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569돌을 맞이하여 2015년 10월 5일부터 6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물어봤다. “국보 1호는 숭례문이 적합합니까? 훈민정음 해례본이 적합합니까?”  조사결과 숭례문은 20.0%, 훈민정음 해례본은 64.2%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숭례문보다 국보 1호로 적합하다는 의견이 3배 이상 차이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 아시아경제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적합한지 묻는 질문에는 부적합 44.7%, 적합 34.8%로 나타나 숭례문이 국보 1호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더 높았다. 

1996년에도 이와 비슷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서울대 생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조사결과 국보 1호의 재지정 검토 필요성에 대해 57%가 재지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국보 1호로 재지정 해야 하는 문화재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뽑았다. 같은 해 문화재 관리국이 실시한 여론 조사도 있다. 이 여론조사는 문화재 전문가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했는데 국보 1호 재지정에 대해 반대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그 이유는 국보 번호는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붙인 것이지 가치 순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당시 찬성한다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국보 1호를 교체 한다 가정하고 어떤 문화재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을 그 대안으로 꼽았다.   

1995년부터 “국보 1호는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재지정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10년 단위로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잔재 청산과도 관련이 있다. 1996년에는 광복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였으며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사업이다. 왜 두 정부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에서 해지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재지정하려 했을까?

숭례문은 1934년 조선총독이 보물 1호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양의 교통흐름에 방해된다며 아다치 겐조우가 숭례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군 사령관은 대포를 쏴서 파괴하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 폭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문으로 남겨 놔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침략의 증거로서 숭례문은 살아남았고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들어온 흥인지문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식민통치에 의미 없는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은 철거당했다.
  
그 후 1934년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하여 보물1호는 숭례문, 보물2호는 흥인지문으로 정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일제잔대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이것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은 식민지이기에 국보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보물 번호를 부여했다.)

문화재청은 변명한다. 국보 지정 당시 이 문제가 거론됐지만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시켰기에 일제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는 보물 지정 당시 고적도 지정했는데 당시에 고적 1호로 지정한 문화재는 경주 포석정이었다. 일제는 교묘하게 보물과 고적에 망국의 의미를 담은 문화재를 1호로 지정한 것이다. 보물을 국보로 격상시키며 일제잔재를 털어냈다면 고적 1호는 왜 그대로 지정한 것일까? 숭례문은 일제 잔재가 아니기에 국보 1호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나오는 문화재청의 논리 없는 변명일 뿐이다.

국보 1호, 2호, 3호 등 번호는 문화재 관리상 편의를 위해 붙인 번호이지 가치의 순이 아니라며 국보 1호에 가치를 부여하지 말라는 주장도 있다. 그 문제를 몰라서 국보 1호를 변경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 부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1호’에 붙는 상징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1호가 중요하지 않으면 각종 시험 문제에 왜 국보 1호를 묻고, 문화재청은 왜 국보 1호 숭례문을 복원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인가.

국보 지정 번호제 해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문화재 지정번호제 폐지에 대한 의견은 찬성 57.4%, 반대 25.9%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대로 국보 번호가 해지된다면 우리에게 국보 1호는 영원히 숭례문으로 남는다. 일본도 국보 번호를 폐지하였지만 지금도 일본 국보 1호가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본인 촬영

 

필자가 재직 중인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는 한글날 제569돌을 맞이하여 국보1호 숭례문 해지 및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1호 지정 진정서를 지난 7일 청와대에 제출했고 작년 11월 11일부터 1월 11일까지 받은 12만 명과 함께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드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거나 ‘다른 문화재는 안 중요해서 국보 1호가 아닌가’라는 댓글을 달았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국보 1호를 변경하지 못 하는 게 아니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면 문화재청이 모든 국보 번호를 없애겠다고 검토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국보 1호를 변경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하고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국가의 상징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른 문화재는 안 중요해서 국보 1호가 아닌가라는 이야기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석굴암이 국보 1호가 된다면 국민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까?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유지된다면 통일된 한국에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남과 북, 해외동포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 그것이 만들어진 원리를 적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된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지 않을까?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가 지정한 국보 1호가 아니라 우리 고유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되길 기원해본다.


“유골을 사업으로 보는 단체와 문화재로 보는 지식인. 인간존엄성은 어디로?”

 

2014년 5월의 어느 날.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를 찾았다. 18년째 동학장군의 유골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하여 방문한 것이다. 

동학장군의 유골이 왜 박물관 수장고에서 나타난 것일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유골은 1906년 일본인 사토 마사지로가 진도에서 수집한 것으로 1995년 일본 홋카이도대학의 한 창고에서 발견됐다. 유골은 두개골만 남아있는 상태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머리)'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새겨져있다. 이 유골이 발견되자 훗카이도 대학은 반인권적 행위로 엄청난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여론의 힘에 밀려 1996년 유골을 한국으로 반환했다.

