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길이 120cm, 칼날 90cm,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있다. 칼의 주인인 도오 가츠아키가 살해 당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것이다.

 

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미사변. 그 당시 사용됐던 범행도구가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충격 받았다. 1895108일 새벽 5시 경복궁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시작된 범행.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거처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불에 태웠다. 그 날에 사용된 칼(살해검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당시 사용했던 칼은 이 아니라 이다. 발음 편의상 이라고 칼럼에 적었다.)은 현재 일본 후쿠오카 시내에 위치한 쿠시다 신사에 보관돼있다.

 

히젠도라고 불리는 이 칼은 16세기 에도 시대에 다다요시라는 장인이 만든 명검이다. 제작 당시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살상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정말로 베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아주 날카로운 칼이다. 이 칼은 후쿠오카를 지키는 7개의 칼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문필가 츠노다 후사코는 그 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겨놓았는데 그 책(민비암살, 한국어판 제목 명성황후-최후의 새벽)에 따르면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이어 달려온 도오 가츠아키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한다. 그 때 사용된 칼이 바로 히젠도였던 것이다. 이 칼은 도오 가츠아키가 그 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쿠시다 신사에 맡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후 범행 연루자들은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 형사처벌을 받게 될 줄 알았으나 1896120,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다.

우리는 이 칼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출처 : 연합뉴스 (2010년 히젠도 환수위원회 발대식 모습)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는 명성황후 살해 120번째 기일을 맞아 범행에 사용된 칼을 압수 폐기해줄 것을 일본 외무성에 요청했다. 범행에 사용한 물건은 검찰이 압수해야하는 물건이지 민간이 소유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근대 법치국사 성립 이후 살인에 사용된 흉기를 압수하지 않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닌가.

 

112, 서울에서 한일정상회담이 열린다. 이에 맞춰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김민기 국회의원에게 국회에서 결의안이 채택될 수 있도록 부탁하였고 1029일 결의안이 발의됐다.

 

출처 : 국제뉴스 (김민기 국회의원이 히젠도에 대한 처분 촉구 결의안 발의 후 기자회견하는 모습) 

 

이 칼은 미래의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압수하여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한일정상회담에 언급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속히 압수하여 사죄의 의미로 한국에 보내길 바란다.

 

* 시해라는 용어는 같은 나라의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행위로 명성황후 시해라고 적으면 조선인이 조선의 왕비를 죽였다는 뜻이 됩니다. 정확한 용어는 ()’이라 해야 하지만 용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기 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되는 살해라는 용어를 칼럼에서 사용했습니다.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혜문닷컴(http://blog.naver.com/doorskyj/120092929826)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다. 오늘 가방에 넣어온 출퇴근길용 책의 제목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장르는 범죄 및 스릴러물이다. 가장 즐겨 보는 TV프로그램은 <그것이 알고싶다>이고, 한때의 꿈은 프로파일러였다. 프로파일러의 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남들이 잘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종종 읽곤 했다. 혈흔으로 타살 방법을 추리하는 내용의 책이나, 곤충을 통해 사인을 추리하는 책 등등. 하루는 불 하나만 켜놓고, 시체 사진이 가득한 책을 보는 필자의 모습에 엄마가 놀란 적도 있다.


이렇게 몇 가지를 나열하고 보니 최근에 본 영화의 제목이 <성난 변호사>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이 영화가 추리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은 <성난 변호사>였고, 지하철역 안에서 울리는 몹시 억울한 이선균의 목소리는 법정물에 등장하는 흔한 주연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 확인하는 필자에게는 이 영화는 당연히 법정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영화를 보기 전 몇 개의 한국형 법정물을 떠올리고 영화의 내용을 대충 추측해보았다. 가장 먼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등장한 감동적인 역전의 재판장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재판장면들이 생각났다. 뭐, 그렇고 그런 재판장면과 검사와 변호사들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진부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화 내용은 의외로 진부하지 않았다. 일단 표면적인 모든 사건이 다 가짜다. 그런데 그 가짜로 포장된 것이 꽤 리얼해서 관객은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관객과 변호성(이선균) 변호사의 눈에 영화 속의 살인사건은 아주 간단해보인다. 살인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는 스토커 김정환(최재웅)뿐이고, 그를 목격한 목격자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혈액과 용의자의 지문이 묻은 증거물까지 있으니 이 사건의 용의자는 곧 범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건을 맡지 않으려던 변호성 변호사는(이하 변변으로 칭함)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맡게 되지만, 김정환의 결백을 믿지 못하고 재차 묻는다. “시체 어디로 숨겼어요?”  그래, 필자도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하셨어요?



어쨌거나 멍한 상태의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변변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다. 그리고 용의자의 결백이 입증되려는 순간, 용의자의 입은 마침내 열린다. “제가 죽였습니다.” 그 순간의 얼빠진 변변의 표정은 꽤 볼만하다. 지하철 역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왜 이래! 네가 죽인 거 아니잖아!” 그리고 거기엔 스포일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얼이 빠지는 필자도 존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변변의 추리에서 김정환은 유일한 용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공범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해도, 단독 범행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김정환이 자신의 죄를 시인함과 동시에 사건은 또 다른 흐름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이 사건은 예측하기 힘든 형태가 되어버린다. 변변은 하루아침에 증거를 조작한 변호사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더 이상 사건을 맡기 힘들어진 변변에게 로펌의 대표는 연예인 마약사건을 맡긴다. 평소 같으면 콧방귀를 꼈을 B급 연예인의 마약사건이지만, 마지못해 수락한 변변은 마약 혐의를 받고 있는 연예인을 만나 감형을 위해서는 같이 마약을 한 친구들을 쓰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정확하지는 않지만 4명을 적으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의리의 연예인 납셨다. 연예인은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면서 인원은 정확하게 얘기해준다. 딱 변변이 적으라고 한 인원에서 1명이 모자라는 인원수다. 변변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아무나 적으면 된다고, 라이벌이나 뭐 그런 사람들. 필자의 귀에는 이 말이 장애물처럼 여겨지는 사람 아무나 적으면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다시 살인사건으로 돌아와서 변변은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이번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한 번 끊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여기까지의 변변은 여전히 이번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인물이고, 그저 돈과 권력을 좋아하는 속물변호사이다. 그러나 살인사건을 계기로 그는 돈과 권력에 더 빠져 속물쓰레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문지훈(장현성)의 충실한 법률적 문제 처리반 개가 된다. 사실 이것도 전부 가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영화 내용이 전부 가짜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법하지만, 사실 큰 틀에서 보면 <성난 변호사>의 일련의 사건과 스토리들은 한 장의 조각보처럼 잘 만들어져 있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추리물 광팬이므로, 모든 영화를 관람할 때 일어날 일을 대충이나마 추리하는 일을 좋아한다. 셜록 홈즈도 인정했듯이 이런 추리 영역은 오랜 습관으로 더 발달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추리 습관은 영화의 재미를 종종 반감시키기도 한다. 특히 법칙이 있는 영화의 경우가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범죄 및 스릴러 장르만큼 필자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공포인데, 이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고 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신이나 알 수 없는 존재가 튀어나올 장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지 등이 대충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장소에서 필자는 오히려 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가장 예측이 안 되는 것은 관객들의 비명시점과 비명의 데시벨 정도다. 필자는 그게 더 무섭다.(악취미 같지만 공포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다른 관객의 비명소리이므로, 영화가 너무 재미없을 때는 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감상하기도 한다.)


