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공화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영국은 극도의 중립적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였다. 오히려 독일과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로 국민군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스페인 본토의 영국령 지브롤터 주둔 영국 해군은 이를 방관하였다. 프랑스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지원에 주저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의한 ‘불간섭 위원회’가 영국의 주도하에 설치된 이후로는 국제 협약 상의 이유로 내전 개입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불간섭 위원회의 참여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 국민군을 도와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협약 위반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련과 멕시코 만이 스페인 공화 정부의 유이한 후원자였고 특히 소련은 전투기, 폭격기, 전차, 군사 고문단, 공산당원을 비롯한 광범위한 물적, 인적 지원을 하였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국가들과 공산주의 소련이 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왜 그들은 공화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파시즘의 확대를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 정부를 지원해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스페인 내전’의 저자 앤터니 비버는 저서에서 확전에 대한 부담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를 자극하려하지 않기 위해 노골적인 유화 정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스탈린도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초반에는 공화 정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유화 정책은 파시즘 국가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음으로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이는 곧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이 파시즘 확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1917년 공산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련 볼셰비즘의 확대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유 진영 국가들이 민주 공화정을 지향했던 스페인 공화 정부를 소련과 비슷한 공산주의 계열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이 본격화되고 마드리드가 사실상 소수의 소련 고문단과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목격한 이후, 공화 정부 색깔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스페인 공화 정부가 좌파적 성격은 어느 정도 띠고 있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자유선거를 보장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보통 국가’였다.(실제로 공화정 초기에는 알칼라 사모라-카세레스 키로가의 온건보수 내각이 집권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 눈에는 공화 정부는 ‘또 다른 모스크바’와 다를 바 없었고 계급 혁명을 위해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불안정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오히려 서구 진영의 보수 정치가, 자본가 계층은 친기업적이고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건 프랑코 국민 진영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는 미국 하원에서 공화 정부에 대한 무기 수출 안이 부결되고, 서방 은행들이 점점 공화 정부에 대한 신용 대부를 거부한 반면, 프랑코 정부에 차관을 지원해주는 식의 형태로 노골적인 국민진영 지지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국경으로 유입되는 무기를 막기 위한 감시 활동을 벌였는데 대부분 소련의 무기가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거쳐 들어가는 것만 적발하였고 지중해에서 국민군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해상 지원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스페인의 공산화를 두려워 한 자유 진영 국가 엘리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불간섭 위원회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의 위험한 도발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공화 정부 패망에 일조하였다.      

국제 여단의 참전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와 이성을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참전했다.

(출처: http://www.malgusto.com/pequenas-pildoras-historicas-30marzo2015/)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 국가들이 정치적 이유로 공화 정부에 대한 정규군 파병에 미온적이던 동안, 코민테른(전 세계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의 주도로 의용군을 모집, 국제 여단이 결성되었다. 물론 인적, 물적 측면에서 소련의 개입과 지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북유럽, 중남미, 중국 등 다양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자발적으로 참전한 사례였다. 총 53개국 약 3만 5천여 명의 병력 규모였고 이들은 간단한 제식과 사격 훈련을 거친 후, 즉시 마드리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물자 지원은 넉넉하지 못했다. 무기는 낡았으며 각국에서 물자 보급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16종류의 서로 다른 구경과 탄약을 쓰는 총기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베테랑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병사들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작전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여단의 병사들은 반강제로 입대한 국민군과 달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고,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공화 정부가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성의 수호를 위해 날아온 자유세계의 사람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했지만 당시,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공화 정부를 지지하였다. 국민 진영과 그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적 성향이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이 펜을 잠시 던져놓고 자신의 서재를 뛰쳐나와 공화 정부를 지원하러 기꺼이 총을 들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어서 귀국 한 이후에는 자신이 보았던 전쟁의 참상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을 ‘카탈루냐 찬가’로 저술하였다.


“1936~1938년 바르셀로나의 시가전”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공화 정부를 위해 복무했고 국민 진영에 대한 반감 뿐 아니라, 공화 진영 내부의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출처: http://www.fornewssites.org/posts/imagenes/17325420/Fotos-antiguas-con-gran-historia.html)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말로와 생텍쥐베리 역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공화 정부를 도왔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파시즘의 만행을 알렸고 후에 내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남겼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물론 참전 후 조지 오웰처럼 공화 정부 내 좌익 정당들 간의 파벌 싸움으로 환멸을 느낀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지성을 수호하고자 한 대의명분은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공화 정부는 왜 패망하였는가?

여튼 공화 정부는 1939년 4월 1일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패전의 원인으로는 공화 정부의 내부 분열을 들 수 있다. 온건한 성향의 아사냐 대통령과 키로가 총리가 이끌었던 초기 공화 정부는 내전 발발 당시 자신들의 확실한 우군이었던 노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키로가 내각은 36년 이미 국민 진영의 반란이 가시화되고 각 지역을 방어하는 공화군과 치안 병력들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경찰들이 속출했다.) 제일 믿을 만 했던 세력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중앙 정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국민 진영 반란군은 식민지 모로코, 카나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서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 북부의 부르고스 지방을 휩쓸었다. 노동자들과 민간인들을 무장시켜 반란군에 저항하는 것은 이제 해당 지방 행정 수장들의 결단에 달려있었다. 하엔 시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주지사가 반란 가담 우려가 있는 경찰 병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대신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국민군의 반란을 사전에 제압한데 반해, 오비에도 시와 같은 경우처럼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한 우유부단한 주지사 때문에 반란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어 공화 정부의 관리들과 노동자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태생적으로 민중을 신뢰하지 못했던 공화 정부 정치 엘리트들의 오판이 결국 프랑코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공화군 포로들”

국민군과 공화군 모두 포로들을 무작정 '데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1936년 11월, 시에라 데 과다라마

(출처: http://www.voxeurop.eu/en/content/article/781661-civil-war-still-open-wound)

1. 공산당의 횡포: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자는 다 프랑코의 첩자들이다!

