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선명하게 뜨고 병원에 가서 임신 사실을 확인했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펄쩍 뛰며 좋아하기 보단 걱정이 앞섰다. “. 나 이제 뭐해야하지?”

주변 친구 중에 임신한 친구도 없었고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국내 최대 임신출산육아 정보 카페라는 곳에 가입해서 이것저것 읽기 시작했다. 성별을 알고 싶어서 각도를 재서 짐작해보는 각도법이야기부터 이게 가진통인가요? 진진통인가요?’라는 글까지 처음 듣는 단어가 넘쳐났다.


△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책은 매우 다양하다.(본인촬영)

인터넷에 게재된 글이다 보니 믿을만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책도 저자마다 다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 할 땐 한결같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임신부가 선택한 방법으로 출산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허나 출산의 과정은 임신부 혼자 고스란히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임신부의 입장을 존중해야합니다.”

 

사실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원하는 출산 방법이 있었다. 바로 수중분만이다. 사람들은 내가 수중분만을 한다하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한다. 허나 나는 나를 위해서 그 분만법을 선택했다. 물을 워낙 좋아해서 아이를 가졌을 때도 온천 태교를 했고 아이를 갖기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탕에 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물에서 아이를 낳으면 긴장감도 덜하고 편히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중분만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과학 선생님이 출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셨는데 뮤지컬 배우 최정원씨의 출산 과정이 담겨있었다. 어떤 고통인지는 몰라도 진통이 오자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물에서 아이를 낳아 바로 안아 올리는 장면이 당시 14살의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나는 반드시 수중분만을 하겠다고 떠들었고 그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나는 출산 예정일을 열흘 앞두었을 때까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에 다녔다. 가깝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수중분만을 한다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써놨기에 간 것이다. 산부인과는 수중분만 외에도 그네분만 등의 특수분만을 한다며 인터넷에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달이 다 돼가도록 담당 선생님이 나의 분만 방법을 묻지 않으셨다. 왜 묻지 않으실까 궁금해서 8개월차에 접어들 때 선생님한테 여쭤봤다.

 

, 수중분만 하고 싶은데요.” 그 말 한 마디에 선생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곤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요즘 엄마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물에 들어가서 애 낳는다고 더 쉽게 낳을 거 같아요? 아이를 낳는 건 아플 거 다 아프고 낳아야 하는거에요. 쓸데없는 정보가 요즘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수중분만 할 생각은 접으세요.”

 

남편과 나는 담당 선생님한테 왜 혼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각종 출산 관련 책에서는 산모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수중분만을 원한다는 이유로 왜 혼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병원을 바꿔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수중분만을 못해서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담당 선생님이 나에게 겁을 줬기 때문이다.

 

태반이 많이 밑으로 내려왔어요. 진통 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전치태반이라는 말씀인가요?

전치태반은 아니에요.”

그럼 정상범위에서 얼마나 내려갔나요?”

정상범위에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린지 병원에 갈 때마다 알 수가 없었다. 태반이 많이 밑에 있는데 정상범위 안에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설상가상으로 막달에 접어들자 담당 선생님은 제왕절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반이 밑에 있어서 진통 왔을 때 정상 분만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 그 날 상황 봐서 응급으로 수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병원에 갈 때마다 들었다. 응급으로 수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태반이 밑에 있다는데 그 밑에 있다는 것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는 이상한 소리에 나는 반발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도 우리 친척 언니들도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모두 애를 쉽게 낳다며 출산의 기쁨만 얘기해줬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혼나고 겁을 먹으니 도무지 그 산부인과에서 담당 선생님과 함께 아이를 낳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예정일을 일주일가량 남기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로 병원을 옮겼다. 태반 검사를 다시 했는데 정상범위에 잘 있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나는 진통이 올 때 태아의 심박수가 떨어지는 바람에 수중분만이 가능한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수중분만을 못했다. 그렇게 자연분만으로 첫째를 낳았다. 코앞에서 원하는 분만을 못했지만 응급상황없이 그리고 원하는 대로 무통주사도 맞지 않고 자연분만을 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 수중분만실의 모습. (본인촬영)

그리고 2년이 흘렀다. 둘째를 낳기 위해 다시 집에서 1시간 떨어진 병원을 향했고 이번엔 원하는 수중분만을 했다. 은은한 조명에 잔잔히 깔리는 음악.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니 부력 때문인지 내 몸이 살짝 떠올랐다. 남편이 내 뒤에서 허벅지를 잡아 힘을 줄 때마다 같이 당겨주니 세배로 더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임신부의 3대 굴욕 중 하나인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난 뒤 입원실에 가자마자 온천을 한 듯 나른한 느낌이었다. 그리곤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온 몸을 감쌌다. 수중분만의 효과도 있었겠지만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만약에 병원을 바꾸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진통이 오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태반이 밑에 있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만 듣고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을까. 그 병원,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수중분만 하겠다는 그 날, 나는 도대체 왜 혼난 것일까.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일과 시간은 담당 선생님의 수술 스케쥴에 의해 결정된다는 우수개소리가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권장하는 제왕절개 분만비율은 15%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35~40%로 매우 높은 상황이다. 제왕절개 분만이 의료 기관 및 관계자의 영리추구에 의해 시행돼서는 안 된다는 가톨릭 의료기관 의학윤리지침서도 있다한다. 돌이켜보니 혹시 정상범위에 있지만 태반이 밑에 있어서 응급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의 숨은 뜻이 느껴지는 것 같다. 혹시 담당 선생님은 나를 생명을 걸고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라고 생각하기 보단 그저 한 명의 ATM 기기로 본 것이 아닐까.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뭐가 힘들다고 노약자석에 오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또 들었다. 첫째 때도 전철 탈 때마다 들었는데 둘째 때도 또 듣고 있다. 그럴 때마다 임산부 배지를 더 잘 보이도록 꺼낸다. 허나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나 때는 임신하고도 밭을 멘 할머니들이 전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의정부 경전철을 이용한 날이 있었다. 노약자석 끝자리를 양보해주면 나도 앉아갈 수 있고 유모차도 붙잡을 수 있어서 끝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자리를 한 칸만 옆으로 가주실 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자신이 유모차 봐 줄 테니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유모차가 경전철 설 때 밀릴 수가 있어서 계속 잡고 있어야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안 밀린다며 자신이 잘 보고 있다가 밀리면 잡아준다며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날은 자리에 앉는 걸 포기하고 서서 올 수 밖에 없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본인촬영)

 

작년 9월 초였다. 한낮 기온이 2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첫째 문화센터 수업이 끝난 후 경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는데 6개월 차에 들어서는 임신부가 유모차까지 밀고 타니 노약자석에 앉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나보다. 그 때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니, 애를 반팔을 입히면 어떡해요? 감기 들게?”

지금 기온이 24도에요. 반팔 안 입히면 더워서 울어요.”