한국으로 반환되면 편안히 잠들 줄 알았던 유골은 동학관련 단체들의 이견으로 안장처를 결정하지 못했고 18년간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돼 왔던 것이다. 2014년 5월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를 찾아간 이유는 동학농민운동 120년을 맞아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본인촬영

동학장군 유골을 만난 후 유골 안장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 했다. 2014년 11월, 황토현 전적지에 동학장군 유골을 안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갑자기 무산됐다. 사적지에 유골을 묻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동학장군 유골이 언제 안장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민감사청구를 했다. 감사청구는 ‘유골이 특정한 이유 없이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은 반인권적 행위이며 형법 제161조에 규정한 사체보관 혹은 유골영득에 저촉, 형사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행위다. 전주역사박물관은 전주시에서 설립한 공공기관이므로 불법 행위를 지속하지 말아야한다. 그렇기에 유골을 지체 없이 화장 혹은 매장절차를 통해 안치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서류접수 후 감사원에서 몇 차례의 전화가 왔다. 그 때마다 ‘이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렀고 2015년 1월, 감사원이 ‘관계기관·단체 등의 이견으로 20년 가까이 지연돼온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장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통보했다. 동학장군 유골의 안장 문제를 담당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업이라고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원의 입장이었다.

이 후 동학장군 유골 안장에 대한 회의가 열렸고 2015년 2월 16일 드디어 유골을 화장한 후 안장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120년 동안 억울하게 떠돌던 동학장군 유골이 드디어 편안히 잠들 수 있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기뻤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너무나 황당한 글을 접하게 됐다. 목포대 이윤선 교수가 자신의 SNS에 작성한 글이 기사화된 내용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일로 확정된 유골 화장을 막는 길이다. 문화재청으로 전화하면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굳이 유골을 화장할 필요가 있나? 이집트의 미이라는 물론 시신을 유리관에 안장하는 사례는 그럼 뭔가? 일본인들에 의해 잘린 목, 쓰인 기록 등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볼 때 이 유골은 적절한 방식으로 보존 안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역사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이 글을 보고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유골을 문화재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유골을 화장하지 않고 적절한 방식으로 보존 안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역사적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잘린 목이 역사적 자료인가? 반인권적으로 유골에 먹 글씨를 쓴 것이 역사적 자료인가? 더 놀라운 대목은 적절한 방식으로 안장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안장한 후 필요하면 잠자던 고인을 깨워 땅에서 꺼낼 것인가. 너무나 소름끼치는 글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댓글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런 무식한 조치를 할 수 있느냐부터 시작해 문화재는 지키는 것인데 화장을 하면 문화재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글까지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인지 황당했다. 

웃긴 것은 유골을 문화재로 생각해 문화재청에 항의하겠다는 글쓴이와 그 외의 사람들이었다. 이 문제의 담당부처는 문화체육관광부인데 엉뚱하게 문화재청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시작부터 경과를 알지 못하고 무엇인 문제인지 알지 못한 글쓴이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감사원의 결정을 글쓴이는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글쓴이는 억울하게 죽은 동학장군의 유골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하여 잠재적 가치라는 것을 소유하려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진출처 : 본인촬영

유골은 소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형법 제161조는 사체보관 혹은 유골영득에 저촉, 형사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행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어떤 연예인이 예쁘다하여 그 사후에 안장된 유골을 꺼내 도망간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범인에게 적용된 법이 바로 형법 161조다. 이것을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사후에 그 인물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가 사체를 안장하지 않고 집에 방치하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120년 전 사망해 안장되지 못한 유골을 껴안고 역사적인 자료라고 말하며 동학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는 많이 배워왔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앞서 동학 단체들의 이견이 있어 유골이 안장되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니 유골안장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타내려는 못된 심보가 단체들의 싸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의 존엄성이 언제까지 돈과 연구목적을 위해 훼손돼야 하는 것일까.   

 


포털 사이트 메인에 핑크색 의자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시는 기존에 엠블럼 스티커만 부착돼 있던 배려석이 크게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배려석에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좌석과 등받이, 바닥까지 '분홍색'으로 연출키로 했다는 것이다.



사진 = 서울시


이 사진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아, 이제 저 자리는 정말 못 앉겠다.”싶었다. 내 생각과는 달리 임신부들은 핑크의자를 매우 반기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저 사진을 보자마자 ‘이제 나는 노약자석에 더는 갈 수 없으며 일반 승객들의 눈치를 더 봐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6개월, 임신부라는 티가 배로 확 나서 누가 봐도 임신부일 때 전철을 타게 됐다. 3호선을 타고 2정거장만 가서 1호선을 갈아타려했기에 의자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전철에 탑승했다. 그런데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홍해 갈라지듯 모든 사람들이 전부, 내가 자신의 앞에 가서 서 있을까 두려운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그 장면을 보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었기에 내 시선을 외면했을 것이다. ‘아.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그 후 일주일 뒤에 똑같은 코스로 전철을 타게 됐다. 이번에 탑승한 전철에서는 한 명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게 나를 쳐다봤다. 젊은이 한 명을 빼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앉아 있던 젊은이는 내가 멀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2정거장을 앉아갔다. 내가 내리는 순간까지 매우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더 불안했다. ‘아. 내가 일어나라고 한 게 아닌데.’


전철을 탈 때마다 걸어 다니는 폭탄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때문에 임신부들은 전철을 타면 일부러 임신부가 앉아 있는 앞에 서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오늘 서서 갈 힘이 있으니 앉아 있고 싶은 분들은 제 눈치 보지마시고 앉아가세요~라는 무언의 뜻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씩씩하게 서서가도 괜찮았던 나에게도 고비가 왔다. 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서서가는 것이 너무도 버겁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노약자석에 엄청난 눈총을 받으며 앉아가기 시작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좀 봐줘야 돼, 양보 이런 게 없어’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비난이 시작됐다. 조용히 말씀하지도 않으신다. 전철 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앉아갔다. 


