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자유민주주의가 실제로 모든 이들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을뿐더러 ‘중립을 표방하는 탈정치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무방향성’이 오히려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와 서슴없이 타협하고 자본 세력의 경제적 이익에만 봉사하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성 자유주의만을 타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케인즈식 타협의 산물인 사민주의'의 한계까지 거침없이 지적하는 저자들의 과감한 주장은 분명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현재 우리는 과거에 비해 외형적인 경제발전과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정치적 불평등마저 두드러지고 있다.

 

보편적인 정치 권리와 사유 재산권을 주장한 자유주의 사상은 시민 권리의 외형적인 확대에는 기여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인 기본권 증진에는 오히려 방해물이 되어왔다.

 

 

저자 중 한 명인 전병찬 작가에 의하면 자유주의 사상은 ‘기존에 작동하는 권력관계’ 자체를 누락시켰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상이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 경제적 자유의 보편적 실현은 ‘진공상태’에서나 가능하다고 진단한다.

 

본인도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자유에 대한 권리 선언이나 법 제도만으론 개개인의 자유를 적절하게 보장해주지 못한다.  자유의 추구도 결국 사회적 관계안에서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가 실현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이 어떤지에 대해 먼저 살펴봐야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조건이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원자화된 개인들이 각기 추구하는 자유는 필연적으로 상충하기 마련이며 대개 경제적 우위를 이점으로 법률 자원을 용이하게 구사할 수 있는 강자의 자유가 결국 선택되기 마련이다.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루칸 웨이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 이론’(uneven playing ground)을 설명했다. 그들은 기울어진 운동장 이론을 바탕으로 ‘대표성을 보장하는 선거 제도’, ‘선거 자원에 대한 동등한 접근’, ‘법의 공정성’ 등이 보장되지 않는 이른바 ‘경쟁적 권위주의 체제’의 출현을 경고했다.

 

'합법이라는 테두리 하에서의 비폭력에 대한 강박'은 현재 87년 체제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현실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합법에 집착하고 중립을 견지하겠다는 무관심한 태도는 결국 현실의 부당함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작가들의 말마따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기어를 중립으로 해도 차는 어느 한 쪽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제도적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 ‘실질적 정치 참여의 제한’, ‘무방향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맹신’은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기득권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기제로 작동하면서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본연의 가치를 퇴보시키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속성인 개인의 원자화, 무방향성’, 그리고 ‘다수결의 한계’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이다. 저자들은 이를 극복하고 정의에 대한 정의를 확립하기 위해 ‘지성’과 ‘정치의 직접 참여 확대’를 융합하는 ‘진리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제도적 보완과 비폭력의 틀에서 상생의 가치를 되풀이해서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통한 구조 변환을 촉구하고 있다.

 

‘진리의 정치’는 개인의 권리와 행복에만 집착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익을 얻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기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관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어있다.

 

따라서 이미 이 시대에 내면화된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관념을 보기 좋게 해체하고 이를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적 윤리 추구로 선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저자들은 진리와 옳음의 기준에 대한 가치 확립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처음 의도했던 바와 상관없이 ‘플라톤식의 엘리트주의’로 변질, 오용될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들이 설명했듯이 ‘진리의 정치’에서 말하는 진리는 플라톤의 사상처럼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닐뿐더러 엘리트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외려 진리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보다 많은 이들의 참여를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지성의 탁월함’과 ‘다수 참여의 확대’를 동시에 포용하는 획기적인 시도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자생존과 개개인의 욕망 추구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시스템을 극복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윤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바로 알렉시스 드 토크빌과 로버트 달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사회 참여가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익이라는 장기적 관점’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행 정치 제도는 시민의 장기적 관점 확산을 장려하고 정치 참여를 증진시키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대표성이 왜곡된 선거 제도'와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경제적 조건의 악화' 등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의 탈정치화와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인을 충원하는 선거 제도와 통치 구조 전반에 대한 대전환의 실패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현행 정치 제도는 변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정치인들의 합법적인 회전문 등용을 야기하는 한편, 참신한 신진 정치인들의 개혁의지를 사전에 걸러내는 검열 기제로써 작동하고 있다.

 

또한 ‘합법에 대한 강박’과 ‘방관’에 가까운 ‘관조적 중립’은 ‘선진 시민의식’과 매우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는 정치를 포함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대전환을 방해하는 구태이다.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고든 경찰청장은 ‘조직이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고 법이 더 이상 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악인이 그것을 농락하는 상황’에 대해 한탄했다. 영화 속 그의 고민처럼 한국 사회에서 법은 ‘옳음의 이정표’가 아니라 가진 자들이 법적 처벌을 경감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기술적 수단’으로 자주 악용된다.

 

박근혜 국정 농단 사태 당시, 법이 정의회복이라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우병우같은 ‘법비’들에게 농락당하기까지 한 상황에 대해 우리는 좌절감을 충분히 경험했다. 법치만능주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득권의 방패막이가 되어 사회진보를 정체시킨다. 물론 법치정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2011년 12월 경제위기 당시,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그리스 시위대, 출처: AFP통신 )

 

그러나 사회변화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사회정의에 역행하는 법에 대해서는 설령 그 방식이 폭력을 동반한다할지라도 시민불복종을 통해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이는 폭동이 아니다.

국민의 기본 권리에 대해 정부에 신탁한 권리를 넘어설 때, ‘정부에 대한 혁명권’을 정당화한 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존 로크 역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 표심이 아닌 ‘옳음과 정의’를 추구하는 진리의 정치를 실현 할 것

2. 그리고 이 진리의 기준을 만들어 가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 권리를 보장할 것

3. 자유주의적 개인의 관점에서 탈피하여 공동체적 가치에 헌신하는 시민성(civic virtue)을 회복할 것

4. ‘기계적 중립’과 ‘비폭력에 대한 강박’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저항권‘을 보장할 것

등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2030세대들을 위해 이 책에서 저자들이 외치고 있는 시대적 요구이다.

 

이 책은 현실의 민주주의가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있는 것이지, 결코 자유, 평등, 민주, 법치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아보인다. 법치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분명 '적당한 사회적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꾸기위해서는 '합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만 사고하는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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