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치하의 스페인(1939~1975)

어쨌든 프랑코의 국민 진영은 우여곡절 끝에 1939년 4월 1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해묵은 갈등을 총칼로 일거에 정리하겠다는 반동적인 시도의 대가는 꽤나 컸다. 이미 내전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프랑코는 승자의 관용을 전혀 베풀지 않았다.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하에 1940년 4월 ‘탄압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범위는 내전 기간 동안 인적, 물적 범죄 행위 뿐 아니라 종교, 전통 문화에 대한 테러 행위까지도 망라하였다. 탄압법으로 처형된 사람만 약 3만 5천명이었고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기아, 질병, 자살 등으로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족히 20만 명이 넘었다.

“내전 승리 후, 병사들을 사열하는 프랑코”

프랑코 정권은 파시즘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보수적 가톨릭 색채가 강했다. 냉전 시대의 서유럽 정세는 이 조그만 독재자가 1975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내전으로 인해 국가 인프라와 산업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공화 정부, 국민 진영 모두 전비 조달을 위해 국가보유 금과 광산 채굴권 등 여러 이권을 소련,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외국에 팔아먹는 바람에 스페인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프랑코 정부는 정치 보복에만 열중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프랑코 치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초중고, 대학, 직장, 여성계 등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오로지 프랑코 권위주의 정권에 동원되기 위한 하나의 소모적 도구로 재편되었고 문화, 언론, 학문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프랑코 정권 동안 교육 정책에 가톨릭교회가 큰 영향을 행사하는 등 스페인은 정교분리라는 시대적 흐름에 도태되었다. 교회 당국의 학계 길들이기로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로 간주된 교사, 교수들은 학교에서 퇴출되었고 저술과 출판 행위마저 철저한 감시를 당하였다. 가까스로 석방된 공화 진영 추종자들과 그 가족들 역시 연좌제와 비슷한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생계를 위한 구직 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하였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는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국가 기관으로부터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경악스러운 발상은 곧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그 결과 1943년에 12,403명의 아이들이 억지로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정부가 지정한 가정으로 강제 입양되거나 고아원, 종교 시설에 위탁되었다.

운 좋게도 내전 승리 이후 국제 정세 또한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랑코는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참전 요청을 적절하게 거절하는 중립 정책을 고수한 대가로 패망한 추축국과 달리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정권 유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5,60년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비민주적인 독재 체제, 인권 탄압 등으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음에도 공산 진영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야 한다는 냉전 논리 덕분에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다. 유럽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비호 아래 정권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고 이는 쿠데타와 독재라는 국민 진영의 과오를 국민들의 기억으로부터 망각시키는 하나의 정치적 선전으로 활용되었다.


“1936년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

윗줄 좌측부터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

아랫줄 좌측부터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결론: 스페인 내전이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스페인 내전은 결코 머나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차치하고서라도 응축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민주적 절차와 합의 문화의 미성숙 때문에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한 광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으로 귀결된 해방 정국, 군사 독재로 굴곡진 우리 현대 정치사와 유사하다. 그리고 내전의 상처는 스페인과 한국 민중들 모두에게 끝나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또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하는 과정 역시 스페인과 한국은 여러모로 많이 닮은 것으로 보인다.

1. 민주주의의 숙명적 한계: 우리는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필자는 공화 정부의 패전 원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이라고 이미 밝혔다. 물론 국민 진영도 여러 이념과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독재 정치 체제를 지향했고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수직적이고 일사불란한 조직 운영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반면, 공화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법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힌 이질적인 집단들이 토론과 합의의 방식으로 행동을 결정했다. 그 결과 국민 진영보다 초기 대응이 느렸고 상부의 결정은 내각이 교체될 때 마다 자주 혼선을 초래했다.

