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쉬운 영화는 아니다.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간혹 지루하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의 깊게 우러나는 맛을 좋아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큰 결심을 하고 봐야 할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까지는 일반 관객의 시선에서 본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첫 소감이다.

 

그러나 196분의 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을 더 관람한 필자의 소감은 그럼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이다. 일단 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예술이다. 영화 곳곳에서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고전 작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벽에 걸린 그림과 포스터는 실제 단편에 들어간 삽화이거나 연극 포스터이며, 전직 연극배우인 주인공 아이딘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에 나오는 양심에 관한 대사의 인용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운영하는 호텔의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명에서 따온 오셀로일 정도니 감독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그 깊이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는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인데, 안톤 체호프의 엄청난 팬인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은 무려 15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영화 <윈터슬립>을 제작했다고 한다. 편집 기간에만 6개월을 투자한 이 영화는 체호프의 문학을 영화로 옮긴 가장 뛰어난 작품”(시카고 트리뷴)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앞서 밝혔듯이 윈터슬립은 196분의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다. 그러나 영화 안에 들어있는 여러 메시지에 비해 복잡한 편은 아니다. 영화가 연극처럼 두 인물의 대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정된 장소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만 인물간의 대화 양상에 따라 에피소드 별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으므로, 만약 이 영화가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인물간의 대화 별로 나누어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화 별로 나누어 정리한 후 영화의 중심 소재인 으로 각 장면을 다시 재정리하는 방법으로 감상했다.

 


황량한 들판을 걸어오는 아이딘


 

영화에서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오셀로호텔의 주인인 아이딘은 고립되어 있는 호텔처럼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인터넷을 통해 지역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방법뿐이다. 그는 이 칼럼 작성을 위해 다른 것들은 남에게 맡겨 두고, 타인의 을 절대 넘보지 않는다. 나머지 일은 타인에게 맡기고 잠재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모든 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을 닫아둔다. 이 모습은 영화 초반부의 첫 장면에서부터 연상이 가능한 내용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아이딘은 황량한 곳에서 걸어오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놀러온 관광객 무리가 멀리서 웅성거리는 모습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 첫 장면부터 고독감이 시야를 강타하기 시작한다. 아이딘의 코트는 황량하게 펄럭이며,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을씨년스러움을 강조한다. 그는 모든 장면에서 온 몸으로 그의 고독감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그럴수록 고독감은 더욱 강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아이딘을 제대로 응시하는 인물이 초반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인물처럼 고립된 호텔과 방 사이를 부유할 뿐이다.

 


아이딘을 응시하는 일리야스



이런 아이딘의 고독감이 초반부에 강조되었기 때문인지 돌을 던지기 전의 일리야스의 시선은 강렬하게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일리야스의 검은 눈동자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의 수면처럼 고요하고도 강렬하게 빛난다. 관객의 불안한 느낌은 적중해 일리야스는 아이딘이 탄 차창 쪽으로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창문은 여러 조각으로 균열이 일어난다.

 


아이딘이 탄 차의 창문에 일어난 균열


 

이 순간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일 것이다. 아이딘이 닫아놓은 에 균열이 생기는 첫 장면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는 이 균열의 틈을 통해 타인의 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또한 이 장면은 관객이 균열의 틈을 통해 영화 속 인물들의 이중성을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관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필자도 이 부분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과연 타인이 보는 모습과도 일치하는가? 나의 선함, 혹은 악함은 타인에게도 똑같이 인식되는가? 어쩌면 필자도 아이딘처럼 나만의 에 갇혀 그동안 많은 것들을 무지 혹은 선악으로 나누어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함께 지옥은 타인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영화 속 아이딘의 모습을 통해 구현된다.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아이딘은 극도의 고독감에 빠져든다.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아이딘 본인과의 관계에도 적용되어 아이딘은 이중의 고독감에 빠진다. 그야말로 타인이라는 지옥에 빠진 셈이다. 특히나 아이딘에게는 잘 안다고 생각했던 본인의 모습조차 타인처럼 인식되는 순간이 더 외롭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는 균열의 틈이 벌어질수록 더욱 심화된다.

 


균열의 틈을 응시하는 아이딘


 

그렇다면 이 균열의 틈은 영화 안에서 각 인물들의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과연 부정적인 결과만을 불러오는가? 필자는 이 의문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균열의 틈을 통해 타인의 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엿보기로 했다. 추가적으로 영화의 개봉관이 적어 많은 사람이 접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스토리를 세부적으로 서술했음을 밝힌다.

 

 

* 아이딘 측 인물과 이스마일 측 인물 사이의 균열의 틈 - 빈부와 자존심 사이

 


이스마일과 히다예의 대화장면


 

영화 전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균열의 틈은 단연 아이딘과 이스마일의 집안의 대립이다. 외면적으로 크게 부각되는 문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아이딘은 이스마일의 집이 몇 달째 집세를 밀렸다며 집사 역할을 하는 히다예에게 투덜거린다. 그러나 아이딘은 이 집세 문제가 본인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히다예와 변호사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정확히는 위임하는 이다. 왜냐하면 히다예는 모든 문제를 아이딘과 상의하여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딘은 이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무지의 영역으로 취급하고 철저히 무시한다. 타인의 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 집주인과 세입자의 갈등은 이스마일의 아들인 일리야스가 아이딘의 차창에 균열을 낸 후에 더욱 심화된다. 일리야스를 잡은 히다예는 일리야스를 집에 데려다주며 깨진 차창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는데, 이때 이스마일이 날카롭게 응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스마일은 처음엔 자신의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히다예에게 당당히 맞서다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아이의 뺨을 때린다.

