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개헌에 대한 논의는 정치 문화나 시민 의식 등 사회 환경적 요인의 변화를 모색하는 방안과는 절된 채, 제도만능주의에 입각하여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와 같은 ‘통치구조의 외형적 변화’에만 과도하게 집착해왔다. 또한 개헌에 대한 주장을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세력 결집을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복기해보면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권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도적 개헌을 논의하기에 앞서 합의 문화, 당론에 대한 의원들의 자율성 보장 등과 같은 성숙한 정치 문화가 전제되지 않는다거나 헌법 조항이 대중의 인식 변화와 조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통치 구조의 외연이 바뀐들, 실질적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필자는 개헌을 통한 통치 구조의 개편 자체에 대해 부정적 이라기보다는 기존 대통령제가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든 여러 제도와의 부조화가 먼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여 민주주의를 제고하기 위해 통치 구조의 개편 같은 하향식 개헌도 필요하지만 선거제, 경제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기본권 강화, 헌법 재판소의 권한 제한 등 ‘상향식 개헌’의 당위성 역시 주장하는 바, 이에 대한 개헌 논의도 추후 전개할 것이다.

 

대통령제의 성공 가능성은 중임제, 결선투표, 총선대선의 동시선거에 달려있어

 

혹자는 현행 대통령제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대통령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보다는 ‘실정에 따른 책임성’을 임기 내에 묻지 못한다는 점이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제도적 원인은 5년 단임제에 있다. 국정 전반을 파악하는 데 2년이 걸리고 제대로 일 좀 해보려면 어느덧 레임덕에 빠져있다. 임기 내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여론이 빗발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 수사를 시도하면 정치 보복으로 인식한 구 세력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등 정권 초마다 이전 정권에 대한 심판을 하니 마니로 온 나라가 소모적 정쟁에 휩싸인다.

 

“뭐? 그 분이 4년을 더 할 수도 있다고?”

헌법 제128조 2항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중임제로 개헌을 하더라도 박 대통령을 위한 ‘노래방 추가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이와는 달리 4년 중임제는 중간 선거로 재신임을 물을 수 있으니 정치의 책임성이 제고되고 대통령이 좀 더 신중한 국정 운영을 하게 된다. 또한 중간 선거에서 승리하면 최대 8년까지 집권가능 하므로 대통령은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책을 남발해 차기 정권에 부담을 주기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정책 구상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임제를 통한 원활한 국정 운영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총선 시기도 조정이 필요하다. 한국은 대선(5년)과 총선(4년)의 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총선이 대통령 임기의 중간 시기에 치러질 경우, 유권자들은 대체로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 심리로 야당에 표를 주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여소야대의 분점정부 출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새로 출범한 정권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집권 초기에 총선을 치르는 동시선거는 분점정부의 출현을 방지하고 대통령과 의회 간 극한 교착 상태가 야기하는 국정 마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아울러 대선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한 명도 없을 경우, 1위와 2위의 2차 투표를 진행하는 결선제의 도입으로 당선자의 ‘외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선투표의 가장 큰 장점은 2차 투표가 진행될 경우, 양 최종 후보가 1차 투표에서 탈락한 후보들의 정책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소수 정당의 정책이 차후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다수제가 야기하는 승자독식을 제어하는 한편 합의와 소통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이다.

 

대표성, 투명성,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회 및 선거 제도 개헌의 목표여야

 

현행 단원제를 미국이나 영국같이 상원과 하원을 따로 두는 양원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구상하는 양원제 개헌에 따르면 미국식과 비슷하게 상원을 각 지역구마다 동(同)수의 지역대표, 하원을 인구수 기준으로 선출한다.

 

양원제의 효용을 따지기 위해서 우선 선거 제도와의 연관성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간 한국은 총선 때마다 선거구 획정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근래에는 수도권의 의석수가 인구수에 비해 과소대표 된 반면, 농어촌 지역의 지역구는 상대적으로 과잉대표 되었기 때문에 선거구를 재편해야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농어촌 지역의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해당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도, 농간 갈등 문제로 비화되었다.

 

다행히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재획정 안에 대해 여야가 가까스로 타협했지만 불만은 누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 의장의 양원제 개헌안은 의회의 이원화를 통해 농어촌 지역의 정치 소외를 막고 인구수에 따른 대표성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의 지역구를 늘린다한들, 사실상 지역의 몇몇 토호 정치인들이 장기간 독식하고 있는 지방 정치 판도를 감안할 때, 선출된 의원들이 진정 1차 산업 종사자들을 대표하는지 강한 의문이 든다. 농어촌 지역의 대표성이 우려된다면 굳이 양원제를 하지 않아도 직능비례대표를 도입하는 것이 실효성이 더 커 보인다.

