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핵? 선한 악마?

새해가 밝은지 보름이 지났다. 새해 소망과 다짐이 아직 채 식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우리 사회분위기는 냉랭한 듯하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남북관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대북제재에 대한 뉴스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며, 우리 정부 또한 대북방송을 하는 등 새해부터 남북관계에 희망은커녕 더욱 어수선한 분위기와 불필요한 긴장감만이 맴돌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총선을 앞두고 위안부문제 등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 어수선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우선 남북관계에 대해서 먼저 글을 쓰고자 한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군인들은 외출과 외박이 통제되는 등 지난해 8월 이후 또다시 비슷한 남북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국제사회는 대북제재 강화방안을 논의하고 있고, 정치권에서는 며칠 전 여당 원내대표가 우리 또한 자위권 차원에서의 핵을 만들어야 한다며 평화의 핵을 주장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핵무기와 사드 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야당에서는 일부 비판에 목소리를 내기도 하는 상황이다.

                                              <출처 : 네이버>

이와 같이 아직도 핵과 같은 무력적인 힘으로 안보가 굳건히 지켜지고 평화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시각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분단국가에서의 국방력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평화의 핵이라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선한 악마, 악한 천사란 말이 맞지 않듯이 평화와 핵은 공존이 가능하지 않은, 굉장히 모순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핵,무기라는 것은 그 자체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그 근본적인 목적은 누군가를 굴복시키고, 무언가를 파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무기를 생산하고 전쟁을 함으로써 서로 지속적인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멸하는 길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핵과 같은 무기를 만들어서 전쟁을 사전에 억제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서로 등을 돌리는 냉소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안보라는 문제에 있어서 힘을 이야기하고, 맞서서 무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환호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분위기를 잘 이용하는 것이 정치인들일 것이다. 몇 일전 여당 원내대표와 같이 핵무장을 이야기 하면 분명 그런 주장에 대해서 동의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올바른 정책이고 지켜야 할 가치관인지 냉철하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 북한이 왜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강력한 힘을 넘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안보와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서로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그런데 일부 우리 정치인 및 시민사회는 핵무장을 주장하는 등 북한과 같은 모습을 보이려 하는데 이것은 매우 옳지 못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고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책도, 가치관도 아닌, 단순한 인간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일부 이러한 생각이 마치 하나의 올바른 정책처럼 또는 정당한 이론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정도에 따라서 누군가의 애국심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평화를 불러오는 것, 어떤 대상간의 화해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오랜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서 많은 고민과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비로소 나오는 것이기에 진정한 안보, 평화란 쉽게 얻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평화를 이야기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적대시하는 마음을 비추지 않는 사람이나 정치인들은 오히려 정책이 없다는 평가와 더해서 사상적인 의심을 받고 정치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과연 진정한 안보와 평화는 어디서 오는가? 정말 우리도 맞서서 핵을 만들고 무력이나 정치적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한반도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수 있을지, 평화의 핵이라는 것이 이치에 맞는 말인지 필자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의 문제는 더 이상은 남과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문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요한 해결과제 중 하나가 된 만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는 무력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진정한 평화로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안 쏘는 탱크는 없다. 탱크는 쏘자고 만드는 거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中-

'채희락의 [Let's take a short res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을 떡으로 바꾼 부자  (0) 2019.02.17



레쓰비_저세상커피.jpg

이 광고 다들 짤방으로나마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저세상 커피’라는 이름의 짤로 많이 오르내린 이 광고는 90년대 말 레쓰비 지면 광고입니다.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인데, 아마 제작자가 영화 ‘제5원소’를 좋아했나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광고입니다. 뭐만 하면 밀레니엄을 갖다 붙이기 바쁜 시대인걸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현실이 IMF라는 지독하게 내려앉은 시대이기에, 미래에 대해 더욱 갈망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커피하면 고급적인 인상이나 따뜻한 연인들의 감정으로 어필합니다. 레쓰비는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저 이번에 내려요’,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같은 멘트를 거침없이 날리는 오글거림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 감성으로 어느 정도 입지가 굳혔을 법한데, 그런 이미지를 다 던지고 새로운 이미지 전환을 꾀해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시대도 밀레니엄이고, 여태껏 커피가 소구하지 못한 점을 이야기해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의식의 환기를 노린 것이겠죠. 그러나 얼마 못 가 묻히고 말았습니다. 도박이었던 것이죠. 


광고가 너무 주관적이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광고에서 메시지를 정의하는 과정을 부호화라고 말하고, 이를 대중들이 이해하는 과정을 해독이라고 합니다. 앞선 광고가 소비자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은 결국 소비자가 광고 메시지의 공감 실패, 즉 부호화의 실패인 것입니다. 너무 주관만 앞선 나머지 소비자가 공감하지 못하는 소구가 되버린 것이죠. 
하지만 이 시도에는 의의가 있었습니다. 누가 커피 광고에 기존까지의 달달한 감성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감히 여느 광고보다 파격적이었노라고 생각합니다.


파격(破格), 틀을 파괴한다, 기존의 갖춰진 관념과 의식을 깨어버린 새로운 생각,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 일입니다. 파격적인 생각이 모이면 혁명이 되고, 파격적인 광고는 대중의 이목을 자극합니다. 물론 모든 파격이 그렇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한 파격은 그 대가로 대중들의 냉소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도 모든 파격은 하나의 업적을 남깁니다. 대중이 기존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틀을 깨어, 더 넓은 사고의 폭으로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일종의 선구자인 셈이죠.


대신 파격에는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틀을 깨면,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하는 그런 사명 말입니다. 그게 없다면 단순히 그건 파격이 아니라 파괴겠죠. 그래서 파격은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존의 얽매이던 틀을 구태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넘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파격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나는 광고가 있습니다. 선거 광고인데, 벌써 10년도 더 지났네요. 


#_노무현

 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2002)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 광고 같은 경우에는 후보자의 약한 모습을 잘 나타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유권자들에게 후보자가 나약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런 광고에서는 대개 ‘리더라면 이래야 한다’는 저변을 깔고 PR을 시도합니다. 강인한 모습, 유능함을 어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광고는 완전히 그런 불문율을 무시했습니다. 소박한 이미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메인으로 하기에는 실로 파격적입니다. 존 레논의 ‘Imagine’ 선곡 또한 여기에 한 몫 더합니다. 가사지만 나라가 없다고, 자기 재산이 없다고 생각해보라는 말들이 태연하게 대통령 광고에서 등장한다는 건 광고로써 혁명이지만 동시에 승산마저 미지수였습니다.


눈물 흘리는 후보자와 모험적인 팝송. 얼핏 보면 파격이라 해놓고 의미 없는 시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탄탄한 메시지가 숨어있습니다. 답의 실마리는 노랫말에서부터 있습니다. 천국도, 나라도 심지어 자기 재산도 없다고 생각해보세요라고 한 말에는 이어, 오늘을 위해, 평화를 위해 그리고 사랑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프레임보다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위해, 기꺼이 눈물도 흘릴 수 있는 사람. 광고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입니다. 잘난 점을 강조하기보단, ‘사람됨’의 리더를 말하고 싶은 광고. 어찌 보면 당신의 철학이 오롯이 반영된 광고인 것 같습니다. 


#_병맛


아마 이것도 파격입니다.

사실 파격의 정의는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슈가 파격일 것 같습니다. 백종원의 요리법도, 김기태의 창조야구(참 소신 있지 않습니까ㅋ)도 모두 파격이고, 더 나아가 병맛 또한 오늘날 파격이 진화한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병맛이 무슨 진화까지냐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과거의 광고를 생각해본다면 확연히 달라진 구석이 많습니다. 


