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날 아침, 나는 열 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늦은 아침을 챙겨먹었다. 운전하기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는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 까진 아니더라도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험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시험 순서는 무작위였다. 한 시가 되자 감독관들이 들어오고 시험 순번을 정해주었다. 나는 여섯 번째였다. 내 앞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시험이 다 끝난 두시가 돼서야 나는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험은 둘 씩 짝지어서 봤는데, 나는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와 뒷자리에 동승했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 스키니진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지점에서 여자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여자의 코스는 D가 나왔다. 시험 감독관은 나에게 동석자 사인을 받았다. 여자가 안전벨트를 맸고, 나 역시 뒷좌석의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D코스는 이백 미터 정도 직진을 하다가 중랑천을 끼고 우회전을 하는 코스였다. 여자는 덜덜 떨며 첫 번째 우회전 코스를 지나갔다. 다음 우회전 까진 길을 따라 직진을 하면 됐다. 하지만 그 직진코스에서 여자는 실수를 했다. 2차선에 맞추어 가고 있던 차는 별안간 1차선으로 표시등도 켜지 않은 채 이동했다. 하마터면, 뒤따라오던 1차선의 마티즈와 사고가 날 뻔했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마티즈의 빵ㅡ하는 경적소리와 함께 실격이 나왔다.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돼 일어난 일이라 여자는 망연자실했다. 감독관은 바로 옆길에 차를 세우라고 말했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왔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무작위로 선택된 코스는 D. 여자와 같은 코스였다. 나는 차분하게, 교육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벨트와 기어와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 이번엔 파랑색 트럭 뒤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첫 번째 교차로를 맞이했다. 우회전이라 신호를 받지 않아도 갈 수 있었다. 마침 왼쪽 차선은 정지 상태였고, 반대편에서 오는 좌회전 차량만 존재했다. 나는 진행했던 차선의 횡단보도에 걸친 상태로, 좌회전 차량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직 초보인 나에게 끼어들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고 끼워들기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사고위험이라는 이유로 실격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맞은 편 차들이 모두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차량은 듬성듬성 왔고, 나는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신호가 바뀌어서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하면 어떡하지? 그리고 곧, 그 상상은 도로 위에서 현실로 바뀌었다. 신호가 바뀌고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걸쳐 있었던 횡단보도의 등도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보행자 보호 위반으로 실격입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허탈했다. 분명히 도로 위엔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넓은 곳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이 분만에 시험 비용 오만 오천 원을 길가에 버린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길바닥에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母子가 나를 향해 비웃고 있었다.
그날 내내,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밖을 돌아다녔다. 괜찮아, 애매한 상황에 걸린 거야. 나도 아마 실격 당했을 거다.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아버지는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줬지만, 바보처럼 우회전을 한 나에 대한 화, 맞은편 좌회전 차들에 대한 화 그리고 전자 교통신호 시스템에 대한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정말로, 우愚회전이었다. 나는 외투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었던, 다음 시험 일정과 응시료가 적혀있는 종이를 지갑에 끼워 넣으며 오지 않는 잠을 취기와 함께 억지로 청했다.
첫 번째 시험 실격에 대한 화가 가라앉을 무렵, 두 번째 시험 날이 찾아왔다. 이번 주 초부터 뉴스에선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왔지만, 이미 잡아놓은 시험 일정을 교체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될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시험일을 고수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완연한 봄비였다. 가벼운 비의 강하속도는 느렸고,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이 정도라면 시험을 볼 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3호선과 4호선을 타고, 마지막으로 1호선으로 환승했다. 유일하게, 1호선만 지상으로 올라갔다. 창동역에서 녹천역까진 한 정거장이었지만, 그세 지하철 차창에는 비가 흩날려 생긴 빗살무늬가 생겼다.
학원 입구에 상호명이 적혀진 녹색 천막 아래로 비가 흘렀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천막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다. 기압이 낮은 탓인지 연기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깔린 채 갖가지 종류의 연기가 섞여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장내방송으로 시험응시자들을 부르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세 번째 순서였고, 앞의 두 사람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삼십분 가량을 기다렸다. 그 삼십 분의 간극동안, 아침에 시작된 비는 내가 시험을 본 시각에 절정에 달했다. 소나타 뒷좌석엔 나와 짝으로 시험을 같이 볼 여자와 내가 앉았다. 여자의 가방 옆엔 아직 마르지 못한 3단 우산이 시트를 적셨다. 내가 먼저 운전석으로 옮겨 탔다. 코스는 C가 걸렸다. D다음에 C라, 도로주행 시험의 코스 순서가 떨어질 때 마다 D, C, B, A순으로 되는 건 아닐까. C코스는 경찰서 앞까지 직진이었다. 왼쪽 지시등을 켜고, 나는 도로위에 올라탔다. 비가 오는 탓에 와이퍼를 움직이니, 신경이 쓰였다. 비가 오면 수막현상 때문에 위험하지, 나는 필기문제집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며 저속주행을 했다. 이윽고 좌회전을 하는 교차로에 들어섰다. 앞에 차가 다섯 대 쯤 있었는데 파란불이 켜지자마자 출발할 기세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교차로의 신호는 앞의 차 때문에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파란색 바탕의 흰 글씨로 비보호 우회전, 이란 글씨가 써져있었다. 우회전, 잊고 싶은 단어였다. 오늘은, 저번 주와 같은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동시에, 비보호非保護란 단어의 ‘비’자가 비雨로 보였다. 난 먼 옛날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비에게 오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 빌었다.
내 바로 앞차의 후미 등이 점멸된 것을 본 나는, 기어를 D에 놓고 뒤따라갔다. 내가 핸들을 돌리려는 찰라, 옆에 있던 감독관이 입을 열었다. 신호 보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올렸다. 황색불이 점등되고 있었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속도가 붙었으니, 앞차를 따라가는 게 맞지 않을까? 혹은 이미 황색으로 바뀌었으니 서야하나? 그때 필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했던 것이 생각났다. 도로를 지나갈 때, 황색등이 켜지기 전 운전자가 도로를 통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구역을 무엇으로 부르는가? 정답 : 딜레마 존(Dilemma Zone)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엑셀을 밟고 있는데, 차는 나가지 않았다.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고장 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신호를 받고나서야 나는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우회전을 해야 하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나는 뒷자리로 유배되었다. 다시 출발지점에 돌아오고 이번엔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시험을 시작했다. 룸미러로 보라색 아이라이너로 깊게 패인 여자의 두 눈이 보였다. 여자는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의 주행은 불안했다. 옆 차선을 몇 번이나 침범하고, 지시등을 켜도 옆 차로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십 분 가량의 시간동안 그녀는 C코스를 실격 없이 완주했다. 감독관은 수고했다는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학원으로 다시 돌아온 후, 감독관이 뒷자리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실격하신 분은 다시 사무실 가셔서 시험 일정 잡으시고 여자 분은 평형주차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렸고, 여자를 태운 차는 장내 도로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 다음 시험 일정을 잡은 뒤, 장우산을 핀 채 나는 녹천역으로 향했다. 녹천역 천장 플레이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후두둑, 후두둑. 전철은 세 정거장 전이었다. 열차가 점점 다가올수록 비는 그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비보호, 는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나. 아마 그녀는 지금쯤 평행주차 시험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열차는 도착하고 나는 문이 닫히기 바로 전, 열차에 올라탔다. 지하철을 운전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창동역으로 향하는 1호선 열차는 객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고 다시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다.
- 끝 -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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