 

더구나 당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경직적인 정당 문화를 판단해보건대, 상원과 하원의 권한 배분 문제와 여야 대립 구도가 중첩될 경우 단원제보다 심한 정치적 불안정성이 예상된다. 특히 양원제로의 전환은 의원 정수 증가를 요하는데 이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강하기 때문에 의원들의 특권 내려놓기를 통한 대국민 설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한국의 단순다수제(득표 1위만 당선), 소선거구제(1지역구, 1의석)로 대표되는 한국 선거제도 상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 구도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유권자들의 이념, 정책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 지역구에서 복수 이상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중선거구제 혹은 대선거구제로 전환하고 비례대표의원 수를 늘린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투명성이 결여된 공천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거나 정책으로 경쟁하는 건전한 정당 정치 문화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금권 정치와 정당 난립만을 초래할 것이다.

 

경제 민주화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적 기본권의 확대가 필요

 

저번 대선의 화두였던 경제 민주화는 헌법 제119조 2항에 근거한다. 해당 조항에는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채택하고 있는 현행 헌법에 이와 같은 2항을 추가한 이유는 견제 없는 시장의 지나친 확장이 독점과 불평등을 야기해 공동체가 기저에서 무너지고 사회적 기본권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헌법에서 말하는 기본권이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는 행복 추구권, 양심의 자유, 재산권, 사회권 등 여러 기본권을 포함한다.

 

문제는 기본권 행사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사용자와 피고용자 혹은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계약 문제는 ‘재산권 행사의 자유’와 ‘생존 및 거주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일상에서 충돌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사회 통합과 경제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행복추구권 및 사회권 조항의 법률적 구체화 방안과 이에 필요한 입법부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개인의 자유를 기본권에서 인정한다 한들 실질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자유의 조건’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회적 요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부자유로 귀결된다. 가령 악덕 기업주에게 근무조건의 개선을 주장하는 어떤 피고용자가 본인이 피하고 싶은 선택지들만 열려있는 경우(해고or 가혹한 근무조건), 이런 상태를 자유롭다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자유란 무엇인가』, 사이토 준이치).

 

누구든지 보편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행복 추구권과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민주화의 실현에 기여한다. 따라서 대기업의 독점을 견제하고 생존과 거주 문제와 직결된 임차인들의 행복추구권 및 사회권을 보다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헌법 조항 신설이 필요하다. 하지만 행복 추구권과 사회적 기본권 조항 자체를 근거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기는 어렵다는 판례가 다수이다. 대체로 헌법재판소는 기본권이 입법자의 법률 제정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고 판시해왔다.

 

“헌법을 통한 기본권 보장은 의회의 법률 제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일하는 국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정당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적극적으로 기본권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그러나 파행이 거듭되어 온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은 수두룩하다. 설령 관련 법률이 있다하더라도 사회권을 보장하기엔 갖가지 예외조항규정(ex: 해고의 제한, 가산수당지급 의무 대상에서 제외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이 추가되어 실질적인 권리 보호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경제 민주화를 위한 기본권 확대 여부는 어디까지나 입법부의 적극적 의지가 중요하다. 헌법 조항의 신설과는 별개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인력을 폭넓게 충원할 수 있는 한국 정당의 개방성 확보 등 정당 조직의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한 이유이다.

 

헌법 재판소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 대의제와 합의 정치 문화 확립의 지름길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통성이 떨어질뿐더러 재판소장을 포함한 9인의 재판관 모두 대통령에게 최종 임명권이 있다는 점에서 행정부를 제대로 제어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특히 정당해산심판 권한은 헌재재판관 선출의 비민주성과 권력의존성을 고려하면 그 남용 소지가 크다. 작년에 해산된 구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재의 정당해산결정을 살펴보면 정당해산의 근거가 되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기준’에 대한 해석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불량 정당’을 정당해산이라는 사법 권위로 분쇄하기보다는 국민이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권 정치의 장에 묶어두면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적 퇴출’을 유도하는 것이 대의제의 원칙을 살리고 반민주적 정당의 극단적인 ’지하 음성화’를 방지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출처: 딴지일보)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 합의의 정치 문화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극한 정치적 대립에 봉착한 경우, 정쟁에 지친 대통령과 의회가 직접 헌법 재판소에 판단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국민의 손으로 뽑히지 않은 9인에 의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는 사례가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협과 설득을 포기하고 의회를 건너뛴 채, 결국 소수의 헌법재판소관들에게 최종 결정권을 쥐어주는 이른바 ‘사법 독재’ 양상은 개헌을 통해 견제해야 한다.

 

결론: 성공적인 개헌을 위해서는 사회, 문화, 환경 등 장기적 토대 마련이 필요.

 

투명하고 전문성을 갖춘 정당 문화, 합의와 숙의가 일반화 된 시민 의식 같은 문화적 조건 없이 단순히 제도적 개헌만으로 가시적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헌법의 정비를 통해 시민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는 긴 세대의 축적과 인내심을 요한다. 선거 승리만을 의식하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과 당장의 눈에 띄는 변화를 갈망하는 현 세대의 ‘기분풀이 식 개헌 주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통치 구조의 안정성에 기여하지 못할뿐더러 다음 세대에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다.

