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왕삥(王兵)

 

인터뷰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당신의 유소년기와 가정환경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1967년에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의 반은 도시에, 반은 시골에 있었다.[각주:1] 부모님은 1950년대에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상대적으로 시골인 촌락에서 떠나 수도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대약진정책’[각주:2] 이후 1960년대 초반은 흉년이었고, (식량 – 옮긴이) 공급에 대한 압박을 줄이기 위해 도시 거주자들은 다시 시골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떠나야했지만, 우리 삼남매(누나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남동생은 네 살 아래다)는 모두 시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문화 대혁명’[각주:3]은 시작된 상태였다. 도시에서 살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안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게 더 편하다고 모두가 충고했고, 아버지는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이후, 어머니는 늘 우리를 시골로 데려가 키웠다. 우리는 모두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도시 출신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모두 어머니와 함께 머물렀다. 내가 여섯 살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를 할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누나나 동생 없이, 나는 몇 년 동안 혼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모두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에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간헐적으로 할아버지와 떨어져 있기도 했다. 때로 어머니에게 돌아가곤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게는 마치 두 곳의 고향이 있던 셈이다. 
 
두 마을에서의 삶은 어땠나? 친족관계는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나?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산시성의 중심부가 고향이고, 그곳은 농경 지역이었고 농경문화가 짙게 배어있었다. 역사적으로, 그곳은 산시성의 남부나 북부보다 훨씬 빨리 개발되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시안에서 대략 8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진양(旌陽)현이었다. 도시로 직접 연결된 버스가 있어 교통수단은 나쁘지 않았다. 그 마을에는 약 60가구가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시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저우즈(周至)현에 속했으며, 친링(秦嶺) 산맥의 작은 언덕에 위치했다. 그 마을에는 1970년 당시 2만의 인구─외가(外家)의 마을에 비해 훨씬 큰─가 있었는데, 산시성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두 곳의 문화는 매우 달랐다. 확실히 두 곳의 특성이나 친족적인 요소가 유사한 건 맞으나, 산시성 중부에 위치한 관중(關中)에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그곳의 생활양식은 허난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각주:4] 혹은 허베이성(河北省)과 같은 중국 내륙의 다른 지방들과는 판이하다. 나는 여러 번 그곳에 위치한 시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늘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우리 산시성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다. 내가 봤을 때 이러한 문화적 보수주의의 주된 원인은 산시성이 중국 근대기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대학 공부는 언제 시작했나?

 

나는 1978년과 1979년에 중학교를 다녔으나, 가정사 때문에 12년이 지난 1991년에야 대학에 진학하였다. 아버지는 시안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1966년 이전에 이미 졸업하여 지방의 건설-디자인 스튜디오에 배정된 상태였다. 내가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1981년, 아버지가 가스 중독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당시 정책은 사망한 노동자의 자식이 빈 일자리를 채울 수 있게끔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자리를 하나 얻어선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겨우 14살이었다. 처음에 나는 온갖 잡일을 하는 ‘후방 공급rear supply’ 부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말 내게 중요했던 유일한 문제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미혼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기숙사의 젊은이들은 모두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같이 놀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는데, 문화 대혁명 이후 대학이 재개되자마자 매년 (스튜디오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디자인 스튜디오는 지방의 최상급 학생들 몇몇을 데려왔다. 그들 중 여럿은 지적으로 뛰어났다. 그들은 모두 가슴으로 그들의 예술사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1980년대였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80년대는 쉴 겨를이 없는─모든 이들이 미래, 직업, 개인적 삶 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시대였다. 80년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80년대는 또한 차라리 따분한 시기였다.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나는 예술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규율에 의존하여 광범위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는데, 건축은 그 규율의 기술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동시에, 건축은 예술 중 가장 실용적인 형식이다. 건축은 예술과 유용성─그러므로 건축을 공부한 사람들은 예술적 혹은 실용적 방향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의 혼합이다. 하지만 건축을 공부하는 것은 예술학교나 영화학교에서 훈련받는 것과 비교하여 사람들에게 독특한 힘을 갖게 한다. 예술학교 학생은 한 분야 혹은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갖곤 하지만, 보통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진 않거나, 개념적인 사고를 잘하진 못한다. 그런 측면은 수학과 과학 과정을 배워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굉장히 논리적으로 생각과 논점을 갖추는 건축과 학생과는 매우 다르다.

 

당시에 당신이 공부하고자 했던 것은 건축이었나, 아니면 토목공학이었나?

 

나는 한 번도 토목공학을 전공하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건축을 전공할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 시험─1984년에, 건축학과에 필요한 특별 시험을 준비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을 준비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1986년인가 87년인가에 나는 사진을 택했다. 또한 1988년쯤에는 회화를 택했다.

 

 

어떻게 사진으로 바꾸게 되었나?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으나, 대학에서 전공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 건축학과는 입학 요건이 엄격했고, 따라서 나는 순수 예술로 눈을 돌렸다. 스튜디오 친구들은 모두 회화에 대한 기본적인 연습을 해왔었고,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활동은 내가 예술 학교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순수-예술 과정에 진입하는 데에는 굉장히 열띤 경쟁이 있었고, 스튜디오에서 한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 옮긴이) 나에게 유일한 방편은 사진이 되었다. 거기다 나는 이미 몇 년 동안 카메라를 갖고 있었고 회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사진 연습을 해왔었다. 비록 내 사진들을 전시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1991년 나는 북동쪽에 있는 선양(瀋陽)의 ‘루쉰(魯迅) 예술 아카데미’에 사진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사진을 공부했고. (그렇다면 - 옮긴이) 언제 영화로 관심을 틀었나?

 

예술 컬리지 2년차에 이미 나는 영화로 전과(轉科)할 생각을 품었다. 영화에 대한 책을 사고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졸업하기 전 마지막 학년 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의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각주:5] 부서로 찾아가, 단기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말했다. 내가 꽤 높은 수준의 학위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내게 매우 친절했다. 사실 루쉰 예술 아카데미 졸업 일 년 전에 이미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내가 했던 공부를 계속하리라 결정했었다. 졸업 후, 베이징에서 나는 여전히 카메라로, 하지만 이제는 시네마토그라피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서는 얼마나 오래 수학했나? 그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은 몇 명이었으며,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는가?

 

원래 훈련 프로그램은 1년 과정이었지만, 일 년을 더 머물렀다. 여러 동기생이 있었고, 나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대다수는 정규 직장에서 임시로 떠나 그곳에 왔던 반면에, 나는 정규 예술 학교를 갓 졸업한 상황이었다. 기초 훈련의 측면에서, 이전에 우리가 습득한 경험은 (서로 - 옮긴이) 달랐다. 대다수는 엄격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었다.

 

사진은 정적인 반면, 영화는 동적이다. 당신은 둘 사이에서 친숙화 과정(사진에서 영화로 분야를 옮기는 과정에서 드는 비용을 말하는 듯 – 옮긴이)을 거쳐야 했나?

 

시각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사진에는 그만의 특성과 특징properties and characteristics이 있다. 많은 이들은 평생을 사진과 함께 한다. 선양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나는 매일같이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형식과 작업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특정 순간을 잡아내는 데 유별나게 매혹되지는 않았다. 내게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것은 인간 삶의 여러 양상을 전체론적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본질the reality of our time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을 선사했다.

 

친숙화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결국 친숙화는 구성요소material의 문제다. 예를 들어, 글짓기를 하는 기자에게 언어에 대한 친숙화는 필수다. 나에게 사진과 촬영기술 모두에 있어 기본적인 언어는 이미지다. 물론 처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 갔을 땐,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해 숙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양적인 축적을 질적인 변형으로 바꾸는 문제였다. 배움은 손 안에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Learning became something in one’s own hands 사실상 현장에서 2년을 보낸 뒤로, 영화 학교는 더 이상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14살에 디자인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부터 24살에 컬리지에 입학할 때까지, 당신은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을 배우는데 꼬박 10년을 보냈다. 당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나?

 

선양에 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80년대 내가 배운 것이나 읽은 책들은 모두 유럽─그리고 거기서 고전적인 건축사(建築史)는 예술사의 여러 양상들과 나뉘지 않는다─에서 온 것이었다. 건축 프로젝트는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그건 여러 전문분야로 분리되지 않았다. 과거에 외딴 건축사란 없었다. 우리는 건축을 예술사─모든 종류의 예술 형식을 총망라한, 장대한 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 컬리지에 입학하고 중국의 전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영화로 전향한 뒤에는 이 이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원문 p. 1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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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cdn.asiancorrespondent.com/wp-content/uploads/2013/08/WangBing.jpg

네이버영화

  1.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에 대해 심화된 논의를 위해선, 루 신유Lu Xinyu, ‘Ruins of the Future’, NLR 31, January-February 2005 참고. 중국의 동시대적 움직입에 대한 조사에 대해선, 잉 치안Ying Qian, ‘Power in the Frame’, NLR 74, March-April 2012 참고. [본문으로]
  2. 1958년에 시작된 중국의 경제건설운동이다. 농산부분에는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공업부문에는 중공업 최우선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흉작과 구 소련인 기사들의 철수로 이 정책은 좌절되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려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4. 陝西省(Shaanxi)과 山西省(Shanxi)의 중국어 발음 표기는 ‘산시성’으로 같다. 둘의 구별을 위해 후자는 한자 발음, 즉 산서성으로 표기하였다. 산시성(陝西省)은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이고, 산서성(山西省)은 중국 동부에 있는 성이다.(옮긴이) [본문으로]
  5.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에 따르면 시네마cinema는 연극적인 요소가 포함된 작품을,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는 영화의 특성만을 지닌 작품을 말한다.(옮긴이) [본문으로]

 

 

올버니Albany[각주:1] – 소득 불평등은 모든 차원의 정부에서 지도자들이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국가적 문제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결코 성공을 보장하지 못했지만, 한때 기회를 보장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후손들이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리라 믿지 않는다. (사회적) 유동성의 이상은 정체라는 현실에 자리를 내어줬다.

 

몇몇은 위를 끌어 내림으로써 소득 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 옮긴이) 나는 아래를 들어 올림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최저임금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로기준을 높이는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2013년에 나는 뉴욕 시의 최저 임금을 올렸다. 7.25달러에서 8.75 달러로. (그리고 올해 말에는 9달러까지 오를 것이다) 최근 예산 집행 계획에서, 나는 다시 최저임금을 뉴욕시에서는 11.5달러, 그리고 나머지 도시에서는 10.5달러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입법부는 제안을 기각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입법자들은 뭉그적거리는 반면, 나는 행동하고 있다.

 

주법(州法)에 따르면 노동위원장은 특정 산업 혹은 직제에서 지불되는 임금이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을 대비하는 데 충분한지 조사할 수 있는─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임금이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추천하는 임금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는─권한이 있다.

 

목요일마다, 나는 노동위원장에게 그런 위원회를 구성해서 패스트푸드 산업에서의 최저 임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위원회는 대략 삼주 후 권고사항을 내놓을 것이고, 그것은 법적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g D. Roosevelt 대통령은 1938년 최저임금을 국법(國法)으로 설정했다. 그로부터 몇 년 전, 그는 “생활임금이라 함은, 겨우 연명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 그건 온당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임금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생활비의 증가와 보조를 맞추지 못해왔다.

 

패스트푸드만큼 소득 격차가 극단적이고 불쾌한 산업은 없다. 패스트푸드 CEO들은 최고 연봉을 받는 임원들이다. 패스트푸드 CEO들의 평균 연봉은 2013년 당시 2천 380만 달러를 달성했고, 그건 (물가상승을 고려하여) 2000년 평균의 네 배가 넘는 수치였다. 반면, 뉴욕에서 요식업에 입문한 노동자들은 일 년에 평균 16920달러를 벌고, 그건 주당 40시간 일할 때 시간당 8.5달러를 버는 셈이었다. 국가적으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은 2000년 이후 (역시 인플레이션을 고려해서) 0.3퍼센트 올랐다.   

 

많은 이들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분의 용돈을 벌고 싶어 하는 십대일 거라 생각한다. 반대로, 여성이 73퍼센트를 차지하고, 20세 이상의 노동자들이 70퍼센트이며, 2/3는 아이를 부양하고 있으며, 가족에 있어 일차적 임금노동자primary wage earners(가족 구성원 중 가장 소득이 많은 사람 - 옮긴이)다.

 

패스트푸드 노동자와 그의 가족은 다른 가족에 비해 공공부조를 받을 가능성이 두 배 정도 더 많다. 나라 전반적으로 패스트푸드 노동자들 중 52퍼센트의─다른 어떤 산업에 비해 높은 수치인데─가족 구성원 중 최소한 한 명은 생활 보조금을 받고 있다.

 

뉴욕 주는 패스트푸드 노동자 한 명당 공공 부조액 지출이 연간 6800달러로 가장 높다. 그건 곧 납세자들에겐 연간 7억 달러의 비용이다.

 

패스트푸드 산업 노동자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는 반면, 산업은 건재하며,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총 천 9백 50억 달러의 수익을 냈고, 2018년까지는 2천 백억 달러까지 늘릴 계획에 있다. 맥도날드는 작년에 46억 7천 달러를 거둬들였고, 버거킹은 2억 9천 백십 달러를 벌었다. 정부는 이들 기업이 노동 비용은 낮고, 이익률은 높게 유지하도록 놔둔 채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산업의 리더는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이 많은─보통 수입 수준의─고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프렌치프라이와 버거의 가격을 상승시키도록 추동할 것이라 주장해왔다. 하지만 다른 나라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호주는 성인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시간당 16달러로 책정했지만, <이코노미스트>의 빅맥 지수에 따르면, 호주의 빅맥 가격은 미국의 4.79달러와 비교해 평균 4.32달러에 불과하다. 최저 임금이 12달러 이상인 프랑스에는 1200개가 넘는 맥도날드 지점이 있다.  

