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정치인 중에 무하마드 엘바라데이라는 인물이 있다. 법학자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97년부터 2009년까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으며 핵 확산 방지를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200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인사이다. IAEA 사무총장임기가 끝난 이듬해인 2010년부터 그는 모국의 정치판에 야권 지도자로 뛰어들었다.

 

2011년 초, 모두가 아는 아랍의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그 연쇄효과로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해온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했다. 그러자 엘바라데이는 ‘IAEA 사무총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스펙’덕분에 순식간에 주요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실각한 후에도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군부가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고 엘바라데이는 그런 구체제 하에서는 ‘어떠한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엘바라데이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다수의 이집트 민중의 바람과 달리 그 이듬해 대선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가까운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바라크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자, 숨 막히는 이슬람 신정 체제가 등장한 셈이다.

 

이처럼 세속자유주의 계열을 대표하던 엘바라데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 이집트 대중의 기대와 달리 무기력했고 정치적 기반 역시 부족했다. 2013년 7월 무르시의 실정에 등을 돌린 민심을 핑계로 압둘 파타흐 시시가 중심이 되어 군부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집트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또 한 번 훼손되었다. 엘바라데이는 비민주적 쿠데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고 옹호하였고 급기야 쿠데타가 성공한 그 해 ‘시시 군부 내각의 부통령’을 맡았다.

"IAEA 사무총장을 세 번 지낸 이집트 출신의 엘바라데이"

국제기구 수장을 세 번 연임한 그의 경력과 달리 모국에서 그의 정치적 지도력은 실망스러웠다. 2011년,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했고 이듬해 대선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 세력을 결집하지 못했고 대중에게 새로운 시대정신도 제시하지 못했다. 2013년 7월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자 부통령으로 활동하는 등 '남다른 처세술'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후 이집트 정국은 무르시를 지지하는 진영과 시시의 군부를 지지하는 진영 간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시시 내각은 친 무르시 지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상 ‘시시 군부 정권의 얼굴마담’이었던 엘바라데이는 유혈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군부의 영향력이 깊게 개입됐다고 의심받았던)2014년 대선에서 시시는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었다. 2011년 민주화를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이집트 국민들은 무르시가 주도하는 이슬람식 구체제를 겪었고 재작년부터는 한때 무바라크의 측근들이었던 장군들 주도의 권위주의 체제를 견뎌내고 있다.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에 의해 유린당하는 동안 엘바라데이가 보여준 지도력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IAEA의 수장으로서 때때로 보여준 강단 있던 리더십과는 달리 모국의 혼란스런 정치판에서 그는 유약했고 지나치게 ‘정치 공학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군부 쿠데타 세력과 야합하기도 했다.

 

