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후배들이 캡사이신 물대포 맞아가며 시민으로서 권리를 표출하는 동안 따뜻한 독서실에 앉아서 이런 논조의 글을 하나 쓴다는 것이 참 염치없는 행동인 거 잘 안다. 민주 시민으로서 집회 결사의 자유를 찬성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결집된 시민 행동의 정당성은 그 누구도 거역하기 힘들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민중 총궐기 같은 집회가 더 많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결국 '메아리 없는 그들만의 아우성'이 될 것이고 그러한 고립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집회의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련되지 못하고 너무 투쟁적이기까지 한 시위 문화가 바뀌어야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 논지인 “쳐 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함께하고 싶은 집회)”을 보고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 진보 진영 시위 문화에 대한 한계 역시 체감하는 한편, 사회 변화에 대한 조그만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쳐 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출처: https://brunch.co.kr/@funder2000/86

대규모 집회의 성격이 세련되지 못한 쌍팔년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의 일침에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건 사실이거니와 그 사람이 제기한 중요한 쟁점은 그게 아닌 듯싶다. 민중 총궐기라는 집회가 폭넓은 지지를 얻어 현 정부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일조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결과 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진보 정당(새민련을 제외한 기타 진보 정당)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선거(2016년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만 한다.

따라서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 유발을 위해서 기존의 시위 문화가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민중 총궐기가 ‘잠재적 우군’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회색분자들’의 참여 독촉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중도층을 전부 회색분자’ 정도로 인식하는 그런 '쌍팔년도 식의 편협한 패러다임'은 중도층의 지지는커녕 그들의 ‘잠재적 관심’마저 유리시킬 뿐이다. 결국 민중 총궐기가 민중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수의 민중을 포괄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집회’로 고립될 뿐이라는 말이다. 범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진보 진영은 또 다시 선거에서 질 것이고 그들을 대표하는 ‘대리인’이 국회에 없다는 이유로 추운 날 캡사이신과 몽둥이를 맞아가며 불법 시위라는 오명까지 감수해야 하는 악순환이 매번 반복될 뿐이다.


‘민중 총궐기’와 같은 집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수 중도층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그들만의 단발성 구호’에 그치면서 그 집단 역량이 선거를 통한 진보 진영의 제도권 정치 편입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출처: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203_0010456219&cID=10201&pID=10200)


하나만 물어보자. 민중 총궐기 같은 범국민적 시위를 왜 하는가? 대통령, 국회의원, 관료 집단이 국민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바람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남발하면서 그러한 부당한 권력 남용을 제어하는데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의 틀에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을 때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권력을 거둬들어 그들 스스로 권리를 되찾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집회와 시위는 ‘임시적 수단’에 불과하다. 정부와 여당이 단정 지은 ‘폭력시위’를 하든, '합법시위'를 하든, 집회와 시위는 국민 의지에 반하는 대리인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 여론이 정책 결정 과정에 잘 투입되도록 위정자들에게 환기시키는 ‘일시적 무브먼트’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민중 총궐기의 최종 종착점은 시민들의 권리행사에 대해 진보 정당이 공감하고 적극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인하는 소통의 장이 되는 동시에 결집을 통한 진보 지지층의 저변 확대와 중도층의 표면적 공감을 획득, 진보 정치인의 국회 대거 진출을 달성하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인은 의회라는 대의제 기구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격하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거리의 정치’는 국민 여론 수렴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수도, 담당해서도 안 된다. 정치적 현안을 거리에서 해결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인 의회가 시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시민들이 거리로 나올 뿐이다.

따라서 사회 문제는 거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회에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 변혁을 이루려면 ‘투표’, 즉 특정 수준 이상의 지지율이 필요하다. 이미 정해진 게임 룰이 있는 한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 최선이다. 54년 전, 누구처럼 ‘구국의 혁명’ 운운하며 총칼로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문제는 민중 총궐기를 기획한 진보  진영이 시위 문화 변화를 통해 대다수 중도층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왜 중도층을 잡아야 하는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뿐더러, 행동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회 문제에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중도층에게 왜 진보 진영이 어필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필자의 답 대신, 근 몇 년 간 변화한 새누리 당의 전략을 말해보고자 한다. 새누리 당은 결코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정당이다. 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새누리 당의 전신 민자당은 PK와 일부 민주화 세력을 포섭하였다. 지난 대선 때는 뜬금없이 경제 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내걸면서 부동층과 복지 취약 계층을 공략했고 결국 이겼다. 더 나아가 이자스민 의원을 내세워 다문화 담론도 노리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새누리당은 '이념 정당'보다는 다양한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포괄 정당'의 형태에 더 가깝다.