특히 공화 정부 안에서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체계를 선호한 공산당원들과 모든 종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했다. 결과적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맞서는 상황에서 그 태생적인 결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전시 상황에서는 빠른 결단과 통일된 조직 강령이 승리를 위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상, 갈등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 제도적 절차로 이를 관리하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학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연 어디까지 권위를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다른 예를 살펴보자. 공화 정부를 돕기 위해 결성된 국제 여단에는 공산주의자 외에도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이들로 따로 조직된 대대는 철저한 탈권위주의를 지향하였다. 상호간에는 계급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날 벌어질 전투 방식과 자신들의 지휘관을 결정하는 문제도 토론과 투표로 결정하였다. 어쨌든 전문성 측면에서 고도로 훈련된 국민군은 분명 오합지졸에 불과한 국제여단보다 더 우수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내전은 국민 진영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부대의 탈권위주의적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강제적인 입대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상의 수호를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 새로운 유형의 군대는 분명 국민군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여 사기가 드높았고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각기 다른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집될 때, 전체주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권위의 공백이 야기하는 기술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항상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는 한반도의 안보 상황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역시 수호해야 하는 우리에게 '공익적 가치를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권위'와 '민주주의 철칙'간의 조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사면법: 과거사는 정녕 정리되었는가? 정치적 흥정과 강요된 화해

앞서 말했듯이, 프랑코 사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6년에 ‘사면법’(Ley del indulto)을 제정하여 과거 국민 진영의 반란과 여러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내전 당시의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고 이념의 잣대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사법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며 관련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프랑코 치하 수십 년 간 핍박받아온 반대세력의 구 국민 진영 인사들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면 사회 통합이 저해되고 향후 국가 발전 역시 지체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면법을 제정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1938~ )”

더 이상의 보복과 갈등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의 사회통합에 힘썼지만, 일각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회피하고 국민 진영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당한 과거사 청산을 마치 과거에 집착하여 분란을 초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논리로 무조건 피해자에게 용서와 이해를 종용하는 방식은 위험하다. 프랑코 국민 진영이 저지른 국가 내란죄와 수많은 인명 살상에 대해 법적, 도의적 책임을 규명하기는커녕, 사회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그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식의 청산 회피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국민적 합의가 실종된 이러한 정치적 흥정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매우 잘못된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 남겨 제2, 제3의 프랑코 식 정치 범죄 행위를 부추길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1976년 사면법 제정 이후, 스페인에서는 81년에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가 시도되기도 했다.)

우리 현대사의 예를 들어보자. 이미 명백한 국가 내란죄로 판명된 1979년 12.12 사태의 주동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처단했는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및 장세동, 허삼수, 허화평 등 하나회 일당을 국가 내란죄로 기소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정치 보복 논리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헌법을 부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초법적 권한으로 학살, 연행, 구금했으며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찬탈하려 한 죄인들을 처벌하는 행위를 겨우 쩨쩨한 정치 보복이나 권력층 내부의 다툼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정은 막대한 추징금과 함께 피고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신군부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97년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통합을 명분으로 그들을 사면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여생을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로 보내도 모자랄 그들은 지금도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대체 언제 그들이 사죄했고, 또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

화해와 용서로 사회통합을 꾀한다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범죄에 대한 처벌을 거부한다면 과연 우리는 후세에 어떤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어쨌든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국왕이 사면법을 통해 프랑코와 국민 진영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에 대해 사면 조치를 단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신군부 인사들을 법적으로 사면했다. 그리고 사면 취지는 두 경우 다 ‘용서와 화해를 통한 사회통합’이었다. 과거사를 판단하는 데 정치적 보복을 목적으로 혐의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 없이 무조건 단죄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정치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 엄한 처벌과 분명한 책임을 지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민적,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과거사에 대해 단죄를 내리는 사법 행위를 고작 사람들을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고 서로 편을 나눠 비효율적인 사회 갈등이나 유발한다는 식의 퇴행으로 인식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철저한 진상 규명과 확실한 처벌을 통해 우리 사회가 후세에 ‘과거의 범죄는 언젠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과거사 청산으로 논쟁 중인 우리 사회는 스페인 내전과 사면법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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