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다. 오늘 가방에 넣어온 출퇴근길용 책의 제목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장르는 범죄 및 스릴러물이다. 가장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싶다>이고, 한때의 꿈은 프로파일러였다. 프로파일러의 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남들이 잘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종종 읽곤 했다. 혈흔으로 타살 방법을 추리하는 내용의 책이나, 곤충을 통해 사인을 추리하는 책 등등. 하루는 불 하나만 켜놓고, 시체 사진이 가득한 책을 보는 필자의 모습에 엄마가 놀란 적도 있다.


이렇게 몇 가지를 나열하고 보니 최근에 본 영화의 제목이 <성난 변호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이 영화가 추리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은 <성난 변호사>였고, 지하철역 안에서 울리는 몹시 억울한 이선균의 목소리는 법정물에 등장하는 흔한 주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확인하는 필자에게는 이 영화는 당연히 법정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영화를 보기 전 몇 개의 한국형 법정물을 떠올리고 영화의 내용을 대충 추측해보았다. 가장 먼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등장한 감동적인 역전의 재판장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재판장면들이 생각났다. 뭐, 그렇고 그런 재판장면과 검사와 변호사들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진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화 내용은 의외로 진부하지 않았다. 일단 표면적인 모든 사건이 다 가짜다. 그런데 그 가짜로 포장된 것이 꽤 리얼해서 관객은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관객과 변호성(이선균) 변호사의 눈에 영화 속의 살인사건은 아주 간단해보인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는 스토커 김정환(최재웅)뿐이고, 그를 목격한 목격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혈액과 용의자의 지문이 묻은 증거물까지 있으니 이 사건의 용의자는 곧 범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건을 맡지 않으려던 변호성 변호사는(이하 변변으로 칭함)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맡게 되지만, 김정환의 결백을 믿지 못하고 재차 묻는다. “시체 어디로 숨겼어요?”  그래, 필자도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하셨어요?



어쨌거나 멍한 상태의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변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 그리고 용의자의 결백이 입증되려는 순간, 용의자의 입은 마침내 열린다. “제가 죽였습니다.” 그 순간의 얼빠진 변변의 표정은 꽤 볼만하다. 지하철 역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왜 이래!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엔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얼이 빠지는 필자도 존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변의 추리에서 김정환은 유일한 용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공범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해도, 단독 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김정환이 자신의 죄를 시인함과 동시에 사건은 또 다른 흐름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이 사건은 예측하기 힘든 형태가 되어버린다. 변변은 하루아침에 증거를 조작한 변호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더 이상 사건을 맡기 힘들어진 변변에게 로펌의 대표는 연예인 마약사건을 맡긴다. 평소 같으면 콧방귀를 꼈을 B급 연예인의 마약사건이지만, 마지못해 수락한 변변은 마약 혐의를 받고 있는 연예인을 만나 감형을 위해서는 같이 마약을 한 친구들을 쓰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정확하지는 않지만 4명을 적으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의리의 연예인 납셨다. 연예인은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면서 인원은 정확하게 얘기해준다. 딱 변변이 적으라고 한 인원에서 1명이 모자라는 인원수다. 변변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아무나 적으면 된다고, 라이벌이나 뭐 그런 사람들. 필자의 귀에는 이 말이 장애물처럼 여겨지는 사람 아무나 적으면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다시 살인사건으로 돌아와서 변변은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이번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한 번 끊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여기까지의 변변은 여전히 이번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인물이고, 그저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속물변호사이다. 그러나 살인사건을 계기로 그는 돈과 권력에 더 빠져 속물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문지훈(장현성)의 충실한 법률적 문제 처리반 개가 된다. 사실 이것도 전부 가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영화 내용이 전부 가짜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법하지만, 사실 큰 틀에서 보면 <성난 변호사>의 일련의 사건과 스토리들은 한 장의 조각보처럼 잘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므로, 모든 영화를 관람할 때 일어날 일을 대충이나마 추리하는 일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인정했듯이 이런 추리 영역은 오랜 습관으로 더 발달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추리 습관은 영화의 재미를 종종 반감시키기도 한다. 특히 법칙이 있는 영화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범죄 및 스릴러 장르만큼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공포인데, 이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고 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신이나 알 수 없는 존재가 튀어나올 장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 등이 대충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장소에서 필자는 오히려 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가장 예측이 안 되는 것은 관객들의 비명시점과 비명의 데시벨 정도다. 필자는 그게 더 무섭다.(악취미 같지만 공포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관객의 비명소리이므로, 영화가 너무 재미없을 때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감상하기도 한다.)


