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하고 있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빈번하게 개입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결국 ‘국민투표’같은 ‘다수의 의지’, ‘다수결 민주주의’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법적 절차와 제도의 틀 안에서 소수의 지성이 legal mind를 발휘하는 헌정주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균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재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사진참조: 위키 백과

 작년,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나는 통진당의 일부 정치이념을 결코 찬성하지 않으며 통진당의 정당 활동이 국가안보와 민주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헌재 판결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가 직시해야할 문제는 통진당이 과연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위협인 반국가단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국가 중대사를 결정해야할 때마다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9인중 1명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재판관 3인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할 수 있고 3인은 대법원장이, 나머지 3인은 국회(여당지명2, 야당지명1)에서 지명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당지명 2인도 보통 대통령의 정치성향과 비슷한 인사가 추천되기 때문에 사실상의 헌재소장, 헌재 재판관 선출은 집권정부의 ‘코드 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 더구나 명시적인 최종 임명권은 9인 모두 대통령에게 그 권한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헌재가 독립된 사법기관이라 할 수 없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지 않은 9명에 불과한 소수 권력이 사회의 가치를 정립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소수의 종교지도자 집단이 헌법위에 군림하여 국정을 주무르는 “이란의 신정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다. 물론 미국에도 우리나라의 헌재와 비슷한 상위재판기관인 ‘연방대법원’(Supreme Court)이 있고 연방대법원 재판관들도 미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지만 그들의 임기는 ‘종신직’이다. 지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재판관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정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라 정부코드와 상반되는 판결도 내릴 수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국회 설득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는 재신임 투표, 탄핵 사태 등 불리한 상황 때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등 ‘국회’가 아닌 ‘거리’에서 정치 현안을 해결하려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아예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위임해버렸다. 이는 사법독재를 심화시키고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진참조: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qxh&articleno=1574, 연합뉴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헌재 재판관들은 연임은 가능하지만 6년의 정해진 임기가 있기 때문에 연임을 위해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부와 다른 진보적, 양심적 목소리를 내기가 사실상 힘들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헌재 재판관은 정부 입맛에 따라 인사교체가 단행되기 쉽다. 그로 인해 어느 정치 성향을 가진 재판관이 얼마만큼 선임되느냐에 따라 이전의 사법 기관들이 내렸던 판결이 자주 뒤집어지는 등 사회 가치판단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렇듯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따라 국가 정책의 정당성과 사회가치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이후 역대정권과 집권 여당은 대화와 타협이 결여된 독단적인 결정을 ‘헌재의 판결’이라는 거역하기 힘든 사법적 권위를 빌려 형식적인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불만을 손쉽게 제어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헌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과 사회적 파급 효과는 헌재의 판결에 사후 반대하는 행위를 정부 입장에서 대한민국 헌정을 부정하는 ‘폭도’나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기 좋은 구실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런 사법 의존 현상을 심화시킨 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크다고 본다. 예전에 행정수도이전, 재신임 투표에 이어 탄핵 사태 등 자신과 참여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헌법재판소의 권한에 기대어 여소야대의 열세적 상황을 정면 돌파하려는 ‘승부사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소통문화성숙의 기회를 최소화하는 등 사실상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소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참조: http://www.ddanzi.com/ddanziNews/3702466)

 그 뒤로도 우리 사회는 어떤 현안에 대해 시민과 정부, 의회가 기탄없는 토론과 포괄적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단 ‘미국산 쇠고기 파동’, ‘집시법’, ‘사형제’, ‘인터넷 실명제’, ‘남성의 병역의무’ 등 굵직한 사회문제현안 해결과 가치판단을 “9인에 불과한 권력”에 사실상 떠넘기고 말았다.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여론수렴의 절차가 불투명해지고 헌법재판소가 모든 국가 중대사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세태에 대해서 예전에 강원택 교수(서울대 정치학과)는 “사법독재”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딱 그러하다. 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에 대해 소통과 타협을 선호하는 방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통과 대화의 과정은 험난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되어진다. 대화는 안 통한다고 단정 짓고 반대 세력을 설득시키기는 귀찮으니 그저 편하게 “어떤 지엄한 카리스마적 권위”에 현답을 구하려 애쓴다. 그래서 어느 새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할 때, 특정 사법기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 된 게 아닌가? 집권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 사법부의 상황에서 헌재의 권력화와 그 영향력의 비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과거 군사독재시절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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