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2일 오전 9시 57분. 약속시간을 3분 남겨두고 도시샤 중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있는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立志館’이라 써진 건물로 들어가니 흰색 마스크를 한 선생님이 대기실로 안내해줬다. 일본인의 초상화 여러 점 걸려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니 오늘 우리를 안내해줄 소노다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과 간단하게 인사한 후 중학교 건물을 나와 5분 정도를 걸어 도시샤 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표본관으로 이동했다. 표본관 문은 5m는 돼 보이는 매우 긴 철제문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우리를 맞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학창시절 과학실에서나 보던 상자 속에 별에 별 동물 박제가 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간 일행이 문 바로 앞에 있는 유리 상자를 보며 “타조다!”라고 외쳤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간 필자는 실내화를 신기 위해 허리 숙여 오른쪽 신발 정리함에 손을 뻗었다. 그 때였다. 신발장에서 10걸음 떨어져 있는 유리 상자 속에 낯익은 꼬리와 뒷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조선 호랑이였다.

 

 
△ 조선호랑이의 뒷다리와 꼬리(좌), 조선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우)(사진출처 : 본인촬영)

박제된 호랑이 앞으로 가자마자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가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노다 선생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국에서는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 남한에서 볼 수 없다며 절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나무로 된 틀과 유리 너머로 겨우 보이는 호랑이를 담기 위해 바삐 움직이자 문을 열고 편히 봐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이 들렸다. 유리문을 열자 더 생생하게 조선 호랑이가 눈으로 들어왔다. ‘조선’에서 왔다고 쓰여 있는 큰 호랑이 앞에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하게 기재돼있지 않은 새끼 호랑이가 가엽게 보였다.

 

 

△ 1917년 함경도 신창에서 조선 호랑이 두 마리를 포획한 야마모토(가운데 서있는 사람).

사진속의 호랑이중 한 마리는 자신의 모교인 도지샤 대학(좌측 호랑이)에 기증하고,

다른 한마리는 호랑이는 당시 일본 황태자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사진출처 : 정호기)

도시샤 중학교에서 관리 중인 호랑이 박제는 일명 ‘야마모토 정호군’이 잡아온 호랑이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1917년 11월에서 12월까지 약 한 달 동안 조선에서 한국 호랑이를 사냥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害獸驅除: 해로운 동물을 퇴치하는 사업)’를 표면에 내세워 호랑이 사냥을 했다. 사냥 팀을 8개로 조직하여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금강산, 전라남도 등에서 사냥을 벌였던 그는 어떤 생각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일까.

일본에 갔을 때 사람들이 ‘이번엔 왜 일본에 왔냐’고 물었다. 조선 호랑이 박제를 보러 왔다고 대답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아십니까?’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일본에서는 그의 조선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임진왜란에 대해 배울 때 하나의 챕터로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호랑이 사냥’이 나온다고 한다.

 

그 내용은 죠잔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아끼던 시동 고즈키 사젠(上月左膳)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복수로 호랑이를 사냥한다는 내용이었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2014), 『정호기』, 서울 : 에이도스, p.22

 


일본에는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호랑이를 사냥한다는 것은 조선을 점령했다는 상징이었을 것이고 일본에서 유명했던 가토 기요마사 이야기처럼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도 그 상징을 잡아 보려한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말한다. 조선 초기부터 계속해서 호랑이 포획정책이 이어졌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멸절됐다는 것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1936년 경성사범학교의 생물 교사인 우에다 츠네카즈가 쓴 글을 보면 답이 나온다.

 

“옛날 조선에는 호랑이가 매우 많았고 어딜 가나 사람과 가축에 피해를 주는 동물로, 호랑이를 죽여서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지방 관사의 중요한 행정업무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북쪽 오지가 아닌 한, 어느 산야를 돌아다녀도 호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는 피해를 방지하자는 목적 외에, 고가의 모피와 뼈를 얻기 위해 연이어 호랑이를 잡았기 때문이다. 뼈는 약재가 되고 모피와 거의 비슷한 가격대를 형성한다. 깔개로 쓰는 호랑이 모피는 엄청난 고가여서 경성에서는 한 장에 시가로 1,000엔에서 15,000엔이나 한다.
지금은 호랑이가 자주 나오는 곳이 함경북도 백두산 자락의 무산과 회령 사이라 하지만, 그곳조차도 작년(1935년)에는 겨우 다섯 마리만 포획했다고 들었다. 이런 상태라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의 호랑이는 멸종할 것이 확실하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2014), 『정호기』, 서울 : 에이도스, p.46-47

 

또 다른 이는 호랑이를 쏜 것은 조선인 포수였다고 말한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일본이 주장하는 논리와 조선 호랑이가 멸절된 것을 조선인의 과실로 주장하는 논리가 어쩜 이렇게 닮아 있을까.
일본 제국주의가 포수를 고용하여 멸절시킬 의도로 사냥했기 때문에 호랑이가 멸절된 것이지 단지 조선인 포수가 호랑이를 쐈다고 호랑이가 멸절된 것인가. 그렇다면 조선 초기부터 호랑이 조선인이 호랑이 사냥을 했을 텐데 왜 그 땐 멸절하지 않은 것인가. 같은 시기 조선의 사슴과 조선의 표범 등 다른 동물들이 멸절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시샤 중학교를 나오기 전, 백두대간 수목원 같은 기관에 호랑이 박제를 기증해주기를 요청한다며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 준비한 요청서를 전달하고 왔다. 요청서를 받은 소노다 선생님은 일행이 학교를 떠나자마자 도시샤 학교법인 이사장실로 전달했다 한다.
이 사실은 국내 언론보다 일본 언론에서 더 많이 다뤘고 이슈가 됐는데 댓글이 4천개 이상 달린 기사도 눈에 보였다. 일본인들은 호랑이를 줘야한다, 말아야 한다 등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올해는 야마모토 정호군이 호랑이를 잡아간 지 99년이 되는 해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호랑이가 잡혀간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도시샤에 있는 호랑이 박제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해부터 호랑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야마모토가 잡아간 호랑이는 도시샤에 있는 것 말고도 한 마리가 더 있는데 당시 황태자에게 기증했다 한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이 호랑이의 행방을 추적중이다.)

 

 

△(왼쪽부터) 도시샤 표본관 소장 조선 호랑이,

교토의 오타니 고등학교에 보관돼 있다가 2005년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 기증된 조선 호랑이,

도쿄과학박물관 소장 호랑이(사진출처 : 본인촬영)

 

지난 2월 22일부터 3일간 조선호랑이의 행방을 추적하기위해 일본 교토와 도쿄에 있는 호랑이들을 조사했다. 박제라고 해도 호랑이 옆에 서면 어찌나 무섭던지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호랑이와 같은 찍은 사진에 잔뜩 겁을 먹은 필자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 옆에 너무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망령은 조선의 무엇을 앗아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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