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를 타고 달린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속력을 높이며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귀가 막힌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난 뒤 빠르게 고도를 높일 때 전해지는 느낌과 같다. 비록 그것보단 자극이 덜하지만 그런 먹먹함은 순식간에 답답함으로 바뀐다. 열심히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하품시늉을 한다. 그래야 내이와 외이 사이의 압력차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宇宙人이 될 팔자는 아닌가보다. 지상에서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갈 때 이정도의 먹먹함을 느낀다면, 그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가야하는 우주여행은 얼마나 힘이 들까. 겨우겨우 우주공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귀머거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의 우주여행을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지금은, 진주星으로 가고 있다.



*


나는 다음 행선지인 진주를 가기 위해 안동에서 열 시에 기차에 올라탔다. 두 시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환승을 한 뒤 또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진주에 도착했다. 환승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은 이유로, 나는 진주성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내일로 여행자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진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한참 여행경로를 짜고 있을 때, 진주가 고향인 동아리 후배 H의 생각이 났다. 남들이 쓰지 않는 소재로 잘도 소설을 써냈던 그는 2년 동안의 대학교생활과 1년 동안의 동아리 생활을 뒤로하고 의무 소방으로 입대를 했다.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진주 바로 옆 D시에 배정이 된 것이 5개월 전 일이었다. 나는 H에게 SNS를 통해 연락을 했다. 군부대가 아닌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H였던 탓에 어렵지 않게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진주 일정인 19일 날 H역시 외박을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H와 진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원래 진주 기차역은 진주성 근처에 있었지만, KTX가 개통되면서 원래 역이 폐쇄되고 시내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새로운 역이 생겼다. H와는 중간 중간 연락을 해가며 진주성 앞에서 네 시에 보기로 했다. 진주역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처럼 꾸며져 있었고 현판엔 또박또박 한글로 진, 주, 역, 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 앞에서 나는 진주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진주나 서울이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았다. 장을 보고 집에 가려는 아줌마, 학원을 가는 학생 그리고 데이트를 하러 약속장소에 가는 젊은 여자까지. 그들 역시 버스를 타고 카드를 단말기에 찍었다. 


농협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그대로 길을 따라가 진주성 쪽으로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H였다. 패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전혀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간편해 보이는 복장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오늘 그가 입고 나온 바나나가 그려진 노랑 티셔츠와 무릎께까지 오는 청바지의 조화도 멋있었다. 여름인데도 짧은 머리를 가리려는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와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여 H에게 말했다.

“네, 형. 근데 소방서가 좀 짜증나요.”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말에 네, 해놓고선 바로 소방서에 대해 불평을 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매표소 앞에서 나는 이천 원을 주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진주 시민인 H는 진주성 입장료가 무료였다. 그는 돈 대신 신분증을 내밀고 입장권을 받았다. 입구 바로 앞엔 누각인 촉석루가 있었다. 잠시 땀도 식힐 겸 그곳에 올라갔다. 그곳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H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12월이었으니, 육 개월 만이었다. H는 진주에 살았지만, 진주를 잘 모른다고 했다. 형, 집에 너무 틀어만 박혀 글을 써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진주성도 마찬가지였다. H는 진주성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가 이랬었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쨌든, H와 나 모두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눈앞이 탁 트이며 진주의 강남(江南)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코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건물이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울의 그것보단 훨씬 적었다. 


진주성 중앙 평평한 곳엔 박물관이 있었다. 상시전시로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이 있었고, 계절마다 전시물이 바뀌는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작가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입장권 안에 박물관입장료까지 포함되어있었는지, 박물관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은 많진 않았지만 전쟁의 처음과 끝까지 그 시간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있었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본 떠 만든 모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었다. H에게 부탁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왠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컷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오른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는 동상은 그 크기가 크지 않았지만 용맹함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진주성 관람을 마치고 나는 H와 함께 그가 친구들과 술을 자주 마시러 갔다는 K대 근처로 이동했다. 방학이기도 하고, 시간도 일러서 문을 연 술집이 몇 개 없었다. 골목을 돌다가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곤 그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니 좀 더 진솔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H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H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나의 것보다 전혀 쉽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라든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긴 가족사이의 갈등.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H가 건강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제 3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H가 자신의 문제들을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

술을 먹는 중간, 동아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 역시 H와의 통화에 즐거워했다. 우리는 안주 하나를 더 시키고 먹은 뒤 술집을 나왔다. 


나는 원래 일곱 시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술집을 나오지 여덟 시가 넘었다. 다행히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밤 버스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진주성이 있는 시내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열 시 버스표를 샀다. 아직 버스 시간까지 한 시간 이상이 남아, H와 나는 다시 한 번 진주성에 가보기로 했다. 아까 먹은 안주와 술을 소화시킨 다는 명목도 추가하면서. 


도로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거리가 뿌옇게 됐다.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오면서 거리는 안개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짧아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진주가 ‘진주’가 아닌 ‘무진’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무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김승옥의 소설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는 불투명한 연기로 가득 찼고, 차들은 그 연기를 뚫으며 나아갔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난 뒤, 나는 그것이 소독차 때문에 생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소독 연기가 무색무취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진주는 아직 이십 세기의, 그런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던 것은, 여섯 시 이후의 진주성은 입장이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입장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진주성 자체는 서울 도심에 있는 창경궁이나 경복궁과는 다르게 밤에도 시민들을 위해 개방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촉석루와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재들은 문을 꼭 걸어 잠갔다. 해가 완전히 지자, 진주성 곳곳의 가로등이 켜졌다.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진주성 안에는 나와 H말고도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간혹 볼 수가 있었다. 진주성은 지주 시민들에게 그들의 도시에 있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친근한 산책코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H도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안 듯 신기해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진주의 야경 역시 멋있었다. 저 멀리서는 다리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드리운 어둠이 건물에서 켜진 빛과 어우러지면서 그대로 진주 남강에 투사되었다. 날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달도 보였을 텐데, 지금쯤 동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태풍이 못내 아쉬웠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나와 H는 다시 진주성을 나왔다. 진주성 바로 앞에 12지신을 등불로 만든 상이 있었다. 나는 말 앞에서, H는 개 앞에서 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H와 악수를 나누며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 다음 휴가 땐 서울 올라와. 계속 고생하고. 


버스는 열 시에 맞춰서 진주를 출발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 나는 내 몸통만한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편안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의 첫 비를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맞았다. 청량한 비를 가로지르며 버스는 부산으로 향했다. 