과거의 광고는 말해야 하는 것이 꼭 분명해야 했습니다. 15초든 30초든, 소비자에게 강점들을 설명하거나, 차라리 강압적인 세뇌(주로 대부업체 광고를 생각하시면 됩니다)를 해서라도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주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메시지에 전달하기에 급급한 구석이 보이는 광고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이 지나자, 그런 조급함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편강한의원 (ⓒ 미쓰윤, 2014)


유튜브 광고로써 많은 화제가 되었던 편강한의원 광고입니다. 진정 병맛의 진수입니다. 그것도 진지하게 병맛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대에게는 웃긴 영상으로써, 병맛 코드가 먹혔을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아마 기성세대에게는 이 광고가 납득이 안 갈 것입니다. 전혀 뭘 말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반응이겠지요. 그래도 저는 두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인지로써의 전략은 성공했다고 봅니다. 20대에게는 그들의 언어로써 어필한 것, 그리고 기성세대에게는 낯선 병맛으로 인한 자극으로써의 인지가 가능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격식의 틀에 매여있던 기존까지의 광고에서, 말하기에는 차마 저렴한(?) 어필들이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B급 문화로만 치부해왔던 것들을, 세상에 표출하고 또 다른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맛의 표출은 단순히 웃긴 것을 넘어서, 오늘의 공감대를 제대로 알고, 말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또한 파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파격에 대해서 역설을 했지만, 글을 쓰다보니 파격적이지 않다면 어떨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모든 광고는 파격을 바탕에 둡니다. 기존과의 차별을 강구함으로써 그 시작점을 찾는 것이죠. 그 시작이 없다면 결국 모든 광고는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역으로 파격하지 못하는 사회는 무슨 사회일까요. 기존 틀에 만족하는 사회는 결국 틀에 갇혀있음을 말합니다. 진보할 수 없는 사회인 것이죠. 파격은 비록 뭇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숙명을 바쳐 세상의 틀을 깬다는 것은 위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자병법에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겼다고 할지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는 이길 수는 없으니 주어진 상황에 맞게 끝없이 변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존에서 변화하는 것, 파격(破格)은 과거에도 오늘도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조건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뮤직 플레이어를 키고 노래를 찾아본다. 오늘은 마음은 기억하지만 머리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노래들이 듣고 싶다.
당연히 제목을 모르기에 뭇 아무개들의 선곡표(멜론DJ)들을 보면서 기웃거려본다.
" 가사가 예쁜 노래 모음 " " 몽황적 느낌의 중독성이 강한 노래 " " 새벽이 오는 밤 쯔음에 듣는 음악 "
나름의 카테고리화 되어 정리된 노래들.
듣다보면 가끔은 "엥? 이게 왜 이런 주제에?" 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반가운것은 내가 들어본 적이 있던, 내 경험에 깃든 노래가 가끔 나올 때의 희열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OST라는 카테고리에 눈이 갔다. Original Sound Track.
흔히들 말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된 노래들이다.
하루에도 수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노래들 속에서, 이 OST들은 어찌보면 보통 노래들 보다는 보석의 과정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원석이랄까.
심하게 얘기하면, 나온 지 몇시간도 안돼 잊혀지는 수많은 인디음악들이 흙수저라면, 이들은 분명 금수저를 문걸 테다.
물론, 금수저의 음악들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곤 하지만..

 

 

OST항목을 누르자 요즈음의 인기중이 OST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다. 그 중 TOP10개 중 9개의 노래들이 전부 응답하라 1988로 채워졌다.
국민 모두가 응팔의 감성에 빠져산다고 하지만, 이건 뭐 다른 드라마나 영화들의 OST들은 기도 펴지 못할 기세다.
그러다 응팔의 OST가 가진 힘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응팔의 OST들은 모두가 원곡을 Remake한 노래들이다. 오혁의 소녀는 1985년 이문세의 '난 아직 모르잖아요'란 앨범에 수록되었었고,
김필의 청춘은 1981년 산울림의 '가지마오'에, 걸스데이 소진이 부른 매일 그대와는 1985년 들국화의 노래이다.
그 밖에도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최호섭의 세월이가면까지..
당시의 시대상의 노래들을 지금의 핫한 아티스트의 입맛과 매력으로 해석했다는 점, 그러면서도 옛 감성을 무시하지 않는 절제미를 갖췄다는 점이 리메이크임에도 우리귀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리메이크 노래들이 응팔이라는 옷의 감성에 비단가루역할을 한다면, 드라마속에 깔리는 원곡 그자체들은 그 옷(응팔)을 채우는 포근한 솜이다.
각 회의 테마와 컨셉에 맞게 이뤄지는 적재적소의 원곡들은, 리메이크에 이미 젖은 우리의 마음을 한층더 무겁고 심오하게 한다.
대학가요제의 마지막을 장신한 신해철의 '그대에게'에게 열광하는 주인공들, 혜리에 대한 마음을 눈빝으로 전하는 정환의 눈빛에 깔리는 광하문연가와 소녀, 풋풋한 청춘들의 우정애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깔리는 감미로운 변진섭의 '숙녀에게'까지..

수 많은 당대의 노래들이 있었고, 수 많은 당대의 노래들을 리메이크 할 수 있었곘지만, 요즘음의 젊은이들도 한번 쯤은 들어봤을 "아! 이노래!",
그리고 당시의 추억과 환경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이햐! 역시 이노래!"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기억하고 눌러쓴 이 노래 선곡에 나는, 드라마 흥행의 신의 한수였다 감히 얘기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응팔의 OST들을 지나 조금 더 스크롤을 내려본 곳에 박효신의 '눈의 꽃'이 당당히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
11년전 소지섭, 임수정 주연의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OST로 겨울내내 HIT가 되었던 곡.
11년이 지난 지금도 이 겨울에 사람들은 그때의 소지섭의 열연과 임수정의 애틋한 감정을 잊지 못하는가보다.
아니, 단순한 드라마의 감정과 더불어, 어쩌면 당시의 우리들의 감성에 무슨 짓을 해났다 보다.

 

 

또 한번 생각에 잠겨본다.
2005년 겨울, 그때 나는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이 드라마를 보았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 말이다.
  
마음의 기억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OST의 힘이었고, 나가아 음악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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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핵실험을 통해 보는 북한의 속사정


북한에도 진보적인 사람들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다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한이 왕조와 다를 바 없는 억압적 국가인 만큼 진보-보수의 스펙트럼이 협소하고, 또한 폐쇄적이기 때문에 잘 포착되지 않을 뿐이다. 북한의 진보적 인사들은 1945년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부터, 이번의 4차 핵실험이 있기까지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들의 존재를 염두에 둘 때, 지난 6일 이뤄진 4차 핵실험은, 북한의 핵기술이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사실 진보라는 단어를 콕 집어서 정의내릴 수는 없으며, 때문에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온건파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보를 ‘비교적 개혁적 성향’이라고 피상적으로나마 정의한다면, 북한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점은 수령의 철학과 그것이 구체화된 주체사상이다. 말하자면, 주체사상에 가까운 것이 북한의 보수다(이러한 진단은 주체사상이나 북한 정치의 다층적 속성으로 인해 북한 정치지형을 정확히 짚어낸다고 할 수는 없다). 북한의 역사는 수령의 생각에 어긋나는 사람들, 즉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한 숙청으로 가득하며, 그 결과 오늘날의 북한은 개혁을 극도로 꺼리는 국가가 되었다. 북한의 온건파는 다른 어느 나라의 진보세력보다 더욱 위험한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수령과 주체의 의식에 철저히 복종하긴 하는 가운데, 그 안에서 조금씩의 변화를 바라보는 진보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운신의 폭이 좁지만, 그들은 한 가지의 방법을 통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바로 수령의 변화를 돕는 일이다. 수령의 철학은 주체사상으로 구체화되었고, 조선로동당과 북한이라는 국가는 이를 철저히 옹호한다. 때문에 수령조차도 주체사상을 함부로 손바닥 뒤집듯 바꾸지는 못한다(97년 망명한 황장엽은 이를 두고, 10살짜리 아이가 수령이 돼도 북한의 체제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른바 '수령을 따라 위대한 혁명의 위업을 달성한다'는 북한의 핵심 목표에 어긋나지 않는 한 그 방법론은 다양할 수 있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의 연기로 유명해진 독립투사 김원봉. 그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반대했었으며, 1956년 김일성을 비판한 세력이 숙청되는 과정에 1958년에 실각되었다. 그 후의 종적은 알 수 없다.


