 사회적 층위에서 소유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사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일종의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하고, 정보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정보의 특성attributes에 접근 할 수 있다.

 

이런 데이터의 저량(貯量)이 결국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기업 저장고로 끝나지 않고 성장하도록 허가할 법사회적 체제를 이해하지 않고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걸 이해한다면, 모든 종류의 사회적 실험이 가능해질 것이다. 충분한 데이터로 당신은 개별 소비자─지역 사회, 지역, 도시의 차원에서─라는 지평선 너머에서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 그것만이 집중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데이터의 법적 위치를 바꾸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당신은 기본적인 선택이 ‘빅 데이터’ 세계의 두 형태─하나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같은 기구에 의해 운영되는─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 시스템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데이터의 위치를 변화시킬 법률을 통과시켜야 하며, 그것을 집핼할 국가 필요하다. 확실히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개입은 줄이는 편이 낫다. 나는 모든 이들의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마치 비밀경찰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공유재commons에 대한 급진 좌파의 언급은 눈여겨볼만 하다. 단지 중앙 집중적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저장소를 기본으로 하지 않을 데이터 저장소, 데이터 소유권, 데이터 공유의 구조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소유된다면, 굳이 국가에 의해 운영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시민들에게 데이터에 대한 소유권을 넘김으로써, 하지만 기본적인 법적 위치는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구글과 페이스북의 독점을 종식시킬 것이다. 그렇게 개인들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그건 재런 래니어[각주:6]의 모델이다. 하지만 만약 시민들에게 돈 찍어내는 기계로서 데이터를 건넨다면, 우리는 모두 기업가가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일상의 금융화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확대되어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 감정, 사실, 아이디어를 화폐화하려는 강박관념─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분명해진다면, 그들은 개방 시장에서 구매자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을 심어놓을 것이다. 이건 인간 사회의 풍경을 현재 신자유주의의 주관성보다 훨씬 악화시킬 것이다. 내가 보기엔 오직 세 가지 옵션이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최상의 알고리즘을 보유하고 있고 최선의 예측을 할 수 있다는 등의 근거에 따라, 그들이 모든 것을 중앙 집중화하고 모든 데이터를 모으는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시민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팔 수 있게 데이터의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또는 시민들은 그들의 데이터를 소유하지만, 그들 삶에 대한 보다 공동체 차원의 계획을 위해 팔진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선호하는 옵션이다. 

 

그럼 당신은 미래는 불가피하게 지금(컴퓨팅 파워의 대규모 집중화와 하나의 독점 또는 과점에 의해 운영되는 데이터)과 같을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가?


최후의 전선(戰線)은 명백하다. 그것은 이 모든 센서, 필터, 프로필과 알고리즘을 관료제와 기업으로부터 해방시켜 시민들과 지역 공동체가 이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만약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경향이 지속된다면, 상상컨대 부자들은 그들의 감각을 배양하고, 언어를 배우고, 예술을 알아가고, 공부하는 데 즐기는 반면, 빈자는 데이터에 따라 처리하는 자동화의 노예(‘노예’라는 표현은 의역임 – 옮긴이)─그 결과, 그들의 모든 시간은 일하는 데 쓰일 것이다─가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컴퓨팅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이 어디에 쓰일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회사들이 그들의 권역을 일상까지 확장해서 심지어 왜 당신이 다른 모델을 원하는지 조차 명확히 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 이르리라 예견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런 기업들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러한 기술과 정치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허용하거나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 60년대 머레이 북친[각주:7]이 <Post-Scarcity Anarchism>[각주:8]에 실린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우리를 풍요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기술이 맡을 거라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짐작할 수도 있다.