한 번은 노약자석 3석이 다 비어있어서 봉을 잡고 일어날 수 있는 끝 쪽 의자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어떤 할머니가 나를 세차게 밀친 적이 있었다.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2자리가 남아있는데도 만삭의 임산부를 밀수가 있는지 어이없는 시선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다. “임신했는지 몰랐지, 이 자리 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표정 관리가 너무 안됐다. 끝자리가 뭐라고 임신부를 밀면서까지 저 할머니는 저 자리에 앉으려했을까. 임신부가 아니더라도 젊은이는 밀고 앉아도 된다는 할머니의 생각에 너무 화가 났다. “됐어요, 그냥 앉으세요.”라는 말을 내뱉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 도쿄에서 전철 탈 일이 있었다. 전철을 타고나서 노선도를 확인하기 위해 전철문 위에 걸려있는 노선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계속해서 쳐다봤다. 내가 외국인으로 보이고 길을 모르는거 같아서 자꾸 쳐다보나 했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말씀하셨다. 
“아, 정말 미안합니다. 당신이 임신한 걸 내가 한 번에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 앉아서 가세요.” 그 말을 듣고 괜찮다고 고개를 젓고 아니라고 손을 흔들었는데도 아주머니는 나를 의자에 앉힌 후 최대한 나와 떨어진 곳으로 가서 서 계셨다. 내가 미안해할까봐 아예 멀리 가버린 것이다.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한국에 있는 엄마한테 문자로 그 상황을 전할 정도였다.   


전철을 타면 나오는 안내방송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말라는 소리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타고 있다가 노약자가 오면 양보해달라는 방송이 나온다. 앉아있어도 되는 좌석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에 박카스 CF에서 노약자석에 앉자는 친구의 권유에 “우리자리가 아니잖아”라는 말로 젊은 남성 두명이 서서 가는 장면이 방영됐다. 그 때부터 노약자석은 앉으면 안되는 곳이 되었다. 앉으면 안되는 곳이 되다보니 그 곳은 노약자만 앉을 수 있게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불편하거나 임신부도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노인만 앉아야 된다는 노인들의 전용 좌석이 돼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한 칸당 최대 12석까지 자리가 비어있어도 절대 앉지 말라며 쉴 곳을 빼앗아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핑크색으로 도배된 자리는 일반석 양 끝 좌석이다. 임신부가 노약자석에 앉아도 된다는 생각을 노인에게 심어주기는커녕 이제 임신부는 일반석 끝에만 앉아라라는 뜻으로 노인들이 받아들일까. 그리고 일반석에 앉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눈칫밥을 먹으며 일반석에 못 앉아 가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좌석을 더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어디서 시원한 바람이 내 배 쪽을 향해 불어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쳐다봤더니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미니 선풍기를 손에 쥐고 내 배를 향해 바람을 날리고 있었다. 아이가 왜 그러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쳐다봤더니 더운 여름날에 뱃속에 있는 아이가 더울까봐 바람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양보와 배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받는 사람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나는 내 배가 지치고 힘든 직장인에게 ‘너 당장 일어나서 양보해!’라는 뜻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곳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핑크 의자가 반갑지 않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리도 각박해져서 임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며 핑크색으로 압박해야하는 세상이 온 것일까.


 

“출판사는 책을 내놓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내놓고 판매하는 회사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읽고 좋아하는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라는 책은 2012년도에 출간된 책으로 문화재 환수운동의 교본이라 불린 책이며 출간과 동시에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된 책이기에 내용은 의심할 바 없이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예쁘게 포장해서 독자에게 전달할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책을 잘 만들고자하는 욕심에 가장 먼저 한 것은 시장조사!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을 두 달 이상 꼼꼼히 살펴보았다. 각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열심히 살펴보고 또 살펴보며 무엇이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들었을까 고민해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떤 책이 잘 팔리는지 파악이 안됐다. 역사 분야의 경우 최근 방영되는 사극과 관련된 책이 잘 팔리고 있었다. 책을 파는 것도 결국 운인가? 싶을 정도로 감이 잡히지 않아서 생각했다.

 

‘내가 갖고 싶은 책을 만들자!’

 

내가 갖고 싶은 책을 만들기 위해 처음 한 작업은 그림 의뢰였다. 평소에 알고 있는 그림 잘 그리는 친구가 있어서 이번에도 그림을 의뢰했다. 딱딱하고 날카로운 그림보다 수채화 같고 색연필로 은은하게 그린 느낌의 그림이 책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지라 친구에게 의뢰할 때도 그렇게 그려달라 주문했다.
그림은 챕터마다 한 장씩 넣기로 하고 의뢰했는데 한일협정 당시 돌려받은 문화재 중 가장 어이없는 ‘짚신’, 시민운동을 통해 돌아오게 된 문정왕후 어보,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반환하게 만든 ‘대한제국 국새’, 우리가 돌려줘야 할 문화재인 ‘오타니 컬렉션’, 우리가 꼭 찾아와야 할 문화재로 ‘조선대원수의 투구’와 ‘평양 율리사지석탑’(투구의 경우 그 전에 의뢰한 그림 사용)을 책 속에 넣기로 했다.

