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열린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여행기 입니다. 마지막 날의 감상을 담았습니다.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듬었습니다.



#1 영화의 전당

 

11시에 시작하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월터 살레스, 2014)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10시 영화를 예매한 K에 맞춰 숙소를 일찍 떴다. 서둘렀던 덕인지, 시간계산을 잘못 했던 탓인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 여유로워서 나쁠 건 없겠다.

 

미처 가지 못했던 화장실을 들르고, 무료 배포 잡지들을 훑다보니 금세 10시가 가까웠다. K을 먼저 보낸 뒤, R과 전날 미리 얘기해둔 대로 기념품점에 들렀다.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거칠게 그려진 파우치 하나를 선물로 골랐고, 아시아 영화와 프랑스 영화에 대한 책을 한 권씩 총 두 권 집었다. 물론, 책 두 권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요새 책 선물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카드 결제기가 먹통이라며 계산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1030분 영화 시간에 맞춰 R마저 떠났다. 왠지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류는 카드결제기가 아니라, 일본인 기자가 R넨 신용카드에 있다는 걸 봉사자가 깨닫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드를 받아든 일본인 기자는 허무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다. 나는 속으론 분통을 터뜨렸으나, 최대한 티를 숨긴 채 웃으며 카드를 건넸다. 내 다음 차례로 계산대 앞에 선 백인 여자의 티 없는 미소도 위선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자는 전적으로 선해보였다.

 

#2 영화의 전당에서 CGV 가는 길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영화를 보다 지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에는 어젯밤 대책 없이 들이켰던 음식이 무거웠다. 편의점에서 계란 두 개와 커피를 하나 샀다. 명색이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백화점이나 편의점, 뭐 하나 제대로 매력적인 할인 상품이 없었다. 계란 두 개는 ‘1+1’이 아니라, 원래 두 개들이 제품이었다.

편의점 계란은 껍질이 쉽게 깨져 좋았다.


무료 잡지들, 책 두 권, 파우치가 담긴 봉지에 커피까지 더해지니 새삼 무거웠다. 날은 더웠고 아직 영화 상영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무턱대고 영화의 전당 근처를 걷는데, 문득 기뻤다.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제각기 흩어졌다. 그중에는 나처럼 한가득 영화제 물건들을 챙기느라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 벤치에 자유롭게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읽고 있는 남자는 커플이어도 좋았고, 생판 모르는 관계라도 좋았다. 야외에 설치된 책 판매 부스에는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책을 파는 사람인지, 누가 책을 구경하려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둘은 하나같이 표지를 들추고 있었다. 나는 마치 책을 파는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책들을 살펴보았다.

팔리기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3 CGV


영화의 전당에서 CGV로 향하는 길목에서 내가 느꼈던 기쁨이란, 이를테면 암묵적 유대감이었다. 마치 영화제라는 거대한 결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영화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의 거대한 스튜디오 속 연기자들처럼. 트루먼(짐 캐리)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단 하나의 암묵적 메시지를 공유한다. “우리는 연기자다.” 그들은 거대한 가상 마을 속에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 모든 혼란통은 어디까지나 저 메시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트루먼 쇼의 스튜디오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좋은 것이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늙은 사람, 좀 못생긴 사람, 잘생긴 사람 할 것 없이. 그들은 거기 있기 위해서 바로 그곳에 있는 거니까. ‘연기자로서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고, 그들의 모든 행위와 말은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마주치는 시선, 누군가의 시큼한 냄새, 유난히 더운 공기. 연기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야릇하면서도 흥분되는 그 모든 대상들.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는 꼬마애와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잔소리를 내뱉는 아주머니도, 거나하게 취해 소리를 박박 질러대는 취객도, 깔깔깔 괴상한 몸짓으로 서로를 웃겨대는 일행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라도, 201510월 초라는 시간, 해운대 센텀시티라는 공간에 있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단 하나의 메시지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을 말이다.

 

여유롭게 출발했으나, 막상 CGV에 도착하니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티켓을 보여주고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좁은 통로는 잠깐, 탁 트인 공간에 벌써 사람이 가득 하다. 다들 어디서 온 걸까, 왜 이 영화를 보러 온 걸까, 나는 오늘 떠나는 데 이들은 언제까지 부산에 머무를까. 암전이 되고, 스크린이 환해진다.

옆 사람이 짧게 심호흡을 한다.


* 영화 <파리의 한국남자> 리뷰입니다.

* 다른 블로그에 실었던 글을 다듬어 올렸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아내를 찾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조금 이상한 질문. 그는 무엇 때문에그녀를 찾아 헤매는 걸까?

<파리의 한국남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놀랍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일단 조금 다른 식으로 질문을 반복해보자. 이번엔 당신에게 묻는다. 왜 당신은 그()와 사는가? 사랑해서? 계약한 관계니까?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감성, 이성, 도덕. ‘납득할만한 대답들이 주를 이룬다. 소위 대중적인 영화들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고, 눈물 흘린다.

 

하지만 <파리의 한국남자>는 이 모든 상식적인 대답에서부터 자유롭다. 달리 말하면, 불편하고 불쾌하다.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고, 맥락의 끝마다 탈맥락적 과잉으로 치솟는다. 영화가 끝났는데 아무도 울지도, 웃지도, 심지어 욕을 하지도 않는다. 실소(失笑). 허탈한 웃음이 영화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 영화가 결코 잘 만들어진작품은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의 불편함을 단순한 실패로만 치부할 순 없다는 입장이다. 이 영화(의 불편함)에 대한 짧은 변론을 남기려는 까닭이다.

 

<파리의 한국남자>가 불편한 것은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상식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계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관계는 무엇인가? 관계는 너와 내가 함께 맺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적이며, 쌍방 간의 완성된 어떤 합의. 너와 나의 것이 곧 관계이며, 관계로서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이것이 상식으로서 관계다.

 

이제 관계에 대한 영화의 문맥을 살펴보자. 하지만 이는 관계에 대한 영화, 혹은 전수일 감독만의 유별난 해석이 아니다. “섹스는 없다.” 자크 라캉의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섹스를 풀어 써볼 필요가 있다. “성관계는 없다.” 여기서 방점은 관계에 찍혀야 한다. 그러므로 다시. “관계는 없다.”

 

라캉에 따르면, 섹스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아니다. 섹스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각각의 환상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는 자위와 다르지 않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성적 매력,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남자의 입장에서) 가슴, 엉덩이, S라인 등이다. 육체의 일부. 결코 여성의 육체 전체가 아니다. 사실 누군가의 벗은 몸을 그대로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른바 부분대상objet a’. 우리는 대상 전체를 욕망하는 것 같지만, 대상 전체를 압도하는 부분대상을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욕망은 곧 대상에 대한 판타지인 것이다.

 

논의를 확장해보자. 관계란 무엇인가? 관계는, 상식과 달리 너와 나의 어긋남이다. 너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어린왕자>에서 여우의 말은 그럴듯한 낭만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냉철한 탐구다. 우리는 길들임길들여짐의 관계다. ,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하지만 이는 중층적이다. 너와 나 각각에 별개로 성립한다. 나의 입장에서 나는 너를 지배하지만, 너의 입장에서 나는 너에게 지배당한다. 나는 너의 지배자고 너는 나의 지배자다.

 

그러니까 관계는 곧 판타지인 것이다. 우리는 판타지다. 우리란 없다. 우리라고 여겨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말했든 너와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너의 것과 나의 것의 어긋남이다. 너의 판타지와 나의 판타지의 충돌이다. 나의 우리와 너의 우리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상호(조재현)는 거지꼴을 하고서 왜 그렇게도 연화(팽지인)를 찾아 헤매는가? 상호에게 아내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영화의 답은 탈맥락적 현상, 그리고 판타지에 있다. 상호는 연화를 찾아다니다 만난 창(미콴락)과 매춘을 시도한다. 그 지점에서 상호의 의도는 의심받는다. 그녀는 아내를 찾기 위해 매춘부 사이를 전전하는가, 아니면 매춘부 사이를 전전하기 위해 아내를 찾아 헤매는가?