무튼 이렇게 습관화된 추리를 즐기는 필자에게도 <성난 변호사>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으니 얼떨떨하면서도 영화가 한층 재미있어졌다. 사실 이런 스토리임을 미리 암시해주는 복선 장치들은 쓰다 남은 천 조각처럼 영화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어서, 필자보다 더 촉이 좋은 사람이라면 반전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 없이 감상할 수도 있다. 아마 없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 천 조각들을 잘 주워 조각보를 만들어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100% 가능하다. 이번엔 필자가 찾은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필자 역시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야 다시 천 조각을 줍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반전 천 조각 중 몇 가지>


- 영화에서 변변이 맡은 사건들 : 영화 초반부에서 변변이 맡았던 약의 부작용 관련 소송은 끝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져온다. 관객들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소송은 조각보의 바탕색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변변이 맡은 B급 연예인의 마약 사건은 데스노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냥 적으라고 내뱉을 때조차 변변은 자신의 이름이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0.1%도 의심하지 않았다.

- 사라진 시신 : 시신이 없는 사건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시신은 애초에 시신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다른 시신이 등장한다면? 바꿔치기할 가능성도 덩달아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체 바꿔치기는 한 번이 어렵지, 한 번 바꿔치기했다면 두 번 바꿔치기도 가능하다.

- 덤앤더머 같은 용식(배유람)&갑수(민진웅) : 무식 혹은 생각 없음 사이에 있는 그들을 변변은 자기 아래에 있는 인물들로 생각하지만, 이런 그들이 변변의 위로 올라서는 순간이 가장 큰 위협이자 반전이 된다. 물론 변변은 곧 이들의 무식 혹은 생각 없음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돋보이는 변변의 덤앤더머 농락 장면은 지하철 씬이다.

- 문지훈의 개 : 문지훈의 대저택 내부에서 변변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개였다. 이중 이 개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주목해야 한다. 문지훈의 개는 저택 안에서의 변변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과 동시에 증거물 확보의 1등공신이다.

- 로맨스의 위치 : 로맨스의 위치는 관객이 가장 잘 속을 수 있을만한 지점에 있다. 보통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로맨스의 위치는 대체적으로 변호사-검사, 변호사(혹은 검사)-조력자, 변호사(혹은 검사)-피해자 안에 하나에 속하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주요 로맨스의 위치를 진선민 검사와 변변에 두고, 서브 로맨스로는 변호사-조력자 구도의 브로맨스를 생각했으나 로맨스의 결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용의자-피해자의 로맨스, 그리고 서브로는 또 하나의 브로맨스)


이 외에도 세부 천 조각들이 존재하며, <성난 변호사> 관객은 이를 통해 전혀 다른 느낌의 조각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천 조각을 지나친 것 같다면 필자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주워도 무관하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위해 친절한 설명까지 놓치지 않는다. 놓친 관객은 설명을 참고해가며 다시 천 조각의 위치를 찾아나가도 무관하다. 자, 이제 각자의 조각보가 완성이 되었다면 잘 접어서 머리 한 켠에 넣어두기를 추천한다. 한국형 추리물 치고는 꽤 쓸만한 조각보일테니 말이다.




* <성난 변호사>의 용의자 김정환(최재웅)은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 등장한 아가씨와 동일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그는 씬스틸러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몹시 다른 매력을.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소비는 나의 즐거움?

나는 자발적 실업상태가 된 지 1주일째다. 실업상태라 돈이라고 하면 통장에 몇푼 뿐이기에 한번 돈 안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말하듯이 집밖에 나가는 순간에 교통비-식사비-커피비 등 모든 것이 돈!돈!돈!이라 집밥만 먹는다. 우리 집이 텃밭을 가지고 농사를 지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서울에서 살았음 마트 가서 돈 쓰게 될 뻔 했다. 그렇지만 계속 물건을 사야하는 일들을 마주한다. 내 손에 있는 몇 백원이라도 소중한 나로서 물건 사는 것만큼 고민되고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어본다. 지금은 물건 사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은데, 언제 경제행위를 하면서 즐거웠던 적 있었나?

지난 몇 년 간 소비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던 시절들이 생각난다. 편의점에서 짜잘하게 매일 사가며 내 입을 호화스러운 척하게 했고, 아무런 생각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보이는 잡동사니를 샀고 휴대폰과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멋져 보이는 것들을 사 모았다. 뭔가 허전함을 느끼며 자기 위로조로 ‘나를 위한 선물이야.’라는 식으로 소비해왔던 시절이 있었다. 과연 그 당시는 즐거웠고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소비가 즐거웠던 기억들: 관계 맺기
나는 사회에선 백조지만 집에서는 가사노동을 해야만 하는 집도비이다. 아직 며칠 되지 않아서 그런지 청소할 때도 계속 걱정과 고민뿐이다. 무심코 틀어 놓은 티비에서 ‘재테크 방법과 주식 변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잠시 걸레질을 멈추고 ‘저 방법 써먹을 정도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찰나에 내가 엄마들이 하는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내가 언제부터 돈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목을 맺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용돈을 받았던 초등학생때부터 인가? 아님 타지에서 대학입학 후 목돈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인가? 알바를 하고 짧게 돈 벌어본 경험때문인가? 내 머리 속 기억들을 다 들어보아도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담 내가 가진 푼돈으로 즐겁게 쓰고 지냈던 적이 있었나?