 

이유정 작가에게 받은 오타니 컬렉션-공양보살상과 조선대원수 투구 그림

 

삽화를 이용하여 제작한 차례

삽화를 이용하여 제작한 본문

 

본문 수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표지 디자인에 매달렸다. 표지에는 가장 상징적인 것을 넣어야 해서 우리가 찾아와야 할 문화재인 조선대원수 투구와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반환한 대한제국 국새를 배치했었다.


그러나 조선대원수 투구의 경우 그림이 너무 많이 사용됐다는 점도 있고 올해 문정왕후 어보가 반환된다는 소식을 들었기도 해서 표지 그림을 전면 수정했다. 수정 후, 문화재환수의 역사적인 장면이라 평가받은 오바마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대한제국 국새를 반환하는 장면을 띠지로 넣기로 하고 띠지를 제작했다. 그런데 아뿔사! 띠지가 잘 보이려면 표지 그림에 있는 어보 그림이 샥~ 가려지고 띠지를 포기하자니 너무 좋은 사진을 놓치게 되는 것 아닌가! 심각한 회의 끝에 문정왕후 어보가 가려지더라도 오바마 대통령 사진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은 언론사에 돈을 주고 구입했는데 가격은 10만원! 내가 언제 오바마 대통령을 책 광고 모델로 사용해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띠지를 넣기로 결정했다.

 

또, 저자의 힘이랄까, 혼이랄까? 저자의 기를 표지에 넣어보고 싶어서 표지 글씨도 저자에게 직접 써달라고 부탁했다.  

 

1차 표지, 2차 표지, 최종 표지

인쇄소에 넘어가기 전 날 밤엔 어찌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지 마음도 급한데 우르르쾅~하는 천둥소리가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출판 기념회 날짜가 잡힌 채로 출간 작업을 하고 있던 차여서 넘기지 않으면 출판 기념회에 책 없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교정 작업을 마치고 이제 인쇄소에 넘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마음이 헛헛하던지 모른다. 왜 헛헛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헛헛한 마음 한 편으로는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기특해서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책이 인쇄소에서 배달되던 날, 너무 기뻐서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내가 갖고 있는 책 이외에 2천권 가까이 되는 책을 모두 창고로 보냈다. 어떻게든 내가 이고 지고 쌓아서 갖고 있어 보려했지만 2천권 되는 책을 보관하고 또 발송하는데 창고밖에 좋은 곳이 없었다. 친절한 창고 사장님 덕분에 계약도 즐겁게 마치고 대량 주문 발송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출판 판매와 관련해서는 총 판매자와 계약을 해서 1인 출판사가 몸소 뛰기 어려운 서점 및 그 외 출판 영업을 담당해주기로 했다. 2번의 계약을 하며 새로 판 좋은 도장을 꽝꽝! 찍었는데 왠지, 정말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된 출판 기념회

 

출판 기념회는 성황리에 잘 마무리했다. 80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을 대관했는데 아니 글쎄! 좌석이 조기마감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진행하기로 하고 80석의 자리를 더 신청 받았는데 그것마저 행사 일주일 전에 예약이 마감됐다. 출판사 사장으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출판 기념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나서 좀 쉬어볼까 했는데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저자가 인기 팟캐스트 정봉주의 전국구에 나가는 바람에 북콘서트 날짜가 덜컥! 잡혀버렸다. 출연진도 그 유명한 명진스님, 정봉주 그리고 주진우!! 이렇게 화려한 출연진이 있다면 더 즐거운 이벤트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큰맘 먹고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한정판 텀블러를 제작했다. 2015년 6월 13일 예정이었는데 아쉽게도 메르스 때문에 연기된 상태여서 7월에 진행할 예정이다. 7월에는 좀 더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해볼 생각으로 준비중이니 꼭 성공해서 출판 마케팅 성공기 칼럼을 또 써봤으면 한다.

 

매일 아침 하는 일이 알라딘과 예스24의 판매지수를 확인하는 것인데 웬일로 갑자기 출판지수가 팍팍 뛰어서 오늘 아침부터 어깨춤을 추고 있다. 허허허. 나도 드디어 책 판매량에 울고 웃는 출판사 사장이 된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70만 년 전, 여성들은 조개를 열심히 모았다 한다.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기 위해 틈만 나면 조개를 잡으러 갔다는데 그 습관이 지금까지 남아 현대의 여성들도 열심히 무언가를 모으게 됐다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주변의 여성들은 뭔가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우리 엄마는 틈만 나면 화분을 사다 모은다. 베란다가 포화 상태가 돼서 안방, 내 방 심지어 복도에도 화분이 길게 줄서 있지만 그래도 계속 해서 모은다. 나의 점심 짝꿍 주임님은 컵을 모은다. 예쁜 컵을 계속해서 산다. 컵이 너무 많으니까 한 번만 더 사오면 버려버릴 것이라는 부모님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컵을 산다. 
나는 책을 산다. 시작은 단순했다.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일 년에 책 100권 읽기를 목표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시작한 책 읽기 프로젝트는 이제 책 모으기 집착으로 이어져 무조건 산다. 쌓아놓으면 언젠가는 보기 때문에 일단 산다.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하면 책이 팔리는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 말을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출판사 창업을 위해 열심히 읽었던 책! '내 작은 출판사 시작하기'

 

2015년의 어느 날. 1인 출판사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1인 출판사 창업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읽었다. 책을 읽어보니 서류를 등록하는 절차 빼고는 특별하게 어려운 것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책을 읽자마자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그것은 출판사 경력 3년! 지금은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를 꼬시는 일이었다.