 

다음은 또 어떤가.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퀀스. 상호가 환락가를 지난다. 술집 마담쯤 되는 여자가 여러 나라의 여자들이 있다며 상호를 유혹한다. (프레임 밖에 있지만 짐작건대) 꿈쩍 않고 길을 가던 상호는 한국 여자도 있다는 말에 발길을 돌린다. 그는 매춘의 대가로 연화와의 결혼반지를 건넨다. 먼저 방에 들어가 자고 있는 상호에게 한 여성이 들어와 섹스를 한다얼굴이 프레임 위에 잘린 매춘부는 상호에게 반지를 돌려준다. 이 시퀀스가 상호의 판타지이며, 동시에 상호에게 매춘행위를 했던 여자가 연화였다고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매춘부로서 연화, 매춘 행위로서 사랑에 대한 상호의 판타지야 말로 연화와 상호의 관계이며, 상호에게 연화가 의미하는 바이며, 상호가 미친 듯이 연화를 찾아다니는 이유라고 말이다




*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신기루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개념 하나 소개하는 듯이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 중 신기루에 대해 모르거나, 신기루라는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오아시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여행자의 절규는 어릴 적 우리에게 철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으니까요.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신기루는 가짜라기 보단 왜곡에 가깝습니다. 신기루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뿅! 하고 무엇이 생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신기루에 대한 정의는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왕가위, <화양연화>(2000)

 

그러므로 신기루란 목이 너무 말라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는 여행자의 ‘망상’이 아니라, 어딘가에 무엇인가 있지만 불안정한 대기층에 의해 왜곡된 빛을 감각하는 여행자의 ‘착시’입니다. 망상과 착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전자가 철저히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완벽히 맥락에 의한 것이죠. 후자에 따르면 그 누구라도 (불안정한 대기층이라는) 특정 맥락 속에서라면 신기루를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기루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왜곡과 맥락입니다. 그리고 왜곡은 또한 일종의 탈맥락적 현상이므로 신기루는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기루는 탈맥락적이면서도 맥락적인 현상이다.’ 좀 풀어서 말해볼까요. 신기루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있다는 점에서 맥락(혹은 합리성)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신기루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라는 점에서 맥락(합리)적이죠. 이런 역설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기루 자체가 역설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1995)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곧 신기루입니다. 여러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이 어려운 말들을 써가면서 사랑을 논해왔지만, 결국 대부분 ‘사랑은 신기루’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대상을 탈맥락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했던 슬라보예 지젝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건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독백은 사랑의 탈맥락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신기루로서의 사랑을 반쯤 포착한 셈. 그렇다면 탈맥락적인 사랑의 성취 이후 지속적인 선언(“난 널 사랑해”)의 노력을 강조했던 알랭 바디우 같은 경우는, 앞선 반쪽짜리 정의에 ‘맥락적’인 성격을 더함으로써 사랑의 성격을 온전히 정의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랑을 억지로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불쑥 찾아오는 사랑을 거부하지도 말길 바랍니다. 사랑은 신에 대한 거부를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맹신하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미시적 차원의, 그러니까 ‘화학적 작용’이라는 말 따위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낭만과 사랑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사랑=아름다움’이라는 억지공식을 설파해온 로맨티시즘도 비겁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얀 사무엘, <러브 미 이프 유 데어>(2003)

 

제가 권하는 사랑이란 차라리 화폐에 대한 마르크스의 냉철한 시선과 닮아 있습니다. 흔히 마르크스는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관념, 혹은 정신의 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비판으)로부터 나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관념 혹은 정신 등의 상부구조가 (교과서에서 가볍게 언급되듯) 하부구조에 종속될 뿐이라고 믿었다면, 마르크스는 굳이 어려운 책을 쓰지 않고 그저 한 마디 했을지도 모릅니다. “화폐를 찢고, 태우자!” 하지만 화폐는 그저 종이쪼가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휴지쪼가리와 같지 않다는 걸 마르크스는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결코 화폐를 버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죠.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화폐를 신기루로서 보았던 셈입니다. 화폐는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인 것이죠.

 

압달라티프 케시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입니다. 사랑은 불쑥, 맥락을 잃은 채 찾아오지만, 그건 사랑의 감정을 느낀 사람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단언하지 마십시오. 어른인 척하는 아이, 아이인 척하는 어른 모두 건강하지 않습니다.

 

혹시 눈앞에서 오아시스가 어른거리는 여행자가 제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아마 오아시스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아시스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발은 떼야하지 않을까요?”




*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같은 시간을 나눴던 이들과의 모임에는 남다른 기억력을 뽐내는 사람이 꼭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7년 만에 만난 재수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유달리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왜 걔 있잖냐. 맨날 잠자고, 자습 빼먹고 피시방 가던 놈. 하, 누구더라...” 다들 조용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뒤늦게 합류한 A가 치고 들어온다. “아, X 말하는 건가? 자습이 뭐냐. 수업도 빼먹고 피시방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걔네 무리가 있었어. Z, W, U랑... 맞다, S. 이렇게 넷이서 같이 다녔잖아. 아, 그리고 니네 그거 아냐? Y랑 X랑 잠깐 사귀었던 거.”

 

이윤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2011) 중에서

 

하나 더 있다. 연례행사처럼 모이는 중학교 동창(회라기엔 초라하지만 어쨌든)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누구 할 것 없이 B에게 말한다. “야, 오랜만에 출석번호 좀 외워봐라.” 싫은 듯, 귀찮은 듯, 하지만 B는 거침이 없다. “1번 C, 2번 G, 3번 F, 4번 Q....” 어느 날은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B가 역으로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야, 니네 키 번호는 기억하냐. 개학하고 첫 날에 키 번호로 앉았잖아. 1번 F, 2번 C, 3번이 나였고.. 그때만 해도 진짜 작았지, 4번 R....”

 

홍상수, <생활의 발견>(2002) 중에서

 

이런 놈들의 기억력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닮고 싶은 기억력은 따로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어떤 날을 회상할 때 다른 건 다 모호하더라도 날씨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 말에는 유달리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에게 “그렇게 살지 마”라는 전화를 받은 새벽에는 유달리 비가 많이 왔었고, 영화 동지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던 그 해는 10년 만에 가장 더웠다.

 

날씨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 번호를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중요한 건 여기서 날씨란 기상청이나 일기예보에서 무미건조하게 예측하고, 보도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과 맞물린 날씨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날씨는 그때 ‘하필’ 그런 상태였겠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인과의 틀 속에 꾸겨놓곤 하는 우리에게 날씨가 결코 우연으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날씨로 어떤 시간, 공간,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날, 거기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분위기와 느낌을 전체적으로 떠올린다는 말과 같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왕가위, <중경삼림>(1994) 중에서

10월의 마지막 날, 11월부터는 하루하루 날씨를 유심히 기억해 두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니,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엊그제부터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친구들과 나눠 마신 막걸리 한 잔에 추위도, 근심걱정도 털릴 정도. 버틸 만하다.”



*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확대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나 홀로 집에 - ⓵

 

 

 


파병에 참여했던 대니 홈스Danny Holems는 실제로 만들었듯, <이라크/사진> 컴퓨터 폴더에 분류될 법한 사진들을 갖고 돌아왔다. 사진들은 위키리크스에 게시된 조악한 비디오(로이터 사진기자와 그의 조수, 나머지 7명의 사람들이 아파치 헬리콥터의 발포에 산산조각 났던 날)로 악명이 높아진 전쟁의 나날을 기록했다. 대니는 당시 지상군으로 있었고, 핑클이 쓴 대로, 그의 사진들은 전후 보도에 쓰였다.

 

반쯤 날아간 머리, 찢어 발겨진 몸통, 안팎으로 쏟아지는 피.
클로즈업, 오토포커스, 자연광, 무결점 컬러
전쟁, 다시 말해, 그 현장에서 (불에 타 죽은) 해럴슨Harrelson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 고, 박격포 공격 이후 머리통에서 튀어나온 건 없는지 걱정하던 병사들이 경험했던 것으로서  전쟁.