 

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하여 600명 이상의 경제학자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에 대한 커져가는 합의가 경제를 손상시키지 않으리라 단언해왔다. 사실상, 임금 상승은 소비를 증가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경제에 도움을 준다. 연구에 따르면 최저임금이 1달러 올라갈 때마다 가정에서는 추가적으로 2800달러를 소비하고, 2014년 이후 최저임금을 인상해왔던, 뉴욕을 포함한 13개 주에서는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고용 성장을 경험했다.

 

임금 위원회를 통해, 뉴욕은 패스트푸드 노동자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하고, 납세자들의 부담을 덜고, 새로운 국가 표준을 정할 수 있다.

 

루즈벨트 또한 최저임금에 대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생활임금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것에 의존하는 어떠한 기업에게도 이 나라에 남아있을 권리는 없다.”


* 민주당원 앤드루 쿠오모Andrew M. Cuomo는 뉴욕 주지사다.

 

* 사진 및 원문 출처:

http://www.nytimes.com/2015/05/07/opinion/andrew-m-cuomo-fast-food-workers-deserve-a-raise.html

  1. Albany 뉴욕의 주도(옮긴이) [본문으로]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③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④

 

 

 

 


당신은 구글에 대한 유럽의 저항이 단지 새로운 기업에 대한 기존 기업의 반대라며 묵살한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모든 신자유주의 소들이 밤에는 똑같이 검다는 이유로 당신이 사람들에게 단념하고 좇으라고 말하는, 미국이라는 불가항력 앞에 깔린 길 위 현실에 존재하는 조약돌(걸리적거리는 정도의 장애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 – 옮긴이)이 아닌가?  

 

유럽식 구글을 개시해야 한다는 지역 정치가들의 지속적인 요구, 그리고 베를린이나 브뤼셀에서부터 나오는 다른 제안들 대다수는 길을 잘못 들었거나 섣부르다. 유럽식 구글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오늘날 구글은 검색 기업 그 이상이다. 구글은 핸드폰 운영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곧 다른 스마트 기기, 브라우저, 이메일 시스템, 그리고 심지어는 꽤 많은 케이블과 광대역 인프라의 운영체계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활동들을 넘나드는 것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유발한다. 아무리 대학에 12억 달러를 쏟아 붇고 구글을 능가할 만한 더 나은 검색 알고리즘을 개발하라고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도전자들이 구글과 똑같은 기초적인 유저 데이터를 소유하게 되지 않는 한, 구글은 지배적인 위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개선된 알고리즘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럽이 타당성을 유지하려면, 데이터와 그것을 생산하는 인프라(센서, 핸드폰 등)가 갈수록 경제 활동의 핵심 영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구글의 진입을 허용하고 몇몇 무료 서비스의 대가로 이 모든 것을 움켜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만약 유럽이 진정 심각했다면, 데이터의 판매를 엄금하는 별개의 법적 체제를 수립했어야 했고, 이후 보다 작은 기업에게 그런 식으로 보호된 데이터 위에서 (검색에서부터 이메일에 이르기 까지) 해결책을 고안하도록 해야 했다.

 

『넷 딜루전』 이후 당신의 정치적 진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음, 원래 나는 스스로를 실용적 영역의 중심에 서있으며, 다소간 사회 민주주의적 관점을 지녔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방향은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종류의 질문들이 확장되어가는 과정 중에 재설정되었다. 그래서 5년 전쯤의 내가 페이스북과 구글과 같은 부류를 규제할 수 있는 더 낫고 효과적인 방식을 찾는 데 만족했었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그러한 활동에 시간을 그다지 많이 투자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인프라와 그것을 통해 운영되는 모든 데이터를 누가 운영하고 소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이러한 모든 서비스가 시장에 의해 조달되고 단지 사후에 규제되어야 한다는 걸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그것을 두서없고 유물론적인 관점 양측 에서 쓰는 것은 도전이다─의 역사에 대한 나의 계보학적 연구의 과정에서 나는 적잖은 시간을 실리콘 밸리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지를 이해하려는 데 투자했다. 실리콘 밸리 그 자체를 어떤 더 광범위의 역사적 내러티브─생산과 소비에 있어서의 변화, 국가 형태에 있어서의 변화, 감시 능력의 변화와 미군의 요구에 대한─ 위에 위치시키지 않으면, 어떤 그럴 듯한 이야기도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선 맑시스트의 역사 기록학[각주:1]으로부터 배울 점들이 많다. 특히 ‘인터넷’의 기존 역사 대부분이 자본과 제국에 대한 의문은 등한시 한 채, 관념적인 엉뚱함ideational irrelevance에 빠져있을 상황에서 말이다.

 

2013년 여름 혹은 가을에 나는 점증하는 개인 데이터의 상품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실래콘 밸리─스마트 침대, 스마트 차, 그리고 스마트한 모든 것─에 의해 중개되는 하나 혹은 다른 방식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로 (또한, 짐작건대 자고 있을 때에도) 보내는 모든 순간들을 포착해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데이터 포트폴리오를 관장curate하는 데이터 사업가로 초대된다. 분석적으로 봤을 때, 모든 것에 대한 데이터화는 일상의 금융화라는 광범위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는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을지 등의 의문들에 대한 답변이 기술보다는 정치에 더 밀접하다는 것이 어떻게 명백해질지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또한 내가 아무리 대안적 정책을 계속해서 제안할지라도,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것도 깨달았다. 유럽이 실리콘밸리를 대체할 만한 프로젝트들을 형성하는 데 그렇게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유럽의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단지 그로 인해 발생할 개입들─미국 기업에 대한 의존 줄이기, 경쟁력이나 기업가 정신을 기본으로 하지 않는 창업initiatives을 장려하기, 시민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인프라에 투자할 자본 모으기─이 현재 신자유주의적 유럽이 견지하는 입장과 명백히 대치되기 때문이다. 브뤼셀에서 거대 기술 기업들을 대표하는 로비스트들이 그러한 논쟁을 주도하는 상황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다른 말로 하면, 유렵이 ‘인터넷’을 다루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터넷’이 아니라 유럽을 역사화하는historicizing Europe 편이 훨씬 낫다. 한때 나는 가장 기초적인, 심지어는 피상적인 수준─예를 들어, 유럽의 반독점 및 경쟁촉진 법antitrust and competition law의 진화, 혹은 ‘사회적 혁신’이라는 순진한 이름 하에서 제3의 길[각주:2]과 뜻을 같이 했던 다양한 아이디어의 보급을 살핌으로써─에서 몇몇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스스로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안주함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인터넷이 모든 것으로 퍼지는 것과, 거대하고 중앙 집중적인 데이터수집의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가?

 

기술 기업들은 모든 종류의 정치적 어젠다를 법령화 할 수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그 우세한 어젠다는, 추방된 이민자나, 부채를 변제하지 못할 것 같은 빈민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중앙 집중적 데이터를 이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와 긴축austerity[각주:3]을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적절한 제도적─이로써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치적─설립에 있어서 거대한 긍정적 잠재력을 내포한다고 믿는다. 당신이 내 활동의 일부를 관찰한 뒤 내게 그것에 대해 제안하거나 예견할 때, 만약 나의 다른 활동 또한 관찰다면 서비스가 훨씬 더 나을 것이라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구글이 나의 웹 검색, 이메일, 위치를 관찰한다는 사실은 이 카테고리들 각각에 대하여, 만약 그들 중 단 하나만을 관찰했을 때에 비해 훨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이러한 논리를 견지하면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 200개의 다양한 정보 서비스 공급자─규모 효과scale effect(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로 이해하면 될 듯 – 옮긴이)로 이용자들은 편리해지므로, 당신은 단 하나의 공급자를 원한다─를 원하지 않으리란 것은 명백하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공급자가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어야 하는지, 혹은 정보국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운 데이터 공유 협약에 도달할 수 있는, 연합되어 공적으로 운영되는 서비스들의 집합이어야 하는지다.

 

대중교통은 때로 손님을 하나도 태우지 않는 기차도 운행되는 현재의 엄격한 체계에 비해, 만약 어디서 사람들을 태워야 할지에 대한 예측분석 등으로 모든 사람들의 위치에 근거하여 조정될 수 있다면 훨씬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그건 단지 비용을 절감해줄 뿐만 아니라, 환경 친화적인 인프라를 설계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나는 모든 이가 전자 팔찌(범죄와는 전혀 상관없다 – 옮긴이)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록 그러한 장비들은 주(州) 차원─국제적일 필요는 없다─에서 작동되어야겠지만, 나는 그런 장비들을 감시하는 데에 반대하지 않는다. 당신이 비(非)-신자유주의적 체제가 21세기에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환경과 기술 모두에 여전히 건설적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종류의 문제를 붙들어야 한다. 그 문제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 당신은 단지 어떤 회사가 공급할 수 있는 서비스들보단, 우리의 공동체 생활을 위한 전반적인 정보 인프라에 대해 생각하고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괜찮아, 우리가 사기업들이 그렇게 하도록 규제할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타당하지 않다. 지금 이 시점에 구글을 규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리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에게, 구글을 규제하는 것은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좋다, 구글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자.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 그 순간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붙들 힘과 자원을 갖지 못한다. 유럽에는 필수적인 대안적 비전을 발전시켜나갈 정치적 의사가 없다. 상황은 바뀔지도 모른다. 내년에 포데모스Podemos[각주:4]와 시리자Syriza[각주:5]가 선거에 승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비-신자유주의적이지만 기술친화적인 세계의 유토피아적인utopian 비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당신이 성립하리라 예상하는 상대적으로 양호한benign 중앙 집중적 ‘빅 데이터’ 배치를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찬양을 늘어놓지 않는 정부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민간 기업들이 이러한 것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또한 내기에 응하여, “우리는 개인들의 프라이버시를 믿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감시받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데이터에 대한 모든 요청사항들을 되돌리는 강력한 법적 체계를 갖출 것이다.”라고 말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프라를 좀먹는 너무 과도한 율법주의로 역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좀 까다롭다. 문제는 어떻게 실제적으로 시민들을 위한, 심지어는 검색 엔진의 경쟁에도 호의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재 강력한 기업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주로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 때문이었고, 그 힘을 억제할 유일한 방법은 그 데이터를 완전히 시장의  영역에서 빼와서 어떤 회사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데이터는 시민들에게 생길 것이고, 다양한 사회적 층위에서 소유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를 사용하고자 하는 기업은 일종의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하고, 정보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정보의 특성attributes에 접근 할 수 있다.

 

이런 데이터의 저량(貯量)이 결국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기업 저장고로 끝나지 않고 성장하도록 허가할 법사회적 체제를 이해하지 않고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걸 이해한다면, 모든 종류의 사회적 실험이 가능해질 것이다. 충분한 데이터로 당신은 개별 소비자─지역 사회, 지역, 도시의 차원에서─라는 지평선 너머에서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 그것만이 집중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데이터의 법적 위치를 바꾸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당신은 기본적인 선택이 ‘빅 데이터’ 세계의 두 형태─하나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민간 기업에 의해 운영되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같은 기구에 의해 운영되는─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 시스템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 데이터의 위치를 변화시킬 법률을 통과시켜야 하며, 그것을 집핼할 국가 필요하다. 확실히 그렇지 않다면 국가의 개입은 줄이는 편이 낫다. 나는 모든 이들의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마치 비밀경찰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공유재commons에 대한 급진 좌파의 언급은 눈여겨볼만 하다. 단지 중앙 집중적으로 계획되고 운영되는 저장소를 기본으로 하지 않을 데이터 저장소, 데이터 소유권, 데이터 공유의 구조를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소유된다면, 굳이 국가에 의해 운영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또 다른 아이디어는 시민들에게 데이터에 대한 소유권을 넘김으로써, 하지만 기본적인 법적 위치는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구글과 페이스북의 독점을 종식시킬 것이다. 그렇게 개인들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그건 재런 래니어[각주:6]의 모델이다. 하지만 만약 시민들에게 돈 찍어내는 기계로서 데이터를 건넨다면, 우리는 모두 기업가가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일상의 금융화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확대되어 사람들에게 그들의 생각, 감정, 사실, 아이디어를 화폐화하려는 강박관념─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분명해진다면, 그들은 개방 시장에서 구매자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을 심어놓을 것이다. 이건 인간 사회의 풍경을 현재 신자유주의의 주관성보다 훨씬 악화시킬 것이다. 내가 보기엔 오직 세 가지 옵션이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최상의 알고리즘을 보유하고 있고 최선의 예측을 할 수 있다는 등의 근거에 따라, 그들이 모든 것을 중앙 집중화하고 모든 데이터를 모으는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시민들이 그것을 소유하고 팔 수 있게 데이터의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다. 또는 시민들은 그들의 데이터를 소유하지만, 그들 삶에 대한 보다 공동체 차원의 계획을 위해 팔진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선호하는 옵션이다. 

 

그럼 당신은 미래는 불가피하게 지금(컴퓨팅 파워의 대규모 집중화와 하나의 독점 또는 과점에 의해 운영되는 데이터)과 같을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가?