이면(裏面)의 목소리


북한에서 진보-보수의 갈등이란, 곧 미제와 그 앞잡이 남조선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사이에 둔 온건파와 강경파 간의 갈등이고, 이는 때때로 경제파와 안보파의 갈등이기도 하며, 당세력과 군세력의 갈등이기도 하다(물론 북한 내부에 어떤 '파'는 존재할 수 없고, 이러한 구분은 대체로 합치될 뿐이다). 군부 강경파는 '조선반도에서의 공산주의 승리'를 위해 철저한 보수성을 표방할 수 있는 명분을 쥐고 있고, 그 틀 속에서라도 경제나 발전을 말하고 싶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명분이 없다. 이러한 구도를 뒤바꿀 수 있는 사람은 수령뿐이다. 수령이 경제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인민 생활을 최대한 향상시키고자 했으며, 그 주요한 방법은 남한과의 경제협력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개성공단이다.


오늘날 개성공단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여기저기서 지탄을 받고 있지만, 개성공단이 개설되는 과정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개성은 평양과 서울을 잇는 주요도시로서, 북한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중 하나다. 개성공단이 착공되기 이전 개성 지역에는 군단 규모의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김정일은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개성공단 부지 근방에 있던 6사단, 64사단, 62포병여단을 10km 이상 후퇴시켰다. 남한으로 치자면, 파주 이북의 모든 부대를 고양·의정부 근처로 후퇴시키는 일과 맞먹는 일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남조선의 함정에 걸려드는 꼴"이라는 북한군 내의 강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상당한 반대가 있었으리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김정일의 개성공단에 반대한 강경파 다수가 당·국가의 요직에서 해임되는 사이,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경제·외교 등 다방면에서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도 눈여겨봤던 박봉주, 개성공단을 중시했던 장성택, 8·25 합의를 이끌어낸 김양건 등이 무분별한 보수성과 거리를 둔 인물들이다.


▲지난 6일 평양 기차역 앞에서 핵실험 성공 뉴스에 환호하는(시늉을 하고 있는지 모를) 평양 시민들 ⓒ로이터


4차 핵실험이 당혹스러운 이유


지난 6일 북한이 자행한 핵실험은 그야말로 깜짝 뉴스였다. 핵실험이 이후 며칠 간 국제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각국 언론을 장식한 '기습'이라는 용어가 이를 잘 표현한다. 북한은 핵실험 계획을 타국에 통보하기는커녕 실험을 카드로 하는 어떠한 외교적 처세도 하지 않았고, 관련된 언급이나 예고도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신년사조차 핵 언급을 피했다. 정말로 수소폭탄실험이었나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부터 출발해, 왜 하필 지금 실험을 했고,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수많은 의문에 대해 여러 가설만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수소폭탄이었는지 김정은 생일(1월8일) 축하용이었는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핵실험이 왜 기존 핵실험과 달리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점이다. 국제사회는 1차~3차 핵실험에 담긴 북한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핵실험은 대개 [외교관계 악화→미사일실험→핵실험]라는 공식(?)에 따라 진행되었고, 북한은 이를 통해 대내적 결집과 대외적 경색국면 돌파를 꾀했다. 작년 10월,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 당시 "미사일을 쏘되 핵실험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분석이 쏟아졌던 것도 공식이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시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실험을 통한 국제외교전이 이와 같은 흐름에 따르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사전대응을 준비하는 한편 실험 후 대북제재와 같은 강경수로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핵실험은 과거의 흐름과 전혀 합치되지 않으며, 무엇을 의도로 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중국에 대한 불만과 대내외적 독립의지를 표출했다는 식의 원론적 분석만이 가능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 북한은 기존의 틀을 깨버린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깨면서까지 북한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더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첫째로 최고승인자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곁에 이른바 온건한 사람들, 즉 북한의 외교에 합리성을 보태주던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013년 12월 8일(처형 4일 전),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체포되는 장성택(左)과 2015년 12월 29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된 김양건(右)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


언제나 그래왔듯 북한을 향한 모든 분석은 외부자의 시선(outsider's view)에서 머물러 있다. 외부자의 시선을 통해 북한은 뭉뚱그려진 단일한 집단 내지는 몸뚱아리처럼 포착되고, 관심은 '그 몸뚱아리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로 수렴된다. 핵실험에 대한 분석이 한결같이 '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다. 외부자의 '왜'라는 질문은 '목적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며,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배제된다. 분석이 북한 사회의 외피를 뚫고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여태껏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이라는 논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일본의 자민당과 민주당, 중국의 태자당과 공청단 등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한 나라의 정치적 이념지평의 다양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북한의 정치적 이념지평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협소하다. 그러나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은 수령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의 최대한의 다양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북핵위기와 같은 결정적 사안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나 남북관계가 유지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남북관계가 발전적일 때 그들은 북한에서 영향력을 펼칠 수 있었고, 이에 힘입어 수령은 개혁적 변화의 추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4차 핵실험이 벌어진 지금,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디 있지?'라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2013년 처형된 장성택과, 2000년대 들어 공식적으로 세 번째로 교통사고를 당한 김양건이 언뜻 생각나는 이유다(북한에서의 교통사고는 항상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북한의 진보적인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김정은이 원하든 원치 않든 대남 강경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든 협력대상이든, 핵문제가 남북 사이의 모든 문제를 집어삼켜버리는 블랙홀이 된다면 분단의 괴물은 한반도를 끊임없이 지배할 것이고, 통일은 전쟁으로밖에 이뤄질 수 없는 '죽음의 성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안에는 평화로운 한반도와 평화로운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북한에도 비록 우리와 생각은 다를지언정, 남북 대결구도를 타파하고 평화를 논의할 수 있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실이다.




지난 18일, UN총회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인권결의안은 2005년부터 UN총회에서 매년 채택되어왔으며, 2014년부터는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권고하는 강력한 조항이 추가되었다. 북한은 조사위의 활동이 인권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두고 있다며 북한인권결의안에 항상 반대해왔다.


북한 내 인권 침해 실태는 세계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덜 심각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수준이다. 인권 문제는 한 개인이 삶을 살아가는 문제이므로, 평화나 통일과 같은 거대한 담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에 북한 인권 결의안을 자체적으로 결의하는 나라는 물론, 북한 인권법을 국내법으로 제정하며 북한 인권 문제의 개선을 외치는 나라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 6월 23일 유엔 북한인권사무소 서울사무소가 설치되어있으며, 국회에도 북한인권법이 계류되어 있고 이를 하루라도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 인권 문제의 모든 원인은 북한의 억압적인 정권에 있으며, 때문에 북한 정권을 강하게 압박하고, 그들의 존립 기반을 흔들어 위태롭게 할 때 인권 문제도 개선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노력으로 인하여 북한 인권 문제가 어떠한 형식과 방향으로든 개선될 가망은 없다. 정권에 대한 압박이 인권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12월 10일, 처음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공식 안건으로 채택한 UN 안전보장이사회 ⓒUN


북한 인권 문제 개괄


북한 내 인권 침해는 권력층의 범위가 산정할 수 없이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권력층에 의해 일반 주민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권력층을 교체하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북한 인권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북한의 권력층도 인권 침해에 대하여 분명한 책임이 있지만, 동시에 권력층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체제적 특성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인권 문제는 본질적으로 북한 체제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문제다. 인권 침해는 모든 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발생하는데, 북한 인권 문제가 심각한 근본적인 이유는 인권 문제를 유발하는 주체적 행위자가 북한을 지탱하는 체제 자체라는 점이다. 즉, 북한 권력층은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주체적 행위자인 동시에 체제에 관해서는 객체적 행위자다. 북한 체제 하에서는 북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억압받는 피지배자인 것이다. 권력층이 객체적 행위자로서의 성질을 가지는 한 권력층의 변화가 인권 문제로 변화할 여지는 없다.


따라서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된다. 북한 체제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주체’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을 뒤섞어 관리하며, 때문에 북한 권력층 또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다방면에 걸친 인권 문제(정치범 수용소, 식량권, 표현의 자유, 이주권, 성분 차별 등)를 생존·충성의 문제와 견고하게 결합시킨다. 북한 내적으로는 인권 문제가 이데올로기의 부분집합이다.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북한 인권 문제는 인권 문제의 주체와 객체, 즉 권력층과 일반 주민을 통해서는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때문에 북한 권력층에게 인권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다.