내 손자는 어제 반팔 입혀서 감기 걸렸다니깐? 반팔을 왜 입혔어?”

한여름에 태어난 아이라서 더위를 심하게 타서 오늘 같은 날 반팔 입어야 돼요

 

. 나는 한낮기온 24도에 반팔 입힌 죄로 등산복 입은 아저씨의 시비를 고스란히 받아 줘야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시비를 걸었다.

 

얘 배고파하는데?”

방금 먹고 왔어요. 졸려서 그래요.”

이거 손수건 물고 있는데 빨리 빼요!”

이 나려고 간지러워서 그러는거에요.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일어나기 싫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날은 도무지 짜증을 참기 힘들어서 보건소로 직행했다. 더 큰 임산부 배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항공사에서 받은 작은 배지에서 보건소에서 주는 큰 배지로 바꿨다.(본인촬영)

 

그 일이 있은 후 커다란 배지를 착용하고 전철을 이용한 날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핑크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저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갈아타요. 앉으세요.”라고 했고 학생이 그래도 앉으세요.”라고 하려고 ..까지 발음한 순간 우린 발견했다. 핑크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그 짧은 순간에 어디서 나타나서 앉으셨는지 너무 몰라서 나도 모르게 어머나!’ 소리가 나왔다.

 

비상상황이 생길까 두려워 전철을 혼자 탈 때마다 남편에게 미리 연락해놨다.

 

그 모습을 보며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운이 좋은지 노약자석에 자리가 있었고 앉아서 간지 5분 정도 됐을까. 공포의 그 순간이 왔다. 술 취한 아저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표적은 나였다. 일어나라고 일부러 내 다리에 짐을 내려놨다. 그 순간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전화번호 하나를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1544-7769. 1544-7769. 1544-7769. 저 아저씨가 시비를 걸다가 혹시라도 내 배를 때리면 바로 문자해야지 그런데 문자할 시간이 있을까? 미리 써놨다가 전송되게 해놔야지. 그것보다 차라리 서서 가더라도 옆 칸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에 복잡한 순간 반대편 노약자석에 자리가 나서 술 취한 아저씨가 앉았다. ‘. 다행이다. 지금 일어나면 30분은 서서 가야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라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전철을 10번 타면 8번은 이런 일이 발생한다. 요즘엔 워낙 캠페인을 많이 해서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그것도 젊은 사람에 한해서다. 자리 전쟁은 임산부 vs 비임산부가 아니라 임산부 vs 노인이 된지 오래다. 나는 임신하고도 밭을 메지 않은 죄로 노약자석에 앉던 핑크의자에 앉던 노인들의 표적이 됐다.

 

  휠체어도 유모차도 매번 한참을 기다려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유모차를 가지고 전철을 탈 때마다 매번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전철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가면 항상 첫 번째에 타지 못한다. 유모차도 휠체어도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데 그런 사람들을 제치고 빨리 올라가려는 노인들이 엘리베이터를 먼저 장악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때도 꼭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간다. 그것도 휠체어와 유모차를 밀어내고 말이다.

 

누군가 나보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극심한 곳을 뽑으라고 하면 전철이라고 답하고 싶다. 핑크의자를 백 날 만들어봤자 노인들의 인식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임산부든 장애인이든 모두 노인에 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다시 핑크의자를 졸업하며. 다시는 핑크의자에 앉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2016년 9월 19일 오전 11시. 가을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았다.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을 특별열람하기 위해서다. 

 

충무공 장검은 1594년 4월에 제작되어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온 쌍칼로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는 명문이 칼에 새겨져있다. 칼에 새겨져있는 명문도 유명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2m에 가까운 칼의 길이다. 이 길이는 ‘이순신 천하장사설’을 유포하게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힘이 세서 2m나 되는 칼을 뽑아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칼은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 사용하지 않고 의장용으로 사용했다 알려져 있다.

 

장검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도(刀)’인데 왜 ‘검(劒)’으로 통칭하는지 지적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장검(長劒)’으로 명기돼 있어서 검으로 불리게 됐다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와 ‘검’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지 않았기에 ‘검’으로 표현된 것 같다.

  
이 날 많고 많은 이순신 장군의 유물 중에 충무공 장검만 열람 신청한 이유는 혈조(血漕 : 칼날에 낸 흠)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가 잘 지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재질분석과 보존처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재질분석과정에서 근현대 안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위말해 ‘페인트’칠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이충무공 장검의 합성수지 도료를 제거”하겠다고 밝히며 “이충무공 장검의 혈조 부위에 칠해진 합성수지 도료(페인트)는 1969~1970년 당시 기존의 퇴락한 안료를 제거하고, 합성수지 도료를 도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혈조에 붉은색 페인트를 제거하기 전 충무공 장검의 모습(사진출처 : 본인촬영)

 

열람 시간에 맞춰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있는 사무동에 들어갔더니 담당 학예사가 얼굴을 본 척 만척하며 “저기 앉으세요. 아. 너무 바빠서”라는 말과 함께 나가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디에 앉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방문자들은 모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멀뚱멀뚱 서 있자 이번에는 담당 과장님이 나와서 수장고 쪽으로 안내해주셨다. 

 

특별열람이 처음이 아닌 필자는 사실 무척이나 당황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가면 일단 문화재를 볼 때 방해가 될 짐을 내려놓을 장소를 이야기해준다. 방문자들이 가져온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나면 담당자가 공식문서에 적혀있는 방문자 명단과 방문한 사람들의 신분증을 대조한다. 모든 사람의 신분 확인이 완료되면 문화재 사진 촬영 및 사진 활용 규정에 관해 설명을 듣고 관련 규정 준수 서약서에 서명한다. 그 후, 가져갈 수 있는 물건만 손에 들고 (메모할 종이와 연필을 박물관에서 따로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간다. 통상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 열람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왜 그런 과정이 없는지 매우 의아했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은 수장고에 들어갔을 때다. 문화재에 대한 특별열람 시에는 학예사가 장갑과 마스크를 같이 준비해놓는다. 그러나 이번 열람에는 마스크밖에 준비해놓지 않았다. 심지어 칼은 보여주고 칼집은 수장고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열람 신청을 한 대표자는 보물 326호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 15대 종부였다. 소유주가 자신의 물건을 보러 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만 보라며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필자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별열람의 경우, 문화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후 그동안 몰랐던 사실은 없는지, 알고 있던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갖게 된다. 

 

미국 서부 최대 박물관인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문정왕후 어보 특별 열람을 할 때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문화재를 살펴보다가 어보 하단 측면에 ‘육실 대왕대비(六室大王大妃)’라고 붓글씨로 쓴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일본 천리대학교 박물관 특별 열람 시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화살통을 살펴보다가 박물관 측도 모르는 화살을 발견하기도 했다. 

