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9일 오전 11시. 가을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았다.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을 특별열람하기 위해서다. 

 

충무공 장검은 1594년 4월에 제작되어 이순신 종가에 전해 내려온 쌍칼로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라는 명문이 칼에 새겨져있다. 칼에 새겨져있는 명문도 유명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2m에 가까운 칼의 길이다. 이 길이는 ‘이순신 천하장사설’을 유포하게 하였는데 이순신 장군은 힘이 세서 2m나 되는 칼을 뽑아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칼은 이순신 장군이 실전에 사용하지 않고 의장용으로 사용했다 알려져 있다.

 

장검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도(刀)’인데 왜 ‘검(劒)’으로 통칭하는지 지적하는 이도 있는데 이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장검(長劒)’으로 명기돼 있어서 검으로 불리게 됐다한다. 조선시대에는 ‘도’와 ‘검’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지 않았기에 ‘검’으로 표현된 것 같다.

  
이 날 많고 많은 이순신 장군의 유물 중에 충무공 장검만 열람 신청한 이유는 혈조(血漕 : 칼날에 낸 흠)에 칠해진 붉은 페인트가 잘 지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에서 재질분석과 보존처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재질분석과정에서 근현대 안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소위말해 ‘페인트’칠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이충무공 장검의 합성수지 도료를 제거”하겠다고 밝히며 “이충무공 장검의 혈조 부위에 칠해진 합성수지 도료(페인트)는 1969~1970년 당시 기존의 퇴락한 안료를 제거하고, 합성수지 도료를 도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혈조에 붉은색 페인트를 제거하기 전 충무공 장검의 모습(사진출처 : 본인촬영)

 

열람 시간에 맞춰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있는 사무동에 들어갔더니 담당 학예사가 얼굴을 본 척 만척하며 “저기 앉으세요. 아. 너무 바빠서”라는 말과 함께 나가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디에 앉으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방문자들은 모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멀뚱멀뚱 서 있자 이번에는 담당 과장님이 나와서 수장고 쪽으로 안내해주셨다. 

 

특별열람이 처음이 아닌 필자는 사실 무척이나 당황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가면 일단 문화재를 볼 때 방해가 될 짐을 내려놓을 장소를 이야기해준다. 방문자들이 가져온 짐을 모두 내려놓고 나면 담당자가 공식문서에 적혀있는 방문자 명단과 방문한 사람들의 신분증을 대조한다. 모든 사람의 신분 확인이 완료되면 문화재 사진 촬영 및 사진 활용 규정에 관해 설명을 듣고 관련 규정 준수 서약서에 서명한다. 그 후, 가져갈 수 있는 물건만 손에 들고 (메모할 종이와 연필을 박물관에서 따로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특별열람을 하러 간다. 통상 이러한 절차를 거친 후 열람실에 들어가게 되는데 왜 그런 과정이 없는지 매우 의아했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질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은 수장고에 들어갔을 때다. 문화재에 대한 특별열람 시에는 학예사가 장갑과 마스크를 같이 준비해놓는다. 그러나 이번 열람에는 마스크밖에 준비해놓지 않았다. 심지어 칼은 보여주고 칼집은 수장고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열람 신청을 한 대표자는 보물 326호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 15대 종부였다. 소유주가 자신의 물건을 보러 간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만 보라며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필자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별열람의 경우, 문화재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후 그동안 몰랐던 사실은 없는지, 알고 있던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갖게 된다. 

 

미국 서부 최대 박물관인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문정왕후 어보 특별 열람을 할 때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문화재를 살펴보다가 어보 하단 측면에 ‘육실 대왕대비(六室大王大妃)’라고 붓글씨로 쓴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일본 천리대학교 박물관 특별 열람 시에도 제공된 장갑을 끼고 화살통을 살펴보다가 박물관 측도 모르는 화살을 발견하기도 했다. 

 

특별열람은 이렇듯 새로운 사실은 없는지 문화재를 꼼꼼히 관찰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특별열람 신청을 하여 문화재를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를 상자 속에서 꺼내서 조심스레 봐야 하는데 이날은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고 그저 눈으로 보게만 했다. 책상 위 상자 속에 있는 칼을 봐야 하니 도무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휴대폰 카메라로 근접 촬영을 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학예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 사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촬영과 관련된 사항은 앞서 말했듯 유물을 보기에 앞서 해당 관의 규정에 다 다르기 때문에 미리 서약서를 써야한다. 혹시라도 미리 요청해야 한다면 특별열람 신청 시에 알려준다.

 

천리대학교에 경우 언론에만 노출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기에 촬영 후에도 당시 특별 열람한 활과 화살 및 화살통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LA 카운티박물관의 경우에는 아예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눈으로 보고 중요한 부분을 직접 스케치해서 나왔다.   

 

사진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필자가 특별열람을 간 것이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롭게 SNS에 올리지 말라는 것인지 언론에 공개하지 말라는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조차 알려주지 않아 충무공 장검의 소유자에게 허락을 받아 당일 촬영한 사진을 공개한다. (휴대폰 사진의 사적인 이용은 안 된다며 DSLR 카메라로 찍는 것은 괜찮다고 했는데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함이 사적인 목적이 아니므로 모두 공개하고자 한다.)

 

 


▲ 장검 확대 촬영(사진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이날 장검을 열람하며 발견한 것은 장검에 붉은 페인트가 조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검의 혈조 부분에는 이상한 무늬로 상처가 나 있는데 그사이에 스며들어 제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충사 측에서 보존처리를 맡겼던 연구소에 질의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문화재청은 2014년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제거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 안료가 확인될 경우 원래의 전통 안료로 칠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기존의 안료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고증을 통하여 원래의 전통 안료를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합성수지도료를 제거한 후 보존처리 하기로 확정하였다.”며 충무공 장검의 붉은 칠을 지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통안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만약 육안으로 확인했던 저 붉은 안료가 붉은 페인트가 다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라면 현대의 보존처리 기술로도 지울 수 없는 혈조의 붉은 칠이 1969년~1970년 사이에 보강을 위해 칠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인되지 않은 걸까?


‘보강’이라는 말은 보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보강했다면 남아있어야 할 전통 안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은 왜 ‘복원’이 아닌 ‘보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붉은 칠이 정말 돼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붉은 칠이 돼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살펴보면 첫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도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과 두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에서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 1969년 발간된 현충사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에 희미하게 관찰되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살펴보자.

 

 

첫 번째, 다른 나라의 칼에 혈조가 칠해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의견이다. 다른 나라에서 발견되는 칼 혈조에 붉은 칠이 발견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렇다고 해서 충무공 장검 혈조에 반드시 붉은 칠이 돼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인과관계가 맞지 않다. 

 

두 번째, 1928년 촬영된 사진을 살펴보자. 혈조에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측에서는 사진 위쪽 칼의 사진만 인용하여 녹슨 칼날의 색상과 혈조 내의 균일하게 나타나는 진한 색상의 대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이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쪽 칼은 칼날과 혈조 내의 색이 같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1928년 촬영된 충무공 장검(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세 번째, 1969년 발간된 현충사 관련 도록에 기재된 장검 사진이다. (필자는 이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관찰되는 사진이 정확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만약 혈조에 무엇인가 칠해진 흔적이 희미하게 관찰된 사진이 컬러였다면 문화재청이 붉은 칠이 칠해져있었다는 근거로 이 사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2014년에 만든 충무공 장검 도록에는 혈조내의 붉은 칠에 대해 언급하면서 1969년에 도록을 만들면서 혈조 내의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는 설명은 왜 발견되지 않은 걸까? 국내에 남아있는 칼 중 혈조 내에 붉은 칠이 돼 있어 유명한 칼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빠졌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다는 설명이 발견됐다면 문화재청은 왜 2014년 국민신문고 답변에서 “현재 장검의 칼날 혈조와 물결문양에 도포된 붉은색 안료의 도포 시점은 관련 자료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확인이 어렵다. 1594년 제작 당시부터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이 어렵다.”라는 답변을 한 것일까?  

 

혈조가 칠해졌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사진 위쪽 칼의 대비를 이야기하는데 아래쪽 칼은 왜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1928년의 사진만을 육안으로만 확인하고 대비가 나타났다고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사진출처 :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

 

 

2014년에 발행한 충무공 장검 특별전 도록에 보면 ‘경인미술관 소장 명대 관제도’를 보면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혈조 부분이 흑백사진으로 보면 마지 뭔가가 칠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조와 칼날에 색이 균일하게 보이는 충무공 장검 사진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채, 흑백사진만 보고 혈조에 칠이 돼 있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혈조에 붉은 칠이 돼 있었는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매듭지어 질 것 같지 않다. 모두 추측성 근거로만 이야기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통안료로 붉은 칠이 돼있었다고 한 들 그것을 붉은 페인트로 복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붉은 페인트 칠을 제거한 것은 420년 전 칼에 현대식 페인트를 칠했기때문이다. 칼에 붉은 안료가 칠해져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그 사실을 잊고 감정소모만 하고 있는 듯 하다.