최후의 전선(戰線)은 명백하다. 그것은 이 모든 센서, 필터, 프로필과 알고리즘을 관료제와 기업으로부터 해방시켜 시민들과 지역 공동체가 이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만약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경향이 지속된다면, 상상컨대 부자들은 그들의 감각을 배양하고, 언어를 배우고, 예술을 알아가고, 공부하는 데 즐기는 반면, 빈자는 데이터에 따라 처리하는 자동화의 노예(‘노예’라는 표현은 의역임 – 옮긴이)─그 결과, 그들의 모든 시간은 일하는 데 쓰일 것이다─가 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컴퓨팅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이 어디에 쓰일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회사들이 그들의 권역을 일상까지 확장해서 심지어 왜 당신이 다른 모델을 원하는지 조차 명확히 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 이르리라 예견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런 기업들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러한 기술과 정치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허용하거나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 60년대 머레이 북친[각주:7]이 <Post-Scarcity Anarchism>[각주:8]에 실린 그의 에세이에서 언급했던 (우리를 풍요롭게 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기술이 맡을 거라는 유토피아적 미래를 짐작할 수도 있다.

 

- 끝 -

 

 

<원문 p. 61-66>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gizmodo.com/5875571/google-just-made-bing-the-best-search-engine
http://newstrack.ng/technology/33-ict/4774-facebook-rolls-out-video-calls-on-messenger-in-nigeria-norway-oman-us-others
http://setup.nl/content/evgeny-morozov-boat

 

  1. 맑시스트 혹은 사적유물론자의 역사기록학은 맑시즘에 영향을 받은 역사기록학의 한 유파다. 맑시스트 역사기록학의 주된 교리의 중심에는 역사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적 제약과 사회 계급이 있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2. 좌ㆍ우의 이념을 초월하는 실용주의적 중도좌파 노선을 일컫는 말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정책 브레인으로 잘 알려진 앤서니 기든스가 논문 <좌우를 넘어서>에서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로 제시한 데서 출발한다. 앤서니 기든스는 <제3의 길>이란 저서에서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제3의 길'로 불리는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경제학에서, austerity는 정부 예산 적자를 줄이는 정책을 말한다. austerity 정책은 종종 지출 삭감, 증세, 또는 둘의 혼합을 포함한다. austerity는 수익을 지출에 가깝게 맞춤으로써 신용평가기관과 채권자들에게 정부의 재정 원칙을 입증하기 위해 실시되곤 한다. austerity는 또한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추동되거나, 외부 기관에 의해 시행되기도 한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4. ([poˈðemos], 영어로 “할 수 있다”로 번역되는) 포데모스는 2014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를 중심으로 창설된 스페인의 좌파 정당이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5. 두문자어로서 Syriza(때로는 SYRIZA로, 그리스어로는 ΣΥΡΙΖΑ, 발음은 [ˈsiɾiza])로 널리 알려진 극좌 연합은 그리스의 좌파 정당이며, 2004년 좌파와 극좌 정당의 연합으로 탄생하였다. 시리자는 그리스 장관을 역임하고 있는 알렉시스 치프라스Alexis Tsiprasf 당의장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의회의 최대 다수당이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6. Jaron Lanier Lanier에 대해선, Rob Lucas, ‘Xanadu as Phalanstery’, NLR 86, March-April 2014 참고. [본문으로]
  7. 머레이 북친(1921.1.14. - 2006.7.30.)은 미국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서 작가, 연설가,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였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8. 는 램파트Ramparts 출판사에서 1971년에 출간된, 머레이 북친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북친은 가능한 무정부주의의 형태는 빈곤-이후의 조건 하에서가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의 개요을 서술한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며칠 전 미국의 가장 큰 고용주인 월마트가 50만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한다는 발표를 했다. 다수의 노동자가 얻는 것은 미미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발표는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우선, 여파가 있을 것이다. 월마트는 매우 큰 기업이기 때문에 월마트의 행위는 아마 다른 기업들에 고용된 수백만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로,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건, 월마트의 행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다. 즉, 저임금은 정치적인 선택이고,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

 

배경지식을 좀 살펴보자. 보수주의자들은─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여러 경제학자들의 지원 하에서─보통 노동시장이 다른 어떤 시장과도 같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들에 따르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임금수준을 결정하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 법칙에 반항하는 이를 처단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관점은 임금을 상승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국에는 실패하거나, 나쁜 결과를 낳을 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최저임금 설정은 농산물 가격의 안정을 위한 시도가 버터 산(山), 와인 호수 등으로 이어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고용을 줄이고 노동자 잉여를 창출할 것이다. 고용자들에게 지출을 압박하거나,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을 장려하는 것도 같은 효과를 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소일렌트 그린Soylent Green─즉, 노동력─은 사람이다. 그리고 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금은 사실상, 버터의 가격과 같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얼마를 받느냐는 단순한 노동과 공급보단 사회력과 정치적 권력에 달려 있다.
 
그 증거는 무엇일까? 첫째, 최저임금이 증가했을 때, 실제로 어땠는지를 보자. 여러 주들은 연방 수준보다 높게 최저임금을 책정했고, 임금을 높인 주와 그렇지 않은 인접한 주를 비교할 때 무엇이 발생했는지(최저임금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 옮긴이)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을 높인 주가 많은 수의 일자리를 상실했을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다. 자연실험natural experiments으로부터 도출된 압도적인 결과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점진적인 증가는 고용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혹은 아예 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가 있다. 우리가 보통 속한 중산층 사회는 비인격적인 시장력의 결과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적인 행위에 의해, 짧은 기간 동안 형성되었다. 미국은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매우 불평등한 사회였지만, 1950년에 극적으로 소득 격차가 줄어듦으로써 바뀌었고, 이를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로버트 마르고Robert Margo는 ‘대압착’Great Compression이라 이름 붙였다.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발생했던 것일까?

 

해답의 일부는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정부의 임금결정 당국(우리나라의 최저임금위원회라고 생각하면 될 듯 – 옮긴이)이 최고 임금과 최저 임금의 격차를 줄이고자 했을 때의 직접적인 정부의 개입이다. 또 다른 해답은, 물론 노조 형성의 급격한 증가였다. 다른 해답으로는 전쟁 기간의 완전 고용 경제였고,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매우 강력한 수요를 창출해냈으며, 노동자들에게 보다 높은 임금을 좇을 수 있는 권한을 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압착기’가 전쟁이 종결되자마자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대신, 완전고용과 친(親)노동자pro-worker 정책은 보수 기준을 바꾸었고, 강력한 중산층은 한 세대를 넘어 지속되었다. 오, 그리고 전후 수십 년은 또한 전례 없는 경제적 성장으로 점철되었다.

 

나를 월마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매업자의 임금 상승은, 비록 훨씬 약한 형태일지라도, ‘대압착기’로 이어졌던 것과 같은 힘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월마트는 노동자의 상당수가 식품 할인 구매권으로 살아가고, 저소득층 의료 보장 제도의 관할 하에 있는 원인으로서 매우 낮은 임금에 대한 정치적인 압력을 받고 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안 좋은 직업을 그만 두려는 의지가 증가하는 데서 드러나듯, 개선되는 노동 시장 덕분에 점차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아직까지─아직 월마트는 어쨌든 임금을 올릴 준비가 되어있다.─이러한 압력이 그렇게 심각해보이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보에 대한 월마트의 합리화는 월마트의 저임금 정책에 대한 비판이 몇 년 동안 말해왔던 것을 반복한다.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더 많이 주는 것은 이직률을 줄이고, 사기를 고취시키며, 생산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인 수천만 인구의 중요한 보수 증가를 획책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암시하는 것보다 거의 확실하게 쉽다는 것이다. 상당 정도 최저임금을 증가시키기.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증가시킴으로써 그들이 조직화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하기. 갑작스레 바이마르 독일처럼 전락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경제를 침체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반하여, 완전 고용을 지향하는 직접적인 통화, 재정 정책. 이런 것들은 행하기 어려운 리스트가 아니다.─그리고 이런 것들을 행한다면, 우리 대다수가 살고 싶어 하는 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주요한 진일보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극도의 불평등과 미국 노동자들의 감소하는 재산은 선택의 문제이지, 시장이라는 신에 의해 점지된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원한다면 그러한 선택을 바꿀 수 있다.

 

 

Walmart&rsquo;s Visible Hand - NYTimes.pdf


사진출처:
http://image.newstomato.com/newsimg/2013/2/16/335160/1.jpg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③

 

 


핵심적인 이슈는 이 영역에서 독점화의 정도 혹은 비율이 아닌가? 이 기업들은 전임자들보다 훨씬 크게, 그리고 빠르게 성장해왔다. 자동차나 항공기 산업에서 과점체제의 출현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구글은 겨우 1996년에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같은 기업들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나 네트워크 효과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할수록, 그것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며, 각자 2천만 명의 유저를 거느린 채 경쟁하는 다섯 개의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건 결코 말이 안 된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플랫폼에 있기를 바랄 것이다. 검색 엔진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글을 사용할수록, 모든 검색은 어떤 점에선 해당서비스의 개선이자 수선tinkering이기 때문에 구글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글이 다른 도메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매우 빨랐다. 현재 그들은 온도 조절 장치, 자율주행차, 건강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구글과 페이스북은 소위 제3세계 국가들에의 연결도 추진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모든 이들이 온라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데, 추가되는 3, 4십억의 눈알들이 광고비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구체적인 조건 하에서under very specific terms 고객들을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한다.

 

빈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온라인에 접속할 것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은 이동통신사를 파트너로 삼는다. 유저들은 그들이 접속하고 다운로드 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만,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진 않는다. 페이스북은 무료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상당한 비용이 든다.─그건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에 아마 긍정적일 것이다. 결국 다른 모든 서비스들은 페이스북에 게재되어야 하고, 따라서 페이스북은 콘텐츠가 유저들에게 제공되는 병목이자 관문이 된다. 그래서 만약 아프리카 학생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싶다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페이스북을 통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마침내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에 대한 데이터가 민간 기업에 의해 수집되고, 그들의 여생 동안 광고로 쓰이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전에는 오직 시장력에 의해 제한된 정도로만매개되었던 관계가, 페이스북이 사람들이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는 인프라의 제공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작스레 미국의 세계적 기업에 의해 점유된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론은 단지 페이스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반대론이다. 현재 꽤 유행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 대한 공격은 마치 실리콘밸리가 다른 모든 것들과 철저히 분리되어있는, 스스로의 역사력historical force인 것 마냥 다룬다. 유럽에선, 실리콘 밸리를 공격하는 많은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오랜 유형을 대변할 따름이다. 출판회사나 은행 등.

 

눈앞에 벌어진 이 모든 것들에 시대구분을 했을 때, 당신은 인터넷의 짧지만 빠른 역사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를 무엇으로 보며, 그것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석적인 변별점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 나는 ‘인터넷’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이 불만이다. 5, 60년대 이후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네트워크에서는 독립적이고 유사한 국면이 있었다. 만약 70년대 후반의 상황을 돌아본다면, 세계를 연결하는 12개의 네트워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불 네트워크payments network, 여행예약 네트워크travel-reservation networks 등. 종국에 인터넷이 되었던 그 네트워크는 지배 시스템이 명확하지 않았을 당시에 등장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규격 위원회Standard Committees에서, 그리고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의 수준에서─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또한 스마트폰 앱과 같은 개발이 있었는데, 구글과 같은 거대 기업이 생산하는 플랫폼에서 운영되기에 우리는 그걸 인터넷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지만, 인터넷네트워킹의 역사보다는 소프트웨어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 모든 역사들이 두서없이 ‘인터넷’이라는 용어로 집중됐던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이다. 만약 1993년에서 1997년 사이의 논쟁을 공부한다면, 이 단어(인터넷)는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였다. 

 

90년대의 대부분, 당신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종다양한 기대와 불안, 해석, 비전과 그것을 나타내는 수많은 경쟁적인 용어들─가상현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인터넷─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 매체로서 인터넷이 그 모든 것들을 앞질렀고, 다른 용어들이 사라져갈 때 인터넷은 조직하는 메타카테고리organizing metacategory가 되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다. 인터넷은 영원하거나 문제가 없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그것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주정부 지원하의 인프라, 인프라의 민영화에서) 이 모든 유사한 역사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역사적 문맥을 빼앗고 전형적인 근원설a typical origin story을 만들어낸 분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발명─빈트 서프Vint Cerf와 다르파DARPA─이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의 역사와 함께 이 매력적인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각주:1]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재 우리의 인터넷 담론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담론들의 통합에는 하나의 객관적인 기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러한 기존의 네트워크가 각각 존재할 당시에, 기본적인 인터넷 프로토콜─TCP/IP[각주:2]─이 그들 모두가 단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현상에 등장하지 않았나?