 

대니의 여자친구 쇼니Shawnee는 그가 때로 컴퓨터에서 이 사진들을 보며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곤 했다. 대니가 집으로 돌아온 뒤 둘이 만났을 때, 쇼니는 19살이었다. 그는 쇼니에게 끔찍하거나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딸이 태어난 뒤, 대니는 한 손엔 어린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엔 총을 들고 총을 쏘던 이라크 사람을 죽인 이야기를 자주 했다. 대니는 그 둘에게 모두 총을 쏴 죽여야 했다. 이제 ‘나는 어디서든 아이들을 봐’,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전우들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그건 대니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점점 더 정신을 잃어갔다. 쇼니는 대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오랜 이야기다. 그의 생애 마지막 날, 쇼니는 밤에 친구들과 놀러 나갈 계획이었다. ‘할 말이 있어.’. 그날 아침 대니가 말했지만, 그녀는 빨래하고 태닝을 해야 했다. ‘대화 좀 하자’ ... ‘대화 좀 하자’ 그녀는 집 청소를 하고, 세차를 하고, 샤워를 한 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날 밤 그녀는 만취운전으로 경찰에게 잡혀 감금됐다가 새벽에야 집으로 와서 계단에 목을 맨 남편을 발견했다. 당시 쇼니는 아이 하나 딸린, 돈 없고 직업 없는 21살에 불과했다. 그저 악착같이 궁리를 마련하고, 이제는 악몽에 밤잠설치는 여성으로서 쇼니는 대니와 같이 귀신이 된 병사와 광기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는 그 어떤 미국인일지도 모른다.

 

아마 대니는 PTSD로 고통을 겪는 병사들의 공식적 통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그는, 진단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매달 펜타곤에 가서 최근 자살 사건들을 살피는 공무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진단이나 치료가 최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몇 년 동안 병사들의 자살은 이슈화되었는데, 주로 5000명을 갓 넘는 자살자의 수가 전쟁에서 죽는 미국인들의 수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지상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처음 파병된 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살과 전투에 대한 통합 연구 자료research combining data는 없다. JAMA Psychiarty[각주:1]에서 출간한, 2001년부터 2007년 사이 390만 미군 부대에 대한 연구에서는 전선에 배치되거나(19/100,000) 그렇지 않은(18/100,000) 모든 병사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게 드러났다.[각주:2] 연구는 재향 전투병들(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이 모두 전투 상태는 아니었다.)을 구별하진 않았지만, 해군이나 공군보다 육군과 해병대 병사들의 자살률이 25퍼센트 더 높다는 건 찾아냈다. ‘우리는 점차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라고, 국립정신건강협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미하엘 쇤바움Mihael Schoenbaum은 4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역사적이고 상식적인 결론은 그렇게 힘든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국인 전체가 결론에 다가가려 하든, 그러지 않으려 하든, 혹은 상관하지 않거나―아니면 자살에 적응하든지 간에, 일반 대중에 대한 (자살 - 옮긴이)률이 2000년 이후 13/100,000까지 올라간 상황이지만, 군국주의와 전쟁이 국내에 공공연히 끼치는 충격이 전쟁에 군대를 보내자는, 새로이 들끓고 있는 열정을 막진 못할 것 같다. ‘지상에 군화를Boots on the ground’, 티비의 전문가들은 이 말을 마치 효험을 기다리는 주문처럼 되뇐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전쟁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이들은 이러한 죽음을 알고 있다. 아마 최근 CNN 특집에서처럼, 사람들은 자살 문제가 며칠간의 초자연적인 명상, 그리고 교전지역에서 정기적인 명상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으려 하는 것 같다.

 

모든 사건에서, 지지, 감사, 그리고 교전국이라는 무언극은 단지 피상적으로 ‘부대’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또한 그 피상성―미국 사회가 가장 심각한 인간사에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외견상 안정, 불편한 사실들에 대한 사회적 외면, 호들갑스러움(환호와 함께 가족으로의 병사들의 초현실적 귀환, ‘시작하자Let's Get It On’에 대한 부담감), 무심한 질문들(‘사람 죽여봤니?’), 그리고 섣부른 판단(‘니가 지원했잖아’) 혹은 죄책감 몰아내기(‘그건 네 잘못아 아니야!’) 비도덕성에 대한 가벼운 표준화(‘망할 아랍놈들한테 누가 보스인지 보여줘. 핵으로 쏴버리라고. 추수감사절 잘 보내’, 아칸사스 주의 초등학생들이 생활품꾸러미를 건네며 병사들에게 권고했다), 자기 성찰에 대한 거부반응―은 여러 재향군인들이 갇혀 있는 심오한 고뇌와 어긋난다.

 

자살은 극단 중에 극단이다. 아담 슈만Addam Schumann은 아내 사스키아Saskia가 그만두게 할 때까지 집 보일러실에서 입에 라이플을 물고 있었다. 그는 수천 일 동안 이라크에서 전투를 보았고, 정신건강을 이유로 일찍이 귀향한 후 2년간 세 번의 여행과, 여러 정신과 의사와 상담가들을 만났다. 그는 ‘훌륭한 병사’, 병장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부대원들 혹은 장교들 중 그 누구도 그가 내면의 어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까지, 그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캔자스Kansas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처방전을 받았고,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직업을 구했다. 매일 아침, 핑클이 소외된 작업 의식이라고 묘사하듯, 아담은 항우울제를 삼켰고, 점심으로 월마트에서 산 엔칠라다(멕시코 음식 - 옮긴이)와 마운티듀를 들고, 스스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라며, 군센터의 큐비클 안에서 전역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설명하는 일을 했다. 그 직장에서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또 다른 직업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루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그의 오른 귀를 찌르는 소리는 오늘 유달리 시끄럽지만, 두 칸 떨어진 곳에 있는 여자를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크진 않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녀는 메트로놈처 럼, 말뚝박는 기계처럼, 자동차 경보 장치처럼 헤드셋에다 대고 말하고 있고, 아담은 연필을 들 어 그녀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한다.

 

아담은 그 여자를 찌르지 않았고, 건물 지하에서 자살하지도 않았다. 우연히 아내가 들어왔고, 우연히 재향군인 관리국의 사회복지사가 패스웨이 홈이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치료 센터에 그를 수용할 여력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로써 그는 죽음을 면했고, 베큐-레너드가 <Of Men and War>을 찍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는 작년 깐느에서 공개되었지만 올해 미국에서 배급은 제한적이었다. 패스웨이의 설립자이자 책임자 프레드 구스만Fred Gusman은 미국인들이 영화를 보기를 봐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거기에는 자기 홍보에 대한 일말의 기미도 없었다. 

 

<원문 102-104쪽>

 

 

NLR32705.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95F02224BD1B1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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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매달 상호검토하에 발간되는 의학 잡지다. [본문으로]
  2. 회고연구retrospective study는 미 육군, 해병대, 공군, 해군, 주방위군에서 현역, 예비역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 종사자들을 동일하게 포함했다. Mark Reger, Derek Smolenski, Nancy Skopp et al., ‘Risk of Suicide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jama Psychiatry, April 2015 참고. [본문으로]

*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승수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조안 위피예프스키(JOANN WYPIJEWSKI)

 

나 홀로 집에

 


한 나라가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상스럽다는 건 인정한다. 더구나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사실상 삶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 공통된 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미국인들이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는 데 57(CBS), 60(Fox), 또는 62퍼센트(퀴니피악Quinnipiac 대학)만큼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온 최근 조사는 미국의 상당수가 실제로 멍청하며,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곳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퀴니피악 대학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9퍼센트가 미국과, 대충 끼워 맞춰진 어떤 동맹국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세’라는 낡은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를 부활시키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진지하게 ‘전쟁을 거부하는war-weary[각주:1] 국가’ 운운했고 작년엔 사막에서의 참수를 통해 고객들을 꾀어냈던 미디어 기업들은 의식이 없는 기억상실을 향한 경로를 뻔하게 따르고 있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2월에 온라인으로 공표했다. 한 달 후 자유주의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msnbc는 거의 동일한 언어를 썼다. ‘희미해지는 전쟁 거부: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isis 지상전을 지지한다.’

 

 

반면 인구의 극소수─대략 표준적인 기준에 따라 0.16퍼센트─는 전쟁의 리얼리티에 너무 지치고,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매우 극심해서hyper-acute 잠자리에 들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종종 살아가기조차 힘들어한다. 이들은 오랜 기간 전쟁에서 싸워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군인들이다. 개괄적으로 500000명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모든 군대의 비율로 본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부모, 배우자, 연인, 그리고 아이들 등으로 퍼지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훨씬 커진다. 그 또한 실제보다 적은 것이다. 그건 완전한 영향이 지체될 수 있는 PTSD의 성질을 반영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 혹은 남모르게 고통 받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최소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270만 병사들의 반수는 의학적 감정이나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의 정신적 상흔은 낙인이다. 그들은 또한 고통스런 모순점을 보인다. 병사들은 실제로 죄책감과 분노로 고통 받고 아파하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위안을 다급히 필요로 한다. 반면에 대중으로, 만약 도움이 안 된다면, 상상력으로 정상성을 정의하는 사회는 김빠지고, 요원하고, 진지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성적인 사람, 도덕적인 영혼이 정상이 되고 싶어 할까?