 

특별열람은 이렇듯 새로운 사실은 없는지 문화재를 꼼꼼히 관찰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특별열람 신청을 하여 문화재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상자 속에서 꺼내서 조심스레 봐야 하는데 이날은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그저 눈으로 보게만 했다. 책상 위 상자 속에 있는 칼을 봐야 하니 도무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휴대폰 카메라로 근접 촬영을 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학예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 사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촬영과 관련된 사항은 앞서 말했듯 유물을 보기에 앞서 해당 관의 규정에 다 다르기 때문에 미리 서약서를 써야한다. 혹시라도 미리 요청해야 한다면 특별열람 신청 시에 알려준다.

 

천리대학교에 경우 언론에만 노출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기에 촬영 후에도 당시 특별 열람한 활과 화살 및 화살통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LA 카운티박물관의 경우에는 아예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눈으로 보고 중요한 부분을 직접 스케치해서 나왔다.   

 

사진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필자가 특별열람을 간 것이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롭게 SNS에 올리지 말라는 것인지 언론에 공개하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알려주지 않아 충무공 장검의 소유자에게 허락을 받아 당일 촬영한 사진을 공개한다. (휴대폰 사진의 사적인 이용은 안 된다며 DSLR 카메라로 찍는 것은 괜찮다고 했는데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함이 사적인 목적이 아니므로 모두 공개하고자 한다.)

 

 


▲ 장검 확대 촬영(사진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이날 장검을 열람하며 발견한 것은 장검에 붉은 페인트가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검의 혈조 부분에는 이상한 무늬로 상처가 나 있는데 그사이에 스며들어 제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충사 측에서 보존처리를 맡겼던 연구소에 질의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제거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 안료가 확인될 경우 원래의 전통 안료로 칠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기존의 안료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고증을 통하여 원래의 전통 안료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합성수지도료를 제거한 후 보존처리 하기로 확정하였다.”며 충무공 장검의 붉은 칠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통안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육안으로 확인했던 저 붉은 안료가 붉은 페인트가 다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라면 현대의 보존처리 기술로도 지울 수 없는 혈조의 붉은 칠이 1969년~1970년 사이에 보강을 위해 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인되지 않은 걸까?


‘보강’이라는 말은 보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보강했다면 남아있어야 할 전통 안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은 왜 ‘복원’이 아닌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붉은 칠이 정말 돼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붉은 칠이 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면 첫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도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과 두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에서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 1969년 발간된 현충사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에 희미하게 관찰되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자.

 

 

첫 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 혈조가 칠해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의견이다. 다른 나라에서 발견되는 칼 혈조에 붉은 칠이 발견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충무공 장검 혈조에 반드시 붉은 칠이 돼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인과관계가 맞지 않다. 

 

두 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을 살펴보자. 혈조에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는 사진 위쪽 칼의 사진만 인용하여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이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쪽 칼은 칼날과 혈조 내의 색이 같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1928년 촬영된 충무공 장검(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세 번째, 1969년 발간된 현충사 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이다. (필자는 이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관찰되는 사진이 정확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만약 혈조에 무엇인가 칠해진 흔적이 희미하게 관찰된 사진이 컬러였다면 문화재청이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다는 근거로 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2014년에 만든 충무공 장검 도록에는 혈조내의 붉은 칠에 대해 언급하면서 1969년에 도록을 만들면서 혈조 내의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는 설명은 왜 발견되지 않은 걸까? 국내에 남아있는 칼 중 혈조 내에 붉은 칠이 돼 있어 유명한 칼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빠졌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다는 설명이 발견됐다면 문화재청은 왜 2014년 국민신문고 답변에서 “현재 장검의 칼날 혈조와 물결문양에 도포된 붉은색 안료의 도포 시점은 관련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확인이 어렵다. 1594년 제작 당시부터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이 어렵다.”라는 답변을 한 것일까?  

 

혈조가 칠해졌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사진 위쪽 칼의 대비를 이야기하는데 아래쪽 칼은 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1928년의 사진만을 육안으로만 확인하고 대비가 나타났다고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사진출처 :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

 

 

2014년에 발행한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에 보면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를 보면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혈조 부분이 흑백사진으로 보면 마지 뭔가가 칠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조와 칼날에 색이 균일하게 보이는 충무공 장검 사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 흑백사진만 보고 혈조에 칠이 돼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매듭지어 질 것 같지 않다. 모두 추측성 근거로만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통안료로 붉은 칠이 돼있었다고 한 들 그것을 붉은 페인트로 복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붉은 페인트 칠을 제거한 것은 420년 전 칼에 현대식 페인트를 칠했기때문이다. 칼에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 사실을 잊고 감정소모만 하고 있는 듯 하다.

 

 

▲  충무공 장검 (사진출처 : 본인촬영)

 

 

충무공 장검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칼날이 달의 표면처럼 오돌토돌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필자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박물관에 전시된 진검을 살펴봤지만 이렇게 칼이 상한 경우는 없었다. 420여 년 전에 만들어져서 종가에 내려온 칼이어서 그렇다고 넘어가야 할까. 그렇다면 500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칼들은 어째서 볼 때마다 깨끗한 모습으로 흰색 검광을 드러내며 반짝거리는 것일까. 그 칼들도 박물관에 전시되기 전에는 무가의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

 

특별열람을 마치고 현충사 직원들과 장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 김에 확인해야 할 문서를 요청했고 문서를 가져온 학예사의 말에서 왜 특별열람 때 그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장검 관련 문서를 요청한 사람이 장검의 소유주인 종부가 아니라 대리인이었고 국민 신문고에 질의 후 추가 질의를 이메일로 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해있었다.

 

  “제가 사실 그거 때문에 빈정이 상해서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공무원은 처음이었다. 
특별열람을 하기 전 나라를 구한 칼을 본다는 생각에 설렜는데 막상 칼을 보고 나니 칼의 상태에 대한 실망과 칼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에 대한 존중이 보이지 않아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 장군을 만나볼 수가 없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당에 걸어놓은 영정은 복제품이다. 왜 그런지 현충사 과장님께 여쭤보니 빛 때문에 그림 색이 발할까 봐 수장고에 넣어 두었다 한다. 사찰에 기도하러 갔는데 대웅전에 복제된 부처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참배 하러 갔는데 복제품에 참배하는 꼴이다. 그걸 아는 참배객은 없다. 다들 속고 있다.

 

영정의 빛이 바란다는데 당연히 보호해야하는거 아니냐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빛 때문에 손상되면 안 되니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고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도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는 것 아닌가.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기념관에 가도 이순신 장군의 유물을 한 점도 만날 수 없다. 전시관에 있는 모든 유물이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전문가가 아니면 다가갈 수도 없이 돼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반인들이 유리관 밖에서라도 접근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수장고에 넣어버린 것은 아닐까.

 


충무공 장검의 페인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이 맞다며 잘못을 지적하는 이에게 가혹하게 대한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이 하는 주장에는 모두 “추측”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충무공 장검은 오늘도 추측에 포장된 채로 수장고에 잠들어있다.   