1일 차


안동에 도착하니 낮 열두 시였다. 다른 도시에 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친가가 있는 이천과 외가가 있는 속초를 제외하곤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화를 한 뒤 시내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등산용 가방을 들고 안동시내 지도를 든 채 서성거리는 나는 영락없는 여행자이자 외지인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간고등어 정식과 찜닭집이 있었지만 내가 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에 나보다 먼저 여행을 간 동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집에 돌아온다. 동생 역시 안동을 첫 방문지점으로 잡았다. 두 시 열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니, 내가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걸었을 땐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는 왜 안동까지 와서 그런 걸 먹어, 동생의 웃음 섞인 핀잔을 뒤로한 채 다음 주에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스호스텔이나 콘도에서 밖에 외박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정집같이 생긴 그곳의 작은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곳의 매니저라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 이용에 관한 설명과 안동 주변지역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숙소를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었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중앙의 젊음의 거리를 돌고나서 구 시장 거리까지 나아갔다.


<젊음의 거리에 있는 조형물>


아쉬운 점은, 이런 거리구 시장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속초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던 포항. 그곳에서 보아왔던 시장거리와 젊음의 거리. 그 거리들의 생김새와 안동의 그것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투리와 가판대에서 주로 판매되는 것이 찜닭재료인 닭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속초든 포항이든 안동이든 모두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가. 같은 문화생활권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수산물 대신 팔고 있는 찜닭이 이곳이 안동임을 알려주는 자그마한 특징이자 차별거리였다. 외려 안동에서 이미 예전에 현대생활로 편입되어버린 구시대적 풍경이나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바랬던 내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 갔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시내에 있는 유적. 고려 개국공신들을 모신 곳이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물>


시장 거리를 돌아본 다음에는 시내 오른쪽 위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았다. 아마 마을 프로젝트로 조성했을 안동의 벽화마을은 그럭저럭 산책코스로 괜찮았다. 하지만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도 잘 되진 않는지 또 와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을 돌았는데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젊음의 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빵 두어 개를 사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젊음의 거리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잠시 사색에 빠졌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엔 처음 보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이따금씩 재미있는 상호 명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과거의 이곳을 유추해보고 미래의 이곳을 상상해본다. (2015年 7月 17日)

 


 

2일 차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게스트하우스 정숙시간이 24:00 ~ 7:00 인 탓에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숙소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 돌아온 후엔 여덟 시부터 야경투어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도 따라 나갔다. 허름한 봉고차에 열댓 명이 타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동강변에 설치된 음악분수였다. 여덟시 정각이 되자 음악이 나오며 분수가 작동을 시작했다. 분수에 설치된 조명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졌다. 음악의 강약에 따라 조명의 색깔과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세기가 달라졌다. 마치 컴퓨터에서 음악파일을 열면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져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엔 월영교로 향했다. 월영교 근처에는 안동댐 상류에서 가져온 초가집 몇 개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모셨던 숙소, 그리고 석빙고도 있었다. 운전기사로 같이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소개를 곁들이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동은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상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북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석빙고는 시원했다.

깨끗했던 날씨 덕분에 월영교는 그대로 검은 강물에 반사됐다. 올해도 지어진 지 12년 된 월영교는 안동시내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야경이었다. 구도만 잡아놓고 찍으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진 사진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열 시 즈음이었다. 같이 야경을 본 사람들 중중에 같은 방에 배정된 사람들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가 거실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눴다.

 

<음악분수.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외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에 예정된 아침 관광투어를 통해 도산서원과 제비원을 둘러봐야 했지만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을 했지만 안동의 거의 모든 사적지는 시내에서 버스를 최소한 사십 분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시에 오후투어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열두 시까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유적지로 가는 버스들은 열 시부터 운행을 했고, 나는 관광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배로 더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어제 갔던 월영교를 넘어 민속촌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여행을 왔으니, 내 두 다리로 어딘가를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생수 한 통을 사고 자전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중간에 석탑 하나를 보고, 월영교도 지나갔다.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이클 복장을 갖추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만을 봤을 뿐. 월영교로 가는 아침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목적지였던 안동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안동댐은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반환점부터 갑자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했다. 일천 원의 관람비는 꼭 일천 원정도의 값을 했다.

민속촌을 나온 뒤엔 낙동강변을 따라 건너편으로 걸었다. 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강물이 왼쪽엔 숲이 울창했다. 숲과 물이 양쪽에 있으니 시원했다. 세 시간 가량을 걷고 나니 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낙동강변을 걸으며>

 

오후엔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나갔다. 상대적으로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동역 초입에서 게스트하우스 차를 타고 사십 분 쯤을 달리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서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봉고차는 신음소리를 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했다. 서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풍경만큼은 예뻤다. 적재적소에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함으로써 멋을 풍겼다. ‘만대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개방되어있었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이용하는 탓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써져 있었다. 비록 만대루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마당의 백일홍과 만대루는 멋진 조화를 이뤘다.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산들의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아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았더라했다. 안동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임진왜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고향이 안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자리를 옮기고 운영(?)했던 병산서원을 와보고 싶었다. 서애 선생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 이곳으로 서원을 옮겨올 때만 해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 줄기는 계속해서 그 흐름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병산서원>


 서원을 나온 뒤엔 바로 하회마을로 향했다. 아마도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풍산 류씨 집성촌인 이 곳 하회마을이 아닐까. 허씨와 이씨가 이곳을 자신들의 터로 잡으려고 했지만 최종 주인은 류씨로 결정이 났다. 하회마을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 있었다. 탤런트 류시원의 젊은 시절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민속과는 다르게 하회마을인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했다. 예전엔 개방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후 관람객이 늘어난 탓에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만 개방됐다. 마을 초입엔 하얀 연꽃들이 펼쳐졌다. 장미꽃처럼 향기롭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엔 초가집과 기와집 두 종류가 있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집이라고 문화해설사가 말해주었다. 기와집들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나 그 유명한 풍산기업 소유자들의 집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과거에 양반들이 가마를 소유했다면 이십일 세기로 바뀐 지금, 그들은 가마 대신 외제차를 몰고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명패는 모두 씨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엔 柳時元이라고 적혀진 명패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서애 선생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충효당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후투어만큼은 시간을 지켜 사람들과 같이 이동해야 되는 터라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회마을은 河回마을이다. 강물이 마을을 온전히 돌아나기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라는 평을 듣는 이 마을의 유일한 허점은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하회마을을 원의 형태라고 보았을 때)부분만 강 건너에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애 선생의 형이었던 류운룡은 풍수지리에 아주 능숙했고, 산이 없는 그 부분에 소나무 만 그루를 심어 그곳으로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 시절, 재력가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송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직도 이 나무 앞에서 굿을 하고 탈춤을 춘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 해설사는 강 위에 뜬 연꽃 같다고 비유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오십 미터도 안되는 강을 건너는데 삼천 원을 내야했다. 요금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하회마을은 풍산기업에서 운영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터라 국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편에 내린 뒤 이런 불평을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연정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집필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애 선생은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풍경은 조용했다. 그 옛날, 하회마을을 찾아온 보부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부용대에서 잠시 쉬어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가장 안동적인 것들을 본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던 일, 하회마을의 이면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오늘 보지 못한 것은 다음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2015年 7月 18日)

 


 

MEMO

*18일 부로 경북지역의 메르스 경보가 없어졌다. 마지막 자택격리자의 격리 일자가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강이 아닌 다른 강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기차역 바로 뒤로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한강의 이분의 일 정도였다. 첫 날 저녁 하류를 보고, 병산서원에서 막 산에서 내려온 중류를 보았다. 그 중류는 하회마을을 돌고 낙동강 댐을 지나 시내로 흘러내려간다.