 


일리야스의 뺨을 때리는 이스마일


 

이 장면은 필자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다. 사실 이스마일은 본인이 할 수 없었던 강자(아이딘)에 대한 항의를 한 아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아들과 닮은 그의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강자 앞에서 그는 아들을 혼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야하기에 아이의 뺨을 때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스마일의 이중적인 입장은(여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인물의 이중성이 등장한다.) 아이와 이스마일의 사이를 휘감는 바람소리에 의해 더욱 쓸쓸하게 부각된다. 가난하기에 드러낼 수 없는 자존심이 그의 마음에 바람처럼 불었을 것이다. 이스마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집 창문을 주먹으로 깨고 만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장면은 아이딘의 균열의 틈을 더 벌려놓는 사건이 된다.

 

이 장면 외에도 아이딘 가족의 식사 시간에 등장한 이스마일의 동생 함디와 일리야스의 등장은 빈부와 자존심에 대한 물음을 다시 야기한다. 아이딘의 가족은 식사시간에 등장한 불청객(함디와 일리야스)을 식탁에 앉아 응시한다. 위에서 아래를 향한 응시는 불편하다. 특히 자선 사업을 하는 아이딘의 아내 니할의 계속되는 질문은 그런 점에서 더욱 불편하다. 차창을 깬 것에 대한 사과를 핑계로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함디는 본인의 의중을 숨긴 채(역시 이중성이 등장한다.) 일리야스에게 사과를 강요한다. 아이는 억지로 사과를 하려고 하지만,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사실 일리야스는 영화 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사이에서 가장 깨끗한 을 가진 인물이다.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행동 또한 감정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을 가진 일리야스의 행동은 모든 어른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일리야스의 돌을 던지는 행위, 뺨을 맞는 장면, 쓰러지는 장면 모두는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일리야스의 맑은 은 어른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쓰러진 일리야스


 

그렇기 때문에 일리야스의 쓰러지는 장면은 니할의 에도 균열을 일으킨다. 감독은 이를 장면의 교차 편집을 통해 표현하는데, 일리야스가 쓰러지는 장면과 교차되는 니할의 놀란 표정은 효과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때 니할의 에 일어난 균열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스마일 집안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리야스가 인상 깊었던 니할이 남편이 부재중인 틈을 타 이스마일의 집에 방문해 큰돈을 건넸던 것이다. , 이 얼마나 오지랖이 넘치는 상황인가! 니할이 이스마일에게 돈을 건넴으로서 이스마일 집안의 가난은 그녀가 심심풀이로 하는 자선사업의 하위 개념으로 추락하고 만다. 물론 가만히 있을 이스마일이 아니다. 이스마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니할이 건넨 큰돈을 불길 속으로 던져버리고 만다. 이에 니할은 일리야스의 기절 때 그랬던 것처럼 깜짝 놀라며 이스마일의 집을 뛰쳐나오고 만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운전대를 잡은 니할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결국 선의라고 생각했던 니할의 행동은 이스마일에게는 선의의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 속의 인물들은 자신만의 에 갇힌 채 자신의 행동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특히 아이딘측 인물들의 경우 이 경향이 더욱 짙게 나타난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의의 행동들은 타인에게는 선의의 행동이 아닐 수도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 단지 부자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아이딘의 집안과 대비되는 집안인 이스마일의 집안은 선의의 행동만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 앞에서 자존심만 세우는 이스마일의 모습, 모든 것을 확실히 맺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함디의 모습 역시 옳은 행동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그들 모두가 타인의 을 무시한 채 본인의 안에서만 머물렀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 아이딘 집안의 균열의 틈 - 도덕과 위선 사이

 


아이딘 집안 사람들이 식사하는 장면


 

빈부의 키워드를 제하고 나면 이제 주목해볼 것은 아이딘 집안 인물의 균열의 틈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균열의 틈 역시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아이딘의 경우는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칼럼을 통해 본인이 도덕적인 사람임을 어필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글을 써가며 본인 스스로 도덕적이고,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세입자와의 문제를 회피하고, 아내의 권태를 못 본 척 하며, 여동생의 불행도 무시하기 일쑤다. 이스마일의 집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던 그는 호텔로 돌아온 후에는 이스마일의 집 살림살이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이를 칼럼의 소재로도 사용한다. 강력하게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여동생 네즐라 앞에서 그는 강력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물론 발끈하며 자신의 말을 계속 내뱉기는 하지만 여동생을 등진 상황에서 여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그의 행동을 대화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사실 그와 여동생의 대화 패턴은 늘 이처럼 일방적이다. 둘의 대화는 대부분 소통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로를 응시하는 니할과 아이딘


 

그래도 아이딘이 강자로 군림하는 관계는 있다. 바로 아내 니할과의 관계이다. 니할의 모든 것은 아이딘의 재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본인을 강자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아이딘은 본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니할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한다. 니할은 이런 아이딘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아이딘의 물질적인 안락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니할은 이 권태의 늪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선사업을 추진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순종적인 편이던 니할은 자신의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자선사업에 관여하려는 아이딘을 못 견뎌한다.