 


광화문 현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2013년부터 궁궐을 조사하면서부터다. 궁궐의 문제점에 대해 책을 집필하는데 그 당시 필자는 사진을 찍고 자료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책에 넣을 광화문 현판 사진을 찍기 위해 광화문을 찾았을 때였다. 카메라를 들어 올린 순간 렌즈 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아. 또 금이 갔구나.

 

 

 

△ 사진출처 : 본인촬영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더니 곧 기사화 됐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우리 국민들은 매우 분노했다. 현판에 금이 조금 갔다고 국민들은 왜 분노한 것일까? 그것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광화문의 현판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곳을 광화문 광장으로 보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주요 외신 특파원들이 한국의 소식을 이야기할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는 광화문대로를 선택해 방송하곤 한다. 한국을 소개할 때 세계인이 인식하는 장소가 바로 광화문 앞 대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당당히 서 있는 광화문. 광화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현판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다.

 

사실 이 날 광화문 현판을 촬영하러 간 것은 현판에 금이 간 것을 담아오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현재 광화문 현판색은 흰 바탕에 검은색인데 원래는 검은 바탕에 흰색 또는 금색 글씨가 아닌지 조사하기 위해 간 것이다. 이 의문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이 쓴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인데 왜 지금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일까 호기심을 갖으며 시작됐다.

 

 


△ 사진출처 : 한겨레(당시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다.)

 

광화문 현판 복원에 대한 의문은 혜문 대표뿐만 아니라 이순우 선생이 제기하기도 했던 사실이다. 조선시대 4대 궁궐로 일컬어지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정문인 돈화문, 홍화문, 흥화문 현판은 모두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갖고 있는데 왜 광화문만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인 것일까? 또,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현판부분이 어두워 보이는데 왜 문화재청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맞다고 복원한 것일까?

 

 


△ 사진출처 : 문화재청 보도자료

 

문제가 제기되자 문화재청은 2014년 6월 자문회의를 열었다. 자문회의 결과 ‘바탕색보다 글씨 부분이 더 검고, 이음부가 바탕색보다 어둡게 나타나 흰색 바탕의 검은색 글씨임을 재차 확인’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바탕색보다 글씨부분이 더 검으면 바탕은 흰색이라니 문화재청이 공개한 동경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을 보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흰색 바탕의 검은 글씨로 써진 경복궁 영추문과 수원화성의 팔달문 사진은 왜 그렇게 선명하게 흰색 바탕이 사진에 잡힌 것일까?

 

 


△ 사진출처 : 조선고적도보(왼쪽 경복궁 영추문, 오른쪽 수원화성 팔달문.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가 또렷하게 보인다.) 

 

이해 할 수 없었지만 문화재청이 내린 결론에 반박할 사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광화문 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 사진출처 :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 사진출처 : 강홍빈(2015),『코넬대학교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의 서울 사진』, 서울 : 서울역사박물관 조사연구과

 

 

 

△ 사진출처 : 부산박물관(2009),『사진엽서로보는근대풍경4관광』, 서울 : 민속원

 

많은 옛 사진에서 광화문 현판이 검은색으로 보이는데 왜 문화재청만 아니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정도의 사진으로는 문화재청이 검은 바탕이 맞다고 얘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광화문, Gwanghwamun, Gwanghwamun Gate, Gyeongbokgung , Palace Gate 등등 각종 방법으로 자료 찾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SNS를 하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페이스북 친구인 이대로 선생님께서 공유하신 글에서 광화문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너무 놀라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정확한 출처 확인이었다. 조작된 사진이 아닌지 최종 확인이 필요했다. 아무리 찾아도 출처가 나오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혜문 대표가 찾아냈다.

사진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한 사진으로 1893년 9월 이전에 서울에서 촬영된 사진이라고 적혀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인지 금색인지 알 수 없지만 바탕보다 분명히 밝은 광화문 글자가 확대하지 않아도 보였다.   

 

△ 사진출처 :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사실 이 문제가 제기된 2014년 MBC 취재 결과 많은 전문가들이 광화문 현판의 바탕색은 흰색일리 없다고 말했다며 인터뷰를 내보냈었다.


당시 기사(MBC,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복원된 광화문 현판 '색깔' 논란”, 2014년5월31일, 박철현 기자)에서는

 “문화재청은 또 일본 도쿄대가 보관중인 일제 시대 광화문 현판 사진도 확인했다고 해명했는데, 정작 확인 작업을 맡았다는 연구자들 얘기는 다릅니다.
◀ 백성욱/세종대 전산정보원장 ▶
"동경 것(도쿄대 소장 사진)은 저희가 정확한 건 알 수가 없습니다.무슨 색이다...이런 건 저희 작업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내에 남아있는 1910년대 광화문 사진을 분석한 전문가는 현판이 적어도 흰색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 김용환/중앙대 사진학과 교수 ▶
"사진이 조작되지 않았다면 현판은 (바탕이) 흰색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렇게 봅니다."라고 보도했다.

 

 

초점이 또렷한 광화문 현판 사진이 나왔다. 이제 문화재청이 다시 답할 때가 왔다.
광화문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인가? 검은 바탕에 흰색 또는 금색 글씨인가? 




2016년 2월 22일 오전 9시 57분. 약속시간을 3분 남겨두고 도시샤 중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立志館’이라 써진 건물로 들어가니 흰색 마스크를 한 선생님이 대기실로 안내해줬다. 일본인의 초상화 여러 점 걸려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니 오늘 우리를 안내해줄 소노다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과 간단하게 인사한 후 중학교 건물을 나와 5분 정도를 걸어 도시샤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표본관으로 이동했다. 표본관 문은 5m는 돼 보이는 매우 긴 철제문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우리를 맞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학창시절 과학실에서나 보던 상자 속에 별에 별 동물 박제가 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간 일행이 문 바로 앞에 있는 유리 상자를 보며 “타조다!”라고 외쳤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간 필자는 실내화를 신기 위해 허리 숙여 오른쪽 신발 정리함에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신발장에서 10걸음 떨어져 있는 유리 상자 속에 낯익은 꼬리와 뒷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 호랑이였다.

 

 
△ 조선호랑이의 뒷다리와 꼬리(좌), 조선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우)(사진출처 : 본인촬영)

박제된 호랑이 앞으로 가자마자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가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노다 선생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 남한에서 볼 수 없다며 절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무로 된 틀과 유리 너머로 겨우 보이는 호랑이를 담기 위해 바삐 움직이자 문을 열고 편히 봐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이 들렸다. 유리문을 열자 더 생생하게 조선 호랑이가 눈으로 들어왔다. ‘조선’에서 왔다고 쓰여 있는 큰 호랑이 앞에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하게 기재돼있지 않은 새끼 호랑이가 가엽게 보였다.