*병산서원은 서재와 동재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를 구분해서 방을 쓰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과거科擧에 초시였던 사람과 재시, 삼시를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면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핍으로 인한 불안이야말로 문학의 시작, 이라고 그는 말했다. 40여년을 ‘청년작가’로 살아온 그에게 찾아온 자유는 오히려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혼’을 꿈꾸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서재에서 내려와 아내에게 이혼을 하자, 라고 말을 하려 안방으로 왔는데 침대위에 누워있는 아내를 보고선 그런 생각이 쑥, 하고 들어가 버렸다. 침대위엔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는 온대 간대 없고 육십 대 중반의 볼품없는 통자 몸매의 여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 떠올라서 차마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그는 느꼈다. 상대방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 환한 면 대신 그늘진 곳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었다.

 

자기갱신自己更新, 자기변혁自己變革. 삶의 본질적인 가치향상을 위해선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청춘이 아닌가. 비록 생물학적인 나이는 70세의 노인일지 몰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불씨가 살아있는 한은, 자신은 청년이고 아직도 청춘이라고, 그는 말했다.

 

*

 

결혼을 한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버지,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제 어미가 걱정을 할까봐 딸은 아버지에게만 연락을 했다. 아마도 애비가 유명한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 것이었으랴. 고심을 한 끝에, 사랑의 끝엔 우의만이 남는다고 답신을 해주었다. 하지만 딸애는, 답장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아내는 그릇을 내팽겨 진채 이렇게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요. 사랑의 끝엔 사랑이 있지. 그는 무언가로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그 내용을 딸애에게 보냈다. 몇 시간에도 답신이 없던 딸애는 어머니의 의견을 듣자마자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라고 했다.

 

사랑이란 잘츠부르크Salzburg의 암염巖鹽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잘츠부르크의 암염은 어둠과 시간의 합작품이다. 유기물들이 깊은 어둠과 시간을 헤쳐야만 암염이 될 수가 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긴 어둠과 시간을 이겨내야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는 결혼의 단계를 삼단계로 생각했다. 첫 번째 단계. 낭만주의. 이 시절의 결혼생활은 연애의 연장선이다. 부부싸움은 장미꽃 한 송이나 맛좋은 포도주 한 잔만으로 풀어질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리얼리즘. 아이를 낳고 아파트에 대한, 시부모님에 대한, 아이에 대한 현실적인 삶이 펼쳐진다. 이 단계의 싸움에서는 돈이 최고의 협상 카드다. 마지막 단계, 인간주의. 이 단계에는 여유롭다. 여유롭다 못해 고요하다. 싸움도 없는 대신 낭만도 없다. 그는 40년의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이 인간주의의 단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의 끝은 사랑이죠, 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나서 생각했다. 아내는 아직까지도 첫 번째 단계인 낭만주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

 

히말라야에서는 노새들이 짐을 옮긴다. 몸집이 작은 노새들은 낭떠러지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6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굽은 등에 얹은 채 한 발 한 발을 벌벌 떨며 땅 위를 걸어간다. 일 년에 꼭 한 번 히말라야에 가는 그는 어느 날 그 노새들을 보고 울음이 났다. 노새들은 부모님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이 세상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지 않다. 그는 오늘만은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그들은 가난을 등에 맨 채 살아왔다. 어떻게든 그것에서 탈출하기 위해 야수적野獸的노동을 했다. 압축성장壓軸成長을 통해 한국은 역사상 가장 단시간에 급속성장急速成長을 했다.

 

현 사회에 팽배해져 있는 부정부패가 그들의 어두운 면이라고는 하나, 우리가 지금 모두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고, 소비적인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꿈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노동을 했던 그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다음세대들이 홍대에나 강남등지에서 한 잔에 만원이나 하는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베란다에서 담배 한 개비도 쉬이 피지 못하는 처지에 몰려버렸다.

 

어머니, 아버지란 단어는 아름답긴 하나, 그것에는 잔혹함이 있다. 무조건 적인 헌신,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 60억 명의 사람 중 하나가 아닌 단지 한 단어로 그들의 규정해버리는 것. 그것은 분명한 잔인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권했다. 침대에 누워서 당신 부모님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라고. □□씨, △△씨. 母와 父로써의 인생이 아닌 그들 이름으로써의 인생이 그제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말이 통하지 않아요. 고집불통이에요.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하다. 야수적 노동을 하며 꿈을 버리고 오직 가난에서 탈피하기 위해 살아왔던 그들은 돈을 버는 방법은 배웠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보다 소통의 방법을 배운 그대들이 아버지를 이해하고 설득해고, 때론 칭찬하고 다그치는 것이 더 맞지 않는가. 늙는 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고 쓸쓸한 것이다. 자식에겐 거대해 보이는 아버지들, 그들은 알고 보면 속이 빈 공룡일지도 모른다.

늙어가는 아버지의 등을 보라.

 

*

 

옛날의 청춘들에겐 ‘지상명령’이 있었다. 특명, 가난을 극복하라. 그들은 그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현재의 청춘들에겐 이런 것들이 없다. 부자도, 그렇다고 가난뱅이도 아닌 지금의 청춘들은 너무나 쓸쓸하다. 대량소비와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자본의 축적을 강요한다.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을 좇아갈 뿐. 오히려 옛 청춘들보다 못한 방황의 시기를 가지고 있다.

 

자기정체성이 중요하다. 20대엔 에너지가 있다.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가. ‘지상명령’이 없다면 자신이 그것을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별을 보고 공통의 별자리 대신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들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될게 아닌가. 이렇게 말하며 그는 조용히 자신의 청춘을 돌아보았다. 어둠만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청춘은 지금 와서 돌아보니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그는 우리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여러분들은 다들 빛나고 있어요.