내가 돈을 모아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사거나, 가족들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 즐겁게 사용한 것 같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소비함으로서의 가지게 된 만족감 말곤 없었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아이스크림 사러가던 가게방에선 항상 더 많이 받아오는 기분이 들어 즐거웠다. 시골동네의 하나뿐인 가게방(슈퍼)는 마을사랑방같은 공간이어서 모든 거래는 외상과 호의로 이루어졌고 부수로 많은 교환활동이 가능했다. 어려서부터 돈으로 주고받는 관계라기보다는 가게방할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던 그 때 무엇인지 모를 따뜻함이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자리잡혀있다. 또 일주일에 한번만 동네에 오는 순대오토바이할아버지는 내가 이사갔음에도 영역을 확장해 우리동네를 와줄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며 초등학교시절 내 나의 순대를 담당하셨다. 그때는 무엇을 사러간다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고,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마음이 더 담겨 있어서, 사고 교환하는 것들이 참 즐거웠던 것 같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함께 살아갈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경제가 이루어지고 더 주기도 하고, 덜 주기도 하고 돈이 없으면 외상도 해주며 서로의 상황에 맞도록 돕고 지냈던 것 아닐까?

사람들의 관계 속 경제행위
우리 동네도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다들 시가지로 나가고 구멍가게가 없어졌다. 어느 순간 대형마트와 편의점이 생겨났다. 전에 비해 훨씬 깔끔하고 편리한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는 곳들에 둘러싸여 나도 살고 있다. 그런 곳일수록 돈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고, 직원들의 노동력도 서비스라는 차원으로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쉬워지는 것 같다. 다시 돌아와 고향에서 지내다보니 누구도 가게방할아버지와 순대할아버지처럼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먹고 살기 위한 소비를 할 뿐이지. 이걸 건네주는 사람의 이야기, 생산자의 이야기, 이 물품의 역사에 관심이 없고 플라스틱를 위에 붙어있는 가격표만 본다.

백조로 돈을 펑펑 쓰며 끝없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보니 나는 근원적 원인을 계속 들여다보게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며 경제행위를 하고 있는 지’가 문제였다. 합리적 인간처럼 되라고 배운 모든 경제지식들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법보다는 ‘돈’이라는 허상으로 나와 너를 분리하여 분절화 시키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우리 동네는 경제적 인간보다는 사람다운 인간들이 살았던 곳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에 와서야 지저분하고 몇 품목이 없었던 가게방의 아이스크림과 비계를 더 많이 주던 순대모듬을 사먹고 싶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그분들과 일상 대화를 너무나도 나누고 싶다.




유난히 덥게 느껴졌던 이번 여름. 출산예정일 전 날까지 출근했던 만삭의 임산부. 출산 전에 회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느냐 너무 바빠서 출산 가방을 출산 예정일 밤 11시에 쌌다. 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경악한다. “애가 언제 나올 줄 알고 그랬습니까?” 

작은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모든 준비는 산후조리원에서 한다는 생각으로 겁도 없이 엄마가 될 준비를 대충하고 있었다. 출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생각도 안 해봤다. 돈이 없어서 애를 천천히 낳겠다는 친구들의 말에 ‘에이~ 애는 낳기만 하면 또 어떻게 해결 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산후조리를 2달 만에 끝내고 회사로 복귀해야했기 때문에 내 몸에 좋다는 소리가 들리면 돈을 썼다. 아이가 50일이 지난 지금, 통장에 그득했던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출산비용을 얼마나 썼는가? 


<<출산 한 달 전부터 출산 후 50일까지 소모비용>>


1. 병원비용 : 자연분만, 2박 3일 입원 55만원(방이 없어서 제일 큰 방을 사용했으니 자연분만 후 출산 비용이 더 줄어들 수 있음) 
(- 국민건강보험에서 130만원이나 내줘서 55만원이 나왔다는 걸 영수증을 받아보고 알았다.)

2. 산후조리원 : 2주 조리 270만원 + 조리원 마사지 144만원

3. 한약 : 22만원 * 3번 = 66만원

4. 제대혈 보관비용 : 270만원

5. 스튜디오 계약 : 50일까지 45만원 (돌까지 조금씩 나눠내는 형식)

6. 집으로 오는 산후도우미 한 달 : 175만원

7. 아이 용품 구입 : 젖병, 젖병세정제, 소독 집게, 온도계, 면봉, 코뻥, 속싸개, 겉싸개, 옷, 보온병, 아기이불, 아기침대, 아기흔들의자 등등 약 200만원

8. 기저귀 한 달에 15만원, 분유 한 달에 10만원 

출산 준비부터 출산 후 출근하기 직전까지 계산해보면 1250만원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출산 후 빠른 시일 내에 복직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썼다. 제대혈을 보관하지 안겠다고 했다하더라도 또 아이의 성장 앨범을 찍지 않겠다고 결심했다하더라도 천만원 가까운 비용이 출산 시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최소 비용으로 아이를 출산할 수도 있다. 출산 후 조리원에 가지 않고 산후도우미도 부르지 않으며 한약 등도 먹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본다고 하면 280만원의 비용이 소모된다고 볼 수 있다. 
에이~ 적게 들여서 280만원만 쓰고 애 낳을 수 있는데 천만 원씩 써서 애 낳는 건 너무 사치 아니야?라고 하는 이들이 있을까 하여 말하고 싶다. “현실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앞서 말했듯이 아주 작은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 단체의 경우엔 출산 휴가 및 육아 휴직 때 대체 인력을 부르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필자가 일하고 있는 문화재 환수 분야는 매우 희귀한 직종이기에(심지어 문화재환수운동가라는 직업은 직업으로 쳐주지 않는다.) 대체 인력을 구하기 힘들다. 필자가 애를 낳고 온 사이 회사는 정말로 멈춰버렸다. 정말로 멈췄기에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하다가 회사 행사에 참여하려고 조리원을 뛰쳐나와 일하고 돌아간 적도 있는데 그 날 밤부터 엄청난 젖몸살에 시달려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뛰쳐나가기만 했는가, 노트북을 들고 조리원 침대 위에서 급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이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말로 회사가 멈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최대한 빨리 회사로 복직하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후조리원과 산후도우미를 부르고 한약을 먹으며 몸을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결과 32일 만에 회사에 복귀하여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면 한 달 쉬지 말고 돈을 적게 들여 출산 한 후 3달은 쉬고 일 나가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빠른 복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출산 후 산모의 몸 상태는 모든 뼈가 열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예전엔 대가족 제도에서 산모와 아기가 보호받았기 때문에 조리원이나 산후도우미가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친정 엄마가 와서 붙어있지 않는 이상 산모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남편도 아침 7~8시에 나가서 저녁 7시~10시 사이에 오지 않는가.)


