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년 7월, 수많은 2차 가해에 시달리다 못한 후배가 죽었다.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자살의 징후가 가득했다. 산적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바빠서 그냥 넘겨왔던 게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 애의 사건을 일개 가십 취급하며 소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성폭력을 화제거리 취급하며 실명이 궁금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질려버렸다. 온통 그 애가 당한 성폭력의 수위에만, 그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한 피해자 상에 부합하는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여러모로 악몽 같은 여름방학이었다.
오롯이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의 죽음이었다. 나를 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직접 지목한 진정인의 죽음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여러모로 내게 큰 상실이었다. 나는 그 애의 죽음과 마주하며 과연 앞으로 내가 성폭력 사건 자체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가해자가 사과문을 빙자한 입장문을 붙이고 나서 익명 커뮤니티 반응[사진=커뮤니티 캡처]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학내 익명커뮤니티에 만연한 수많은 2차 가해다. 후배가 생전 고통 받았던 사건 두 개 모두 2016년에 벌어진 일인데, 아직도 당시 익명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때 익명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에게 ‘왜 익명커뮤니티 시끄럽게 여기에 공론화 하고 난리냐’ 는 반응과 가해자에 동조해서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가담하는 반으로 갈려 시끄러웠다. 아무리 피해자 편을 들어도 ‘너 피해자 본인이냐? 평소 행실 보니까 억울할 일도 없겠는데 왜 난리냐?’ 는 반응만 돌아왔던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익명 뒤에 숨어 그를 적극적으로 난도질했고, 그의 과 사람들은 피해자를 평소 행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혹자는 ‘별 일 없었으면 과 회장까지 했을 인재’의 스캔들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마저도 익명커뮤니티의 분위기가 무서워 침묵해야만 했다.
결국 그 애에게 자기를 비난하는 익명 여론은 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싸워주지 못했던 우리 모두와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해가 바뀌고 성소수자 모임 레인의 동아리 승격심사 과정에서 가해자의 친구가 또다시 2차가해를 했고 – ‘없는 사실을 지어내 타인을 자살 직전까지 몰아간 사람이 포함된 동아리의 진실성을 의심한다’ 는 내용이었다. – 또 다시 본인의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와 괴로워하던 그 애는 결국 우리 모두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2차 가해에 대한 의문은 내 안에 남아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2016년 1학기에 있었던 성폭력사건 공론화 당시, 나는 가해자에게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난을 경계했다. 이 공동체에 가해자에게 떳떳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가해자가 가해를 저지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묵인과 방조를 저질렀고, 성폭력문화에 문제제기하지 않는 우리로부터 성폭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는 내가 가진 생각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 게 너무나 힘이 든다. 스스로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대자보를 쓰며 학교의 미온적 대처를 규탄하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반성폭력 실천 모임 활동을 하던 그 애를 떠올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까지도 2차 가해를 저지르며 떳떳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피진정인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공허해진다. 이론과 함께하지 않는 실천은 공허한 실천이라는데, 나는 그런 ‘공허한 실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2018년이 되고 미투 운동이 사회 각계에서 터지는 동안에도, 성공회대학교는 여전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 틈에 수많은 성폭력이 벌어지고 묵인되고 사라진다.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생사회를 마주할 때마다 그 애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양예원 씨와 스튜디오 실장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볼 때마다 2016년 우리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가해자 입장대로 떠들어댔던 사람들의 차이점이 대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 가해자의 말이 진실이요, 양 측의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양비론적인 말을 진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그 애를, 나를, 수많은 피해자들을 무너지게 했을 것이다.
성폭력에 의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타살자들을 마주하게 될까. 자신의 피해를 꾹꾹 눌러 적었던 그 애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며 괴로워하고 위안받았던 다른 학교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댓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살아있을까? 부디 죽지 않았기를.
* 2차 가해/ 2차 피해에 대한 용어적 논의가 있지만 글을 쓸 당시 적었던 대로 2차 가해라는 표현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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