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치하의 스페인(1939~1975)

어쨌든 프랑코의 국민 진영은 우여곡절 끝에 1939년 4월 1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해묵은 갈등을 총칼로 일거에 정리하겠다는 반동적인 시도의 대가는 꽤나 컸다. 이미 내전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프랑코는 승자의 관용을 전혀 베풀지 않았다.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하에 1940년 4월 ‘탄압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범위는 내전 기간 동안 인적, 물적 범죄 행위 뿐 아니라 종교, 전통 문화에 대한 테러 행위까지도 망라하였다. 탄압법으로 처형된 사람만 약 3만 5천명이었고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기아, 질병, 자살 등으로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족히 20만 명이 넘었다.

“내전 승리 후, 병사들을 사열하는 프랑코”

프랑코 정권은 파시즘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보수적 가톨릭 색채가 강했다. 냉전 시대의 서유럽 정세는 이 조그만 독재자가 1975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내전으로 인해 국가 인프라와 산업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공화 정부, 국민 진영 모두 전비 조달을 위해 국가보유 금과 광산 채굴권 등 여러 이권을 소련,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외국에 팔아먹는 바람에 스페인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프랑코 정부는 정치 보복에만 열중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프랑코 치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초중고, 대학, 직장, 여성계 등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오로지 프랑코 권위주의 정권에 동원되기 위한 하나의 소모적 도구로 재편되었고 문화, 언론, 학문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프랑코 정권 동안 교육 정책에 가톨릭교회가 큰 영향을 행사하는 등 스페인은 정교분리라는 시대적 흐름에 도태되었다. 교회 당국의 학계 길들이기로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로 간주된 교사, 교수들은 학교에서 퇴출되었고 저술과 출판 행위마저 철저한 감시를 당하였다. 가까스로 석방된 공화 진영 추종자들과 그 가족들 역시 연좌제와 비슷한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생계를 위한 구직 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하였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는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국가 기관으로부터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경악스러운 발상은 곧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그 결과 1943년에 12,403명의 아이들이 억지로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정부가 지정한 가정으로 강제 입양되거나 고아원, 종교 시설에 위탁되었다.

운 좋게도 내전 승리 이후 국제 정세 또한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랑코는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참전 요청을 적절하게 거절하는 중립 정책을 고수한 대가로 패망한 추축국과 달리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정권 유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5,60년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비민주적인 독재 체제, 인권 탄압 등으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음에도 공산 진영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야 한다는 냉전 논리 덕분에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다. 유럽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비호 아래 정권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고 이는 쿠데타와 독재라는 국민 진영의 과오를 국민들의 기억으로부터 망각시키는 하나의 정치적 선전으로 활용되었다.


“1936년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

윗줄 좌측부터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

아랫줄 좌측부터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결론: 스페인 내전이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스페인 내전은 결코 머나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차치하고서라도 응축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민주적 절차와 합의 문화의 미성숙 때문에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한 광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으로 귀결된 해방 정국, 군사 독재로 굴곡진 우리 현대 정치사와 유사하다. 그리고 내전의 상처는 스페인과 한국 민중들 모두에게 끝나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또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하는 과정 역시 스페인과 한국은 여러모로 많이 닮은 것으로 보인다.

1. 민주주의의 숙명적 한계: 우리는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필자는 공화 정부의 패전 원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이라고 이미 밝혔다. 물론 국민 진영도 여러 이념과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독재 정치 체제를 지향했고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수직적이고 일사불란한 조직 운영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반면, 공화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법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힌 이질적인 집단들이 토론과 합의의 방식으로 행동을 결정했다. 그 결과 국민 진영보다 초기 대응이 느렸고 상부의 결정은 내각이 교체될 때 마다 자주 혼선을 초래했다.

특히 공화 정부 안에서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체계를 선호한 공산당원들과 모든 종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했다. 결과적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맞서는 상황에서 그 태생적인 결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전시 상황에서는 빠른 결단과 통일된 조직 강령이 승리를 위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상, 갈등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 제도적 절차로 이를 관리하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학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연 어디까지 권위를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다른 예를 살펴보자. 공화 정부를 돕기 위해 결성된 국제 여단에는 공산주의자 외에도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이들로 따로 조직된 대대는 철저한 탈권위주의를 지향하였다. 상호간에는 계급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날 벌어질 전투 방식과 자신들의 지휘관을 결정하는 문제도 토론과 투표로 결정하였다. 어쨌든 전문성 측면에서 고도로 훈련된 국민군은 분명 오합지졸에 불과한 국제여단보다 더 우수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내전은 국민 진영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부대의 탈권위주의적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강제적인 입대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상의 수호를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 새로운 유형의 군대는 분명 국민군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여 사기가 드높았고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각기 다른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집될 때, 전체주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권위의 공백이 야기하는 기술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항상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는 한반도의 안보 상황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역시 수호해야 하는 우리에게 '공익적 가치를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권위'와 '민주주의 철칙'간의 조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사면법: 과거사는 정녕 정리되었는가? 정치적 흥정과 강요된 화해

앞서 말했듯이, 프랑코 사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6년에 ‘사면법’(Ley del indulto)을 제정하여 과거 국민 진영의 반란과 여러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내전 당시의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고 이념의 잣대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사법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며 관련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프랑코 치하 수십 년 간 핍박받아온 반대세력의 구 국민 진영 인사들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면 사회 통합이 저해되고 향후 국가 발전 역시 지체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면법을 제정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1938~ )”

더 이상의 보복과 갈등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의 사회통합에 힘썼지만, 일각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회피하고 국민 진영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당한 과거사 청산을 마치 과거에 집착하여 분란을 초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논리로 무조건 피해자에게 용서와 이해를 종용하는 방식은 위험하다. 프랑코 국민 진영이 저지른 국가 내란죄와 수많은 인명 살상에 대해 법적, 도의적 책임을 규명하기는커녕, 사회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그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식의 청산 회피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국민적 합의가 실종된 이러한 정치적 흥정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매우 잘못된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 남겨 제2, 제3의 프랑코 식 정치 범죄 행위를 부추길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1976년 사면법 제정 이후, 스페인에서는 81년에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가 시도되기도 했다.)

우리 현대사의 예를 들어보자. 이미 명백한 국가 내란죄로 판명된 1979년 12.12 사태의 주동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처단했는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및 장세동, 허삼수, 허화평 등 하나회 일당을 국가 내란죄로 기소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정치 보복 논리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헌법을 부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초법적 권한으로 학살, 연행, 구금했으며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찬탈하려 한 죄인들을 처벌하는 행위를 겨우 쩨쩨한 정치 보복이나 권력층 내부의 다툼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정은 막대한 추징금과 함께 피고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신군부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97년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통합을 명분으로 그들을 사면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여생을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로 보내도 모자랄 그들은 지금도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대체 언제 그들이 사죄했고, 또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

