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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즈음 진짜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을까- 충무공 장검 특별열람”“언제 즈음 진짜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을까- 충무공 장검 특별열람”

Posted at 2016.09.22 20:05 | Posted in [오늘 이야기]


 

2016년 9월 19일 오전 11시. 가을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았다.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을 특별열람하기 위해서다. 

 

충무공 장검은 1594년 4월에 제작되어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온 쌍칼로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는 명문이 칼에 새겨져있다. 칼에 새겨져있는 명문도 유명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2m에 가까운 칼의 길이다. 이 길이는 ‘이순신 천하장사설’을 유포하게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힘이 세서 2m나 되는 칼을 뽑아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칼은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 사용하지 않고 의장용으로 사용했다 알려져 있다.

 

장검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도(刀)’인데 왜 ‘검(劒)’으로 통칭하는지 지적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장검(長劒)’으로 명기돼 있어서 검으로 불리게 됐다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와 ‘검’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지 않았기에 ‘검’으로 표현된 것 같다.

  
이 날 많고 많은 이순신 장군의 유물 중에 충무공 장검만 열람 신청한 이유는 혈조(血漕 : 칼날에 낸 흠)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가 잘 지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재질분석과 보존처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재질분석과정에서 근현대 안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위말해 ‘페인트’칠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이충무공 장검의 합성수지 도료를 제거”하겠다고 밝히며 “이충무공 장검의 혈조 부위에 칠해진 합성수지 도료(페인트)는 1969~1970년 당시 기존의 퇴락한 안료를 제거하고, 합성수지 도료를 도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혈조에 붉은색 페인트를 제거하기 전 충무공 장검의 모습(사진출처 : 본인촬영)

 

열람 시간에 맞춰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있는 사무동에 들어갔더니 담당 학예사가 얼굴을 본 척 만척하며 “저기 앉으세요. 아. 너무 바빠서”라는 말과 함께 나가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디에 앉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방문자들은 모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멀뚱멀뚱 서 있자 이번에는 담당 과장님이 나와서 수장고 쪽으로 안내해주셨다. 

 

특별열람이 처음이 아닌 필자는 사실 무척이나 당황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가면 일단 문화재를 볼 때 방해가 될 짐을 내려놓을 장소를 이야기해준다. 방문자들이 가져온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나면 담당자가 공식문서에 적혀있는 방문자 명단과 방문한 사람들의 신분증을 대조한다. 모든 사람의 신분 확인이 완료되면 문화재 사진 촬영 및 사진 활용 규정에 관해 설명을 듣고 관련 규정 준수 서약서에 서명한다. 그 후, 가져갈 수 있는 물건만 손에 들고 (메모할 종이와 연필을 박물관에서 따로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간다. 통상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 열람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왜 그런 과정이 없는지 매우 의아했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은 수장고에 들어갔을 때다. 문화재에 대한 특별열람 시에는 학예사가 장갑과 마스크를 같이 준비해놓는다. 그러나 이번 열람에는 마스크밖에 준비해놓지 않았다. 심지어 칼은 보여주고 칼집은 수장고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열람 신청을 한 대표자는 보물 326호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 15대 종부였다. 소유주가 자신의 물건을 보러 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만 보라며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필자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별열람의 경우, 문화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후 그동안 몰랐던 사실은 없는지, 알고 있던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갖게 된다. 

 

미국 서부 최대 박물관인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문정왕후 어보 특별 열람을 할 때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문화재를 살펴보다가 어보 하단 측면에 ‘육실 대왕대비(六室大王大妃)’라고 붓글씨로 쓴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일본 천리대학교 박물관 특별 열람 시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화살통을 살펴보다가 박물관 측도 모르는 화살을 발견하기도 했다. 

 

특별열람은 이렇듯 새로운 사실은 없는지 문화재를 꼼꼼히 관찰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특별열람 신청을 하여 문화재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상자 속에서 꺼내서 조심스레 봐야 하는데 이날은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그저 눈으로 보게만 했다. 책상 위 상자 속에 있는 칼을 봐야 하니 도무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휴대폰 카메라로 근접 촬영을 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학예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 사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촬영과 관련된 사항은 앞서 말했듯 유물을 보기에 앞서 해당 관의 규정에 다 다르기 때문에 미리 서약서를 써야한다. 혹시라도 미리 요청해야 한다면 특별열람 신청 시에 알려준다.

 

천리대학교에 경우 언론에만 노출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기에 촬영 후에도 당시 특별 열람한 활과 화살 및 화살통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LA 카운티박물관의 경우에는 아예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눈으로 보고 중요한 부분을 직접 스케치해서 나왔다.   

 

사진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필자가 특별열람을 간 것이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롭게 SNS에 올리지 말라는 것인지 언론에 공개하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알려주지 않아 충무공 장검의 소유자에게 허락을 받아 당일 촬영한 사진을 공개한다. (휴대폰 사진의 사적인 이용은 안 된다며 DSLR 카메라로 찍는 것은 괜찮다고 했는데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함이 사적인 목적이 아니므로 모두 공개하고자 한다.)