무튼 이렇게 습관화된 추리를 즐기는 필자에게도 <성난 변호사>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으니 얼떨떨하면서도 영화가 한층 재미있어졌다. 사실 이런 스토리임을 미리 암시해주는 복선 장치들은 쓰다 남은 천 조각처럼 영화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어서, 필자보다 더 촉이 좋은 사람이라면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 없이 감상할 수도 있다. 아마 없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 천 조각들을 잘 주워 조각보를 만들어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100% 가능하다. 이번엔 필자가 찾은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필자 역시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야 다시 천 조각을 줍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


- 영화에서 변변이 맡은 사건들 : 영화 초반부에서 변변이 맡았던 약의 부작용 관련 소송은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져온다. 관객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소송은 조각보의 바탕색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변변이 맡은 B급 연예인의 마약 사건은 데스노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냥 적으라고 내뱉을 때조차 변변은 자신의 이름이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0.1%도 의심하지 않았다.

- 사라진 시신 : 시신이 없는 사건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신은 애초에 시신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른 시신이 등장한다면? 바꿔치기할 가능성도 덩달아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체 바꿔치기는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바꿔치기했다면 두 번 바꿔치기도 가능하다.

- 덤앤더머 같은 용식(배유람)&갑수(민진웅) : 무식 혹은 생각 없음 사이에 있는 그들을 변변은 자기 아래에 있는 인물들로 생각하지만, 이런 그들이 변변의 위로 올라서는 순간이 가장 큰 위협이자 반전이 된다. 물론 변변은 곧 이들의 무식 혹은 생각 없음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돋보이는 변변의 덤앤더머 농락 장면은 지하철 씬이다.

- 문지훈의 개 : 문지훈의 대저택 내부에서 변변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개였다. 이중 이 개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주목해야 한다. 문지훈의 개는 저택 안에서의 변변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증거물 확보의 1등공신이다.

- 로맨스의 위치 : 로맨스의 위치는 관객이 가장 잘 속을 수 있을만한 지점에 있다. 보통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로맨스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변호사-검사, 변호사(혹은 검사)-조력자, 변호사(혹은 검사)-피해자 안에 하나에 속하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주요 로맨스의 위치를 진선민 검사와 변변에 두고, 서브 로맨스로는 변호사-조력자 구도의 브로맨스를 생각했으나 로맨스의 결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용의자-피해자의 로맨스, 그리고 서브로는 또 하나의 브로맨스)


이 외에도 세부 천 조각들이 존재하며, <성난 변호사> 관객은 이를 통해 전혀 다른 느낌의 조각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천 조각을 지나친 것 같다면 필자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주워도 무관하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위해 친절한 설명까지 놓치지 않는다. 놓친 관객은 설명을 참고해가며 다시 천 조각의 위치를 찾아나가도 무관하다. 자, 이제 각자의 조각보가 완성이 되었다면 잘 접어서 머리 한 켠에 넣어두기를 추천한다. 한국형 추리물 치고는 꽤 쓸만한 조각보일테니 말이다.




* <성난 변호사>의 용의자 김정환(최재웅)은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 등장한 아가씨와 동일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그는 씬스틸러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몹시 다른 매력을.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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