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을 사업으로 보는 단체와 문화재로 보는 지식인. 인간존엄성은 어디로?”

 

2014년 5월의 어느 날.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를 찾았다. 18년째 동학장군의 유골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하여 방문한 것이다. 

동학장군의 유골이 왜 박물관 수장고에서 나타난 것일까?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유골은 1906년 일본인 사토 마사지로가 진도에서 수집한 것으로 1995년 일본 홋카이도대학의 한 창고에서 발견됐다. 유골은 두개골만 남아있는 상태로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머리)'이라는 글씨가 먹으로 새겨져있다. 이 유골이 발견되자 훗카이도 대학은 반인권적 행위로 엄청난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여론의 힘에 밀려 1996년 유골을 한국으로 반환했다.

한국으로 반환되면 편안히 잠들 줄 알았던 유골은 동학관련 단체들의 이견으로 안장처를 결정하지 못했고 18년간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방치돼 왔던 것이다. 2014년 5월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를 찾아간 이유는 동학농민운동 120년을 맞아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본인촬영

동학장군 유골을 만난 후 유골 안장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강력히 항의했고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듯 했다. 2014년 11월, 황토현 전적지에 동학장군 유골을 안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갑자기 무산됐다. 사적지에 유골을 묻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동학장군 유골이 언제 안장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민감사청구를 했다. 감사청구는 ‘유골이 특정한 이유 없이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은 반인권적 행위이며 형법 제161조에 규정한 사체보관 혹은 유골영득에 저촉, 형사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행위다. 전주역사박물관은 전주시에서 설립한 공공기관이므로 불법 행위를 지속하지 말아야한다. 그렇기에 유골을 지체 없이 화장 혹은 매장절차를 통해 안치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서류접수 후 감사원에서 몇 차례의 전화가 왔다. 그 때마다 ‘이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흘렀고 2015년 1월, 감사원이 ‘관계기관·단체 등의 이견으로 20년 가까이 지연돼온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장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에 통보했다. 동학장군 유골의 안장 문제를 담당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사업이라고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감사원의 입장이었다.

이 후 동학장군 유골 안장에 대한 회의가 열렸고 2015년 2월 16일 드디어 유골을 화장한 후 안장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120년 동안 억울하게 떠돌던 동학장군 유골이 드디어 편안히 잠들 수 있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기뻤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너무나 황당한 글을 접하게 됐다. 목포대 이윤선 교수가 자신의 SNS에 작성한 글이 기사화된 내용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일로 확정된 유골 화장을 막는 길이다. 문화재청으로 전화하면 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굳이 유골을 화장할 필요가 있나? 이집트의 미이라는 물론 시신을 유리관에 안장하는 사례는 그럼 뭔가? 일본인들에 의해 잘린 목, 쓰인 기록 등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볼 때 이 유골은 적절한 방식으로 보존 안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더 현실적인 역사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이 글을 보고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유골을 문화재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유골을 화장하지 않고 적절한 방식으로 보존 안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역사적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잘린 목이 역사적 자료인가? 반인권적으로 유골에 먹 글씨를 쓴 것이 역사적 자료인가? 더 놀라운 대목은 적절한 방식으로 안장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안장한 후 필요하면 잠자던 고인을 깨워 땅에서 꺼낼 것인가. 너무나 소름끼치는 글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댓글의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런 무식한 조치를 할 수 있느냐부터 시작해 문화재는 지키는 것인데 화장을 하면 문화재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글까지 어떻게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인지 황당했다. 

웃긴 것은 유골을 문화재로 생각해 문화재청에 항의하겠다는 글쓴이와 그 외의 사람들이었다. 이 문제의 담당부처는 문화체육관광부인데 엉뚱하게 문화재청에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시작부터 경과를 알지 못하고 무엇인 문제인지 알지 못한 글쓴이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감사원의 결정을 글쓴이는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글쓴이는 억울하게 죽은 동학장군의 유골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하여 잠재적 가치라는 것을 소유하려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진출처 : 본인촬영

유골은 소유물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형법 제161조는 사체보관 혹은 유골영득에 저촉, 형사 처분을 받을 수 있는 행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어떤 연예인이 예쁘다하여 그 사후에 안장된 유골을 꺼내 도망간 사례가 있었다. 그 당시 범인에게 적용된 법이 바로 형법 161조다. 이것을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사후에 그 인물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이가 사체를 안장하지 않고 집에 방치하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120년 전 사망해 안장되지 못한 유골을 껴안고 역사적인 자료라고 말하며 동학장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우리는 많이 배워왔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앞서 동학 단체들의 이견이 있어 유골이 안장되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니 유골안장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타내려는 못된 심보가 단체들의 싸움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간의 존엄성이 언제까지 돈과 연구목적을 위해 훼손돼야 하는 것일까.   

 


‘오늘도 청년실업’
어김없이 뉴스에선 청년실업과 취업난,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사람들은 청년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 마디씩 거든다.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공부만 해서 쯧쯧’부터 ‘다 우리의 책임이다. 미안하다 흑흑’까지 모두 저마다의 청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가만히 듣고 보니, 지금 나의 모습은 매스컴에서 다루어지는 청년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취준생/6년만에 대졸/대학나온 고급인력이라는데 공부와 책상에서 하는 오피스 워크 말곤 할 줄 아는 능력 없음/돈도 집도 없어 다시 부모님 집/아슬아슬한 스펙 등등. 다 말하려 하니 구차해진다. 내 처지 말고도 다양한 청년들의 모습이 있음에도 청년실업문제를 정형화시킨 뉴스들이 계속 전달된다. 주류 언론을 챙겨보시는 우리 부모님은 하루종일 집에만 있는 나를 계속 비교하며 한숨을 푸욱 푸욱 쉰다.

뉴스에선 41만명이 나와 비슷한 상황이란다. 어떻게든 취업시키면 청년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모든 정책과 연구들은 청년과 청춘을 연관 지어 이슈를 생성한다. 다들 ‘청년/청춘’이르는 틀을 고루하게 만들어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또, ‘대기업 취업의 문을 열어주면 되고, 창업을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거짓정답일지도 모르는 기존의 방법들에 헛된 희망만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누군가 날 청년이라고 규정하고 우리가 무기력하고 힘든 존재로만 만드는 것 같은 누군가의 생각들이 기분 나쁘다. 다들 스물다섯 살이 경제적 노동력으로서 한창이라고 하지만, 나는 무기력한 25살을 보내고 있다. 매스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에 ㅆ 욕하고 싶었고 순간 욱하기도 한다.

 

‘국민여러분, 경제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커가면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국민여러분, 경제가 어렵습니다.’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계속 어렵고 힘겨운 삶을 조장하는 경제가 회복되길 바라고 각자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최우선일까?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경제 속의 삶을 살아왔던 우리에겐 어쩔 수 없이 경제가 나아지길 바라며, 당장 안정적이고 돈을 적당히 주며 익숙한 공간을 찾아서 사는 것을 택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여기서 하나 묻고 싶다. ‘과연 지금의 경제가 나아질까요?’ 라고. 경제상황과 청년실업문제가 마치 정답을 찾는 듯이 일정한 형태의 정책과 수단들로 귀결되는 모습을 계속적으로 봐왔다. 투자나 개발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누구에게도 동의 받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현실성 없는 경제학원론법칙들처럼 그저 경제가 나와 내 친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한정시키고 경제 안에서 갇혀서 살 수 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

 

‘타의적 백조생활’
나는 사회에서 노동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지금까지 뒤처지지 않으려 공부하고 남들 하는 대로 하기 위한 삶을 살려했던 것 같다. 계속 ‘잘 하고 있는 거야’라고 자기위안을 할 수 있는 형식적 생각을 하고 합리화해왔던 것 같다. 현명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든 사회가 요구하는 틀 안에 나를 구겨 넣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점점 내 모습을 잃어가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가고 누군가가 정해준 메시지가 담긴 뉴스 속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었다. 백조가 되고 나니 극도의 스트레스와 미운 25살의 삐딱함으로 인해서 인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과 믿어왔던 경제에 회의감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청년에 대한 우울한 이야기를 듣고는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일거야. 언젠가는 기회는 올 거야.’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결국 나는 세계경제와 나라경제가 어렵기에 선택받지 못한 타의적 백조생활이었다. 주류경제에서 백조인 내 상황은 어렵고, 경제회복은 나아갈 곳이 없어 보이기에 기다리는 것도 대책 없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백조생활이 익숙해진 시기에 하나 결심을 했다.

