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올림픽에 대해 어느 언론(“대회 운영 호평+흑자 올림픽, 흠잡을 데가 없다”, 스포츠 조선, 2.25일자)은 조직위의 저비용 고효율 정책덕분에 흑자 올림픽을 달성했다고 호평을 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저비용 고효율에 대한 신화는 시장친화적인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각광받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비용 고효율 개념은 필요한 시설인프라 구축을 방기하고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식으로 시장레짐 하위 계층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장 폭력의 개념으로 자주 변질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비용 고효율의 패러다임은 자원봉사자들이 감내해야했던 인간 이하의 처우를 시장의 이익으로 치환시키고, 이들의 희생을 흑자 달성이라는 성과로 은폐해 버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방한용품과 온수 공급부족, 부실한 급식, 근무지와 먼 숙소 배정 및 수송수단 미비)로 대회 직전 2천여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들이 이탈했다(출처: 네이버 tv 'JTBC 뉴스').

 

맑스는 '죽은 노동'(생산설비 등 비인격적 고정자본)살아있는 노동’(인간의 노동 및 그 산출물)의 착취를 통해 증식한다고 했지만 이번 올림픽의 열악한 대중교통 인프라는 그 죽은 노동조차 미비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저비용 고효율 달성을 위해 죽은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 양자 모두에 대한 삭감 및 착취는 이번 평창 올림픽 조직위의 초자본주의적’(Supercapitalism) 특색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직위의 올림픽 운영 전반을 감독해야 할 문재인 정부가 과연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계속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게다가 이번 평창 올림픽을 흑자 올림픽이라고 내세우는 근거도 빈약하다. 올림픽 비용 14조원 중 고속철 등 인프라 구축에만 12조원이 들었는데 그 비용을 지방균형발전 차원에서의 국가 인프라 구축비용으로 간주하고 올림픽 지출 내역에서 자의적으로 누락시켜버렸다.

 

관광 인구 유입이 대폭 늘어 향후 큰 경제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기사 내용에서 여전히 사람이 아닌 돈이 먼저다식의 사고방식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애석하게도 이번 평창 올림픽의 바가지 요금 사례로 본 경악스러운 지역 이기주의는 향후 강원도 관광수입제고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따라서 올림픽 특수효과가 인지 인지는 장기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해봐야 할 문제이다.

 

효율성 강조와 꼰대 지수간의 상관관계

 

이번 올림픽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패러다임은 비단 경제 논리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았다. 효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종종 정치 영역에서 민주적 가치를 훼손하기도 한다.

 

시간 및 갈등 비용을 아낄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의견 수렴 과정을 생략하는 하향식 결정 방식에 대한 유혹은 민주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커 보인다.

 

남북 단일팀의 추진 과정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일방적이었다. 이는 불통으로 일관하다 철저하게 몰락한 박근혜 정권을 뒤로 하고 소통을 강조하겠다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가장 지양했어야 할 태도였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평화, 화합을 도모하는 지구촌 축제이다. 하지만 그 외형적인 평화가 누군가에 대한 일방적 희생 강요를 통해 내부 불만을 은폐시킴으로써 만들어진 평화라면 나는 그 평화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남북 단일팀의 대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갑작스레 대회 불참을 번복해서 시간이 없었다는 사정도 알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팀 추진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모토대로 공정하고 평등해야 했다.’ 무엇보다 일반 국민, 아니 최소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 감독에게 먼저 의사를 타진했어야 했다.

 

만약 이런 기본적인 의견 수렴 과정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다면 아쉽지만 이번 남북 단일팀 논의는 애초에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대의만을 앞세워 그대로 밀어붙였다.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자기들끼리 내부적으로 단일팀 추진 결정을 불가역적인 상수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선수들에게 이해를 구하러 가는 웃지 못 할 촌극은 소통이 아니라 쇼통에 가깝다(출처: 뉴시스).

 

어차피 하위권 팀이고 국가가 지원해줬으니 국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 이건 또 무슨 중앙집권적 냄새나는 주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모든 국민은 국가로부터 공공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 국민의 처우와 권리에 대해 국가 마음대로 해도 된단 말인가? 모든 대학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대학의 내부 행정과 교칙에 대해 국가 마음대로 개입해도 된단 말인가? 중앙정부 교부금을 받는 지자체는 어떠한가? 저런 논리라면 지방자치제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남북 단일팀은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불공정했고 국가 일방적이었다. 무엇보다 선수단에 대한 희생 강요를 전제로 했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할 여지조차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이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평창올림픽과 남북단일팀을 마냥 평화의 상징이라고 자화자찬할 수만은 없다. 남북평화의 대의를 존중할지라도 그 과정이 국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하위 집단의 일방적 희생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잘잘못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언론이 그 역할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의 언론은 남북 단일팀의 과정은 다소 잡음이 있었을지라도 결과론적으로 해보니 좋지 않았느냐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버린다.

 

이런 특성은 문 정부 주요 지지층과 현 정부 요직의 주를 이루는 586세대의 집단적 한계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보수정권 10년 동안 핍박받는 야당 지지층임을 호소하는 한편, ‘민주화 세대로서 자부심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이나 회사 등 조직 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일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체현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은 일사불란하지만 의사결정과정에서 여전히 경직적이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내 말대로 해보니까 좋았으니 문제없잖아식의 마인드는 산업화 세대뿐 아니라 민주화 세대들의 사고방식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애석하게도 나 같은 2030세대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2030세대가 남북 단일팀의 극적인 성사를 통해 감동받기 보다는 공정성과 불통을 문제 삼아 놀랐다는 청와대 참모들의 고백을 보고 나 역시 놀랐다. 소통 정부임을 자처하는 현 정부 참모들의 세대여론 파악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번 평창올림픽은 시장권력과 민족국가권력의 동맹을 통해 개인의 소외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보다는 효율’, ‘개인보다는 민족적 대의’(남북평화)가 두드러졌다. 전자를 우파의 실책이라 하면 후자는 좌파의 전체주의적 한계를 보여준다. 둘 다 마찬가지로 수직적 권력구조 하에서 대회 종사자, 선수 개개인이 직면하는 소외현상을 눈여겨보지 않는 태도는 비슷하다.

 

효율의 가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가치를 조금 더 존중해주는 따뜻한 시장논리’,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정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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