 

‘아프니까 청춘’이 아닌 ‘아픈 것을 이겨낼 수 있으니 청춘이지’라는 말 또한 그는 강조했다.

 

구술문화口述文化는 생각하는 법을 잊게 한다. 자신의 별자리,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려면 자신만의 생각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확실한 문자가 존재하는 21세기는 오히려 구술문화의 장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글로 된 문장에서 생각하는 힘이 나오는 법이다. 진부한 소리 같겠지만 이는 곧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진리이기도 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

 

일주일 전 오늘,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박범신’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SBS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인 아이러브人의 녹화방송으로써, 등촌동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스포츠스타를 직접 보는 것처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직접 보는 것을 평소에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나는 국문과에서 박범신의 강연회 방청권을 준다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신청했다.

 

자신을 ‘젊은 작가’라고 표상하는 60대 중반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작년에 김애란의 강연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작가들의 강연회는 마치 책 한권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신이 전하고 싶은 내용을 자신의 삶, 혹은 좋은 비유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을라치면, 마치 낭독소설朗讀小說을 듣는 듯 했다.

 

강연의 대주제는 힐링, 이자 청춘들에게 권하는 독讀한 습관, 이었다. 그는 이야기의 시작을 작가인 자신의 삶으로 시작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40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로 ‘사랑’을 말했고, 이 시대의 늙은 아버지들을 말하면서 그들의 삶을 다시 돌아볼 것을 권유했다. 또, ‘아프니깐 청춘’이 아닌 ‘아픈 것을 이겨낼 수 있으니 청춘’이다, 라는 말을 전했으며 다시 문학이야기로 돌아와 자신에게 문학은 ‘목 메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비유했다. 곧이어 현 사회의 문제점과 청춘들의 상태를 꼬집으며 1등만이 성공이 아니라는 말과,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라고도 말하며 끝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인들을 꺼내어보라고 권했다.

 

길어도 두 시간이면 될 것 같았던 강연은 무려 세 시간을 넘겼다. 내 왼편에 앉았던 다른 일행은 졸고 있었지만, 나는 그 세 시간이 마치 순식간에 지나갔다. 허리를 죄어오는 요통과 목을 뻐근하게 만드는 경통을 느낀 후에, 같이 강연회를 가준 지인의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해서야 열한시가 넘은 시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느꼈던 건,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현과 생각이 아직 깊지 못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던 것들을 강단 위의 그는 힘 있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주장들을 획일화 시키는 강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양성을 해치고, ‘이러저러하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내지는 ‘나처럼 될 수 있다.’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소설 대신 올라와있는 것들을 보며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러나 그의 강연은 그렇지 않았고, 그의 세 시간 분량의 강연을 감히, 아주 압축적으로 말해본다면, 책을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서 자신만의 계획을 만들어서 실천하라, 였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고 있었던 질문시간에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강연 내내 ‘생각하는 힘을 길러라’라고 넌지시 일러주었지만, 방청객들의 질문은 20대 중반의 대학생도, 30대를 맞은 회사원들도 결국은 제가 지금 청춘인데 힘든 점이 있어요, 어떻게 극복해야 될까요, 혹은 달려가다가 넘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일어설 수 있을까요, 같은 그에게 일련의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뿐이었다. 오히려 맨 처음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아이가 그에게 물어보았던, 제 친구가 결혼을 지금 당장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깐, 결국은 이것이 누구의 문제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만의 생각을 하려는 것보단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 답을 구하려는 것 같아 보였다. 다양성을 중시하기보단 답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교육방식이 이미 너무 뿌리를 깊게 내린 것 같아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부끄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에 소설 하나를 드디어 완성시킨 덕분에 나는 무언의 만족감과 게으름에 빠져서 다른 글을 쓰는 것을 중단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이미 한 학기에 하나를 쓴다는 목표를 이루었으니 천천히 써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나태하게 지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방전放電이 됐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충격요법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그러다가 일주일 전 접한 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충전充電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시간 동안의 강연을 들으면 피곤할 법도 했지만,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나는 빨리 집에 가서 그의 강연회를 듣고 느낀 점을 써야 된다는 생각과 새로운 소설을 써야지, 라는 생각에 비로소 사로잡힐 수 있었다.

 

그의 강연회를 들으며 받은 책은 그의 문장집 <힐링>이었다. 앞서,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힐링’이라는 단어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가난과 불안에 시달렸던 전 세대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들도 쓰지 앉았던 ‘힐링’이란 단어를 우리가 쓰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이번에 <힐링>이라는 책을 썼지만, 자신도 아직 ‘힐링’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하고 살며 마음속에 있는 시인을 가두지 말고 꺼낸다면, 자신처럼 흡연과 음주를 하고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역시나 ‘정답’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래서, 내가 앞서 썼었던 4개의 글은, 그의 강연회에서 필기를 했던 것을 토대로 재문장화再文狀化시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문장에 들어있던 단어들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그 단어들을 문장으로 만든 것은 나였으니, 결국 단어는 그의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문장은 나의 것이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강연을 갔다 오고 나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강연의 여운은 아직까지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의 문장집을 조금씩 읽으면서 더 좋은 문장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40살이나 더 젊은 내가 오히려 그에게 충전充電을 당했다. 아! 그야 말로 진정한 ‘젊은 작가’가 아니었는가.

 

- 2014. 5. 8

 

강연회를 갔다 온 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아직도 둔촌동 홀에서 그의 강연을 듣는 나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1년이 지날 동안 박범신은 한 두 개의 소설집을 더 냈고, 나는 훈련소를 갔다 온 뒤에 사회복무를 하고 있다. 그의 강연이후, 글을 다시 끄적거렸다. 완성된 초고를 세 개 정도 썼고, 하나가 마음에 들어 계속 수정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에 파묻혀 있던 글을 이렇게 다시 수면 위로 들어 올려본다.

 

End.