 

 

△ 1917년 함경도 신창에서 조선 호랑이 두 마리를 포획한 야마모토(가운데 서있는 사람).

사진속의 호랑이중 한 마리는 자신의 모교인 도지샤 대학(좌측 호랑이)에 기증하고,

다른 한마리는 호랑이는 당시 일본 황태자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사진출처 : 정호기)

도시샤 중학교에서 관리 중인 호랑이 박제는 일명 ‘야마모토 정호군’이 잡아온 호랑이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1917년 11월에서 12월까지 약 한 달 동안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害獸驅除: 해로운 동물을 퇴치하는 사업)’를 표면에 내세워 호랑이 사냥을 했다. 사냥 팀을 8개로 조직하여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금강산, 전라남도 등에서 사냥을 벌였던 그는 어떤 생각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일까.

일본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이번엔 왜 일본에 왔냐’고 물었다. 조선 호랑이 박제를 보러 왔다고 대답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아십니까?’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일본에서는 그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배울 때 하나의 챕터로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호랑이 사냥’이 나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죠잔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아끼던 시동 고즈키 사젠(上月左膳)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복수로 호랑이를 사냥한다는 내용이었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2014), 『정호기』, 서울 : 에이도스, p.22

 


일본에는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호랑이를 사냥한다는 것은 조선을 점령했다는 상징이었을 것이고 일본에서 유명했던 가토 기요마사 이야기처럼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도 그 상징을 잡아 보려한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계속해서 호랑이 포획정책이 이어졌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멸절됐다는 것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1936년 경성사범학교의 생물 교사인 우에다 츠네카즈가 쓴 글을 보면 답이 나온다.

 

“옛날 조선에는 호랑이가 매우 많았고 어딜 가나 사람과 가축에 피해를 주는 동물로, 호랑이를 죽여서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지방 관사의 중요한 행정업무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북쪽 오지가 아닌 한, 어느 산야를 돌아다녀도 호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는 피해를 방지하자는 목적 외에, 고가의 모피와 뼈를 얻기 위해 연이어 호랑이를 잡았기 때문이다. 뼈는 약재가 되고 모피와 거의 비슷한 가격대를 형성한다. 깔개로 쓰는 호랑이 모피는 엄청난 고가여서 경성에서는 한 장에 시가로 1,000엔에서 15,000엔이나 한다.
지금은 호랑이가 자주 나오는 곳이 함경북도 백두산 자락의 무산과 회령 사이라 하지만, 그곳조차도 작년(1935년)에는 겨우 다섯 마리만 포획했다고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의 호랑이는 멸종할 것이 확실하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2014), 『정호기』, 서울 : 에이도스, p.46-47

 

또 다른 이는 호랑이를 쏜 것은 조선인 포수였다고 말한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일본이 주장하는 논리와 조선 호랑이가 멸절된 것을 조선인의 과실로 주장하는 논리가 어쩜 이렇게 닮아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포수를 고용하여 멸절시킬 의도로 사냥했기 때문에 호랑이가 멸절된 것이지 단지 조선인 포수가 호랑이를 쐈다고 호랑이가 멸절된 것인가. 그렇다면 조선 초기부터 호랑이 조선인이 호랑이 사냥을 했을 텐데 왜 그 땐 멸절하지 않은 것인가. 같은 시기 조선의 사슴과 조선의 표범 등 다른 동물들이 멸절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시샤 중학교를 나오기 전, 백두대간 수목원 같은 기관에 호랑이 박제를 기증해주기를 요청한다며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 준비한 요청서를 전달하고 왔다. 요청서를 받은 소노다 선생님은 일행이 학교를 떠나자마자 도시샤 학교법인 이사장실로 전달했다 한다.
이 사실은 국내 언론보다 일본 언론에서 더 많이 다뤘고 이슈가 됐는데 댓글이 4천개 이상 달린 기사도 눈에 보였다. 일본인들은 호랑이를 줘야한다, 말아야 한다 등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올해는 야마모토 정호군이 호랑이를 잡아간 지 99년이 되는 해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호랑이가 잡혀간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도시샤에 있는 호랑이 박제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해부터 호랑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야마모토가 잡아간 호랑이는 도시샤에 있는 것 말고도 한 마리가 더 있는데 당시 황태자에게 기증했다 한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 호랑이의 행방을 추적중이다.)

 

 

△(왼쪽부터) 도시샤 표본관 소장 조선 호랑이,

교토의 오타니 고등학교에 보관돼 있다가 2005년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 기증된 조선 호랑이,

도쿄과학박물관 소장 호랑이(사진출처 : 본인촬영)

 

지난 2월 22일부터 3일간 조선호랑이의 행방을 추적하기위해 일본 교토와 도쿄에 있는 호랑이들을 조사했다. 박제라고 해도 호랑이 옆에 서면 어찌나 무섭던지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호랑이와 같은 찍은 사진에 잔뜩 겁을 먹은 필자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 옆에 너무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망령은 조선의 무엇을 앗아간 것일까.


마지막회 시청률 19.6%, 역대 케이블 TV 프로그램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세트장이 철거된다. 세트장은 의정부종합운동장 확장 부지에 위치해있다.

사진출처 : 응답하라 1988 홈페이지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의정부에 거주하는 시민으로서 의정부에 응답하라 1988’ 세트장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의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가 그동안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의정부시에 대해 물어보면 군사도시또는 경전철 문제(버스보다 느리다거나 적자가 심하다거나 자주 멈춰 선다는 등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는 곳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렇기에 응답하라 1988’ 세트장이 의정부의 이미지를 조금 바꿔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시군에 사는 사람들이 세트장도 구경하고 근처에 있는 부대찌개 거리에서 점심도 먹으면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그래서 드라마가 종영하면 세트장에 가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MK스포츠 123일자 기사에 따르면 경기콘텐츠진흥원과 의정부시, CJ E&M등이 해당 세트장의 보존, 활용을 위해 민간 위탁 운영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했으나 결국 부지의 기본적인 사업 계획 등 원천적인 해결이 불가능해 잠정적 철거 결론을 냈다"고 한다.

CJ E&M 측에서 의정부시에 세트장 보존을 위해 10억원의 비용을 지불하라고 요청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세트장이 철거가 확정된 듯 하다.

 

보도된 기사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여 의정부시에 전화해서 관련 사항을 물어보았다. 의정부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세트장이 가건물이기 때문에 안전상의 문제가 있어서 시민 개방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 말이 사실일까? 그래서 세트장의 모습이 어떤지 직접 찾아가 보았다.

 

직접 찾아가 본 세트장은 겉에서 볼 때는 무슨 건물인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벽에 막혀있었다. 그러나 세트장 안으로 들어간 순간 TV 속에서 만났던 쌍문동 봉황당 골목이 펼쳐졌다. 이미 철거가 시작돼 봉황당 간판은 보이지 않았고 쌍문동 태티서가 나물 다듬고 만두 빚던 평상도 보이지 않았다.

