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속에 답이 있다. 대학 입학 첫 해 교양 수업에서 들었던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내게 철학은 어렵지 않은 학문이었다. 적어도 정답과 오답의 학문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것. 내게는 그것이 철학의 전부였다. 최초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울 뿐, 일단 한번 시작하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나만의 철학은 완성될 수 있었다. 생각한대로 말하기, 아무 것도 모를 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철학을 머릿속으로만 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뇌내연애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실천하지 않는 철학은 죽은 지식과도 같았다. 철학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일 것이다. 철학의 근본이 다른 생각, 다른 사유에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큰 맥락에서) 동일한 가치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말했다가는 도태되고 소외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철학을 실천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실천하는 철학의 어려움에 대한 나의 사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지난 해, 우연히 수많은 필리핀 이주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혜화역 부근에서 주말마다 필리핀 시장을 열고 있다고 했다. 4년 이상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애써 못 본 척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들은 저마다의 처지와 사연은 다르겠지만 하나같이 유쾌해 보였다. 그냥 지나가기엔 아쉬운 마음에 필리핀 음식을 먹어보기로 했다.

 

간이식당에는 나와 일행을 제외한 이들 전부가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을 먹으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빨리 먹고 자리를 피해야 된다는 생각에 쫓겨 제대로 맛도 보지 못한 채 접시를 비웠다. 식당에 있던 이들은 내게 적대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았고, 나 역시 그들에게 반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와 일행은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몸을 사렸고,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평소 피부색이 다르거나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앞의 사례를 제외하고도 나는 과거 베트남 사람이 건네는 음식에 대해 속으로 경계한 부끄러운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간 철학 실천의 어려움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이 어쩌면 변명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는 걸 증명했다. 철학 실천의 어려움은 세상이나 사회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극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내면에 있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살기란 어렵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어렵지만 그에 앞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 역시 결코 쉽지 않은 법이다. 철학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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