뼈가 모두 열려있는 산모가 남편을 출근시키고 3시간에 한 번 먹여야 하는 아이를, 왜 우는지도 모른 채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아이가 울지 않을 때까지 안고 있어야 하는 아이를 볼 수 있을까. 돈 많이 드니까, 최소비용을 들여 애를 낳고 그런 상태로 아이를 보라하면 누가 애를 많이 낳겠는가. 


아이를 낳고 빠르게 회복하여 한 달여 만에 회사에 복직하기까지 나라에서 해준 것은 병원비 지원 130만원이었다. (임신기간 사용한 고운맘카드 비용 50만원도 있으나 이 칼럼은 출산 한 달 전부터 아이 낳고나서 50일을 계산했기에 제외했다.) 문제는 둘째다. 첫째는 어떻게 어떻게 낳았지만 이 비용을 또 부담하고 애를 낳으라는 건 무리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워킹맘의정보창고” http://cafe.naver.com/ggworkingmom/35301


  저출산시대에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많다하여 아이를 낳기 전에 출산장려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거 웬걸. 첫째는 지원대상에서 찾아볼 수 없고 둘째 역시 없다.(성남시 제외) 셋째는 낳아야 출산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하면 경제적 부담을 이기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최소비용으로 낳으면 되지 않냐 우기면 과연 최소비용으로 아이를 낳은 뒤 둘째, 셋째도 낳을 마음이 생길까.


  아이를 낳아보니 국가가 이것을 지원해주면 애를 좀 더 낳겠다 싶은 것이 생겼다. 바로 “산후조리원과 산후도우미 지원”이다. “산후조리원 2주 + 산후도우미 4주”를 국가가 지원해준다면 나는 둘째를 낳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할 생각이 있다. 6주의 시간이면 산모의 몸이 많이 회복된 상태이고 매일매일 빽빽 울던 아이도 안정을 찾고 조금은 잘 자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지나면 산모가 혼자 아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6주의 시간동안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크다. 그렇기에 이것을 국가가 지원해주면 나는 애를 더 낳을 생각이 있다. 

 

  조리원에서 만난 친구들도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들도 모두 아이를 낳기 전에 사직서를 냈다한다. 내년 초에 결혼하는 가장 친한 친구는 출산비용 부담에 아이 낳는 계획을 미뤘다한다.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 진짜 필요한 시기에 산모를 지원해주는 정책은 언제 나올 것인가.



살면서 초코파이에 대한 추억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군대에서 화장실에서 몰래 뜯어먹었다는 일화, 달달한 게 있어야 머리가 돌아간다고 매일 하나씩 물고 다녔던 고3 때 이야기, 헌혈하러 갔다가 초코파이만 먹고 왔다는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한국인의 일상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초코파이 하면 바로 따라붙는 글자가 있습니다. 대부분 정(情)을 떠올리는데요. 다른 유사 브랜드도 많지만, 이미 정(情)이라는 브랜드가 우리 정서에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1979년 신문 지면 초코파이 광고

정(情)을 쓰고 있는 오리온(구_동양제과)은 1974년 한국에 처음 초코파이를 선보였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초코파이의 원조인 셈이죠. 낱개 하나에 ‘50원’으로 선보였는데요. (지하철 요금이 30원, 자장면이 100원 하던 시절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싸지 않은 가격인데도 매출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과자라는 것과 동시에 폭신한 식감 덕에 시장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광고도 런칭 당시부터 80년대 후반까지 광고는 별다른 특징에 대한 어필 없이 다소 밋밋한 광고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코파이로 순항하던 오리온은 돌연 난관에 직면합니다. 당시 제과 경쟁사였던 롯데와 해태가 차례로 ‘초코파이’라는 동일한 이름과 상품을 팔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황한 동양제과는 롯데제과에 상표등록 취소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법원은 "초코파이라는 이름은 빵과자에 마쉬멜로우를 넣고 초콜릿을 바른 과자류를 뜻하는 보통 명칭이다"라고 하여 소를 기각합니다. ‘파이 싸움’에서 허무하게 주도권을 빼앗겨버린 오리온은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초코파이에 정(情)을 넣다

오리온은 시장 분석에 들어갑니다. 모든 경쟁사가 이제 비슷한 초코파이를 내놓을 것이고, 그러면 맛의 차이로 어필하는 건 이제 무의미하겠죠. 그렇다고 초코파이의 새로운 맛을 내놓는 건 치열하게 전개되는 ‘파이 싸움’에서 물러나는 행위일 것입니다. 상품에 대해 차이를 어필하는 것보다, 오리온은 새로운 판을 짜보는 방향으로 노립니다. 초점을 ‘초코파이’가 아니라 ‘초코파이’를 사는 ‘소비자’에 맞춰보기로 합니다. 초코파이를 왜 사는지 의문을 가져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코파이는 각 과자입니다. 12개 파이가 들어있는 각 과자라는 거죠. 봉지 과자처럼 혼자 한 번에 다 먹으려고 사기보다는 누군가와 나눠 먹는 점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리온은 이 것에 좀 더 착안합니다. 

‘누군가와 나눠 먹는 것, 과자 이상의 그 따뜻함 오고 가는 것... 어쩌면 사람들은 정(情)을 주고받는 거야. 그래 정(情)이다. 오리온의 초코파이는 정(情)을 주고받자.’ 

초코파이가 가진 상태만으로 강력한 컨셉을 잡아냅니다. 어떤 초코파이든지 ‘다 각에 들어있는 과자’이지만 오리온의 초코파이는 사는 행위에서부터 정(情)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리온은 지금까지도 장수하고 있는 ‘정(情) 캠페인’을 89년부터 제작합니다.



마음을 나눠요(1990, 오리온)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CM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마음을 나누다라는 키 카피로 소비자에게 다가갔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현대에 들어가면서 점차 잊혀가는 한국인의 정(情)을 브랜드에 집어넣었습니다. 정(情)이라는 한 글자 덕분에 오리온은 경쟁사는 단숨에 제치고, 27년째 장수할 수 있는 브랜드로 굳혀지게 됩니다.


