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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정상성에 균열을 내는 3대의 이야기안토니아스 라인, 정상성에 균열을 내는 3대의 이야기

Posted at 2019.01.13 22:10 | Posted in 닻별의 [일상다반사]



페미니즘 열풍이 한차례 불어닥친 한국에도 여성 서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만큼 여성 중심 공동체를 특별할 것 없이, 아주 잔잔하게 그려내는 영화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영화는 안토니아와 자손들의 삶을 지극히 유토피아적으로 그린다. 카메라의 중심에는 언제나 ‘여성’ 이 있다. 여성과 여성의 삶을 존중해주는 유니콘 같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는 사회에서 정한 정상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질문한다. 과연 이 사회가 정한 부계 중심의 정상성이 보편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보편성 역시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낸 개념은 아닌가?

아주 다양한 사건들이 각자 의미를 갖고 스쳐 지나가지만, 나는 안토니아의 3대가 균열내는 정상성이 무엇인지 상징하는 바를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의 포스터 (출처 - 네이버영화)



안토니아 – 결혼보다는 파트너십으로


 안토니아는 바스의 청혼을 받지만 (“내 아들들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오.” 라는, 지극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청혼이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그를 거절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동반자로 산다. 비혼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파트너가 있는 사람이 – 특히나 결혼 가능한 이성 파트너일 경우 – 결혼 대신 파트너쉽 관계를 평생 유지하자고 제안했을 때, 선뜻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거기에는 세금 감면이나 내 집 마련 등 정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이라는 경제적 이유 역시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연애 관계의 최종 도착지를 결혼으로 결론짓고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결혼을 권장하는 한국 사회에서 둘의 파트너십은 결혼이 아닌 동반자로서의 삶, 결혼의 대안을 이상적으로 보여준다. 안토니아와 바스는 이성애-유성애 관계를 맺지만, 둘의 파트너십은 이성애-유성애 틀의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델로서 작용할 수 있다.


다니엘 – 원하는 가족을 선택할 권리, 이성애 관계에서 이탈하기


 다니엘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한다. 안토니아는 그런 딸을 나무라는 대신에 괜찮은 남자를 직접 물색해준다. 결국 다니엘은 목표했던 대로 테레사를 낳는다. 출산을 남성과 여성의 사랑의 결실로 그리는 클리셰와는 100만광년 정도 동떨어진 행보다. 다니엘의 출산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 위한 일종의 ‘도구’적 행위다. 그 과정에서 남성은 자식을 낳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다니엘의 행위는 ‘대’를, 자신의 핏줄을 통해 부나 명예를 후손에 물려주고자 했던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집단과 자손을 낳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점에서 다를 것 없는 결과를 보이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맥락을 보이게 된다.

정상성을 이탈한 다니엘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니엘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 파트너와 평생을 함께하는데, 둘의 파트너십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안토니아의 공동체에 녹아든다. 둘의 결합은 이상하다거나 특이하다는 시선 없이 안토니아 공동체의 다른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축복받는다. 재생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여성 당사자를 배제하고, 동성 연애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 사회와 대비되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테레사 – 재생산의 자유와 모성 이데올로기, 공동 육아


 다니엘의 딸 테레사가 임신했을 때, 가족들은 출산 결정권을 온전히 테레사에게 부여한다. 아무도 테레사에게 “낳아!” 혹은 “낳지 마!”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테레사가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테레사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을 때 구성원 중 누구도 그녀의 선택을 부정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낙태와 같은 재생산 과정에서 결정권을 온전히 당사자에게 준다는 점에서 안토니아의 작은 사회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면모를 보인다.

사라를 낳은 이후, 테레사는 사라에게 헌신하지 않는다. 애초에 테레사는 결혼에도 초연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사라에게 냉담한 게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자녀의 육아에 관심 없는 테레사에게 아무도 모성 운운하지 않는 장면은 몹시 인상 깊었다. 테레사는 늘 그렇듯 자기가 하고 싶은 일 – 작곡 – 에 집중하며 산다. 테레사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점에서, 이 공동체에는 모성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던진다. 과연 모성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인가? 모성을 당연하게 상정하는 사회로부터 주입된 것은 아닌가?

사라의 육아는 아빠 시몬과 다른 가족들이 함께 한다. 사라는 공동육아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형성한 친밀한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 없이 성장했지만 사라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 감수성 넘치는 사람으로 자란다.


안토니아의 대안 공동체


 안토니아의 공동체는 가부장제 사회의 일반적인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소수자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는 현실적이지 않다. 사회의 당연한 규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유별나게 특별한 것처럼 그려지지도 않는다. 영화는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가 ‘다른 인간’ 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맞춰 가는 모습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이다. 

 이 영화는 1995년에 개봉했다.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이 영화는 선도적이고 ‘특이’한 영화다. 다양한 관계와 선택지가 당연시되는 안토니아와 가족들처럼 한국 사회도 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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