어차피 힘들 거라면 타의적 백조생활이 아니라 ‘자발적 백조인생을 살기’로 했다.

‘자발적 백조’로서 경제와 사회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다음 편에는 자발적 백조인생의 주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부산에 가는 길이었다. 뜨거웠던 여름 해는 구름에 가린 채 지고 있었고, 여행길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입석 칸에 널브러졌다. 부산까진 한 시간 남짓 남았다. 배가 고프니 모든 일이 성가시다. 기다리는 것조차 지치던 차에, 기차는 어느 역에 도착했다. 3초 정도 생각했을까. 아니 이성보다는 육감이 더 옳으리라 판단하고는 곧장 차에서 내렸다. 밀양이란다. 밀양아리랑, 전도연과 송강호가 나온 영화... 내가 아는 밀양은 이게 전부였다.


표충사도 있고, 얼음골도 있다지만 거기까지 갈 시간도 없었다. 무작정 내려버렸지만, 막상 갈 곳이 없는 일개 경유지였다. 스마트폰을 뒤져보았다. 이왕 왔으니 저녁은 확실히 채우고 갈 요량이었다. 혹자는 밀면을 가보라 하고, 어느 이는 삼겹살이 맛있더란다. 그러다 한 블로그가 시장에 국밥집이 있는데 괜찮았다고 한다. 시장구경도 하고, 가는 길에 얼추 시내도 볼 수 있겠네 싶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 라디오에선 야구 중계가 흘러나온다. 롯데의 사직 홈경기였다. 역 간판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야 여기가 밀양임을 실감한다. 야구가 일상의 하나, 그 이상으로 열광하는 전형적인 부산경남, 소위 PK의 한복판에 있던 것이다.


버스는 낙동강을 지나갔다. 본격적인 시내인데,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명색이 시(市)라고 은행이니, 카페니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시장 어귀에서 내려 어름어름 찾기 시작했다. 7시도 안 되었는데, 가게는 하나둘 장사를 파하고 있었다. 문 닫았으면 어쩌지 걱정하던 차에, 다행히도 내가 찾던 국밥집은 아직 장사하고 계셨다. 할머니 두 분이 계셨는데, 저녁 손님으로는
 내가 처음인 듯 보였다. 


“국밥 줄까?” 

주인 할머니가 물으시며 주방으로 향하신다. 국밥 외에는 고를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림판은 할머니께서 직접 쓰신 모양이었다. 작은 뚝배기부터 간판까지 모든 사물에서 노포(老鋪)의 정취가 절로 묻어나온다. 그 사이 국밥을 다 끓이셨는데, 정성스레 뚝배기에 담긴 국밥을 천천히 토렴하고 계셨다. 서울에서는 아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손주뻘 되는 어린 손님이 뜨거운 국물에 차마 입이라도 상할세라 몇 번이고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는 것을 반복하셨다. 시키면 바로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하고, 팔팔 끓고 있는 게 국밥의 의무인 줄 알았는데, 아마 나는 그동안 ‘빠름’을 미덕을 숭상해온 것 같았다. 이유도 모르는 ‘바쁨’에 ‘빨리빨리’가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것 말이다. 그렇게 빠름에 젖어 있는 나에게 ‘느림’의 미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다.

부산에서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방아잎을 찢어 넣어주신다. 그렇게 알맞게 따스한 국밥이 내 앞에 펼쳐졌다. 찬은 그리 많지는 않다. 정구지와 김치 그리고 새우젓. 여기에 된장과 양파와 풋고추가 전부이다. 소박하지만 국밥을 먹기에 이상적인 차림이다. 뽀얀 국밥에 가지런히 올린 정구지를 이제 보기 좋게 흐트러뜨린다. 휘휘 말아보니, 다대기가 어우러지니 국물 색은 이내 구수한 색깔이 된다. 듬직한 한 술, 정구지 올려 입으로 올려보낸다. 이내 양 볼따구니까지 푸짐히 채워진다. 다른 어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먹어댔다. 국밥을 마셨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정도로 먹었다.


‘어디서 왔노?’

뚝배기 바닥이 보일 즈음에 주인 할머니가 운을 떼신다. 서울에서 왔는데, 서울에는 이런 국밥은 찾을 수도 없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다. 덧붙여 맛의 비결도 여쭈어보았다. 그저 순수하게 매일 끓인다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표현으로 작은 하꼬방인데도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종종 찾아오는 걸 보면 결국 ‘매일 매일 순수하게’가 그렇게 사람을 부르는 것 같다고 하셨다. 무언가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 같아 내심 기대했는데, 되레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어떤 것을 위해 매일, 부끄러움 없이 순수하게 만들어온 적이 있었는지 짐짓 되돌아보게 되었다.

주인 할머니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일생을 살아오신 고장이셨는지, 자부심이 묻어났다. 산새가 좋아서, 비가와도 물난리가 잘 안 난다고. 낙동강이 한가운데로 흘러서 농사도 짓기 좋은 땅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다 부산 가고, 서울 가고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고. 푸념 자부심과 체념, 다양한 것이 느껴졌다. 벽에 걸린 밀양 사진 몇 개가 그 증거처럼 남아있는 것 같았다. 살기 좋은 곳이라 어디든 사람이 북적이던 그 활기가 이제는 사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옛 정취는 이제 가고 없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추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그 정취를 국밥으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국밥은 밀양을 닮았다. 넉넉한 인심, 때 묻지 않은 여유로움이 오롯이 담겨있다. 화려한 진미와 값비싼 만찬들이 수두룩하지만 나는 서울에 있는 지금도 그 정취가 담긴 따스한 국밥 한 그릇이 먹고 싶다. 그것은 아마 사람 냄새 솔찬히 먹어보고 싶은 마음의 허기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p.s : 광고글만 쓰던 놈이 이젠 국밥에 대해서도 끄적여보았습니다. 아주 가끔은 기행문이나 이런 음식에 대한 낙서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올려보았습니다.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글을 쓰기 정말 귀찮을 때가 있다. 성격이 게으른 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정해진 마감일에 쫓겨 마지못해 기계에서 찍어내듯이 쓰는 글’이 아니다. 그냥 쓰고 싶을 때 써야 좋은 글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쓰고 싶은 주제가 마구 떠올라서 흥분되는 바람에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에 바쁘고, 어떤 날은 정말 쓸 소재도 안 떠오른다. ‘삘’은 안 나오는 마당에 정해진 기일에 맞춰 대충 써낸 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체념감에 아예 손을 놓고(넋도 같이)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 일도 다반사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의 성과란 그 날 개인의 생체 리듬에 맞춰 변화무쌍한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은 영 날이 아니네요.”라고 태업을 하며 여유를 부리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사회이다. 낮과 밤,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시간적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생체리듬 대신, 오늘날 우리는 한낱 기계에 불과한 12진법짜리 시계의 분침과 초침의 순환적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동규칙을 정한다. 심지어는 밀리 초(1/1000초),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자본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주어진 시간을 틀에 맞추어 해야 할 과업으로 빽빽하게 배열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에 항거하거나 이에 낙오된 자를 이 사회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어버린다. 높은 생산성을 달성해 인간의 후생 개선을 위해 고안된 시간의 규격화는 역으로 우리를 시간의 권력에 복속시킨다.