▲ 주체사상이 지배하는 북한. 김일성의 혁명사상은 곧 주체사상을 의미하며, 그 누구도 이에 반기를 들 수 없다.


더구나 이런 접근은 판단의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아 논리적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정은 시대 북한의 경제적 상황은 과거에 비해 호전되었으며, 이제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실제로 IMF나 한국은행조차도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매년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고 보고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인권을 위해 힘쓰는 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UN의 북한 인권조사위원회가 북한 내부에 들어가 북한 인민을 인터뷰할 때, 체제에 완벽히 순응한 인민이 북한 내부에는 아무런 인권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실제로 북한 인권 문제는 없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의 대답이 ‘아니오’라는 것은, 질문이 문제의 본질, 즉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포함하지 않고 현상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 자체에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 본질은 앞서 언급했듯 북한의 체제다. 북한이 대대적인 경제제재 속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어나가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효과적인 제재나 압박은 없다. 가장 반인권적인 군사적 갈등, 즉 국지적 전투나 전면적인 전쟁을 기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 정권이 잘못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는 명백하다. 그러나 북한 인권 문제가 상당히 고질적이며 복잡한 문제인 만큼,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목소리는 북한 정권 규탄에서 북한 정권 해체 기도로밖에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체제적 특성은 간과되고 있는 것, 즉 현상에만 집중한 피상적인 접근인 것이다. 때문에 아직까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성숙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 북한 3대 세습을 규탄하는 시민단체 ⓒ오마이뉴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한 길


인권의 보장은 생명권(정치·시민·종교적 권리)과 생존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동시적 보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코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우선하지 않는다. 북한 인권 문제의 책임을 북한 정권에 묻는 것은 곧 생명권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체제가 경제적 상황을 개선·퇴보시킨다는 명제와, 국가 내 모든 주민 간 일정 정도의 경제적 평등성이 체제적 변화의 필요조건이라는 명제가 대립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인권 개선을 위해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생명권을 개선해줘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생존권을 개선해줘야 한다는 논리 또한 설 수 있다. 이 두 명제를 바탕으로 정책을 세우는 일은 정책적 명분과 현실성을 고루 고려해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시민이 어떤 방식으로든 북한 인권을 위한 일을 하는 것과, 국가 정부가 나서서 하는 것은 다르다.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해 소리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므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한 마디 말을 할 때도 그 파급력을 염두해야 하며, 어떤 언행을 할 경우 그 언행이 앞뒤가 다르거나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북한 인권 문제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복잡한 가운데, 정부가 북한 인권의 개선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로 북한 인권이 개선될 수 있도록 움직여야 한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는 같은 민족이라는 특수성을 갖는 남한이다. 또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남한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북한에 대한 언행의 영향력을 높이는 일, 즉 남북 관계를 긴밀히 엮어가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 내부에서 정치 체제의 하위적 위치에 있는 부분적 요소로, 남북 공동의 노력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개선해나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남북 간 정치적 관계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늘 명시해야 할 점은 북한이 정치와 인권을 묶어 다룬다고 해서 남한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남한 또한 인권과 정치를 묶어 다루면-인도적 지원은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북한 인권 개선에 악영향만 끼친다는 사실은, 정치적 관계 악화가 대북 인도적 지원마저 대폭 축소시킨 5·24조치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전략적 신뢰


남북의 정치적 관계 개선이 인권 문제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명제의 가장 큰 근거는, 정치적 관계 개선으로 말미암아 전략적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신뢰는 국제 외교에서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장 기본적인 신뢰구축(Confidence Building)이라는 정책에서 가져온 것으로, 남북 간의 평면적·일상적 신뢰가 아니라 전략적·관계적 신뢰를 의미한다(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빛 좋은 개살구이자 레토릭 정책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전략적·관계적 신뢰를 구축하는 일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상호 관계를 긴밀히 연관·결합하는 것으로, 그 대표적 모델이 개성공단이다. 남북이 공동으로 투자·관리하는 개성공단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전쟁 위험을 크게 줄이는 안전장치였으며, 단연 남북 간 정치적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남한이 대북 지원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지원의 규모가 크게 성장할 때, 인권 개선을 위해 남한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 또한 넓어지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바야흐로 인간안보가 중시되는 사회이다. 인간안보 곧 정치·경제·군사적 안정은 물론 민주주의 사회, 이주권, 환경권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며 안보의 개념을 인간에게 접목시킨 만큼, 인권 개념과 많은 부분에서 공명한다. 기존에 인간의 권리라는 틀에서 다루어지던 분야가 이제 ‘안보’라는 말로 새로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아름답게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인권의 보장이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한선도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변화와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허하다. 북한 인권 문제의 진짜 문제인 ‘체제’라는 괴물과, 그 괴물을  현실적인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때다.



부조화의 조화


단어에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여있다. “고독”에는 짙은 외로움의 감정이, “여행”에는 낭만에 대한 그리움이, “복면”에는 익명성이라는 담론이 내포되어 있다. 특정한 단어가 포괄하는 다른 ‘무언가’는 시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단어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무엇과 연결되는지 면밀히 고민해야한다. 2015년 겨울, “복면”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폭력성이 깃들고 있는 복면이라는 단어를,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해도 되는 걸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서로 연결되는 현상은 흔하다. 예를 들면 ‘푸른 종소리’나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와 같은 공감각적 표현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새로운 차원의 심상을 만든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만 봐도 가슴이 뛰거나, 헤어진 연인과 함께 듣던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 ‘부조화의 조화’ 현상은 보기보다 강력해서, 심리치료에까지도 이용된다.


때문에 특정 단어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단어와 관계된 것들을 꺼린다. 그러다가는 그 단어 자체는 물론 관련된 것 모두를 거부하게 된다. 소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가 대표적인 예다. 마법사들에게 볼드모트는 곧 죽음이었다. 마법사들은 볼드모트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입 밖에 꺼내지 않음으로써 그를 두려움 자체로 만들었고, 볼드모트를 두려움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볼드모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욱 막강한 공포권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 해리포터와 볼드모트. ⓒ네이버영화


단어, 프레임


같은 것도 그것을 나타내는 서로다른 단어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어는 가장 효과적인 ‘프레임’이다. 일례로, 교정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서투르게나마 올바름을 말하는 학생들을 흔히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순간, 학생들은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지닌 느낌(강경함, 진보지향적, 조직적, 융통성 없음, 반사회적 등)에 매몰된다.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몇몇 학생에게는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나, 모든 운동권 학생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그 매몰은 실제 운동권 학생들이 지닌 신념이나 태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운동권’은 외재적인 프레임이다.


대학교에 막 입학한 새내기 시절, 90년대에 대학에 다닌 선배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선배는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었는데, 그 때를 이렇게 추억했다. “극도로 진보적이었고, 극도로 보수적이었어.” 전자의 진보는 선배가 속했던 정치적 진영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후자의 보수는 진영 속에서 선배의 태도였다. 대립적인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치 진영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광대한 의미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에 따라 다른 프레임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형의 진보와 보수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보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지칭하는 정치 진영 현실 간의 심각한 부조화를 느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혹은 우파와 좌파)는 시대와 지역과 집단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보수와 진보라는 담론이 한국 사회의 특정 진영을 의미할 때,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내포하는 다른 ‘무언가’들도 그 진영에 귀속된다.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며, 누가 보수적이고, 누가 진보적인가 하는 질문의 답은 복잡하게 뒤엉켜버린다.



▲ 종단문제 해결을 위해 50일 간 단식농성을 한 동국대학교 김건중 부총학생회장 ⓒ오마이뉴스


보수의 프레임


동국대의 경우, 2014년 12월부터 조계종의 학교 행정 개입, 총장의 논문 표절, 이사장의 탱화 절도사건 등이 문제시되며 학생과 학교당국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학생들의 반발은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의 50여일에 걸친 단식농성까지 이어졌으며, 그 결과 12월 3일 동국대 이사회는 모든 이사의 사퇴를 결의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은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저항하는 학생들의 태도다. 그들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저 진보적인가? 아니다. 저항하는 동국대 학생들은 누구보다 보수적이다.