* 사진출처:
http://medicalworldnews.co.kr/data/news_image/1407/373fc446d570c09e6bababca531e6805_PI9atrG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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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정리를 마지막으로 한 건 약 2개월 전이다. 전공서적은 전공서적끼리, 소설책은 소설책끼리 그리고 수업관련 프린트는 프린트끼리 정리하여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휴학을 하고나선 책상에 앉아있을 일이 없었고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지냈다. 특히 여름인 요샌, 잠도 내 방이 아닌 거실에서 요와 이불을 덮고 잤기 때문에 난 내 방을 정리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문득, 가방을 챙겨서 나오려는데, 책상 위가 심하게 더럽혀진 것을 발견했다. 알라딘에서 사온 책들이 나선계단처럼 빙그르르 돌아가며 쌓여있었고, 작은 책장 위에는 지폐를 쓰고 남은 잔돈과 영수증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었다. 침대위에는, 전날 입었던 셔츠와 바지 그리고 잘 때 입었던 반바지 두어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언제 이렇게 엉망이 된 거지? 나는 다시 방 정리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질서를 잃는다. 책상 위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꼬인 줄처럼 점점 어지럽혀 진다. 아버지가 피는 담배에서 나온 담배연기는 처음엔 담배 끝에서 일직선으로 나오다가 이내 공기 중에 흩뿌려진다. 수업시간의 학생들은 줄맞춰진 책걸상에 얌전히 앉아있지만 시간이 흘러 쉬는 시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가고 순식간에 교실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북적거린다.

 

과학에선, 이렇게 무질서한 척도를 ‘엔트로피’라고 부른다.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내 방은 점점 더러워지고, 담배연기는 레이저처럼 일직선으로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 방을 청소하면 엔트로피가 낮아지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엔트로피를 생각할 때 우리는 ‘책상’만 보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것을 생각해야한다. 방을 치울 때는, 당연히 책이나 동전에 발이 달린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나 로봇청소기가 그 일을 해야만 한다. 그 당사자가 ‘나’라면, 나는 방을 치울 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일을 한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사용하게 된다. 방 청소를 끝내면 나는 허기를 느끼고 몸에선 열이 나며 땀이 난다. 방은 깨끗해 졌지만 거기에 들어난 도구나 도구를 사용한 사용자의 엔트로피가 늘어난다. ‘방’의 상태만 놓고 보면 무질서도가 줄어들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주변의 무질서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변의 늘어난 무질서도가 방에서 줄어든 무질서도보다 항상 크다.

 

나는 문득, 이런 무질서도의 증가가 이렇게 ‘과학적’인 측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오늘 들었다. 지하철 공익광고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광고에선 부자父子가 등장했다. 지하철이 도착 한 뒤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타려는 아버지를 일곱 살의 아들이 제지한다. ‘내리는 사람 먼저에요.’라고 말한 아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인다. 에스컬레이터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손을 맞잡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또 한 소리를 듣는다. ‘다른 한 손은 안전띠에 올려놓아야죠.’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엔 우린 모두 안전 지킴이였다. 횡단보도가 빨간불일 땐 절대로 길을 건너지 않았으며 횡단보도를 건널 땐 꼭 한 쪽 손을 높이 들었다. 쓰레기에 관한 건 또 어떤가. 길바닥에 버리는 일 없이 휴지통에 넣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단횡단은 기본이요 길거리엔 태우다 만 담배꽁초와 과자봉지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쓰레기들이 길에 즐비하다. 사람 역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이 엔트로피-무질서도-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 ‘질서’를 가르쳐주는 예절교육이나 도덕교육이 정말로 힘든 것 같다.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주의 현상인데 그것을 역행하는 것을 의도하니 말이다. 애초에 ‘예절’이나 ‘도덕’같은 건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닌가. 동물들은 충실하게 자신들의 무질서도를 증가시켜나가는 데 비하여 사람들은 ‘사회’에 속해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있다. 새로 산 키보드의 내구성은 점점 떨어져가고 모니터에선 계속해서 가장 혼란한 상태의 에너지인 열을 발산하고 있다. 나는 사회에 속해있지만 사람 역시 이런 과학적 법칙에 예외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방영했었던 과학다큐 ‘코스모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별을 이루고 있는 원자와 사람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그 구성이 같다, 라고. 그래서 우리는 별을 품고 있는 우주의 원리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 사진출처: http://oheim.egloos.com/v/3548186

 

 

우회전愚回傳, 비보호雨保護 ①

 

 

 

 

시험 날 아침, 나는 열 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늦은 아침을 챙겨먹었다. 운전하기 편하게 운동화를 신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는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 까진 아니더라도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험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시험 순서는 무작위였다. 한 시가 되자 감독관들이 들어오고 시험 순번을 정해주었다. 나는 여섯 번째였다. 내 앞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시험이 다 끝난 두시가 돼서야 나는 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험은 둘 씩 짝지어서 봤는데, 나는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와 뒷자리에 동승했다. 그녀가 입은 검은색 스키니진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지점에서 여자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여자의 코스는 D가 나왔다. 시험 감독관은 나에게 동석자 사인을 받았다. 여자가 안전벨트를 맸고, 나 역시 뒷좌석의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D코스는 이백 미터 정도 직진을 하다가 중랑천을 끼고 우회전을 하는 코스였다. 여자는 덜덜 떨며 첫 번째 우회전 코스를 지나갔다. 다음 우회전 까진 길을 따라 직진을 하면 됐다. 하지만 그 직진코스에서 여자는 실수를 했다. 2차선에 맞추어 가고 있던 차는 별안간 1차선으로 표시등도 켜지 않은 채 이동했다. 하마터면, 뒤따라오던 1차선의 마티즈와 사고가 날 뻔했다. 아찔한 상황이었다. 마티즈의 빵ㅡ하는 경적소리와 함께 실격이 나왔다. 시작한 지 오 분도 안 돼 일어난 일이라 여자는 망연자실했다. 감독관은 바로 옆길에 차를 세우라고 말했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왔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무작위로 선택된 코스는 D. 여자와 같은 코스였다. 나는 차분하게, 교육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벨트와 기어와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 이번엔 파랑색 트럭 뒤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 첫 번째 교차로를 맞이했다. 우회전이라 신호를 받지 않아도 갈 수 있었다. 마침 왼쪽 차선은 정지 상태였고, 반대편에서 오는 좌회전 차량만 존재했다. 나는 진행했던 차선의 횡단보도에 걸친 상태로, 좌회전 차량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직 초보인 나에게 끼어들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고 끼워들기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사고위험이라는 이유로 실격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맞은 편 차들이 모두 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차량은 듬성듬성 왔고, 나는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신호가 바뀌어서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하면 어떡하지? 그리고 곧, 그 상상은 도로 위에서 현실로 바뀌었다. 신호가 바뀌고 왼쪽 차선의 차들이 직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걸쳐 있었던 횡단보도의 등도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보행자 보호 위반으로 실격입니다. 감독관이 말했다. 허탈했다. 분명히 도로 위엔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넓은 곳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이 분만에 시험 비용 오만 오천 원을 길가에 버린 것이라 생각하니 화가 났다. 길바닥에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모자母子가 나를 향해 비웃고 있었다.
 