 

‘나랑 책 만들지 않을래?’

 

그렇게 후배는 꼼장어 한 접시에 넘어왔다. ‘됐어! 편집하고 전문적인 것은 후배에게 맡기는 거야!’라고 너무도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후배를 만나고 2일 뒤, 출판사 이름을 정했다. 사실 출판사 이름은 어렵지 않게 정했다. 인문/역사서를 주로 출간할 예정이기에 그에 맞게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금강초롱은 우리나라 특산종인데 일제강점기에 ‘하나부사야’라는 이름으로 식물학계에 등재된 슬픈 이야기를 갖고 있는 꽃이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담아보고 알려보자는 마음으로 금강초롱이라고 출판사 이름을 정했다. (필자가 근무하는 문화재제자리찾기의 책을 담당할 것이기에 문화재제자리찾기라고 이름 지을까하다가 혹시, 책 판매가 제자리걸음을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마음에 금강초롱으로 정했다. 사장이 된다는 건 미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었다.)
출판사 이름을 정한 뒤 출판사 이름 등록여부를 검색 시스템을 이용해 알아봤다. 금강초롱은 없었다! 야호! 이 이름은 제가 가져갑니다!

 

그 다음! 신분증과 집문서, 주민등록등본을 들고 시청으로 갔다. 문화관광체육과로 가니 친절한 직원분이 출판사 등록 신청서를 꺼내 작성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내 경우엔 사무실을 두지 않고 ‘무점포 창업’이라 하여 사무실 없이 등록했다.
  신청 후, 며칠 뒤에 전화가 와서 등록증을 찾으러 오라 했는데 바빠서 엄마를 시켰다. 본업이 있는 상태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자리를 2일이나 비울 수 없었다. 등록증을 받을 때 등록면허세를 납부해야하는데 얼마인지 기억나질 않는다. 허허허. 2만원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심부름 값까지 해서 엄마한테 10만원을 덜컥 주고 왔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 엄마. 맛있는 거 사드셨나 모르겠다. 허허허.

 

출판 등록만 하면 끝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야했다! 아이고야. 이 때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사업자 등록이라는 것은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저기 찾아봐도 사무실 임대차 계약서가 있어야 사업자 등록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작은 소호 사무실이라도 임대해야 하는건가 고민이 많았다. 밑져야 본전! 혹시 몰라 세무서에 가서 무점포 창업이라고 했더니 출판 등록증과 신분증만으로 사업자등록이 가능했다. 괜히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이제 등록하는 것은 끝인가 싶지만 하나 더 남았다. 국제도서번호(ISBN)이라는 것을 신청해야하는 것이다! 신청은 인터넷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됐다. 검색만 하면 어떻게 등록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블로그가 많았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처리했다! 아! 이제 진짜 다 된 것인가!

 

금강초롱에서 처음으로 발행한 책은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개정판이었다. 문화재 환수운동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청소년 권장도서로 지정된 좋은 책이었기에 개정판을 내는 것이 사실 많이 부담됐다.

 

편집자 후배와 회의를 하면서 출판을 하는데 정해야 할 것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일단 종이! 종이는 다 같은 종이인 줄 알았는데 종이부터 외계어가 시작됐다. 종이에 그람수가 표시돼 있는 견적서를 보고 ‘뭐? 뭐?’ 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80g이 뭔지 100g이 뭔지 알 수가 출판 경험 없는 내가 알리가 있나! 표지도 다 같은 표지가 아니어서 내가 원하는 질감의 표지를 찾기 힘들었다. 코팅은 어떤지 질감은 어떤지 색깔은 어떤지 등등 일반인의 언어로 설명했더니 내가 원했던 종이가 페스티벌이라는 종이라는 것을 편집자 후배가 알려주어서 그나마 쉽게 진행이 됐다. 아. 종이의 종류! 그러고 보니 판형도 사이즈마다 어떤 느낌인지 감이 안와서 다른 책을 들고 ‘이 사이즈!’라고 외쳤던 것 같다. 또, 책을 인쇄하면 표지와 본문이 따로 인쇄되기 때문에 두 개를 합쳐주는 작업, ‘제책’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으아.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직접 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책은 우여곡절 끝에 어떻게 잘 인쇄됐는지 모르게 인쇄가 돼서 창고로 들어갔고 필요한 수량만큼 받았다. 책이 나온 날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때부터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내 작은 출판사 창업하기라는 책을 읽으며 출판에 대한 지식을 익혔는데 머리말부터 나오는 심오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출판사는 책을 내놓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내놓고 판매하는 회사다!”라는 이야기였다.

 

서점에 책이 간다고 해서 책이 팔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원고라도 알리고 또 알리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 같다. 5월 17일 출간 기념회를 시작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고 2쇄 인쇄를 앞둔 지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은 어떻게 팔아야 할까?”


 

처음 이 뉴스를 접했을 땐 사람들이 왜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둑놈이 훔쳐온 장물은 그에 맞게 처리해야하는데 문화재 환수 문제로 돌려주지 말자는 여론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2013년 초 대마도에서 도둑놈이 훔쳐온 불상 2구는 지금도 대마도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국에 남아있다.