둥근 정이 떴습니다(1999, 오리온)


소비자는 이성적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광고를 볼 때마다 ‘상술’일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판단하지만, 이내 따뜻한 말 한마디에 흔들릴 수 있는 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코파이가 아무리 맛있다고 한들, 차이를 말하지 않으면 소비자에겐 다 똑같은 초코파이가 됩니다. 경쟁사와 차이가 없더라도, 광고는 소비자에게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리온은 소비자에게 초코파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정(情)을 나눌 수 있다’라는 의미 말입니다. 이런 것을 광고용어로 ‘브랜드 메시지(Brand Message)’라고 합니다. 

브랜드 메시지, 설득의 운명

브랜드 메시지는 ‘소비자가 브랜드를 지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정보나 경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브랜드를 연상할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 ‘브랜드 메시지’라는 것이죠. 간단한 예로 심플하고 혁신적인 아이폰이 히트를 치고 스티븐 잡스가 주목을 받자, 소비자들은 “애플=창의성”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은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어떤 단어나 자극이 소비자에게 주어지면 브랜드가 연상될 수 있는 확고한 연결회로를 만드는 것이 이 브랜드 메시지인 것이죠. 

이제 정(情)이라는 단어는 오리온 초코파이와 이제는 뗄 수 없는 연결회로가 된 것 같습니다. 
20여년 간 이름이나 컨셉을 유지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만큼 브랜드를 유지해왔다는 건 그만큼 소비자에게 깊이 각인되었다는 방증이 되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런 고급진 컨셉을 바꾸는 게 이상한 일인거죠. 2011년 광고도 이러한 맥락을 잇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情)이라는 브랜드 메시지를 지구를 잇는 매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구와 정을 맺다(2011, 오리온)


여기에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소재로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립니다. 이 또한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정(情)을 잇는 매개로 초코파이가 등장합니다. 메시지를 우리만의 정서가 아닌 세계로 확장한 것입니다. 잔잔한 음악과 내레이션이 그 훈훈함을 배가시키는 것 같습니다. 초코파이의 해외진출은 앞서 말한 브랜드 메시지를 강화하는 데 한 몫합니다. 한마디로 정(情)은 어디서나 같다. 이런 식의 메시지로 소비자의 연상을 강화하는 것이죠.

사실 모든 광고주들은 초코파이 같은 광고를 원할 것입니다. 한번만 딱 봐도, 혹은 그 단어가 귀에 스쳐도 우리의 브랜드가 생각나게 하는 광고를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단박에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소비자를 파악하고, 시대를 관찰해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산물 그것이 시대를 통찰하는 광고인 것입니다.


(p.s : 초코파이는 소개하고 싶은 광고들이 많았습니다. 김갑수 씨의 정타임도 인상적이었고, ‘말아톤’에서의 영화 PPL도 인상적이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모아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확대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나 홀로 집에 - ⓵

 

 

 


파병에 참여했던 대니 홈스Danny Holems는 실제로 만들었듯, <이라크/사진> 컴퓨터 폴더에 분류될 법한 사진들을 갖고 돌아왔다. 사진들은 위키리크스에 게시된 조악한 비디오(로이터 사진기자와 그의 조수, 나머지 7명의 사람들이 아파치 헬리콥터의 발포에 산산조각 났던 날)로 악명이 높아진 전쟁의 나날을 기록했다. 대니는 당시 지상군으로 있었고, 핑클이 쓴 대로, 그의 사진들은 전후 보도에 쓰였다.

 

반쯤 날아간 머리, 찢어 발겨진 몸통, 안팎으로 쏟아지는 피.
클로즈업, 오토포커스, 자연광, 무결점 컬러
전쟁, 다시 말해, 그 현장에서 (불에 타 죽은) 해럴슨Harrelson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 고, 박격포 공격 이후 머리통에서 튀어나온 건 없는지 걱정하던 병사들이 경험했던 것으로서  전쟁.

 

대니의 여자친구 쇼니Shawnee는 그가 때로 컴퓨터에서 이 사진들을 보며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곤 했다. 대니가 집으로 돌아온 뒤 둘이 만났을 때, 쇼니는 19살이었다. 그는 쇼니에게 끔찍하거나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를 들려줬다. 딸이 태어난 뒤, 대니는 한 손엔 어린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엔 총을 들고 총을 쏘던 이라크 사람을 죽인 이야기를 자주 했다. 대니는 그 둘에게 모두 총을 쏴 죽여야 했다. 이제 ‘나는 어디서든 아이들을 봐’,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전우들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한다. 그건 대니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점점 더 정신을 잃어갔다. 쇼니는 대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오랜 이야기다. 그의 생애 마지막 날, 쇼니는 밤에 친구들과 놀러 나갈 계획이었다. ‘할 말이 있어.’. 그날 아침 대니가 말했지만, 그녀는 빨래하고 태닝을 해야 했다. ‘대화 좀 하자’ ... ‘대화 좀 하자’ 그녀는 집 청소를 하고, 세차를 하고, 샤워를 한 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날 밤 그녀는 만취운전으로 경찰에게 잡혀 감금됐다가 새벽에야 집으로 와서 계단에 목을 맨 남편을 발견했다. 당시 쇼니는 아이 하나 딸린, 돈 없고 직업 없는 21살에 불과했다. 그저 악착같이 궁리를 마련하고, 이제는 악몽에 밤잠설치는 여성으로서 쇼니는 대니와 같이 귀신이 된 병사와 광기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는 그 어떤 미국인일지도 모른다.

 

아마 대니는 PTSD로 고통을 겪는 병사들의 공식적 통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그는, 진단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매달 펜타곤에 가서 최근 자살 사건들을 살피는 공무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진단이나 치료가 최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몇 년 동안 병사들의 자살은 이슈화되었는데, 주로 5000명을 갓 넘는 자살자의 수가 전쟁에서 죽는 미국인들의 수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지상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처음 파병된 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살과 전투에 대한 통합 연구 자료research combining data는 없다. JAMA Psychiarty[각주:1]에서 출간한, 2001년부터 2007년 사이 390만 미군 부대에 대한 연구에서는 전선에 배치되거나(19/100,000) 그렇지 않은(18/100,000) 모든 병사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게 드러났다.[각주:2] 연구는 재향 전투병들(전선에 배치된 부대들이 모두 전투 상태는 아니었다.)을 구별하진 않았지만, 해군이나 공군보다 육군과 해병대 병사들의 자살률이 25퍼센트 더 높다는 건 찾아냈다. ‘우리는 점차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라고, 국립정신건강협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미하엘 쇤바움Mihael Schoenbaum은 4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역사적이고 상식적인 결론은 그렇게 힘든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국인 전체가 결론에 다가가려 하든, 그러지 않으려 하든, 혹은 상관하지 않거나―아니면 자살에 적응하든지 간에, 일반 대중에 대한 (자살 - 옮긴이)률이 2000년 이후 13/100,000까지 올라간 상황이지만, 군국주의와 전쟁이 국내에 공공연히 끼치는 충격이 전쟁에 군대를 보내자는, 새로이 들끓고 있는 열정을 막진 못할 것 같다. ‘지상에 군화를Boots on the ground’, 티비의 전문가들은 이 말을 마치 효험을 기다리는 주문처럼 되뇐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전쟁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이들은 이러한 죽음을 알고 있다. 아마 최근 CNN 특집에서처럼, 사람들은 자살 문제가 며칠간의 초자연적인 명상, 그리고 교전지역에서 정기적인 명상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으려 하는 것 같다.