그날 내내,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로 밖을 돌아다녔다. 괜찮아, 애매한 상황에 걸린 거야. 나도 아마 실격 당했을 거다. 다음에 또 보면 되지. 아버지는 이런 말로 나를 위로해줬지만, 바보처럼 우회전을 한 나에 대한 화, 맞은편 좌회전 차들에 대한 화 그리고 전자 교통신호 시스템에 대한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정말로, 우愚회전이었다. 나는 외투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었던, 다음 시험 일정과 응시료가 적혀있는 종이를 지갑에 끼워 넣으며 오지 않는 잠을 취기와 함께 억지로 청했다.

 

첫 번째 시험 실격에 대한 화가 가라앉을 무렵, 두 번째 시험 날이 찾아왔다. 이번 주 초부터 뉴스에선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왔지만, 이미 잡아놓은 시험 일정을 교체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될지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 정한 시험일을 고수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완연한 봄비였다. 가벼운 비의 강하속도는 느렸고, 때문에 비가 내리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이 정도라면 시험을 볼 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3호선과 4호선을 타고, 마지막으로 1호선으로 환승했다. 유일하게, 1호선만 지상으로 올라갔다. 창동역에서 녹천역까진 한 정거장이었지만, 그세 지하철 차창에는 비가 흩날려 생긴 빗살무늬가 생겼다.

 

학원 입구에 상호명이 적혀진 녹색 천막 아래로 비가 흘렀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천막 아래에서 담배를 피웠다. 기압이 낮은 탓인지 연기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바닥에 깔린 채 갖가지 종류의 연기가 섞여 내 코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장내방송으로 시험응시자들을 부르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세 번째 순서였고, 앞의 두 사람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삼십분 가량을 기다렸다. 그 삼십 분의 간극동안, 아침에 시작된 비는 내가 시험을 본 시각에 절정에 달했다. 소나타 뒷좌석엔 나와 짝으로 시험을 같이 볼 여자와 내가 앉았다. 여자의 가방 옆엔 아직 마르지 못한 3단 우산이 시트를 적셨다. 내가 먼저 운전석으로 옮겨 탔다. 코스는 C가 걸렸다. D다음에 C라, 도로주행 시험의 코스 순서가 떨어질 때 마다 D, C, B, A순으로 되는 건 아닐까. C코스는 경찰서 앞까지 직진이었다. 왼쪽 지시등을 켜고, 나는 도로위에 올라탔다. 비가 오는 탓에 와이퍼를 움직이니, 신경이 쓰였다. 비가 오면 수막현상 때문에 위험하지, 나는 필기문제집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며 저속주행을 했다. 이윽고 좌회전을 하는 교차로에 들어섰다. 앞에 차가 다섯 대 쯤 있었는데 파란불이 켜지자마자 출발할 기세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교차로의 신호는 앞의 차 때문에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파란색 바탕의 흰 글씨로 비보호 우회전, 이란 글씨가 써져있었다. 우회전, 잊고 싶은 단어였다. 오늘은, 저번 주와 같은 우愚는 범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동시에, 비보호非保護란 단어의 ‘비’자가 비雨로 보였다. 난 먼 옛날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비에게 오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 빌었다.

 

내 바로 앞차의 후미 등이 점멸된 것을 본 나는, 기어를 D에 놓고 뒤따라갔다. 내가 핸들을 돌리려는 찰라, 옆에 있던 감독관이 입을 열었다. 신호 보세요. 나는 고개를 살짝 올렸다. 황색불이 점등되고 있었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미 속도가 붙었으니, 앞차를 따라가는 게 맞지 않을까? 혹은 이미 황색으로 바뀌었으니 서야하나? 그때 필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했던 것이 생각났다. 도로를 지나갈 때, 황색등이 켜지기 전 운전자가 도로를 통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구역을 무엇으로 부르는가? 정답 : 딜레마 존(Dilemma Zone)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핸들을 돌렸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엑셀을 밟고 있는데, 차는 나가지 않았다.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고장 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신호를 받고나서야 나는 좌회전을 할 수 있었다. 우회전을 해야 하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나는 뒷자리로 유배되었다. 다시 출발지점에 돌아오고 이번엔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시험을 시작했다. 룸미러로 보라색 아이라이너로 깊게 패인 여자의 두 눈이 보였다. 여자는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의 주행은 불안했다. 옆 차선을 몇 번이나 침범하고, 지시등을 켜도 옆 차로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십 분 가량의 시간동안 그녀는 C코스를 실격 없이 완주했다. 감독관은 수고했다는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학원으로 다시 돌아온 후, 감독관이 뒷자리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실격하신 분은 다시 사무실 가셔서 시험 일정 잡으시고 여자 분은 평형주차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차에서 내렸고, 여자를 태운 차는 장내 도로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 다음 시험 일정을 잡은 뒤, 장우산을 핀 채 나는 녹천역으로 향했다. 녹천역 천장 플레이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후두둑, 후두둑. 전철은 세 정거장 전이었다. 열차가 점점 다가올수록 비는 그 기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비보호, 는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었나. 아마 그녀는 지금쯤 평행주차 시험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열차는 도착하고 나는 문이 닫히기 바로 전, 열차에 올라탔다. 지하철을 운전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창동역으로 향하는 1호선 열차는 객실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고 다시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다.

 

- 끝 -


사진출처:

http://www.ygosu.com/community/?m2=real_article&bid=yeobgi&rno=816829&page=0&frombest=Y

 

 

아침에 시작된 비는 내가 시험을 본 시각에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나는 도로주행시험에서 두 번째 떨어졌다. 운전석엔 내가, 조수석엔 감독관이, 그리고 뒷좌석에는 나와 같이 짝으로 시험을 본 여자가 앉아있었다. 첫 번째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는 찰라, 황색등이 켜졌다. 나는 교차로를 빠르게 통과하려고 엑셀을 밟았지만 순간 옆 자리에 있는 감독관이 역시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황색등이면 좌회전 차량은 가면 안 돼요. 직진만 허용됩니다, 라고 감독관은 말했다. 채점용 테블릿 PC에서 실격이라는 전자음이 나왔고 조용한 차 안에서는 와이퍼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저번 달 부터 녹천역에 있는 운전 전문 학원을 다녔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지하철로 삼십 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깔끔한 건물과 매끈한 노면을 기대했던 나에게 컨테이너 박스로 되어있는 학원의 가건물은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기능시험을 위한 도로 역시 곳곳이 파지고 노란선과 흰 선은 몇 번이나 덧칠해졌는지 옅은 노랑 빛을 띠고 있었다. 도로 곳곳엔 ‘운전면허시험용’이나 ‘도로주행’이라고 써진 노란색 자동차가 줄줄이 주차되어있었다. 그것들을 보니, 어렸을 적 봤던 만화 ‘꼬마자동차 붕붕’이 생각났다. 석유를 마시면 힘을 냈던 그 자동차는 이제 ‘꼬마 버스 타요’와 ‘로보카 폴리’에게 제 자리를 넘겨준 지 오래였다. 사무실로 들어간 나는 학원 등록비로 삼십 칠만 오천 원을 일시불로 결제했다.