 

“클릭 대기 중!”
1000분의 1초, 그 찰나의 시간 차이로 개강을 앞두고 우리는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eh5b/110132019651)

시간 권력의 역사(시간과 개인, 사회)

사실 시간의 권력은 산업사회 이전 시대에도 권력층에 의해 행사되었다. 고대에는 농사의 풍작과 치수(治水)가 곧 지배층 권력의 원동력이었다. 이 시기 시간의 개념이란 1년에 걸친 농사의 풍년을 위해 해와 달, 비와 눈의 내리는 시기를 예측하고 날씨와 풍요의 신께 제사 드리는 행위의 반복을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세 사회의 권력이었던 교회는 농사와 더불어 수많은 종교적 과업과 축일을 통해 민중의 1년 365일을 짜임새 있게 간섭하려했다. 교회가 가진, 시간을 측정 및 설정할 수 있는 능력과 일반 민중이 해야 할 일과를 배치하는 것은 곧 권력이었다. 시간의 권력은 권위적이었지만, 봉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력을 보장하는 시간적 권력이면 족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권력은 여전히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교회)에 속해 있었다.

‘시간의 주권’이 인간에게 속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먼저 알아차린 이들은 상인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 간, 도시 간 원거리 교역이 증가하자, 상인들은 유통 과정의 속도, 상품의 품질, 시장 정보력 등이 모두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됨을 깨달았다. 상대적 희소성에 따른 차익을 얻기 위해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팔고 시장의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혹은 상품 품질의 보존을 위해, 어음과 같은 신용 화폐의 청산과 상환 기일을 지키기 위해 보다 정확하고 엄정한 시간관념이 필요했다.

이후 19세기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자 시간의 권력은 더 치밀해졌다. 포드주의에 입각한 대량생산을 위해 숙련 노동자의 탁월함 대신 자본가들은 공정, 노동의 단순화와 획일화를 택하였다. 과거에는 고된 숙련 기술을 익힌 장인만이 대접을 받고 소량 생산에 따른 고부가 가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열 살짜리 어린이도 몇 분이면 익힐 간단하게 응축된 공정 기술 패러다임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자본가들의 관심은 복잡하거나 고차원적인 장인 기술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위해 단일 공정의 보다 빠른 시간 단축과 이에 반비례하여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계 생산점에 다다를 때까지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산단가를 낮추어 시장 경쟁력을 갖추고 이윤을 취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식사”
노동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이윤 창출에 도움이 안 되는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간주되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식사시간과 휴식시간 단축이 규정된 일과표 부여를 통해, 자본은 개인의 시간을 장악하였다.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출처:
http://cinemaedebate.com/2009/11/23/tempos-modernos-1936/)

생산비 절감을 위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쌍두마차’는 이때부터 불을 뿜기 시작했으며, 인체의 관절과 신체의 역학구조는 생산을 위한 공정단계 하나하나에 알맞게 분석되고 재조직되었다. 공정의 시간단축과 더불어 노동자의 하루 일과는 일괄적으로 생산 활동에만 최대한 투입되도록 짜였으며 출근시간, 식사시간, 휴식 시간의 엄수는 시간 권력의 냉엄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간이 곧 권력이며 시간이 곧 돈인 시대가 도래했다.

시간 측정의 통일: 패권 국가로 향하는 길(시간과 국가)

예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존재했다. 이것이 국가적 목표가 되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 ‘역법’(曆法, 달력 계산법)이다. 역법은 당시 국가나 시대에 따라 상이했다. 개별 국가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채택한 역법을 얼마나 더 넓은 세계에 ‘표준력’으로 공인받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국가 간의 권력 문제’이다. 예로부터 패권 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가 자신들만의 ‘역법’이었다. 시간을 관장하여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기에 고대부터 이집트력, 그리스력, 로마력, 율리우스력 등 패권국의 달력 계산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변국은 패권국의 역법을 수용하였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는데 중화사대질서 하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천하에서 사용할 자신들 고유의 역법이 있었고 왕조나 황제가 바뀔 때마다 그 해에 고유의 칭호를 붙이는 연호(年號)를 공표했다. 이러한 중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이웃나라에도  통용되었고 ‘건원’(建元)은 패권국만이 행사하는 특권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주변국에게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건원은 곧 ‘자주성의 표출’이었다. 우리나라는 일부 왕조를 제외하면 신라 말기 선명력, 고려 후기 수시력, 조선 전기 대통력, 후기에는 시헌력 등 역법에 관해서는 대부분 중국의 것을 차용하였고, 이는 곧 중화 패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시간 측정법의 표준화는 ‘국가 간 수직적 권력관계의 상징’이었다. 또한, 역법의 교체는 곧 개혁의 시발점이자, 정치권력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12진법대신, 10진법 시간관념 도입을 시도했던 것, 1895년 을미개혁 때 조선 정부와 1926년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이 기존의 전통 역법을 버리고 서양식 태양력을 채용한 것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력이 된 태양력, 즉 그레고리력의 보급과 더불어 전 세계는 지구의 자전에 따라 상이한 시차를 감안하여 표준 시간대를 채택하고 있다. 이 역시 국제정치 패권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7세기부터 해양 패권을 독식해온 영국은 국제 무역과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서로 다른 지리적 공간에 공통적으로 적용할만한 새로운 국제 표준 시간대의 설정이 필요하였다. 이를 자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 자오선(Greenwich Mean Time Line, 일명 GMT, 경도 0도선)으로 삼아 국제 표준 시간대의 기준으로 19세기 후반에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고 이를 토대로 각국은 영국이 만든 규칙에  따라 자국의 시간대를 수용하였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기’(西紀)라고 불리는 그레고리력의 확산과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의 공인은 영국 중심 세계패권주의에 상응하는 하나의 특권이었으며, 이로써 전 세계를 (팍스 브리태니커에 기초한) 하나의 시장권으로 묶는 국제 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켰다.  

 

“두 번 잃어버린 시간대”
1908년 대한제국은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를 채택했는데, 1912년 일제 침탈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도쿄시’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일제 청산을 이유로 127.5도 표준시로 회귀하였으나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다시 도쿄시를 채택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표준시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015년 북한은 광복절을 기해 기존 경도 135도의 도쿄시와 30분의 시차가 있는 이전 대한제국의 127.5도로 회귀하고 이를 ‘평양시’로 명명하였다. 우리나라는 고유의 표준시를 두 번 잃어버린 셈이다.
(출처: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207)

속도경쟁의 결과: 시간의 폭력성

전술했듯이 근대부터 시간의 권력은 자본과 노동의 통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현대에 접어들어 시간은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 동네 PC방을 비롯한 편의 오락 시설 등은 이용시간을 기준으로 값을 지불해야하고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기준은 ‘시급’단위로 책정되며 자동차, 고속철도 등의 교통수단은 얼마나 더 빠른가가 기술진보의 척도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도를 측정하는 단위는 km/h, 즉 한 시간 당 얼마의 거리를 가느냐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거래 행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 하나의 공리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에서 속도 경쟁은 사회적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한민국만큼 배달이나 택배 서비스 문화가 일상화되어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가만히 앉아 전화 한 통이면 전국 어디든지 믿기 힘들 정도의 짧은 시간 이내에 맛있는 음식과 주문한 상품을 배달 받을 수 있는 특유의 배달, 택배 문화는 선진산업사회의 발전된 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껏 누려온 배달, 택배 서비스 역시 시간의 권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배달 업계에서는 배달원들에게 하루 안에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배달 업무를 배정하고 그 성과에 따라 직무평가와 보수 지급, 고용에 대한 계약 여부를 결정하였다.

 

“속도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비극”
더 빨리 소비하고 싶고, 더 빨리 팔아야만 하는 배달 문화의 이면에는 ‘시간의 폭력성’이 내재해있다.
(출처: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709590)

우리가 집에서 편하게 음식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살기 위해 살인적인 업무를 감당하여야 했다. 자연스레 이러한 '시간의 폭력성'앞에 이들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할 하등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도로에서 위험한 곡예 주행을 해야 했고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해가며 인도로 겁 없이 달린다. 법치질서는 무너지고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이로 인한 무고한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해왔던 배달, 택배 서비스가 역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범법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광적인 빠름을 추구하는 시간의 폭력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 이상, 교통위반에 대한 처벌수위만 높인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시간 압축을 향한 욕망은 파국적 결말을 맞는다. 누군가의 생계를 쥐락펴락하면서 더 빨리빨리 문화를 종용하는 ‘시간의 폭력성’은 사회 법치를 무시하는 명분이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결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시간 이용의 차등 권력화

‘부자도 돈을 주고 시간을 살 수 없다.’, 혹은 ‘누구에게나 24시간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현대에 접어들어 더 무게감 있는 인생의 격언으로 통용되고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사회적 평판이 결정된다고들 한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은 축적되어 서로 다른 인생의 군상들을 만들어낸다. 누군가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시간 활용을 게을리 한 자는 하류 인생으로 떨어질 수 도 있다는 시간의 권력이 주는 하나의 공포이다.