 

만약 니할의 자선사업이 정말 도덕적으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이었다면 니할의 태도는 공감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자선 사업은 타인을 향한 진정한 자선 사업이 아니다. 자신의 권태를 잊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 줄 방법일 뿐이다. 아이딘은 이런 니할의 태도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비판한다.(이와는 반대로 네즐라는 니할의 자선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니할은 결국 이스마일에게 돈을 건네는 자선 행위를 통해 극단적으로 아이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이 자선 행위는 오히려 위선으로 변질되고, 결국 그녀는 그녀 스스로 경멸하던 남편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

 


니할과 대화를 나누는 네즐라


 

그렇다면 네즐라는? 역시 자신만의 에 갇힌 인물이다. 그녀는 식사 자리에서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꺼낸다. 요지는 선이 악에 대항하지 않음으로서 악을 이긴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선악 키워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네즐라의 본인만의 고립된 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네즐라의 이 논쟁은 아이딘 집안의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을 점점 닫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네즐라는 본인의 결혼생활을 정당화하기 위해 꺼낸 이 논쟁을 정작 실제로 적용하는 단계에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본인이 아끼는 컵을 깬 가정부를 어떻게 벌을 줘야하나 니할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아이러니는 더욱 돋보인다. 그녀는 모든 문제에 있어 자신만의 논점이 옳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문제는 정당화시키고, 타인의 문제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마치 본인의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처럼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딘과 다투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다음 대사를 보자.

 

난 삶의 방향을 설정할 열정도 없지만 그러는 오빠는? 오빠랑 상관도 없는 일에 좋은 시절 다 날렸잖아. 연금술사처럼 무모하게 사는 거 지겹지도 않아? 오빠 문제가 뭔지 알아? 고통 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거야. 토 달지 마. 내 말 인정해. 용감하게 진실에 직면해야 해. 더 사실적인 걸 찾고 있다면 파괴적이 돼야 해.”

 

네즐라는 본인도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모순적인 논쟁으로 속이면서도 오빠에게는 사실적인 걸 찾기 위해서는 용감하게 파괴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도덕과 위선 사이에 선 네즐라는 아이딘의 집안 인물 중에서도 가장 아이러니한 존재, 아이러니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아이딘 집안의 인물들은 도덕과 위선 사이에서 도덕을 지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위선에 가까워지고 만다. 역시나 원인은 타인의 을 의식하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의 고립이다.

 

 

* 아이딘 스스로의 균열의 틈 - 본인과 타인 사이

 


창 너머를 응시하는 아이딘


 

이제 가장 내부 균열의 틈이 남아있다. 바로 아이딘 스스로의 균열의 틈이다. 이는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일리야스가 던진 돌에 의해 생겨난 아이딘의 균열은 영화 속에서 여러 인물과 부딪히며 점차 벌어져간다. 그는 점차 타인의 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만 영화에서는 이 과정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타인의 균열의 틈에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글을 쓰기 위해 이스탄불로 떠나던 아이딘은 기차역에서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돌아온 아이딘은 창문 너머의 니할을 응시하며 독백한다.

 


기차길에 서 있는 아이딘


 

니할, 나 안 갔어. 못 갔지. 늙어서일 수도 있고 미쳐서일 수도 있고 내가 달라져서일 수도 있지만 좋을 대로 생각해. 나도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내 안의 새로운 내가 나를 놓아주지 않네. 나한테 가라고 하지 마. 이스탄불에 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았어. 가 봤자 모든 게 낯설 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걸 알아줘. 내겐 당신뿐이라는 사실.”

 

놀랍게도 일련의 사건들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아이딘의 의 균열의 틈을 벌리며 을 점점 열리게 만든다. 이제 아이딘의 균열의 틈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재탄생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니할에 대한 사랑으로만 언급되며 끝난다는 점은 아쉽다. 아이딘은 니할을 향한 독백에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으나 그 실체를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 역시 아이딘과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은 여러 메시지를 통해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만 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열린 메시지는 관객의 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화의 결말에서는 감독이 의도한 하나의 생각이나 메시지로 정리되며 끝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윈터슬립>의 경우는 꽤어렵고 아쉽다고 생각되었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그가 윈터슬립’, 드디어 겨울잠에서 깨어 봄날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아이딘의 고독한 은 마침내 어느 봄날에 활짝 열릴 것이다. 그리고 아이딘의 열린 은 외부에도 영향을 미쳐 타인의 까지도 열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관객들의 차례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은 아이딘이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을 엿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을 열 준비가 이미 되어있기 때문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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