 

운전면허를 취득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졌는데, 그 중 첫 단계는 필기시험이었다. 학원에선 필기시험 예상문제집을 등록할 때 무료로 하나 나눠주었는데, 문제은행식이라 거기에 나오는 문제 중 무작위로 40문제가 출제 된다고 했다. 학원에서는 필기시험을 위한 강의를 따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교시동안 동영상을 봐야 했는데, 필기시험에 붙고 난 뒤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안전교육을 미리 듣는 것이라고 했다. 난 업무가 끝난 뒤 삼일 정도를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가 빔 프로젝터로 한물 간 개그맨들이 나오는 시시콜콜한 영상을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두 시간 씩 쪼개서 봤다. 그 주 주말에 나는 필기시험을 봤고, 어렵지 않게 92점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기능시험이었는데, 예전에 비해 훨씬 간소해 졌다. T자 코스나 S자 코스, 언덕 위에서 멈춰야 했던 예전 시험과는 달리 시동을 키고, 전조등을 켜고 와이퍼를 조작한 뒤 오십 미터를 전진하는 것뿐이었다. 기능교육부턴 강사가 붙었는데, 나를 맡은 강사는 오십 대에서 육십 대 사이로 보이는 여자였다. 자신을 원래 도로주행 강사라고 소개한 여자는, 교육시간동안 간소하게 바뀌어버린 기능시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시험이 쉬워지니 요새 도로가 개판이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옆에서 이렇게 떠들든 말든, 기어를 D에 놓고 저속주행을 했다. 엑셀을 밟지 않아 차의 속도는 시간당 십 킬로미터를 유지했다. 직진은 쉬웠지만 코너링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핸들을 얼마나 돌려야 하는지, 나는 강사에게 좌회전과 우회전을 할 때 핸들을 돌리는 것에 대한 이론 같은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여강사는 그건 ‘감’의 영역이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혼란한 내 머릿속에선 기어 변속과 핸들 조작으로 인한 자동차 내부 기어의 토크Torque와 앞바퀴의 각속도가 맴돌았다. 교육이 끝나자 십 분 간의 쉬는 시간 후에 바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강사가 가르쳐준 대로 전조등을 켜고 와이퍼를 움직였으며 방향 지시등을 능숙하게 껐다. 오십 미터를 간 뒤 브레이크를 밝았다. 기어를 P로 놓고 핸드브레이크를 올린 뒤 시동을 껐다. 내가 탄 차의 번호가 불리면서 합격, 이라는 장내방송이 들렸다.

 

이제 남은 것은 여섯 시간의 도로주행 교육과 시험뿐이었다. 밤에 차를 가지고 나가 몰고 싶지 않은 탓에, 도로주행 교육은 평일이 아닌 주말 낮으로 잡았다. 월 초에 학원에 등록하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동영상을 볼 때만 해도 추웠었는데, 주말이 되니 날씨가 포근해졌다. 면허시험 뒤 쪽에 있는 작은 동산에서도 꽃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덟 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나는 도로주행교육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컨테이너 바깥에서 담배를 다 태운 강사들이 들어왔다. 열 댓 명이 넘는 강사 중, 체구가 아담하고 안경을 낀 구수한 인상의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사의 지시를 따라 나는 2010년형 아반떼에 올라탔다. 첫 두 시간 동안은 장내에서 엑셀을 밟고 코스를 돌았다.
  
장내에서의 두 시간이 끝나고, 강사는 나는 서로 자리를 바꿨다. 평소엔 아버지가 운전 하는 것을 보고 있어도 부러움이나 선망이 느껴지진 않았는데, 기어를 능숙하게 바꾸고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강사를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작아보였던 그가 갑자기 대단하게 느껴졌다. 강사는 학원을 빠져나간 뒤 긴 직선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바로 옆엔 시동이 꺼진 덤프트럭과 땅을 파다가 멈춰버린 포클레인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모든 도로주행 코스의 시작점이었다.

 

도로주행 코스는 A, B, C 그리고 D 네 가지가 있었다. A와 C코스가 비슷하고, B와 D코스가 비슷했다. A, C코스는 직진코스가 길지 않은 탓에 자주 회전을 해야 했다. 경찰서 앞에서 좌회전을 하고, 횡단보도가 있는 왕복 이차선 도로로 우회전을 하는 것이 특히 신경 쓰였다. 이에 반해 B, D코스는 시작 후 전방 이백 미터 앞에서 중랑천을 끼고 우회전으로 건너는 것이 전부였다. B코스는 무지개다리가 있는 교차로에서 유턴이었고, D코스는 장미아파트 앞에서 유턴을 하면 됐다. 코스를 외우는 것이 좋다싶어 나는 각 코스의 포인트들을 계속 되뇌었다. 경찰서, 국민은행, 무지개다리, 장미아파트, 좌회전, 우회전, 직진, 유턴. 자, 이제 교육을 시작합시다. 나는 강사와 다시 자리를 맞바꿔 운전석에 앉았다.

 

시트위치를 조정하고 안전벨트를 맨 뒤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P에서 D로 놓고, 핸드브레이크를 내렸다. 나는 좌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사이드미러로 뒤쪽에서 오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도로정규속도로 달리는 차들 사이로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 대 쯤을 먼저 보네고 나서야 검은색 소나타 뒤를 쫓아 2차로로 진입했다. A코스부터 시작할게요. 엑셀을 좀 더 밟아요. 강사가 주문했다. 장내에선 이십 킬로미터밖에 밟아보지 못했는데, 엑셀을 밟는 발이 부르르 떨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계기판은 어느새 시속 사십 킬로미터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전에, 가장 빠르다는 육상선수인 칼 루이스의 속도가 삼십육 킬로미터였다. 딱 일 초에 십 미터를 달린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페달 하나를 밞는 것만으로 그를 추월해버렸다. 이상하게도, 한 번 경험해본 속도는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속력에 대한 역치 값은 기어를 고단으로 바꾸는 듯 계속 올라갔다.