 

 

▲  충무공 장검 (사진출처 : 본인촬영)

 

 

충무공 장검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칼날이 달의 표면처럼 오돌토돌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필자가 해외에 나갈 때마다 박물관에 전시된 진검을 살펴봤지만 이렇게 칼이 상한 경우는 없었다. 420여 년 전에 만들어져서 종가에 내려온 칼이어서 그렇다고 넘어가야 할까. 그렇다면 500년 전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칼들은 어째서 볼 때마다 깨끗한 모습으로 흰색 검광을 드러내며 반짝거리는 것일까. 그 칼들도 박물관에 전시되기 전에는 무가의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

 

특별열람을 마치고 현충사 직원들과 장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 김에 확인해야 할 문서를 요청했고 문서를 가져온 학예사의 말에서 왜 특별열람 때 그리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장검 관련 문서를 요청한 사람이 장검의 소유주인 종부가 아니라 대리인이었고 국민 신문고에 질의 후 추가 질의를 이메일로 한 것에 대해 기분이 상해있었다.

 

  “제가 사실 그거 때문에 빈정이 상해서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공무원은 처음이었다. 
특별열람을 하기 전 나라를 구한 칼을 본다는 생각에 설렜는데 막상 칼을 보고 나니 칼의 상태에 대한 실망과 칼의 소유주인 이순신 종가에 대한 존중이 보이지 않아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현충사에 가면 이순신 장군을 만나볼 수가 없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사당에 걸어놓은 영정은 복제품이다. 왜 그런지 현충사 과장님께 여쭤보니 빛 때문에 그림 색이 발할까 봐 수장고에 넣어 두었다 한다. 사찰에 기도하러 갔는데 대웅전에 복제된 부처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참배 하러 갔는데 복제품에 참배하는 꼴이다. 그걸 아는 참배객은 없다. 다들 속고 있다.

 

영정의 빛이 바란다는데 당연히 보호해야하는거 아니냐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빛 때문에 손상되면 안 되니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고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도 복제품을 걸어 놔야 하는 것 아닌가.


현충사에 있는 충무공 기념관에 가도 이순신 장군의 유물을 한 점도 만날 수 없다. 전시관에 있는 모든 유물이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전문가가 아니면 다가갈 수도 없이 돼 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반인들이 유리관 밖에서라도 접근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수장고에 넣어버린 것은 아닐까.

 


충무공 장검의 페인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주장이 맞다며 잘못을 지적하는 이에게 가혹하게 대한다. 그러나 그 전문가들이 하는 주장에는 모두 “추측”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충무공 장검은 오늘도 추측에 포장된 채로 수장고에 잠들어있다.   

 


90년대, 북한에 닥친 재앙 수준의 위기


북한 전 외교관인 태영호의 탈북 이후로, 정부부처부터 수많은 언론사들까지 북한에 드디어 망조가 보인다고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단은 지극히 편협하다. 1990년대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체제 위기를 겪었으나, 이를 이겨냈다. 이것이 왜 가능했는지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지금 창궐하는 북한붕괴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더불어, 북한붕괴론이 얼마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있다.


1990년대로 돌아가보자. 민주화 운동과 극심한 체제 위기를 겪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1989년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전통적인 북한의 우방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89년 6월에는 중국에서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심지어 중국은 7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는데도! 1990년에는 독일이 통일되면서 동독은 자연스레 붕괴되었다.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91년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마침내 해체되었다. 북한은 몇 년 사이에 세계에서 유례없는 외딴 나라가 되어버렸고, 이 즈음 북한붕괴론은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위협을 느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1994년 김일성 사망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김정일 체제가 안정적일지, 김일성의 죽음이 연사인지 피살인지 등을 다루는 기사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뿐만 아니었다. 북한은 80년대부터 전면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경제계획 실패와 각종 자연재해로 유례없는 경제난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며 외부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경제 상황은 하루게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중국과의 관계도 89년 중소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상당히 껄끄러웠는데, 중국은 한 발 더 나아가 92년에 남한과 수교를 맺어버렸다. 북중관계는 그야말로 끝장난 지경이어서, 북중 접경지역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이라는 상황은 수습되기는커녕 끊임없이 악화되어 갔다.


더욱 엄청난 문제가 터졌다. 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것이다.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에는 배급제가 붕괴하고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어, 북한 당국의 주민에 대한 법적·물리적·경제적·사상적 통제력이 상실되다시피 했다. 몇 십 만 명이 아사하기 시작하고, 주민들은 당국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체적으로 살 길을 찾기 시작했다. 80년대까지는 남에서 북으로 가는 탈남 현상이 많았는데, 이 시기 이후에는 탈남 현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규모 탈북 사태가 벌어졌다. 김일성 사후 북한 지도층 내부에서 김정일이 무자비한 숙청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이는 김정일 정권이 불안정하며 지도층의 불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었다. 97년에는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마저 남측으로 망명하며 북한붕괴론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북한이 처했던 상황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에는 사회주의 국가 붕괴라는 실제적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 모든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북한 또한 곧 붕괴하리라 예측했다. 그 어떤 학자나 정치인도 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북한은 살아남았다.


북한이 살아남은 이유


도대체 북한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주체사상의 힘이다.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이 기치로 삼았던 사회주의(맑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등)과 북한의 주체사상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맑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등은 자기만의 영역과 사상을 공고히 구축했음에도, 맑스식 사회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조차 맑스주의를 뛰어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맑스식 사회주의라는 틀을 과감히 뛰어넘었다. 맑스식 사회주의 이전에 있었던 다른 사회주의들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북한은 맑스주의를 과감하게 비판하며 주체사상을 치켜세웠고, 이를 통해 어버이 수령과 어머니 당에 대한 충성심은 종교적 신앙 수준으로 치달았다. 부모를 축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는 상호감시체계다. 주체사상이라는 명확한 삶의 이정표가 세워진 가운데, 북한은 주민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하여 주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상호감시체계로는 '생활총화제도'가 대표적이다. 북한 주민들은 학생, 직장인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이 때 자기반성과 더불어 필수적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하는데, 이 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알고 있음에도 지적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지적하거나, 이른바 반국가적 행위를 포착해내면 큰 보상이 뒤따랐다. 주체사상이 생각을 묶는 족쇄였다면, 상호감시체계는 행동을 묶는 족쇄였다.


세 번째는 김정일의 지도력이다. 90년대 당시 북한이 처했던 상황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엄청난 충격의 연속이었다. 재앙처럼 닥치는 위기에 맞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려면 정치력 이상의 능력이 필요했고, 김정일은 이를 정확히 간파했다. 김정일은 마치 악단의 지휘자처럼 북한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사회주의국가의 붕괴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으로 철저하지 무장하지 못한 가운데 불순한 책동세력이 활개쳤기 때문이므로 사상을 더욱 강화하라고 주문했다. 91년에는 남측과 함께 UN에 동시가입하여 국제적으로 개별국가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가침조약(91년 남북기본합의서)을 맺어 동요하는 지도층을 달랬다. 그리고 최악의 경제난에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시절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했던 시절을 일컫는 말이다. 즉, 어버이 김일성이 인민을 위해 감내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견디자는 감정적인 호소를 북한 주민들에게 던진 것이다. 김정일은 이외에도 주체사상을 발전시킨 선군사상을 계발하고, 법체계를 정비하고, 상호감시체계를 통해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고, 필요한 경우엔 정치적 숙청도 서슴지 않으며 혼란을 차근차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한은 살아남았다.


오늘날 김정은 정권이 불안정하다고 말해도, 김정일 시대만큼 불안정할까? 억압적인 정권이 또 다른 정권으로 바뀔 때 지도층의 이탈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다. 90년대의 북한이 위기를 겪어내게 했던 힘인 주체사상과 상호감시체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김정은의 지도력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김정일 사후 지금까지는 지도력이 불안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북한보다 먼저 붕괴할 북한붕괴론의 실체


물론 북한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과 북한의 역사를 살펴보면 북한이 망하리라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북한붕괴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공부 좀 하라!'고 말해주고 싶으나, 북한 전문가들이 북한 역사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다 알고 있다. 북한이 살아남았으며,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란 사실을.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북한은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우리나라 국민들이 계속 믿어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왜 핵을 개발하는지, 왜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대책없이 '비핵화'만 말하는 것, 혹은 도대체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 구체적인 청사진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채 '통일은 대박' 따위의 속 빈 구호를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남북관계나 북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나 전망은 최대한 흐리고, 북한 체제에 균열이 보인다는 자극적인 소문을 퍼뜨리면서, '악마국가 북한'과 '마침내 승리할 대한민국'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프로파간다를 이데올로기화하고, '이대로만 가면 북한은 끝이다!'는 식의 근본없는 안도감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같은 국가적 무지(無知)를 강화하는 이 이데올로기만 있으면 북한붕괴론은 영속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특정 세력'은 이를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는가?


세계적인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은 한 인터뷰에서 "북한붕괴론이 북한보다 먼저 붕괴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 말을 듣고 "북한붕괴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북한붕괴론보다 먼저 붕괴할 것"이라는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후자가 더 매력적이다.