 

나는 TCP/IP 프로토콜의 현실성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용어로서 인터넷의 산만한 통합은 거부한다. 내 걱정은 사람들이 이 구조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일련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마치 인터넷에 게재된 서비스들이 기업들에 의해 운영되거나 정부에 의해 감시되지 않는 것처럼 가정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끝장낼 거야.”, 혹은 “인터넷은 실패할거야.”, 또는 “인터넷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거야.” 이런 식의 말들은 거의 종교적이다. 나는 심지어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내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컴퓨터에서 이용하는 것과 인터넷 이전, 그러니까 40년 전에 몇몇 도서관에서 운용되던 정보체계 사이에는 대다수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암시하는 것보다 연속성이 훨씬 강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다 날카로운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이러한 국면을 바라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60년대에 MIT나 다른 어떤 곳의 엔지니어들은 현대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공익사업으로서 컴퓨터 사용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MIT 같은 장소에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사람들의 집에서 전기나 물을 쓰듯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한 장소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세서를 돌릴 필요가 없거나 자신만의 하드웨어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 IBM같은 거대한 컴퓨터 회사들은 대부분 큰 사업체의 중앙 컴퓨터를 공급하고 있었다. 개인 유저들, 가족들, 소비자들에게는 공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70년대 반문화와 반제도적anti-institutional 풍조 덕분에, 애플 같은 기업들이 이러한 거대 회사들의 지배구조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고, 컴퓨터가 단지 관료제와 공격의 기계가 아니라, 해방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데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과 <지구백과Whole Earth Ctalog>[각주:3] 같은 간행물의 지적인 조력자들─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이 DIY 패러다임을 고취시키고 있던 반문화 진영─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상호연결─당신은 상호연결된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되어있는지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 당신에게는 그저 대학들이 있었고, 개인 컴퓨터 사용을 향한 이동이나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클라우드 컴퓨팅으로의 이동은 그러한 초기의 수사rhetoric─물론, 이제는 인프라의 공적인 운영과 관리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공익사업에 대한 어떠한 비유도 거부하는 것을 제외한다면─를 반복하고 있다.

 

중앙 집중화된 ‘빅 데이터’라는 현재의 현상은 이 유구한 역사 위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겠는가?

 

‘빅 데이터’는 지난 몇 년에만 해당하는 특유의 것이 아니다. 이 데이터 수집을 추동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터넷 논쟁은 잊고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액시엄Axiom(Acxiom의 오기인 듯 - 옮긴이)이나 엠실론 같은 기업들에 정보를 파는 데이터 은행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들은 데이터를 누구에게 파는가? 은행, 보험 회사, 사설 탐정 등등에게다. 60년대 후반 미국에선 데이터 은행의 역할과 잠재적 남용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빅 데이터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국립 데이터 은행을 운영하고 연방 기관이 수집한 모든 정보들을 모든 개개의 기관이나 대학이 접근할 수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통합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의회를 포함하여 엄청난 논쟁이 일었다. 결국에 그 아이디어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부결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과학자들과 기업들은 데이터가 수집되어온 이래로, 암에 대한 치료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에─정확히 현재 빅 데이터와 관련된 수사와 같은 종류다─다른 연구자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핸드폰, 스마트기기, 또는 컴퓨터를 통해 추적되고, 점차 그 양이 증폭되고 있으므로, 정보는 훨씬 더 쉽게 생산된다. 이제는 수집된 양이 상당히 많아졌으므로, (이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터넷 논쟁은 모든 것을 추상적인 기술의 역사의 일환으로 이야기하는, 일종의 기억상실증과 함께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구글의 메인 랭킹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사실상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정보 과학과 색인 작업indexing에 투자한 작업의 결과였다. 어떤 아이템이 연관되었고 그렇지 않은지─누가 무엇에 연결되어있는지, 인용 패턴 등을 살펴봄으로써─를 결정하는 데 구글이 사용하는 메커니즘은 학계 논문에 대한 색인 작업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했다. (즉) 그들만의 개발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보 과학에서의 발전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절대 추측할 순 없을 것이다. 유사하게, 오늘날 ‘온라인 공개수업massive open online courses’[각주:4]을 듣는 이들은 5, 60년대에 B. F. 스키너Skinner같은 사람들이 말했던, 강사를 없앨지도 모를 ‘교수기계teaching machine’[각주:5]를 촉진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모른다. 교육을 자동화하려는 전통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여러 스타트업이 같은 영역에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초기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모든 분야─교육, (‘자가측정quantified self’[각주:6]와 함께) 의료, 그리고 모든 나머지들─에 퍼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되고, 그 외의 다른 권력이나 대의명분이라고는 없는, 멍청한 역사로 끝나버릴 위험에 처해있다.

 

당신은 지난 10여 년간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집중화로의 이러한 추동이 얼마나 불가피하다고 보는가?

 

경계를 넘어서 집중화로 향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또한 특정 속도를 도메인과 레이어 각각에 부여하는 산업 역학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데이터에 발생하는 것은 핸드폰 제조에서 발생하는 것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구글과 페이스북은 그들이 지식과, 지식이 통과하는 출구를 만들어내는 센서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세계의 지식을 조직하는 사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속담이 그러하듯 ‘무더기’를 조작하기 위해 그들이 모든 층위─운영체계, 데이터, 색인 작업─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재의 역경향을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구글의 목표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조직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 대한 근원적인 정보 인프라를 운영하는 것이라면, 구글이 그들 모두를 붕괴할 좋은 위치에 있게 될 거란 사실을 더 많은 산업과 기업이 깨닫게 되면 긴장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현재 국영 기업들─종종 당연하게도 구글이 자동차 산업을 인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독일 자본─에 의해 유럽 정책 입안자들은 구글을 와해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독일의 거대한 빅 미디어 기업들에도 구글을 염려할 까닭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산업 내 경쟁은 속도가 늦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시민들에게 그렇게 유리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구글과 페이스북은 자연독점으로 보이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와해시키려는 유럽의 미미한 압박에는 경제, 정치, 혹은 생태적으로 어떠한 대안적 비전도 없다.

 

 

<원문 p. 56-60>

 

Isn’t the key issue the rate and degree of monopolization in this area? These companies have grown much bigger and faster than their predecessors. It took a lot longer for oligopolies to emerge in the automobile or aircraft industries. Google only started in 1996.

 

That’s a function of the nature of the service and the network effects in companies like Google and Facebook. The more people are on Facebook, the more valuable it becomes, and it doesn’t really make sense to have five competing social networks with twenty million people on each; you want all of them on one platform. It’s the same for search engines: the more people are using Google, the better it becomes, because every search is in some sense a tinkering and improvement in the service. So Google’s expansion into other domains has been very fast. Right now they do thermostats, self-driving cars, health. Google and Facebook are even trying to bring connectivity to so-called Third World countries. For them it’s important to get everyone in Africa and Asia online, because that’s the next few billion eyeballs to be converted into advertising money. But they get their customers online under very specific terms.


Facebook takes mobile operators as partners, since in poor countries most people will get online through their mobile phones. Users pay for what they access and download, but don’t have to pay to access Facebook. Facebook comes free, and everything else is at a price—so that’s supposedly positive, because it’s better than paying for everything. The result is that all other services have to establish a presence on Facebook, which thus becomes the bottleneck and gateway through which content is fed to users. So if you wanted to provide education to students in Africa, you’d be better off doing it through Facebook, because they wouldn’t have to pay for it. You would then end up with a situation where data about what people learn is collected by a private company and used for advertising for the rest of their lives. A relationship previously mediated only in a limited sense by market forces is suddenly captured by a global American corporation, for the sole reason that Facebook became the provider of infrastructure through which people access everything else. But the case to be made here is not just against Facebook; it’s a case against neoliberalism. A lot of the Silicon Valley-bashing that is currently so popular treats the Valley as if it was its own historical force, completely unconnected from everything else. In Europe, many of those attacking Silicon Valley just represent older kinds of capitalism: publishing firms, banks etc.

 

In a periodization of how all this came about, what do you see as the critical turning points in the short but fast history of the Internet, and what are the most important analytical distinctions to be made within it?


I’m dissatisfied, as I’ve said, with the ambiguity of the term ‘the Internet’. From the fifties or sixties onwards, there were separate, parallel developments in software, in hardware, in networks. If you look back at the situation in the late seventies, you find a dozen networks connecting the globe: the payments network, the travel-reservation networks and so on. That the network which eventually became the Internet would emerge as the dominant system was not obvious. It took a lot of effort—in standards committees, and at the level of organizations like the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to make that happen. There were also developments such as smartphone apps, which we now perceive as part of the Internet because they run on platforms produced by giant companies like Google, but which make more sense within the history of software than that of internetworking. The fact that all of those histories discursively converged on the term ‘Internet’ is itself a significant historical development. If you study the debate between 1993 and 1997, this wasn’t the most popular term to talk about these issues; that was ‘cyberspace’.


For most of the nineties, you still had a multiplicity of different visions, interpretations, anxieties and longings for this new world, and a lot of competing terms for it—virtual reality, hypertext, World Wide Web, Internet. At some point, the Internet as a medium overtook all of them and became the organizing metacategory, while the others dropped away. What would have changed if we had continued thinking about it as a space rather than as a medium? Questions like these are important. The Net isn’t a timeless, unproblematic category. I want to understand how it became an object of analysis that incorporates all these parallel histories: in hardware, software, state-supported infrastructures, privatization of infrastructures, and strips them of their political, economic and historical contexts to generate a typical origin story: there was an invention—Vint Cerf and darpa—and it became this fascinating new force with a life of its own.6 Essentially, that’s our Internet discourse at present.

 

But isn’t there at least one objective basis for the unity of these discourses about the Internet: that, while all these previous networks existed separately, once the basic Internet protocol—tcp/ip—came onto the scene they all tended to converge into a single integrated structure?


I’m happy to accept the reality of the tcp/ip protocol, while also rejecting the discursive unity of the Internet as a term. My concern is that people assume there is a set of facts which derives directly from this architecture, as if the services that are built on it are not operated by companies or monitored by states. They start saying things like: it will break the Internet, or the Internet will fail, or the Internet will not accept it. This kind of talk is almost religious. I might even say that the Internet does not exist. This is not to deny that there is something which I use every day; but there’s much more continuity than many of these narratives suggest between what I use on my computer and an information system that ran in some library forty years ago, before the Internet.


So how might we begin looking at these developments in a sharper socio-historical perspective?


In the sixties, engineers at mit and elsewhere had a vision of computing as a public utility that looked very much like contemporary cloud computing. Their idea was that you would have one giant computer in a place like mit, and then in people’s houses you would get computing
just as you do electricity or water. You wouldn’t need to run your own processor or have your own hardware, since it would all be centralized
in one place. At that time the big computer companies like ibm were mostly supplying mainframe computing for big business—they didn’t cater to personal users, families, consumers. Thanks in part to the anti-institutional climate and counterculture of the seventies, companies like Apple challenged the dominance of those big players. It took a lot of effort by people like Steve Jobs, and their intellectual enablers in publications like the Whole Earth Catalog—Stewart Brand and the countercultural wing that was promoting this do-it-yourself paradigm—to convince consumers that computers could be owned and operated by individuals; that they were creative new tools of liberation, and not just machines of aggression and bureaucracy.


Unless you understand this, it’s hard to see how everything got interconnected—you needed something to interconnect. At the beginning you just had the universities, and it would have stayed that way if there had been no change of mentality, no shift towards personal computing. Today the move to cloud computing is replicating some of that early rhetoric—except, of course, that companies now reject any analogy with utilities, since that might open up the possibility of a publicly run, publicly controlled infrastructure.


How should the current phenomenon of centralized ‘big data’ be located in this broader history?


‘Big data’ isn’t something unique to the last few years. To understand what’s driving this data collection, you need to forget Internet debates and start focusing on the data banks selling information on the secondary market—companies like Axiom and Epsilon. Who are they selling their data to? To banks, insurance companies, private investigators and so on. There was a debate in the late sixties about the role and potential abuse of data banks in America, which was not all that different from the big data debates today. At stake was whether the us should run national data banks and aggregate all the information collected by federal agencies into one giant database accessible to every single agency and every single university. It was a huge debate, including on a Congressional level. In the end the idea was killed because of privacy concerns. But a lot of scientists and companies made a case that since the data had been collected, it ought to be made accessible to other researchers, because it might help us to cure cancer—exactly the sort of rhetoric you hear now with Big Data. Nowadays the information can be produced far more easily because everything we do is tracked by phone, smart gadget, or computer, and this amplifies its volume. So much is now gathered that you can argue it deserves a new name. But these Internet debates tend to operate with a kind of amnesia, narrating everything in a kind of abstracted history of technology.

 

There’s a story to be told even about Google’s main ranking algorithm, which actually comes out of decades of work on information science and indexing. The mechanism that Google uses to determine which items are relevant or not—by looking at who links to what, citation patterns etc—was developed in relation to the indexing of academic literature; it’s not their own invention. But you would never guess that without knowing something about developments in information science. Likewise, people looking at these ‘massive open online courses’ today don’t generally know that in the fifties and sixties people like B. F. Skinner were promoting what he called ‘teaching machines’ that would dispense with an instructor. There’s a continuous tradition of trying to automate education. The fact that a bunch of start-ups have now moved into the area does not erase those earlier developments. Now that ‘the Internet’ is spreading into everything—education, healthcare (with the ‘quantified self’), and all the rest—we’re in danger of ending up with a kind of idiot history, in which everything starts in Silicon Valley, and there are no other forces or causes.


How inevitable do you regard this drive towards technical and organizational centralization over the last decade or so?


There are tendencies towards centralization across the board, though there are also industry dynamics which lend a specific tempo to each domain and layer. So what is happening with data should be distinguished from what is happening in phone manufacturing. But Google and Facebook have figured out that they cannot be in the business of organizing the world’s knowledge if they do not also control the sensors
that generate that knowledge and the gateways through which it passes. Which means that they have to be present at all levels—operating systems, data, indexing—to establish control over the entire proverbial ‘stack’.


Can we perceive any counter-tendencies at present?


