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은폐하고 보수는 외면했던 개성공단의 진실

추재훈

도대체 왜 개성공단이 평화를 위한 안전장치란 말인가? 애초에 적지(敵地) 한가운데 협력적 공단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오늘날 개성공단 존폐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개성공단이 기획된 의도가 상당부분 숨겨져 있기 때문에 유발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성공단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다. 하지만 개성공단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제 자체는 너무나도 불충분하며, 그 숨겨진 의도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개성공단과 평화 혹은 안정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론적·현실적 구상과 근거들이 숨어있다. 이를테면 전략적 요충지인 개성에서의 북한군 후퇴, 개성공단을 근거로 하는 한반도 국제경제지구의 가능성 확대 등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그래서 꼭꼭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개성공단의 성격이 있다. 신자유주의다.


개성공단이 극도의 우파 자본주의적 기획의 결과였음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개성공단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개성공단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이 때의 전략은 단순히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햇볕정책이라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정책의 산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좌파·우파와 진보·보수라는 이념적 구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좌우와 보혁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가 만연한 사회기 때문인 탓도 있다.


▲ 정부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조치로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파주 경의선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차량에 물품을 싣고 복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분단체제, 좌-우, 보-혁의 왜곡


개성공단을 이야기하기 전에 좌우와 보혁에 대해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좌파-우파, 진보-보수의 틀은 복잡하다. 그러나 핵심은 간단하다. 먼저, 좌파-우파는 결코 민주주의와 관련된 구분이 아니며, 경제적 지향성과 관련된 구분이다. 우파는 사익 중심의 자본주의를, 좌파는 공익 중심의 사회주의를 지향한다(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레닌이 기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소수 경제기득권의 횡포를 방지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본연의 이념이다. 북한을 결코 사회주의국가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진보와 보수의 경우, 진보는 보다 개혁적인 사람들, 보수는 보다 현상유지적인 사람들의 집합이다. 진보와 보수가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란 없으며 시대에 따라 변한다. 카이사르 시절 로마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보수, 왕정주의자들이 진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세계는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이므로, 우파는 자연스럽게 보수로 귀결되었다. 마찬가지로 좌파와 진보 또한 연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말 공산권이 붕괴하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한 채로 개성공단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개성공단은 우파적 이념의 발현이다. 개성공단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대한민국의 자본으로 북한에 공단을 짓고,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남북이 나누어갖는 것이다. 북한은 노동력만 투입하고 인건비를 벌어들이며, 나머지 이익은 한국 기업이 갖는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의 돈 놓고 돈 먹기 전략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원리다.


▲ 지난 12일, 개성공단기업협회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진 새누리당(左)과 정의당(右) ⓒ오마이뉴스


개성공단, 극도의 자본주의


따라서 이런 식의 공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북한은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커진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쉽사리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개성공단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아직까지 북한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처럼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을 때 개성공단을 버릴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즉, 개성공단은 더 커져야 했다. 가령 지금까지 개성공단에는 총 123개 기업이 입주해있었는데, 만약 1,230개 기업이 있었다면, 혹은 한미의 협조 하에 삼성이 들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남북이 구상한 대로 해주공단, 신의주공단까지 만들어지고, 나아가 함흥공단, 원산공단 등이 만들어져 몇 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한국 기업으로부터 월급을 받았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북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지금 중국의 영향력과 맞먹거나 혹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북한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경협을 통해 천문학적인 세금을 거둬들이고 여기에 크게 의존할 만큼 대남의존도가 높아졌다면, 그래서 경협 중단이 정권 운영에까지 타격을 입힐 정도가 된다면, 지금처럼 남북경협 중단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무작정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자행할 수 있을까?


우파가 보수와 교집합이 많고 좌파가 진보와 교집합이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햇볕정책과 개성공단이 자칭 보수세력에게 지탄받는가? 그것은 안보지상주의가 만연한 한국의 분단체제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우파적 보수성을 지향하는 사람조차도 정치적으로 반공적·안보적 보수성에 매몰되는 분단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이것을 북풍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북풍이 향하는 곳은 이른바 좌파 혹은 종북이라고 이름붙여진다. 이곳에는 안보지상주의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들이 뒤섞여있는데, 진정한 의미의 우파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상당한 국민들은 이를 믿는다. 개성공단은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우파적 논리에 따르지만, 분단국의 왜곡된 정치지형 속에서 개성공단이 좌파적이라는 모순적인 비난이 생겨난 것이다.