 

 

(전쟁에 대한 – 옮긴이) 외상적 거부Traumatic weariness는 어떤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영웅적이지 않다.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킬레스의 무기력보다는 그의 야만성을, 오디세우스의 눈물보다는 그의 현명함과 모험심을, US Navy SEAL 크리스 카일Chris Kyle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기 보단 ─특히 그의 자서전 American Sniper가 증명하듯─ 필적할 수 없는 살인 기록과 인종주의를 기억한다. 데이비드 핑클David Finkle은 환호를 받았고, 2007년 파병 급증의 일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켄자스 포트 라일리Fort Riley 보병대대에서의 경험을 담아 2009년 출간한 The Good Soldiers 이후로 맥아더 영재상MacArthur genius grant을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동일한 병사 일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전후’ 살아가는 모습을 좇는 2007년의 후속작 Thank You for Your Service의 판권을 샀으나, 영화 계획은 미뤄졌다. 별 다른 행동은 없었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 책은 읽기 힘든harder 전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 책을 읽는 건 곧 인내심의 발현이었다. 폭력으로 인하여 책에 삽입된 전보(戰報)에서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전보는 사건의 처음과 끝을 다루고, 형용할 수 없는 적의 끔찍한 행위들을 나열하는 동안 전우band of brothers의 끔찍한 행위들은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과 로랑 베큐-레너드Laurent Bécue-Renard의 최신 다큐멘터리 Of Men and War에서의 폭력은 군인의 존재 속에 파고들어가고, 감정적인 EFP(아마 ‘폭발 성형 관통자’Explosively formed penetrator의 약자인 듯. 하여튼 참전 군인의 통제 불가능한 정서적 불안을 말하려는 것 같다 - 옮긴이)는 어디서나, 어느 방향으로든, 몇 번이고 배치되어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는 용어는 일찍이 오랜 전쟁에서 쓰였다. ‘Support the Troops’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도시들에선 노란 리본, 잔디밭의 노란 표지판, 풍선, 그리고 자동차용 스티커가 마치 경기가 있는 날의 팀 컬러처럼 나타났다. 전쟁은 마치 하나의 스포츠였고, 사람들은 관중이었으며,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따낸 전투부대에 대한 찬사였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팀의 사기는 상업의 리듬을 따랐다. ‘Support the Troops’는 ‘Buy American[각주:2]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가게 창문, 게시판, 범퍼 스티커에 쓰인 슬로건─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기업이었고, 보안은 제품이었고, 사람들은 소비자였으며, 병사들은 숙련 노동자였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일종의 사례금이었다. (사실상 사업이라기에도 뭐했지만) 기업이 실패하자, 표지판들은 사라졌고, 때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인 ‘Pray for Our Troops’로 대체되기도 했다. 전쟁은 문제시되어왔고, 병사들은 지쳤으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얼마 남지 않은 공허한 에티켓이나 고행쯤이 되었다. 바로 그때 핑클은 시민들 사이에선 다른 문제로 넘어가려는 열망이 있고, 병사들에게는 씁쓸함이 남아있다고 적었다. ‘그들이 내가 겪었던 것을 알았다면,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그런 지랄맞은 소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정확히 똑같은 말을 했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리포터인 핑클은 그 순간의 비애감pathos과 부조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한 외교관에게 2005년 조지 부시Geroge W. Bush 대통령이 예맨으로 ‘민주주의의 수출’ 정책을 깨닫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퓰리처 상을 탔던 연작은 (외교관의) 선의와 (양측 정부의) 잘못된 방향, 그리고 돈, 위험과 중복되는 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The Good Soldiers는 패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은 모두 파탄 직전의 제국의 역사에 대한 에피소드로 읽히지만, 그가 보여준 부조리를 넘어서 이런 제국의 기획들에 대해 작가가 믿었던 것은─그가 중동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 단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무가치한 외국 파트너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서투른 문민 지도자에 의해 실행 됐다고, 혹은 지배와 확장에 대한 더 크고 오랜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털어놓지 않는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가 출간된 이후 인터뷰에서 핑클은 전쟁에 의해 모든 병사들이 끝장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은 적응하고 잘 살고 있다. 그는 힘들어 하는 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인정하고 싶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책은 ‘어젠다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엄밀히 그건 옳지 않은데, 그가 그런 것처럼, 전쟁을 영원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군국주의를 미국의 정책과 문화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책과 책 속 모든 이들은 전쟁의 정치학과 그것이 전쟁 이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것 또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핑클과, 그가 8개월 동안 의지했던 병사들이 겪었던 전쟁은 논리나 논쟁을 벗어나, 오직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만이 있기에, 정치 밖에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또는 그가 썼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전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고, 반면에 그 모든 것을 의미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의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한 Thank You for Your Service은 의미가 소멸될 때, 즉 병사들이 해산하고 그들이 겪은 극한의 경험이 집의 친밀하고 사교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원문 99-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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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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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 사전에 따르면 war-weary는 ‘전쟁에 지친(피폐한)’정도로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보다는 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것 같아 ‘전쟁을 거부하는’으로 번역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war-weariness를 ‘War-weariness is the public or political disapproval for the continuation of a prolonged conflict or war’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거부하는’이라는 의미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옮긴이) [본문으로]
  2. 미국 정부의 국산품 구입 운동. 또는 그 정책. 1930년 연방법에 따라서 입법화되었으며, 1960년 이래 달러 방위를 위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창하였다. (네이버사전 – 옮긴이) [본문으로]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②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③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는 동안, 당신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 <이름 없는 남자>(2009)를 찍었다. 그 영화는 고립과 고독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의도했던 것인가? 형식적으로 말해, 영화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녹음한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대조적으로, <이름 없는 남자>에는 대화가 전혀 없다.

 

 내가 이 남자와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우리는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다 잠시 쉬고 있었고, 한 친구가 나를 황무지 근처로 안내하고 있을 때, 어디서인지 이 남자가 나타났다. 별안간 나는 그가 살고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그의 삶의 경험을 전해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한 사회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커져가는 시간에 살고 있다. 그건 비대해진 욕망의 시간이다. 그리고 여기 가장 가난하고, 외로우나 또한 가장 소박하며, 자발적이고 자급자족하는 존재가 있다. 그는 다른 이들과의 접촉 없이 황무지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그는 여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메마르는 풀처럼 자연의 상태에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움직인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를 찍는 동안, 나는 실제로 언어가 영화를 유지할 수 있는 극한을 탐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에서 대화를 쓰지 않은 이유는 꽤 단순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그에 대한 영화를 찍어도 되는지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의사소통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존재 상태를 찍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주제는 당신의 최근 다큐멘터리 <세자매>(2012)에서도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이 세자매를 우연히 만났다. 어딘가에서 당신은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雲南省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러 갔을 때 그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어떻게 그들과 친구가 되었나?

 

그 작가의 이름은 쑨 시샹Sun Shixiang이다. 솔직히 나는 그가 2001년 31살에 요절하기 전까지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와 나는 같은 세대에 속해 있다. 그는 그의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에 대한 회고를 소설화했고, 2004년 사후에 출간된, 『셴시神史』(신의 이야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소설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있다. 소설은 쑨 시샹이 목격한 인간 삶의 모든 양상들로 풍부하다. 그만의 이야기에 더하여, 그는 그의 부모, 조부, 이웃, 친족들의 이야기를 한다. 내 생각에 그는 나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거기다, 그가 소설에서 형상화한 삶을 나도 살았다고 느낀다. 그는 유년기부터 성숙한 뒤까지 효과적으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건 정신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작가나 문학 비평가는 아니지만, 『셴시』야말로 동시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라 생각한다. 동시대 문학을 여러 편 읽었지만, 대다수는 우리 삶에서 동떨어져 있다. 개인적인 삶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이 역사적 시기에, 이 국가 사회적 (진행) 과정에서 겪고 있는 삶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강렬하지만 종종 풍부하고 강력한, 이 생동하는 집단적 경험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내게 이 작품들은 그저 너무 나이브하다. 나는 <바람과 모래> 작업을 하는 동안, 쑨 시샹의 소설을 매우 빨리 읽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촬영하느라 바빴기에 <바람과 모래>가 완성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내게 그건 무덤을 방문해 경의를 표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거기서 어떻게 세자매를 만나게 되었나? 당신의 필름이 보여주듯, 그들은 돌봐주는 부모 없이 대부분 스스로 생활하고 있다.