 

모든 사건에서, 지지, 감사, 그리고 교전국이라는 무언극은 단지 피상적으로 ‘부대’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또한 그 피상성―미국 사회가 가장 심각한 인간사에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외견상 안정, 불편한 사실들에 대한 사회적 외면, 호들갑스러움(환호와 함께 가족으로의 병사들의 초현실적 귀환, ‘시작하자Let's Get It On’에 대한 부담감), 무심한 질문들(‘사람 죽여봤니?’), 그리고 섣부른 판단(‘니가 지원했잖아’) 혹은 죄책감 몰아내기(‘그건 네 잘못아 아니야!’) 비도덕성에 대한 가벼운 표준화(‘망할 아랍놈들한테 누가 보스인지 보여줘. 핵으로 쏴버리라고. 추수감사절 잘 보내’, 아칸사스 주의 초등학생들이 생활품꾸러미를 건네며 병사들에게 권고했다), 자기 성찰에 대한 거부반응―은 여러 재향군인들이 갇혀 있는 심오한 고뇌와 어긋난다.

 

자살은 극단 중에 극단이다. 아담 슈만Addam Schumann은 아내 사스키아Saskia가 그만두게 할 때까지 집 보일러실에서 입에 라이플을 물고 있었다. 그는 수천 일 동안 이라크에서 전투를 보았고, 정신건강을 이유로 일찍이 귀향한 후 2년간 세 번의 여행과, 여러 정신과 의사와 상담가들을 만났다. 그는 ‘훌륭한 병사’, 병장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부대원들 혹은 장교들 중 그 누구도 그가 내면의 어둠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까지, 그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캔자스Kansas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처방전을 받았고,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직업을 구했다. 매일 아침, 핑클이 소외된 작업 의식이라고 묘사하듯, 아담은 항우울제를 삼켰고, 점심으로 월마트에서 산 엔칠라다(멕시코 음식 - 옮긴이)와 마운티듀를 들고, 스스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라며, 군센터의 큐비클 안에서 전역자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설명하는 일을 했다. 그 직장에서 그가 한 첫 번째 일은 또 다른 직업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루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그의 오른 귀를 찌르는 소리는 오늘 유달리 시끄럽지만, 두 칸 떨어진 곳에 있는 여자를 없애버리고 싶을 만큼 크진 않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그녀는 메트로놈처 럼, 말뚝박는 기계처럼, 자동차 경보 장치처럼 헤드셋에다 대고 말하고 있고, 아담은 연필을 들 어 그녀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한다.

 

아담은 그 여자를 찌르지 않았고, 건물 지하에서 자살하지도 않았다. 우연히 아내가 들어왔고, 우연히 재향군인 관리국의 사회복지사가 패스웨이 홈이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치료 센터에 그를 수용할 여력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로써 그는 죽음을 면했고, 베큐-레너드가 <Of Men and War>을 찍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는 작년 깐느에서 공개되었지만 올해 미국에서 배급은 제한적이었다. 패스웨이의 설립자이자 책임자 프레드 구스만Fred Gusman은 미국인들이 영화를 보기를 봐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거기에는 자기 홍보에 대한 일말의 기미도 없었다. 

 

<원문 102-104쪽>

 

 

NLR32705.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95F02224BD1B17611

https://fellowshipofminds.files.wordpress.com/2011/04/no-boots-on-the-ground.jpg

https://pbs.twimg.com/profile_images/470503115297284096/N69JqZD7.png

 

 

  1.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서 매달 상호검토하에 발간되는 의학 잡지다. [본문으로]
  2. 회고연구retrospective study는 미 육군, 해병대, 공군, 해군, 주방위군에서 현역, 예비역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 종사자들을 동일하게 포함했다. Mark Reger, Derek Smolenski, Nancy Skopp et al., ‘Risk of Suicide Among us Military Service Members’, jama Psychiatry, April 2015 참고. [본문으로]

9월은 사실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했고,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의 끝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맛보기도 했다. 힘들었다. 그런데 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지내보니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관계든 일이든 꿈이든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건 없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너무 얽매여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어쩌면 내 멋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세상은 참 따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기도 씻기도 불편한 곳을 굳이 찾아가기도 귀찮고,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친구들의 역할이 컸다. 아마 혼자였다면 나는 분명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도 가능했다. 덕분에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제 행사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간식을 먹고, 대화하고, 잠을 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역이었다. 부산역의 풍경은 뭐랄까, 서울역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 여유가 좋았다. 부산역 근처에서 밥을 해결한 후, 해운대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강풍이 불었는데 제법 시원했다.

우리가 출발한 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배우들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흥과 분위기는 우리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첫날부터 영화를 보는 건 무리라 생각해서 우리는 숙소 근처 횟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꿈, 돈, 여자 등 다양한 주제가 모둠회마냥 썰려 나왔고, 소주 한 잔과 함께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적당히 취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가니 고요했다. 침대에 가로누워 창문을 바라보니 반달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보름달이었는데 시간이 참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는 오직 영화에 집중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첫 영화 <디판>만 같이 보고, 나머지는 각자 예매한 영화들을 따로 봤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기억에 더 남는다. 함께이면서 동시에 혼자였던 여행이었다. 어쨌든 영화 3편을 이어 보니 정신이 없었다. 오후 1시쯤 헤어진 우리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건 11시가 넘어서였다. 간단하게 야식을 먹을 겸 해운대 포장마차촌에 들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영화 관계자와 연예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여유 있는 상태로 오자는 다짐과 함께.

숙소에 와서 눈을 붙이려 했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피곤했는지 모두 잠들어 있었다. TV를 이리저리 돌리다 영화 <이웃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성균의 악역 연기에 빠진 사이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내가 잠에 못 든 건 영화가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 것이다. 이따금씩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지금도 선명하지 않다.