이렇듯 시간의 이용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당연히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권력과 성공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이라 해도 경제적 조건의 제약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자가 결국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에 시간을 더 여유롭게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초 단위로 해야 할 일과가 짜여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특권은 더 크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과 경제적 걱정 없이 더 나은 인생을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있는 사람의 시간 활용도는 분명 다르다.

이렇듯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보다, 시간을 남들보다 얼마나 더 자유롭게 할애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과 환경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제약의 차이는 계급적, 계층적 차이에 기인한다. 동일한 직장 내에서 관행적으로 허용되는 일반 사원과 부장의 출근 시간이 다르고, 업무시간동안 업무 외에 할애할 수 있는 재량권도 사회적 위치와 직급에 따라 차등 배분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자나 권력자라고 해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대신, 남들보다 ‘시간을 더 벌 수 는 있다.’ 시간이 돈, 권력이고, 권력과 돈이 곧 시간이다.

짜인 인생 시간표: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근대로 접어들어 시간은 곧 국가적 계획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대중의 사회적 리듬을 통제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시간의 관리와 계획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 일과나 방학 시간표를 짜는 습관을 들여 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르친다. 더구나 입시에 모든 교육 과정과 유년기 시절이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우리는 그 시기에 ‘해야 할 인생의 과업’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시기적으로 분명하게 정해진다.

입시와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은(예를 들어 연애)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얼마든지 하렴.”이라는 사회적 강요아래 자의반 타의반 보류된다. 과연 대학만 들어가면 시간의 활용이 자유로울까? 20살 때부터 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에 20대 대부분의 시간이 저당 잡힌다. 취업을 해서 서른 언저리가 됐을 쯤엔 ‘결혼’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 물론 시간 할애에 대한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에 기초하였지만, 결국 인간은 시간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쉬어가는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

결국 시간의 압박에 따른 집단적 스트레스는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보복운전이나 그에 따른 보복폭행 피의자 대부분이 평범한 직장인, 자영업자 등이 다수라는 점,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과도한 업무를 처리해야하는 부담을 겪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간의 압축을 통해 누리는 서비스는 우리 모두를 편리하게 했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의 압박에 따른 분노조절 장애의 확산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시간에 충실하려는 현대인의 욕망, 버스 도착 정보 알림판"
불확실성을 없애고 분, 초 단위를 기준으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http://goyangcity.tistory.com/2561)

오늘날 우리는 시간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분과 초의 초미세 영역까지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 다음 버스나 전철이 언제 올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대중교통 앱으로 버스, 전철이 도착하는 시간을 초 단위로 알 수 있다. 한술 더 떠 환승에 필요한 시간과 제일 빨리 환승할 수 있는 플랫폼 위치까지 알려준다. 바야흐로 현대인들은 시간을 초 단위까지 통제하여 고도의 효율성을 발휘하려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 같이 촘촘한 시간의 간격에 인간이 종속되어 감을 뜻한다.

12진법과 60진법으로 정확하게 규격화된 시간은 반복적인 규칙과 규율을 부여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본유의 자연적 리듬의 존재를 간과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은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획일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빽빽하게 짜인 일과표에서 개인이 발휘할만한 창의적인 발상이나 창조나 재충전을 위한 ‘뜻하지 않은 일탈’은 허용되기가 쉽지 않다. 이로써 산업적 발전과 별개로 사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지적, 문화적 수준의 고양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사회담론에 대한 철학적 사고행위에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이미 ‘사치스러운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시간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집단적 광기를 뿜으며 대중을 어떠한 전체 목표에 동원하려 애썼고(나치즘, 마오이즘, 북한식 공산주의), 반대로 권력을 이용해 인위적인 여가 시간을 허용하여 정치적 영역에 대해 대중의 무관심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살라자르의 3F정책, 전두환 5공 정부의 3S정책)

 

북한의 집단체조(mass game): 사적인 권력유지를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시간을 착취하는 정치적 선전 기술은 전체주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출처:
http://blog.fontanka.ru/posts/151070/)

결론: 인간, 시간의 주권자

시간의 권력은 시간의 표준화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효율적인 이용을 가능케 하는 등 인류 문명의 복리후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간의 주권자로서 인간이 시간을 주체적으로 이용한 역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인간은 시간에 쫓기고 시간의 틀에 자유를 속박 당했다. 중세에는 종교와 관습이, 근대부터는 자본이 ‘시간의 고용주’였다. 시간의 규칙성이 시간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과도하게 저해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권력이 시간의 주권을 인간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본의 이윤 축적에만 봉사한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ex: 평일에 하는 시민 참여 정책 공청회)을 초래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필자는 마감일의 압박에 쫓겨 쓰고 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한참 지났다. 반복적인 게재는 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업이긴 하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쓰는 것이 내가 쓰고 싶을 때 써서 좋은 글을 창조하는 것보다 뭐가 더 나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 글의 일부 문장과 표현은「문화정치학의 영토들」, 2007, 그린비 출판사, 이진경 편저 中 ‘근대적 시간: 시계, 화폐, 속도, 최진석’에서 부분 인용 및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그거 하면 뭐가 달라지나?"

나는 어렸을 때 공상을 참 좋아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생각들.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한다고 해서 부모님이 상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잠들기 전이면 늘 어떤 것이든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다. 그 생각이 사람들한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또 내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품었던 가장 큰 의문은 지구가 혹시 네모난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생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름 진지했다. 물론 그때도 ‘지구는 둥글다’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왠지 인정하기가 싫었다. 적어도 내가 한 방향으로 쭉 가서 다시 원래 있던 지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나는 지구가 둥글다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싫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쳤다. 당시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의문 제기가 철없는 아이의 반항으로 비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나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인데 그걸 실없는 소리로 취급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 역시 나와 같은 루트로 그 보편적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들의 반박은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의 무게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일단 공상에 타자가 개입되면 그건 더 이상 공상이 아니었기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는 공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계기가 있었다거나  철이 들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런 공상을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다른 친구들한테 들켰다가는 이상한 놈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나는 대학생이 되면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됐고, 그 시선이 내 공상을 부정적으로 볼까 두려워 나는 공상 행위 자체를 중단한 것이다. 물론 공상을 하지 않아도 삶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 달라진 것들은 분명히 있었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으니까.

일단 공상을 끊으니 합리적인 고민도 하지 않게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게 공상이었는데, 그걸 하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질문마저도 자취를 감춰버렸다. 또 한 가지, 공상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공허함을 느끼게 됐다. 기실 공상의 위대함은 창조성에 있다. A를 생각하다가 B가 나오고 A와 B가 조합되는 사이에 하나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일련의 과정은 공상하는 사람을 절로 유쾌하게 만든다. 그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런 공상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기제로 작동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 편히 공상하기로 했다. 공상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하고 다른 삶의 영역에 영감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새삼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한 말이 떠오른다.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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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이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현재가 아닌 그 언젠가의 어떤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일까, 홀로 멍하니 두 눈의 초점을 잃은 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그 어떤 상태적인 상태일까. 아님 지극한 외로움이 엄습한 가운데서의 무작정 느끼고 싶은, 감정일까. 이렇듯 몽환적이라는 단어는 내 멋대로, 내 방식대로 하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감성 다의어’이다. 그리고 이 가수의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몽환적이 된다.