 

쑨 시샹의 무덤은 고산지대에 있다. 언덕에서 돌아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차를 멈추고 길가에 있는 세 아이들을 봤다. 첫째 언니 잉잉Yingying이 일곱 살이어서 아직 학교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 년 전이었다. 영화를 찍기 시작해씅ㄹ 때, 잉잉은 열 살이었고, 두 동생들은 대략 여섯 살, 네 살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얘기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감자로 요리를 해줬다. 그건 시골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시골 생활 방식에 익숙하다. 이상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서 낯선 이의 집에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 아이들의 삶이 당신의 유년시절을 상기시켰나?

 

내가 1970년대에 성장할 때, 중국에서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전국 모든 곳에서 먹을 음식은 충분하지 않았고, 입을 옷도 없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물질적 빈곤은 우리 기억에 세세히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80년대부터 중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가난에 찌든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이런 문제는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빈곤이란 어느 정도 기억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고산지대에 간다면, 갑자기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진 동일한 빈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빈곤이 팽배해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부모들이 자립하기 위해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는 게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맞다. 그건 과거와는 매우 다른 시기에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사람들이 항상 행복한 가족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차라리, 높은 확실성의 수준에 대한 말이다. 사람들의 사적인 생활은 사회에 의해 제한받았다. 당신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쉽게 이혼하거나, 가족을 떠날 수 없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활동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는 만약 당신이 아내, 혹은 남편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떠나버리는 몽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실제로 불가능했다. 당신의 개인적 삶을 위한 자유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이는 별개의 문제다.

 

<세자매>(왕삥, 2012)

 

이런 문제들은 지금도 발생하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건 상당 부분 경제적 발전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과 더불어, 경제적 관계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보다 훨씬 더 강한─지배력을 발휘한다. 왜냐고? 간단하다. 이 작고 가난하고 외진 마을을 보자. 일할 수 있는 모든 젊은 노동자들은 이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곳의 경제는 더욱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름끼치게도, 경제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착취한다.

 

<세자매>는 여러 롱 쇼트들을 통해, 주로 제한된 대화와 내레이션 없이 아이들의 일상을 좇으며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들은 매우 강렬해서, 사람들로 가득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하나로 관통하였다. 이런 점들로 미뤄봤을 때, 그런 이미지가 관객을 연결시켜주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그 영화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90분짜리로,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TV에 방영되는 영화(다큐멘터리 프로를 말하는 듯 - 옮긴이)는 대략 50분이므로, 90분은 이미 충분히 길다. 또 다른 버전은 영화관 상영을 위해 만들었고, 150분짜리다. 이미 말했듯,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의 접점을 형성한다. 이미지들이 반드시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울 필요는 없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영화제작자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계속 보고 있을 때, 당신이 무엇인가에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을 때, 왜 당신은 그것을 보고 싶어하며, 그리고 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가? 사람들이 신경 쓰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소녀들의 내면적 충만함, 그들 삶의 모든 디테일들 ─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관객들에겐 이 확대되어가는 복잡함을 반성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친절함을 베푼다. 심지어 막내 아이조차 돼지와 염소 모이를 주는 데 동참한다. 그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매우 슬프면서 단순한 관계다. 이 영화에서 많은 것들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들의 삶과 감정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의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충만한 영화는 광고가 아니다. 충만한 영화는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우리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세자매>는 궁핍한 환경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영화 전체는 빈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소녀들의 생동하는 실존에 대한 것이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의 영화가 보여주듯, 도시에 일하러 나간 세자매의 아버지는 매년 토마토와, 주식을 심으러 마을로 돌아온다.

 

그렇다, 그리고 명백히 그는 문제가 있다. 이 지점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발생한 새로운 이슈를 제기한다.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갔지만, 그들의 노동이 도시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임금과 생활수준은 여전히 낮으며, 그래서 시골은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 이 어린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음식, 숙박 등의 생계를 위한 지출을 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시골로 돌아왔을 때, 뼈 빠지게 노동했음에도 가져오는 것이 거의 없다. 소녀들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 않으나, 만약 혼자였다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세자매가 있으니, 그는 도시에서 아무 것도 저축하지 못하므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또한 외로움에 대한 것은 아닌가?

 

<세자매>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이들의 일상에 어떠한 부분도 차지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몇 년 동안 아이들을 남기고 떠난 상태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와 집 주위에서 몇몇 사람들을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세 명의 외로운 어린 아이들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경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경제는 우리 모두를 납치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인간  관계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관계다. 경제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할당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채찍질한다(reinforce의 의역 – 옮긴이). 결국 이러한 위치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원유>와 <석탄, 화폐>에서 논했던 것과 상응하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오늘날 중국의 불특정한 사회적 관계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이 보기에 세자매 같은 아이들이 자라면, 그들 또한 도시를 갈망할 것 같나?

 

아이가 도시를 갈망하진 않을지라도, 중국의 경제는 도시에 집중되어있다. 도시들은 마치 자석과도 같다. 그건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의 문제다. 실제로 과거에는 중국의 경제가 시골에 집중되어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골 경제, 도시 경제 그리고 하찮은 산업 사이에는 심연이 있었다. 이제는 무거운 경제적 힘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도시는 엄청난 부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고, 기회를 찾기 위해 이 부에 이끌린다. 자석의 에너지는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범위를 결정한다.

 

언젠가 당신은 중국에서 오직 상하이만이 도시 문화를 갖고 있으며, 다른 곳은 ─ 예컨대, 베이징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치 문화다. ─ 그렇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도시들이 그런 자석이 되어가고 있다면, 이는 도시 문화를 성장시키겠는가? 혹, 반대로 문화는 후커우戶口[각주:1] 거주자 등록 시스템에 의해 좌절되겠는가?

 

그게 그러한 경향을 늦출 거라 생각진 않는다. 그 말은 중국 시네마에 대한 논의 중에 나왔다. 국가로서 중국은 농경 문명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사회 이데올로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그러한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 문화가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 살 때 등장했는지 ─ 혹은 어떻게 등장했는지 ─ 의 여부는 미래를 위한 문제다. 하지만 도시들은 성장을 지향할 것이고, 시네마 또한 도시 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 삶의 모든 다른 부분까지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의무 또한 있다.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걸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

 

그 말은 당신이 영화는 그만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영화는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 변화할 것이다. 우리 세계는 점점 더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해가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아한다. 과거에, 비록 우리는 문자 언어에 기반을 둔 풍성한 문화를 향유했음에도, 이미지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작곡법, 어휘 게임, 서사 장르, 풍속에 대한 묘사 등 모든 것들은 문자 언어를 응용해서 창조한 문화의 구성요소였다.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예술의 역사는 훨씬 짧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다. 동시대 시네마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시네마는 오래 전부터 우리 레퍼토리에 축적되어온 것에 제한받지 않을 것이다.

 

- 끝 -

 

<원문 p. 129-13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1. 중국의 후커우(戶口, 호적) 제도는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 본적제도와 비슷하지만, 후커우의 이동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즉, 현행 후커우 제도는 정부가 국민들의 거주지 이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옮긴이) [본문으로]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②

 

 

<중국 여인의 연대기>(왕삥, 2006)


그렇다면, <원유>에서의 노동자들의 계약이 올해 혹은 내년에 끝날지도 모르는 건가?

 

오늘날의 실제 생산관계 때문에 그렇다. 그러한 시스템은 단지 작업장에서의 경제적 관계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측면에서 바뀌어왔다. 한 회사가 당신을 고용하고자 결정한다면, 그건 두 달, 세 달, 일 년, 혹은 삼 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회사는 당신이 일한 만큼 임금을 지불할 것이다. 영화 자체는 이것을 기록한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려하지 않았다. 영화를 본 뒤, 당신만의 판단을 내릴 수 있으나, 그건 관람자로서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석탄, 화폐Coal, Money>에서 당신은 산시성에서부터 항구도시 톈진天津까지 석탄을 운송하는 트럭을 따라다니며, 석탄 광산 근방에서부터 길 위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손을 거쳐 석탄을 화폐로 바꿀 기회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의 풍경을 포착했다. 이 또한 우리 사회적 현실의 한 단면으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포착하려는 목적이었나? 