Tension may arise when more and more industries and companies realize that, if Google’s aim is not only to organize all of the world’s knowledge, but also to run the underlying informational infrastructure of our everyday life, it will be in a good position to disrupt all of them. That may generate resistance. At present there is pressure on European policy-makers to break up Google, driven by national firms—often German capital, which, understandably, is fearful that Google could take over the auto industry. The big media empires in Germany also have reason to be worried by Google. So this kind of intra-industry fight might slow things down a little. But I don’t think it will benefit citizens all that much, since Google and Facebook are based on what seem to be natural monopolies. Feeble calls in Europe to weaken or break them up lack any alternative vision, economically, politically, or ecologically.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www.ted.com/talks/evgeny_morozov_is_the_internet_what_orwell_feared?language=ko#t-20261

 


  1. DARPA: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펜타곤의 한 기관. 빈트 서프는 그곳의 핵심 인물이다. [본문으로]
  2. TCP/IP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핵심 프로토콜이다. 인터넷에서 전송되는 정보나 파일들이 일정한 크기의 패킷들로 나뉘어 네트워크상 수많은 노드들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경로들을 거쳐 분산적으로 전송되고, 수신지에 도착한 패킷들이 원래의 정보나 파일로 재조립되도록 하는 게 바로 TCP/IP의 기능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지구백과 Whole Earth Ctalog(WEC)>는 미국의 반문화 잡지였고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도 하에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그리고 이후 1998년까지는 간헐적으로 발간되었다. 잡지는 에세이와 기사를 특징으로 했지만, 주로 제품 리뷰에 집중했다. 편집 방향은 자급자족, 생태학, 대안교육, DIY, 전체론holism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도구에 대한 접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WEC는 광범위한 제품들(옷, 책, 도구, 기계, 종자 등)을 나열하고 리뷰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직접적으로 판매하진 않았다. 대신에, 판매자의 연락처를 아이템과 리뷰 옆에 기재해놓았다. 비록 정기적으로 간행되진 않았으나, 다양한 형식으로 수많은 판본과 최신판이 있었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4. 웹 기반의 온라인 공개 강좌. 정규 교육의 보조 수단에 머물지 않고 수업과 시험 등의 교육 체계를 갖춘 대학 강좌를 가리킨다. 여러 사람에게 강좌를 널리(massive) 공개(open)하기 때문에 기존 대학 교육 체계를 크게 바꿀 태세다. 미국 유명 대학이 앞서 시작했으며, 일본의 주요 대학도 2014년부터 인터넷으로 강좌를 제공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케이무크(K(Korea)MOOC)가 추진된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5. 행동주의적 학습원리를 교육의 실천 분야에 응용한 것으로 학습자가 개별적으로 자기속도대로 학습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된 자동학습장치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6. 자가측정이란 개인 일상에 있어서 투입(음식 소비, 주변 공기의 질), 상태(기분, 각성, 혈류 산소 수준), 그리고 행위(정신적이고 육체적인)의 측면에 대한 데이터의 습득과 기술을 통합시키는 움직임이다. (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그 어젠다의 정치적 결말은 무엇이었나?

 

2009년 국무부가 이란의 녹색 시위[각주:1]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일면에 실렸다. 다른 나라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던 트위터가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의 선거 이후 이란에서 시위의 움직임이 싹트고 있을 때 웹사이트 점검 계획을 결정하자, (비록 트위터를 이용하는 이란인 수는 꽤 과장된 면이 있었지만) 트위터 커뮤니티의 분노를 유발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때, 코엔은 트위터 최고 중역 중 한 사람에게 점검을 늦춰달라고 요구했고, 그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에 새어나갔다(혹은 넘어갔다). 그 사건은 이란 선거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읽힐 수 있었기 때문에, 코엔이 백악관과 마찰을 빚었다는 후문이 보도되었다. 그 사건 이후, 당시 에피소드는 미국 정부가 최소한 신흥 미디어 사용에 관여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었다. 실제로, 직업 외교관은 이 모든 것들을 싫어했다. 누군가는 이 두 젊은이들이 미국 외교 정책을 오로지 디지털을 기반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장문의 블로그 포스트를 쓰기도 했다. 그 에피소드는 실리콘 밸리가 단지 미국무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러시아, 이란, 중국 등의 국영 매체에서 인용되었다. 러시아에선, 미국 인프라American infrastructure로부터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정부 부내를 소집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급작스레 과두제 집권층들은 러시아 인터넷 기업들의 소유주를 매수하기 위해 크렘린Kremlin 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기업들은 문을 닫거나, 만약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 저항을 촉진시킬 위험이 보이면 내용을 삭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어느 정도 아랍의 봄the Arab Spring의 결과가  『넷 딜루전』을 입증한다고 보는가?

 

좀 더 확장해보자. 비록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단 하나의 메시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독자들 중 일부는 내가 인터넷은 불가피하게 시위자들과 반체제 인사들을 다스리는 식으로 정부의 편에 설 것이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내가 인터넷은 피상적이고 비효율적인 행동주의를 야기했으며, 실질적 변화를 원하는 이들에 의해 묵살당할 수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디지털 기술의 특정 양상은 사회적 움직임에 기여할 것이며, 다른 양상은 움직임을 억압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었다.─이러한 경향 중 어떤 것이 지배적일지는 대부분 한 국가의 정치적 역학에 의존한다. 또한 나는 이런 기술들에 대한 유명 담론이 세 가지 현실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기술들은 무엇보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적 기업들에 의해 운영 된다는 점. ‘인터넷 자유화’라는 슬로건들이 낡은 외교 정책의 고려사항들considerations을 갑자기 사라지게 하진 않는다는 점. (그에 대한 미국의 매혹은 냉전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유토피아적인 등장은 미국 정부 스스로 온라인에서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사이버공격, 감시, 정보 조작spin)과 조화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아랍의 봄은 내 예감의 상당수가 사실임을 보여줬다. 우리는 서양 정권이 리비아와 이집트에 감시 기술들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 만약 군정과 겨룰 만한 지속적인 정치구조를 광장 밖에서 형성하지 않는다면, 사회 연결망에 의한 수평적 움직임의 용이함은 제한적인 도움만 줄 뿐이라는 것, 아랍의 봄에서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역할에 대해 널리 퍼진 찬양이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란이 온라인 자원에 대한 지배를 한 층 더 팽팽하게 하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디지털 시위의 새로운 형식의 도래로서 아랍의 봄에 대한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정교한 미디어의 사용이 지적인 해방과 인권에 대해 높은 존중 따위로 이어지리라 믿게끔 했던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의 갱신된 버전에 불과했다. 이것이 넌센스라는 걸 보여주기에는 ISIS의 미디어 전략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의 관점에서 현재 인터넷의 소유구조는 어떠한가?

 

나는 그 구조 전체의 복잡한 지도를 그려보지 않았고, 현재 대부분의 작업은 ‘인터넷’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에 맞춰져있을 뿐이다. 하지만 기업들에 대해 말하자면, 명백히 하드웨어에서부터 소프트웨어까지 압도적으로 미국 기업이 많다.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적잖은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의 운영체계─안드로이드─는 구글의 것이다. 이제 다른 물음이 떠오른다. 안드로이드는 오픈소스[각주:2]지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대다수는 미국에 본부를 둔 기업이 공급한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클로즈드 소스보다 낫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안드로이드가 구글에 의해 운영되고, 구글 소유의 다른 제품들과 통합되어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편익을 줄인다. 그 결과로, 여전히 미국의 거대한 한 기업이 트래픽과 데이터의 상당량을 지배하고 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 걸었던 초기의 희망은 국가안보국과 같은 기관에 취약해질 수도 있는 코드에서 ‘비밀문backdoor’을 찾기 위해 그것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거대한 익스플로잇 공격exploits[각주:3] 시장이 있다는 걸 안다. 돈만 있다면, 당신은 심지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라도 익스플로잇 공격을 할 수 있다. 누구에게 돈이 있을까? 물론, 국가안보국이다.

 

자유로운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에선, 최소한 해커 대 감시자의 고양이와 쥐 게임cat-and-mouse games이 가능하지만, 애플처럼 폐쇄된 체계에서는 국가안보국 같은 기관들이 당신의 데이터에 접근하는지를 알 방도가 없다.[각주:4] 이런 구분이 아직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제 이 상황을 평가하기 위한 규범적 기준에 대해 명확하게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 만약 그러한 질문이 단지 사적인 차원이라면, 물론 오픈 소스가 훨씬 낫다. 하지만 그것이 이미 엄청난 개인정보의 저장소에 접근할 수 있는 구글과 같은 회사가 확장을 계속하고, 21세기 인프라의─건강, 교육 등에서─초기 공급자가 되기를 우리가 원하는지에 대한 이슈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그 서비스 중 일부가 애플에 비해 스파이 활동에서 좀 더 안전하다는 사실은 그러한 우려와 관련 없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미국 거대 기업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초국가적인 방법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는 나를 더 이상 설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국가들 혹은 정부들에 그들(미국 거대 기업 – 옮긴이)에게 덜 타협한 대안으로서less compromised alternatives to them 독자적인 기업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라고 장려한다.

 

스노든Snowden 이후, 여러 해커들은 특히 정부 스파이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들에겐 그것이 문제다. 그들은 시민 자유 옹호자civil libertarians이며, 시장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는다. 다른 해커들은 검열과 관련 있다. 그들에겐,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자유가 중대하며, 표현이 기업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스노든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지만, 취약한 보안 업무를 가진 기업을 없애고, 높은 수준의 투명한 관리, 의무와 함께 국가안보국에 대한 더 엄격한 감시를 한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실리콘 밸리와 좋은 관계로 지낼 것이다. 개인적으론 국가안보국이 우리의 시민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 모르는, 실리콘 밸리의 재력means으로 자본이 일상에 침식해 들어오는 것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이 어젠다─그리고 그것은 여러 미국 자유주의자들이 공유했다─를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노든의 개인적인 제안들은 여전히 법률을 엄격히 따른다. (스노든에 따르면 – 옮긴이) 만약 우리가 단지 미국 법률 체계에서 견제와 균형의 다섯 단계를 더 설립하거나, 대중public에 의해 잘 통제되는 법정을 구성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시장에 대한 더 무거운 정치적 질문이나 소유라는 이슈는 건드리지 않는다. 최근 작업에서, 나는 우리가 아직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에게서 뽑아간 데이터는 구글, 애플 그리고 다른 회사들의 대차대조표에 반영되는 대로 엄청난 가치를 갖는다. 맑시스트의 입장에서 이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당신이 광고를 하나 볼 때 누가 누구를 위하 일하고 있는가? 왜 구글이나 애플이 초기 소유주여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이 데이터를 감시하고monitor, 모으고, 팔기를 강요받고 있는가? 이것은 어느 정도로 일상의 금융화에서 새로운 분야가 되고 있는가? 시민적 자유의 측면에선 그러한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

 

 

<원문> p. 52-55

 

What was the political upshot of this agenda?


In 2009 the tale of the State Department’s help to the Green protests in Iran got front-page treatment in the New York Times. The official story was that Twitter, not knowing much about what was happening in other parts of the world, decided to schedule maintenance of their website just as protests were brewing in Iran after the election of Ahmadinejad, triggering outrage within the Twitter community (though how many Iranians were using Twitter was much exaggerated). At this point, Cohen asked one of Twitter’s senior executives to delay their maintenance, and the story leaked (or was passed) to the New York Times. Later it was reported that Cohen got into trouble with the White House, because this could be read as American intervention in the Iranian elections. After the event, the episode was spun to suggest the us government was at least in touch with emerging media use. Actually, career diplomats hated all this. Some wrote long blog posts complaining that these two youngsters were running us foreign policy on all things digital. The episode was used by state-owned media in Russia, Iran, China and elsewhere to prove that Silicon Valley was just an extension of the State Department. In Russia, you heard the first calls in government circles for something to be done about Russian dependence on American infrastructure. Suddenly there were moves by oligarchs close to the Kremlin to buy out the owners of Russian internet companies, so that they could either be shut down or have content removed if they risked provoking any social protest.


How far would you see the outcome of the Arab Spring as a vindication of The Net Delusion?


To some extent. Many people took the book to carry a single message, even if they rarely agreed on what it was. One group of readers thought I was saying that the Internet would inevitably favour governments over protesters and dissidents; another that I was suggesting the Internet led to shallow, ineffective activism and could be dismissed by those interested in real change. Actually, my argument was that certain aspects of digital technologies are conducive to social mobilization, and others to suppression of mobilization—which of these tendencies predominates largely depends on the political dynamics in a country. I also wanted to make clear that popular discourse about these technologies was completely disconnected from three realities: that they are operated by private companies interested, above all else, in making money; that slogans like ‘Internet freedom’ have not made old-style foreign policy considerations suddenly disappear (American fascination with them has its roots in the Cold War); and that their utopian appeal cannot be squared with most of the things (cyber-attacks, surveillance, spin) the us government itself was doing online.


So the Arab Spring did confirm many of my hunches. We learnt that Western companies were supplying surveillance technologies to Libya and Egypt; that the ease of horizontal mobilization afforded by social networks is of limited help if it doesn’t generate more lasting political structures that can contest the military rule outside the squares; that widespread celebration of the role of Twitter and Facebook in the Arab Spring led Russia, China, and Iran to take further steps to tighten control over their own online resources. Much of the talk about the Arab Spring as the arrival of a new style of digital protest, in fact, was an updated version of modernization theory, inviting us to believe that the use of sophisticated media leads to intellectual emancipation, greater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so forth. One look at isis’s media strategy is enough to show that this is nonsense.

 

What in your view are the current ownership structures of the Internet?