요새 언론에서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2017년 대선 출마 예측에 대해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엘바라데이가 한때 이집트 국민들의 막연한 기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유엔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벌써부터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의 대선 출마설 제기에 대해 자신은 단지 경주에서 열리는 유엔 NGO 컨퍼런스에 사무총장의 자격으로 참여하러 방한한 것일 뿐,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삼가달라는 그의 변명은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영국의 텔레그래프와 프랑스의 AEP를 비롯한 해외 언론은 임기가 아직 남은 반총장의 마음이 이미 한국 대권 도전에 가있다고 꼬집었다. 그가 정말 공식적인 유엔 업무상, 유엔총장의 자격으로 방한했다면 오래전에 은퇴한 정치원로이자 충청 정치권의 영수인 김종필 씨는 굳이 왜 만났는가? 또한 TK 정치권의 전통적 성지인 안동을 몸소 방문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요란한 정치 행보와 달리 차분한 그의 답변은 외교관 특유의 완곡어법을 고려하여 진의를 파악해야 할 정도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건대, 여당에서 대권 참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천착하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형 선거 문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국제기구의 수장 출신, 다국적 기업의 임원,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국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되거나 본인들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능력과 무관한)대외적인 스펙을 내세워 정계에 진출하는 사례를 우리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이집트 대중의 마음을 흔들만한 정치적 어록조차 전무했던 정치 신인 엘바라데이가 국제원자력 기구의 수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던 사례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국제기구의 수장을 역임한 경력을 일국의 정치 지도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갖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엘바라데이와 반기문이 국제기구의 수장을 꽤 오랜 기간 동안 무난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조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 만큼 능동적 리더십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세를 파악하고 현상 유지에 집중함으로써 국제정치의 권력 관계상 강대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게 비교적 잘 처신했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다섯 개의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veto)을 행사하면 선출될 수 없는 유엔총장의 선출 방식 상, 반총장은 개인의 정치적 역량보다는 대륙별 순환에 의한 선출 구조와 강대국 입장에서 딱히 반대할 이유 없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연임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조직에나 개선해야할 나쁜 관행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의롭고 투명해야 할 정책 결정 방식이 비공식적이고 부당한 방식으로 점철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한국 정치집단 문화의 비합리적 독소 관행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총장 임기를 복기해보면 그가 과연 리더로서 한국 정치 문화와 구조적 관행을 개선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유엔은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5개국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동시에 그들만의 밀실협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총장은 (모든 국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 당사국들 간의 표면적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국제 사회의 여론 및 레짐(Régime)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고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공인된 규범적 존재이다. 설령 이러한 일련의 합의 과정들이 ‘비구속적 선언’에 그친다 할지라도 국제 규범을 강행하려는 유엔의 의지와 더불어 어느 분쟁 지역에서는 유엔총장의 판단과 말 한마디가 개인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여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할지도 모르고, 안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가 대선 후보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인지도도 있는 데다가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는 무난한 캐릭터이기 때문이고, 여당의 입장에서는 행동이 예측 가능한 '얌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초의 안철수처럼 반기문도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은 특히, 국제 분쟁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유엔총장 본연의 임무를 여러 차례 방기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인들을 상대로 2014년 이후 42건에 달하는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고(파견 평화유지군의 수장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 출신.)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간의 유혈 충돌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태에 대해 스리랑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이웃나라 인도 출신의 조사관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 관한 현실 감각에 문제를 보임은 물론, 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리더십조차 발휘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면에서 반기문 총장은 IAEA 사무총장으로서 부시 미 정부가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엘바라데이보다 더 유약한 리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반총장은 현상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남다른 비전으로 구조적 병폐를 청산하는 등 한국 정치 문화의 체질 개선에 필요한 개혁적 지도자는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엘바라데이의 정계 입문이 실패로 끝난 이유 중 하나는 ‘모국 내에서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활동한 엘바라데이는 모국의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그저 좀 유명한 ‘외지인’에 불과했고 야권의 공식적 단일 지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력한 야권 세력이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와 유사한 정치 강령을 가진 무슬림형제단이 서구식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엘바라데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은 당연했다.

 

엘바라데이가 이집트의 척박하고 분열된 야권에서 고전한 것과 달리 반기문의 정치적 전망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인다. 당장 자신을 뒷받침해줄 정치적 세력의 토대가 미비한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만약 새누리당이 진심으로 반기문 총장의 영입을 원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도 모든 당내 역량을 발휘해 그를 대선 주자로 만들고자 지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 여당인 만큼 대선 후보를 거머쥐기 위해 치열한 당내 경선을 감수해야겠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과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집착하는 ‘한국 특유의 신민형 정치문화’가 맞물려 그의 대선 도전 과정은 의외로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진정으로 필요한 지도자인지는 여전히 강한 의문이 든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치중한 나머지 실질적인 삼권분립과 당내 민주화가 아직 요원한 ‘87년 체제’에서 진일보하기 위해 한국 정치에 필요한 리더십은 현상유지가 아닌 사회 구조적, 정치 문화적 개혁을 위한 정치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보여준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고 토호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충청과 TK연대를 조장하는 진부한 지역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상투적인 언변을 구사해 정치 혐오에 빠진 부동층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편의주의적 전략을 취하려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공감과 깊이 있는 담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차기 대선 주자라고 가정했을 때, 여권의 정치인들이나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모난 정치적 언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의 불통 대통령 리더십으로 당권을 위협받았다고 판단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반기문 씨가 비교적 예측가능하고 제어하기 쉬운 ‘바지사장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강대국들의 거부권 없이 유엔 총장 연임에 무난하게 성공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반총장의 국제적 인지도를 이용한 새누리당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집권 시 외국과의 협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2013년 7월, 무르시 정부를 전복한 군부의 쿠데타 이후에 엘바라데이가 부통령에 임명된 것도 그의 대외적 인지도를 이용해 서방을 상대로 합법 정부 승인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군부의 정략적 영입이었다. 반총장이 정말 대선 출마에 뜻이 있다면 현재 자신을 향한 여권의 정치적 구애와 국민의 높은 지지율이 결코 본인의 정치 지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선 본인의 현재 직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 드리는 바이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대외적 직위를 이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만을 기름장어처럼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부당한 외압과 관행에 맞서 소신 있게 대응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기술적 능력 외에 소통, 분배와 관련된 탈권위주의적 공감의 능력과 더불어 개혁을 위한 굳센 정치적 결단력이 반기문 씨에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끝으로 필자가 고2때 벌어진 ‘김선일 씨 피랍 사건’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보여준 그의 무능하고 영혼 없는 수습능력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는 ‘반기문 대세론’을 경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1일 차