 

출처 : 연합뉴스

 

흔히 ‘대마도 불상’이라 부르는 불상 2구는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일본 중요문화재)과 고려 금동 관세음보살좌상(나가사키현 지정문화재)이다. 두 개의 불상은 처리 방식에서 행보가 갈렸는데 그 이유는 금동 관세음보살좌상에서 ‘고려국 서주 부석사’라고 쓰여 있는 복장 유물(불상 속에 있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고 충남 서산군에 있는 부석사는 불상이 서산 부석사 소유라고 주장하였고 2013년 2월 대전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당시 대전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정확한 유출경로를 따져볼 것’이라는 판결을 냈다. 이 때부터가 문제였던 것 같다. 가처분이 받아들여지자 힘을 얻은 서산 부석사 측이 법률을 오해하고 행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산부석사금동관세음보살좌상제자리봉안위원회(이하 봉안위)는 올해 초 성명을 내고 ①정부가 관세음보살상을 몰수품으로 취급하지 말고 성보로서 예의를 다하고 ②본래 자리인 부석사에 봉안하게 하며 ③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일본 측이 소장경위를 밝히기 전에 환부조치 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솔직히 말해 이 3가지 주장은 모두 논리의 파탄을 안고 있다. ①정부가 관세음보살상을 몰수품으로 취급하지 말고 성보로서 예의를 다하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도둑놈이 훔쳐온 장물을 몰수하여 3개월 이내에 환부 조치해야하는 것이 형사소송법에 맞는 이치다. 이 주장대로라면 정부는 법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법을 넘어 월권행위를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② 본래 자리인 부석사에 봉안하게 하라와 ③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 일본 측이 소장경위를 밝히기 전에 환부 조치하지 말라는 소리도 가처분 신청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주장하는 소리다.

 
가처분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어떠한 물건을 현재 상태로 보전하기 위해 법원에 의뢰하는 행위를 말한다. 봉안위가 가처분을 낸 것은 도둑이 훔쳐온 장물이 국가에 몰수 된 뒤 대마도로 가게 되는 것을 임시적으로 막아놓고 그것이 왜 서산 부석사의 불상인지 법원에서 밝혀야 하는 것이지 가처분을 냈다고 불상을 도난당한 관음사가 불상을 어떻게 취득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만약 봉안위의 말대로 가처분이 진행된다면 ‘우리 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노트북이 내가 몇 년 전에 도난당한 것이니 법원에 가서 당신이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시오’라고 하면 정당하게 노트북을 구입한 사람도 무조건 법원에 나가서 이 노트북이 내 것임을 증명해야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봉안위는 사유재산제도에 대해서 철저히 무시하고 있으며 법률 해석을 자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가처분 신청은 신청을 낸지 3년 뒤에 풀리게 돼 있다. 2016년 2월이면 가처분이 풀린다. 봉안위는 하루빨리 변론기일 또는 심문 기일을 열어 불상이 왜 부석사 소유인지 밝혀내야한다. 이것을 망각한 채 일본보고 따져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서 ①번의 주장처럼 법률을 무시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의 경우엔 복장유물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것이 우리 것이라 주장하는 한국에 학자는 대마도에서 ‘신공왕후가 한반도에서 가져갔다’라고 기록된 책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더 위험한 주장이다. 신공왕후가 누구인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신공왕후의 임나 정벌을 이야기하는 사람 아닌가? 불상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는 꼴이 된 셈이다. 이것이 학자로서 할 주장인가?

 

출처 : 본인촬영

 

필자는 비영리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라는 곳에서 4년째 근무 중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47책, 일본 궁내청(이른바 천황궁)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 1205책, LA카운티박물관으로부터 문정왕후어보 반환결정을 이끌어냈으며 2014년 4월 25일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대한제국 국새 및 조선왕실인장 9점을 반환하게 한 단체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많이 욕을 들었던 것이 동조여래입상을 일본으로 반환하라고 이야기 했을 때였는데 7시간 만에 4800개의 악성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다. 
  
당시 기자회견은 강제징용 전문 최봉태 변호사,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문화재환수운동가 혜문이 가졌다.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워 성과를 내본 세 사람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마도 불상을 돌려주라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문화재환수는 정확하게 약탈된 증거를 갖고 진행해야한다. 문화재환수는 식민지 시기나 6.25전쟁 당시 부당하게 약탈당한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옴으로써 우리가 당시에 잃어버린 민족의 정신을 찾는 운동이다.


대마도 불상을 보면 일단 부당하게 반출됐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모두 추론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추론하여 떼쓰게 되면 어떤 문화재가 어떤 의미를 갖고 돌아 올 수 있을까? 떼써서 돌려달라는 것은 그저 그 문화재가 탐이 나서 하는 행위가 아닐까?
  
대마도 불상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최근 자신의 SNS에 대마도 불상은 우리 것이라며 쓴 글을 보고 필자는 혀를 끌끌 찰 수밖에 없었다. 대마도 불상은 우리 것이니 대마도 탐방을 가지 않겠냐며 여행상품을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 특히 문화재 문제는 민족 감정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 감정을 갖고 이 사건에 임한다면 앞으로 일본과의 모든 문화재 반환 운동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강제징용 문제, 문화재 문제는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되면 생각해보겠다.’라는 일본인의 핑계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판단 실수로 일본에게 너무나 좋은 회피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이로써 모든 과거사 문제가 대마도 불상 문제 때문에 중단된 지 벌써 2년 반이 돼간다. 
  
이제라도 가짜 문화재 환수운동가들의 거짓 이야기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해야하지 않을까?