마지막 날 남은 영화 한 편을 보러 영화의 전당에 갔다. 그곳엔 레드카펫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하고 부탁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사실 처음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대학 선배였다. 부산에 사는 형도 아닌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는 걸 보면 우연이라는 게 정말 있긴 있구나 싶었다. 어쨌든 사진도 잘 찍고 우리는 다시금 헤어졌다.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부산 서면에서 권총 도난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사를 봤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그런 소식을 접하니 씁쓸했다. 인간은 참 다양한 성격의 군상들로 모인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에서처럼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더 이상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주제가 고갈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컨대 여행에 내려갈 때는 공동으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올라올 때는 딱히 그런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부산으로 내려가는 시간보다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은 가득 채워졌다. 서울에 도착하니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감정과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충실했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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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569돌을 맞이하여 2015년 10월 5일부터 6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물어봤다. “국보 1호는 숭례문이 적합합니까? 훈민정음 해례본이 적합합니까?”  조사결과 숭례문은 20.0%, 훈민정음 해례본은 64.2%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숭례문보다 국보 1호로 적합하다는 의견이 3배 이상 차이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 아시아경제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적합한지 묻는 질문에는 부적합 44.7%, 적합 34.8%로 나타나 숭례문이 국보 1호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더 높았다. 

1996년에도 이와 비슷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서울대 생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조사결과 국보 1호의 재지정 검토 필요성에 대해 57%가 재지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국보 1호로 재지정 해야 하는 문화재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뽑았다. 같은 해 문화재 관리국이 실시한 여론 조사도 있다. 이 여론조사는 문화재 전문가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했는데 국보 1호 재지정에 대해 반대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그 이유는 국보 번호는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붙인 것이지 가치 순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이 당시 찬성한다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국보 1호를 교체 한다 가정하고 어떤 문화재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을 그 대안으로 꼽았다.   

1995년부터 “국보 1호는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재지정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10년 단위로 나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잔재 청산과도 관련이 있다. 1996년에는 광복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였으며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사업이다. 왜 두 정부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에서 해지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재지정하려 했을까?

숭례문은 1934년 조선총독이 보물 1호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양의 교통흐름에 방해된다며 아다치 겐조우가 숭례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군 사령관은 대포를 쏴서 파괴하자라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가 숭례문 폭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 입성한 문으로 남겨 놔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침략의 증거로서 숭례문은 살아남았고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으로 들어온 흥인지문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식민통치에 의미 없는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은 철거당했다.
  
그 후 1934년 일제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제정하여 보물1호는 숭례문, 보물2호는 흥인지문으로 정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일제잔대라고 비난받는 이유가 이것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은 식민지이기에 국보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보물 번호를 부여했다.)

문화재청은 변명한다. 국보 지정 당시 이 문제가 거론됐지만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시켰기에 일제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는 보물 지정 당시 고적도 지정했는데 당시에 고적 1호로 지정한 문화재는 경주 포석정이었다. 일제는 교묘하게 보물과 고적에 망국의 의미를 담은 문화재를 1호로 지정한 것이다. 보물을 국보로 격상시키며 일제잔재를 털어냈다면 고적 1호는 왜 그대로 지정한 것일까? 숭례문은 일제 잔재가 아니기에 국보 1호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때마다 나오는 문화재청의 논리 없는 변명일 뿐이다.

국보 1호, 2호, 3호 등 번호는 문화재 관리상 편의를 위해 붙인 번호이지 가치의 순이 아니라며 국보 1호에 가치를 부여하지 말라는 주장도 있다. 그 문제를 몰라서 국보 1호를 변경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 부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1호’에 붙는 상징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1호가 중요하지 않으면 각종 시험 문제에 왜 국보 1호를 묻고, 문화재청은 왜 국보 1호 숭례문을 복원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인가.

국보 지정 번호제 해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문화재 지정번호제 폐지에 대한 의견은 찬성 57.4%, 반대 25.9%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대로 국보 번호가 해지된다면 우리에게 국보 1호는 영원히 숭례문으로 남는다. 일본도 국보 번호를 폐지하였지만 지금도 일본 국보 1호가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본인 촬영

 

필자가 재직 중인 문화재제자리찾기에서는 한글날 제569돌을 맞이하여 국보1호 숭례문 해지 및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1호 지정 진정서를 지난 7일 청와대에 제출했고 작년 11월 11일부터 1월 11일까지 받은 12만 명과 함께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드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거나 ‘다른 문화재는 안 중요해서 국보 1호가 아닌가’라는 댓글을 달았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국보 1호를 변경하지 못 하는 게 아니다. 돈이 없어서 못한다면 문화재청이 모든 국보 번호를 없애겠다고 검토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국보 1호를 변경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소중하고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국가의 상징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다른 문화재는 안 중요해서 국보 1호가 아닌가라는 이야기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석굴암이 국보 1호가 된다면 국민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까?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유지된다면 통일된 한국에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남과 북, 해외동포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 그것이 만들어진 원리를 적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된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지 않을까?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가 지정한 국보 1호가 아니라 우리 고유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국보 1호가 되길 기원해본다.


<1년간의 셰어하우스 생활기>

처음 셰어하우스에 살게 된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나는 신촌에 있는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고, 병원과 가까운 집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 이대에 위치한 셰어하우스를 알게 됐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과 산다는 게 처음부터 쉽게 느껴진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한번은 가서 봐보자’ 라는 생각에 집을 방문하고서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그렇게 이집에 살게되고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사진=1층 거실 식탁)


- 보증금 80만원에 집을 얻다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시작한지 4년, 별의 별 집에서 다 지냈었다. 기숙사, 반지하, 홍대 원룸, 강북 엄마 친구집, 친적집, 복층 오피스텔까지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1년에 두번 꼴로 짐을 쌌다 풀었다 했다. 짐이 되는 겨울옷은 애시당초 많이 사지도 않고, 조금만 필요없어도 물건을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에게 집의 개념은 잠자는 곳 정도 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곳은 ‘집’ 이 아니라 ‘방’ 이였다.


높은 보증금과 월세 그리고 그만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가지게 되는 좁은 방. 지금 내는 월세도 버거운데 더 좋은 집에서 살려면 더 많은 비용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지 앞으로 내가 살아가게 될 미래의 집에 대해서도 낙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포기’는 내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까지도 서서히 퍼져나가는 듯 했다. 


“지금 현재 이렇게 좁은 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데 언젠가는 내가 내 집을 마련하고 독립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집살려면 10억은 있어야 한다는데."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였다.