 

두 시간 가량의 교육동안 나는 A, B, C코스를 돌 수 있었다. 중간의 쉬는 시간 20분 정도를 제외하면 한 코스 당 삼십 분쯤 걸린 셈이었다. 교육이 끝나고 다리 힘이 풀렸는지 문을 열고나올 때 몸이 휘청거렸다. 그렇게 첫 도로주행이 끝났다. 직선코스는 괜찮았지만, 아직 회전은 익숙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눈을 감은 채 방금 달렸던 코스를 상상했다. 두 손을 움켜쥐고 마치 핸들을 돌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옆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보았더라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어서 그것을 알 순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도 학원에 나와 남은 두 시간의 교육을 받았다. 전 날보단 실력이 늘었는지 두 시간 동안 D, A, B, C 순서로 모든 코스를 다 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시험에 붙을 수 있겠죠? 내가 능청스레 물어보았지만 강사는 대답을 피했다. 외려, 시험 볼 때는 또 달라요, 라며 말했다. 이왕 물어본 거 기분 좋게 붙을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해주면 덧나나. 나는 우측 방향지시등을 켜고 주행이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사무실로 들어간 나는, 시험 일정을 잡았다. 다음 주 금요일이 좋아보였다. 시험응시양식에 맞춰 종이를 작성하고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집에 온 나는, 도로에서의 무용담을 아버지에게 늘어놓았다. 이제 곧 차를 몰 수 있을 것 같아요. 문득 내가 읽었던 연작소설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절에서 생활하던 절필작가가 어느 날 밤 집에 잠시 돌아왔는데, 고등학생인 자신의 막내아들이 엘란트라를 타고 집을 나서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민첩하게 조수석에 앉는다. 아들은 놀랐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차의 속도를 올린다. 이럴 때, 정말 기분이 좋아요. 어디까지 갔다와봤니. 김포까지 간 날도 있어요. 아버지는 무면허인 고등학생 아들이 엘란트라를 몰고 밤의 도로를 질주 하는 것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무용담을 늘어놓는 나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다음 편에 계속)

 

* 사진출처: http://dizin.co.kr/189394

 

 

난 우유를 좋아하지만 두유도 좋아해. 어쩌면 두유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카스텔라, 쿠키와 함께 먹는 우유는 정말 맛있지만, 마시고 나면 입안에 끈적끈적한 것이 자꾸 입 안에 맴돌아. 배가 살살 아픈 날에 차가운 우유를 마시면 몇 시간동안 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고생을 하지. 하지만 두유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아. 우유보다 고소한 맛도 나고, 마시고나서 입 안에 남는 것도 없고. 사람들은 우유와 두유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식품이라고 생각할 진 몰라도 사실 그 둘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어. 우유牛乳는 소젖을 짜서 얻는, 한자 그대로 ‘소의 젖’이야. 하지만 두유豆乳는 물에 불린 콩을 다시 물과 갈아서 만든 음료지. 우유가 동물에게서 얻는 다면 두유는 식물에게서 얻는 거야. 그런데 이상한 건, 두유가 영어로 소이밀크라는 거지. Soy-Milk. 콩-우유. 나는 그래서 두유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어. 두유는 콩의 젖을 짜서 얻는 게 아닌데 왜 milk라는 어미가, 乳라는 한자가 들어가 있는 걸까. 콩을 짜냈으니 두유豆油가 맞는 것 아닐까? 처음에 두유를 만든 누군가가 소이밀크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실수였던 게 분명하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인디언, 이라고 불렀듯이 말이야.

 

채식주의자들은 두유를 더 좋아해. 내가 알기로는 채식주의자는 종류가 둘 있는데, 세미(?)채식주의자들은 계란이랑 우유까진 먹어. 하지만 프로(?)채식주의자들은 계란이랑 우유조차 먹지 않아. 고등학교 때 원어민 영어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프로채식주의자였어.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을 안 먹고 늘 빵과 샐러드로 점심을 싸와서 먹었지. 하루는 그 사람이 빵을 먹고 있을 때 우리 반 여자애가 그 선생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점수를 잘 받을 요량이었을 런지는 몰라도 딸기우유를 하나 매점에서 산 뒤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고 있던 그에게 우유를 내밀었어. 하지만 그 교사는 우유팩에 적인 ‘milk’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손을 내저으며 단박에 거절을 하더라고. 여자애는 자신이 사온 딸기우유의 빛깔처럼 얼굴이 빨개졌지. 수업시간에 좀 더 집중을 했더라면, 그 원어민 교사가 첫 시간에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하는 걸 들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민망해져 있는 여자애를 뒤로 세우고, 내가 쉬는 시간에 마시려고 사두었던 두유를 내밀었어. 그리곤 이렇게 말했지. “하우 두유 두?”

 

나는 두유종류를 많이 알아. 이십 년 전에 처음으로 두유라고 인지하고 먹었었던, 가위로 모퉁이를 잘라낸 뒤 그 사이에 작은 빨대를 꼽아 마셨던 삼육두유, 목욕탕에서 아빠와 나오면서 사먹었었던 순두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구가 사온 고소한맛이 진했었던 검은콩 두유, 그리고 베지밀. 특히, 베지밀은 종류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플레인 요구르트같이 담백한 맛이 나는 베지밀 에이가 있어. 이건 아침에 식사대용으로 바나나랑 같이 갈아서 마시면 맛있지. 그냥 마시기엔 좀 밋밋하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유인 베지밀 비. 에이와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달콤한 맛이 나는 그 두유에는 분명히 당성분이 추가적으로 들어갔을 거야.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우연히 온장고에 있던 베지밀 비를 천원을 주고 사마셨을 때, 나는 아직도 그때의 따뜻함을 잊지 못해.

 

이렇게 나는 좋아하는 두유가 많지만, 그래도 내가 우유를 찾는 이유는 내가 두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것 하나와 관련이 있어. 두유는 왜 우유처럼 여러 가지 맛이 없을까? 더 이상 다른 맛은 낼 수 없는 걸까? 그게 제일 걱정되고 궁금해. 우유는 초코, 딸기, 바나나, 메론, 커피... 이 밖에도 많은 종류가 있는데 두유는 기본 맛, 달콤한 맛, 검은콩 딸랑 세 가지 밖에 없더라고. 언젠가 두유계의 에디슨이 나와서 맥주 종류만큼이나 많은 두유를 맛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Prologue : 이마트에서 쿨피스 파인애플 맛을 산 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왜 파인애플 우유는 없을까? 포도 우유는 왜 없으며 딸기 두유는? 그리고 커피 주스는 왜 없는지. 그러다가 정류장 옆으로 외국인이 다가왔다. 그는 일 리터짜리 베지밀 두유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 사진출처: 구글 검색(http://www.seehint.com/r.asp?no=1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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