안동에 도착하니 낮 열두 시였다. 다른 도시에 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친가가 있는 이천과 외가가 있는 속초를 제외하곤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화를 한 뒤 시내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등산용 가방을 들고 안동시내 지도를 든 채 서성거리는 나는 영락없는 여행자이자 외지인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간고등어 정식과 찜닭집이 있었지만 내가 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에 나보다 먼저 여행을 간 동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집에 돌아온다. 동생 역시 안동을 첫 방문지점으로 잡았다. 두 시 열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니, 내가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걸었을 땐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는 왜 안동까지 와서 그런 걸 먹어, 동생의 웃음 섞인 핀잔을 뒤로한 채 다음 주에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스호스텔이나 콘도에서 밖에 외박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정집같이 생긴 그곳의 작은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곳의 매니저라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 이용에 관한 설명과 안동 주변지역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숙소를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었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중앙의 젊음의 거리를 돌고나서 구 시장 거리까지 나아갔다.


<젊음의 거리에 있는 조형물>


아쉬운 점은, 이런 거리구 시장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속초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던 포항. 그곳에서 보아왔던 시장거리와 젊음의 거리. 그 거리들의 생김새와 안동의 그것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투리와 가판대에서 주로 판매되는 것이 찜닭재료인 닭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속초든 포항이든 안동이든 모두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가. 같은 문화생활권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수산물 대신 팔고 있는 찜닭이 이곳이 안동임을 알려주는 자그마한 특징이자 차별거리였다. 외려 안동에서 이미 예전에 현대생활로 편입되어버린 구시대적 풍경이나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바랬던 내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 갔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시내에 있는 유적. 고려 개국공신들을 모신 곳이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물>


시장 거리를 돌아본 다음에는 시내 오른쪽 위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았다. 아마 마을 프로젝트로 조성했을 안동의 벽화마을은 그럭저럭 산책코스로 괜찮았다. 하지만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도 잘 되진 않는지 또 와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을 돌았는데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젊음의 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빵 두어 개를 사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젊음의 거리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잠시 사색에 빠졌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엔 처음 보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이따금씩 재미있는 상호 명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과거의 이곳을 유추해보고 미래의 이곳을 상상해본다. (2015年 7月 17日)

 


 

2일 차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게스트하우스 정숙시간이 24:00 ~ 7:00 인 탓에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숙소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 돌아온 후엔 여덟 시부터 야경투어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도 따라 나갔다. 허름한 봉고차에 열댓 명이 타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동강변에 설치된 음악분수였다. 여덟시 정각이 되자 음악이 나오며 분수가 작동을 시작했다. 분수에 설치된 조명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졌다. 음악의 강약에 따라 조명의 색깔과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세기가 달라졌다. 마치 컴퓨터에서 음악파일을 열면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져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엔 월영교로 향했다. 월영교 근처에는 안동댐 상류에서 가져온 초가집 몇 개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모셨던 숙소, 그리고 석빙고도 있었다. 운전기사로 같이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소개를 곁들이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동은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상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북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석빙고는 시원했다.

깨끗했던 날씨 덕분에 월영교는 그대로 검은 강물에 반사됐다. 올해도 지어진 지 12년 된 월영교는 안동시내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야경이었다. 구도만 잡아놓고 찍으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진 사진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열 시 즈음이었다. 같이 야경을 본 사람들 중중에 같은 방에 배정된 사람들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가 거실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눴다.