▲ 개성공단 총계획(左, ⓒ용인시민신문). 계획은 2008년 이후 남북관계 악화와 더불어 중단되었고, 현재는 1단계까지만 진행되었다(右, ⓒ시사저널).


전장에서 시장으로


햇볕정책이 우파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햇볕정책은 남북의 경제적 협력에서 시작해 정치적 협력까지 이끌어낸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이를 기능주의라고 한다. 기능주의는 “자유로운 교역은 전쟁을 억지한다”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모태가 되어, 현대 유럽에서 통합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 유럽연합의 근거가 되었다. 즉 기능주의란 단순히 일상적·평면적 신뢰가 아니라 기능적 협력을 통한 관계적·전략적 신뢰의 구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럽은 기능주의적 사고에 따라 각종 경제적(기능적) 협력을 펼쳐나가면서 1958년에 유럽경제공동체(ECC)를 만들고, 이를 1967년에 유럽공동체(EC)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1991년 유럽연합(EU)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유럽은 경제위기에 고전하고 있지만, 위기에 맞서 더욱 전향적인 통합을 위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대전 후 어수선했던 유럽이 통합되는 과정을 벤치마킹한 정책이 햇볕정책이며, 그 속에서 설계된 결과물이 개성공단이다.


그런데 남북은 유럽과 크게 두 지점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로 유럽의 전반적 경제격차에 비해 남북 경제격차가 훨씬 심하다는 점, 둘째로 유럽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안보협력체가 1949년 먼저 만들어져 있었던 점이었다. 남북 경제격차는 유럽 통합이 진행되던 때 유럽 내부적 격차보다 훨씬 심하므로 한국 자본이 북한에 투입되면 될수록 북한의 경제적 종속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남북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은 경제협력의 심각한 제약이었으며, 따라서 경협은 군사대립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보다 전향적으로 시도되어야 했다.


▲ 유럽공동체(EC)는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EU(유럽연합)으로 출범했다. ⓒAPF


시장에서 광장으로


대한민국이 햇볕정책 구상을 처음 내놓았을 때 북한이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고민했던 부분도 이 부분이다. 두 정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햇볕정책은 본질적으로 북한 경제의 한국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키는 극도의 자본주의 정책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두 정부는 햇볕정책이 평화를 위한 정책이 될 수 있도록 경제적 팽창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 언행을 최대한 삼가고, 사회적·문화적 협력을 병행하며 정치·군사적으로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역사, 학문, 예술, 종교, 스포츠 등 수많은 분야에서 남북 협력이 이루어졌고,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걷고 있는 최근까지 만월대 공동 발굴 등의 협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북한은 같은 노동력을 투입했을 때 남북경협보다 북중경협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지만 개성공단을 더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햇볕정책이 자리잡기 시작한 2003년 이후 대남도발은 없었으며, 공교롭게도 햇볕정책이 멈춘 2008년 이후 북한은 대남도발을 자행하기 시작했다(이 지점에서 핵 문제는 분명히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단순히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동북아시아 및 세계 전체의 문제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가 바탕이 됐을 때 개성공단이 남북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제는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햇볕정책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고, 개성공단이 그 결과물이라는 이유로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여러 문제점을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그것이 제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신자유주의를 통해 최소한의 안정적 남북관계를 일구어낼 가능성은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식의 사고가 불만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의 왜곡된 정치지형에 의해 개성공단이 이상한 오해의 온상이 된 현실이다.


오늘날 북한문제와 관련해 중국역할론과 중국책임론이 나오는 이유는 중국의 대북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대외교역 중 대중교역이 90%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전략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중국이 북한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에 반해, 지금은 중국이 전유하고 있는 대북영향력을 대한민국이 스스로 갖고자 기획된 것이 햇볕정책이었다. 또한 그 영향력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경협이 늘어났다면 우리가 지금과는 달리 주도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남북이 함께 일구어낸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 정부도 강조하는 신뢰와 평화라는 원칙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개성공단은 결코 헛된 공상이 아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AP통신>


 

<채권단의 긴축재정안을 반대하는 그리스 국민들 프레시안>

 

그리스 사태가 결국 일단락되어지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리 편치 않다. 그리스는 지난달 30(현지시간)까지 국제통화기금(IMF)에 채무를 갚지 못 하면서 사실상 디폴트(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 유럽채권단은 이에 긴축재정을 조건으로 하는 구제금융안을 그리스 정부에 제시했지만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반대의사를 표하며 국민투표에 부쳤고, 그 결과 6139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국민들 또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치프라스 총리는 며칠 뒤 기존 협상안보다 무려 50억 유로나 더 긴축하는 내용의 파격적인 재협상안을 채권단에 제시했다. 은행의 붕괴와 유로존 탈퇴(그렉시트)의 우려로 마련한 긴급 강구책이란 판단이었다. 결국 그리스 의회의 승인을 받아낸 이 안은 유로존 정상회의에 회부되어 13(현지시간) 그리스 3차 구제금융에 대한 결정을 이끌어낸 상태다.