I haven’t developed a complex map of the entire stack of these, and much of my current work is on the ambiguity of this term, ‘the Internet’. But obviously, from hardware to software, if we are speaking of companies, these are overwhelmingly American. Samsung may have a respectable share of the smartphone market, but its operating system—Android—is Google’s. Which raises a further question. Android is open-source, but a lot of open-source software is provided by companies with headquarters in the us. Open-source software is no doubt better than closed-source, but the fact that Android is run by Google, and integrated with other products that Google owns, lessens the benefits of this. The outcome is still one giant us company in control of a vast amount of traffic and data. The initial hope with open-source software was that anyone could examine it for any ‘backdoors’ in the code that might make it vulnerable to agencies like the nsa. But we know that there is a huge market in exploits.4 If you have the money, you can exploit even open-source software. Who has the money? The nsa, of course.

 

With free or with open-source software, at least cat-and-mouse games of hacker-versus-surveiller are possible, whereas with closed systems like Apple’s there’s little way of knowing what access organizations like the nsa might have to your data.5 Shouldn’t one still make this distinction?


This is where we need to be explicit about the normative benchmarks by which we want to assess the situation. If the question is just privacy,then of course open-source is far better. But that doesn’t resolve the issue of whether we want a company like Google that already has access to an enormous reservoir of personal information to continue its expansion and become the default provider of infrastructure—in health, education and everything else—for the twenty-first century. The fact that some of its services are a bit better protected from spying than Apple counterparts doesn’t address that concern. I’m no longer persuaded by the idea that open-source software offers a kind of transnational way of escaping the grip of the American behemoths. Though I would still encourage other countries or governments to start thinking about ways in which they can build their own, less compromised alternatives to them.


Since Snowden, a lot of hackers are especially concerned with government spying. For them, that’s the problem. They’re civil libertarians, and they don’t problematize the market. Many others are concerned with censorship. For them, the freedom to express what they want to say is crucial, and it doesn’t really matter if it’s expressed on corporate platforms. I admire what Snowden did, but he is basically fine with Silicon Valley so long as we eliminate firms that have weak security practices and install far better, tighter supervision at the nsa, with more levels of transparent control and accountability. I find this agenda—and it’s shared by many American liberals—very hard to swallow, as it seems to miss the encroachment of capital into everyday life by means of Silicon Valley, which I think is probably more consequential than the encroachment of the nsa into our civil liberties. Snowden’s own proposals remain very legalistic: if we can only establish five more stages of checks and balances within the American juridical system, and a court that is better controlled by the public, everything will get better.


These debates don’t touch on issues of ownership or bigger political questions about the market. In my more recent work, I’ve argued that we don’t yet know how to address these. The data extracted from us has a giant value that is reflected in the balance sheets of Google, Apple and other companies. Where does this value come from, in a Marxist sense? Who is working for whom when you view an ad? Why should Google or Apple be the default owners? To what extent are we being pushed to monitor, gather and sell this data? How far is this becoming a new frontier in the financialization of everyday life? You can’t address such matters in terms of civil liberties.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6/Evgeny_Morozov_at_re-publica10.jpg

  1. 이란의 녹색 운동은 시위자들이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의 퇴진을 요구하던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 이후에 발생한 정치적 운동을 일컫는다. (옮긴이) [본문으로]
  2. 어떤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 필요한 소스나 설계도를 누구나 접근 해서 열람 가능하도록 공개하는 것. 보통 소스가 공개된 소프트웨어를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라고 하며, 소프트웨어 말고도 개발 과정이나 설계도가 공개되는 경우 하드웨어에도 오픈 소스 모델이 적용 가능하며, 글꼴과 같은 데이터에도 오픈 소스 개발 모델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옮긴이 – 엔하위키 미러) [본문으로]
  3. 익스플로잇 공격exploit: 기술적 버그나 취약성을 이용하는, 예를 들어 겨냥한 장비를 장악하는 기술을 나타내는 컴퓨터 보안 용어. [본문으로]
  4. 여기서 ‘해커’라는 용어 사용은 DIY 실험주의의 함축적 의미를 지닌, 기술적 하위문화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이 용어는 컴퓨터 시스템에 무단으로 엑세스하는 ‘크래커들crackers’을 의미하는 팝문화적 사용과 구별되어야한다. (쉽게 말해 해커는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크래커는 법을 위반하는 사람이다. - 옮긴이) [본문으로]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어떻게 당신의 작업에 정치와 기술을 접목시킬 수 있었나?

 

2004년 이후, 나는 우크라이나와 다른 지역의 시위자들이 문자 메시지와 블로그를 통해 결집된다는 이야기를 믿었다. 2006년 3월 벨라루스는 선거를 앞두고 있었을 때, 나는 자문해봤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 시점에, <트랜지션>Transitions이라는 이름의 인쇄 잡지print magazine를 발간하다 90년대 후반부터 온라인으로만 발간하기 시작한, 프라하Prague에 거점을 둔 NGO 트랜지션 온라인Transitions Online과의 협력을 시작했다. 비용을 대기 위해, 그들은 여러 종류의 부차적 활동을 벌여야 했으며, 그래서 NGO로 탈바꿈한 초기엔 전 소련 블록에서 온 기자에게는 기삿거리를 취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자기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집시Roma를 가르치는데─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whatever there was money for─집중했다. 대부분의 기금은 교육이나 지역적 이슈에 관심을 가졌던 소로스 네트워크Soros network에서 마련되었다. 자본의 다른 출처들로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금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인터뉴스Internews, 아마도 독일 마셜 기금the German Marshall Fund, 그리고 이와 같은 미국 조직들에 더하여, 체코 정부와 스웨덴 국제 개발국Swedish International Development Agency 등이 있었다. 대다수는 프로젝트 별로 지원되었다. 결국 트랜지션 온라인은 블로깅이나 사회 연결망social network 등 뉴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영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쓴 우편을 그들에게 보냈고, 결국 벨라루스 블로그를 인계받게 되었다. 뉴 미디어의 영역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前) 소련을 가로질러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나는 그들을 위해 전임으로 일을 맡게 됐다. 이 말은 그들을 교육하면서 전 소련의 상당히 넓은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어디에 머물고 있었나?

 

나는 베를린에서 삼 년하고 반년을─일 년은 유러피언 컬리지 오브 리버럴 아츠에서, 그리고 이 년 반은 NGO에서 일하며─머물렀다. 하지만 2008년 8월에 나는 NGO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여러 기금 제공자의 태도, 그리고 그들의 기술과 정치에 대한 억측assumptions 때문에 좌절하게 되었다. 소로스는 원하는 어디에서라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하는 오픈 소사이어티 장학재단Open Society Fellowships을 창설했다. 장학금 중 하나를 받자마자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정해야 했고, 뉴욕으로 간다면 책을 출판하기 더 쉽지 않을까 추측했다. 나는 이미 많은 글─그렇게 깊이 있지는 않지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 자유 기고하던 여러 편의 오피니언─을 쓰고 있었다. 물론 기사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계간 공학technology 부록과, 잡지 내의 국제 면에 꽤 많은 글을 게재했다. 이미 나는 기술과 정치에 대한 표준적인 지식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었다.

 

이것들이란 무엇이었는가?

 

나는 우리 프로젝트에서 기대했던 결과의 결핍뿐만 아니라 우리가 야기할 수 있는 잠재적 피해 때문에 좌절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장려함으로써 세계를 구하려 했으나, 스스로 뉴 미디어를 통해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던 벨라루스나 몰도바, 혹은 코카서스 등지의 여러 사람들을 결국 우리가 망칠 거라는 것이 내게는 명백했다. 우리가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도착해서 건넨 뒤, 그들은 곧 전혀 다른 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좋아, 비록 내가 실패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 후에 우리의 목적 자체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나는 목적을 믿고 있었고, 만약 우리의 목적이 출판과 대화의 독립적 문화─하버마스의 공론장Habermasian public sphere[각주:1]  같은─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계획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국가들의 힘 있는 정부를 지원자로 간주했는데─최소한, 아무도 적이라고 말하진 않았다─그들의 우선사항이 우리와 정반대였다는 것은 명백했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독립적인 목소리들을 들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교활하게─감시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블로거들을 고용하여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만들어내고, 온라인 대화를 조작하고, 웹사이트에서 서비스 거부 공격denial-of-service attacks[각주:2]을 하는 등─뉴 미디어 공간에 툴tool, 기술, 그리고 전략을 신속히 동원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정당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물론 회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 기업들이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감시 장비를 공급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 기금의 소관 밖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첫 책 『넷 딜루전』Net Delusion을 출간했을 때, 나의 목표는 해방의 신호탄으로서 우리가 경탄해 마지않던 여러 툴, 플랫폼 그리고 기술이 마찬가지로 바로 그 활동가, 반체제 인사와 우리가 추구했던 대의cause에 등에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각주:3]  오늘날 이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때 당시 대부분의 기부자와 서양의Western 정권은 단순하게도 독재자들이─그들이 독재적인 정부를 뭐라고 부르든─너무 멍청하고, 체계적이지 않고, 과학 기술 공포증technophobia 때문에 절대 ‘인터넷’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며, 그래서 이 정보통신기술의 새로운 물결은 그들을 몰락시킬 것이라 가정했다. 워싱턴에서는 냉전의 종결이라는 서사가 이러한 추측을 굳히는 데 한몫했다. 소련을 몰살했던 것이 자유유럽방송Radio Free Europe과 제록스Xerox 프린터였다면, 이제 블로그와 사회 연결망social network이 민주주의의 전파 작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미국의 주 정부American state가 새로운 툴과 플랫폼에 점점 더 관여할수록, 점점 더 그것에 대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다른 정부에 귀띔해줄 것이므로, 미국 외교 정책의 기둥으로서 인터넷 자유화라는 이러한 프레임이 새로운 툴과 플랫폼이 대안적 공론장을 형성할 잠재성의 기반도 약화시킬 조짐이 내게는 명백히 보였다. 하지만 『넷 딜루전』을 썼을 때 나는 25살이었고, 결국 워싱턴 싱크탱크에 합류하지end up in a Washington think-tank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책은 마치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스스로 덫을 놓고 있다고 말하고자 애쓰고, 그들에게 달리 행동하라 충고하고 있는 것 마냥 쓰여 있다. 물론, 이제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지만.

 

당신은 전세계적인 선거 감시에 있어서 어떤 정부도 국가안보국NSA[각주:4]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나?

 

그렇다. 나는 국가안보국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미국 정부에 의한 사이버 공격과 같이─많은 사건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미 2006년이나 2007년에는 비록 늘 그렇듯 지하디스트jigadists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적들의 웹사이트를 다운take down시키는 걸 원치 않는 CIA와 펜타곤Pentagon 사이의 긴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하디스트나 다른 적들의 웹사이트를 다운시켜야 하는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에는 그에 해당하는 전용 기구dedicated unit가 있었다는 건 명명백백했다. 그래서 힐러리 클린턴Hilary Clinton이 인터넷 자유화에 대한 2010년 연설에서 사이버 공격에 참여한 나라들을 힐난했을 때, 그것은 최악의 위선이었다. 어디서든 미국 당국자들이 블로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단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이나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 같은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실제 정책을 고려야해야 하는 것처럼. 그건 인터넷 자유화뿐만 아니라, 인권과 다른 여러 이슈의 모순이다. 이런 해외 정책의 모순은, 미국 자체가 행하고 있던 것은 간과한 채, 러시아, 중국, 이란, 이집트와 다른 국가들이 감시, 검열, 블로거 매수, 기업에 대한 지배체제 설립 등의 측면에서 어떤 종류의 수단과 기술을 진전시켰는지 이해하고자 했던 나의 책 속에 반영되어있다.

 

오늘날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좇는가track?

 

글쎄, 스탠포드의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 아래서 수학했고, 스스로 차기 국방/외교 정책의 ‘신동Wunderkind’으로 홍보했던 제어드 코엔Jared Cohen과 같은 인물을 예로 들어보자. 24살이었던 2006년, 국무부 정책기획부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두 권을 책─르완다Rwanda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다룬 책과, 청년의 과격화youth radicalization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거기서 코엔은 국무부 부장관이었던, 전직 콘트라Contra[각주:5] 통제관 존 네그로폰테John Negroponte와 닷컴 버블 붕괴 직전에 ‘신 경제new economy[각주:6]에 대한 찬양일색의 글[각주:7]을 썼던, 국무부의 정치외교 담당 차관 제임스 글래스먼ames Glassman과 함께 일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테크노포리아technophoria[각주:8]의 흐름 속에서 오바바의 선거에서 본격적으로 날개를 폈다take off. 국무부에 계속 남아있으면서, 코엔은 콜럼비아에서 발생한 2008년 반(反)Farc[각주:9] 집회가 페이스북에 FARC에 저항하는 그룹을 만든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게 전부라고 주장하며, ‘인터넷 자유화’의 불가피한 중요성을 논증했다. 실제로는, TV에 중계된 대통령 연설에서 페이스북 그룹을 방송에 내보내고, 모든 일을 조직했던 이는 물론 알바로 우리베Álvaro Uribe[각주:10]였다. 하지만 국무부에 이 사건은 선의를 위한 대중 집회가 신기술을 통해 마법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방식의 선례showcase로 남았다. 코엔 옆에는, 오바마가 클린턴의 상급 고문으로 임명했던, 국제 관계나 외교 정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얕았던 서른 살의 알렉 로스Alec Ross가 있었다. 이 짝패는 소위 ‘기술 집행 여행tech executive trips’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주요 문화 수출과 소프트 파워soft diplomacy의 근저에는 기술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은 관련 기업들의 CEO들이 미국의 이미지를 해외로 전파하는 것을 북돋을 수 있도록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회장bosses을 준-문화quasi-culture 대사로 임명해, 실리콘 밸리로에서 멕시코, 시리아─아사드를 만났던─ 또는 이라크로 보냈다. 다분히 상징적이게도, 제어드 코엔은 오바바의 중요한 후원자인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Eric Schmidt를 바그다드로 가는 중에 만났다. 그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The New Digital Age[각주:11] 의 공동 저자가 되었다.