 

영화 <석탄, 화폐>는 불완전한 프로젝트다. 당시 우리는 매우 많은 장면을 찍었다. 하지만 영화는 유럽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되었고, 내겐 그저 5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프랑스 제작사는 사실 그 문제를 이해했다. 이후 그들은 내게 완전한 버전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가서 다시 작업할 시간이 없었다. 50분 안에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서술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완성된 작업이 아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할 때, 이 영화 속 사람들이 훨씬 생동적이고, 종종 주도적이라는 데 동의하는가?

 

그렇다. 우리네 시간의 본성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중국이 내가 <철서구>를 찍던 당시와 완전히 같진 않다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서 고난을 엿볼 수 있지만, 또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창조성, 에너지, 그리고 활력이 존재한다. 낙후된 경제, 단순 생산 방식과 시스템의 제약이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 시대의 삶이 흘러간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왕삥, 2006)

 

연대기적으로 <철서구> 이후 당신의 작품은 <중국 여인의 연대기He Fengming>(2006)이었다. 주제적으로 봤을 땐, 이 작품은 장편 극영화 <바람과 모래The Ditch>(2010)과 연결된다. 두 작품 모두 중국 북서쪽에 위치한 강제 노동 수용소 지아비앙고Farm Jiabiangou에 대한 것이다. 그 수용소는 1957년 ‘우익인사들’을 잡아두기 위해 설치되었고, 1958년에서 60년의 대기근 당시 3000명 이상의 죄인 중 대부분이 그곳에서 굶어죽자 폐쇄조치했다. 1961년 초 당시 정부는 모든 억류자들에게 귀향하라 명령했고, 단지 몇 백 명만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이건 우리가 방금 논의했던 영화와 비교해 전혀 다른 주제가 아닌가?

 

사실 나는 <철서구> 직후, 2004년에 일찍이 지아비앙고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원유>와 <석유, 화폐>를 찍는 와중에 (지아빙고에 대한 – 옮긴이) 각본의 초안을 쓰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지아비앙고에 있었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바람과 모래>를 완성하는 데 까지 7년이 걸렸다. 다른 영화들은, 어쨌건 여가 시간에 만든 부산물이었다.

 

왜 그러한 주제를 선택했으며, 그 영화에 그렇게 많은 힘을 들인 까닭은 무엇인가?

 

양샨휘杨显惠의 책 『지아비앙고로부터의 이야기Stories from Jiabiangou』에서 처음 그 수용소에 대한 것을 들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후 나는 그와 만나려 했다. 그동안, 더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읽고, 인터뷰를 했다. 2005년에 양샨휘는 내게 허펭밍和凤鸣을 소개해줬다.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한 게 그때였다.

 

지아비앙고가 중국의 근대사에서 비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선, 국제공산주의운동은 거의 한 세기 전에 중국에 유입되었다. 이 시기 전체를 통틀어 그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괄목할만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등,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지아비앙고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지아비앙고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독특한 의의를 내포한다. 수용소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당신의 다큐멘터리에서, 허펭밍은 자신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녀는 혁명에 가담하려는 열망이 가득했던 열광적인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불과 10년도 안 돼,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우익인사’라는 낙인이 찍혔고, 각자 다른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지아비앙고에서 남편이 굶어 죽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를 마지막으로 찾아갈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 기에 자식들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이전에 썼던 모든 기록들을 없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1세기에 회고록을 출판할 수 있었다. 영화는 눈길 위에서 허펭밍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후, 카메라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는 또한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있지도 않는데, 인터뷰어의 질문이 녹음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전체는 기본적으로 불을 켜기 위해 일어날 때 등 일부 예외적 순간을 제외하면, 의자에 앉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건네는 허펭만 그 자체다. 의도한 것이었나?

 

실제로 사전에 계획되었던 것이다. 그 방식은 우리가 처음 허펭만과 만났을 때부터 결정되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실제 촬영은 훨씬 더 길었지만, 형식은 같았다. 나는 보통 영화가 디자인된 방식을 관객들이 받아들일지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당신이 영화제작자라고 해보자. 납득할만한 영화를 만드는 게 당신의 직업이다. 관객들을 걱정하는 대신, 당신은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내게 그건 이 특정 작업을 하는 데 있어 당신의 필요에 맞는, 잠재적으로 더 좋은 영화를 만들거나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당신의 영화는 그 주제의 생생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바람과 모래>(왕삥, 2010)

 

카메라는 허펭만에게서 상당히 멀리 고정되어있다. 그녀를 어느 정도 클로즈업해서 잡을 생각은 없었나? 혹시 카메라 자체가 그녀의 주의를 잡아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나?

 

내 생각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영화제작은 다양한 전략을 동원할 수 있다. 클로즈업 혹은 롱 쇼트, 드러나는 카메라 혹은 숨겨진 카메라, 의식적인 행위 혹은 자연스러운 반응 등. 이것들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영화에서 선택한 기술과 스타일은 주제에 적합해야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화의 주제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카메라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를 찍을 때 이러한 관계에 대한 나의 주된 관심은 그 관계를 억제─눈치 채지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 따분하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찍는 것은 단지 각각의 이야기, 캐릭터가 아니라 역사를 연결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건 당시에 사회적 현상이었다. 당시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회고를 기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왜냐고? 우리의 주류 문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들의 삶을 인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반복적으로 물어왔던 또 다른 질문은 ‘왜 사람들이 그 늙은 여인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이다. 내게 이건 절대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진실하다고 여겼고, 그게 전부다. 우리의 사회적 삶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관계의 약화다. 주요 사건들에서부터 나날의 만남들까지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느끼는 환경으로 진화해왔다. 하지만 내게 이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의심을 갖고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그녀와 진실한 관계를 형성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내게 그녀를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왜 우리는 그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가? 최소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또 다른 인간에 대해 배울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같은 이야기의 극영화, <바람과 모래>를 만들었나?

 

이미 언급했듯, 나는 지아비앙고 수용소가 중국 근대사─반면에, 역사로서 그곳은 과거의 일부분이고 더 이상 현재에도 존재하는 양상은 아니다─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대신 극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개인적 선택이었다.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압력을 받고 있긴 하지만, 우리에겐 또한 공간과 자유─그건 가능성들을 탐험하는 문제다─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극영화로 만들어서는 안 될 이유란 없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바람과 모래>의 서사화 괴정에서, 시나리오에서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개인들의 실제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들이 드러나는 방식 사이의 갈등에 어떻게 접근했는가?

 

그런 갈등이 나의 작업을 지연시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우선, 오늘날 당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볼 때 개인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나 같은 경우는 영화제작 연습을 통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바람과 모래>의 제작 과정과 촬영 전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을 다루고, 복잡한 서사를 엮어내고, 해당 시기의 풍부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역사영화에 익숙하다. 하지만 내 접근 방식은 달랐다. 나는 시간과 서사를 다루는 방식을 포함하여 영화와 역사를 보는 것을 다시 사유하길 원했다. 나는 이야기를 그것의 전체로서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내가 담았던 것은 훨씬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과 모래>는 매우 단순하다. 아마 몇몇 관객들은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매우 만족한다.

 

<바람과 모래>(왕삥, 2010)

 

<바람과 모래>는 1957년의 ‘반우익인사’ 운동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전달하지 않고, 노동 수용소의 기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지 1960년 겨울에 수용소에서 ‘우익인사’들이 보낸 길고 끔찍한 나날들을 다룰 뿐이다. 유사하게 영화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배경 정보의 파편들을 제시하는 것을 제하면, 중심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서사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역사 영화에서 시간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생각하였나?

 

오늘날 역사를 복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의 존재는 감각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에서 작은 파편들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으니까. 역사는 이렇게 흩뿌려진 기억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 영화는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있다. 이 부분은 어떤 캐릭터에 있고 저 부분은 다른 캐릭터에 있다. 이 남자의 에피소드와 다른 남자의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그 에피소드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한 달 안에 발생한다. 이들은 서로 공생하면서 모두 연관되어 있고, 시간의 일치는 모두가 공유한다. 우리는 캐릭터의 개발 또는 완전한 서사를 구축하려하지 않았다. 또한, 지아비앙고 노동 수용소가─결국, <바람과 모래>는 지아비앙고 역사의 오직 일부분만을 보여줄 따름이다─영화의 주된 캐릭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영화는 수용소의 역사 전반을 다루려는 목표로 하지 않으며, 어쨌든 나는 그런 거대 규모의 작업을 할 자원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흥미로워하는 시간의 작은 부분을 찍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해당 역사적 시기를 어렴풋이 볼지도 모른다.