 

- 끝 -

 

 

<원문 p. 61-66>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gizmodo.com/5875571/google-just-made-bing-the-best-search-engine
http://newstrack.ng/technology/33-ict/4774-facebook-rolls-out-video-calls-on-messenger-in-nigeria-norway-oman-us-others
http://setup.nl/content/evgeny-morozov-boat

 

  1. 맑시스트 혹은 사적유물론자의 역사기록학은 맑시즘에 영향을 받은 역사기록학의 한 유파다. 맑시스트 역사기록학의 주된 교리의 중심에는 역사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적 제약과 사회 계급이 있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2. 좌ㆍ우의 이념을 초월하는 실용주의적 중도좌파 노선을 일컫는 말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정책 브레인으로 잘 알려진 앤서니 기든스가 논문 <좌우를 넘어서>에서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로 제시한 데서 출발한다.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이란 저서에서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제3의 길'로 불리는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경제학에서, austerity는 정부 예산 적자를 줄이는 정책을 말한다. austerity 정책은 종종 지출 삭감, 증세, 또는 둘의 혼합을 포함한다. austerity는 수익을 지출에 가깝게 맞춤으로써 신용평가기관과 채권자들에게 정부의 재정 원칙을 입증하기 위해 실시되곤 한다. austerity는 또한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추동되거나, 외부 기관에 의해 시행되기도 한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4. ([poˈðemos], 영어로 “할 수 있다”로 번역되는) 포데모스는 2014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를 중심으로 창설된 스페인의 좌파 정당이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5. 두문자어로서 Syriza(때로는 SYRIZA로, 그리스어로는 ΣΥΡΙΖΑ, 발음은 [ˈsiɾiza])로 널리 알려진 극좌 연합은 그리스의 좌파 정당이며, 2004년 좌파와 극좌 정당의 연합으로 탄생하였다. 시리자는 그리스 장관을 역임하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Alexis Tsiprasf 당의장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의회의 최대 다수당이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6. Jaron Lanier Lanier에 대해선, Rob Lucas, ‘Xanadu as Phalanstery’, NLR 86, March-April 2014 참고. [본문으로]
  7. 머레이 북친(1921.1.14. - 2006.7.30.)은 미국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서 작가, 연설가,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였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8. 는 램파트Ramparts 출판사에서 1971년에 출간된, 머레이 북친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북친은 가능한 무정부주의의 형태는 빈곤-이후의 조건 하에서가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의 개요을 서술한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일관성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아마 ‘우직하다.’, ‘한결같다.’ 등등 긍정적인 이미지로 연결될 겁니다. 사람도 일관성 있는 사람이 더 신뢰가 가기 마련이죠. 제품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가 오랫동안 그 자리 그 모습에 있다면, 신뢰도 갈뿐더러 오랜 친구마냥 정이 생기기까지 합니다. 브랜드 자체가 ‘일관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것도 있지만, 오늘은 ‘하나로만 죽 밀고 가는’ 브랜드 광고에 대해 말할까 합니다.

2011년, 다소 특이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는 LG사의 ‘엘라스틴’ 샴푸 광고였는데요. 하지만 그 광고의 주인공은 샴푸가 아니라 전지현이었습니다. 이 광고만큼은 브랜드 홍보 목적이 아닌, 모델 전지현에 헌정 광고였다고 합니다. 11년 동안 전지현은 엘라스틴 광고 모델로 진행했습니다. “엘라스틴 했어요‘라는 카피는 엄청난 유명세를 타지는 않았지만, 전지현의 고급적인 이미지와 잘 어울려 브랜드 포지셔닝 구축에 일조하였죠. 그래서 LG사는 고마운 마음으로 떠나는 전지현만의 광고를 제작하게 됩니다. 비즈니스와 이해관계를 떠나 대단한 의리라고 생각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장기간 같은 모델을 쓰거나, 더 나아가 일관된 캠페인을 집행하는 일은 요즘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트렌드가 변하는 시대에 우직함은 무모한 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변하는 고객의 니즈에 맞게 대처하는 것이 광고의 숙명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 우직함을 계속 보고 싶습니다.