추재훈



지난 2월부터 급격하게 가속화된 사드 논란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왜 사드에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상에 사로잡혀있다. 추재훈


사드가 왜 불필요한지는 명확하다사드가 왜 불필요한지는 명확하다. 전술적으로, 첫째로 사드는 미 본토 방어용 MD체계의 일환이다. 미국 태평양사령관, 미사일방어국장 등은 이미 수 차례 이 사실을 미국 의회에서 확인했다. 둘째로, 북한이 한국에 미사일을 쏠 정도의 전면전이 벌어지면 사드는 이미 필요 없다. 북한은 먼저 수천 문의 야포, 중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으로 이미 남한 지역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안보주의자들이 걱정하는 미지의 땅굴로, 수십만 명의 인민군이 이미 침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로, 북한이 한국을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형 미사일로만 공격할 필요도 없다. 최근 북한이 신이 나서 개발하고 있는 SLBM이 그 대표적인 증거다. 마지막, 사드는 한반도라는 야전의 최전선에 설치하기에는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번의 어설픈 실험만 거쳤을 뿐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드의 정치적인 효과다. 사드는 중국과 북한을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사드를 통해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냉전적 갈등구조가 심화되면, 중국은 북한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드는 국내의 북한붕괴론을 붕괴시킨다. 필자는 북한붕괴론을 믿지 않지만, 북한붕괴론을 위해서 강력한 대북제재가 필요하다는 논리 자체는 이해한다. 이를 위해 4차 핵실험 이후 간 열심히 노력했던 것도 안다. 그런데 북중동맹이 강고해지면 대북제재는 효과를 잃는다.


북한에 대한 강경일변도는 보수의 정체성과도 같다. 북한 카드는 지금까지 지금껏 여권을 단단하게 결집시켰던 핵심 카드다. 그런데, 사드는 이마저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이토록 엉망진창이다. 외교적 이익도 없는데, 집권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마저 포기하면서, 뭘 위해서 사드를 추구하는가? 그녀의 특성을 보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그녀는 독재자의 딸이다. 독재자는 국가를 사유화한다. 유년기부터 자아를 확립하는 청소년기까지 독재자 슬하에서 자라며, 그녀는 국가운영에 대한 독재자의 사고방식을 깊게 내면화했다. 유신정권 붕괴 후 오랜 기간 칩거하다가, IMF사태로 정계에 나선 이유도 그와 같다. 아버지가 어떻게 일구어놓은 나란데,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일구어놨다는 생각도 틀렸지만.


, 그녀는 보수의 상징이다. 한국의 보수는 정치·경제적 지향성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이념으로 뭉친 집단이다. 친일에서 독재로 이어지는 보수 집권의 역사 속에서, 보수는 안보위기 결집효과를 위해 북한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반북=대한민국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이 형성되었고, ‘평화통일과 같은 진보적 담론마저도 흡수해버리며 반북 이데올로기는 확대·발전했다.


, 그녀는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공감능력도 없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아버지에게 충성하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것을 그녀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총격 피살과 배신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혼자 견뎠고, 다른 사람의 슬픔 따위는 자신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리더는 팔로워에게 일정한 권한과 책임감을 부여해야 하는데, 남을 믿지 못하는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세심한 부분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이유다. 독재자는 자기 자신밖에 믿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대통령이 7월 14일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국무위원(과 국민)들에게 사드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세월호가 눈물로 가라앉을 때, 애초에 공감능력이 없는 그녀는 공감할 줄 안다는 위선마저 내다버렸다. 사드를 배치하면서는 보수의 전통적인 논리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대북제재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안하고, 비핵화와 통일이라는 속 빈 레토릭에만 지겹도록 매달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명령과 복종의 일사분란한 체계 속에, 온 구성원이 똘똘 뭉쳐, 북한에 맞서 싸우며 번영하는, ‘나의 대한민국’이라는 허상이다. 그녀는 이렇게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나의 대한민국’ 안에는 아무런 신념도, 철학도, 지혜도 없다. ‘민혁당’의 슬픈 역사와 ‘하얼빈’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를 말하며, 국민은 여전히 영도가 필요한 자식들이라 믿고 가르치려 드는 그녀에게, 민족이나 역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그녀의 대한민국은 보수의 대한민국과도 다르다. 보수가 건국절을 말하는 이유는, 친일과 독재의 과거를 뒤덮고 북한을 부정하며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프레임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녀가 건국절을 말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아버지가 일으키고 자신이 유지하는 사유물이기 때문이다.


사드는 대통령에게 최초에는 방어용 체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드 논란이 곪아서 터져버린 지금, 사드는 더 이상 국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의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사드마저 포기해버리면, 대통령의 ‘나의 대한민국’은 무너진다. 이것이 그녀가 사드에 집착하는 이유다. 역사는 독재자를 잊었지만, 그녀는 독재자를 잊지 않았다.





사드와 핵실험의 양면성



동북아시아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북한이 판세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정권유지’라는 목표에서 단 한발자국도 떨어져있지 않다. 세상에 북한만큼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나라도 없다. 몇 년에 한 번 정부가 바뀌는 민주국가에 비해 관료의 변화가 극히 적은 북한은, 수십 년 간 외교의 장에서 온갖 경험을 겪은 관료들로 중무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주체사상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떠받들고 있다.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드는 김일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덤이다. 북한이 예측불가한 나라라는 생각은 오판이다. 그들이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면, 그들의 과거와 주체사상만 들여다보면 될 정도로 일관성있는 나라다. 따라서 그들이 일으키는 외교적 기획이 얼마나 잘 설계된 것인지 아는 주변국은 북한의 이상징후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동북아시아의 21세기는, 북한 주변국들이 어떤 식으로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당근을 내밀며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과거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동북아 냉전적 갈등구조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햇볕정책의 시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햇볕정책에 대한 직접적 옹호가 아니라, 사실이다. 여기에 북한은 계속 싸워댔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 북한이다. 핵개발, 미사일실험, 경제협력 등, 북한이 지금껏 취했던 대외적 기획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판세를 좌우하는’ 동북아 법칙을 최대한 활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핵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핵실험은 대외적 효과는 테러에 치를 떠는 미국을 위협하여 미국을 아시아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이에 반발하는 중국의 뒤에 잠시 숨는 것이다. 즉, 한미일, 북중러의 냉전적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숙명적 형제이자 적국인 한국이 자신과 협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통합하고, 정권의 위상을 드높이고, 필요에 따라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음은 옵션이다. 한국이 남북경협을 중단하면 어떠랴, 어차피 그 카드는 아직 설익은 카드다.


한 손에 핵을 쥐고 있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 안정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 협상을 통해 불가역적으로 정권의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 북한의 노림수다. 이러나저러나 핵은 북한에게 꽃놀이패다. 간헐적으로 동북아를 뒤흔드는 핵실험을 보면 북한이 보인다.




이제 눈을 남쪽으로 돌려 사드 배치 문제를 보자. 성주에 배치된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는데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하다. 조금 양보해서,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고 치자. 북한이 남쪽으로 별 공격 효과도 없는 고고도미사일을 발사할 정도의 상황이 발생했다면, 수천 문의 장사정포와 생화학무기가 이미 한반도 남쪽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핵폭탄도 터진 뒤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사드배치 논란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사드배치의 대외적 효과는 미국패권에 치를 떠는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을 한반도 문제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미국 뒤에 쏘옥 숨는 것이다. 즉, 한미일, 북중러의 냉전적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숙명적 형제이자 적국인 북한이 신이 나서 SLBM을 발사하는 것이다. 대내적으로 국민은 극단으로 찢어지고, 정권의 위상은 땅으로 추락하고, 필요에 따라 불순세력을 이용할 수 있음은 옵션이다. 중국이 대북제재를 중단하면 어떠랴, 어차피 그 카드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던 카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 한국… 정부… 대통령이다. 사드배치, 개성공단 중단, 위안부협상 등, 대통령이 지금껏 취했던 대외적 기획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판세를 좌우하는’ 동북아 법칙을 최대한 활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3년은, 미국과 일본이 어떤 식으로든 한미일 공조체제로 한국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당근을 내밀며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한일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위안부 협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이다. 여기에 한국은 홀랑 넘어갔다.


세심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한 달에 한번 꼴로 사고를 내는 한국 정부는, 정치의 장에서 도통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관료들로 중무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대통령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떠받들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역사에 대한 처참한 지식수준은 덤이다. 한국의 외교정책이 예측불가하다는 생각은 오판이다.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면, 한국 정부와 대통령만 들여다보면 될 정도로 일관성있는 나라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일으키는 정치적 파문이 얼마나 허술하게 설계된 것인지 아는 국민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한국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정부가 판세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 안정’이라는 목표에서 단 한발자국도 떨어져있지 않다. 세상에 한국 정부만큼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정부도 없다.


핵실험이 북한 정권의 국가적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는 만큼, 사드는 한국의 대통령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그간 개헌에 대한 논의는 정치 문화나 시민 의식 등 사회 환경적 요인의 변화를 모색하는 방안과는 절된 채, 제도만능주의에 입각하여 대통령제냐 의원내각제냐 와 같은 ‘통치구조의 외형적 변화’에만 과도하게 집착해왔다. 또한 개헌에 대한 주장을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세력 결집을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복기해보면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권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도적 개헌을 논의하기에 앞서 합의 문화, 당론에 대한 의원들의 자율성 보장 등과 같은 성숙한 정치 문화가 전제되지 않는다거나 헌법 조항이 대중의 인식 변화와 조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통치 구조의 외연이 바뀐들, 실질적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필자는 개헌을 통한 통치 구조의 개편 자체에 대해 부정적 이라기보다는 기존 대통령제가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든 여러 제도와의 부조화가 먼저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여 민주주의를 제고하기 위해 통치 구조의 개편 같은 하향식 개헌도 필요하지만 선거제, 경제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기본권 강화, 헌법 재판소의 권한 제한 등 ‘상향식 개헌’의 당위성 역시 주장하는 바, 이에 대한 개헌 논의도 추후 전개할 것이다.