 

 

 

(위쪽 첫번째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철거중인)

택이네 집, 정봉이네집, 선우네집, 봉황당 골목길 계단

사진출처 : 본인촬영

 

현재(2016128)는 소품 철거가 진행 중이며 구정이 지나면 본격 철거에 들어간다.”는 세트장 철거 관리인에게 세트장 안전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더니 정봉이네 집과 같은 곳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했다. 덧붙여 시민개방을 할 줄 알았는데 왜 바로 철거하는지 본인도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아고라에서도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의정부 세트장 철거 반대청원이 125일부터 진행 중이다.

(청원 사이트 링크 :  http://m.bbs3.agora.media.daum.net/gaia/do/mobile/petition/read?bbsId=P001&articleId=181524&objCate1=1&pageIndex=1)

청원에 참여한 네티즌들은 입장료 내더라도 꼭 가고 싶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개방해준다면 좋겠다.”라는 입장이다.

세트장 철거에 찬성하는 네티즌들도 있다. 그들은 청원이 시작되자  유지, 관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더라.’,‘다른 드라마 세트장들도 개방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안와서 철거한만 못했다더라.’라는 의견을 냈다.

세트장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청원을 낸 이유는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 방향으로 시민에게 개방할 수 있는 방법을 의정부시가 찾아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은 세대 간의 격차를 줄여준 고마운 드라마다. 그렇기에 철거가 결정됐다하지만 날씨가 풀리면 엄마,아빠, 친구들 손을 잡고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의정부시와 CJ E&M이 다시 한 번 노력해주었으면 한다.


 

24살의 청년이 2015년 11월 18일 현재 35일째 단식 중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총장 보광 스님, 이사장 일면 스님 퇴진'입니다. 두 스님은 퇴진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청년은 단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청년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단식 중인 동국대학교 부총학생회장 김건중 학생은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온 몸에 반점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평소에 가는 한의원 선생님께 당시 33일째 단식 중인 학생의 상태가 어떤지 여쭤봤습니다. 선생님께서 당장 가서 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2일 뒤에 찾아갈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하니 “그 학생 2일 뒤에 없을지도 몰라요. 늦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동국대학교로 바로 달려갔습니다. 단식 중인 천막이라 대표자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밖에 있으라는 소리에 초초하게 기다렸습니다. 학생은 잠이 들었는데 얼굴은 시퍼렇게 변했으며 반점이 올라와서 딱 보아도 정말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는 상태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학생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스님들은 뭘 하고 계신 걸까요. 학생의 상태가 이렇게나 심각한데 논문 표절 문제의 중심 보광스님과 흥국사 탱화 절도 의혹을 받고 있는 일면스님은 계속해서 김건중 학생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불교닷컴

지난 9월 17일, 동국대학교에서는 전체 학생 총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학생 1만3000명 가운데 정족수 7분의 1에 해당하는 1788명을 훌쩍 넘는 2031명이 만해 광장에 모여 이사장 일면 스님과 총장 보광 스님의 사퇴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반대 한 표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다하니 학생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는 “학생총회 그거 그냥 행사 아니었느냐”며 무시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법보신문(위). 동국교지 페이스북(아래)

(학생들에게 빵을 나눠 준 날  당신은 이사장이 아니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일면스님은 “이사회에서 뽑았으니 이사장이다. 학생이 뭔데 이사장이냐 아니냐를 말하느냐”고 답했다한다.)

 

일면스님은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동국대 학생들을 위해 지난 6월 16일 오후 동국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에게 빵과 커피를 나눠주는 행사도 치뤘다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빵은 나눠줄 수 있지만 학생들의 생각을 대변하기 위해 35일째 단식하고 있는 아이에겐 왜 찾아가지 않는 걸까요. 그 아이가 일어나서 건간을 회복해 빵을 먹을 수 있게 왜 못하는 걸까요.

 

 

사진출처 : 불교닷컴

필자는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흥국사 탱화와 관련하여 도난 문화재가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도록 시민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탱화 제자리찾기 운동을 하는 도중에 김건중 학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학생이 단식한지 3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11월 14일 은석초등학교에서 열린 동국대학교 이사회 관련 기사를 보다가 알게된 것입니다. 그 날 단식 중인 김건중 부회장이 일면 스님이 이사에 재선임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 탈진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사진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면서 최대한의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김건중 학생처럼 목숨을 걸고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흥국사 탱화 제자리찾기를 위해서 30일 이상 단식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할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생이 쇼크를 받아 병원으로 가는 사진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에 충격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가 저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을까요.

 

지난 9월 8일에 조계종은 중앙종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일면 스님에 대한 이사 후보 추천안은 찬성 31표, 반대 40표로 부결됐던 사안입니다. 그 후 동국대 이사 후보를 추천할 종립학교관리위원회가 계속해서 개최됐지만 성원미달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11월 14일 이사회를 열어 현 이사인 일면스님이 자신을 다시 이사에 재선임하는 이사회를 진행한 것입니다.

 

 

조계종 중앙종회까지 무시하면서,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면스님은 계속해서 이사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일면스님은 일주일 뒤인 25일 100인 대중공사(大衆公事 : 사찰에서, 사찰 운영이나 승려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문책, 공지 사항 등이 있을 때, 사찰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일.)에서 탱화 절도와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겠다고 합니다.

 

일주일 뒤에 해명하면 끝일까요? 일주일 뒤면 김건중 학생 단식 42일째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일면스님이란 분이 어떤 분이기에,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기에 35일이나 단식하는 아이를 외면하고 이사장 자리를 지키려고 할까 궁금해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봤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면스님 출생 1947년 9월 25일. 속세 나이로 만 68세입니다.
스님의 노욕(老慾)에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시작이군!’

 


사진출처 : 뉴시스

 

국정교과서 대표 집필진으로 초빙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기자들과 자택에서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일보 여기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한다. 최교수는 논란이 확산되자 국정교과서 집필진에서 자진 사퇴했다. 사퇴 소식에 몰려든 취재진에게 최교수는 "나는 별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했다한다.

 

지난 해 9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여성 캐디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 번 툭 찔렀다’는데. 피해 여성은 1991년생, 당시 나이 24살이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대사! ‘딸 같아서, 손녀 같아서’라는 말로 무마하려했다. 법원은 박 전 국회의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과 성폭력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수강명령을 내렸는데 박 전 국회의장이 항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건은 또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여성인턴을 성추행한 사건이다. 그는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앞 둔 상황에서 여성인턴을 성추행했고 이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당시엔 "허리 툭 치며 격려한 것일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했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팀의 조사를 받을 때는 피해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다, 여성 인턴이 호텔 방으로 올라왔을 당시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변명거리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사회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여자애가 무슨 재주로?’