저항이란 근원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다른 무엇보다 보수적인 행동이다. ‘저항권’이라는 개념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존 로크에 의해 공식화되었다(물론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시민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구성된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시민의 자연권을 침해할 경우,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저항하고 정부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민중총궐기를 두고 폭력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지양되어야 하며, 누구나 폭력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비난이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비난과 연결될 순 없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랐다는 이유로 배척되지 않듯, 폭력 자체와 이를 자아낸 시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단지 폭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현상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온, 복면의 마스코트가 된 ‘가이포크스’ 가면. ⓒ네이버영화


보수의 제국, 검열관의 천국


서울대학교의 최인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프레임>에서, 프레임은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발언 이후 복면에 덧씌워진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는 시위대에게 끔찍한 폭력성을 부여하며,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시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한다. 복면을 폭력과 시위를 통제하는 내면의 검열관으로 만든 것이다.


민중총궐기는 경제민주화와 공약 폐기를 넘어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정부에 대해 쌓여온 불만의 응집이며, “헌법의 가치를 지켜라”고 외치는 시민들은 너무나도 보수적이다. 이를 철저히 외면한 채, IS 운운하고 저항권을 필요악으로 규정하며 “복면을 벗으라”고 외치는 자칭 보수 세력은, 폭력에 대한 비난을 무기삼아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한다. 흔히 말하는 ‘물타기’며, 헌법이 지향하는 ‘저항’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다.


보수는 신성하다. 보수는 과거의 가장 빛나고 찬란하던 가치와 신념들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며 만들어낸 시대정신이며, 피땀흘리며 세워놓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집중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다. 반대로, 시대정신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모순에 집중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식과 노력의 집합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앞뒤 다퉈가며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보수가 아니며, ‘보수’라는 복면을 쓴 친정부적·반국가적 세력이다. 시위대의 복면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전에 ‘보수’라는 가짜 복면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친한 후배들이 캡사이신 물대포 맞아가며 시민으로서 권리를 표출하는 동안 따뜻한 독서실에 앉아서 이런 논조의 글을 하나 쓴다는 것이 참 염치없는 행동인 거 잘 안다. 민주 시민으로서 집회 결사의 자유를 찬성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결집된 시민 행동의 정당성은 그 누구도 거역하기 힘들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민중 총궐기 같은 집회가 더 많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결국 '메아리 없는 그들만의 아우성'이 될 것이고 그러한 고립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집회의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련되지 못하고 너무 투쟁적이기까지 한 시위 문화가 바뀌어야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 논지인 “쳐 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함께하고 싶은 집회)”을 보고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 진보 진영 시위 문화에 대한 한계 역시 체감하는 한편, 사회 변화에 대한 조그만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쳐 맞을 각오하고 쓰는 한국의 요즘 집회 비판"

출처: https://brunch.co.kr/@funder2000/86

대규모 집회의 성격이 세련되지 못한 쌍팔년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의 일침에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건 사실이거니와 그 사람이 제기한 중요한 쟁점은 그게 아닌 듯싶다. 민중 총궐기라는 집회가 폭넓은 지지를 얻어 현 정부의 정책 전환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일조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결과 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 진보 정당(새민련을 제외한 기타 진보 정당)이 다수결로 결정하는 선거(2016년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만 한다.

따라서 더 많은 시민들의 참여 유발을 위해서 기존의 시위 문화가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민중 총궐기가 ‘잠재적 우군’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회색분자들’의 참여 독촉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중도층을 전부 회색분자’ 정도로 인식하는 그런 '쌍팔년도 식의 편협한 패러다임'은 중도층의 지지는커녕 그들의 ‘잠재적 관심’마저 유리시킬 뿐이다. 결국 민중 총궐기가 민중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수의 민중을 포괄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집회’로 고립될 뿐이라는 말이다. 범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진보 진영은 또 다시 선거에서 질 것이고 그들을 대표하는 ‘대리인’이 국회에 없다는 이유로 추운 날 캡사이신과 몽둥이를 맞아가며 불법 시위라는 오명까지 감수해야 하는 악순환이 매번 반복될 뿐이다.


‘민중 총궐기’와 같은 집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수 중도층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그들만의 단발성 구호’에 그치면서 그 집단 역량이 선거를 통한 진보 진영의 제도권 정치 편입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출처: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203_0010456219&cID=10201&pID=10200)


하나만 물어보자. 민중 총궐기 같은 범국민적 시위를 왜 하는가? 대통령, 국회의원, 관료 집단이 국민 여론을 제대로 수렴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바람과는 정 반대의 정책을 남발하면서 그러한 부당한 권력 남용을 제어하는데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의 틀에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을 때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권력을 거둬들어 그들 스스로 권리를 되찾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집회와 시위는 ‘임시적 수단’에 불과하다. 정부와 여당이 단정 지은 ‘폭력시위’를 하든, '합법시위'를 하든, 집회와 시위는 국민 의지에 반하는 대리인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 여론이 정책 결정 과정에 잘 투입되도록 위정자들에게 환기시키는 ‘일시적 무브먼트’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민중 총궐기의 최종 종착점은 시민들의 권리행사에 대해 진보 정당이 공감하고 적극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확인하는 소통의 장이 되는 동시에 결집을 통한 진보 지지층의 저변 확대와 중도층의 표면적 공감을 획득, 진보 정치인의 국회 대거 진출을 달성하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인은 의회라는 대의제 기구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다양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격하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거리의 정치’는 국민 여론 수렴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수도, 담당해서도 안 된다. 정치적 현안을 거리에서 해결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자인 의회가 시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 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시민들이 거리로 나올 뿐이다.

따라서 사회 문제는 거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회에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 변혁을 이루려면 ‘투표’, 즉 특정 수준 이상의 지지율이 필요하다. 이미 정해진 게임 룰이 있는 한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 최선이다. 54년 전, 누구처럼 ‘구국의 혁명’ 운운하며 총칼로 세상을 뒤집어엎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문제는 민중 총궐기를 기획한 진보  진영이 시위 문화 변화를 통해 대다수 중도층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냐는 것이다.

왜 중도층을 잡아야 하는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뿐더러, 행동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회 문제에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중도층에게 왜 진보 진영이 어필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필자의 답 대신, 근 몇 년 간 변화한 새누리 당의 전략을 말해보고자 한다. 새누리 당은 결코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정당이다. 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새누리 당의 전신 민자당은 PK와 일부 민주화 세력을 포섭하였다. 지난 대선 때는 뜬금없이 경제 민주화와 복지 담론을 내걸면서 부동층과 복지 취약 계층을 공략했고 결국 이겼다. 더 나아가 이자스민 의원을 내세워 다문화 담론도 노리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새누리당은 '이념 정당'보다는 다양한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포괄 정당'의 형태에 더 가깝다.

그들의 애매모호함은 역으로 폭넓은 지지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한다. 새누리 당의 정당 지지율을 보라. 그 많은 ‘악재’속에서도 지금도 40%가 넘는 지지를 받고 있다. 단지 '교육수준이 낮다고 여겨지는 일부 노인'들과 TK와 PK에 기반을 둔 '경상도 민심 덕'이라고만 오판하면 안 된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인프라를 갖춘 이 ‘코끼리 정당’이 뭐가 아쉬워서 진보 진영의 담론까지 호시탐탐 탐내겠는가? 바로 중도층 공략을 통해 보다 넓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보수도 끊임없이 '진보'한다. 그것도 아주 '세련'되게.