 

사비나 앤 드론즈. 개인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1인으로써, 장르의 구애를 받지도 편애를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음악을 통한 몽환성은 대체로 인디가수들을 통해 많이 느낀다. (참고로 나는 홍대도, 인디밴드들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한다.) 약간은 답답해보이는 소극장에 안개처럼 나풀대는 먼지들을 위한 것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내리쬐는 조명하나. 그리고 외로이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 그 공간을 채우는 어느 여자의 목소리. 나의 몽환적 느낌의 상상의 나래는 보통 이런 분위기와 배경 속에서 채워진다. 그리고 이 가수의 노래를 듣는 순간 ‘역시’ 그랬다.

 

(출처 네이버)

그녀의 본명은 최민영이란다. 사비나는 그녀의 예명일 것이고, 드론즈는 공명이라해서 울려퍼짐의 뜻은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삶의 이야기정도라고 해야 할까. 응급실 간호사 출신이라는 그녀는 노래에서 그렇듯 ‘외로움’에 대한 감정을 많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속에 혼자인 것 같은 이유를, lover 외로운 그대여 할 수 있는 것은..내 가시덤불 속에 그 속에 누군가를 가두는 것 뿐”
어느 발라드의 듣기 좋은 말처럼 흔해 보일 수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통하는 순간 몽환성의 바다 안에 그저 넋 놓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몽환성은 누군가에게는 황홀감으로 누군가에게는 외로움 가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노래, 그 외로움 속에서도 공유하고 싶은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곡이다. 언젠가 저 멀리 남미에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그 곳에 살고 있는 교포에게 ‘Stay'란 곡을 들려준 적이 있다. 전주에서부터 시작되는 잔잔함 속에서 그녀의 에코 꽉 찬 목소리. 그런데 그 와중에 전해지는 아이러니한 속삭임의 느낌. 그 친구는 술에도 취해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그 음악에 취해 황홀해 하던 기억이 있다. 반면 나는 무엇인가 알수 없는 타지에서의 외로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경험이 있다.

(출처 다음)

(출처 다음)

그녀는 지금도 말하는 거 같다.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어느새인가 몽환적인 느낌의 개념을 넘어 나의 삶을, 나의 외로움을 위로해주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위로가 아니라 외로움은 외로움으로써 충분히 느끼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근심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외로움에 사무쳐 있는 그대들, 별빛 가득한 하늘 보며 어제의 미래였던 오늘을, 내일의 미래인 오늘을 꼽십고 싶은 이들,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기울여 보자. 그녀가 전해줄 것이다.

“there's nothing anymore. just stayed enough to pick up the day has g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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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일입니다. 수학선생님이 4교시(점심 전 시간)에 수업이신 날에는 곧잘 “공부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배가 고파서 되갔어?? 창자나 빨리 채우고 오라우” 하시면서 10분 일찍 끝내주셨습니다. 그땐 그 얘기가 귀에 들리지는 않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제대로 밥을 먹은 적이 손에 꼽게 됩니다. 학교 때문에 혹은 알바 때문에 밥 대신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게 거의 일상이 되었네요. 그렇게 끼니를 때우다보니 정작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지, 일을 하기 위해 먹는지 씁쓸한 고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 더 포함한다면 학생도 낄 수 있겠습니다. 오래도록 인류는 계속 먹고 살려고, 정확히는 생존을 위해 작업과 노동을 해왔지만, 어째 요즘은 이것이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 때문에, 일 때문에 우리는 본 목적인 ‘먹고 사는 시간’을 대충해도 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닐는지 말입니다. 먹는 것뿐일까요. 놀 시간, 쉴 시간도 모두 같은 처지일 것입니다.



최근 올레(Olleh) 광고입니다. 광고를 보면서 제 일상과 오버랩이 많이 됩니다. 앞서 말한 제 푸념들, 정확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초상인 것 같습니다. 일을 하건, 학교를 다니는 모든 이들이라면 시간 때문에 뛰어보았을 테고, 저런 질문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광고의 타겟으로 설정한 직장인의 상황을 ‘바쁜 이’, ‘시간이 없는 사람’으로 잡은 것 같습니다. 얄밉게도(?) 여기서 바쁜 우리에게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상황을 제시하면서, ‘시간이 없는 이유’를 올레가 ‘자신이 더 빨라진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15초라는 짧은 시간에 어떤 반박을 달기 어려울 정도로 논리적인 메시지입니다.

‘직장인은 바쁘다’라는 건 어느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마 ‘시간이 없다는 것’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죠. 하지만 그 사실을 광고로 쓰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가 아닐 것입니다. ‘직장인, 그래 바쁘지...그래서 뭐? 우리 회사랑 무슨 상관인데?’의 물음 앞에서, 명확한 답이 있어야합니다. ‘직장인은 항상 시간이 없으니까, 우리 통신사 속도가 더 빨라지면, 그들이 다른 걸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잖아. 우리가 그 시간을 만들어주자’라는 답의 산물이 이 광고로 이어졌을 겁니다. 


그렇다고 저 질문에 모든 답이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상관성이야 찾으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비자와의 상관성, 즉 팔 수 있는 접점을 강하게 말해야합니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소비자에게 ‘사고 싶은’ 이미지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의 큰 무기가 저는 ‘공감’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겪은 감정을 남이 알아준다면 ‘사이다’처럼 속 시원한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브랜드도 소비자가 겪은 상황이나 느낌을 광고에서 풀어내는 것이 광고의 핵심입니다. 


밥이 떨어졌을 때, 햇반(1997, CJ)


밥 얘기가 나왔으니, 밥 광고 하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CJ사의 햇반 다들 아실 겁니다. 한국인의 주식이 쌀밥이니, 간편하게 밥을 해먹을 수 있는 제품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해보입니다. 근데 그렇다고 우리가 햇반을 매일 먹지는 않습니다. 집에 밥이 하나도 없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인데요. 처음 햇반의 포지셔닝은 집밥의 대체제로 잡아서 어필했습니다.

‘간편하다'라는 컨셉의 포지셔닝은 잘 먹혔습니다만,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주부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신이나 자취생들이야 상관은 없었지만, 가족의 밥상을 책임진 주부들에게 햇반은 그리 탐탁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쁜 일과를 보내는 주부의 입장으로서 밥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제품이 나온 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 좋은 밥을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마음일 진데, 그냥 렌지에 돌려서 밥을 만드는 게 인스턴트 음식같이, 건성건성 밥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에 CJ는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2008, CJ)


카피 하나로 주부들이 생각했을 고민을 꿰뚫었습니다. ‘미안해하지마세요’ 한 문장으로 주부의 공감부터, 브랜드의 품질까지 모두 담아냈습니다. 타겟의 집요한 분석이 빛을 발한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부의 일상과 고충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만들어내지 못했을 광고입니다. 그런 오랜 생각에서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찾고 주부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햇반은 ‘엄마’라는 단어와 뗄 수 없을 정도로 연결고리는 잘 쓰고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말은 익히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라는 말이죠. 마케팅도 마찬가지입니다. 팔아야 할 소비자도 모르면서 우리 브랜드만 잘 났다고 얘기하면 제대로 팔릴 수 있을까요. 아마 표적 없는 화살이 될 것입니다. 표적, 즉 타겟을 잡은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깊숙이 분석하고 연구하여 공감할만한 소재를 찾아 브랜드와 연결하는 것이 마케팅 과정의 필수입니다. 공감만큼 소비자를 쉽게 설득할 수 있는 무기는 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모든 광고가 떠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 첫 번째 암살 대상 : <암살> 디지털 스포일러