화해와 용서로 사회통합을 꾀한다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범죄에 대한 처벌을 거부한다면 과연 우리는 후세에 어떤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어쨌든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국왕이 사면법을 통해 프랑코와 국민 진영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에 대해 사면 조치를 단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신군부 인사들을 법적으로 사면했다. 그리고 사면 취지는 두 경우 다 ‘용서와 화해를 통한 사회통합’이었다. 과거사를 판단하는 데 정치적 보복을 목적으로 혐의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 없이 무조건 단죄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정치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 엄한 처벌과 분명한 책임을 지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민적,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과거사에 대해 단죄를 내리는 사법 행위를 고작 사람들을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고 서로 편을 나눠 비효율적인 사회 갈등이나 유발한다는 식의 퇴행으로 인식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철저한 진상 규명과 확실한 처벌을 통해 우리 사회가 후세에 ‘과거의 범죄는 언젠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과거사 청산으로 논쟁 중인 우리 사회는 스페인 내전과 사면법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한때 카피라이터가 추앙받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작가도 아니면서 문장 하나로 돈을 버는 직업, 입에 짝짝 붙는 좋은 카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가는 그런 사람이라는 인식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으로 광고홍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 오길비나 박웅현과 같은 크리에이티브한 광고인이 되겠다는 부푼 꿈으로 다가갔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카피 수업 첫 시간, 교수님이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시 쓰지 마라”


화려한 수식도, 강렬함도 어필할 수 있지만, 그것이 좋은 말일지언정 카피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건 감상문이나 시(詩)에 가깝겠죠. 씁쓸하게도 카피의 본질, 존재의 이유는 팔리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상술의 일환인 것입니다. 팔리기 위해 태어났고, 제품을 팔리기 위해 고객의 귓가에다 ‘나를 사셔야 해요’라고 처절하게 외쳐대는 것이 카피라는 것입니다. 막상 이렇게 쓰니 참 씁쓸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팔리지 않는 카피는 광고주도 소비자도 외면하고 말 테니까요.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타고난 팔자겠죠.


아파트 광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브랜드 광고가 많았습니다. 저마다 브랜드를 고급화하기에 바쁩니다. 소비자의 욕구를 계속 건드는 것이죠. 소비자의 머리에 어느 아파트가 고급화로 인지시키기 위한 각축전이 치열했습니다. 더욱 세련된 모델, 호화로운 아파트의 모습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좀 다른 광고가 등장합니다. 



진심이 짓는다 (e편한세상, 2009)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보자’라는 식의 전개가 마음에 듭니다. 소비자에게 현실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더해집니다. ‘아파트가 유럽의 성도 아니고, 매일 모델같이 우아하게 살 수는 없잖아’라는 주장이 그럴듯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찾은 답은 진심이다”라는 카피로 쐐기를 박습니다.
대단합니다. 모두가 하는 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판을 내세울 수 있는 결단력.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 고급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들은 많은데도, 광고는 이 표현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광고는 아파트에 살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속내를 잘 잡아내고 이를 광고로 승화시켰습니다. 문학적 수사나 화려한 표현 없이도 광고는 ‘진심’이라는 단어 하나로 의미와 컨셉, 포지션 모두를 잡아낸 것입니다.


카피를 상술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카피가 비단 광고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카피를 어떻게 팔아야 할지에 대한 전략을 말씀드린 것이죠. 문장 하나로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반응을 만들 수 있게 만든다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카피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는 편지의 문장, 억지로 써야 하는 반성문, 어느 학교의 논술 답안지 속에도 카피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스치는 일상에서도 숨겨진 카피는 정말 많을 것입니다.



서촌 어느 식당 주인의 카피. 단 세 줄로 식당을 어필했습니다.

이렇게 카피에 대해서 주절주절 썼지만, 저는 아직 카피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습 때 몇 개 써보지만, 본의 아니게 ‘문학적 감성’만 도드라져 보이게 됩니다. 너무 드러내서도 안 되고, 너무 꾸며도 안 되는 것이 카피입니다. 도저히 범인(凡人)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교수님이 말씀하신 이 가르침을 떠올려 봅니다. 


‘카피는 그냥 바늘이 아니라, 낚싯바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을 뚫고 끝의 갈고리로 소비자의 지갑을 낚아야 한다.’


작가 반, 장사꾼 반...결국은 글로 장사하는 사람.

카피라이터는 그런 사람입니다.



*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신기루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개념 하나 소개하는 듯이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 중 신기루에 대해 모르거나, 신기루라는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오아시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여행자의 절규는 어릴 적 우리에게 철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으니까요.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신기루는 가짜라기 보단 왜곡에 가깝습니다. 신기루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뿅! 하고 무엇이 생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신기루에 대한 정의는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왕가위, <화양연화>(2000)

 

그러므로 신기루란 목이 너무 말라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는 여행자의 ‘망상’이 아니라, 어딘가에 무엇인가 있지만 불안정한 대기층에 의해 왜곡된 빛을 감각하는 여행자의 ‘착시’입니다. 망상과 착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전자가 철저히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완벽히 맥락에 의한 것이죠. 후자에 따르면 그 누구라도 (불안정한 대기층이라는) 특정 맥락 속에서라면 신기루를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기루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왜곡과 맥락입니다. 그리고 왜곡은 또한 일종의 탈맥락적 현상이므로 신기루는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기루는 탈맥락적이면서도 맥락적인 현상이다.’ 좀 풀어서 말해볼까요. 신기루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있다는 점에서 맥락(혹은 합리성)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신기루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라는 점에서 맥락(합리)적이죠. 이런 역설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기루 자체가 역설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1995)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곧 신기루입니다. 여러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이 어려운 말들을 써가면서 사랑을 논해왔지만, 결국 대부분 ‘사랑은 신기루’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대상을 탈맥락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했던 슬라보예 지젝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건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독백은 사랑의 탈맥락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신기루로서의 사랑을 반쯤 포착한 셈. 그렇다면 탈맥락적인 사랑의 성취 이후 지속적인 선언(“난 널 사랑해”)의 노력을 강조했던 알랭 바디우 같은 경우는, 앞선 반쪽짜리 정의에 ‘맥락적’인 성격을 더함으로써 사랑의 성격을 온전히 정의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랑을 억지로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불쑥 찾아오는 사랑을 거부하지도 말길 바랍니다. 사랑은 신에 대한 거부를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맹신하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미시적 차원의, 그러니까 ‘화학적 작용’이라는 말 따위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낭만과 사랑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사랑=아름다움’이라는 억지공식을 설파해온 로맨티시즘도 비겁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얀 사무엘, <러브 미 이프 유 데어>(2003)

 

제가 권하는 사랑이란 차라리 화폐에 대한 마르크스의 냉철한 시선과 닮아 있습니다. 흔히 마르크스는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관념, 혹은 정신의 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비판으)로부터 나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관념 혹은 정신 등의 상부구조가 (교과서에서 가볍게 언급되듯) 하부구조에 종속될 뿐이라고 믿었다면, 마르크스는 굳이 어려운 책을 쓰지 않고 그저 한 마디 했을지도 모릅니다. “화폐를 찢고, 태우자!” 하지만 화폐는 그저 종이쪼가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휴지쪼가리와 같지 않다는 걸 마르크스는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결코 화폐를 버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죠.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화폐를 신기루로서 보았던 셈입니다. 화폐는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인 것이죠.

 

압달라티프 케시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입니다. 사랑은 불쑥, 맥락을 잃은 채 찾아오지만, 그건 사랑의 감정을 느낀 사람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단언하지 마십시오. 어른인 척하는 아이, 아이인 척하는 어른 모두 건강하지 않습니다.

 

혹시 눈앞에서 오아시스가 어른거리는 여행자가 제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아마 오아시스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아시스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발은 떼야하지 않을까요?”