 


<원문 p.125-129>

 

 

 

FILMING A LAND IN FLUX(WANG BING).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철서구>(왕삥, 2003)


영화를 많이 봤었나? 당신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하루같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비록 시네마의 역사가 겉으론 매우 풍부해 보이지만, 또한 상당히 단순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즉, 처음에 당신은 여러 영화제작자, 학교, 국가적인 전통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식으로 그 분야를 검토하면, 그것의 전반적인 풍경에 대해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사는 매우 짧은 반면, 예술사는 매우 길다.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닌 시네마는 오래된 형식이 아니다. 거기다, 활동사진motion pictures이 탄생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형식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인 문화에 침투해 들어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네마는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그 영향의 정점에 다다랐다. 여러 학교와 전통이 생겨났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소련. 각각은 상대적 환경과 사회적 문맥에 따라 형성되었다. 각 사회의 시네마에는 고유한 기능과 필요조건이 있었다. 가령, 미국에서 영화가 재빨리 상업적 이익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반면, 소련에서 영화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라별로 실험과 탐구는 상이했다. 시네마 혁신─형식적. 예술적 특성과 기술적 진보 모두에 있어서─이 취한 방향들은 지역의 사회문화사와 연관되어있다.

 

학우들과의 논의에서, 당신은 촬영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물음들에 집중했었나, 아니면 이미 대개 영화제작으로 관심이 바뀌어 있었나?

 

단지 촬영기법만 한정하진 않았다. 시작부터, 우리의 관심은 특정한 측면 대신 전체를 쥐어 잡는 것에 있었다. 첫 해는 진정 시네마─역사, 동시대적 발전, 그리고 여러 국가의 전통에 대해─에 대해 배웠다. 요컨대, 목표는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였다. 꼬박 일 년 동안 이 방식으로 작업한 후에,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기본적인 요약과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향성은 점차 명료해졌다.

 

당신이 영화제작에 눈을 돌렸던 90년대 중반, 중국 감독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 시네마가 당신의 생각의 영향을 주었나?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당시 영화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제작자 개인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비록 몇 편의 영화들이 1980년대 이후로 국제적 권위의 상을 받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매우 황량했고, 세계적인 예술의 특성인 풍부함과 예측불가능성이 결여되어있었다. 모던 아트는 삶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포함하지만, 당시 영화들에 그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문화적 표지cultural markers 또는 이정표의 문제에 더하여, ─내가 보기에─PRC[각주:1]의 체제establishment 하에서 지속된 영화 제작이 주된 문제였다.

 

1990년대에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 없이 해외로 몰래 작품을 반출했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더 이상 제도적 체제institutional establishment 속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지 않나?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내가 체제 속의 영화제작이라고 말할 때, 누구라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뭘 의도한 거냐고? 간단하다. 체제의 영화들은 동시대적 문화와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몇몇 고유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체제의 관점은 여전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직 동시대적이지도, 진정으로 현대문명의 작업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 또한 이건 중국 시네마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철서구>(왕삥, 2003)

 

이 말은 당신이 이른 20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영화들을 봤고 동시대 영화를 그 당시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영화들을 봤다. 당신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면, 영화는 당신의 삶이 되므로 당신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작업을 해왔다. 여전히 매일 영화를 본다. 이건 영화제작자로서 내 삶의 일부다. 중국의 영화사를 보면, 영화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건 마치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다. 영화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했고, 그들 또한 영화에 대한 의식을 형성했다. 중국인들은 시네마가 새로운 문명을 대변한다고 받아들이지도, 또 다른 문화적 형식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을 연구한다면, 당시 중국인들에게 시네마는 그저 장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화는 주로 이 새로운 장난감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걸 발견한 몇몇 부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시의 자료는 랜덤 저글링random juggling이나 무대 공연 쇼트들이 전부다. 이건 유럽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영화는 아주 강력한 시네마 문명으로서, 새로운 문명─중국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이 초기 국지화localization가 수행된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시네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 유럽과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모로 변화했다. 중국인들은 영화가 단지 갖고 노는 새로운 장난감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또한 중국 자체가 매우 급속히 변화하고 있던 시기와 겹쳤다. 정치와 경제의 발전은 중국 시네마의 역사와 함께였다. 오늘날 통상의 표현은 이 시기를 ‘좌파 시네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정의내리긴 어렵다. 1949년 이전 상하이에서 발전한 시네마는 중국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시기였다. 당시 영화들을 세심히 보면, 교과서에서 봤던 버전과는 달리, 씬 뒤에서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역사적 문제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차분하고 조리정연한 눈으로 보는 것은 쉬울 것이다. 내 눈에 이 시기의 영화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헐리우드를 표방한, 상업적이고 스타 중심적인 작품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지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도 있다. 영화를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몇몇 요소들이나, 과거 지식인들의 윤리적 표현들, 그리고 동시에 지배적인 스타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도시 아방가르드적urban avant-garde이고, 어떤 영화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리얼리즘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는 혼합되어있다. 영화의 여러 스타일은 보통 감독들의 다양한 배경 때문에 생긴다.

 

중국의 영화제작자와 평론가 대부분은 국가(중국 – 옮긴이)의 영화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그건 중국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학자들이 왕왕 중국의 시네마에 대해 논쟁하지만, 중국사회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로는 비록 그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자세한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대조적으로, 그들은 방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당면한 문화역사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자국의 시네마를 연구하는데 투자한다. 국가의 영화사는 이런 종류의 연구로 출현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와 같은 작업이 없다. 우리의 영화사를 정초하려는 노력─신중하고, 명확하며, 합리적인 노력─이 결핍되어있다. 물론 세계의 영화사와 다른 나라들의 영화사를 이해해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사회문화적 질서와 동시대적인 영화제작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본질을 무엇인가? 지금 시네마의 실정은 어떠한가? 영화제작자로서 보건대, 자기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인내력을 가져야 한다. 나의 관점은 이렇다.

 

 <원유>(왕삥, 2008)

 

 

당신은 90년대 말에 북동쪽으로, 선양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사양화한 지구의 철거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을 찍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테마로 결정했나?

 

나는 베이징에서 때로 텔레비전 시리즈 작업에 참여하거나 카메라맨으로 일하면서 삼년을 보냈다. 이후 <철서구>를 찍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톄시(铁西) 산업지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양에서 컬리지에 다닐 때, 주말이면 종종 그곳에 사진을 찍으러 가곤 했다. 그곳의 공장들, 노동자들과 거주자들. 나는 그 장소에 익숙해졌다. 반면에, 그 결정은 또한 우리네 시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왔다. 내게 톄시 지구를 상기시키는 고적감desolation─중요하던 역사가 이제 점차 우리 눈 앞에서 쇠퇴해가고, 와해되어가고 있다는 감정─이 있었다. 그 이후, 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런 테마와 수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공단과, 그곳의 생산 일과routine,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는 것도 포함되었나?

 

물론이다. 어떤 테마를 정한 뒤에, 모든 영화제작자는 여러 기술적인 접근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기술 장비들을 실행 가능하도록 배치하는 법을 고려하는 것, 그게 전부다. 많은 이들은 왜 첫 영화의 러닝 타임이 9시간인지 물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개인적으로 그건 내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는 전혀 특이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관객들로부터의 저항resistance(저조한 관객수를 말하는 듯 – 옮긴이)을 예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 제작에 있어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나?

 

저항?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완성할 때까지의 계획을 자각하며 영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 내 직업은 완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현시presentation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주로 나날의 실제 작업과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나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노동자들과 사귀는 것 등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모든 건 참으로 간단했다. 영화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이다. 매일같이 찍고, 매일같이 수많은 세부사항들을 다뤄야 한다. 작업에는 물적 자원의 지속적인 투입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내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지원해줬다.

 

<원유>(왕삥, 2008)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잠재적인 관객들의 저항을 고려하지 않았나?