매체에서 계속해서 언급하던 영화 <암살>을 드디어 감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말처럼 재미있었다. 그리고 하필 본 날이 광복 70주년의 광복절이어서 작품 그 이상으로 의미 있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애국심이 끓어오르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고, 배우진 역시 화려했다. 무엇보다 독립군 여자 저격수인 안옥윤에 눈이 갔다. 전지현이라는 배우가 여자 저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영화 내내 그녀의 행적에 눈이 갔다. 같은 여자가 봐도 결혼식장 씬은 아름다우면서도 멋졌다. 색의 대비가 명확한 장면으로 구성되었던 것처럼, 안옥윤 자리에 전지현이 있어야 할 당위성은 명확해보였다. 나머지 배우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감초 같은 역할과 대사는 필자를 139분 동안 홀린 사람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총 평을 먼저 언급하자면 필자의 의견은 ‘아쉽다.’에 가깝다. 일단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예고편은 물론이거니와 뉴스, 네티즌의 평가 등등을 접하며 이미 영화가 너무 익숙해져 정작 본 영화에서는 영화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은 분명 이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이런 디지털 스포일러를 당할 때마다 인터넷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정말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감상평이나 원작을 전혀 참고하지 않는 것을 감상 원칙으로 삼고 있는데, <암살>을 보기 전에는 이 원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뉴스, 인터넷 할 것 없이 <암살>의 열기로 들썩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암살>에서 많은 장면들을 알고 있거나 예상할 수 있었고, 딱 그만큼 재미없었다. <암살> 디지털 스포일러를 암살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300불이면 뭐든 다 해준다는 그 남자에게 의뢰하고 싶다. 현재 환율로 300불은 35만 2,380원(15.08.16 기준), 이 돈으로 스포일러를 없앨 수 있다면야 투자할 만한 가격 아닐까. 도와줘요, 하와이 피스톨!



문득 영화관에서 영화를 처음 감상했던 때가 생각났다. 무려 15년 전 이야기다. 가족 대부분이 집을 비운 더운 여름 오후였고, 필자는 퇴근한 아버지와 함께 지금은 사라져버린 모 영화관으로 향했다. 당시에 고소하고 짭짤하던 팝콘의 맛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시선을 끌어당기던 <반지의 제왕>의 예측할 수 없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지의 제왕>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었던 필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상상했고, 예상치 못한 방향의 전개에 흥분하기도 하며 온 몸으로 영화를 즐겼다. 솔직히 3D, 4D가 넘쳐나는 지금보다 그 당시에 감상한 영화가 더 생생했던 것 같다. <암살>에서도 이 정신적인 3D, 4D를 즐길 여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더 생생하고 즐거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 두 번째 암살 대상 : 비슷한 영화 스타일과 굳어진 흥행 공식



아쉬운 느낌을 보탰던 것은 또 있다.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많이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살’이라는 주제는 많이 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너무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 많았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가져오는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물들이 아주 낯익다는 것이다. 감초 역할로 종종 등장하는 배우 오달수는 물론이고, 하정우-전지현-이정재의 구도는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도둑들>과 <베를린>이 생각난다. 확인해보니 이 두 영화 중 <도둑들>과 <암살>의 감독(최동훈)은 동일인물이다. 또 다른 작품인 <베를린>의 감독은 현재 인기리에 상영 중인 <베테랑>의 감독 류승완이다.


굳이 영화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모르고 넘어갔을 것 같다. 그만큼 연상된 영화들이 차별화된 자체 영화스타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 영화의 시대상, 줄거리 등을 제외하고 영화만의 차별화된 스타일은 무엇이 있었는지 필자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통점은 몇 가지 이야기할 수 있다. 세 영화 모두 화려한 액션과 장면이 긴장을 이끌고, 감초 배우의 대사는 간간히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며 분위기를 이완시킨다. 자연스러운 반전은 관객을 별로 놀라게 하지 않는다. 다음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죽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던 인물의 대부분은 죽고, 소수만이 살아남아 다음 일을 도모한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영화들이라서 그런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흐름이 너무 비슷해 보인다.


사실 최근 상영하는 한국 영화들을 보면 이 같은 느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특정 타겟이 있는 컨셉형 영화이거나 화려한 액션 영화다. 두 가지 공식을 벗어난 영화는 대체적으로 손익 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고, 극장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사와 배급사는 잘 팔릴만한 영화를 찾고, 감독 역시 잘 팔릴만한 영화 제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팔릴만한 영화는 보통 잘 팔렸던 영화와 비슷하게 제작되고, ‘잘 팔리는 영화’는 마치 수학 공식처럼 굳어진다. 위에서 언급했던 세 영화 역시 ‘잘 팔리는 영화’의 공식에 맞춰 충실하게 내용을 풀어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굳어진 공식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화에서 관객이 호응할 만한 공식은 이제 어느 정도 나와 있고, 그 익숙함이 주는 재미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이 암기 과목이 아니듯, 영화 역시 공식의 반복 나열에 지나서는 안 된다. 공식을 토대로 응용이 가능해야 한다. 다른 영화와의 차별성은 분명 그 응용 과정에서 드러난다.


평균을 유지한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우리나라 관객의 수준은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관객이 수준이 우리나라 영화 수준의 평균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사실 지금도 약간 넘어선 것 같다.) 2015년도 상반기의 흥행작이 주로 웰메이드 외화였다는 사실과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흥행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한국영화는 흥행성을 버릴 순 없을지라도 차별성은 꼭 챙겨 가야 한다. 동시에 이 문제는 제작 및 배급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관객이 있어야 더 다양한 영화도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 번째 암살 대상 :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상



<암살>은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평했듯이 필자 역시 이 영화가 볼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여자 저격수가 대장이자 히로인인 까닭에 전지현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유독 볼거리가 많았다. 독립군 부대를 나오며 어둠 속에서 일본군을 저격하는 장면이나 까페 미라보에서 커피를 처음 마시며 하와이 피스톨을 만나는 장면, 깨진 안경을 다시 맞추기 위해 백화점에 등장하는 장면 등. 특히 잠깐 나온 백화점은 많은 블로거들도 언급할 만큼 꽤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전지현을 중심으로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 또한 볼거리를 넘어 생각할거리다. <암살> 이전까지의 독립운동가는 주로 남성으로 표현되었고,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소 수동적인 여성으로 등장했다. 독립군의 식사와 바느질을 맡아 하거나 심부름, 혹은 정보원 역할을 하는 등 일부분을 담당할 뿐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주로 술집 마담이거나 술집 아가씨(혹은 기생)였으며, 전통적인 밥 짓는 여성상 혹은 남성을 홀려 정보를 빼내는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필자 역시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단 매체를 통해서 접해본 적이 없었고,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는 늘 수면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살>에서는 대장인 안옥윤이 등장하고, 친일파인 강인국의 아내이자 안옥윤의 어머니인 여성 독립운동가 안성심이 등장한다.(그러고 보니 안성심으로 등장한 배우 진경은 영화 <베테랑>에도 출연한 인물이다.) 안성심의 존재는 초반부에 반짝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친일파인 강인국 앞에서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독립군을 숨겨줬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밝힌다. 또한 신고를 하겠다는 남편을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 뿐인가? 독립운동가의 도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보하기도 한다. 아주 담력이 큰 여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성심 역시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벗어나자마자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옥윤은 안성심에서 더 나아간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안옥윤은 4발의 총알로 4명의 일본군을 맞추는 명사수로 등장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임무를 받아 그녀는 당당히 대장격을 맡기까지 한다. 작전을 세우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였다면 다른 남성 독립운동가의 작전을 수용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였겠지만 안옥윤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나아가 작전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멤버인 황덕삼과 속사포가 초반에 망설이거나 생계형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적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을 부각시키기 위해 초반부에 굳이 남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속사포와 황덕삼을 낮춘 것은 아쉽다. 물론 그들은 영화 내에서 감초 같은 역할이므로 콩트 같은 상황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두 남성 독립운동가를 희화화해 상대적으로 높인 안옥윤의 여성 독립가로서의 입지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 다시 내려가고 만다. 하와이 피스톨과 염석진 옆에서의 안옥윤을 보라. 그녀가 변장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해도 존재감은 한층 작아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의 입지가 기존과 비교했을 때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거짓 고백 앞에서 흔들리다 결국 아버지를 쏘지 못하는 안옥윤의 모습을 보라. 결국 강인국을 처단한 것은 하와이 피스톤이다. 치렁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부케총을 쏘는 모습은 또 어떤가. 강렬한 색채의 효과와 예술적인 장면은 분명 좋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남성 독립운동가의 몫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의 위치가 부각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아쉽다. 그래도 안옥윤이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등장과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가상에서 더 발전했다는 점에는 큰 의의를 두고 싶다.