 

대통령제의 성공 가능성은 중임제, 결선투표, 총선대선의 동시선거에 달려있어

 

혹자는 현행 대통령제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대통령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보다는 ‘실정에 따른 책임성’을 임기 내에 묻지 못한다는 점이 현행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제도적 원인은 5년 단임제에 있다. 국정 전반을 파악하는 데 2년이 걸리고 제대로 일 좀 해보려면 어느덧 레임덕에 빠져있다. 임기 내 실정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으니 임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여론이 빗발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 수사를 시도하면 정치 보복으로 인식한 구 세력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등 정권 초마다 이전 정권에 대한 심판을 하니 마니로 온 나라가 소모적 정쟁에 휩싸인다.

 

“뭐? 그 분이 4년을 더 할 수도 있다고?”

헌법 제128조 2항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중임제로 개헌을 하더라도 박 대통령을 위한 ‘노래방 추가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이와는 달리 4년 중임제는 중간 선거로 재신임을 물을 수 있으니 정치의 책임성이 제고되고 대통령이 좀 더 신중한 국정 운영을 하게 된다. 또한 중간 선거에서 승리하면 최대 8년까지 집권가능 하므로 대통령은 단기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무책임한 정책을 남발해 차기 정권에 부담을 주기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정책 구상에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임제를 통한 원활한 국정 운영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총선 시기도 조정이 필요하다. 한국은 대선(5년)과 총선(4년)의 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총선이 대통령 임기의 중간 시기에 치러질 경우, 유권자들은 대체로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 심리로 야당에 표를 주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여소야대의 분점정부 출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새로 출범한 정권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집권 초기에 총선을 치르는 동시선거는 분점정부의 출현을 방지하고 대통령과 의회 간 극한 교착 상태가 야기하는 국정 마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아울러 대선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한 명도 없을 경우, 1위와 2위의 2차 투표를 진행하는 결선제의 도입으로 당선자의 ‘외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결선투표의 가장 큰 장점은 2차 투표가 진행될 경우, 양 최종 후보가 1차 투표에서 탈락한 후보들의 정책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소수 정당의 정책이 차후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다수제가 야기하는 승자독식을 제어하는 한편 합의와 소통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이다.

 

대표성, 투명성,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회 및 선거 제도 개헌의 목표여야

 

현행 단원제를 미국이나 영국같이 상원과 하원을 따로 두는 양원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구상하는 양원제 개헌에 따르면 미국식과 비슷하게 상원을 각 지역구마다 동(同)수의 지역대표, 하원을 인구수 기준으로 선출한다.

 

양원제의 효용을 따지기 위해서 우선 선거 제도와의 연관성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간 한국은 총선 때마다 선거구 획정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근래에는 수도권의 의석수가 인구수에 비해 과소대표 된 반면, 농어촌 지역의 지역구는 상대적으로 과잉대표 되었기 때문에 선거구를 재편해야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농어촌 지역의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해당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이 이어지면서 도, 농간 갈등 문제로 비화되었다.

 

다행히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 재획정 안에 대해 여야가 가까스로 타협했지만 불만은 누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 의장의 양원제 개헌안은 의회의 이원화를 통해 농어촌 지역의 정치 소외를 막고 인구수에 따른 대표성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의 지역구를 늘린다한들, 사실상 지역의 몇몇 토호 정치인들이 장기간 독식하고 있는 지방 정치 판도를 감안할 때, 선출된 의원들이 진정 1차 산업 종사자들을 대표하는지 강한 의문이 든다. 농어촌 지역의 대표성이 우려된다면 굳이 양원제를 하지 않아도 직능비례대표를 도입하는 것이 실효성이 더 커 보인다.

 

더구나 당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경직적인 정당 문화를 판단해보건대, 상원과 하원의 권한 배분 문제와 여야 대립 구도가 중첩될 경우 단원제보다 심한 정치적 불안정성이 예상된다. 특히 양원제로의 전환은 의원 정수 증가를 요하는데 이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강하기 때문에 의원들의 특권 내려놓기를 통한 대국민 설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한국의 단순다수제(득표 1위만 당선), 소선거구제(1지역구, 1의석)로 대표되는 한국 선거제도 상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 구도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유권자들의 이념, 정책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 지역구에서 복수 이상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중선거구제 혹은 대선거구제로 전환하고 비례대표의원 수를 늘린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투명성이 결여된 공천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거나 정책으로 경쟁하는 건전한 정당 정치 문화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금권 정치와 정당 난립만을 초래할 것이다.

 

경제 민주화 성공을 위해서는 사회적 기본권의 확대가 필요

 

저번 대선의 화두였던 경제 민주화는 헌법 제119조 2항에 근거한다. 해당 조항에는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자유시장 경제질서를 채택하고 있는 현행 헌법에 이와 같은 2항을 추가한 이유는 견제 없는 시장의 지나친 확장이 독점과 불평등을 야기해 공동체가 기저에서 무너지고 사회적 기본권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헌법에서 말하는 기본권이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말한다. 여기에는 행복 추구권, 양심의 자유, 재산권, 사회권 등 여러 기본권을 포함한다.

 

문제는 기본권 행사로 인해 다른 누군가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사용자와 피고용자 혹은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계약 문제는 ‘재산권 행사의 자유’와 ‘생존 및 거주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일상에서 충돌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사회 통합과 경제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행복추구권 및 사회권 조항의 법률적 구체화 방안과 이에 필요한 입법부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개인의 자유를 기본권에서 인정한다 한들 실질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자유의 조건’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회적 요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부자유로 귀결된다. 가령 악덕 기업주에게 근무조건의 개선을 주장하는 어떤 피고용자가 본인이 피하고 싶은 선택지들만 열려있는 경우(해고or 가혹한 근무조건), 이런 상태를 자유롭다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자유란 무엇인가』, 사이토 준이치).

 

누구든지 보편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 행복 추구권과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민주화의 실현에 기여한다. 따라서 대기업의 독점을 견제하고 생존과 거주 문제와 직결된 임차인들의 행복추구권 및 사회권을 보다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헌법 조항 신설이 필요하다. 하지만 행복 추구권과 사회적 기본권 조항 자체를 근거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하기는 어렵다는 판례가 다수이다. 대체로 헌법재판소는 기본권이 입법자의 법률 제정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고 판시해왔다.

 

“헌법을 통한 기본권 보장은 의회의 법률 제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

일하는 국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정당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적극적으로 기본권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그러나 파행이 거듭되어 온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은 수두룩하다. 설령 관련 법률이 있다하더라도 사회권을 보장하기엔 갖가지 예외조항규정(ex: 해고의 제한, 가산수당지급 의무 대상에서 제외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이 추가되어 실질적인 권리 보호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경제 민주화를 위한 기본권 확대 여부는 어디까지나 입법부의 적극적 의지가 중요하다. 헌법 조항의 신설과는 별개로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인력을 폭넓게 충원할 수 있는 한국 정당의 개방성 확보 등 정당 조직의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한 이유이다.

 

헌법 재판소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 대의제와 합의 정치 문화 확립의 지름길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손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통성이 떨어질뿐더러 재판소장을 포함한 9인의 재판관 모두 대통령에게 최종 임명권이 있다는 점에서 행정부를 제대로 제어하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특히 정당해산심판 권한은 헌재재판관 선출의 비민주성과 권력의존성을 고려하면 그 남용 소지가 크다. 작년에 해산된 구 통합진보당에 대한 헌재의 정당해산결정을 살펴보면 정당해산의 근거가 되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기준’에 대한 해석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불량 정당’을 정당해산이라는 사법 권위로 분쇄하기보다는 국민이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도록 제도권 정치의 장에 묶어두면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적 퇴출’을 유도하는 것이 대의제의 원칙을 살리고 반민주적 정당의 극단적인 ’지하 음성화’를 방지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출처: 딴지일보)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 합의의 정치 문화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극한 정치적 대립에 봉착한 경우, 정쟁에 지친 대통령과 의회가 직접 헌법 재판소에 판단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국민의 손으로 뽑히지 않은 9인에 의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는 사례가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타협과 설득을 포기하고 의회를 건너뛴 채, 결국 소수의 헌법재판소관들에게 최종 결정권을 쥐어주는 이른바 ‘사법 독재’ 양상은 개헌을 통해 견제해야 한다.

 

결론: 성공적인 개헌을 위해서는 사회, 문화, 환경 등 장기적 토대 마련이 필요.

 

투명하고 전문성을 갖춘 정당 문화, 합의와 숙의가 일반화 된 시민 의식 같은 문화적 조건 없이 단순히 제도적 개헌만으로 가시적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헌법의 정비를 통해 시민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는 긴 세대의 축적과 인내심을 요한다. 선거 승리만을 의식하는 일부 정치권 인사들과 당장의 눈에 띄는 변화를 갈망하는 현 세대의 ‘기분풀이 식 개헌 주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통치 구조의 안정성에 기여하지 못할뿐더러 다음 세대에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다.