공화 정부 집권 내각인 인민 전선은 다양한 이념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 좌파 공화주의, 중도 자유주의, 아나키즘(절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을 표방하는 연립 정당들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국민 진영이 개전 초기에 이미 프랑코를 총통(generalissimo)으로 추대하고 내부 결속을 다진데 반해, 공화 정부는 내전 기간 동안에만 네 번의 내각 교체가 단행되었다. 통일되지 않은 지도 체제는 전시 상황을 관리하는데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소련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스페인 공산당은 공화 정부 내각에서 주도권을 쥐려했고 사회주의 세력과 아나키즘 세력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이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당의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운영 방식은 절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의 거센 불만을 야기했다. 

심지어 물자 보급을 담당하던 공산당 소속 장교들은 전방에서 국민군과 싸우고 있는 몇몇 부대에 무기 지원과 의약품 보급을 거부하였는데 해당 소속 부대장이 공산당원이 아니거나 아나키스트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온건 자유주의자였던 후안 네그린이 공화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자 그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산당의 횡포를 방관했다. 공산당원이 주동이 된 군 수사국은 묻지마 식으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거나 공산주의에 비판하는 좌파 진영 인사들까지 잡아 감금, 고문, 처형하였다. 스페인 공산당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으로 일관된 숙청은 프랑코 국민 진영이 했던 짓거리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이에 대해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2. 와해되는 국제여단

인민전선 내각 안에서 불필요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동안 사상 검증에 따른 보급품 수송이 자주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전방에 배치된 공화군 병사들은 점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자유를 수호하려 이역만리 타국으로 온 국제 여단 소속 병사들은 점차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간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편지로 본국에 있는 가족, 자국 언론에 공화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선이탈, 탈영, 태업 등의 방식으로 국제 여단 병사들이 저항하자, 스페인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은 거칠게 대응했다. 편지를 검열하거나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국제 여단 병사들을 집단 수용소, 정신 병원에 감금하였고, 심지어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급기야 1937년 9월에 공화 정부가 국제 여단 병사들의 지위를 스페인 공화군 소속으로 규정짓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외국인이었던 국제 여단 병사들이 스페인 군법의 적용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들의 제대나 본국 귀환은 이제 기약이 없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자 했던 그들의 용맹함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3.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대립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보수 국민 진영과 진보 공화 정부 간의 이념 전쟁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 왕정복고(카를로스 왕당파), 보수적 공화주의(몰라 이하 여러 장군들), 급진 파시즘(팔랑헤당) 등 국민 진영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내부에도 여러 대립 구도가 존재했다. 


“필사의 탈출”, 1939년

공화 정부의 패망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자 많은 스페인인들이 목숨을 걸고 스페인-프랑스 국경을 넘어가 수준 이하의 난민 생활을 감수했다. 

(출처: http://es.fanscup.com/real-betis-balompie/forumpost/39595)

특히 공화 진영의 내부 결속을 저해했던 원인 중의 하나가 중앙-지방간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었다.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역은 전통적으로 마드리드 주도의 중앙 집권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고 이는 바스크 인들이 대다수였던 바스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 불신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인들과 바스크 인들이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를 지지한 까닭은 그나마 공화 정부가 프랑코보다 덜 중앙집권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은 프랑코라는 점 외에 여러 면에서 이질적이고 융화될 수 없었던 중앙-지방간의 느슨한 연합은 시간이 지날수록 와해되기 시작했다. 내전이 발발하자 지방 정부의 자치는 보류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선호하는 공산당이 공화 정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다른 좌파 정당을 탄압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대다수였던 카탈루냐 지역은 이에 반발, 1937년 5월, 스페인 공산당을 상대로 ‘내전 속의 내전’을 벌였다. 여기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득세하자, 공화 정부 내의 여러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제는 심화되었다. 1937년 초에 남부 도시 말라가가 결국 국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공화 정부의 총리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독립 의식을 싫어하여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단결하는 내부 통일에 집착할수록, 지방 민심을 점점 상실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화 정부 패망 임박”

1938년 5월, 국민 진영(회색)의 공세는 공화 정부(붉은색)를 두 동강 내버렸고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다. 패전이 확실시되었음에도 이듬해까지 전쟁이 계속된 이유는 공화 정부가 프랑코를 상대로 항복 협상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4. 선전 효과 집착에 따른 전술 실패

공화 정부의 관료들과 공산당원들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선전 효과에 집착했다. 1937년 초부터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독선은 더 심해졌는데 전략적으로 별 의미 없는 소도시 몇 개를 대병력을 이용해 점령한 후, 자신들의 성과를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자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제공권에서 절대 우위였던 국민군은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공화군에 뺏긴 지역을 금세 수복하곤 했다. 오히려 국민 진영의 뒤이은 반격으로 공화군은 더 큰 손실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불필요한 병력 소진은 1938년 7월 에브로 강 대공세 작전의 실패로 전체 병력 대부분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이 공군을 이용하여 아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 식의 무리한 전진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지만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마드리드의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내부에 프랑코의 첩자가 있어서 패배했다는 논리를 펴며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다음편 예고)두 개의 스페인(下): 아물지 않은 상처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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