 

그리스가 그놈의 복지병때문에 망했다?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선 언론들의 다양한 원인 분석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아니나 다를까 그리스 사태의 원인을 과잉복지’, ‘복지병인 것 마냥 그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 기사를 내놨다. <지원금 300조원도 탕진공짜복지 좋아하다 이 지경까지”> 실제 조선일보 지면에 실렸던 제목이다. 과연 그리스가 복지때문에 망하게 된 걸까? 먼저 그리스의 1인당 국민소득(GNP) 대비 정부 복지지출 비중은 21.3%로 유로존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복지로 유명한 스웨덴은 27.3%, 덴마크는 26.1%, 핀란드는 24.9%(2012년 기준). 복지지출이 많아 그리스가 저 지경이다? 망했다면 저 북유럽 국가가 먼저 망해야 옳다. 결국 애초 사실관계부터 틀린 것이다. 다음 과도한 연금수령액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의 노년층이 받는 연금의 비율은 2011년 이후 3차례의 채권단의 긴축 요구에 의해 무려 40%이상이 삭감되었다. 또 그리스 연금수령자의 45%는 빈곤선인 월665유로(83만원) 미만의 연금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 전체 가구의 49%의 주 소득원이 노인연금에 의지하고 있단 사실은 그리스의 열악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연금이 곧 생계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과잉복지라 칭하고 또 탓할 수 있는가?

 


<한국일보>

 

그 다음 이런 과잉복지로 인한 그리스 국민들의 나태함을 이유로 많이들 꼽는다. 그러나 그리스는 연간 노동시간이 OECD국가 평균(2013년 기준) 1,770시간보다 훨씬 많은 2,037시간으로 멕시코, 한국 다음으로 가장 높은 나라로 기록돼있다. 유럽에서 2,000시간 이상 일하는 나라는 그리스가 유일하다. 이처럼 그리스는 우리가 터무니없이 걱정하는 만큼 복지가 과하지도 또 나태하지도 않다. 우리나라처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그에 걸맞은 복지 권리는 누리지 못 하고 있는 처지다.

 


죄지은 금융자본과 부패정권, 탈세자는 쏙 빠진 채, 애꿎은 국민들만 벌 받으라고?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구제금융을 받는 동안 유로존 정상들 특히 그리스 채권 비중이 높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채권단은 그리스에게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요구했고 또 그리스는 성실히 이행해왔다. 재정지출을 줄였고, 빚도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가 됐다. 하지만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실업률이 25%로 치솟았고, 2009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GDP(국내총생산)22%나 감소했으며, GDP대비 부채비율도 35%나 증가했다. 부채규모는 갈수록 증가해 20113,559억 유로로 최고치를 찍었고 2015년 현재 3,127억 유로(400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말 당시 1,000억 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었다. 하지만 현재를 미뤄보면 구제금융이 그리스 부채를 줄이는 데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 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리스의 디폴트 사태는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애초에 그리스는 유로존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의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2001년 당시 그리스 전 정권과 미국 금융회사인 골드만삭스의 국가채무 은폐 작업을 통해 무리하게 가입했던 것이 원흉이었다. 한 마디로 국채 사기를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는 각종 공공재 수입을 담보로 28억 유로를 골드만삭스로부터 빌렸었다. 유로존 가입만 하면 장밋빛 미래를 예상했던 그리스는 점차 수출경쟁력 하락과 경기침체에 빠지자 손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금융회사들의 검은 손을 잡아버렸다. 이후의 구제금융이 실질적 경기진작 효과를 거두지 못 하게 된 이유도 이와 같은 금융자본의 채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또 그리스와 유럽연합 내부 역시 당시에도, 지금까지도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람들도 가득 차 있어왔다.

 

탈세 또한 빈번하고 그 액수도 어마어마하다. 연간 세금 청구액의 불과 20%만이 세입 되고, 나머지의 절반인 40%는 탈세, 또 절반은 뇌물로 바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해운업이 강세인 그리스에선 해운재벌들이 사업등록지 이전 등의 방법으로 연 2000~3000억 유로의 탈세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2009년 그리스의 탈세액은 약 2000~3000억 유로로 당해 재정 적자의 3분의2에 달하기도 했다.