 

24살의 청년이 2015년 11월 18일 현재 35일째 단식 중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총장 보광 스님, 이사장 일면 스님 퇴진'입니다. 두 스님은 퇴진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청년은 단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청년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단식 중인 동국대학교 부총학생회장 김건중 학생은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온 몸에 반점이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평소에 가는 한의원 선생님께 당시 33일째 단식 중인 학생의 상태가 어떤지 여쭤봤습니다. 선생님께서 당장 가서 말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2일 뒤에 찾아갈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하니 “그 학생 2일 뒤에 없을지도 몰라요. 늦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동국대학교로 바로 달려갔습니다. 단식 중인 천막이라 대표자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밖에 있으라는 소리에 초초하게 기다렸습니다. 학생은 잠이 들었는데 얼굴은 시퍼렇게 변했으며 반점이 올라와서 딱 보아도 정말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는 상태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학생이 다 죽어가고 있는데 생명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스님들은 뭘 하고 계신 걸까요. 학생의 상태가 이렇게나 심각한데 논문 표절 문제의 중심 보광스님과 흥국사 탱화 절도 의혹을 받고 있는 일면스님은 계속해서 김건중 학생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 불교닷컴

지난 9월 17일, 동국대학교에서는 전체 학생 총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학생 1만3000명 가운데 정족수 7분의 1에 해당하는 1788명을 훌쩍 넘는 2031명이 만해 광장에 모여 이사장 일면 스님과 총장 보광 스님의 사퇴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반대 한 표를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다하니 학생들의 생각이 어떠한지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는 “학생총회 그거 그냥 행사 아니었느냐”며 무시했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법보신문(위). 동국교지 페이스북(아래)

(학생들에게 빵을 나눠 준 날  당신은 이사장이 아니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일면스님은 “이사회에서 뽑았으니 이사장이다. 학생이 뭔데 이사장이냐 아니냐를 말하느냐”고 답했다한다.)

 

일면스님은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동국대 학생들을 위해 지난 6월 16일 오후 동국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에게 빵과 커피를 나눠주는 행사도 치뤘다합니다.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빵은 나눠줄 수 있지만 학생들의 생각을 대변하기 위해 35일째 단식하고 있는 아이에겐 왜 찾아가지 않는 걸까요. 그 아이가 일어나서 건간을 회복해 빵을 먹을 수 있게 왜 못하는 걸까요.

 

 

사진출처 : 불교닷컴

필자는 문화재를 제자리에 돌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흥국사 탱화와 관련하여 도난 문화재가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도록 시민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탱화 제자리찾기 운동을 하는 도중에 김건중 학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학생이 단식한지 3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11월 14일 은석초등학교에서 열린 동국대학교 이사회 관련 기사를 보다가 알게된 것입니다. 그 날 단식 중인 김건중 부회장이 일면 스님이 이사에 재선임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 탈진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사진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문화재 환수운동을 하면서 최대한의 사명감을 갖고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김건중 학생처럼 목숨을 걸고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흥국사 탱화 제자리찾기를 위해서 30일 이상 단식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할수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생이 쇼크를 받아 병원으로 가는 사진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에 충격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가 저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고 외면할 수 있을까요.

 

지난 9월 8일에 조계종은 중앙종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일면 스님에 대한 이사 후보 추천안은 찬성 31표, 반대 40표로 부결됐던 사안입니다. 그 후 동국대 이사 후보를 추천할 종립학교관리위원회가 계속해서 개최됐지만 성원미달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11월 14일 이사회를 열어 현 이사인 일면스님이 자신을 다시 이사에 재선임하는 이사회를 진행한 것입니다.

 

 

조계종 중앙종회까지 무시하면서,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면스님은 계속해서 이사장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까?

 

 

일면스님은 일주일 뒤인 25일 100인 대중공사(大衆公事 : 사찰에서, 사찰 운영이나 승려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문책, 공지 사항 등이 있을 때, 사찰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일.)에서 탱화 절도와 관련된 의혹을 해명하겠다고 합니다.

 

일주일 뒤에 해명하면 끝일까요? 일주일 뒤면 김건중 학생 단식 42일째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일면스님이란 분이 어떤 분이기에, 얼마나 대단하신 분이기에 35일이나 단식하는 아이를 외면하고 이사장 자리를 지키려고 할까 궁금해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봤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면스님 출생 1947년 9월 25일. 속세 나이로 만 68세입니다.
스님의 노욕(老慾)에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같은 시간을 나눴던 이들과의 모임에는 남다른 기억력을 뽐내는 사람이 꼭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7년 만에 만난 재수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유달리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왜 걔 있잖냐. 맨날 잠자고, 자습 빼먹고 피시방 가던 놈. 하, 누구더라...” 다들 조용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뒤늦게 합류한 A가 치고 들어온다. “아, X 말하는 건가? 자습이 뭐냐. 수업도 빼먹고 피시방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걔네 무리가 있었어. Z, W, U랑... 맞다, S. 이렇게 넷이서 같이 다녔잖아. 아, 그리고 니네 그거 아냐? Y랑 X랑 잠깐 사귀었던 거.”

 

이윤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2011) 중에서

 

하나 더 있다. 연례행사처럼 모이는 중학교 동창(회라기엔 초라하지만 어쨌든)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누구 할 것 없이 B에게 말한다. “야, 오랜만에 출석번호 좀 외워봐라.” 싫은 듯, 귀찮은 듯, 하지만 B는 거침이 없다. “1번 C, 2번 G, 3번 F, 4번 Q....” 어느 날은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B가 역으로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야, 니네 키 번호는 기억하냐. 개학하고 첫 날에 키 번호로 앉았잖아. 1번 F, 2번 C, 3번이 나였고.. 그때만 해도 진짜 작았지, 4번 R....”

 

홍상수, <생활의 발견>(2002) 중에서

 

이런 놈들의 기억력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닮고 싶은 기억력은 따로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어떤 날을 회상할 때 다른 건 다 모호하더라도 날씨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 말에는 유달리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에게 “그렇게 살지 마”라는 전화를 받은 새벽에는 유달리 비가 많이 왔었고, 영화 동지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던 그 해는 10년 만에 가장 더웠다.

 

날씨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 번호를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중요한 건 여기서 날씨란 기상청이나 일기예보에서 무미건조하게 예측하고, 보도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과 맞물린 날씨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날씨는 그때 ‘하필’ 그런 상태였겠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인과의 틀 속에 꾸겨놓곤 하는 우리에게 날씨가 결코 우연으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날씨로 어떤 시간, 공간,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날, 거기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분위기와 느낌을 전체적으로 떠올린다는 말과 같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왕가위, <중경삼림>(1994) 중에서

10월의 마지막 날, 11월부터는 하루하루 날씨를 유심히 기억해 두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니,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엊그제부터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친구들과 나눠 마신 막걸리 한 잔에 추위도, 근심걱정도 털릴 정도. 버틸 만하다.”