 

물론 개헌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개헌을 통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바란다면 제도적 수정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헌법 가치가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아가 실생활에서 실질적인 권리 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제도적 개헌을 통해 공동체에 장기간 축적된 정치, 사회 문제를 일소할 수 있다는 만능주의적 시각을 경계하는 이유이다.





32℃. 서울은 아직 벚꽃조차 만나지 못했는데 나하(오키나와 현)는 4월 초부터 이미 달아올라있다. 택시 기사의 하늘색 반팔 소매, 넘실대는 야자수 그리고 폐부와 맞닥뜨리는 습한 공기로 하여금 이곳은 일본 본토라기보다는 태평양에 놓인 전형적인 남국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다에 둘러싸인 오키나와는 지리적 특성과 달리 고유한 음식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오키나와 소바(沖縄そば)’가 대표적인데, 내가 오키나와에서 처음 접한 음식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여행 책마다 반드시 먹어보라고 하는 음식인데, 솔직히 책자의 권유보다는 찌는 날씨가 한 몫 하게 된다.

진하지만 시원한 장국과 투박하지만 호쾌하게 목 뒤로 넘어갈 수 있는 면타래. 소바하면 당연히 여름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소바는 사뭇 다르다. 아니 일반적인 소바라고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가 봐온 소바와는 판이한 모습이다.


오키나와 소바(沖縄そば)


두툼한 고기와 면발. 그리고 무엇보다 하얗게 올라오는 김은 이미 시원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일반적인 라멘이나 제주도의 고기국수와 비슷하다. 사실 소바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에선 국수 자체를 총칭하는 단어니, 내 기대가 다소 무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체념을 뒤로 하고 맛을 본다. 국물을 한 움큼 들이킨다. 돼지국밥처럼 걸쭉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국물은 맑다. 마치 소고기무국처럼 맑지만 그 뒤끝에는 진한 육향이 따라오는 느낌이다. 담백했던 국물과의 첫 조우를 마치고나면 면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 양이 상당하다. 


규슈에서 먹었던 라멘보다 차슈나 면의 양이 거의 곱빼기에 가깝다. ‘푸짐하다’라는 표현이 이 음식과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냥 밀가루로 반죽한 이 면은 라멘보다는 식감이 더 쫄깃하다. 일반적인 소바는 찰기 없이 툭툭 끊어진다면, 오키나와 소바는 우리네 칼국수마냥 적당히 찰지고 탱탱하다. 옆에 코레구스라는 양념도 같이 주는데, 할라피뇨와 같은 매운 맛을 주는 향신료이다. 진한 맛을 방해할 수도 있으나, 돼지의 진한 향이 부담스럽다면 몇 방을 넣어 먹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릇의 절반만 먹어도 배부른 이 오키나와 소바는 사실 이 섬과는 다소 맞지 않는다. 면의 재료인 밀가루의 밀 자체가 온대에서만 자생할 수 있는 작물이기에 열대에 가까운 오키나와 에선 밀이 자라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사실 오키나와 요리는 독특한 점이 더 있다. 섬임에도 불구하고 생선 요리는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생선 대신 이 섬의 토종 돼지인 아구가 이 섬 요리의 주 단골이다. ‘돼지는 울음소리 빼고 전부 먹는다(豚は鳴き声以外は全部食べられ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쓰임은 다양하다. 




고야(여주)가 들어간 참프루. 담백하면서 쌉싸름한 맛이 인상적이다.



오키나와 소바와 함께 대표하는 요리는 참프루이다. 여주를 채썰어 두부와 채썬 고기와 계란 등을 볶은 요리이다. 그렇게 많이 볶지 않았기에 쌉쌀한 맛이 뒤에서부터 조금씩 올라온다. 두부와 채썬 돼지고기가 이런 쓴 맛과 조화를 이룬다. 뒤죽박죽 섞는다라는 뜻을 가진 이 요리는 만드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여주대신 햄이나 양배추 등을 넣을 수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집에서 해먹는 볶음밥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실제로 가정에서는 햄을 애용한다고 한다.)


오키나와 요리는 모자람이 없다. 어떤 음식이든 푼푼하고 기름진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사면이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생선 요리가 한 손안에 꼽을 정도이다. 정갈하고 아담한 기존의 일본 요리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과언은 아닐 것이다. 



류큐 왕국의 궁궐 슈리성(首里城).



넉넉한 음식의 모습은 사실 이 곳 사람들의 기저에 품고 있는 왕국 ‘류큐’가 자리하고 있다. 류큐. 이 섬을 지지하는 정신적 원동력이자 지주(支柱)와 같은 존재이다. 세 곳 건너 한 곳의 간판은 언제나 류큐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과거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이 지역이 이렇게 널리 돼지고기를 애용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류큐의 존재 덕분이다. 천년이 넘는 동안 육식을 금해온 일본의 영향 밖에서 류큐만의 독자적인 식문화가 가능했다. 


15-16세기부터 류큐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방이 바다로 고립된 것은 오히려 이들에게는 사방으로 통하는 바닷길로 만들었다. 일본과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조선까지 그들의 길을 넓혀가며, 당대 아시아의 허브국가가 되었다. 대륙을 오가며 그들은 자연스레 호방한 기질이 음식에까지 스며들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진 것에 맞게 재창조하였다. 대륙도 바다도 아닌 류큐만의 밥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류큐 전통의상을 입은 슈리성(首里城) 안내원.
소금으로 과자를 만드는 발상을 보면 오키나와들의 창의성은 과거에만 한정된 기질은 아닐 것이다.



음식도 언어처럼 사회나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것은 시대의 흐름에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시대와 전통이 만나 제3의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키나와의 음식은 제3의 길을 찾아 자주적인 식문화를 완성했다.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진주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도 지켜온 전통을 빼앗기지도 스스로 잃지도 않고 제3의 길로써 오늘까지 이끌어왔다. ‘대장부는 굽히고 펴는데에 능해야한다’라는 말처럼 오키나와의 요리는 흐름의 변화를 다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신이 오키나와를 가게 된다면 먼저 오키나와 소바를 먼저 먹어보길 권한다. 푹푹 찌는 날씨에 왜 하필더운 국물을 권하냐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뜨거움이야말로 그들이 치열하게 찾아온 제3의 길을 모색한 흔적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오키나와의 소바는 뜨겁다.

 


얼마 전 벌어진 강남역 여성 피살 사건과 작년의 메르스 사태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위험에 대해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심리적 불안감의 크기가 위험이 일어날 현실적 확률의 크기를 압도했다는 점이다. 메르스 발병 기간 동안 국내 감염자 수는 186명이었고 이 중 사망자는 38명이니 치사율은 약 20%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총인구수를 대상으로 하면 메르스에 걸려 사망한 비율은 고작 약 0.00007%에 지나지 않는다. 천만 명 당 7명 수준이다.

 

하지만 사회가 받아들이는 공포의 크기는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연간 한국의 10만 명당 살해당할 확률은 1명이 채 되지 않는다. 세계 평균에 비해서도 분명 압도적으로 낮은 수치이다. 하지만 통계적 수치는 이번 사건에 대해 국민들, 특히 여성들의 불안감을 전혀 상쇄할 수 없었다. 현실과 괴리된 통계와 확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한국전쟁 때 미군 사망률보다 낮은 확률로 불안에 떠는 한국인들”

김진 씨는 작년 6월 10일 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논설에서 한국전쟁 때 미군의 사망확률은 50분의 1인데 반해, 광우병 파동 때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인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1억분의 1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를 막고 정부를 때려 부쉈으니 한국 사회가 근거 없는 소문에 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비자발적 위험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크기가 위험이 발생할 ’기수적 확률‘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통계와 확률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도구이긴 하다. 정치가와 관료들은 더 이상 이념 논리나 오랜 ‘실무적 육감’만으로 국가 정책을 세울 필요가 없다. 숫자가 빽빽하게 들어 찬 통계로 정책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통계와 확률로 무장한 데이터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인 하나의 척도로 인정받게 되었다. 기업가들 역시 더 이상 ‘야성적 충동’에 따라 매출 전망을 예측하거나 설비 투자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한편, 좀 더 엄밀한 경영 계획 수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통계와 확률은 거시경제정책이나 기업 경영 같은 정량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기호나 유행, 역사, 법 제도 등 사회문화적 기준에서도 유효한 바로미터로 활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바야흐로 데이터 만능주의가 횡행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불안에 쉽게 동요하는 집단 과민반응에서 탈피하고 과학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통계와 확률만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예측하고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는 착각은 사람이 오직 이성으로만 상황을 인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전망 이론가들에 따르면 사람이 위험을 인식하는 태도가 확률적 수치보다는 ‘위험의 형태’나 ‘심리적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비자발적으로 노출된 위험, 그리고 그 성격과 대처 방법이 불분명한 위험에 대해 느끼는 집단적 불안감을 위험이 발생할 확률적 근거만으로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미시경제학 제5판, 이준구).

 

메르스 사태의 경우, 정보 부족과 보건당국의 미흡한 초동대처가 사태를 악화시켰고 투명하지 못한 정보 비공개 방침, 정부 발표의 번복은 불신을 초래해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켰다. 총인구 대비 약 0.00007%에 불과한 결과적인 사망률과 별개로 확률 데이터가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느꼈던 불안의 정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예이다.