 

<원문> p. 48-52

 

How and when did you connect politics and technology in your work?


After 2004, I believed the story that the protesters in Ukraine and elsewhere were mobilized through text messaging and blogs. There were elections coming up in Belarus in March 2006, so I asked myself—what’s going to happen there? At this point I started collaborating with an ngo in Prague called Transitions Online, which used to be a print magazine called just Transitions, and in the late nineties became online-only. To pay for this, they had to develop all sorts of secondary activities, so they transformed themselves into an ngo, initially focused on teaching journalists from the former Soviet bloc how to do investigative reporting, or Roma who wanted to write about their lives—whatever there was money for. A lot of the funding came from parts of the Soros network concerned with education or regional issues. Other sources of money included 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Internews, maybe the German Marshall Fund, and alongside these American organizations, the Czech government and the Swedish International Development Agency. A lot of it was project-by-project. Eventually Transitions Online began to express an interest in new media—blogging, social networking etc. I offered to write some posts for them on what was happening in this area, and eventually took over the Belarus blog. When it became clear how quickly the new media space was developing across the former Soviet Union, we agreed that I would work for them full-time. That meant travelling quite widely in the former Soviet Union, doing training sessions for them.


Where were you based in these years?


I stayed in Berlin for three and a half years—a year in the European College of Liberal Arts, then two and a half years working for the ngo. But by August 2008 I had become frustrated not only with ngo work, but also with the attitude of many funders and their assumptions about technology and politics. Soros had created Open Society Fellowships that allowed you to work on a project from wherever you wanted. On getting one of these, I had to decide where to be based, and reckoned it would probably be easier to get a book published if I moved to New York. I was already doing a lot of writing—nothing very deep, but a lot of opinion pieces, freelancing for The Economist; of course, my name was not attached to the articles, but I worked quite a bit on their quarterly technology supplements and the international section of the magazine. I already had some ideas about what was wrong with much of the received wisdom about technology and politics.


What were these?


I was frustrated not only with the lack of the kind of results we had expected from our projects, but also the potential damage we could be causing. We were supposed to be saving the world by helping to promote democracy, but it seemed clear to me that many people, even in countries like Belarus or Moldova, or in the Caucasus, who could have been working on interesting projects with new media on their own, would eventually be spoiled by us. We would arrive with a lot of money, and put them on a grant, and they would soon start thinking very differently: ‘Great, even if I fail I can get another grant.’ Later I began to question our objectives too, but back then I believed in them, and thought that if our aim was to promote an independent culture of publishing and conversation—a kind of Habermasian public sphere—trying to engineer it by doling out money was the wrong way to go about it.


At the same time, while the governments in power in these countries were supposed to be our allies—at least, nobody said they were our enemies—it was clear their priorities were the opposite of ours. We thought all we needed to do was make these independent voices heard. But governments very quickly began deploying tools, techniques and strategies in this new media space that were much smarter than we had anticipated—not only stepping up surveillance, but creating their own propaganda by hiring bloggers, manipulating online conversations, carrying out denial-of-service
attacks on websites. We weren’t raising the right questions about this. Of course, in retrospect there was a reason why we were not asking them. It wasn’t in the remit of 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to be questioning whether American companies were supplying surveillance equipment to the government of Uzbekistan.


So when I began my first book, The Net Delusion, my aim was to show that many of the tools, platforms and techniques we were celebrating as emancipatory could equally be turned against the very activists, dissidents
and causes we were trying to promote.1 Today this sounds obvious. But back then, most donors and most Western governments simply assumed that dictators—or whatever they called authoritarian governments—would never be able to control ‘the Internet’, because they were too dumb, too disorganized, too technophobic, and that this new wave of information technology would bring about their downfall. In Washington the narrative of the end of the Cold War encouraged this: if it was Radio Free Europe and Xerox machines that killed off the Soviet Union, blogs and social media could now finish the job of exporting democracy.

 

It seemed clear to me that this framing of Internet freedom as a pillar of us foreign policy threatened to undermine whatever potential the new tools and platform had for creating an alternative public sphere, since the more the American state got involved in them, the more it would tip off other governments that something ought to be done about them. But I was twenty-five when I wrote The Net Delusion, and thought I might end up in a Washington think-tank, so it reads as if I’m trying to tell us policy-makers they were setting a trap for themselves, and I was advising them to act differently. Of course, I wouldn’t write it that way now.


You weren’t aware that the nsa far exceeded any government in the world in its universal electronic surveillance?


No, I didn’t know about the nsa. But a lot was in the open.cyber-attacks by the us government, for example. Already by 2006 or 2007 it was crystal clear that there were dedicated units within the Department of Defense whose job was to take down the websites of jihadists and other foes, even if there was typically tension between the Pentagon and the cia, which wanted to derive intelligence from them so didn’t want them taken down. So when Hillary Clinton condemned countries that engage in cyber-attacks in her 2010 speech on Internet freedom, it was the worst kind of hypocrisy. Just as when us officials talk of supporting bloggers everywhere, you only have to look at their actual policy in countries like Azerbaijan or Saudi Arabia. It’s not just a contradiction on Internet freedom, but also on human rights and many other issues. These foreign policy contradictions were reflected in my own book, where I was trying to understand what kinds of tools and techniques Russia, China, Iran, Egypt and other such states were developing in terms of surveillance, censorship, buying bloggers, establishing control over companies, without paying attention to what the United States itself was doing.


How would you track that today?


Well, let’s take the example of a figure like Jared Cohen, who studied at Stanford under Larry Diamond, and marketed himself as the next defence/foreign policy Wunderkind. He published two books.one on America’s response to the Rwandan genocide and another on youth radicalization.before getting a job with the Policy Planning Staff at the State Department in 2006, aged twenty-four. There he worked with former Contra-controller John Negroponte, who was Deputy Secretary of State, and Under Secretary of State for Public Diplomacy James Glassman, author of a hymn to the ‘new economy’ shortly before the dot.com bubble collapsed.2 But his career really took off with Obama’s election on a wave of technophoria. Staying on at State, Cohen used the anti-farc mobilization of 2008 in Colombia to demonstrate the vital importance of ‘Internet freedom’ to the State Department, claiming it was all started by a guy on Facebook who had set up a group to protest against the farc. In reality, of course, it was Álvaro Uribe who aired the Facebook group in a presidential address on television, and organized the whole affair. But in the State Department this became the showcase of how mass mobilization for good causes could be magicked up through the new technology. Alongside Cohen, there was now Alec Ross, in his thirties and with little background in international relations or foreign policy, whom Obama appointed as Senior Adviser to Clinton. This pair started arranging what they called ‘tech executive trips’. Since the main us cultural export and basis for soft diplomacy seemed to be technology, they decided that the ceos of these companies could help boost America’s image abroad. So they would fly bosses from Silicon Valley over to Mexico, Syria—where they met with Assad—or Iraq as quasi-cultural ambassadors. Symbolically enough, Jared Cohen met Eric Schmidt, the Google boss who is a key Obama backer, on a trip to Baghdad. They went on to become co-authors of The New Digital Age.3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 : http://newleftreview.org/

 

  1. 하버마스에 따르면, “공론장(public sphere)은 여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우리 사회 삶의 영역이며, 공론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다시 말하면, 공론장은 자유로운 사적 개인이 모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소통 행위를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는 이념적, 도덕적, 정치적 소통 행위의 모델이다. (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2. 시스템을 악의적으로 공격해 해당 시스템의 자원을 부족하게 하여 원래 의도된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공격을 서비스 거부 공격, 혹은 디오에스/도스(DoS)라고 한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3. The Net Delusion: How Not to Liberate the World, New York and London 2011. [본문으로]
  4. 미국 연방 정부의 해독 첩보국으로 미국 국방부 소속이다. 1952년 11월 4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창설되어, 해외 통신과 해외 신호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책임진다. NSA는 암호 해독 분석에 관여하고 타국의 유사한 기관에게서 미국의 정부 통신과 정보 시스템에 책임을 진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5. Contrarevolucionario(반혁명분자) 또는 Contrarevolucion(반혁명)의 약어이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의 혁명이 성공하여 소모사정권이 붕괴되고 산디니스타 좌익정부가 수립된 이후, 반혁명 세력들은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에서 반군을 조직하고 니카라과에 대한 무력침공을 꾀하였다. (중략) 1981년 9월 미국은 콘트라반군에게 자금공급, 산디니스타군의 이동 및 위치에 관한 정보제공, 통신수단을 이용한 지원 등 간접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중략) 1990년 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친미·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차모로가 당선되면서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된 콘트라 반군은 곧 해체되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6.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유망분야가 출현하거나 확대되고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의 공존이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안정 속의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경제가 이러한 특징을 보이면서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경제패턴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여 "신경제"라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7. James K. Glassman, Dow 36,000: The New Strategy for Profiting from the Coming Rise in the stock Market, New York 1999. [본문으로]
  8. 최신의 훌륭한 하이테크 장치를 구매함으로써 얻는 황홀경 The high you get from purchasing the latestt and greatest high tech gadget.(옮긴이 – urban dictionary) [본문으로]
  9. 콜롬비아 무장혁명조직. (옮긴이) [본문으로]
  10. 콜롬비아의 정치인이다. 2002년 ~ 2010년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11. Eric Schmidt and Jared Cohen, The New Digital Age: Reshaping The Future of People, Nations and Business, London 2013.(에릭 슈미트, 제러드 코언, 『에릭 슈미트의 새로운 디지털 시대: Google 회장 에릭 슈미트의 압도적인 통찰과 예측, 사람, 국가, 비즈니스의 미래를 다시 쓰다』, 이진원 역, 알키, 2014.) [본문으로]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에브게니 모로조프[각주:1]

 

데이터 센터들을 사회화하자!

 

냉전 이후post-Cold War 동유럽의 정치학 기초 교육으로부터, 실리콘 밸리의 속사포patter 비평을 경유하여, 인터넷과 신자유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회역사적 논쟁들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작업은 어떠한 다른 기술 비평가와 달리 독특한 경로를 좇는다. 이 혁명을 양산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벨라루스Belarus의 민스크Minsk 지역에 있는, 50년대 후반 새로이 탄광 마을로 설립된 솔리고르스크Soligorsk라 불리는 지역에서 1984년에 태어났다. 거의 모든 노동력은 외부에서 유입되었고, 거기에 국가적 특성은 거의 없었다. 친가는 러시아 북부에서 왔고, 모스크바Moscow 근처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7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광산학 학위를 취득한 뒤 (솔리고르스크에) 왔다. 그 도시는 포타시움potassium을 채굴하여 세계 시장에서 매우 잘 팔리는 비료를 생산하는 거대 국영 기업 하나가 꽉 잡고 있다. 그 기업은 여전히 벨라루스에서 가장 이윤이 높은 기업이다. 조부모님에서부터 삼촌, 고모들까지 온 가족은 그 회사에서 일했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소련USSR이 해체되었고, 솔리고르스크 같이 작은 도시에서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겪었지만, 소련의 붕괴와 우리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내가 열 살 때 권력을 잡은 루카셴코Lukashenko 대통령 치하에서 벨라루스는 공식적으로는 두 개의 국어를 인정하였지만, 러시아어가 지배적인 언어였고, 솔리고르스키에서 자라는 것은 그저 러시아의 한 지방에서 자라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민스크보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훨씬 많이 접했다. 초기에 벨라루스의 텔레비전은 없었다. 국내 미디어는 별로 힘이 없었고, 그래서 우리가 보는 신문들과 집에서 보는 대다수의 TV 프로그램들은 러시아로부터 온 것이었다.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내가 솔리고르스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큰 단절cut off를 느꼈을 것이다. 후에 루카셴코는 만약 도시에서 미디어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독립 국가로서 벨라루스의 존립을 입증할 능력을 상실하고, 벨라루스가 단지 친 러시아 국가밖에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프로그램을 하루에 서너 시간으로 제한하고 몇몇 지역 뉴스와 벨라루스의 프로그램을 섞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 같은 이들은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를 사서 러시아 TV를 계속 봤는데, 특별히 루카셴코의 정치를 불신해서라기 보다는, 지역 방송이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당신은 벨라루스를 떠나게 되었나? 

 

내 사촌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에, 운 좋게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학사 학위를 딸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나도 나라 밖에서 뭔가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걸게 되었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일 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차순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국경 근처에 있는, 불가리아Bulgaria의 블라고에브그라드Blagoevgrad라 불리는 작은 도시에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한 학교였던 자리에, 소로스Soros와 미국국제개발처USAID, 그리고 아마 몇몇 정부 부처의 재정적 지원으로 90년대 초에 설립된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솔리고르스키처럼 인구 7만명의 작은 도시였다. 그곳은 구소련 블록 혹은 그 인접국(불기라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몽골리아 등)에서 학생들이 넘어온 특이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는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내가 2001년 도착했을 땐 코소보 사태 직후였던 터라, 대학에서는 민족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4년을 보냈고, 구소련에 대하여 벨라루스에서보다 훨씬 많이 배웠다.