 다급해진 공화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영국은 극도의 중립적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였다. 오히려 독일과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로 국민군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스페인 본토의 영국령 지브롤터 주둔 영국 해군은 이를 방관하였다. 프랑스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지원에 주저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의한 ‘불간섭 위원회’가 영국의 주도하에 설치된 이후로는 국제 협약 상의 이유로 내전 개입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불간섭 위원회의 참여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 국민군을 도와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협약 위반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련과 멕시코 만이 스페인 공화 정부의 유이한 후원자였고 특히 소련은 전투기, 폭격기, 전차, 군사 고문단, 공산당원을 비롯한 광범위한 물적, 인적 지원을 하였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국가들과 공산주의 소련이 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왜 그들은 공화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파시즘의 확대를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 정부를 지원해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스페인 내전’의 저자 앤터니 비버는 저서에서 확전에 대한 부담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를 자극하려하지 않기 위해 노골적인 유화 정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스탈린도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초반에는 공화 정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유화 정책은 파시즘 국가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음으로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이는 곧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이 파시즘 확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1917년 공산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련 볼셰비즘의 확대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유 진영 국가들이 민주 공화정을 지향했던 스페인 공화 정부를 소련과 비슷한 공산주의 계열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이 본격화되고 마드리드가 사실상 소수의 소련 고문단과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목격한 이후, 공화 정부 색깔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스페인 공화 정부가 좌파적 성격은 어느 정도 띠고 있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자유선거를 보장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보통 국가’였다.(실제로 공화정 초기에는 알칼라 사모라-카세레스 키로가의 온건보수 내각이 집권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 눈에는 공화 정부는 ‘또 다른 모스크바’와 다를 바 없었고 계급 혁명을 위해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불안정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오히려 서구 진영의 보수 정치가, 자본가 계층은 친기업적이고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건 프랑코 국민 진영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는 미국 하원에서 공화 정부에 대한 무기 수출 안이 부결되고, 서방 은행들이 점점 공화 정부에 대한 신용 대부를 거부한 반면, 프랑코 정부에 차관을 지원해주는 식의 형태로 노골적인 국민진영 지지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국경으로 유입되는 무기를 막기 위한 감시 활동을 벌였는데 대부분 소련의 무기가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거쳐 들어가는 것만 적발하였고 지중해에서 국민군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해상 지원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스페인의 공산화를 두려워 한 자유 진영 국가 엘리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불간섭 위원회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의 위험한 도발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공화 정부 패망에 일조하였다.      

국제 여단의 참전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와 이성을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참전했다.

(출처: http://www.malgusto.com/pequenas-pildoras-historicas-30marzo2015/)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 국가들이 정치적 이유로 공화 정부에 대한 정규군 파병에 미온적이던 동안, 코민테른(전 세계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의 주도로 의용군을 모집, 국제 여단이 결성되었다. 물론 인적, 물적 측면에서 소련의 개입과 지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북유럽, 중남미, 중국 등 다양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자발적으로 참전한 사례였다. 총 53개국 약 3만 5천여 명의 병력 규모였고 이들은 간단한 제식과 사격 훈련을 거친 후, 즉시 마드리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물자 지원은 넉넉하지 못했다. 무기는 낡았으며 각국에서 물자 보급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16종류의 서로 다른 구경과 탄약을 쓰는 총기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베테랑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병사들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작전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여단의 병사들은 반강제로 입대한 국민군과 달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고,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공화 정부가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성의 수호를 위해 날아온 자유세계의 사람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했지만 당시,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공화 정부를 지지하였다. 국민 진영과 그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적 성향이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이 펜을 잠시 던져놓고 자신의 서재를 뛰쳐나와 공화 정부를 지원하러 기꺼이 총을 들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어서 귀국 한 이후에는 자신이 보았던 전쟁의 참상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을 ‘카탈루냐 찬가’로 저술하였다.


“1936~1938년 바르셀로나의 시가전”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공화 정부를 위해 복무했고 국민 진영에 대한 반감 뿐 아니라, 공화 진영 내부의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출처: http://www.fornewssites.org/posts/imagenes/17325420/Fotos-antiguas-con-gran-historia.html)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말로와 생텍쥐베리 역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공화 정부를 도왔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파시즘의 만행을 알렸고 후에 내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남겼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물론 참전 후 조지 오웰처럼 공화 정부 내 좌익 정당들 간의 파벌 싸움으로 환멸을 느낀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지성을 수호하고자 한 대의명분은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공화 정부는 왜 패망하였는가?

여튼 공화 정부는 1939년 4월 1일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패전의 원인으로는 공화 정부의 내부 분열을 들 수 있다. 온건한 성향의 아사냐 대통령과 키로가 총리가 이끌었던 초기 공화 정부는 내전 발발 당시 자신들의 확실한 우군이었던 노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키로가 내각은 36년 이미 국민 진영의 반란이 가시화되고 각 지역을 방어하는 공화군과 치안 병력들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경찰들이 속출했다.) 제일 믿을 만 했던 세력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중앙 정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국민 진영 반란군은 식민지 모로코, 카나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서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 북부의 부르고스 지방을 휩쓸었다. 노동자들과 민간인들을 무장시켜 반란군에 저항하는 것은 이제 해당 지방 행정 수장들의 결단에 달려있었다. 하엔 시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주지사가 반란 가담 우려가 있는 경찰 병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대신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국민군의 반란을 사전에 제압한데 반해, 오비에도 시와 같은 경우처럼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한 우유부단한 주지사 때문에 반란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어 공화 정부의 관리들과 노동자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태생적으로 민중을 신뢰하지 못했던 공화 정부 정치 엘리트들의 오판이 결국 프랑코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공화군 포로들”

국민군과 공화군 모두 포로들을 무작정 '데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1936년 11월, 시에라 데 과다라마

(출처: http://www.voxeurop.eu/en/content/article/781661-civil-war-still-open-wound)

1. 공산당의 횡포: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자는 다 프랑코의 첩자들이다!

공화 정부 집권 내각인 인민 전선은 다양한 이념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 좌파 공화주의, 중도 자유주의, 아나키즘(절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을 표방하는 연립 정당들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국민 진영이 개전 초기에 이미 프랑코를 총통(generalissimo)으로 추대하고 내부 결속을 다진데 반해, 공화 정부는 내전 기간 동안에만 네 번의 내각 교체가 단행되었다. 통일되지 않은 지도 체제는 전시 상황을 관리하는데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소련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스페인 공산당은 공화 정부 내각에서 주도권을 쥐려했고 사회주의 세력과 아나키즘 세력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이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당의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운영 방식은 절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의 거센 불만을 야기했다. 

심지어 물자 보급을 담당하던 공산당 소속 장교들은 전방에서 국민군과 싸우고 있는 몇몇 부대에 무기 지원과 의약품 보급을 거부하였는데 해당 소속 부대장이 공산당원이 아니거나 아나키스트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온건 자유주의자였던 후안 네그린이 공화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자 그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산당의 횡포를 방관했다. 공산당원이 주동이 된 군 수사국은 묻지마 식으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거나 공산주의에 비판하는 좌파 진영 인사들까지 잡아 감금, 고문, 처형하였다. 스페인 공산당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으로 일관된 숙청은 프랑코 국민 진영이 했던 짓거리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이에 대해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2. 와해되는 국제여단

인민전선 내각 안에서 불필요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동안 사상 검증에 따른 보급품 수송이 자주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전방에 배치된 공화군 병사들은 점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자유를 수호하려 이역만리 타국으로 온 국제 여단 소속 병사들은 점차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간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편지로 본국에 있는 가족, 자국 언론에 공화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선이탈, 탈영, 태업 등의 방식으로 국제 여단 병사들이 저항하자, 스페인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은 거칠게 대응했다. 편지를 검열하거나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국제 여단 병사들을 집단 수용소, 정신 병원에 감금하였고, 심지어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급기야 1937년 9월에 공화 정부가 국제 여단 병사들의 지위를 스페인 공화군 소속으로 규정짓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외국인이었던 국제 여단 병사들이 스페인 군법의 적용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들의 제대나 본국 귀환은 이제 기약이 없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자 했던 그들의 용맹함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3.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대립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보수 국민 진영과 진보 공화 정부 간의 이념 전쟁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 왕정복고(카를로스 왕당파), 보수적 공화주의(몰라 이하 여러 장군들), 급진 파시즘(팔랑헤당) 등 국민 진영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내부에도 여러 대립 구도가 존재했다. 