 

어떤 논객은 메르스의 감염률과 사망률이 결핵보다 낮은 수준이므로 국민들에게 호들갑떨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메르스의 감염 메커니즘에 대한 무지함을 방증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메르스 같은 전염병은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확산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전염병이 국내로 유입된다는 이유로 세계화 시대에 출, 입국 자체를 덜컥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일상생활을 위해 버스나 전철같이 밀폐되고 고도로 밀집된 공간에서 불가피하게 불특정 다수와 접촉할 수밖에 없는 현대 도시인의 생활 패턴 상,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비자발적’이고 ‘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메르스의 경우 결핵과 달리 백신을 통한 완치 방법도 전무했으니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10만 명당 살해당할 확률이 1명도 안 된다는 확률적 확신보다는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역 한복판에서, 그것도 공중 화장실이라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장소에서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진 강력 범죄에 대해 일반 여성들이 심리적으로 자기대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적 특징’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큰 상자에 수만 개의 검은 콩 중 흰 콩 하나를 섞은 뒤 눈을 감고 콩을 하나씩 꺼내어 몇 번째 만에 흰 콩이 나오는 지 실험을 한다고 가정하자. 확률 상 거의 불가능하지만 분명 첫 순번에 흰 콩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확률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 희박한 확률에 뽑힐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항상 동등하다. 바꾸어 말하면 확률의 이면에 숨겨진 이 ‘동등성’은 결과적 확률과 별개로 그 누구도 심리적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집단 심리 기제를 촉발한다. 그리고 확률이 아예 '0'이 아닌 이상, ‘동등성에 따른 불안감’은 위험이 발생할 ‘확률의 기수적 크기’와는 상관없이 항시 존재한다.

 

그렇다면 통계는 어떠한가?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는 GDP나 실업률, 유아사망률, 흡연율, 범죄율, 조혼인율 등 여러 사회지표를 통계로 내어 국가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거나 사회 발전의 척도로 대중에게 홍보한다. 연일 미디어에서 발표하는 통계적 기준에 따라 시민들도 정치나 사회, 경제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린다. 확률과 마찬가지로 통계도 수치에 국한된 가치중립적이라는 다수의 인식 덕분에 높은 신뢰성을 얻고 있다.

 

하지만 통계 역시 결국 사람이 작성하는 결과물이다. 그 이면에는 ‘비통계적 의의’와 의도적인 통계치 누락, 비교 대상 선정 기준의 비객관성, 평균값과 중위값의 갭이 발생하는 등 ‘불안정한 주관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통계는 대부분 이와 대동소이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GDP(혹은 GNP)를 과연 ‘생활 개선의 척도’로 간주할 수 있을까?"

“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분별한 도시의 확장 속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GNP에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계산에 넣고 핵탄두도 계산에 넣으며 도시 폭동을 진압할 경찰 장갑차도 계산에 넣습니다. 하지만 GNP에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 그들이 받는 교육의 질, 그들의 놀이가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GNP는 모든 것을 간단히 계산해 냅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 (캔자스 대학 연설 中, 1968)-

 

예를 들어 한 사회의 치안 수준을 나타내는 ‘살인 사건 사망률’은 보통 ‘10만 명 당 살해당한 사람 수’로 파악한다. 이런 측정 방식은 ‘총인구수의 변화’에 의해 왜곡되기 쉽다. 가령 t년도의 총인구수가 3000만 명인 A국의 10만 명당 살해당한 사람 수는 4명이라고 가정해보자. 30년 후, A국의 10만 명당 살해당한 사람 수가 2명으로 떨어진다면 A국의 치안은 명백히 개선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주어진 통계치는 십만 명 당 살해당한 사람 수이지, ‘A국의 총인구수 증감 추이’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년 후 A국의 총인구수가 t년도에 비해 2배를 초과한다면 실제 살해당한 사람 수(살인 건수)는 t년도에 비해 증가함을 알 수 있다.

 

물론 10만 명 당 살해당한 사람 수는 줄었기 때문에 ‘살해당할 확률’은 적어졌지만 살인 동기나 범행 형태에 따라 인간이 느끼는 살인에 대한 위험의 크기가 반드시 통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묻지마 범죄나 흉악한 범행 수법을 구사하는 연쇄 살인범의 출몰은 사회가 인식하는 치안 수준을 통계 그 이상으로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평균의 함정’에 빠진 1인당 GDP와 직장인 평균 연봉, 전업 주부의 가사 노동은 제외하면서 환경오염을 발생시키는 생산 활동과 범죄율 증가에 따른 교도소 신축비용 증가를 경제성장 변수로 포함시키는 ‘GDP의 이상한 계산방식’, 사실상의 실업 상태인 비경제활동인구(만15세 이상 취준생, 공시생)를 실업자에 포함시키지 않은 한국의 실업률 통계, 체감물가와 따로 노는 소비자 물가지수 등을 살펴본다면 통계는 객관적 지표라기보다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계산에서 제외할 것인지 결정하는 권력이 작동한 결과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소비자 물가지수와 소비자 체감물가 간의 괴리"

임금상승이 정체되어 있는 반면, 국내 휘발유와 생필품 값은 오르고 있다. 하지만 경제 당국은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근거로 ‘지나친 디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이에 공감하고 있을까?

 

물론 통계와 확률은 사회의 역동적인 수요에 맞게 정책을 설계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통계적 예측을 통해 지역주의에 따른 소모적인 정쟁을 최소화하면서 지하철 노선이나 고속도로, 공항 등 국가 인프라를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교육, 노인, 노동 정책의 개선을 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계와 확률과 같은 데이터 역시 정치적 이념과 권력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비자발적이고 불투명한 의사 결정 과정 때문에 촉발된 집단적 불안을 ‘객관적’ 통계와 확률적 수치를 근거로 무시하려는 비민주적 정치 문화를 야기하기도 한다.

 

가령, 최신 통계 기법과 위험 발생 확률을 엄밀히 계산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최적의 핵발전소 부지를 결정한다 하더라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비자발적으로 직면한 심리적 불안감’까지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기피 시설을 짓는 대신 해당 지역에 대해 정부에서 지원하는 여러 보상 대책을 마련한다 해도 그것이 시민들의 불안감 내지 심리적 박탈감 등 음(-)의 효과와 완벽히 등가교환 할 수는 없다.

 

통계와 확률도 결국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 도구에 불과하다. 통계와 확률에 근거한 데이터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 측정 방식의 재고를 요구하는 건 정당하다. ‘수학적 중립성’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감성적 사고와 행동을 억지로 통계 결과에 끼워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비이성적 폭력’에 불과하다. 수정이 필요한 건 집단 심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데이터이지, 불확실한 상황에 불안해하는 대중의 본성이 아니다.



작년 열린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여행기 입니다. 마지막 날의 감상을 담았습니다.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듬었습니다.



#1 영화의 전당

 

11시에 시작하는 <지아장커: 펜양에서 온 사나이>(월터 살레스, 2014)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10시 영화를 예매한 K에 맞춰 숙소를 일찍 떴다. 서둘렀던 덕인지, 시간계산을 잘못 했던 탓인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영화의 전당에 도착했다.

, 여유로워서 나쁠 건 없겠다.

 

미처 가지 못했던 화장실을 들르고, 무료 배포 잡지들을 훑다보니 금세 10시가 가까웠다. K을 먼저 보낸 뒤, R과 전날 미리 얘기해둔 대로 기념품점에 들렀다. 오드리 헵번의 이미지가 거칠게 그려진 파우치 하나를 선물로 골랐고, 아시아 영화와 프랑스 영화에 대한 책을 한 권씩 총 두 권 집었다. 물론, 책 두 권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요새 책 선물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카드 결제기가 먹통이라며 계산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1030분 영화 시간에 맞춰 R마저 떠났다. 왠지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류는 카드결제기가 아니라, 일본인 기자가 R넨 신용카드에 있다는 걸 봉사자가 깨닫기 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드를 받아든 일본인 기자는 허무한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섰다. 나는 속으론 분통을 터뜨렸으나, 최대한 티를 숨긴 채 웃으며 카드를 건넸다. 내 다음 차례로 계산대 앞에 선 백인 여자의 티 없는 미소도 위선이었을까.

그럼에도 여자는 전적으로 선해보였다.

 

#2 영화의 전당에서 CGV 가는 길


아무것도 안 먹기에는 영화를 보다 지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에는 어젯밤 대책 없이 들이켰던 음식이 무거웠다. 편의점에서 계란 두 개와 커피를 하나 샀다. 명색이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백화점이나 편의점, 뭐 하나 제대로 매력적인 할인 상품이 없었다. 계란 두 개는 ‘1+1’이 아니라, 원래 두 개들이 제품이었다.

편의점 계란은 껍질이 쉽게 깨져 좋았다.


무료 잡지들, 책 두 권, 파우치가 담긴 봉지에 커피까지 더해지니 새삼 무거웠다. 날은 더웠고 아직 영화 상영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무턱대고 영화의 전당 근처를 걷는데, 문득 기뻤다.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제각기 흩어졌다. 그중에는 나처럼 한가득 영화제 물건들을 챙기느라 바쁜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 벤치에 자유롭게 누워 있는 여자와 그 옆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읽고 있는 남자는 커플이어도 좋았고, 생판 모르는 관계라도 좋았다. 야외에 설치된 책 판매 부스에는 두 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책을 파는 사람인지, 누가 책을 구경하려는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둘은 하나같이 표지를 들추고 있었다. 나는 마치 책을 파는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책들을 살펴보았다.

