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열린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여행기 입니다. 마지막 날의 감상을 담았습니다.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듬었습니다.



#1 영화의 전당

 

11시에 시작하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월터 살레스, 2014)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10시 영화를 예매한 K에 맞춰 숙소를 일찍 떴다. 서둘렀던 덕인지, 시간계산을 잘못 했던 탓인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 여유로워서 나쁠 건 없겠다.

 

미처 가지 못했던 화장실을 들르고, 무료 배포 잡지들을 훑다보니 금세 10시가 가까웠다. K을 먼저 보낸 뒤, R과 전날 미리 얘기해둔 대로 기념품점에 들렀다.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거칠게 그려진 파우치 하나를 선물로 골랐고, 아시아 영화와 프랑스 영화에 대한 책을 한 권씩 총 두 권 집었다. 물론, 책 두 권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요새 책 선물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카드 결제기가 먹통이라며 계산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1030분 영화 시간에 맞춰 R마저 떠났다. 왠지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류는 카드결제기가 아니라, 일본인 기자가 R넨 신용카드에 있다는 걸 봉사자가 깨닫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드를 받아든 일본인 기자는 허무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다. 나는 속으론 분통을 터뜨렸으나, 최대한 티를 숨긴 채 웃으며 카드를 건넸다. 내 다음 차례로 계산대 앞에 선 백인 여자의 티 없는 미소도 위선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자는 전적으로 선해보였다.

 

#2 영화의 전당에서 CGV 가는 길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영화를 보다 지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에는 어젯밤 대책 없이 들이켰던 음식이 무거웠다. 편의점에서 계란 두 개와 커피를 하나 샀다. 명색이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백화점이나 편의점, 뭐 하나 제대로 매력적인 할인 상품이 없었다. 계란 두 개는 ‘1+1’이 아니라, 원래 두 개들이 제품이었다.

편의점 계란은 껍질이 쉽게 깨져 좋았다.


무료 잡지들, 책 두 권, 파우치가 담긴 봉지에 커피까지 더해지니 새삼 무거웠다. 날은 더웠고 아직 영화 상영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무턱대고 영화의 전당 근처를 걷는데, 문득 기뻤다.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제각기 흩어졌다. 그중에는 나처럼 한가득 영화제 물건들을 챙기느라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 벤치에 자유롭게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읽고 있는 남자는 커플이어도 좋았고, 생판 모르는 관계라도 좋았다. 야외에 설치된 책 판매 부스에는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책을 파는 사람인지, 누가 책을 구경하려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둘은 하나같이 표지를 들추고 있었다. 나는 마치 책을 파는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책들을 살펴보았다.

팔리기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3 CGV


영화의 전당에서 CGV로 향하는 길목에서 내가 느꼈던 기쁨이란, 이를테면 암묵적 유대감이었다. 마치 영화제라는 거대한 결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영화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의 거대한 스튜디오 속 연기자들처럼. 트루먼(짐 캐리)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단 하나의 암묵적 메시지를 공유한다. “우리는 연기자다.” 그들은 거대한 가상 마을 속에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 모든 혼란통은 어디까지나 저 메시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트루먼 쇼의 스튜디오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좋은 것이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늙은 사람, 좀 못생긴 사람, 잘생긴 사람 할 것 없이. 그들은 거기 있기 위해서 바로 그곳에 있는 거니까. ‘연기자로서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고, 그들의 모든 행위와 말은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마주치는 시선, 누군가의 시큼한 냄새, 유난히 더운 공기. 연기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야릇하면서도 흥분되는 그 모든 대상들.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는 꼬마애와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잔소리를 내뱉는 아주머니도, 거나하게 취해 소리를 박박 질러대는 취객도, 깔깔깔 괴상한 몸짓으로 서로를 웃겨대는 일행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라도, 201510월 초라는 시간, 해운대 센텀시티라는 공간에 있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단 하나의 메시지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을 말이다.

 

여유롭게 출발했으나, 막상 CGV에 도착하니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티켓을 보여주고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좁은 통로는 잠깐, 탁 트인 공간에 벌써 사람이 가득 하다. 다들 어디서 온 걸까, 왜 이 영화를 보러 온 걸까, 나는 오늘 떠나는 데 이들은 언제까지 부산에 머무를까. 암전이 되고, 스크린이 환해진다.

옆 사람이 짧게 심호흡을 한다.


9월은 사실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했고,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의 끝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맛보기도 했다. 힘들었다. 그런데 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지내보니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관계든 일이든 꿈이든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건 없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너무 얽매여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어쩌면 내 멋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세상은 참 따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기도 씻기도 불편한 곳을 굳이 찾아가기도 귀찮고,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친구들의 역할이 컸다. 아마 혼자였다면 나는 분명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도 가능했다. 덕분에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제 행사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간식을 먹고, 대화하고, 잠을 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역이었다. 부산역의 풍경은 뭐랄까, 서울역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 여유가 좋았다. 부산역 근처에서 밥을 해결한 후, 해운대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강풍이 불었는데 제법 시원했다.

우리가 출발한 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배우들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흥과 분위기는 우리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첫날부터 영화를 보는 건 무리라 생각해서 우리는 숙소 근처 횟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꿈, 돈, 여자 등 다양한 주제가 모둠회마냥 썰려 나왔고, 소주 한 잔과 함께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적당히 취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가니 고요했다. 침대에 가로누워 창문을 바라보니 반달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보름달이었는데 시간이 참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는 오직 영화에 집중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첫 영화 <디판>만 같이 보고, 나머지는 각자 예매한 영화들을 따로 봤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기억에 더 남는다. 함께이면서 동시에 혼자였던 여행이었다. 어쨌든 영화 3편을 이어 보니 정신이 없었다. 오후 1시쯤 헤어진 우리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건 11시가 넘어서였다. 간단하게 야식을 먹을 겸 해운대 포장마차촌에 들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영화 관계자와 연예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여유 있는 상태로 오자는 다짐과 함께.

숙소에 와서 눈을 붙이려 했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피곤했는지 모두 잠들어 있었다. TV를 이리저리 돌리다 영화 <이웃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성균의 악역 연기에 빠진 사이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내가 잠에 못 든 건 영화가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 것이다. 이따금씩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지금도 선명하지 않다.

마지막 날 남은 영화 한 편을 보러 영화의 전당에 갔다. 그곳엔 레드카펫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하고 부탁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사실 처음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대학 선배였다. 부산에 사는 형도 아닌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는 걸 보면 우연이라는 게 정말 있긴 있구나 싶었다. 어쨌든 사진도 잘 찍고 우리는 다시금 헤어졌다.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부산 서면에서 권총 도난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사를 봤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그런 소식을 접하니 씁쓸했다. 인간은 참 다양한 성격의 군상들로 모인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에서처럼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더 이상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주제가 고갈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컨대 여행에 내려갈 때는 공동으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올라올 때는 딱히 그런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부산으로 내려가는 시간보다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은 가득 채워졌다. 서울에 도착하니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감정과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충실했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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