 

이렇듯 부정부패와 금융자본주의의 결탁이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유럽채권단의 그리스 국민들을 향한 긴축재정 요구는, 죄인은 가만둔 채 애꿎은 이들에게 벌 받으라 강요하는 꼴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스인의 입장에선 가혹하고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SBS>


 

차라리 그렉시트(유로존 탈퇴)가 기회일 수 있다.

 

법률적인, 또 도덕적인 관점에서 그리스가 긴축재정으로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채무이행의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유로존의 시스템은 그리스와 그 국민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IMF 등 국가재정 및 개발원조 업무를 맡았던 엘리엇 모스 박사에 의하면 자국 통화를 쓰는 국가들은 무역수지가 악화되면 통화 가치를 낮춰 수출경쟁력을 높일 수 있지만 유로존 국가는 통화가치를 독자적으로 낮출 수 없어 무역적자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무역적자의 증가는 정부부채 증가 및 경제성장의 둔화로 이어진다. 그리스 위기도 이런 과정에서 발생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는 제조업 비중이 5.7%로 매우 낮으며, 관광 및 해운업 등 서비스업의 비중은 무려 90%에 이른다. 그런데 자동차, 가전제품 등 대부분 소비재는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결과 무역수지가 적자 구조인 것이다. 근본적인 경제 산업구조의 개편이 선차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구제금융을 통해 유로존에 남아있다 한들 과연 그리스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미지수다. 더구나 애초에 유로존의 회원국가간의 경제규모가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유로존의 존재이유와 시스템 문제, 그리고 단일통화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시적인 유로존 탈퇴를 통해 자국 경제의 흐름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살피고 체감해보는 것도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은 공존의 길이다.

 

유로존은 경제도 그렇지만 철저히 정치적 연합체에 가깝다. 경제규모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국 패권과 대등한 위치에서 견제하고 협력하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그렉시트(유로존 탈퇴)를 선언했다면, 그리스와 같은 부채와 경기침체에 시달리는 나머지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G는 그리스다)국가들 또한 연달아 유로존 탈퇴를 염두에 둘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훗날 유로존의 영향력 상실과 나아가 붕괴까지 이어질 수 있기에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체제 유지를 꾀하는 유로존 강대국인 본인들로서는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올해 초 총선에서 승리를 거둔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치프라스 총리는 이미 공약으로 구제금융 재협상 카드를 들고 나왔었다. 국민의 삶 개개인을 파괴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제금융 협상안은 일정 부분 제외하면서, 채무의 30억 유로 정도의 헤어컷(채무탕감)을 요구해왔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채무이행에 대한 책임감과 의지를 가졌던 사람인 것이다. 기존에 정치적으로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 사태의 책임자로 몰고 비난하는 이들은 이 같은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리스 채권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전쟁보상금을 추징당했지만, 1953년 런던합의를 통해 채무탕감을 받은 전례가 있다. 그로 인하여 경제위기에서 타개했고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일 역시 이제는 자신들의 예전 기억처럼 위기의 그리스에게도 그와 같은 선처와 배려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체제 공고화를 위해서 말이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이후 갑작스레 구제금융 재협상안을 제시했을 때 대다수의 국민의 반대의사를 무시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치프라스는 국민투표의 결과가 곧 긴축재정안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 뿐이지, 그렉시트의 의미는 아니란 걸 먼저 깨달았다고 본다. 또 그의 협상안 내용을 보면 긴축재정 액수를 늘린 것은 불만일 수 있겠지만, 채무 만기 연장과 법인세 강화, 채무탕감 요구 등을 제시했다. 자국의 탈세문제 같은 부정부패 해소와 더불어 채무탕감을 직접 요구함으로써 유로존의 시스템 문제를 건드리며 온전히 자신들만의 문제 때문이 아니란 것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결국 본래 예상 밖으로 탈 없이 그리스 3차 구제금융안이 유럽정상회의서 장장 17시간 마라톤 회의 끝에 타결됐다. 그리스는 기존 요구액보다 108조원이 많은 86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얻게 됐다.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던 독일과 그리스는 공존의 길을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에 그리스를 긍정적으로 예견하기는 힘들다. 삐걱거리는 유로존 시스템의 한계와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언제 그리스를 잠식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치프라스 본인은 자신의 판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걸 바라보는 현재의 그리스 국민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그리스의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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