팔리기 어려운 책들이 많았다.



#3 CGV


영화의 전당에서 CGV로 향하는 길목에서 내가 느꼈던 기쁨이란, 이를테면 암묵적 유대감이었다. 마치 영화제라는 거대한 결계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영화 <트루먼 쇼>(피터 위어, 1998)의 거대한 스튜디오 속 연기자들처럼. 트루먼(짐 캐리)을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단 하나의 암묵적 메시지를 공유한다. “우리는 연기자다.” 그들은 거대한 가상 마을 속에서 각자의 생활을 해나가지만, 그 모든 혼란통은 어디까지나 저 메시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트루먼 쇼의 스튜디오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좋은 것이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늙은 사람, 좀 못생긴 사람, 잘생긴 사람 할 것 없이. 그들은 거기 있기 위해서 바로 그곳에 있는 거니까. ‘연기자로서 그들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고, 그들의 모든 행위와 말은 연기와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마주치는 시선, 누군가의 시큼한 냄새, 유난히 더운 공기. 연기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야릇하면서도 흥분되는 그 모든 대상들.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는 꼬마애와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을 꼭 잡으며 잔소리를 내뱉는 아주머니도, 거나하게 취해 소리를 박박 질러대는 취객도, 깔깔깔 괴상한 몸짓으로 서로를 웃겨대는 일행도 모두 한통속이라는 생각. 어쩌면 나만의 착각일지라도, 201510월 초라는 시간, 해운대 센텀시티라는 공간에 있는 이들이라면 최소한 단 하나의 메시지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믿음을 말이다.

 

여유롭게 출발했으나, 막상 CGV에 도착하니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티켓을 보여주고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어둡고 좁은 통로는 잠깐, 탁 트인 공간에 벌써 사람이 가득 하다. 다들 어디서 온 걸까, 왜 이 영화를 보러 온 걸까, 나는 오늘 떠나는 데 이들은 언제까지 부산에 머무를까. 암전이 되고, 스크린이 환해진다.

옆 사람이 짧게 심호흡을 한다.



이집트 정치인 중에 무하마드 엘바라데이라는 인물이 있다. 법학자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97년부터 2009년까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으며 핵 확산 방지를 통해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200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인사이다. IAEA 사무총장임기가 끝난 이듬해인 2010년부터 그는 모국의 정치판에 야권 지도자로 뛰어들었다.

 

2011년 초, 모두가 아는 아랍의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그 연쇄효과로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해온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했다. 그러자 엘바라데이는 ‘IAEA 사무총장 출신이라는 화려한 스펙’덕분에 순식간에 주요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무바라크가 실각한 후에도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군부가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었고 엘바라데이는 그런 구체제 하에서는 ‘어떠한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엘바라데이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민주화를 열망하던 다수의 이집트 민중의 바람과 달리 그 이듬해 대선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가까운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바라크의 군부 권위주의 정권이 물러나자, 숨 막히는 이슬람 신정 체제가 등장한 셈이다.

 

이처럼 세속자유주의 계열을 대표하던 엘바라데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 이집트 대중의 기대와 달리 무기력했고 정치적 기반 역시 부족했다. 2013년 7월 무르시의 실정에 등을 돌린 민심을 핑계로 압둘 파타흐 시시가 중심이 되어 군부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집트의 절차적 민주주의는 또 한 번 훼손되었다. 엘바라데이는 비민주적 쿠데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군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고 옹호하였고 급기야 쿠데타가 성공한 그 해 ‘시시 군부 내각의 부통령’을 맡았다.

"IAEA 사무총장을 세 번 지낸 이집트 출신의 엘바라데이"

국제기구 수장을 세 번 연임한 그의 경력과 달리 모국에서 그의 정치적 지도력은 실망스러웠다. 2011년, 이집트의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했고 이듬해 대선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 세력을 결집하지 못했고 대중에게 새로운 시대정신도 제시하지 못했다. 2013년 7월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자 부통령으로 활동하는 등 '남다른 처세술'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후 이집트 정국은 무르시를 지지하는 진영과 시시의 군부를 지지하는 진영 간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시시 내각은 친 무르시 지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상 ‘시시 군부 정권의 얼굴마담’이었던 엘바라데이는 유혈사태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만 남긴 채,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리고 (군부의 영향력이 깊게 개입됐다고 의심받았던)2014년 대선에서 시시는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었다. 2011년 민주화를 위해 들고 일어났던 이집트 국민들은 무르시가 주도하는 이슬람식 구체제를 겪었고 재작년부터는 한때 무바라크의 측근들이었던 장군들 주도의 권위주의 체제를 견뎌내고 있다.

 

이집트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에 의해 유린당하는 동안 엘바라데이가 보여준 지도력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IAEA의 수장으로서 때때로 보여준 강단 있던 리더십과는 달리 모국의 혼란스런 정치판에서 그는 유약했고 지나치게 ‘정치 공학적’이었으며 심지어는 군부 쿠데타 세력과 야합하기도 했다.

 

요새 언론에서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2017년 대선 출마 예측에 대해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었던 엘바라데이가 한때 이집트 국민들의 막연한 기대를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유엔사무총장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벌써부터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의 대선 출마설 제기에 대해 자신은 단지 경주에서 열리는 유엔 NGO 컨퍼런스에 사무총장의 자격으로 참여하러 방한한 것일 뿐,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삼가달라는 그의 변명은 어딘가 어설퍼 보인다.

 

영국의 텔레그래프와 프랑스의 AEP를 비롯한 해외 언론은 임기가 아직 남은 반총장의 마음이 이미 한국 대권 도전에 가있다고 꼬집었다. 그가 정말 공식적인 유엔 업무상, 유엔총장의 자격으로 방한했다면 오래전에 은퇴한 정치원로이자 충청 정치권의 영수인 김종필 씨는 굳이 왜 만났는가? 또한 TK 정치권의 전통적 성지인 안동을 몸소 방문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요란한 정치 행보와 달리 차분한 그의 답변은 외교관 특유의 완곡어법을 고려하여 진의를 파악해야 할 정도지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건대, 여당에서 대권 참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면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유념해야 할 사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천착하는 것은 전형적인 후진형 선거 문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국제기구의 수장 출신, 다국적 기업의 임원,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국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되거나 본인들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능력과 무관한)대외적인 스펙을 내세워 정계에 진출하는 사례를 우리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이집트 대중의 마음을 흔들만한 정치적 어록조차 전무했던 정치 신인 엘바라데이가 국제원자력 기구의 수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던 사례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국제기구의 수장을 역임한 경력을 일국의 정치 지도자로서 필요한 역량을 갖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엘바라데이와 반기문이 국제기구의 수장을 꽤 오랜 기간 동안 무난하게 수행했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조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 만큼 능동적 리더십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세를 파악하고 현상 유지에 집중함으로써 국제정치의 권력 관계상 강대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게 비교적 잘 처신했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다섯 개의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라도 거부권(veto)을 행사하면 선출될 수 없는 유엔총장의 선출 방식 상, 반총장은 개인의 정치적 역량보다는 대륙별 순환에 의한 선출 구조와 강대국 입장에서 딱히 반대할 이유 없이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연임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 조직에나 개선해야할 나쁜 관행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의롭고 투명해야 할 정책 결정 방식이 비공식적이고 부당한 방식으로 점철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한국 정치집단 문화의 비합리적 독소 관행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총장 임기를 복기해보면 그가 과연 리더로서 한국 정치 문화와 구조적 관행을 개선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유엔은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5개국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동시에 그들만의 밀실협상으로 운영되는 측면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총장은 (모든 국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해 당사국들 간의 표면적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국제 사회의 여론 및 레짐(Régime)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이다.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고 국가 간 분쟁을 중재할 권한이 공인된 규범적 존재이다. 설령 이러한 일련의 합의 과정들이 ‘비구속적 선언’에 그친다 할지라도 국제 규범을 강행하려는 유엔의 의지와 더불어 어느 분쟁 지역에서는 유엔총장의 판단과 말 한마디가 개인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여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할지도 모르고, 안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그가 대선 후보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인지도도 있는 데다가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는 무난한 캐릭터이기 때문이고, 여당의 입장에서는 행동이 예측 가능한 '얌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초의 안철수처럼 반기문도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은 특히, 국제 분쟁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유엔총장 본연의 임무를 여러 차례 방기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인들을 상대로 2014년 이후 42건에 달하는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고(파견 평화유지군의 수장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 출신.) 2009년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간의 유혈 충돌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태에 대해 스리랑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이웃나라 인도 출신의 조사관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 관한 현실 감각에 문제를 보임은 물론, 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리더십조차 발휘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면에서 반기문 총장은 IAEA 사무총장으로서 부시 미 정부가 주장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 엘바라데이보다 더 유약한 리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반총장은 현상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남다른 비전으로 구조적 병폐를 청산하는 등 한국 정치 문화의 체질 개선에 필요한 개혁적 지도자는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엘바라데이의 정계 입문이 실패로 끝난 이유 중 하나는 ‘모국 내에서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활동한 엘바라데이는 모국의 제도권 정치인들에게는 그저 좀 유명한 ‘외지인’에 불과했고 야권의 공식적 단일 지도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력한 야권 세력이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와 유사한 정치 강령을 가진 무슬림형제단이 서구식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엘바라데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음은 당연했다.