현대의 수권 정당은 과거처럼 선거에서 결코 자신들의 골수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구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회색분자들'에게 어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민중 총궐기가 보다 넓은 계층을 포용해야 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될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진보도 집회, 시위 문화를 포함해 다방면에서 변해야 한다. 포괄 정당이 전 지지층을 상대로 폭넓은 지지율을 노리는 것처럼 진보 진영도 어떻게 하면 중도층의 집회 참여를 유도하고 나아가 그들이 선거에서 정당 투표만이라도 진보 정당을 뽑을 수 있을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올해 정의당 당 대표 선거 후보로 나왔던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진보적 토양이 부족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보다 실현 가능한 '조그만 승리'를 거두는 데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진보가 99번을 실패해도 100번째 도전에서 성공을 거두어 변화를 이루어 낸다는 이 ‘슬픈 진보의 패배 공식’은 역으로 지금 대한민국 진보 진영이 '승리의 경험치'에 목말라 한다는 현실을 방증한다. 진보가 거듭된 실패에 익숙하다지만 '이기는 노하우의 축적'은 그들이 원하는 사회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조그만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진보 진영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민중 총궐기 집회가 단순히 "억울하오, 내 말 좀 들어보소."에 그쳐서는 안 된다. '회색분자'(?)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집회 문화로의 변화를 꾀하고 실제로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들에게도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앞서 말했듯이 투표로써 진보 정치인의 대거 원내 진출을 그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의회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소외 계층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일꾼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시위가 하는 것이다.


“떼 지어 푸른 집으로 가봐야 불통 누님만 계실 뿐이다.”

시위대의 ‘청와대 진출’보다 시민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진보 인사들의 ‘의회 진출’이 더 필요하다. 시위는 그런 결연한 집단 의지를 다지고 신념적 확신을 과시하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처: http://news1.kr/articles/?2506126)


시위를 하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중도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진보가 표방하는 핵심 가치나 강령을 버리고 보수 기득권에 흡수되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를 통한 평등 가치의 실현, 상호 체제 인정을 통한 남북 평화 구축,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 진보가 주장해 온 가치 중에는 분명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적지 않다. 다만 과거 군사정권과 달리 ‘이명박근혜 신보수주의 정권’은 어쨌든 민주적 선거를 통한 외형적 합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대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생략한 ‘거리의 정치’로만 대응하기에는 범국민적 공감을 얻어내기 힘들다고 본다.

민중 총궐기같은 시위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지지하는 진보 정당이 제도권 정치의 장으로 들어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기능해야 한다. 문제는 현재 진보 정당들이 비례대표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내 교섭 단체’조차 만들지 못할 정도로 득표율이 적다는 것이다. 소선거구제에 따른 지역구 선거에서의 제도적 불리함을 딛고 비례 대표제로 더 많은 의회 진출을 위해서는 좋든 싫든, 정당 득표율로 나타나는 중도층의 지지가 절실하고 이를 위해 진보 진영의 대표적 이미지인 시위 문화에 대해서도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 변신이라면 뭐든 괜찮다고 본다. 문화제 형식이든, 최대한 다양한 시민들의 발언대를 보장하든, 노래를 바꾸든 새로운 시도는 분명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생각보다 효과는 적었고, 말 못할 온갖 고생을 했다는 그들의 고충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를 시도한 것에 대해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도 회의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적 전환 국면을 이룬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시위의 성공 여부는 ‘시위의 방식’보다는 ‘시대적 흐름’을 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서울의 봄’과 ‘87년 6월 항쟁’은 각각 유신 정부 몰락과 4.13 호헌 조치라는 정치적 급변 상황과 집권 여당의 무리수에 대한 시민들의 '필연적 반작용'이었다. 역사적 타이밍이 갖춰지고 어떤 사소한 사건이 촉매로 작용할 때 다수의 잠재된 중도 시민들의 응축된 불만은 결국 폭발하게 되어있다. 그 전까지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들의 분노를 ‘임계점’까지 차근차근 유도해낸다면 말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진보 진영은 중도층을 받아들일 준비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세련되고 효과 있는 집회 방안을 주장하기 전에 참여부터 하라고? 있으면 먼저 알려달라고?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심정적 동조는 하지만 기존 집회의 표현 방식이 낯설어 참여를 꺼리는 중도층은 분명히 있다. 외연 확대를 위해서라면 그들이 오게끔 만드는 방안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음식 맛이 좋은 식당은 오지 말라고 해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손님이 적다면 왜 자신의 식당이 인기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들 스스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왜 맛이 없냐는 손님의 불만에 "그럼 니가 만들어 보던가."식으로 일갈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타개책인가? 그런 태도가 유권자들이 느끼는 진보 진영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러한 비아냥과 아집은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는 중도층의 지지만 이탈시킬 뿐이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은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하긴 하다. 문제는 일부 진보 진영 지지자들의 그런 경솔한 언행 하나하나가 민중 총궐기의 당위성에 대해서 굳이 반대하지 않을 '잠재적 우군'까지 돌아서게 만든다는 점이다. 포괄성을 담보하지 못한 시위는 의회민주주의라는 게임 판에 큰 영향을 끼치기 힘들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역시 초기 대학생 시위대의 산발적인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넥타이 부대’를 필두로 한 일반 시민들이 가세해서야 그 결집의 위력이 배가되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때도 우리는 '중도층의 합세'가 어떤 반전 국면을 가져왔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잠재적 우군’은 분명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중도층 시민들은 진보 진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치, 사회적 시류에 민감하다. 다만 평소에는 그 의식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선 역사적 타이밍도 중요하겠지만 중도층의 잠재된 의식을 분출시키기 위한 방법은 진보 진영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격발을 위한 노리쇠’는 이미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다. 


 

 

 

                 사진:  이재명 성남시장 연합뉴스

 

 

 

성남시는 내년부터 성남에 만 3년 이상 거주한 19~24세의 청년들에게 분기당 25만원 씩 연간 100만원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정책을 내놨다. 924일 성남시는 관련 조례안을 입법예고하면서 복지부에 정책 도입협의를 요청했다. 2016년엔 24세 청년들에게 지급하기만 했고, 소요 예산은 113억 원이다. 1-2개 연령 외에 추가 확대를 위해서는 정부의 참여가 필요해 이 정책의 채택안을 요청한 것이다. 성남시는 청년들이 돈을 성남 지역 내에서만 쓸 수 있게 전자화폐 형태로 지급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시장은 "65세 이상에게 월 20만원씩 주는 기초연금이 노인 세대의 과거 기여에 대한 후()배당이라면 청년 배당금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선()투자"라고 했다. 청년배당 정책은 우리나라 최초로 기본소득 정책을 도입하는 최초의 사례다. 일종의 기본소득으로, 복지사업처럼 소득 수준이나 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등 없이 지급된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복지는 늘려가야 하지만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다. 어떤 복지가 정말 시급한 것이고, 진짜 절실한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배분해야 한다. 취업을 돕고 싶다면 청년층을 상대로 취업 정보 제공, 전문적 직업교육, 인턴직 마련에 힘쓰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며 이는 포퓰리즘 정책이자 세금을 사용해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지금부터 논란이 이루어진 배경과 쟁점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1) 청년배당, 포퓰리즘인가?

성남시의 정책에 대해 가장 큰 비난은 포퓰리즘이자 헬리콥터 머니라는 것이다. 성남시는 재정자립도가 서울 강남·서초·중구, 경기 화성시에 이어 5위인 부자 지자체이다. 세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시장이 개인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것처럼 헬리콥터에서 살포하듯 하겠다는 것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많다. 청년층을 매수하기 위한 선거 전략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포퓰리즘은 혜택 받는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부담은 전체 유권자에게 분산되기 때문에 비판과 반대 목소리는 집결되기 힘들다는 점을 악용해 세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복지든 미래 성장을 해친다면 문제가 된다.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복지는 후에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적절한 복지정책은 성장의 기반을 다지지만, 부적절하고 근시안적인 정책은 미래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원의 희소성을 고민해 예산제약하의 최적화를 이루는 정책을 사용해야한다. 이를 위해 정책목표의 우선순위와 정책수단의 적합성을 따져야한다. 성남시가 청년취업문제가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청년할당제를 시행하겠다고 했다면 이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한정된 예산으로 어떤 사업에 치중할지 결정하는 것은 정부 혹은 지자체 목표의 비중설정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중요한 것은 주어진 목표에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현재 성남시는 일자리센터가 구직자의 취업상담, 교육, 알선을 하며 능동적으로 취업을 지원하며 3년 연속 도내 최고 취업자수를 유지하고 있다. 계층별, 대상별로 4~5주의 맞춤형 취업 교육은 물론 참여 수당을 주고 지원과 개인별 적성에 맞는 기업체도 발굴해 상담사가 동행 면접을 하는 제도를 시행 중이며 대규모 취업박람회를 8차례나 열어왔다. 청년취업을 위해 취업 정보 제공, 전문적 직업교육, 인턴직 마련에 힘쓰라고 말하지만 이미 잘 시행되고 있는 제도이며, 하나의 목표에 하나의 수단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다양한 정책조합을 사용할 때에 더욱 목표를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을 때도 많다. 직업 교육과 청년 배당금이 청년취업이라는 목표를 이뤄나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2) 청년배당정책은 어떤 효과를 낳을까.