 

<음악분수.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외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에 예정된 아침 관광투어를 통해 도산서원과 제비원을 둘러봐야 했지만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을 했지만 안동의 거의 모든 사적지는 시내에서 버스를 최소한 사십 분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시에 오후투어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열두 시까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유적지로 가는 버스들은 열 시부터 운행을 했고, 나는 관광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배로 더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어제 갔던 월영교를 넘어 민속촌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여행을 왔으니, 내 두 다리로 어딘가를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생수 한 통을 사고 자전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중간에 석탑 하나를 보고, 월영교도 지나갔다.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이클 복장을 갖추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만을 봤을 뿐. 월영교로 가는 아침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목적지였던 안동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안동댐은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반환점부터 갑자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했다. 일천 원의 관람비는 꼭 일천 원정도의 값을 했다.

민속촌을 나온 뒤엔 낙동강변을 따라 건너편으로 걸었다. 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강물이 왼쪽엔 숲이 울창했다. 숲과 물이 양쪽에 있으니 시원했다. 세 시간 가량을 걷고 나니 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낙동강변을 걸으며>

 

오후엔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나갔다. 상대적으로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동역 초입에서 게스트하우스 차를 타고 사십 분 쯤을 달리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서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봉고차는 신음소리를 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했다. 서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풍경만큼은 예뻤다. 적재적소에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함으로써 멋을 풍겼다. ‘만대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개방되어있었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이용하는 탓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써져 있었다. 비록 만대루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마당의 백일홍과 만대루는 멋진 조화를 이뤘다.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산들의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아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았더라했다. 안동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임진왜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고향이 안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자리를 옮기고 운영(?)했던 병산서원을 와보고 싶었다. 서애 선생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 이곳으로 서원을 옮겨올 때만 해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 줄기는 계속해서 그 흐름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병산서원>


 서원을 나온 뒤엔 바로 하회마을로 향했다. 아마도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풍산 류씨 집성촌인 이 곳 하회마을이 아닐까. 허씨와 이씨가 이곳을 자신들의 터로 잡으려고 했지만 최종 주인은 류씨로 결정이 났다. 하회마을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 있었다. 탤런트 류시원의 젊은 시절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민속과는 다르게 하회마을인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했다. 예전엔 개방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후 관람객이 늘어난 탓에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만 개방됐다. 마을 초입엔 하얀 연꽃들이 펼쳐졌다. 장미꽃처럼 향기롭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엔 초가집과 기와집 두 종류가 있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집이라고 문화해설사가 말해주었다. 기와집들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나 그 유명한 풍산기업 소유자들의 집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과거에 양반들이 가마를 소유했다면 이십일 세기로 바뀐 지금, 그들은 가마 대신 외제차를 몰고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명패는 모두 씨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엔 柳時元이라고 적혀진 명패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서애 선생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충효당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후투어만큼은 시간을 지켜 사람들과 같이 이동해야 되는 터라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회마을은 河回마을이다. 강물이 마을을 온전히 돌아나기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라는 평을 듣는 이 마을의 유일한 허점은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하회마을을 원의 형태라고 보았을 때)부분만 강 건너에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애 선생의 형이었던 류운룡은 풍수지리에 아주 능숙했고, 산이 없는 그 부분에 소나무 만 그루를 심어 그곳으로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 시절, 재력가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송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직도 이 나무 앞에서 굿을 하고 탈춤을 춘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 해설사는 강 위에 뜬 연꽃 같다고 비유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오십 미터도 안되는 강을 건너는데 삼천 원을 내야했다. 요금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하회마을은 풍산기업에서 운영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터라 국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편에 내린 뒤 이런 불평을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연정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집필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애 선생은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풍경은 조용했다. 그 옛날, 하회마을을 찾아온 보부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부용대에서 잠시 쉬어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가장 안동적인 것들을 본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던 일, 하회마을의 이면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오늘 보지 못한 것은 다음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2015年 7月 18日)

 


 

MEMO

*18일 부로 경북지역의 메르스 경보가 없어졌다. 마지막 자택격리자의 격리 일자가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강이 아닌 다른 강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기차역 바로 뒤로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한강의 이분의 일 정도였다. 첫 날 저녁 하류를 보고, 병산서원에서 막 산에서 내려온 중류를 보았다. 그 중류는 하회마을을 돌고 낙동강 댐을 지나 시내로 흘러내려간다.

*병산서원은 서재와 동재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를 구분해서 방을 쓰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과거科擧에 초시였던 사람과 재시, 삼시를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면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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