 

물론 개헌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개헌을 통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바란다면 제도적 수정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헌법 가치가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아가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권리 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제도적 개헌을 통해 공동체에 장기간 축적된 정치, 사회 문제를 일소할 수 있다는 만능주의적 시각을 경계하는 이유이다.


 
 

 대립하고 있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빈번하게 개입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결국 ‘국민투표’같은 ‘다수의 의지’, ‘다수결 민주주의’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법적 절차와 제도의 틀 안에서 소수의 지성이 legal mind를 발휘하는 헌정주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균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재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사진참조: 위키 백과

 작년,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나는 통진당의 일부 정치이념을 결코 찬성하지 않으며 통진당의 정당 활동이 국가안보와 민주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헌재 판결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가 직시해야할 문제는 통진당이 과연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위협인 반국가단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국가 중대사를 결정해야할 때마다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9인중 1명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재판관 3인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할 수 있고 3인은 대법원장이, 나머지 3인은 국회(여당지명2, 야당지명1)에서 지명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당지명 2인도 보통 대통령의 정치성향과 비슷한 인사가 추천되기 때문에 사실상의 헌재소장, 헌재 재판관 선출은 집권정부의 ‘코드 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 더구나 명시적인 최종 임명권은 9인 모두 대통령에게 그 권한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헌재가 독립된 사법기관이라 할 수 없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지 않은 9명에 불과한 소수 권력이 사회의 가치를 정립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소수의 종교지도자 집단이 헌법위에 군림하여 국정을 주무르는 “이란의 신정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다. 물론 미국에도 우리나라의 헌재와 비슷한 상위재판기관인 ‘연방대법원’(Supreme Court)이 있고 연방대법원 재판관들도 미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지만 그들의 임기는 ‘종신직’이다. 지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재판관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정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라 정부코드와 상반되는 판결도 내릴 수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국회 설득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는 재신임 투표, 탄핵 사태 등 불리한 상황 때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등 ‘국회’가 아닌 ‘거리’에서 정치 현안을 해결하려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아예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위임해버렸다. 이는 사법독재를 심화시키고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진참조: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qxh&articleno=1574, 연합뉴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헌재 재판관들은 연임은 가능하지만 6년의 정해진 임기가 있기 때문에 연임을 위해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부와 다른 진보적, 양심적 목소리를 내기가 사실상 힘들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헌재 재판관은 정부 입맛에 따라 인사교체가 단행되기 쉽다. 그로 인해 어느 정치 성향을 가진 재판관이 얼마만큼 선임되느냐에 따라 이전의 사법 기관들이 내렸던 판결이 자주 뒤집어지는 등 사회 가치판단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렇듯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따라 국가 정책의 정당성과 사회가치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이후 역대정권과 집권 여당은 대화와 타협이 결여된 독단적인 결정을 ‘헌재의 판결’이라는 거역하기 힘든 사법적 권위를 빌려 형식적인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불만을 손쉽게 제어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헌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과 사회적 파급 효과는 헌재의 판결에 사후 반대하는 행위를 정부 입장에서 대한민국 헌정을 부정하는 ‘폭도’나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기 좋은 구실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런 사법 의존 현상을 심화시킨 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크다고 본다. 예전에 행정수도이전, 재신임 투표에 이어 탄핵 사태 등 자신과 참여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헌법재판소의 권한에 기대어 여소야대의 열세적 상황을 정면 돌파하려는 ‘승부사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소통문화성숙의 기회를 최소화하는 등 사실상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소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참조: http://www.ddanzi.com/ddanziNews/3702466)

 그 뒤로도 우리 사회는 어떤 현안에 대해 시민과 정부, 의회가 기탄없는 토론과 포괄적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단 ‘미국산 쇠고기 파동’, ‘집시법’, ‘사형제’, ‘인터넷 실명제’, ‘남성의 병역의무’ 등 굵직한 사회문제현안 해결과 가치판단을 “9인에 불과한 권력”에 사실상 떠넘기고 말았다.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여론수렴의 절차가 불투명해지고 헌법재판소가 모든 국가 중대사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세태에 대해서 예전에 강원택 교수(서울대 정치학과)는 “사법독재”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딱 그러하다. 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에 대해 소통과 타협을 선호하는 방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통과 대화의 과정은 험난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되어진다. 대화는 안 통한다고 단정 짓고 반대 세력을 설득시키기는 귀찮으니 그저 편하게 “어떤 지엄한 카리스마적 권위”에 현답을 구하려 애쓴다. 그래서 어느 새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할 때, 특정 사법기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 된 게 아닌가? 집권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 사법부의 상황에서 헌재의 권력화와 그 영향력의 비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과거 군사독재시절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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