많은 사람들은 이번 예산이 취업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비교로 정책의 실효성을 따지기엔 어려운 문제다. 정책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정책으로 인해 드는 비용은 관련 예산과 그 예산에 대한 기회비용이다. 그 예산으로 다른 곳에 예산을 사용했을 때의 기회비용을 면면히 따져야한다. 반면 그에 대한 편익은 이로 인해 아낄 수 있었던 취업준비생 청년들의 시간이다. 그 시간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었거나 취업준비에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번 예산 지급은 성남시에서만 유통되는 지역화폐로 지급되었기 때문에 지방 경제 활성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정책에 대해 성남시가 살기 좋은 도시로 평가되거나 많은 사람이 선호하게 되는 것 같은 긍정적인 반향이 일어 집값이 오르는 등의 capitalization도 정책에 대한 편익으로 들 수 있다. 같은 세금을 내는데 혜택이 많다면 사람들의 선호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면 단지 세금을 내는 비용만 따질 것이 아니라 이어진 효과에 대한 계산도 필요하다. 단지 정책에 들어간 예산과 당장에 정책의 시행효과가 있느냐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명목적 비용과 암묵적 비용 그리고 효과를 비교하며 어떤 것이 더 큰지 따져야 할 것이다.

 

3) 다른 시의 시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냐.

성남시의 이번 청년 배당으로 다른 지역의 청년들이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분권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지방정부가 나누어지는 것의 장점은 지역주민의 취향에 부합하는 공공재를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방정부간 경쟁하며, 서로 더 나은 지방정부를 향해 갈 수도 있고, 지방재 조달에 있어서 실험을 해볼 수도 있다. 한 지방정부가 시행해서 성공을 하면, 다른 지방정부가 따라가는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 지방정부의 격차가 생겨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정책을 막으면 안 된다. 물론, 중앙정부에게 과도한 보조금을 요청하거나, 빚이 많아진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복지를 이유로 빚을 지는 것은 국가를 망가지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남시의 자금과 연결지어서 봐야할 지점이다. 현재 성남시의 자금은 탄탄하다. 성남시의 재정자립도는 56.18%로 경기도 내에서 화성시(59.1%) 다음으로 높은 상태다. 하지만, 한순간의 인기를 위해 탄탄한 재정을 모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재정 유지와 복지정책의 균형이 필요하다.

 

4) 청년 모두에게 지급되어야 하나?

성남시는 19~24세 청년에게 소득이나 취업 여부 관계없이 분기당 성남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25만원을 지원하는 청년 배당을 시행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이나 노동여부와 관련 없이 모든 청년들에게 지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이는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재산, 소득, 노동 여부,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을 의미한다. 산업화가 고도화하면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기술의 발달로 노동력 수요가 줄어들면서 일자리 부족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지급해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자는 취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본소득은 복지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심사수급 과정에서 생기는 빈곤의 낙인과 수치심 유발을 없앤다는 것, 급여 수급을 위한 노동 회피를 없앨 수 있다는 것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것은 효율과 형평에 대해 어떤 것을 더 중시 여기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지원 대상을 일일이 찾아내야 한다면 선별복지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고 인력비용이 늘어나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떤 것이 편익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드는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사진: 이재명 성남시장 헤럴드경제

 

 

 

사실 여러 가지 문제에 맞부딪혀 성남시장의 청년배당제의 시행은 불투명한 상태다. 하지만, 예산을 가지고 정책을 논하려면 단순한 수치 몇 개에 큰 의미를 두고 시행해야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면 안된다. 폭넓게 보고, 예산안에 나타나지 않은 기회비용이 무엇인지, 이로 인해 더 얻을 수 있는 파급효과는 무엇인지 다 따질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이번 청년배당제는 시행된다고 해도 일회성으로 그칠 경우 예산 낭비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장기적으로 청년의 권익증진과 사회적 자본의 축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정책의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연합뉴스_성남시, 모든 청년에게 수당 주는 '청년배당'..입법예고

http://media.daum.net/society/all/newsview?newsid=20150929195756533

 

한겨레 21_모든 청년에게 월 10만원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0825171006532

 

한국일보_“청년배당, 청년세대에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http://www.hankookilbo.com/v/def29d198abe44d4ac97a7669b13a3bd

 

조선일보_청년들에 연 100만 원 살포, 해도 너무하는 성남시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4/2015100402545.html

 

http://www.kce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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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첫날의 일기  (0) 2015.10.04

출퇴근 시간에 기계적으로 몸을 지하철에 싣는 삶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의 내 모습과 다르게, 내가 잠시 살아봤던 인도는 생기가 넘치고 ‘살아 있는 곳’ 이었다. 물론 단편적인 모습이라며 인도의 사회문제를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에너지가 있고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도의 모습으로 계속 글을 써가도록 하겠다. 또한 기억해야 할 점이 내가 지냈던 곳이 소수민족이 많고 다양한 문화와 종교, 인종이 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시길.