 

엘바라데이가 이집트의 척박하고 분열된 야권에서 고전한 것과 달리 반기문의 정치적 전망은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인다. 당장 자신을 뒷받침해줄 정치적 세력의 토대가 미비한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만약 새누리당이 진심으로 반기문 총장의 영입을 원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라도 모든 당내 역량을 발휘해 그를 대선 주자로 만들고자 지원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 여당인 만큼 대선 후보를 거머쥐기 위해 치열한 당내 경선을 감수해야겠지만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과 인물의 대외적 인지도에만 집착하는 ‘한국 특유의 신민형 정치문화’가 맞물려 그의 대선 도전 과정은 의외로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이 현재의 대한민국에 진정으로 필요한 지도자인지는 여전히 강한 의문이 든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제왕적 대통령제에 치중한 나머지 실질적인 삼권분립과 당내 민주화가 아직 요원한 ‘87년 체제’에서 진일보하기 위해 한국 정치에 필요한 리더십은 현상유지가 아닌 사회 구조적, 정치 문화적 개혁을 위한 정치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보여준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고 토호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충청과 TK연대를 조장하는 진부한 지역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상투적인 언변을 구사해 정치 혐오에 빠진 부동층을 손쉽게 공략할 수 있는 편의주의적 전략을 취하려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공감과 깊이 있는 담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차기 대선 주자라고 가정했을 때, 여권의 정치인들이나 상당수의 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모난 정치적 언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 확산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의 불통 대통령 리더십으로 당권을 위협받았다고 판단한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반기문 씨가 비교적 예측가능하고 제어하기 쉬운 ‘바지사장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강대국들의 거부권 없이 유엔 총장 연임에 무난하게 성공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반총장의 국제적 인지도를 이용한 새누리당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집권 시 외국과의 협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2013년 7월, 무르시 정부를 전복한 군부의 쿠데타 이후에 엘바라데이가 부통령에 임명된 것도 그의 대외적 인지도를 이용해 서방을 상대로 합법 정부 승인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된 군부의 정략적 영입이었다. 반총장이 정말 대선 출마에 뜻이 있다면 현재 자신을 향한 여권의 정치적 구애와 국민의 높은 지지율이 결코 본인의 정치 지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선 본인의 현재 직무에 충실할 것을 당부 드리는 바이다. 또한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대외적 직위를 이용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만을 기름장어처럼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부당한 외압과 관행에 맞서 소신 있게 대응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테크노크라트로서의 기술적 능력 외에 소통, 분배와 관련된 탈권위주의적 공감의 능력과 더불어 개혁을 위한 굳센 정치적 결단력이 반기문 씨에게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끝으로 필자가 고2때 벌어진 ‘김선일 씨 피랍 사건’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보여준 그의 무능하고 영혼 없는 수습능력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밑도 끝도 없는 ‘반기문 대세론’을 경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고척 돔 내부 전경(ⓒ OSEN)

지난 3월 2016 프로야구 시범경기가 막을 올렸다. 올 시즌 팬들의 최고 화두는 단연 고척 스카이돔(이하 고척돔)이었다. 국내 최초 돔 구장이라는 타이틀은 팬들의 이목을 집중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와의 협의를 통해 기존 목동구장에서 고척 돔구장으로 옮겨졌다고는 하나, 모기업 없이 ‘야구로 먹고 사는 구단’인데 돔구장을 운영이 가능할 것인가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우려 가운데 시작한 시범경기에서 다소 뜻 밖의 광경이 노출되었다.


“4월부터 구장 내 외부음식 반입이 전면 금지합니다.”


구단 측 직원들이 입구에서 관객들에게 공지한 발언이었다. 발언대로라면 정확하게 오늘. 즉 정규시즌부터 구장 밖에서 사온 모든 음식의 반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음식 자체의 취식을 불허하는 것이 아니다. 구장에는 엄연히 테이블 석까지 마련되어있다. 굳이 관객이 음식을 먹고 싶다면 구장 내에 있는 매장을 이용하라는 논리인 것이다. KBO(한국야구위원회) 규정에는 구장 내 안전을 위하여 외부의 주류 반입을 제재하는 규정은 있으나, 관객의 음식물 반입 제한은 다른 구장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척구장만의 풍경이 될지 모른다.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다소 비싼 가격에 음식을 사야 하는 상황이다. 예컨대 고척돔 외부에 있는 한 치킨집에서는 1만~1만2000원이면 1마리를 살 수 있지만 고척돔 내에서 구매하면 1만8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출처_ 파이낸셜 뉴스

고척돔의 상술은 명백히 부당한 이득이다. 같은 음식을 매점만 음식을 허가하는 것과 훨씬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은 관객을 우롱한 강매 행위이다. 과거 극장에서 행해져 오던 ‘상영관 내 외부음식 반입 금지’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영화를 보러 찾은 관객에게 외부음식은 불허하고, 매점에서 살 것을 강제했다. 냄새가 심한 음식이야 당연히 제재가 필요하지만, 팝콘이나 탄산음료는 원가에 몇 배를 부풀려 판매하였다.(2008년부터 반입 규정은 해제되었지만, 극장의 매출 감소를 우려하여 관객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고척돔 또한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기간이 지나면 집에서라도 볼 수 있지만, 야구경기는 특정 시간에만 볼 수 있는 제약이 있기에 관객에게 더욱 불리하다. 그 날 야구를 보러 찾아온 관객은 음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내야 하는 을이 되어야했고, 구장은 스스로 갑이 되어 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척 돔 입구 전경. 인근 상인회의 넥센 입성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보인다.


이러한 폭리는 단순히 관객들에게 삥을 뜯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척 돔의 준공을 전후로 관객을 대상으로 한 많은 상권이 새로 생겨났는데, 대부분 야구 하나만 바라고 가게를 열었다. 그런데 구장은 이들마저 고사(枯死)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외부 음식의 반입을 금하는 것으로도 이들에게는 막대한 타격인데, 여기에 고척 돔 지하에 대형 식당가를 조성한다는 이야기마저 돌고 있다. 돔 부근의 상점부터 인접한 동양미래대학의 먹자골목마저 다 삼킬 수 있게 된다. 자영업 상인들에게 기회가 될 줄 알았던 돔 구장은 졸지에 거대한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장이 이렇게 ‘모두의 갑’이 되어버린 데에는 서울시의 행정이 숨어있다. 2008년 건립계획 발표 때만 해도 408억원에 불과했던 사업비가 8차례나 설계가 변경되면서 2,443억으로 6배로 뛰었다. 그리고 거의 준공이 다다른 작년까지도 구장을 쓸 구단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다. 상습적 교통정체와 애매한 지하철 접근성, 그리고 막대한 임대료를 부담해야하는데 상식적으로 구단의 입장에서 구미가 당길만한 요소는 전무했다. 2,000억대의 예산은 쓸 사람은 생각도 안한 사상누각(沙上樓閣)과 같은 계획인 것이다.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지어진 2천억 대의 돔구장을 서울시는 부랴부랴 넥센 히어로즈에게 떠밀었다. 서울시는 절박했다. LG나 두산 구단은 이미 거절하기로 못 박았고, 대기업의 눈치를 살핀 것인지 선뜻 제안조차 하지도 못했다. 어느 프로구단도 이곳을 쓰지 않는다면 연간 20억이나 되는 적자를 서울시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동 구장을 홈으로 쓰던 넥센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잠실보다 적은 좌석수인데 더 많은 임대료를 내라는 서울시 측 제안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서울시는 압박과 제안을 동시에 내밀었다. 기존 목동구장(소유권은 서울시설관리공단에 있다)의 광고권을 회수하고 넥센의 구장이용료를 올리는 대신에, 고척 돔에 대한 시설 보수 비용 390억을 추가로 투입과 2년간 광고권을 구단에 주기로 했다. ‘울며 겨자 먹기’식의 협상이었다.



야구장에 관객은 구장과 구단은 생존과 직결되어있다. 사진은 지난 22일 고척에서 열린 넥센과 롯데와의 시범경기


이렇듯 고척 돔 협상에서 보여준 서울시 행정 처리는 지금까지 보여온 서울시 기조와 많이 다르다. 함께 상생을 주창하던 이미지였으나, 정작 모기업도 없는 약자 야구단의 사정은 외면하고 손해를 감당해 줄 것을 종용하고 있다. 단순히 구단뿐만 아니라 팬과 시민까지 고스란히 피해로 이어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이기적인 간섭으로 즐겨야하는 프로 스포츠가 주민과 팬 그리고 구단 모두에게 울상이 되고 있다. 

그런 협상을 통해서 넥센은 그렇게 고척 돔에서 오늘부터 경기를 한다. 앞으로도 매 해 60경기 정도를 고척에서 진행하며 운영해야한다. 입장료도 올렸고,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 팬들의 음식 가져올 권리마저 제한하면서까지 아등바등 버티고 있다. 넥센은 앞으로 새로운 수익 구조를 모색하고 창출해야만 하는데, 서울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며 일관하고 있다. 구단의 이익의 문제가 아닌 존폐의 문제가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행정과 야구의 불편한 동거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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