1000만원이 넘는 보증금은 도저히 내 스스로 벌 수 있는 돈이 아니였다.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도 버거워하셔서 친구와 반반씩 모아 집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셰어하우스의 보증금은 달랐다. ‘두달치 월세가 보증금’ 그 돈은 80만원이였다. 보증금이 100만원도 아니고 80만원이라니. 보증금은 적을 수록 좋다지만 나에게는 너무 파격적인 가격이라 이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000만원을 감당하던 나에게 920만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였다. 아담한 3층 주택에 거실이 2개, 쾌적한 부엌, 넓은 옥상에 아담한 테라스까지 빠짐없이 좋았다. 7명이 한집에 살면서 거실, 부엌, 화장실을 공유하지만 방은 따로 쓰기 때문에 나의 개인시간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생긴다는 것

7명이 함께 살았지만 다같이 밥을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다 각자의 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세명, 네명 시간이 되는 사람끼리 같이 밥을 먹었다. 귀찮을 땐 혼자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는데 그러면 라면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서 누군가가 같이 먹으려고 나오게 되어있다. 그런게 좋았다. 집에서 사람사는 냄새가 나서 뭐든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같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어느정도 맞춰나가야 되는 일이 생기는 것과 같다. 룰이 필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은 집 사람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하면서 청소와 다른 문제들을 상의해나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식탁에서 회의도 하고, 회의 후에는 같이 요리를 해서 밥을 먹기도 한다. 






- 월세는 28~38만원, 좋은 공간 그리고 좋은 생각



   (사진=1층 거실)


   (사진=2층 거실)


사실 셰어하우스라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1층 거실에서 우리는 한 두명씩 모여 빈둥빈둥 티비를 보기도 하고, 2층 테라스에서 연애나 일 이야기를 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때로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 문닫고 하루종일 잠만 자기도 하고 셰어하우스에서의 생활은 특별하기보다는 대게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1층 거실에서 밤새 대학 과제를 하기도 하고, 몇몇은 모여서 컴퓨터 게임을 하기도 한다. 혼자서 원룸사는 일이 지루하고, 무섭던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딱 좋다. 모든 셰어하우스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집은 다들 셰어하우스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같이 산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같이 티비보고, 밥 먹고 이런 것들이 매일 같이 사는 가족들 보듯이 일상적인 일들이 되어버려서 맞추어간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가끔 직장 다니는 친구와 학교 등교시간이 비슷해서 같이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헤어질때 '저녁에 만나' 라고 말할 때면 가족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때면 모여사는 우리가 신기하다.


친구들이 놀러와서 7명인 식구가 10명 정도 되면 1층 거실에서는 술판이 벌어진다. 다들 어울리기를 좋아해서 집에 놀러온 손님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배달음식 시키고 편의점에서 술 사와서 치맥하다보면 이 집 살기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놀러온 손님들도 이런 우리집을 신기해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작년에 방송했던 '괜찮아, 사랑이야' 같다고 한다. 테라스에 있던 의자에서 햇살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기도 하고, 저렇게 이불을 널어놓기도 한다. 여름에는 돗자리를 깔아놓고 치킨시켜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우리집 사람 참 많다라고 느낄때는 요리를 할 때다. 찌개를 좋아하는 나는 김치찌개를 끓일 때면 10인분을 한다. 아니면 다음날에 내가 먹을 김치찌개가 없기 때문이다. 입이 많아서 인지 왠만한 요리를 다 한그릇씩 비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래서 찌개를 끓이다가도 양을 보면 집에 사람 참 많다라는 생각이 든다. 라면사러 가기 귀찮으면 아무나 라면있는 사람 있나고 묻고 다음에 사다준다고 한다. 그런게 웃기기도 하고 재밌다. 


집 값이 비싸고, 1인 가구가 많은 서울에서 서로 어느 정도 배려하고, 규칙을 지켜나갈 용의가 있다면 셰어하우스는 좋은 주거 형태이다. '방'이 아닌 '집'에서 높은 삶의 질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10억을 모아 서울에서 내 집마련 할 수 있을 까?" 이 집에 살며 사회문제인 주거난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함께 풀어나갈 고민을 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가 무능력한 개인이라서 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집 값이 비정상 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셰어하우스는 좋은 대안이였다. 셰어하우스가 보편화되며 많은 이들이 같이 밥 먹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



   (사진=2층 테라스)


   (사진=내 방)



  


 



   언제 더웠냐는 듯이 쌀쌀해진 날이다. 10월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칼바람이 부는 걸 보니진짜 가을이긴 한가보다사실 나는 가을을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이다가을에 맞는 쌀쌀한 바람도 좋았고높은 하늘도한 조각 떠 있는 구름도 좋았다무엇보다 생일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나를 더 즐겁게 만들었었다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그 기분은 가을을 기다리게 했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가을이 싫어진 건 고3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내 생일도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을 즈음이다. 교정에 은행이 떨어지고 나뭇잎이 지면 수능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체득한 결과, 가을이 온 것을 느낌과 동시에 내가 어딘가에 던져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푸르던 잎이 노랗게 변하는 은행나무를 보고 있자면, 준비되지 않은 나 자신이 더욱 초라해졌다. 사람들은 늘 나를 보며 실전에 강한 아이라며 걱정이 없다고 했지만, 수많은 걱정과 근심을 품고 울며 자는 날이 수 없었다.


  5년이 지나, 다시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다시 사회에 내던져질 준비를 하고 있으니 문득 피하고 싶었던 고등학생 때의 가을이 생각났다. 계절이 바뀌는 것에 늘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던 지난 사 년과는 달리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나의 인생을 걱정하며 시간이 가지 않길 기도했다. 날을 새며 자기소개서를 쓰고 고치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칸을 보며 그간의 삶에 의구심을 느꼈다. 분명히 부족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나는 뭘 해왔는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말할 수 없었다.

 

  그간의 날들보다 훨씬 쌀쌀한 오늘, 나는 고등학생 때처럼 쓸쓸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우는 내 곁에서 말없이 함께 걸어주던 친구가 있던 그때와는 달리 홀로 밤길을 걸어야 했다. 명단에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글자를 한동안 바라보고 나니, 내 삶을 부정당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문젤까 고민해봐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청해봐도 뻥 뚫린 듯한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라는 말로도 '이게 부족했어'라는 충고로도 마음을 다잡을 수 없는 것을 보니, 오늘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날인가 보다. 오늘을 마음껏 슬퍼하고 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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