“필사의 탈출”, 1939년

공화 정부의 패망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자 많은 스페인인들이 목숨을 걸고 스페인-프랑스 국경을 넘어가 수준 이하의 난민 생활을 감수했다. 

(출처: http://es.fanscup.com/real-betis-balompie/forumpost/39595)

특히 공화 진영의 내부 결속을 저해했던 원인 중의 하나가 중앙-지방간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었다.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역은 전통적으로 마드리드 주도의 중앙 집권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고 이는 바스크 인들이 대다수였던 바스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 불신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인들과 바스크 인들이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를 지지한 까닭은 그나마 공화 정부가 프랑코보다 덜 중앙집권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은 프랑코라는 점 외에 여러 면에서 이질적이고 융화될 수 없었던 중앙-지방간의 느슨한 연합은 시간이 지날수록 와해되기 시작했다. 내전이 발발하자 지방 정부의 자치는 보류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선호하는 공산당이 공화 정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다른 좌파 정당을 탄압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대다수였던 카탈루냐 지역은 이에 반발, 1937년 5월, 스페인 공산당을 상대로 ‘내전 속의 내전’을 벌였다. 여기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득세하자, 공화 정부 내의 여러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제는 심화되었다. 1937년 초에 남부 도시 말라가가 결국 국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공화 정부의 총리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독립 의식을 싫어하여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단결하는 내부 통일에 집착할수록, 지방 민심을 점점 상실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화 정부 패망 임박”

1938년 5월, 국민 진영(회색)의 공세는 공화 정부(붉은색)를 두 동강 내버렸고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다. 패전이 확실시되었음에도 이듬해까지 전쟁이 계속된 이유는 공화 정부가 프랑코를 상대로 항복 협상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4. 선전 효과 집착에 따른 전술 실패

공화 정부의 관료들과 공산당원들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선전 효과에 집착했다. 1937년 초부터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독선은 더 심해졌는데 전략적으로 별 의미 없는 소도시 몇 개를 대병력을 이용해 점령한 후, 자신들의 성과를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자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제공권에서 절대 우위였던 국민군은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공화군에 뺏긴 지역을 금세 수복하곤 했다. 오히려 국민 진영의 뒤이은 반격으로 공화군은 더 큰 손실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불필요한 병력 소진은 1938년 7월 에브로 강 대공세 작전의 실패로 전체 병력 대부분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이 공군을 이용하여 아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 식의 무리한 전진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지만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마드리드의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내부에 프랑코의 첩자가 있어서 패배했다는 논리를 펴며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다음편 예고)두 개의 스페인(下): 아물지 않은 상처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또 시작이군!’

 


사진출처 : 뉴시스

 

국정교과서 대표 집필진으로 초빙된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기자들과 자택에서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일보 여기자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했다한다. 최교수는 논란이 확산되자 국정교과서 집필진에서 자진 사퇴했다. 사퇴 소식에 몰려든 취재진에게 최교수는 "나는 별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했다한다.

 

지난 해 9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여성 캐디를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다.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 번 툭 찔렀다’는데. 피해 여성은 1991년생, 당시 나이 24살이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대사! ‘딸 같아서, 손녀 같아서’라는 말로 무마하려했다. 법원은 박 전 국회의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과 성폭력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수강명령을 내렸는데 박 전 국회의장이 항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건은 또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여성인턴을 성추행한 사건이다. 그는 대통령의 의회 연설을 앞 둔 상황에서 여성인턴을 성추행했고 이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당시엔 "허리 툭 치며 격려한 것일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했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팀의 조사를 받을 때는 피해 여성의 엉덩이를 만졌다, 여성 인턴이 호텔 방으로 올라왔을 당시에 속옷을 입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변명거리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사회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 여자애가 무슨 재주로?’

여러 가지 사건을 지켜보며 나는 재작년 여름을 떠올렸다. 문화재환수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LA카운티박물관이 소장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운동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문화재환수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당당히 문화재를 반환받지 못한다면 문화재환수운동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작년 7월부터 9월 사이는 LA카운티박물관에 문정왕후어보를 돌려 달라 직접 반환요구를 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문정왕후어보가 미군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는 사실을 3년간 조사 연구하여 입증했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협상에 나선 것이다.

회사에서는 협상력을 높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환수운동을 고민했고 논의 끝에 백악관 청원사이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백악관 청원사이트 ‘We the People'은 게시한 청원에 대해 10만 명이 한 달 안에 서명하면 백악관이 입장을 표명하는 제도이다. 우리는 불법도난당한 문정왕후어보가 LA카운티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니 반환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10만 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한 100인 위원회’를 발족했다. 
모두 다 문정왕후어보가 고국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환수운동을 벌였지만 한 편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추측할 수 있는 환수위원회 불만의 이유는 정부가 무관심해서이거나 미국 측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도 일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불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당시 나이 27살이었던 필자가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한 100인 위원회 사무처장’이라는 것이었다.

 

‘20대 여성이 가진 편견과 싸우다’

불만을 가진 ‘못된 아저씨’들의 괴롭힘은 정말 치사할 정도로 쪼잔 했다. 발대식 행사의 사회를 맡은 필자가 못마땅했는지 마이크라도 내려놓으면 쏜살같이 달려와 모든 사람이 듣도록 소리쳤다. ‘이건 준비했냐? 저건 준비했냐?’
행사 도중에 연설자가 연설을 하든 말든 20대 사무처장보다 내가 더 위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별의 별 행동을 다했다. 행사가 끝나고 마련된 식사자리에서도 괴롭힘은 이어졌다. 식탁 맨 끝에 앉아야 한다고 화를 내지 않나. 사무처장이 동행해야하는 자리임에도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어른들이 식사하는 자리이니 방 밖에 나가서 밥을 먹으라고 한 적도 있다. 한밤중에 전화해 자신이 2만 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으니 완벽한 보고서를 올리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거나 능력도 없는데 큰 직함을 준 회사에 감사하며 다니라며 필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한 참 바쁜 시간에 와서 밖에 나가서 커피를 사오라고 시킨 후 커피를 가져오면 내가 사주는 거니까 감사하며 마시라는 것까지. 괴롭힘 당한 것을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다. 단순히 ‘20대 여성’이 사무처장이 됐다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의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예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정왕후어보는 반환결정이 났고 반환결정 축하를 위해 가진 저녁 식사자리에서 모두 한 마디씩 하는 기회가 생겼다. 필자에게 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많은 기회를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문정왕후어보 반환 발표는 정전60주년을 맞아 불법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돌아오게 됐다는 의미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20대 여성은 능력이 없다는 편견과 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대 여성은 커피를 타고 복사만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참으로 기쁩니다.’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