 

 


▲ 장검 확대 촬영(사진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이날 장검을 열람하며 발견한 것은 장검에 붉은 페인트가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검의 혈조 부분에는 이상한 무늬로 상처가 나 있는데 그사이에 스며들어 제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충사 측에서 보존처리를 맡겼던 연구소에 질의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제거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 안료가 확인될 경우 원래의 전통 안료로 칠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기존의 안료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고증을 통하여 원래의 전통 안료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합성수지도료를 제거한 후 보존처리 하기로 확정하였다.”며 충무공 장검의 붉은 칠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통안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육안으로 확인했던 저 붉은 안료가 붉은 페인트가 다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라면 현대의 보존처리 기술로도 지울 수 없는 혈조의 붉은 칠이 1969년~1970년 사이에 보강을 위해 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인되지 않은 걸까?


‘보강’이라는 말은 보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보강했다면 남아있어야 할 전통 안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은 왜 ‘복원’이 아닌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붉은 칠이 정말 돼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붉은 칠이 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면 첫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도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과 두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에서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 1969년 발간된 현충사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에 희미하게 관찰되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자.

 

 

첫 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 혈조가 칠해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의견이다. 다른 나라에서 발견되는 칼 혈조에 붉은 칠이 발견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충무공 장검 혈조에 반드시 붉은 칠이 돼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인과관계가 맞지 않다. 

 

두 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을 살펴보자. 혈조에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는 사진 위쪽 칼의 사진만 인용하여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이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쪽 칼은 칼날과 혈조 내의 색이 같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1928년 촬영된 충무공 장검(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세 번째, 1969년 발간된 현충사 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이다. (필자는 이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관찰되는 사진이 정확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만약 혈조에 무엇인가 칠해진 흔적이 희미하게 관찰된 사진이 컬러였다면 문화재청이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다는 근거로 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2014년에 만든 충무공 장검 도록에는 혈조내의 붉은 칠에 대해 언급하면서 1969년에 도록을 만들면서 혈조 내의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는 설명은 왜 발견되지 않은 걸까? 국내에 남아있는 칼 중 혈조 내에 붉은 칠이 돼 있어 유명한 칼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빠졌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다는 설명이 발견됐다면 문화재청은 왜 2014년 국민신문고 답변에서 “현재 장검의 칼날 혈조와 물결문양에 도포된 붉은색 안료의 도포 시점은 관련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확인이 어렵다. 1594년 제작 당시부터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이 어렵다.”라는 답변을 한 것일까?  

 

혈조가 칠해졌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사진 위쪽 칼의 대비를 이야기하는데 아래쪽 칼은 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1928년의 사진만을 육안으로만 확인하고 대비가 나타났다고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사진출처 :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

 

 

2014년에 발행한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에 보면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를 보면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혈조 부분이 흑백사진으로 보면 마지 뭔가가 칠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조와 칼날에 색이 균일하게 보이는 충무공 장검 사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 흑백사진만 보고 혈조에 칠이 돼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매듭지어 질 것 같지 않다. 모두 추측성 근거로만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통안료로 붉은 칠이 돼있었다고 한 들 그것을 붉은 페인트로 복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붉은 페인트 칠을 제거한 것은 420년 전 칼에 현대식 페인트를 칠했기때문이다. 칼에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 사실을 잊고 감정소모만 하고 있는 듯 하다.

 

 

▲  충무공 장검 (사진출처 : 본인촬영)

 

 

충무공 장검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칼날이 달의 표면처럼 오돌토돌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필자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박물관에 전시된 진검을 살펴봤지만 이렇게 칼이 상한 경우는 없었다. 420여 년 전에 만들어져서 종가에 내려온 칼이어서 그렇다고 넘어가야 할까. 그렇다면 500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칼들은 어째서 볼 때마다 깨끗한 모습으로 흰색 검광을 드러내며 반짝거리는 것일까. 그 칼들도 박물관에 전시되기 전에는 무가의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

 

특별열람을 마치고 현충사 직원들과 장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 김에 확인해야 할 문서를 요청했고 문서를 가져온 학예사의 말에서 왜 특별열람 때 그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장검 관련 문서를 요청한 사람이 장검의 소유주인 종부가 아니라 대리인이었고 국민 신문고에 질의 후 추가 질의를 이메일로 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해있었다.

 

  “제가 사실 그거 때문에 빈정이 상해서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공무원은 처음이었다. 
특별열람을 하기 전 나라를 구한 칼을 본다는 생각에 설렜는데 막상 칼을 보고 나니 칼의 상태에 대한 실망과 칼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에 대한 존중이 보이지 않아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 장군을 만나볼 수가 없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당에 걸어놓은 영정은 복제품이다. 왜 그런지 현충사 과장님께 여쭤보니 빛 때문에 그림 색이 발할까 봐 수장고에 넣어 두었다 한다. 사찰에 기도하러 갔는데 대웅전에 복제된 부처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참배 하러 갔는데 복제품에 참배하는 꼴이다. 그걸 아는 참배객은 없다. 다들 속고 있다.

 

영정의 빛이 바란다는데 당연히 보호해야하는거 아니냐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빛 때문에 손상되면 안 되니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고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도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는 것 아닌가.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기념관에 가도 이순신 장군의 유물을 한 점도 만날 수 없다. 전시관에 있는 모든 유물이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전문가가 아니면 다가갈 수도 없이 돼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반인들이 유리관 밖에서라도 접근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수장고에 넣어버린 것은 아닐까.

 


충무공 장검의 페인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이 맞다며 잘못을 지적하는 이에게 가혹하게 대한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이 하는 주장에는 모두 “추측”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충무공 장검은 오늘도 추측에 포장된 채로 수장고에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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