일관성의 사례로 먼저, ‘다시다’를 들 수 있겠습니다. 시장 점유율 80%, 10년간 매해 2만 5천 톤이 생산될 정도로 굳건히 하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다시다 앞에 붙는 수식어가 있죠. ‘고향의 맛 다시다’라는 카피인데, 지금 어린 친구들은 기억을 못 할 것이고, 저도 이 광고를 보기 전까지도 어슴푸레 기억만 있었습니다. 광고는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하였다가, 이내 장소를 불문하고 전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다시다는 자연과 잘 어울리는 우리네 고향의 맛이라는 것을 어필하려 했나 봅니다. 모델로는 김혜자 선생님이 거의 매번 요리하는 모습이 나오고는 먹음직한 요리에 다시다를 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오는 멘트는 지금의 광고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 이 맛이야’ (1987, 제일제당) 


1987년부터 시작한 고향의 맛 다시다2000년까지 진행됩니다. 무려 13년간 진행되었는데요. 오랜 시간 동안 김혜자 선생이 나옴으로써, ‘어미니모델로 잘 각인이 됩니다. 손수 요리를 준비하는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과 닮았기에, 그리고 당시 세대에게는 자랐던 고향에서의 손맛, 특유의 정취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광고에서, 기능이나 품질을 앞세우는 것보다 소비자가 가진 감정이나 기억을 자극하는 것을 감성 소구라고 합니다. 기능이 좋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이성적인 설득보다, 브랜드를 씀으로써 얻는 감정으로 설득하는 것이죠어머니의 손맛, 고향의 맛, 이 둘 중 하나라도 모르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광고는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것이 다시다라고 전략적으로 그리고 13년이란 시간 동안 줄곧 일관적으로 어필한 것이죠.




최근에 볼 수 있는 장기캠페인은 무엇이 있을까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는 흰 원피스와 코발트 빛 푸른 하늘. 바로 포카리스웨트입니다. ‘나나나나 나나 나나~’로 시작하는 광고 CM은 이미 많이 익숙할 겁니다

내에는 1987년 동아오츠카에서 출시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여성모델을 기용했습니다만, 초기 광고에는 음료의 기능에 대한 어필을 의식해야만 했습니다. 이유는 같은 해, 국내시장에 등판한 라이벌, ‘게토레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서야 이온음료 시장은 게토레이와 포카리스웨트의 틈새 없는 2강 체제로 굳혀졌지만, 90년대 후반까지 이 둘의 광고는 기능에 대한 각축전을 벌입니다. 정확히는 누가 더 갈증 해소에 좋은지를 놓고 말입니다그러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포카리스웨트가 다른 카드를 꺼냅니다. 당시 신예 배우 손예진을 기용한 광고 캠페인은 줄곧 15년 내리 이어지고 있습니다.

 

 

 

"내 몸에 흐르는 이온 포카리스웨트"(2001, 동아오츠카)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청순한 여성을 모델을 기용함으로써, 맑고 순수한 이온음료라는 이미지로의 연결이 가능해졌고, 동시에 인지도까지 제고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입니다. 이제는 해마다 포카리 스웨트모델이 누가 될지도 관심사가 될 정도니 말 다했습니다. 리스크가 제법 있었던 시도였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고 할까요. 동아오츠카는 때에 맞게 시각을 잘 전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소비자들은 이온음료에 대해 대충은 아니까, 이제 우리 브랜드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이었을 것 같습니다.


15년째의 캠페인 광고를 이어가는 포카리스웨트 광고(2014, 동아오츠카)


주목할 점은 이 컨셉의 브랜드를 10년 넘게 끌고 왔다는 점입니다. 2001년 이후로, 거의 매년 이 컨셉의 광고가 집필되는데요. 광고주 생각에는 다른 획기적인 컨셉의 욕심이 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광고는 인식과 기억의 문제입니다.
이수원 씨의 [1등 기업의 광고, 2등 기업의 광고]에서 브랜드의 방향을 이렇게 말합니다.