대한민국에서 20대 여성은 가장 약한 고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쉽게 공격에 노출된다. 그 공격이 성추행이든 그 외의 것이든 그것을 방어해줄 사회적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만 알면 아는 기업의 회장과 업무 관계로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 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필자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필자뿐만이 아니었다. 동행한 20대 여성 통역원에게도 시종일관 ‘아가씨’라고 불렀다. 직급이 조금이라도 높은 남자가 20대 여성을 부를 때 그 많고 많은 단어 중에 하필 ‘아가씨’를 고르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오늘 저 사람의 노동을 착취할 수 있는 임금을 제공했으니 부르는 것도 내 마음이다.’라는 자본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사고를 가졌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최몽룡 교수가 성희롱한 여기자의 나이는 필자가 확인하지 못해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윤창중 전 대변인이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연결고리인 20대 여성에 대해 내키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비영리단체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다.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으면 초등학생도 연설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렇기에 정말로 사무처를 이끌어가는 필자에게 ‘사무처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했던 곳이다.
그러나 필자가 근무하는 곳이 당연한 권리를 부여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곳으로 손 뽑힐 뿐 우리사회는 20대 여성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 특히나 20대 여성은 사회에 뿌리박힌 악질적 편견과 싸워야 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이러한 고통을 정책과 시스템들이 바로잡아줄 수는 없을까? 나는 그것을 청년 정치인에게 기대해본다. 자신이 직접 경험했고 주변의 친구들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을 청년들은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과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청년 정치인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20대 여성이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더 이상 피해를 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청년 정치인이 열어가길 희망한다. 2016년 4월 13일은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 이 칼럼을 쓰기 전, 혹시 필자가 갖고 있는 편견은 없을까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필자는 20대 여성이 사회에서 가장 힘들게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료를 읽다 보니 20대 여성 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편견과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진은 그의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에게 교육이 허락된 것은 5천 년 인류 역사에서, 채 1백 년이 되지 않는다.(p.86)”고 했다. 그만큼 기존의 세계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고 로댕의 조각은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고 앵그르의 그림은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라고 표현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p.81)”고도 책에서 말했다.

 

20대 여성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여성들은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존재가 되어 사회적 편견과 싸우고 있다. 문제는 필자가 아직 20대이기에 필자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칼럼을 썼다. 전체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글에 담을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역사적으로 세상을 뒤흔든 전쟁, 혁명은 절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50여년 넘게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혁명적 사건의 시발점은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내재된 원인들이 누적된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조그만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폭발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은 즉흥적이거나 우연이 아닌 이유로 발생한다.

1936년 7월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은 공화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이하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이하 몰라) 등 보수적 성향의 장군들이 팔랑헤 당(파시즘 정당, 후에 통합 팔랑헤당으로 개편, 프랑코 내각의 집권여당이 된다.), 왕당파와 함께 스페인령 모로코와 북부 스페인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보수 우익 반란군 진영인 국민 진영'과 '인민전선 내각이 이끄는 공화 정부'가 이념의 차이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약 35만 명이 사망, 50만 명의 국외 망명자가 발생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장한 공화 정부 여성 지지자들, 1936년, 마드리드.”
후방 지원과 시가지 전투 참여까지 실제로 여성들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출처: http://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war-and-conflict-spanish-civil-war-pic-23rd-july-1936-an-news-photo/80752137)

작용과 반작용: 지배 세력의 억압에 대한 민중의 대응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사상의 자유와 과학이 전 유럽을 아우르던 20세기 초반까지도 미신에 근거한 가톨릭 권위주의와 절대왕정에 푹 절여있던 스페인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 스페인에는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종교 재판소가 아직 존재하였고 학문의 자유와 교육, 문예는 가톨릭교회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세기 제국의 위용을 갖추던 모습은 쇠퇴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군인들의 총칼로 민중을 지배하였다.

스페인 왕국 안의 이민족이었던 북쪽의 바스크 인들과 동남쪽의 카탈루냐 인들은 여전히 마드리드 중앙 정부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갈등은 카스티야 지방(마드리드)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내전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 왕, 군인, 교회, 자본가와 대지주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고 장군들의 빈번한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일반적인 의미의 쿠데타와는 다른 스페인, 남미에서의 군사 항명. 국왕으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는다.)는 스페인 사회를 도덕적 해이와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고 가곤 했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지배를 감내해야했던 도시 중산층, 노동자, 소작농 계급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신론,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급진적인 외래 사상에 쉽게 포섭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듯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이미 50여 년 전부터 스페인 사회는 군주제, 가톨릭, 군벌, 자본가,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다양한 계급과 이데올로기로 사분오열되었고 온건한 개혁이나 타협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대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르고스 지역에서는 사제들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중세적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대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였고, 말라가나 산세바스티안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하는 등 모순적인 공존이 가능한 곳이 바로 19세기 말 스페인이었다. 타협할 수 없었던 양대 세력의 거대한 충돌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내전의 대내적, 대외적 영향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진영이 승리하기까지 3년 동안 전선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공화군과 국민군 양쪽 모두에 의해 정치인, 민간인, 지식인,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보복 학살 및 불법 구금, 고문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광기를 피해 스페인인들은 미주, 중남미, 프랑스 등 국외로 도피하였고 이는 스페인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초래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진영의 방관 속에 공화 정부를 지원한 소련과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지한 나찌 독일, 이탈리아가 충돌하는 국제 대리전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신형 무기와 전술을 스페인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시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승리를 통해 이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내전 종식 후 5개월 뒤 벌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31년 대규모의 민중 혁명으로 국왕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직후 수립된 스페인의 ‘유일합법 공화 정부’는 서구 진영이 사태를 방관하는 사이에 결국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 반란군에게 패망하였다. 반란군 장군 중 하나였던 프랑코는 ‘지도자'(caudillo)로 등극, 1975년 죽을 때 까지 36년 간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고 77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은 민주화가 되었다.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Ι)는 자유선거 실시와 정당 활동을 합법화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는 한편, ’사면법‘을 제정, 좌익 진영의 과거 범죄와 더불어 프랑코 진영의 반란죄 및 기타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구 반란 세력을 단죄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으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스페인 내전의 특징과 민중들의 수난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남유럽 국가의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우리의 해방 정국 이후 현대 정치사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절대 왕정과 일제 통치라는 강압적 지배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중들은 점점 폭력이 수반된 극단적인 혁명을 모색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한국의 민중들은 각각 왕정 폐지, 일제 패망에 따른 절대 권력의 공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율적인 국가 경영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 의회민주주의 같은 상식적이고 온건한 입헌적 절차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백색 테러, 적색 테러 등 무고한 살인과 폭동, 사보타주 따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 했다. 집단이성의 마비에 따른 시대적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 등의 방식 외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던 결과가 내전(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이었다.

1. 내전 발발 초기

 

 

스페인 내전은 장기간 누적되어온 보수와 진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 가톨릭과 무신론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갈등을 과격한 반동적 쿠데타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 뿐 아니라, 주요 거점에 배치된 일개 하사관이나 병사들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공화 정부의 관리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분명하였다. 반란 초기에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등 분명 여러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었던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부대 지휘관의 결단이나 하급 장교 혹은 병사들의 조직적인 행동, 그리고 치안대와 돌격대 같은 준군사 조직, 각 주지사들이 어느 편에 설지에 대해 신속하게 입장 표명을 함으로써 내전 발발 한 달 만에 스페인 전역은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아직은 건재한 공화 정부”
내전 발발 한 달 후인 1936년 8월. 국민군(회색)은 고작 식민지 모로코와 지중해의 여러 제도, 그리고 북부의 부르고스, 팜플로나 지방, 서남부의 안달루시아 일부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공화 정부(붉은색)는 수도 마드리드와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북부의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시가 북쪽의 국민군 영역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제3의 도시 발렌시아와 군사 요충지 카르타헤나 항 역시 공화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2. 미디어를 통한 국제 여론 포섭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이전의 전쟁의 양상들, 즉 군대 대 군대의 싸움에 의존했던 일차원적 전장의 개념을 벗어나 라디오 방송, 신문과 같은 현대 미디어를 통해 상대 진영의 사기를 꺾으려했고 각 진영의 공보 담당 관리들은 외신들을 이용하여 각자 자기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였다.