여러 가지 사건을 지켜보며 나는 재작년 여름을 떠올렸다. 문화재환수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LA카운티박물관이 소장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문화재환수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당당히 문화재를 반환받지 못한다면 문화재환수운동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작년 7월부터 9월 사이는 LA카운티박물관에 문정왕후어보를 돌려 달라 직접 반환요구를 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문정왕후어보가 미군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는 사실을 3년간 조사 연구하여 입증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협상에 나선 것이다.

회사에서는 협상력을 높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환수운동을 고민했고 논의 끝에 백악관 청원사이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백악관 청원사이트 ‘We the People'은 게시한 청원에 대해 10만 명이 한 달 안에 서명하면 백악관이 입장을 표명하는 제도이다. 우리는 불법도난당한 문정왕후어보가 LA카운티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니 반환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10만 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한 100인 위원회’를 발족했다. 
모두 다 문정왕후어보가 고국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환수운동을 벌였지만 한 편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추측할 수 있는 환수위원회 불만의 이유는 정부가 무관심해서이거나 미국 측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불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당시 나이 27살이었던 필자가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한 100인 위원회 사무처장’이라는 것이었다.

 

‘20대 여성이 가진 편견과 싸우다’

불만을 가진 ‘못된 아저씨’들의 괴롭힘은 정말 치사할 정도로 쪼잔 했다. 발대식 행사의 사회를 맡은 필자가 못마땅했는지 마이크라도 내려놓으면 쏜살같이 달려와 모든 사람이 듣도록 소리쳤다. ‘이건 준비했냐? 저건 준비했냐?’
행사 도중에 연설자가 연설을 하든 말든 20대 사무처장보다 내가 더 위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별의 별 행동을 다했다. 행사가 끝나고 마련된 식사자리에서도 괴롭힘은 이어졌다. 식탁 맨 끝에 앉아야 한다고 화를 내지 않나. 사무처장이 동행해야하는 자리임에도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어른들이 식사하는 자리이니 방 밖에 나가서 밥을 먹으라고 한 적도 있다. 한밤중에 전화해 자신이 2만 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으니 완벽한 보고서를 올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거나 능력도 없는데 큰 직함을 준 회사에 감사하며 다니라며 필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한 참 바쁜 시간에 와서 밖에 나가서 커피를 사오라고 시킨 후 커피를 가져오면 내가 사주는 거니까 감사하며 마시라는 것까지. 괴롭힘 당한 것을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다. 단순히 ‘20대 여성’이 사무처장이 됐다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예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정왕후어보는 반환결정이 났고 반환결정 축하를 위해 가진 저녁 식사자리에서 모두 한 마디씩 하는 기회가 생겼다. 필자에게 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많은 기회를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문정왕후어보 반환 발표는 정전60주년을 맞아 불법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돌아오게 됐다는 의미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20대 여성은 능력이 없다는 편견과 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대 여성은 커피를 타고 복사만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참으로 기쁩니다.’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은 가장 약한 고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쉽게 공격에 노출된다. 그 공격이 성추행이든 그 외의 것이든 그것을 방어해줄 사회적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만 알면 아는 기업의 회장과 업무 관계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 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자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필자뿐만이 아니었다. 동행한 20대 여성 통역원에게도 시종일관 ‘아가씨’라고 불렀다. 직급이 조금이라도 높은 남자가 20대 여성을 부를 때 그 많고 많은 단어 중에 하필 ‘아가씨’를 고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저 사람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는 임금을 제공했으니 부르는 것도 내 마음이다.’라는 자본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최몽룡 교수가 성희롱한 여기자의 나이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해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윤창중 전 대변인이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20대 여성에 대해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비영리단체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다.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으면 초등학생도 연설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사무처를 이끌어가는 필자에게 ‘사무처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했던 곳이다.
그러나 필자가 근무하는 곳이 당연한 권리를 부여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곳으로 손 뽑힐 뿐 우리사회는 20대 여성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특히나 20대 여성은 사회에 뿌리박힌 악질적 편견과 싸워야 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이러한 고통을 정책과 시스템들이 바로잡아줄 수는 없을까? 나는 그것을 청년 정치인에게 기대해본다. 자신이 직접 경험했고 주변의 친구들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청년들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과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청년 정치인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20대 여성이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더 이상 피해를 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청년 정치인이 열어가길 희망한다. 2016년 4월 13일은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 이 칼럼을 쓰기 전, 혹시 필자가 갖고 있는 편견은 없을까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필자는 20대 여성이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료를 읽다 보니 20대 여성 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편견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진은 그의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에게 교육이 허락된 것은 5천 년 인류 역사에서, 채 1백 년이 되지 않는다.(p.86)”고 했다. 그만큼 기존의 세계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고 로댕의 조각은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고 앵그르의 그림은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라고 표현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p.81)”고도 책에서 말했다.

 

20대 여성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여성들은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존재가 되어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다. 문제는 필자가 아직 20대이기에 필자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칼럼을 썼다. 전체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글에 담을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있다. 칼의 주인인 도오 가츠아키가 살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다.

 

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미사변. 그 당시 사용됐던 범행도구가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충격 받았다. 1895108일 새벽 5시 경복궁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시작된 범행.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거처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불에 태웠다. 그 날에 사용된 칼(살해검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당시 사용했던 칼은 이 아니라 이다. 발음 편의상 이라고 칼럼에 적었다.)은 현재 일본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한 쿠시다 신사에 보관돼있다.

 

히젠도라고 불리는 이 칼은 16세기 에도 시대에 다다요시라는 장인이 만든 명검이다. 제작 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정말로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아주 날카로운 칼이다. 이 칼은 후쿠오카를 지키는 7개의 칼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문필가 츠노다 후사코는 그 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겨놓았는데 그 책(민비암살, 한국어판 제목 명성황후-최후의 새벽)에 따르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이어 달려온 도오 가츠아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한다. 그 때 사용된 칼이 바로 히젠도였던 것이다. 이 칼은 도오 가츠아키가 그 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쿠시다 신사에 맡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후 범행 연루자들은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 형사처벌을 받게 될 줄 알았으나 1896120,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다.

우리는 이 칼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출처 : 연합뉴스 (2010년 히젠도 환수위원회 발대식 모습)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는 명성황후 살해 120번째 기일을 맞아 범행에 사용된 칼을 압수 폐기해줄 것을 일본 외무성에 요청했다. 범행에 사용한 물건은 검찰이 압수해야하는 물건이지 민간이 소유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근대 법치국사 성립 이후 살인에 사용된 흉기를 압수하지 않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닌가.

 

112, 서울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열린다. 이에 맞춰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김민기 국회의원에게 국회에서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부탁하였고 1029일 결의안이 발의됐다.

 

출처 : 국제뉴스 (김민기 국회의원이 히젠도에 대한 처분 촉구 결의안 발의 후 기자회견하는 모습) 

 

이 칼은 미래의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압수하여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한일정상회담에 언급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속히 압수하여 사죄의 의미로 한국에 보내길 바란다.