‘진정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있는 인도
한국에서 나는 주체적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었지만, 경쟁 속에 눈치를 살피며 어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이끌려 살았다.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이고 사회가 원하는 것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다수의 방향에 따라야 하는지에 의문도 생기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인도에서 나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자신의 감정과 일에 충실하고, 주변을 살피고 함께 살 수 있는 여유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인도 사람들를 보고 게으르다고 말한다.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만약 릭샤 아저씨가 우리를 본다면 어떨까? 아마 아저씨는 우리의 방식이 더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길가에서 낮잠도 자고, 품격 있는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마시며, 가족들을 위해 일할 땐 일하는 릭샤 아저씨들의 삶은 만족을 알고, 그들만의 행복을 향유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기엔 그들의 삶이 열악할 수 있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보다 풍요롭다고 생각한다. 릭샤 아저씨들처럼 내가 본 인도분들은 자기 페이스를 절대 잃지 않으며, 어떤 틀에 자신을 가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 나간다. 누군가의 시선과 생각에 의식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충실히 사는 것 같았다. 자신이 궁금하면 물어보고, 흥정하고 싶으면 하고, 신기하면 쳐다보고, 무엇이든 때 묻지 않고 아이들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인도 분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누가 그들 삶의 주인인지'는 달랐다.
또한 타인을 대할 때 자신이 소중해서 타인의 삶이나 성향을 자신의 틀 안에 넣어서 이해하려 합리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남일에 무심하기 보다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고 관심 가져주고 함께 고민한다. 그 분들은 나를 소수민족인 앙가미족 아이로 생각했음에도 다들 모여서 고민해주었던 기억들이 있다. 내가 무슬림마을에서 사원을 찾지 못해 헤맬때 내가 못 알아듣는 데도 가이드해줬던 일리아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도 그랬고. 번잡한 버스터미널에서 내 엉덩이를 만지고 성희롱했던 아저씨한테 나 혼자 위축되어서 한국어욕을 하고 있는데 다들 어디선가 나타나서 욕해주고 혼내줬던 것도 그랬다. 모든 것에 효율적이고 경쟁적인 사람들에겐 시간낭비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어느 사회든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가 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그분들의 삶 태도는 내 생각과 행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해지고 따뜻해졌고, 어떤 것에 편견과 잣대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태도를 배웠다. 한국에서는 오지랖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할지를 느꼈다. 인도생활은 나에게 더 없이 큰 응원 같았다. ‘너 방식대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달라도 함께 사는 곳’이 살아있는 인도
인도는 다양함 그 자체 였다. 나처럼 생긴 몽골리안부터 우리가 흔히 인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종까지, 지역별로 많은 부족과 문화들이 공존했다. 그들은 여러 신들이 공존하고 다른 신들을 믿으며 살아간다. 힌두교, 무슬림, 기독교, 시크교 등등 종교가 달라도 함께 다른 종교의 축제와 휴일을 즐겁게 보낸다. 우리는 절대 무슬림과 기독교는 함께할 수 없으며 이도교라고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서는 종교를 여러 개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기독교이면서 힌두교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느끼지만, '함께 살아갈 것이고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본 인도는 서로 달라도 융합되고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인도에서의 경험은 나도 모르게 ‘다르다’는 말을 두려워하고, ‘다름’을 머리 속으론 인정하지만 불편해 하고 있었던 나의 모습들이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선 선 긋기와 다름을 죽이려 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인도는 너무나도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삶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가 미타암톨 마을(망고나무아래라는 뜻의 시골마을)을 가서 단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마을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마을과 네팔등 외지에서 시집을 온 아주머니들이 살고 있다. 아주머니들은 항상 모이면 아쌈주의 유명한 비훗Bihut춤을 추고, 한 두시간씩 추고 나서야 마을일을 하던 한다. 비훗을 함께 출때 보면 다양한 소수민족출신의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방식을 선보이면서도 함께 모인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네팔노래를 부르며 박수로 가락을 만들어 한다. 내가 만났던 아주머니들은 서로 너무나도 다른 지역 출신임에도 문화, 언어가 다 달라도 어울리며 지내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발전시키고 그들만의 문화생활을 만들어 갔다. 나에겐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들의 포용력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 덕분에 외지인인 나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살아있다. 바로 이 곳에.
나는 그 곳에서 느꼈다. 내가 살아있고, 그들도 살아있고, 우리 모두가 지금 지구에 살아있다는 걸. 옹졸하고 편협했던 나의 마음과 삶의 태도가 나 자신을 죽이고, 주변을 보지 못하게 해서 외부로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대한다는 것을 느꼈다. 인도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내가 잊고 있던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다시 느끼고 배웠었다. 다양성이 서로 공존할 수 있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봐왔고, 잠시 그 곳에서 함께 살아봤다.
지금 나는 이 곳에 살고 있는 데, 아직도 이 곳은 다르고 다양한 것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고 뉴스에선 종교를 비롯한 다름에 의한 혐오와 이로 인한 폭력들을 다룬다. 점점 사람들도 나도 뭐가 옳고 그른지를 잘 모르고 몽롱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듯하다. 회색빛이 짙게 투사되는 지금의 분위기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생기가 넘칠 수 있을까? 조화를 이루면서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인도 아쌈에서 얻었던 경험처럼 모두가 ‘내가 살아있다’는 자극을 계속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바짝 긴장해서 올라온 어깨부터 풀고 주기적으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 기대한다. 무엇보다 가시로 둘둘 감은 말과 행동이 아닌, 나와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있다’는 의미를 잊지 않길 바란다. 나는 인도에서 함께 살아있음을 느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금 이곳에서도 함께 살아있음을 주변에서 보고 있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 바로 이곳에.



당신은 지금 살아있나요? 아니면 오늘 하루라도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 있나요?

요즘 나는 살아있는 햄토리 같은 삶이다. 햄스터가 우리 안에서 주는 먹이를 잘 먹고 쳇바퀴를 수십번 돌고 피곤해서 자고, 어제와 동일한 패턴으로 또 먹고 돌고 잔다. 분명 나는 살아있기에 지금 움직이고 숨을 쉬고 있는 거지만, 내 정신은 살아있다는 느낌보다는 꾸역꾸역 하루를 지낸다는 느낌이 들까. 내 정신이 맑고 말랑했던 때, ‘내가 살아있구나’라고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서 마구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글을 펴보려고 한다.

물었다. ‘나는 살아있나?...’
피로사회라고 명명되는 한국사회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 나는 학점, 취업, 스펙 모든 것을 향해 사람들과 경쟁하고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고 있었다. 경쟁 속에서 계속 마주하게 된 좌절과 포기, 걱정으로 일상 속에 지쳐가고 있었다. 점점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고 조급해지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그땐, 내 눈 앞에 아무것도 안보이고, 미래가 암담해 보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혼자 살기 바빴던 나는, 누군가를 살펴보고 함께 할 만한 여유 또한 없었다. 이렇게 나는 모든 것에 폐쇄적이고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쉽게 말하자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문뜩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메말라 가던 내가. 나한테 물었다 ‘나는 살아있나……?’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고 함께 움직여보고도 싶었고, 살아있다는 말랑말랑한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모든 걸 내려놓고 인도로 떠났었다.

나에게 던지는 물음 ‘살아있는 인도’
인도. 나에게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된 곳.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한번도 외국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난 오직 인터넷과 책을 통해서만 외국을 봐왔고, 옆집에 살았던 외국인 노동자분들과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교환학생들을 만나면서 외국을 알았다. 그렇기에 인도는 간접경험뿐이었던 나에게 마치 세계지도에서 보이는 인도라는 이름처럼 그저 보이기만 하고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인도 아쌈주 가우하티에서 살면서, 살아 숨쉬는 인도와 사람들은 나에게 생기와 호흡을 나눠주었다. 인도는 ‘나는 살고자 하는 삶 자체요. 살고자 하는 삶의 한 가운데 있다’라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말을 정확히 느낄 수 있었던 곳이었다.

‘사람 그 자체’ 살아있는 인도
인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Where are you from? 너는 어디 출신이니?’ 이었다. 인도라는 나라가 넓어서, 인도 자국민이라도 다양한 인종과 지역출신들이라 출신을 묻는 질문을 일상 속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이 질문을 많이 들었다. 내가 KOREA에서 왔다고 대답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날 KOREA이라는 외국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옆집 사는 사람, 인도에 어느 지방사람처럼 대해주셨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모를 수 있지만, 지구라는 별에 나는 그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대하는 인도인들에게 놀랐다. 내가 만났던 인도인들은 어느 누구보다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사람들 자체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 자체로 받아 들였나'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편협하게 외국인들을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인식과 국적으로만 가지고 대하진 않았는지를 말이다. 인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외국인이 아니었다. 나가랜드, 마니푸르(인도 동북부지역명)사람처럼 생기고 동네에서 덩치가 큰 아이, 한국에 고향 집이 있는 황은미이었다,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인도사람들과 살면서 나는 온전히 나일 수 있었고, 나를 마주보고 있게 되었다. 그 곳에서 나를 보여주고 자연스럽게 그 분들을 받아들이면서, 다다, 바이듀(언니 오빠 호칭)과 말이 안 통해도 함께 즐겁게 비훗춤을 추기도 하고 나눠먹기도 하는 등 시간을 보내고 다양한 이야기 나누었다. 잠시나마 한 곳에서 살아가면서 사람 그 사람자체로 느끼고 마주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배웠다. 누군가를 편견과 배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함을 느꼈다.

3년이 지난 지금. 난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하나의 틀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을 쓰며 두꺼운 가면을 쓰고 나를 포장하고 남들과 비교하기 바쁘다. 다시 그 때처럼 온전히 ‘내 자신’이려 노력하고 사람들의 다름을 이해할 필요성을 느꼈다. 2부에 걸쳐 인도 나가랜드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몽골리안 앙가미족있었던 내 모습들을 다시 떠올리며 인도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다시 느끼고자 한다. 

 

* 인도 아쌈주는 우리가 흔히 카페에서 먹는 아쌈홍차가 나오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인도의 이미지와 다르게, 아쌈와 나가랜드, 마니푸르등 인도 동북부지역은 소수민족이 많고, 힌두교,무슬림,기독교가 각각 2-30%정도를 차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종파가 있기에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한다. 한국 사람처럼 생긴 몽골리안부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도인들도 있다. 주변 국가(네팔, 방글라데시, 중국국경 등)과도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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