3. 우리 안에 적이 있다!

전쟁의 양상은 전면전과 더불어 후방에서의 게릴라 전, 도시 점령 후 시가전 등 꽤나 지루하고 소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적의 첩자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경향을 가진 인사들이 각각 상대 진영 도시에 암약하여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설령 일부 도시에서는 그런 세작들의 활동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안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각 진영 내부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불신과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군 국민 진영의 장군 몰라는 방송을 통해 “마드리드에는 우리의 제5열이 침투해있다.”라는 식으로 공화 진영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였는데 결과는 예상외로 효과적이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한 축인 스페인 공산당원들은 군 수사국을 이용해 초법적 권한으로 우익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처형과 고문을 자행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려했다.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비이성적인 공포 정치는 결국 공화 정부 내각에 대한 민심 이반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회 민주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 중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내부 불신은 프랑코의 마드리드 입성과 공화 정부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인민재판: 우리 편 아니면 전부 빨갱이(혹은 반동)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결백한 민간인인지를 판단하거나, 적에게 얼마만큼 부역했는지 에 대해 혐의를 입증하려는 능력도, 의지도 사실상 양 진영 모두에게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일부 도시에서는 공화 정부 쪽 민병대에 의해 국민 진영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지주, 성직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다. 또한, 공화 정부의 치안 당국은 국민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미리 정치범 수용소의 우익 인사들을 줄줄이 총살시켰다. 그러다가 국민군이 점령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우익 인사들은 기세등등하게 좌익 인사들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밀고하는 등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무장한 사제들과 레케테(카를로스 파 민병대: 왕당 보수파), 팔랑헤당 당원들은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노동조합원, 노조 간부, 공화군, 공화 정부 관리 및 반 국민진영 혐의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어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즉결처분하였다. 물론 변호인이 동석하거나 삼심제 형식의 상식적인 재판 절차 따위는 없었다. 국민 진영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보통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국군의 보복, 밤에는 빨치산 세상을 감내해야 했던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민초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지 모로코에서 거병한 국민 진영은 현지 리프족들로 이루어진 외인부대를 반란에 끌어들였다. 본토에 상륙한 후 이들은 뛰어난 매복술과 근접전으로 국민 진영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스페인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적인 학살, 강간, 약탈을 저질렀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 점령군의 희생양이었던 그들이 스페인 장군 프랑코를 위해 총을 든 것은 참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출처: http://www.alternatehistory.com/discussion/showthread.php?t=287588)

5. 시가전에 따른 국민군의 보복

내전 기간 동안 국민군의 도시 탈취 작전에서 되풀이 된 시가전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국민 진영은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 지원으로 공화 진영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시 접수’를 위해 투입된 지상군 병력 중 상당수가 건물이나 주택에서 은폐 중인 공화군 잔당과 무장한 노동자, 민간인들의 기습 사격이나 저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건물을 하나하나씩 제압하면서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병력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독이 오를 데로 오른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아랍인으로 구성된 스페인령 모로코 외인부대)들은 민가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병원의 환자들을 집단 살해하거나, 생포한 민간인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만행으로 대응하였다.

6. 무차별 도시 폭격 작전과 민간인 살상

프랑코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원한 이탈리아와 나찌 독일은 공화 진영 도시들에 대해 현대 전쟁사에서 최초로 다수의 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대량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독일의 리히트호펜 대령이 지휘한 콘도르 군단(스페인 파병 독일 군대) 소속 하인켈, 융커 폭격기의 무자비한 폭격은 비인도적인 인명 살상을 초래했고 특히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은 적지 않은 민간인 학살(민간인 희생자 수에 대해선 국민 진영과 바스크 자치정부가 다르게 주장함)을 초래했기 때문에 나찌 독일과 국민 진영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진영과 동맹국의 폭격전략은 국민 진영이 공화 진영의 도시들을 탈취할 때 그 심리적, 전술적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은 더욱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7. 대리전쟁(독일, 이탈리아 vs 소련)

애초부터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정부는 막대한 차관과 군대, 무기 등을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스페인에 자신들과 유사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 프랑스의 후방을 위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 수송기들은 모로코 주둔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들을 지중해 건너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에 신속하게 상륙시킬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공화 정부가 국민 진영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독일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나찌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 국민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콘도르 군단’을 결성, 파병하였는데 스페인 전장을 많은 신무기와 전술을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하였다. 거의 수직으로 강하하여 목표물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하는 슈투카 폭격기도 이 중 하나였다. 폭격시에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났기 때문에 공화군과 스페인 시민들이 느꼈던 심리적 공포는 배가되었다.

(출처: http://www.thisdayinaviation.com/tag/stuka/)

(다음편 예고) 두 개의 스페인(中): 지성의 패배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참을 수 없는 '주체'의 가벼움



▲  새누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홍보하기 위해 10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대로변에 걸었다 떼어낸 현수막을, 14일 저녁 다시 내걸었다. ⓒ 오마이뉴스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을 배우는 학생'은 필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필자는 김일성 주체사상만을 배우지는 않았다. 김정일 주체사상, 김정은 주체사상까지 다 배웠다. 주체사상의 내용은 물론 주체사상의 역사까지 세세히 공부했다. 지금 필자의 말을 듣고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필자가 주체사상을 공부한 이유는 간단했다. 무엇보다 주체사상을 알아야 북한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필자는 동국대학교 북한학과를 다닌다. 


필자가 주체사상을 공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번에 '뜨악'하는 표정을 짓거나 "그럼 북한을 옹호해?"하고 묻는다. 직접적으로 "빨갱이야?"하고 비꼬는가 하면, 군필자인 필자에게 "군대 헛 갔다왔네"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가 평소 북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누구에게나 불편한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깨달은 사실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주체사상을 공부한다'는 말을 곧 '주체사상을 믿고 따른다', 혹은 '주체사상을 믿고자 하고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필자가 말하는 공부는 후자의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고, 순수하게 그 의미와 역사를 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만 사람들도 '아~' 한다. '네가 그 정도는 아닐 줄 알았어'하는 안도감과 함께. 물론, '그래도 그건 아냐'라며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온건한 것, 불온한 것


한국의 공부는 온건한 공부와 불온한 공부의 두 갈래로 나뉜다. 온건한 공부는 불온하지 않은 공부이고, 불온한 공부란 국가비판적 공부다. 불온한 공부의 3대 대명사가 바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주체사상이다. 누군가 경제학의 케인즈주의를 공부한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케인즈주의자'라고 일컫지 않는다. 하지만 불온한 공부의 3대 대명사는 다르다. '저 공산주의 공부해요'라고 말했다간, 근처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등짝을 얻어맞기 딱 좋다. 그것이 불온한 공부기 때문이고, 앞서 말했듯 불온한 공부는 불온한 사상을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은 결과적으로 '수령절대주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를지언정, 그것이 수령절대주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주체사상을 실제로 공부해본 결과, 그것이 수령절대주의라는 사실은 더 명확해졌을 뿐이다. 고등교육과정 정도를 거친 누구라도 주체사상을 공부해 본다면, 그 부정적인 진실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주체사상은 아직까지 금단의 영역이자 악의 성지다.