그들의 애매모호함은 역으로 폭넓은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한다. 새누리 당의 정당 지지율을 보라. 그 많은 ‘악재’속에서도 지금도 4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단지 '교육수준이 낮다고 여겨지는 일부 노인'들과 TK와 PK에 기반을 둔 '경상도 민심 덕'이라고만 오판하면 안 된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인프라를 갖춘 이 ‘코끼리 정당’이 뭐가 아쉬워서 진보 진영의 담론까지 호시탐탐 탐내겠는가? 바로 중도층 공략을 통해 보다 넓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수도 끊임없이 '진보'한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현대의 수권 정당은 과거처럼 선거에서 결코 자신들의 골수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회색분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민중 총궐기가 보다 넓은 계층을 포용해야 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될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진보도 집회, 시위 문화를 포함해 다방면에서 변해야 한다. 포괄 정당이 전 지지층을 상대로 폭넓은 지지율을 노리는 것처럼 진보 진영도 어떻게 하면 중도층의 집회 참여를 유도하고 나아가 그들이 선거에서 정당 투표만이라도 진보 정당을 뽑을 수 있을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올해 정의당 당 대표 선거 후보로 나왔던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진보적 토양이 부족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다 실현 가능한 '조그만 승리'를 거두는 데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진보가 99번을 실패해도 100번째 도전에서 성공을 거두어 변화를 이루어 낸다는 이 ‘슬픈 진보의 패배 공식’은 역으로 지금 대한민국 진보 진영이 '승리의 경험치'에 목말라 한다는 현실을 방증한다. 진보가 거듭된 실패에 익숙하다지만 '이기는 노하우의 축적'은 그들이 원하는 사회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조그만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민중 총궐기 집회가 단순히 "억울하오, 내 말 좀 들어보소."에 그쳐서는 안 된다. '회색분자'(?)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회 문화로의 변화를 꾀하고 실제로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도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앞서 말했듯이 투표로써 진보 정치인의 대거 원내 진출을 그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소외 계층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일꾼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시위가 하는 것이다.


“떼 지어 푸른 집으로 가봐야 불통 누님만 계실 뿐이다.”

시위대의 ‘청와대 진출’보다 시민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진보 인사들의 ‘의회 진출’이 더 필요하다. 시위는 그런 결연한 집단 의지를 다지고 신념적 확신을 과시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처: http://news1.kr/articles/?2506126)


시위를 하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중도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진보가 표방하는 핵심 가치나 강령을 버리고 보수 기득권에 흡수되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를 통한 평등 가치의 실현, 상호 체제 인정을 통한 남북 평화 구축,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 진보가 주장해 온 가치 중에는 분명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적지 않다. 다만 과거 군사정권과 달리 ‘이명박근혜 신보수주의 정권’은 어쨌든 민주적 선거를 통한 외형적 합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대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생략한 ‘거리의 정치’로만 대응하기에는 범국민적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다고 본다.

민중 총궐기같은 시위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지지하는 진보 정당이 제도권 정치의 장으로 들어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기능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진보 정당들이 비례대표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내 교섭 단체’조차 만들지 못할 정도로 득표율이 적다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에 따른 지역구 선거에서의 제도적 불리함을 딛고 비례 대표제로 더 많은 의회 진출을 위해서는 좋든 싫든, 정당 득표율로 나타나는 중도층의 지지가 절실하고 이를 위해 진보 진영의 대표적 이미지인 시위 문화에 대해서도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 변신이라면 뭐든 괜찮다고 본다. 문화제 형식이든, 최대한 다양한 시민들의 발언대를 보장하든, 노래를 바꾸든 새로운 시도는 분명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생각보다 효과는 적었고, 말 못할 온갖 고생을 했다는 그들의 고충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를 시도한 것에 대해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도 회의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적 전환 국면을 이룬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시위의 성공 여부는 ‘시위의 방식’보다는 ‘시대적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서울의 봄’과 ‘87년 6월 항쟁’은 각각 유신 정부 몰락과 4.13 호헌 조치라는 정치적 급변 상황과 집권 여당의 무리수에 대한 시민들의 '필연적 반작용'이었다. 역사적 타이밍이 갖춰지고 어떤 사소한 사건이 촉매로 작용할 때 다수의 잠재된 중도 시민들의 응축된 불만은 결국 폭발하게 되어있다. 그 전까지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들의 분노를 ‘임계점’까지 차근차근 유도해낸다면 말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진보 진영은 중도층을 받아들일 준비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세련되고 효과 있는 집회 방안을 주장하기 전에 참여부터 하라고? 있으면 먼저 알려달라고?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심정적 동조는 하지만 기존 집회의 표현 방식이 낯설어 참여를 꺼리는 중도층은 분명히 있다. 외연 확대를 위해서라면 그들이 오게끔 만드는 방안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음식 맛이 좋은 식당은 오지 말라고 해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손님이 적다면 왜 자신의 식당이 인기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들 스스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왜 맛이 없냐는 손님의 불만에 "그럼 니가 만들어 보던가."식으로 일갈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타개책인가? 그런 태도가 유권자들이 느끼는 진보 진영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러한 비아냥과 아집은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는 중도층의 지지만 이탈시킬 뿐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은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하긴 하다. 문제는 일부 진보 진영 지지자들의 그런 경솔한 언행 하나하나가 민중 총궐기의 당위성에 대해서 굳이 반대하지 않을 '잠재적 우군'까지 돌아서게 만든다는 점이다. 포괄성을 담보하지 못한 시위는 의회민주주의라는 게임 판에 큰 영향을 끼치기 힘들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역시 초기 대학생 시위대의 산발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넥타이 부대’를 필두로 한 일반 시민들이 가세해서야 그 결집의 위력이 배가되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때도 우리는 '중도층의 합세'가 어떤 반전 국면을 가져왔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잠재적 우군’은 분명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중도층 시민들은 진보 진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치, 사회적 시류에 민감하다. 다만 평소에는 그 의식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선 역사적 타이밍도 중요하겠지만 중도층의 잠재된 의식을 분출시키기 위한 방법은 진보 진영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격발을 위한 노리쇠’는 이미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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