 

* 시해라는 용어는 같은 나라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행위로 명성황후 시해라고 적으면 조선인이 조선의 왕비를 죽였다는 뜻이 됩니다. 정확한 용어는 ()’이라 해야 하지만 용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기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살해라는 용어를 칼럼에서 사용했습니다.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혜문닷컴(http://blog.naver.com/doorskyj/120092929826)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유난히 덥게 느껴졌던 이번 여름. 출산예정일 전 날까지 출근했던 만삭의 임산부. 출산 전에 회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느냐 너무 바빠서 출산 가방을 출산 예정일 밤 11시에 쌌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경악한다. “애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그랬습니까?” 

작은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모든 준비는 산후조리원에서 한다는 생각으로 겁도 없이 엄마가 될 준비를 대충하고 있었다. 출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생각도 안 해봤다. 돈이 없어서 애를 천천히 낳겠다는 친구들의 말에 ‘에이~ 애는 낳기만 하면 또 어떻게 해결 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산후조리를 2달 만에 끝내고 회사로 복귀해야했기 때문에 내 몸에 좋다는 소리가 들리면 돈을 썼다. 아이가 50일이 지난 지금, 통장에 그득했던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출산비용을 얼마나 썼는가? 


<<출산 한 달 전부터 출산 후 50일까지 소모비용>>


1. 병원비용 : 자연분만, 2박 3일 입원 55만원(방이 없어서 제일 큰 방을 사용했으니 자연분만 후 출산 비용이 더 줄어들 수 있음) 
(- 국민건강보험에서 130만원이나 내줘서 55만원이 나왔다는 걸 영수증을 받아보고 알았다.)

2. 산후조리원 : 2주 조리 270만원 + 조리원 마사지 144만원

3. 한약 : 22만원 * 3번 = 66만원

4. 제대혈 보관비용 : 270만원

5. 스튜디오 계약 : 50일까지 45만원 (돌까지 조금씩 나눠내는 형식)

6. 집으로 오는 산후도우미 한 달 : 175만원

7. 아이 용품 구입 : 젖병, 젖병세정제, 소독 집게, 온도계, 면봉, 코뻥, 속싸개, 겉싸개, 옷, 보온병, 아기이불, 아기침대, 아기흔들의자 등등 약 200만원

8. 기저귀 한 달에 15만원, 분유 한 달에 10만원 

출산 준비부터 출산 후 출근하기 직전까지 계산해보면 1250만원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출산 후 빠른 시일 내에 복직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썼다. 제대혈을 보관하지 안겠다고 했다하더라도 또 아이의 성장 앨범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다하더라도 천만원 가까운 비용이 출산 시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최소 비용으로 아이를 출산할 수도 있다. 출산 후 조리원에 가지 않고 산후도우미도 부르지 않으며 한약 등도 먹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본다고 하면 280만원의 비용이 소모된다고 볼 수 있다. 
에이~ 적게 들여서 280만원만 쓰고 애 낳을 수 있는데 천만 원씩 써서 애 낳는 건 너무 사치 아니야?라고 하는 이들이 있을까 하여 말하고 싶다. “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앞서 말했듯이 아주 작은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 단체의 경우엔 출산 휴가 및 육아 휴직 때 대체 인력을 부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필자가 일하고 있는 문화재 환수 분야는 매우 희귀한 직종이기에(심지어 문화재환수운동가라는 직업은 직업으로 쳐주지 않는다.) 대체 인력을 구하기 힘들다. 필자가 애를 낳고 온 사이 회사는 정말로 멈춰버렸다. 정말로 멈췄기에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다가 회사 행사에 참여하려고 조리원을 뛰쳐나와 일하고 돌아간 적도 있는데 그 날 밤부터 엄청난 젖몸살에 시달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뛰쳐나가기만 했는가, 노트북을 들고 조리원 침대 위에서 급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이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말로 회사가 멈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최대한 빨리 회사로 복직하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후조리원과 산후도우미를 부르고 한약을 먹으며 몸을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결과 32일 만에 회사에 복귀하여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 한 달 쉬지 말고 돈을 적게 들여 출산 한 후 3달은 쉬고 일 나가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빠른 복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출산 후 산모의 몸 상태는 모든 뼈가 열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예전엔 대가족 제도에서 산모와 아기가 보호받았기 때문에 조리원이나 산후도우미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친정 엄마가 와서 붙어있지 않는 이상 산모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남편도 아침 7~8시에 나가서 저녁 7시~10시 사이에 오지 않는가.)


뼈가 모두 열려있는 산모가 남편을 출근시키고 3시간에 한 번 먹여야 하는 아이를, 왜 우는지도 모른 채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아이가 울지 않을 때까지 안고 있어야 하는 아이를 볼 수 있을까. 돈 많이 드니까, 최소비용을 들여 애를 낳고 그런 상태로 아이를 보라하면 누가 애를 많이 낳겠는가. 


아이를 낳고 빠르게 회복하여 한 달여 만에 회사에 복직하기까지 나라에서 해준 것은 병원비 지원 130만원이었다. (임신기간 사용한 고운맘카드 비용 50만원도 있으나 이 칼럼은 출산 한 달 전부터 아이 낳고나서 50일을 계산했기에 제외했다.) 문제는 둘째다. 첫째는 어떻게 어떻게 낳았지만 이 비용을 또 부담하고 애를 낳으라는 건 무리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워킹맘의정보창고” http://cafe.naver.com/ggworkingmom/35301


  저출산시대에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많다하여 아이를 낳기 전에 출산장려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거 웬걸. 첫째는 지원대상에서 찾아볼 수 없고 둘째 역시 없다.(성남시 제외) 셋째는 낳아야 출산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하면 경제적 부담을 이기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최소비용으로 낳으면 되지 않냐 우기면 과연 최소비용으로 아이를 낳은 뒤 둘째, 셋째도 낳을 마음이 생길까.


  아이를 낳아보니 국가가 이것을 지원해주면 애를 좀 더 낳겠다 싶은 것이 생겼다. 바로 “산후조리원과 산후도우미 지원”이다. “산후조리원 2주 + 산후도우미 4주”를 국가가 지원해준다면 나는 둘째를 낳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 생각이 있다. 6주의 시간이면 산모의 몸이 많이 회복된 상태이고 매일매일 빽빽 울던 아이도 안정을 찾고 조금은 잘 자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지나면 산모가 혼자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6주의 시간동안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크다. 그렇기에 이것을 국가가 지원해주면 나는 애를 더 낳을 생각이 있다. 

 

  조리원에서 만난 친구들도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들도 모두 아이를 낳기 전에 사직서를 냈다한다. 내년 초에 결혼하는 가장 친한 친구는 출산비용 부담에 아이 낳는 계획을 미뤘다한다.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 진짜 필요한 시기에 산모를 지원해주는 정책은 언제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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