* 네 번째 암살대상 : 안옥윤과 미츠코 사이에 선 나, 혹은 누군가


필자는 <암살>를 보고 나서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하필 70주년 광복절에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쌍둥이인 안옥윤과 미츠코라는 인물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안옥윤-미츠코 자매는 얼굴만 같을 뿐, 그 외의 공통점은 없다. 그런데 문득 그 둘에게서 필자 스스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얼굴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다음 대사를 살펴보자.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었다고.”(안옥윤)

“나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좋아해. 그런데 넌 안했으면 좋겠어. 경성에선 다 이렇게 살아.”(미츠코)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과 친일파 아버지를 둔 부르주아 여성 미츠코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반된 입장차를 보인다. 그러나 닮은 외모 때문인지 두 사람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각각의 인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두려움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안옥윤과 독립운동을 지지하지만 동생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미츠코. 사실 크게 보면 두 사람은 외모만큼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락한 방향을 꿈꾼다. 필자 역시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역사는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득 안옥윤과 미츠코 사이에서 필자는 어디쯤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광복 70주년, 대기업의 건물에서는 태극기가 나부끼고 TV에서는 관련 다큐가 수시로 방영되고 있다. 사실 그래서 광복 70주년에도 달가운 마음보다 슬픈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로 사실 역사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필자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층 더 부끄러워졌다. <암살>의 후반부는 그런 필자,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는 것만 같다. 바로 김원봉의 대사였다.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잊음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필자 스스로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새삼스럽게 더 두려워졌다. 지금 잊혀져가는 역사는 얼마나 많은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필자에게는 가장 아픈 역사인 위안부 문제는 또 어떤가. 필자나 그 누군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문제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그것이 점차 현실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김원봉의 재조명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일본인의 존재 역시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나 필자는 안옥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기에 위 글에서는 생략했음을 밝힌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승수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조안 위피예프스키(JOANN WYPIJEWSKI)

 

나 홀로 집에

 


한 나라가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상스럽다는 건 인정한다. 더구나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사실상 삶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 공통된 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미국인들이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는 데 57(CBS), 60(Fox), 또는 62퍼센트(퀴니피악Quinnipiac 대학)만큼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온 최근 조사는 미국의 상당수가 실제로 멍청하며,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곳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퀴니피악 대학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9퍼센트가 미국과, 대충 끼워 맞춰진 어떤 동맹국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세’라는 낡은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를 부활시키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진지하게 ‘전쟁을 거부하는war-weary[각주:1] 국가’ 운운했고 작년엔 사막에서의 참수를 통해 고객들을 꾀어냈던 미디어 기업들은 의식이 없는 기억상실을 향한 경로를 뻔하게 따르고 있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2월에 온라인으로 공표했다. 한 달 후 자유주의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msnbc는 거의 동일한 언어를 썼다. ‘희미해지는 전쟁 거부: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isis 지상전을 지지한다.’

 

 

반면 인구의 극소수─대략 표준적인 기준에 따라 0.16퍼센트─는 전쟁의 리얼리티에 너무 지치고,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매우 극심해서hyper-acute 잠자리에 들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종종 살아가기조차 힘들어한다. 이들은 오랜 기간 전쟁에서 싸워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군인들이다. 개괄적으로 500000명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모든 군대의 비율로 본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부모, 배우자, 연인, 그리고 아이들 등으로 퍼지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훨씬 커진다. 그 또한 실제보다 적은 것이다. 그건 완전한 영향이 지체될 수 있는 PTSD의 성질을 반영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 혹은 남모르게 고통 받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최소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270만 병사들의 반수는 의학적 감정이나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의 정신적 상흔은 낙인이다. 그들은 또한 고통스런 모순점을 보인다. 병사들은 실제로 죄책감과 분노로 고통 받고 아파하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위안을 다급히 필요로 한다. 반면에 대중으로, 만약 도움이 안 된다면, 상상력으로 정상성을 정의하는 사회는 김빠지고, 요원하고, 진지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성적인 사람, 도덕적인 영혼이 정상이 되고 싶어 할까?

 

 

(전쟁에 대한 – 옮긴이) 외상적 거부Traumatic weariness는 어떤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영웅적이지 않다.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킬레스의 무기력보다는 그의 야만성을, 오디세우스의 눈물보다는 그의 현명함과 모험심을, US Navy SEAL 크리스 카일Chris Kyle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기 보단 ─특히 그의 자서전 American Sniper가 증명하듯─ 필적할 수 없는 살인 기록과 인종주의를 기억한다. 데이비드 핑클David Finkle은 환호를 받았고, 2007년 파병 급증의 일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켄자스 포트 라일리Fort Riley 보병대대에서의 경험을 담아 2009년 출간한 The Good Soldiers 이후로 맥아더 영재상MacArthur genius grant을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동일한 병사 일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전후’ 살아가는 모습을 좇는 2007년의 후속작 Thank You for Your Service의 판권을 샀으나, 영화 계획은 미뤄졌다. 별 다른 행동은 없었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 책은 읽기 힘든harder 전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 책을 읽는 건 곧 인내심의 발현이었다. 폭력으로 인하여 책에 삽입된 전보(戰報)에서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전보는 사건의 처음과 끝을 다루고, 형용할 수 없는 적의 끔찍한 행위들을 나열하는 동안 전우band of brothers의 끔찍한 행위들은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과 로랑 베큐-레너드Laurent Bécue-Renard의 최신 다큐멘터리 Of Men and War에서의 폭력은 군인의 존재 속에 파고들어가고, 감정적인 EFP(아마 ‘폭발 성형 관통자’Explosively formed penetrator의 약자인 듯. 하여튼 참전 군인의 통제 불가능한 정서적 불안을 말하려는 것 같다 - 옮긴이)는 어디서나, 어느 방향으로든, 몇 번이고 배치되어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는 용어는 일찍이 오랜 전쟁에서 쓰였다. ‘Support the Troops’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도시들에선 노란 리본, 잔디밭의 노란 표지판, 풍선, 그리고 자동차용 스티커가 마치 경기가 있는 날의 팀 컬러처럼 나타났다. 전쟁은 마치 하나의 스포츠였고, 사람들은 관중이었으며,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따낸 전투부대에 대한 찬사였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팀의 사기는 상업의 리듬을 따랐다. ‘Support the Troops’는 ‘Buy American[각주:2]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가게 창문, 게시판, 범퍼 스티커에 쓰인 슬로건─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기업이었고, 보안은 제품이었고, 사람들은 소비자였으며, 병사들은 숙련 노동자였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일종의 사례금이었다. (사실상 사업이라기에도 뭐했지만) 기업이 실패하자, 표지판들은 사라졌고, 때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인 ‘Pray for Our Troops’로 대체되기도 했다. 전쟁은 문제시되어왔고, 병사들은 지쳤으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얼마 남지 않은 공허한 에티켓이나 고행쯤이 되었다. 바로 그때 핑클은 시민들 사이에선 다른 문제로 넘어가려는 열망이 있고, 병사들에게는 씁쓸함이 남아있다고 적었다. ‘그들이 내가 겪었던 것을 알았다면,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그런 지랄맞은 소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정확히 똑같은 말을 했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리포터인 핑클은 그 순간의 비애감pathos과 부조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한 외교관에게 2005년 조지 부시Geroge W. Bush 대통령이 예맨으로 ‘민주주의의 수출’ 정책을 깨닫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퓰리처 상을 탔던 연작은 (외교관의) 선의와 (양측 정부의) 잘못된 방향, 그리고 돈, 위험과 중복되는 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The Good Soldiers는 패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은 모두 파탄 직전의 제국의 역사에 대한 에피소드로 읽히지만, 그가 보여준 부조리를 넘어서 이런 제국의 기획들에 대해 작가가 믿었던 것은─그가 중동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 단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무가치한 외국 파트너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서투른 문민 지도자에 의해 실행 됐다고, 혹은 지배와 확장에 대한 더 크고 오랜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털어놓지 않는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가 출간된 이후 인터뷰에서 핑클은 전쟁에 의해 모든 병사들이 끝장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은 적응하고 잘 살고 있다. 그는 힘들어 하는 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인정하고 싶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책은 ‘어젠다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엄밀히 그건 옳지 않은데, 그가 그런 것처럼, 전쟁을 영원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군국주의를 미국의 정책과 문화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책과 책 속 모든 이들은 전쟁의 정치학과 그것이 전쟁 이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것 또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핑클과, 그가 8개월 동안 의지했던 병사들이 겪었던 전쟁은 논리나 논쟁을 벗어나, 오직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만이 있기에, 정치 밖에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또는 그가 썼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전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고, 반면에 그 모든 것을 의미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의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한 Thank You for Your Service은 의미가 소멸될 때, 즉 병사들이 해산하고 그들이 겪은 극한의 경험이 집의 친밀하고 사교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원문 99-102쪽>