시민사회와 언론도 이 금단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누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기 위해 '주체사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나왔을 때, 시민사회와 언론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크게 두 가지의 비판을 했다. 첫째,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그럼 역사교육을 받은 한국 청년이 전부 주사파냐? 둘째, 그래, 역사교과서에서 주체사상 가르친다. 북한의 현실을 명확히 꼬집을 수 있도록 잘 가르치고 있다. 새누리당이 주체사상 운운하는 데에 대하여, '우린 너희가 생각하는 종북좌파가 아니야!'라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10월 30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찬성하며 친북 반국가 교과서 집필진 퇴출을 촉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가장으로서의 국가, 식솔로서의 시민


이런 비판의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모든 반대파가 종북좌파가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합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반대파를 '종북좌파'나 '빨갱이'의 사상프레임 속에 가둬놓으려고 하는 것은 진부하기까지 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들이 끊임없이 '종북프레임'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이 전략이 먹혀 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새누리당 집권층을 공고히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파 또한 그 프레임 속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미국 미시건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리처드 니스벳은 그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한국과 북한을 비교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논하는 논쟁이 벌어진다면 모두가 한국의 우월성을 인정할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전통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옳은 주장이 결국 승리하리라는 신념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 정부는 북한에 관한 정보로부터국민을 '보호'하고자 했고, 북한에 관한 어떠한 형태의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한국과 오늘날의 한국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종북' 담론은 반국가적 세력에 대한 국가의 무제한적 탄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북 담론은 옳은 사상을 가진 국가가 사상적으로 미성숙한 시민을 보호한다는 식의 가부장적 기제와 닿아 있다. 새누리당은 '주체사상 학습'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주사파의 부활을 암시했다. 주사파의 부활은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비상사태일 뿐만 아니라, 미성숙한 시민들에 대한 사상적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북한이라는 적을 앞에 둔 상태에서, 국가는 또 한 번 아버지로서의 존재를 꿈꾸고, 시민은 '아버지, 저희 그런 거 아니에요!'하고 외치며 기겁하고 있다.



주체사상 배우면 어때서? 내가 너보다 북한 비판 잘할 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직 대한민국 사상공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국가는 물론 시민조차도,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합리적 사고를 통해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아직도 "주체사상 배우면 어때서?"라는 질문에 극도로 조심스럽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른바 NL계열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핵심적으로는 그건 그 질문에 응당 따라나올 '북한이 말하는 거니까', '북한에 동조하려고?'식의 비논리적인 비판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물어봐야 한다. '일본의 다케시마 주장을 읽으면 거기에 동조하게 되니?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부하면 고구려를 빼앗기니? 그건 바보지.' 새누리당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주체'적 정치논리에 끌려다니지 말고, 합리적이며 전면적으로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주체사상 배우면 어때서?"라고, "대한민국 시민이 주체사상을 공부한다고 주체사상에 빠져버릴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고.


주체사상을 공부하다 보면 북한 김씨 일가의 연설이나 담화를 접하게 된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당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북한식의 주체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1992년 1월 3일 김정일은 "사회주의건설의 력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이라는 담화에서 배신자들의 반동적 궤변에 의해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고 있다고 외쳤다. 


지난 10월 10일 김정은은 당창건기념일 연설에서, 인민은 당을 어머니처럼 무한히 신뢰해야 하여 일심단결해야한다고 말했다. 이틀 뒤인 10월 12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자 "하나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사상 배우길 참 잘했다.



(본 글은 2015년 10월 26일 오마이뉴스에 게재되었던 기사입니다.)



미시감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고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대학을 가니 마니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 몰래 고액의 수학 과외를 신청하고, 자기를 부모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해도 좋다고 배수진을 쳤다. 가문 역사상 최대의 패륜아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갈 수밖에 없었다. 과외 첫 날,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낯설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초록색 표지판과 구부러진 가로등과, 색 바랜 횡단보도와 붉은 벽돌의 건물이 처음 보는 양 생소했다. 내 방이 마치 호텔방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나의 동네도, 나의 집도 아니었다. 


상실감 비슷한 것이었다. ‘여긴 우리 집이 아냐!’하는 단순한 반항심이 아니었고, ‘나만의 집을 가질 거야!’하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생각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무언가가 무너진 느낌이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외 사건’ 이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고, 부모님과의 많은 대화도 있었다(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부모님의 힐난과 나의 저항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때만큼 부모님과 많이 소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라는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는 식의 사유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원래도 질 낮은 개똥철학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급작스러웠던 그 날의 낯섦 이후로 개똥철학은 내 뇌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게 삶의 근원이자 유일한 지지자이며 최후의 안식처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내 멋대로 그렇게 정해놓고는, 그에 따른 부모님의 역할을 내 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도대체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기나 할까? 차차 고개를 드는 의구심. 모든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꼭꼭 숨겨져 있는 진짜 사실들, 몰이해에 파묻힌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


▲  면허를 딴 뒤, 부모님 차를 몰래 타고 친구들과 자주 놀러갔었던 고향의 동해 바닷가.



이방인


사실 그냥 멘탈이 약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나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용인되는 압박을 주었던 것뿐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면 될 일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일상적인 고민과 일상적인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 이름난 대학교에서 지금과는 다른 공부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다. 그 때, 쓸데없이 낯설어하는 이상한 놈으로.


누구나, 여행을 가면 생각을 한다. 모든 게 새롭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것처럼 낯선 것들을 바라본다. 다만 어린아이와 여행자의 차이가 있다면, 어린아이와 달리 여행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는 어떤 유형의 내면화된 당위도 없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다. 여행자에게는 길을 잃을 자유가 있고, 따라서 좌절도, 희망도, 후회도, 기쁨도,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자는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고, 자신의 힘과 소망에 따라 자라난다. 하지만 그런 만큼, 여행지에 마냥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이곳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그들의 환경과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타당한 이유보다는, 차라리 내 안에서 만든 비합리적 변명이 나았다. 그야말로 나에게 최적화되어있고,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생각하고 바꿔나갈 수 있으니까. 게다가 내 안에서 만들어진 모든 논리가 밖에 떠도는 다른 것들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과 너무 멀어진 내가 사회 부적응자처럼, 싸이코패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의 나를 부정할 순 없다. 그건 내가 이겨내야 할 또 다른 과제다. 


▲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는 영화 ‘Into The Wild’의 한 장면



“만일 지도가 지형과 다르다면,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면, 한 사람의 세계는 다른 누군가의 세계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도도 같을 수 없다. 분명히 길이라고 되어있는데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과감하게 지도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미련하게 ‘여기가 길이라고 했는데!’하면서 우왕좌왕하지 않아야 한다. 지도를 고치든, 절벽을 길로 만들어버리든, 선택과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모두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다들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을 위해 열심히 고민했고, 또 다른 생각을 가지기 위해 현실의 공간과 정신의 공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내게 그 과정은 때로는 즐거웠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살아왔음을 안다. 나와 생각을 같이 하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그렇기 때문에 내게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우리 모두는 위대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위대함으로 인해서, 나는 기껏해야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다른 누구와 공감하든 그를 비난하든, 그 이전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서사를 존중한다. 하지만 위대성이 곧 존중의 필요성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가 존중을 모른다면, 비록 그가 위대한 개인이라고 할지언정, 나 또한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꼭 존중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구태여 존중받지 않아도 좋다. 나를 존중하고 말고는 타인의 몫이니까. 그러나 내 서사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쓰이는 것은 싫다. 그러니 내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지 말길. 내 지도는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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