무엇을 공부했나?

 

대학의 강령은 지역의 더 나은 지도자들, 시민 사회나 정부에서 정치 경력political careers을 쌓을 준비가 된 동창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몇몇은 그렇게 됐지만, 졸업자들은 대부분 컨설팅이나, 감사auditing 또는 회계 법인에 취직했다. 나는 경영학과 경제학 복수학위 취득했다. 초기에는 투자 은행에 취직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 야망으로부터 나를 구해낸 것은  전 세계의 모든 거래들이 이루어지는(그래서 만약 증권매매업자들이 ‘O’를 ‘I’로 잘못 타이핑했다면, 그 실수를 잡아내야 한다.) 본머스Bournemouth에 위치한 JP 모건Morgan에서의 10주간의 인턴십이었다. 나는 왜 그들이 그 과정을 자동화하지 않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투자은행은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가리아에서 졸업한 뒤 무엇을 했나?

 

역시 (이 경우에는 교양liberal arts 교육에 사로잡힌 미국의 자선가 개인에 의한) 미국 자본으로 설립되어, 지금은 바드 컬리지Bard College의 일부분인, 작은 규모의 유러피언 컬리지 오브 리버럴 아츠the European College of Liberal Arts에서 일 년간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학위 과정은 아니었지만, 전액을 지불하면 일 년간 바람직한 인문학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내가 끝마친 프로그램은 세 명의 사상가들(프로이트Freud, 맑스Marx, 그리고 푸코Foucault를 연이어)에 초점을 맞췄다. 아홉 달 동안 우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읽었다. 소설에 있어서 루카치Lukács , 제임슨Jameson, 노버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수많은 2차 자료들secondary literature 등. 매우 지적인 자극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자 은행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학자 또한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가 대부분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그런 공부를 했다는 것이 기쁘지만.

 

당신은 어떻게 투자 은행가에서 뉴 미디어 작가로 전환하게 되었나?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네덜란드 대사와 결혼하여 불가리아로 온 뒤, 블라고에브그라드에서 강의를 했던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각주:2] 기자reporter 에르노트 판 린덴Aernout Van Lynden이었다. 캠퍼스의 문화 수준은 낮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와 <파이낸셜 타임즈FT>를 매일 읽게 독려한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기본적으로 멀리 인적이 끊긴 블라고에브그라드에 사는 이들이 그러한 책들을 읽을 리 만무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지 경력에 초점을 맞췄다. 내가 장문으로 된 저널리즘을 읽고, 영어로 쓰는 것을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덕이었다. 동시에, 컬리지의 마지막 학년 즈음 나는 블로깅blogging(단지 현상으로서 블로깅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서)을 특집 보도하는 기사들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것에 주목했다. 하워드 딘Howard Dean이 민주당 후보로 참여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와중이었다. 소규모 모금의 수평적 배치와 블로깅,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선거에 자금을 대는 견고한 단체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sway 주류 미디어를 우회할 수 있게 됐다.’는 해방적 수사로 그의 캠페인은 점철됐다. 대략 비슷한 시기였는데 2004년 후반, 나는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는 세계에서 매우 유명한 블로깅 플랫폼)라이브저널LiveJournal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우크라이나Ukraine의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에서 같은 도구의 사용에 대한 흥분의 물결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뭔가 흥미로운 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는 미디어와 기금모금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담론이 있었고, 이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를 볼 수 있으며, 조지아Georgia나 세르비아Serbia에서는 더 일렀다. 미국의 지원 아래서 세르비아에 대항하는 ‘오트포르!Otpor!’[각주:3]의 활동가들은 컴퓨터 게임을 함으로써 시위를 조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컴퓨터 게임, 문자메시지, 블로깅 등. 이러한 단어들이 나의 뇌리에 스쳤다. 이 기술들에 대한 내 흥미는 높아졌다. 다음 해, 나는 하워드 딘 국면moment의 주요 전문가들이 쓴, <블로그!Blog!>라 불리는 편집본edited collection을 집어 들었다. 아마 나는 중요한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유럽에서 내가 속한 집단보다 한 발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게 그 시점이었나?

 

아니다. 더 일렀다. 2003년쯤 베를린에서 하계학교를 다닐 때, 듣도보도 못한 <아크지Akzia>[각주:4]라는 신문에 자유 투고하며, 언론계에 몸담은 러시아 학생을 만났고, 그녀는 내게 편집장을 소개시켜줬다. 아크지는 러시아 카페나 진보적인 사람hipsters과 지식인들이 머무는 장소에 무료로 분배되었고, 온라인에서 꽤나 활동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단지 오락용이나 문화적 출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급진적인 러시아의 청년 혹은 다른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적 기사를 연재했다. 그들은 내게 칼럼을 제안했고, 그게 내가 언론계에 몸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는 영어로 쓰기 오래 전부터 러시아어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해서 쓴 건 아니었다. 나의 칼럼은 코스모폴리탄cosmopolit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전 세계적 이슈(미국 선거, 브라질의 시민 저널리즘과 모바일 기술, 온라인 출판과 저작권, 건축, 하여간)를 다뤘다. 그 당시 나는 러시아 정치에 그다지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나날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양을 주입하던 불가리아의 아메리칸 대학을 나왔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만약 내가 러시아 정치에 경도되어 있었다면, 아마 푸틴Putin의 대안으로서 친(親) 호도르코프스키Khodorkovsky[각주:5] 쪽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부분적으로는 나의 사정(당시 나는 언젠가 벨라루스가 EU에 가입할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여전히 순진했다.)으로 인해, 외국의 정책 이슈를 다룰 때면  러시아와 이러저러한 말다툼을 벌이는 몰도바Moldova나 조지아 같은 작은 국가들과 동질감을 가졌다.

 

 

<원문> (p.45-48)

 

evgeny morozov


SOCIALIZE
THE DATA CENTRES!

 

Your work traces a distinctive path—unlike that of any other technology critic—from a grounding in the politics of post-Cold War Eastern Europe, via critique of Silicon Valley patter, to socio-historical debates around the relations between the Internet and neoliberalism. What was the background that produced this evolution?


I was born in 1984, in the Minsk region of Belarus, in a new mining town called Soligorsk, founded in the late fifties. More or less the whole labour force was brought in from outside, and there’s little sense of national belonging. My father’s family came from the north of Russia; my mother, who was born near Moscow, arrived in the seventies with a degree in mining from Ukraine. The town is dominated by one huge state-owned enterprise that mines potassium and produces fertilizers which sell very well on the world market: it’s still the most profitable company in Belarus. My entire family worked for it, from grandparents to uncles and aunts. The ussr dissolved when I was seven, and while there may have been all sorts of problems with living in a small city like Soligorsk, they were not linked to the ussr’s disappearance. Under Lukashenko, who came to power when I was ten, Belarus was officially bilingual, but Russian was the dominant language, and growing up in Soligorsk felt just like being in a province of Russia. We were much more connected to events in Moscow than in Minsk. Initially there was no Belarusian television; the national media were not very strong, so the newspapers we got, and most of the tv programmes we watched at home, were Russian. People in Kaliningrad probably felt more cut off than I did in Soligorsk. Later, Lukashenko realized that if he didn’t control the flow of media in the country, he could lose the ability to make a case for Belarus to exist as an independent state, however pro-Russian. So he started limiting Russian programming to three or four hours a day, and mixing in some local news and Belarusian programming. But then people like my parents bought satellite dishes and continued watching Russian tv, not particularly because they mistrusted Lukashenko’s politics, but because the local stuff was so boring.

 

How did you come to leave Belarus?


My cousin was lucky enough to have studied for her bachelor’s degree in St Petersburg, before moving to Holland. So there was an expectation in my family that I might be able to do something outside the country. I wanted to spend a year in a high school in the us, but that didn’t work out. The next best thing was to go to the American University in Bulgaria, which had been set up in the early nineties with Soros and usaid—and maybe some State Department—money, in a former school for communist leaders in a small town called Blagoevgrad, near the border with Macedonia and Greece. Like Soligorsk it’s a small town, of 70,000 people; an odd, poor place, where a lot of the students came from the former Soviet bloc or adjacent countries: Bulgaria, Romania, Yugoslavia, Georgia, Armenia, Azerbaijan, Mongolia. Many, like myself, were on scholarships. There was a lot of ethnic tension on the campus when I arrived, in 2001, soon after the Kosovo conflict. I spent four years there, and learnt far more about the former Soviet Union than I ever did in Belarus.


What were you studying?


The mission statement of the university was to educate the future leaders of the region, its alumni set for political careers in government or civil society. Some did that, but its graduates mostly found themselves working in business—in consulting, auditing or accounting firms. I ended up double-majoring in business administration and economics. My initial ambition was to work in an investment bank. What saved me from that was a ten-week internship at JP Morgan in Bournemouth, of all places, making sure all the trades went through; so if any of the traders mistyped ‘0’ as ‘1’, you would have to catch it. I never understood why they couldn’t just automate the process. I realized investment banking was probably not for me.


What did you do after graduating in Bulgaria?


I decided to take a year out at the European College of Liberal Arts, a small outfit, now part of Bard College, that was also set up with American money—in this case by a private us philanthropist obsessed with liberal arts education. It wasn’t a degree programme, but you could do a proper humanities course there for a year, with all expenses paid. The programme I ended up on focused on three thinkers: Freud, Marx and Foucault, in succession. For nine months we read very widely; Lukács on the novel, Jameson, Norbert Elias, a lot of secondary literature. It was a very intellectually stimulating programme. But while I knew I didn’t want to do investment banking, I also didn’t want to be an academic. So I thought most of this study was useless. In retrospect, of course, I’m glad I did it.

 

How did you get from investment banking to writing on new media?


A key influence on me was an Anglo-Dutch war reporter, Aernout Van Lynden, who lectured in Blagoevgrad because he was married to the Dutch ambassador to Bulgaria. The cultural standards on campus were low, but he was a genuine intellectual, who encouraged us to read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and the ft every day. Living in Blagoevgrad—in the middle of nowhere, essentially—those were not at all the kinds of things people read. Most students were just focused on their careers. It was due to him that I started reading long-form journalism and experimenting seriously with writing in English. At the same time, in the last year or so of college I noticed that there was a sudden flow of articles dedicated to blogging—not just blogging as a phenomenon in itself, but as a political tool. This was during the 2004 us presidential election, when Howard Dean was running for the nomination of the Democratic Party. His campaign was marked by the horizontal deployment of micro-fundraising and blogging, and an emancipatory rhetoric—‘finally we can bypass the entrenched institutions that fund elections, and the mainstream media that sway them’. At roughly the same time, in late 2004, I saw the same wave of excitement about the use of these tools in the Orange Revolution in Ukraine, where LiveJournal—a blogging platform that was very popular
in the Russian-speaking world—played a significant role.

So I felt there was something interesting here. In America you had this discourse about the democratization of access to the media and to fundraising, and you could already see results of these changes in Ukraine, and earlier in Georgia and Serbia. Activists in Otpor!, the American-sponsored opposition in Serbia, were reporting that they had learnt how to organize protests by playing computer games. To me, this clicked: the computer games, the text messaging, the blogging . . . My interest in these technologies intensified. The following year, I picked up a book written by leading analysts of the Howard Dean moment, an edited collection called Blog!. I was perhaps a bit ahead of my cohort in Europe in understanding that a major transformation was under way.


At this point you started writing about politics?


No, that came earlier. Around 2003, when I was at a summer school in Berlin, I met a Russian student of journalism who was freelancing for Akzia, a paper I’d never heard of, and she introduced me to the editor. Akzia was distributed free in Russian cafés and places where hipsters and intellectuals hung out, and had a quite active online presence. It wasn’t just an entertainment and culture publication: it featured political pieces about Russian youth and other movements, some more radical than others.
They offered me a column, which is how I started in journalism—I was writing in Russian long before English. But not about Russia: the column was called Kosmopolit and covered a global beat—American elections, citizen journalism and mobile technology in Brazil, online publishing and copyright, architecture, you name it. Back in those days I wasn’t much preoccupied with Russian politics. Had I been, given that I was coming out of the American University in Bulgaria, where we were fed the gospel of neoliberalism on a daily basis, I would have probably inclined toward a Khodorkovsky-like alternative to Putin. On foreign policy
issues, I identified with smaller states like Moldova or Georgia in their various squabbles with Russia, in part because of my background—I was still naive enough to believe that Belarus could one day join the 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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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 : http://newleftreview.org/


  1.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 작가이자, 기술의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연구하는 벨라루스 출생 연구원이다. 그는 현재 미국의 종합 시사 주간지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수석 에디터를 맡고 있다.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 17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영국과 네덜란드 양국간의 3차에 걸친 전쟁과 18세기 말엽의 1차례 일어났던 전쟁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3. ‘오트포르!Otpor!’: '저항하라!'는 의미의 세르비아어. '오트포르'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간 존재했던 세르비아의 정치조직이다.(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아크지Akzia: '행동'이라는 뜻의 러시아어(옮긴이) [본문으로]
  5. 미하일 보리소비치 호도르콥스키(1963년~): 러시아의 기업인으로 옛 러시아 최대의 민간 기업이던 석유 회사 유코스의 회장. 푸틴에 대항하여 야당에 정치자금을 대다 '탈세 및 횡령'혐의로 수감 중, 유코스는 파산했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호도르코프스키는 강력한 반(反)푸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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