 

 

 

NLR32705.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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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 사전에 따르면 war-weary는 ‘전쟁에 지친(피폐한)’정도로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보다는 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것 같아 ‘전쟁을 거부하는’으로 번역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war-weariness를 ‘War-weariness is the public or political disapproval for the continuation of a prolonged conflict or war’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거부하는’이라는 의미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옮긴이) [본문으로]
  2. 미국 정부의 국산품 구입 운동. 또는 그 정책. 1930년 연방법에 따라서 입법화되었으며, 1960년 이래 달러 방위를 위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창하였다. (네이버사전 – 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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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달린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속력을 높이며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귀가 막힌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난 뒤 빠르게 고도를 높일 때 전해지는 느낌과 같다. 비록 그것보단 자극이 덜하지만 그런 먹먹함은 순식간에 답답함으로 바뀐다. 열심히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하품시늉을 한다. 그래야 내이와 외이 사이의 압력차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宇宙人이 될 팔자는 아닌가보다. 지상에서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갈 때 이정도의 먹먹함을 느낀다면, 그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가야하는 우주여행은 얼마나 힘이 들까. 겨우겨우 우주공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귀머거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의 우주여행을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지금은, 진주星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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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 행선지인 진주를 가기 위해 안동에서 열 시에 기차에 올라탔다. 두 시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환승을 한 뒤 또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진주에 도착했다. 환승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은 이유로, 나는 진주성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내일로 여행자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진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한참 여행경로를 짜고 있을 때, 진주가 고향인 동아리 후배 H의 생각이 났다. 남들이 쓰지 않는 소재로 잘도 소설을 써냈던 그는 2년 동안의 대학교생활과 1년 동안의 동아리 생활을 뒤로하고 의무 소방으로 입대를 했다.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진주 바로 옆 D시에 배정이 된 것이 5개월 전 일이었다. 나는 H에게 SNS를 통해 연락을 했다. 군부대가 아닌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H였던 탓에 어렵지 않게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진주 일정인 19일 날 H역시 외박을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H와 진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원래 진주 기차역은 진주성 근처에 있었지만, KTX가 개통되면서 원래 역이 폐쇄되고 시내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새로운 역이 생겼다. H와는 중간 중간 연락을 해가며 진주성 앞에서 네 시에 보기로 했다. 진주역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처럼 꾸며져 있었고 현판엔 또박또박 한글로 진, 주, 역, 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 앞에서 나는 진주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진주나 서울이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았다. 장을 보고 집에 가려는 아줌마, 학원을 가는 학생 그리고 데이트를 하러 약속장소에 가는 젊은 여자까지. 그들 역시 버스를 타고 카드를 단말기에 찍었다. 


농협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그대로 길을 따라가 진주성 쪽으로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H였다. 패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전혀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간편해 보이는 복장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오늘 그가 입고 나온 바나나가 그려진 노랑 티셔츠와 무릎께까지 오는 청바지의 조화도 멋있었다. 여름인데도 짧은 머리를 가리려는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와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여 H에게 말했다.

“네, 형. 근데 소방서가 좀 짜증나요.”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말에 네, 해놓고선 바로 소방서에 대해 불평을 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매표소 앞에서 나는 이천 원을 주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진주 시민인 H는 진주성 입장료가 무료였다. 그는 돈 대신 신분증을 내밀고 입장권을 받았다. 입구 바로 앞엔 누각인 촉석루가 있었다. 잠시 땀도 식힐 겸 그곳에 올라갔다. 그곳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H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12월이었으니, 육 개월 만이었다. H는 진주에 살았지만, 진주를 잘 모른다고 했다. 형, 집에 너무 틀어만 박혀 글을 써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진주성도 마찬가지였다. H는 진주성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가 이랬었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쨌든, H와 나 모두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눈앞이 탁 트이며 진주의 강남(江南)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코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건물이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울의 그것보단 훨씬 적었다. 


진주성 중앙 평평한 곳엔 박물관이 있었다. 상시전시로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이 있었고, 계절마다 전시물이 바뀌는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작가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입장권 안에 박물관입장료까지 포함되어있었는지, 박물관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은 많진 않았지만 전쟁의 처음과 끝까지 그 시간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있었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본 떠 만든 모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었다. H에게 부탁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왠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컷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오른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는 동상은 그 크기가 크지 않았지만 용맹함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진주성 관람을 마치고 나는 H와 함께 그가 친구들과 술을 자주 마시러 갔다는 K대 근처로 이동했다. 방학이기도 하고, 시간도 일러서 문을 연 술집이 몇 개 없었다. 골목을 돌다가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곤 그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니 좀 더 진솔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H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H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나의 것보다 전혀 쉽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라든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긴 가족사이의 갈등.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H가 건강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제 3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H가 자신의 문제들을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

술을 먹는 중간, 동아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 역시 H와의 통화에 즐거워했다. 우리는 안주 하나를 더 시키고 먹은 뒤 술집을 나왔다. 


나는 원래 일곱 시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술집을 나오지 여덟 시가 넘었다. 다행히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밤 버스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진주성이 있는 시내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열 시 버스표를 샀다. 아직 버스 시간까지 한 시간 이상이 남아, H와 나는 다시 한 번 진주성에 가보기로 했다. 아까 먹은 안주와 술을 소화시킨 다는 명목도 추가하면서. 


도로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거리가 뿌옇게 됐다.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오면서 거리는 안개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짧아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진주가 ‘진주’가 아닌 ‘무진’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무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김승옥의 소설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는 불투명한 연기로 가득 찼고, 차들은 그 연기를 뚫으며 나아갔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난 뒤, 나는 그것이 소독차 때문에 생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소독 연기가 무색무취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진주는 아직 이십 세기의, 그런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던 것은, 여섯 시 이후의 진주성은 입장이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입장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진주성 자체는 서울 도심에 있는 창경궁이나 경복궁과는 다르게 밤에도 시민들을 위해 개방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촉석루와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재들은 문을 꼭 걸어 잠갔다. 해가 완전히 지자, 진주성 곳곳의 가로등이 켜졌다.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진주성 안에는 나와 H말고도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간혹 볼 수가 있었다. 진주성은 지주 시민들에게 그들의 도시에 있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친근한 산책코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H도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안 듯 신기해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진주의 야경 역시 멋있었다. 저 멀리서는 다리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드리운 어둠이 건물에서 켜진 빛과 어우러지면서 그대로 진주 남강에 투사되었다. 날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달도 보였을 텐데, 지금쯤 동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태풍이 못내 아쉬웠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나와 H는 다시 진주성을 나왔다. 진주성 바로 앞에 12지신을 등불로 만든 상이 있었다. 나는 말 앞에서, H는 개 앞에서 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H와 악수를 나누며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 다음 휴가 땐 서울 올라와. 계속 고생하고. 


버스는 열 시에 맞춰서 진주를 출발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 나는 내 몸통만한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편안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의 첫 비를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맞았다. 청량한 비를 가로지르며 버스는 부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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