브랜드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브랜드가 좌충우돌, 우왕좌왕한다면  
과연 누가 그 브랜드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포카리스웨트는 선명하게 소비자에게 기억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15년의 광고를 남긴 것이지요. 수익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 장기적인 투자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양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할 수 있기에 더 많은 고객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도 오래된 단골집에 발길이 더 갑니다. 브랜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신뢰가 쌓여야 하고, 간절한 이미지 어필이 필요합니다. 믿고 쓰기 위해서는 그만한 품질이 밑바탕이 되고, 소비자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브랜드들은 10년을 넘게 일관성으로 지켜왔기에 오늘의 브랜드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제품만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우리 각자를 고유의 브랜드들로 놓고 본다면, 그 브랜드를 일관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요


 

 

내 방 정리를 마지막으로 한 건 약 2개월 전이다. 전공서적은 전공서적끼리, 소설책은 소설책끼리 그리고 수업관련 프린트는 프린트끼리 정리하여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휴학을 하고나선 책상에 앉아있을 일이 없었고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지냈다. 특히 여름인 요샌, 잠도 내 방이 아닌 거실에서 요와 이불을 덮고 잤기 때문에 난 내 방을 정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문득, 가방을 챙겨서 나오려는데, 책상 위가 심하게 더럽혀진 것을 발견했다. 알라딘에서 사온 책들이 나선계단처럼 빙그르르 돌아가며 쌓여있었고, 작은 책장 위에는 지폐를 쓰고 남은 잔돈과 영수증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침대위에는, 전날 입었던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잘 때 입었던 반바지 두어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된 거지? 나는 다시 방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질서를 잃는다. 책상 위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꼬인 줄처럼 점점 어지럽혀 진다. 아버지가 피는 담배에서 나온 담배연기는 처음엔 담배 끝에서 일직선으로 나오다가 이내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수업시간의 학생들은 줄맞춰진 책걸상에 얌전히 앉아있지만 시간이 흘러 쉬는 시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가고 순식간에 교실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북적거린다.

 

과학에선, 이렇게 무질서한 척도를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내 방은 점점 더러워지고, 담배연기는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방을 청소하면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엔트로피를 생각할 때 우리는 ‘책상’만 보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을 생각해야한다. 방을 치울 때는, 당연히 책이나 동전에 발이 달린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나 로봇청소기가 그 일을 해야만 한다. 그 당사자가 ‘나’라면, 나는 방을 치울 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사용하게 된다. 방 청소를 끝내면 나는 허기를 느끼고 몸에선 열이 나며 땀이 난다. 방은 깨끗해 졌지만 거기에 들어난 도구나 도구를 사용한 사용자의 엔트로피가 늘어난다. ‘방’의 상태만 놓고 보면 무질서도가 줄어들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주변의 무질서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변의 늘어난 무질서도가 방에서 줄어든 무질서도보다 항상 크다.

 

나는 문득, 이런 무질서도의 증가가 이렇게 ‘과학적’인 측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오늘 들었다. 지하철 공익광고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광고에선 부자父子가 등장했다. 지하철이 도착 한 뒤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타려는 아버지를 일곱 살의 아들이 제지한다. ‘내리는 사람 먼저에요.’라고 말한 아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인다. 에스컬레이터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손을 맞잡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또 한 소리를 듣는다. ‘다른 한 손은 안전띠에 올려놓아야죠.’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엔 우린 모두 안전 지킴이였다. 횡단보도가 빨간불일 땐 절대로 길을 건너지 않았으며 횡단보도를 건널 땐 꼭 한 쪽 손을 높이 들었다. 쓰레기에 관한 건 또 어떤가. 길바닥에 버리는 일 없이 휴지통에 넣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단횡단은 기본이요 길거리엔 태우다 만 담배꽁초와 과자봉지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쓰레기들이 길에 즐비하다. 사람 역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이 엔트로피-무질서도-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 ‘질서’를 가르쳐주는 예절교육이나 도덕교육이 정말로 힘든 것 같다.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인데 그것을 역행하는 것을 의도하니 말이다. 애초에 ‘예절’이나 ‘도덕’같은 건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동물들은 충실하게 자신들의 무질서도를 증가시켜나가는 데 비하여 사람들은 ‘사회’에 속해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있다. 새로 산 키보드의 내구성은 점점 떨어져가고 모니터에선 계속해서 가장 혼란한 상태의 에너지인 열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사회에 속해있지만 사람 역시 이런 과학적 법칙에 예외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방영했었던 과학다큐 ‘코스모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별을 이루고 있는 원자와 사람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그 구성이 같다, 라고. 그래서 우리는 별을 품고 있는 우주의 원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 사진출처: http://oheim.egloos.com/v/354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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