 

뭐라고? 영화의 비용은 박스오피스 수익과 다른 문제다. 둘은 연관이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박스 오피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뒤얽혀있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지는 둘은 서로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자 – 옮긴이). 그건 명백히 큰 이윤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믿는 한, 계속해야 한다. 그건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이후 당신은 <철서구>의 테마를 잇는 듯한, 다큐멘터리 두 편 <원유Crude Oil>(2008)와 <석탄 가격Coal, Money>(2010)을 더 찍었다. 엄동설한에 중국 북서쪽 칭하이靑海성의 황야에 있는 유전에서 노동자들을 기록한 <원유>의 러닝타임은 14시간이다. (<원유>는 – 옮긴이)로스 엔젤레스에서 관객들이 임의로 들어오고 나가는 전시관에서 상영되었다. 사실상, 거기 앉아서 영화 전부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설치미술 같다. 의도했었나?

 

그랬다. 로테르담 영화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설치 시네마 섹션을 원했다. 그들은 내게 요청했고, 나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영화는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익은 별로 없었다. 당시 나는 북서쪽에서 작업하고 있었으므로, 편의를 위해 유전을 찍기로 결정했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중공업이나 에너지 산업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원유>에서는 노동자들의 휴게실에서나, 바깥 리그rig(굴착 장비 – 옮긴이) 옆에서나, 대화나 행동이 거의 없다. 영화에 대한 단일한 인상은 심지어 그들이 말을 하거나 주위를 돌아다닐 때에도 끊기지 않으며, 보통 몇 분여간 지속되는 롱 쇼트들은 그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이건 관객들이 집단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공동체와 삶lived life에 대한 강렬한 감상을 품는 <철서구>와는 상반된다. 그러한 대조는 지역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중국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공장들에는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공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의 정규직 노동자라면, 노동 현장에 대한 소유 중 일부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유사하게, 사람들의 일상은 공장에서 그들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옮긴이) 이는 오늘날의 생산시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디든지 계약-노동 시스템으로 이뤄져있다. 그건 고용이라는 단순한 관계이며, 보통 일시적이다. 유전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계약 시스템에 속해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 현장은 더 이상 당신의 삶과 관계가 없다.

 

 

<원문 p.119-12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s://d1tyf8b78tco2j.cloudfront.net/3d16c62a/cea14667/images/b929d2662ab573ede55da76278e346248724a391.1000.jpg
http://www.lightindustry.org/crude_oil.jpg

  1.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옮긴이) [본문으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구글. 트위터. 우리가 의존하는 모든 서비스 ─ 그리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모든 서비스들이다. 어쨌든, 현금으로 말이다. 하지만 광고로 수익을 얻는 인터넷 플랫폼은 공짜가 아니며, 그들이 프라이버시나 통제control의 측면에서 뜯어가는 가격은 점점 비싸지고 있을 뿐이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중의 93퍼센트는 “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누군가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고 믿지만, 우리가 온라인에서 형성하는 정부의 양은 급증해왔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사용자의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페이스북과 다른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은 광고로 수익을 얻는다. 바로 이번 주만 하더라도, 페이스북이 소유하고 있는 인스타그램은 사용자의 피드feeds를 더 많은 광고주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사업 모델에 대한 불쾌한 비밀은 인터넷 광고의 가치가 그렇게까지 크진 않다는 것이다. 1990년대, 사용자 제작 콘텐츠UGC(우리나라에서는 UCC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 옮긴이)로 웹 초기에 광고로 수익을 얻는 사이트 중의 하나인 Tripod.com을 창설하는 데 일조했던 이선 주커먼Ethan Zuckerman에게 물어보라. 심지어 그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광고 옆에 나타나는 유저 콘텐츠를 경계했기 때문에 팝업 광고를 고안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는 팝업과 광고로 수익을 얻는 사업 모델 둘 모두를 후회하기 되었다. 전자는 짜증스러울 뿐이지만, 후자는 풍부하고 다원적인 인터넷 구조를 파괴하는 공범이다.

 

주커맨은 페이스북이 한 달에 사용자당 20센트를 이윤으로 올린다고 지적한다. 회사에 따르면 평균적인 사용자는 매달 페이스북을 하는 데 인상적인 20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 액수는 가엾기 그지없다. 이 보잘 것 없는 이윤폭은 사업 모델을 추진한다drive. 사용자에 대한 추적과 대규모 정보 수집에 기반한 과한 타게팅 없이 인터넷 광고는 기본적으로 가치가 없다. 이건, 특히 미국 성인의 2/3가 개인적 행동에 대한 분석과 추적에 기반하여 그들을 표적으로 하는 광고를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나쁜 협상이다.

 

큰 가치가 없는 광고는 수억 명의 사용자를 거느린 회사만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사업은 거대한 인터넷 플랫폼에 안성맞춤이다.

 

광고에 기반한 사업들은 온라인에서의 상호작용을 왜곡시킨다. 사람들은 인터넷 플랫폼이 우리를 서로 연결하게 해주거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능으로서─전 세계의 풍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거기에 몰려든다. 하지만 광고에 기반한 자금조달은 회사들이 우리가 바라듯 서로 연결하도록 하는 대신, 광고주들을 대표하여 우리의 주의를 조작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용자들은 그들의 피드가 친구들이 올리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렇지 않다. 페이스북은 10억이 넘는 사용자의 뉴스피드를 우리가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독점적이고 변화무쌍한 알고리즘를 통해 운영한다. 만약 페이스북이 우리가 사이트에 더 오래 머물게 하고 스트림stream에 광고를 집어넣기 위해서 피드를 조작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우리에게 이 알고리즘에 대한 지배권을 기꺼이 내놨을 것이다.

 

초기에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해서 흥분했던 비영리 시민 단체들은 이제 자신들의 업데이트를 홍보boost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포스트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에 다가가기 매우 어렵다는 것에 낙담한다.

 

뭘 해야 할까? 간단하다. 인터넷 사이트는 사용자들이 고객이 되도록 허용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동의할 거라 확신하는데, 나는 페이스북이나 구글이 나를 추적하지 않고, 암호화를 업그레이드하고, 선호와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하나의 고객으로서 나를 대우해준다면 기꺼이 매달 20센트 그 이상도 낼 것이다.

 

많은 이들은 인터넷 서비스에 직접 돈을 낼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러한 서비스가 공짜라는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에 잘못 빠져있기 때문이다. 광고에 대한 프라이버시 비용을 점차 인식해감에 따라 상당히 바뀔 것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여러 영화의 해적판을 공짜로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Netflix에 돈을 지불한다. 결국 구입하는 생산물엔 비용이 포함되어있듯, 우리는 어쨌든 광고에 돈을 지불한다. 현재의 월 한도까지, 우리가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할 때 시간 당 몇 페니penny를 나눠 지불하는 식의, 빈틈없고 안정적인 소액결제 시스템은 전반적인 풍경landscape을 개선할 것이다.

 

다른 장애물이 있다. 누군가 이런 실행 가능하고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소액결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지만, 실리콘 밸리는 기업가적인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빚을 지고 시작할 순 없다. 사용자들이 여기저기서 소액을 쓰고, 모든 빅 브라더들에게 쉽게 추적당하지 않고, 심지어 개인화를 가능하게 한 소액결제 시스템은 인터넷 초기에 이미 발명되었다. 큰 은행과 거대 인터넷 플랫폼은 그들의 감시 능력을 제약하는 이러한 소액결제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걸 부활시킬 수 있다.

 

우리의 지불은 이미 광고가 하는 것처럼 빈국의 접속에 보조금을 줄 수 있다. 페이스북 15억 사용자 중 1/4만이라도 그들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표적이 되거나 추적당하지 않기 위해 매달 1달러를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 매년 40억 달러─분명 고려할 가치가 있는 숫자다─을 양산해낼 것이다.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엄청난 부를 가진 듯 보이지만, 나는 그에게 내 재산의 일부를 주고 싶다. 나는 내 정보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꺼려하는 후원받는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라─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약간이라도 비용을 지불하고 싶다. 나는 생산자가 아니라, 고객이 되고 싶다.

 

소문에 따르면 주커버그는 캘리포니아 팰로 앨토Palo Alto의 회사 근처에 집을 구입하기 위해 3천 달러를 섰고, 하와이의 한적한 땅을 사기 위해 3억 달러 이상을 썼다. 그는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라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몇 달러를 지불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사진 및 원문 출처: http://www.nytimes.com/2015/06/04/opinion/zeynep-tufekci-mark-zuckerberg-let-me-pay-for-facebook.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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