 


2014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훈민정음 국보1호 지정을 위한 10만인 서명운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동안 한글관련 단체가 같은 주제로 서명운동을 벌였으나 번번이 실패한 운동에 문화재 관련 단체가 도전한 것이다. 문화재 관련 단체가 주장한 내용은 ‘숭례문이 국보1호로써 자격이 있느냐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1996년 김영삼 정권, 2005년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했던 국보1호 숭례문과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호를 교체하려 했던 정책을 다시 추진하자.’였다. 


서명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진행됐는데 국민의 호응을 얻어 서명운동 마감일인 2015년 1월 11일까지 총 11만 8405명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종료됐다.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학생, 주부 및 정치인까지 많은 이들이 호응한 서명운동으로 조명 받았다.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서명운동 종료 당일 저녁에 문화재청은 보도 자료를 배포해 국보 및 보물 등의 번호를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국가문화재 관리 체계 재조정을 위한 기본 연구’ 용역을 진행하고 국보 번호를 폐지하는 것을 전제로 여러 가지 안을 마련한 뒤 공청회 및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안을 결정한다고 한다.

 


서명은 국보1호 숭례문과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호를 바꿔달라는 운동이었는데 문화재청은 왜 모든 국보 번호를 폐지하겠다고 나선 것일까?


문화재청은 국보 1호는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이지, 국보의 가치가 으뜸이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보1호와 국보70호의 번호를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화재청이 말하는 변명에 불가하다.


국보 1호가 무엇인지는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다. 그 이유는 교과서에 수록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보 1호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는 외국인이 한국에 귀화할 때 보는 시험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문화재 해설 및 관광 관련 자격시험 문제 등 역사와 관련된 시험에 단골문제로 출제되고 있다. 또한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언론은 ‘국보1호’가 불에 탔다고 집중 조명했으며 2013년 숭례문 복원 당시 문화재청에서 ‘국보1호’를 복원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미 국보1호는 대한민국 문화재의 대표자리를 부여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문화재청은 말한다.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를 국민들이 문화재 중요도 순위로 오해하고 있어서 생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화재청이 매번 말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당장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국보2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답하지 못한다. 국보를 문화재 중요도 순서로 인식했다면 국보 5호까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국보1호 숭례문을 국민이 기억하는 이유는 1호의 상징성 때문에 그것이 문화재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표상이 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의 논리적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은 1996년과 2005년. 정부가 국보1호와 국보 70호의 번호 교체문제를 진행했다는 것으로 이미 드러나 있다. 국보1호의 상징성은 이미 예전부터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던 사안인 것이다.


두 차례 실패한 정책 이야기가 2015년,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2015년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이기에 일제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와 최근 복원된 숭례문이 부실과 비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국보 자격 박탈문제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1934년 조선총독이 보물1호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양의 교통흐름에 방해된다며 아다치 겐조우가 숭례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군 사령관은 대포로 쏴서 파괴하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 폭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문이므로 남겨 놔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침략의 증거로서 숭례문은 살아남았고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들어온 흥인지문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식민통치에 의미 없는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은 철거당했다.


그 후 1934년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하여 보물1호는 숭례문, 보물2호는 흥인지문으로 정했다. 국보1호 숭례문이 일제잔재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이것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은 식민지이기에 국보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보물 번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또 변명한다. 국보지정 당시 이 문제가 거론됐지만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시켰기에 일제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는 보물 지정 당시 고적도 지정했는데 당시에 고적 1호로 지정한 문화재는 경주 포석정이었다. 일제는 교묘하게 보물과 고적에 망국의 의미를 담은 문화재를 1호로 지정한 것이다. 보물을 국보로 격상시키며 일제잔재를 털어냈다면 고적1호는 왜 그대로 지정한 것일까? 숭례문은 일제잔재가 아니기에 국보1호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나오는 문화재청의 논리 없는 변명일 뿐이다. 


문화재계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문화재와 관련하여 일하고 있는 지식인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집착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행정관리 번호일 뿐인데 잘 모르는 국민들이 오해한 것이다라며 이야기 할 때마다 그들은 왜 상징과 표상은 이해하지 못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현재 국보에 번호를 부여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북한 밖에 없다. 해외사례 중 국보에 번호를 부여하는 경우가 없고 일본도 최근에 없앴으니 우리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필자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쉽고 간편한 방법을 갖고 있다. 바로 문화재 국보번호 시스템이다. 이러한 좋은 상징 제도를 왜 없애려하는가.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문화재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하겠다며 국민들이 지지하는데 번번이 문화재 위원회만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상징과 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재위원들이 있는 한, 국민의 여론을 무시한 채 고집과 아집으로 버티는 문화재위원들이 있는 한, 문화재계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다. 또한 대한민국을 상징할 수 있는 좋은 체제도 잃어버릴 것이다.


