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글은 2014년 작성되었으나, 현 시의성과 부합하여 게재했음을 밝힙니다.



기자. 1년 간 품어온 꿈이었다. 처음엔 저널리즘에 대한 무한한 애정도, 투철한 사명감도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 둘째, 영악하게 글을 쓸 줄 안다. 셋째,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염세주의자다. 이 세 가지를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은 오로지 기자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했던 언론인의 꿈을 이제는 접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은 지금껏 약 1년간 언론계에 기웃거리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자,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내 미래에 바치는 헌정서다. 


유난히도 사건 사고가 많았던 2014년 상반기에 나는 인턴이라는 ‘나름의 형태로서’ 언론계에 몸담아봤다. 사회부에서도 사건팀에 배정됐기 때문에 항상 현장에 나가있어야 했다.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3일 후엔 세월호가 침몰했고, 이후 진주 요양병원 화재, 고양터미널 화재, 브라질 월드컵, 6·4 지방선거 등이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건들을 다뤄보면서 나름의 보람과 뿌듯함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언론이라는 영역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쫓아가고 있지만 정작 내가 쓴 기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뉴스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단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17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자회견. (ⓒ 서울신문)


우선 언론사에서 일을 해보며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은 언론도 기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다른 매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광고 외에 마땅한 수익 모델이 없다.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누구도 자신의 돈과 시간을 투자해 뉴스를 사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 일명 '닷컴기사'라 불리는 자극적인 기사들을 내놓게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유가족의 아픔을 가능한 한 극대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비하도록 돕는 유통자였다. 알리기 위한 취재가 아닌, 취재를 위한 취재를 펼치는 언론계 현장에서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다. 


기성 언론이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의무를 뒤로하고 스스로 또 하나의 권력이 된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이는 기자들의 특권의식에도 녹아있다. 언론의 공익적 성격 때문에 기자는 그 어떤 직업보다도 사회 정의 실현과 같은 거대담론을 쉽게 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 모순을 지적하는 언론의 임무에 반해 언론계 내부에서는 부당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사 내에서 인턴과 계약직 비율은 매우 높은 편이다. 또, 아직까지 언론계 현장에서는 폭언이 일상화된 곳들이 많다. 필자도 언론사 인턴 기자 시절 술자리에서 선배로부터 모욕적인 언행을 당한 적이 있다. 그는 후배들의 학력을 따져 물었고, 가족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던 한 인턴을 칭찬하며 추켜세웠다. 업무적인 것 외에 집안 배경이나 학벌을 노골적으로 중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 언론사 입사지원서에서는 부모, 심지어 조부모의 신상까지 적는 칸이 있다는 점은 가히 충격적이다. 


언론계에는 ‘야마’와 같이 일본말에서 유래한 은어가 많다. '부장님, 사장님, 선배님'이 아니라 '님'자를 빼고 '부장, 사장, 선배'라고 서로를 부른다. 조직 내 수평적 문화와 평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상은 일본의 언어 습관을 그대로 들여온 것에 불과하다. 일본말에서는 '사장(社長: しゃちょう)'라고 그 자체에 존칭을 담고 있기에 따로 '님' 자를 붙이지 않는다. 이 같은 언어 습관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기자 사회의 악습들이 많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례로 ‘사쯔마와리(察回り)’라고 불리는, 수습기자 때 새벽까지 경찰서를 돌며 사건사고를 보고하는 문화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몇 시간도 안 되는 쪽잠을 자며 3개월 간 '사람취급 못 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무도 이 악순환을 끊으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는 성찰하지 않는 기자 개인에게도 있고,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 깊이 침잠한 언론계에도 있으며, 거기에 썩은 동아줄을 놓아주는 정권, 그리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독하게 살아남을 것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에도 있다. 그저 묵묵히 밥줄이 끊기지 않길 바라며 말과 글을 생산수단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기자라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언론인은 이 시대의 눈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기자라는 꿈을 단호하게 접으려고 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해도 좋다. 꿈을 포기하는 과정에서의 구차한 변명이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 없다. 그러나 분명 나에게는 이 꿈을 버리는 데에 대한 확신이 있다. 여전히 현실을 비관하고, 영악하게 글을 쓰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염세주의자로서 나는 또 다른 실험을 시작하려 한다. 한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가 아니어도 세상을 당당하게 인터뷰할 것이고, 숨은 권력에 분노할 것이며, 모든 것을 글과 말로 풀어낼 것이다. 기자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보다 더 자유롭고 근사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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