 

 

 

일본 가마쿠라현 가마쿠라시에는 ‘고토쿠인(高德院)’이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는 조선 궁궐에 건물로 추정되는 ‘관월당(觀月堂)’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 왕실의 건물이 일본에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왕실은 1924년 조선 척식은행에 ‘관월당’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 이 후 조선척식은행은 재정이 어려워졌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 스기노 키세이라는 일본의 자산가에게 돈을 빌리며 파산을 면하는데 이 때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관월당을 넘겨준다. 답례품이 된 관월당은 스기노 키세이의 별장으로 옮겨졌다가 고토쿠인이라는 사찰에 기증되어 현재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며칠 전 관월당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가마쿠라에 있는 고토쿠인을 찾았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높이 13.4m의 가마쿠라 대불을 지나자 관월당을 만날 수 있었다. 
관월당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환수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원형에서 너무 많이 변형됐다. 관월당의 옆면은 돌판으로 메워졌고 지붕의 모양도 전통 궁궐양식과는 달랐다. 의도된 변형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일본식 건물 같아 보이는 관월당을 보고 더 이상의 자료조사 및 연구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데 찾아와야하지 않겠느냐 묻는다면 그것을 찾아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찾고 싶지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문화재 환수운동은 강제로 빼앗겼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와 혼을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찾는 작업이다. 해방 100년을 맞이하는 해에 맞춰 진행된 문화재 환수운동은 식민지 사과의 의미로 당시 일본 칸 나오토 총리의 담화를 통해 『조선왕실의궤』를 반환하게 하였고 정전60주년을 맞는 해에 진행된 문화재 환수운동은 오바마 대통령이 미군에 의해 약탈당한 조선왕실의 인장 9점을 정상회담 때 직접 반환하게 하였다. 
이처럼 문화재 환수운동은 그 의미가 분명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사건이다. 명성황후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궐 안에 세운 법당으로 추정하고 있는 관월당을 환수해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가 내린 결론이다. 

 

환수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두 번째 이유는 관월당을 사들이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데 있다. 문화재환수운동은 잃어버린 민족정신을 찾는 운동이기에 절대로 문화재를 사들이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문화재를 사서 국내에 가져오는 것이 문화재 환수운동이라면 국내 최고의 문화재 환수운동가는 리움박물관의 소유주 이건희 회장일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작년에 문화재 경매를 담당하는 회사에서 ‘우리는 문화재 환수를 위해 문화재 경매를 실시한다.’라는 마케팅을 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은 엄연히 구분해야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화재 환수에 돈을 쓰지 않는 것도 비현실적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문화재환수를 위해 힘쓴다는 문화재청 산하 재단 이사장이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을 구분 못하는데 일반 국민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문화재계에 있는 지식인들이 문화재 환수운동을 ‘문화재’에만 초점을 두어 진행하기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환수의 문제로 다가서지 않고 구입을 해서라도 ‘관월당’을 찾아오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월당 구입 및 이사 비용과 국내에 들어왔을 때 활용가치를 따져보겠다.
비용 문제부터 살펴보자면 일단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관월당’ 건물의 가격보다 이사비용이 최소 3배에서 10배 이상 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월당을 돈을 주고라도 사와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국내 기업이 그 정도의 기부금은 내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기업이 비용대비 효과가 적은 일에 발벗고 나서겠는가.  
문제는 또 있다. 비싼 비용을 내고서라도 찾아온다한들 궁궐 건물로 ‘추정’되는 건물이기에 한국에 와도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관월당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관월당을 환수해야한다고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자료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남이 한 이야기를 듣고 앵무새처럼 언론에 나와 떠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하지 않고 환수문제를 거론한 지식인들의 뻔뻔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담보로 잡혔던 물건을 다짜고짜 빼앗긴 문화재라고 주장하던 자칭 지식인들이 왜 그런 오류를 범했는지 알 수 있었다. 1차 자료에 대한 조사 없는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러한 가짜 지식인들의 거짓말에 관월당을 환수해야한다고 방송사 프로그램까지 취재를 하여 보도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렇다면 관월당의 활용가치는 얼마나 될까? 경복궁으로 돌아온 자선당 유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찾아와야한다며 가져왔던 경복궁 자선당 유구는 훼손이 심해 용이 불가능하여 자선당 복원당시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 그 이후 현재까지 경복궁 북쪽 건청궁 뒤뜰에 방치돼 있다. 
자선당 유구를 활용하기 위해 복원에 사용은 못했지만 옆에라도 둬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여론에 경복궁 북쪽 건청궁에서 경복궁 동쪽 자선당까지 이동하는 안이 제시 된 적도 있다. 그러나 건청궁에서 자선당 앞으로 이전하는 비용이 전문가 추산 1억원이라는 결론이 났고 이전 안은 폐기됐다. 비용 문제로 인해 앞으로도 상당기간 자선당 유구는 건청궁 뒤뜰에 자리할 예정이다. 자선당 유구가 경복궁 안으로 돌아올 당시 삼성문화재단은 상당한 비용을 내고 자선당 유구 이전을 도왔다. 그러나 활용가치가 없는 문화재를 환수하는데 헛돈을 썼다며 아직까지도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상태다. 
앞선 사례를 비추어 볼 때 관월당의 국내 활용도가 가늠될 것이다. 자선당 유구의 경우 돌아올 자리라도 분명했지만 관월당은 돌아온다고 해도 어디로 돌려놔야할지 알 수 없는 문화재다. 그렇기에 국내에 들어와도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관월당 문제를 조사하면서 필자는 사실 한국의 지식인에 대해 무척이나 많이 실망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말로만 하는 지식인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신중을 기해야하는 환수 문화재 선정 작업부터 오류가 나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식인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재 환수문제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무턱대고 환수작업을 시작하니 문화재 환수와 문화재 구입을 혼동하는 지식이들이 환수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앞으로 이런 지식인은 건전한 사회가 거르기를 소망해본다.

 

* 관월당은 2010년 국내로 들어올 뻔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협상이 파기됐다고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