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신기루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개념 하나 소개하는 듯이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 중 신기루에 대해 모르거나, 신기루라는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오아시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여행자의 절규는 어릴 적 우리에게 철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으니까요.

그런데 엄밀히 말해 신기루는 가짜라기 보단 왜곡에 가깝습니다. 신기루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뿅! 하고 무엇이 생겨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신기루에 대한 정의는 ‘물체가 실제의 위치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왕가위, <화양연화>(2000)

 

그러므로 신기루란 목이 너무 말라 오아시스의 환영을 보는 여행자의 ‘망상’이 아니라, 어딘가에 무엇인가 있지만 불안정한 대기층에 의해 왜곡된 빛을 감각하는 여행자의 ‘착시’입니다. 망상과 착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전자가 철저히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완벽히 맥락에 의한 것이죠. 후자에 따르면 그 누구라도 (불안정한 대기층이라는) 특정 맥락 속에서라면 신기루를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기루에서 중요한 두 가지는 왜곡과 맥락입니다. 그리고 왜곡은 또한 일종의 탈맥락적 현상이므로 신기루는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기루는 탈맥락적이면서도 맥락적인 현상이다.’ 좀 풀어서 말해볼까요. 신기루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 있다는 점에서 맥락(혹은 합리성)을 벗어납니다. 하지만 신기루는 분명히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라는 점에서 맥락(합리)적이죠. 이런 역설을 혐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신기루 자체가 역설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비포 선라이즈>(1995)

 

그런 점에서 사랑은 곧 신기루입니다. 여러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이 어려운 말들을 써가면서 사랑을 논해왔지만, 결국 대부분 ‘사랑은 신기루’라는 말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대상을 탈맥락화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했던 슬라보예 지젝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친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을 건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독백은 사랑의 탈맥락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이들은 신기루로서의 사랑을 반쯤 포착한 셈. 그렇다면 탈맥락적인 사랑의 성취 이후 지속적인 선언(“난 널 사랑해”)의 노력을 강조했던 알랭 바디우 같은 경우는, 앞선 반쪽짜리 정의에 ‘맥락적’인 성격을 더함으로써 사랑의 성격을 온전히 정의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사랑을 억지로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불쑥 찾아오는 사랑을 거부하지도 말길 바랍니다. 사랑은 신에 대한 거부를 마치 하나의 종교처럼 맹신하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지 미시적 차원의, 그러니까 ‘화학적 작용’이라는 말 따위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낭만과 사랑을 그럴듯하게 연결시켜 ‘사랑=아름다움’이라는 억지공식을 설파해온 로맨티시즘도 비겁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얀 사무엘, <러브 미 이프 유 데어>(2003)

 

제가 권하는 사랑이란 차라리 화폐에 대한 마르크스의 냉철한 시선과 닮아 있습니다. 흔히 마르크스는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관념, 혹은 정신의 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헤겔(비판으)로부터 나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만약 관념 혹은 정신 등의 상부구조가 (교과서에서 가볍게 언급되듯) 하부구조에 종속될 뿐이라고 믿었다면, 마르크스는 굳이 어려운 책을 쓰지 않고 그저 한 마디 했을지도 모릅니다. “화폐를 찢고, 태우자!” 하지만 화폐는 그저 종이쪼가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휴지쪼가리와 같지 않다는 걸 마르크스는 알았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결코 화폐를 버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했죠.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화폐를 신기루로서 보았던 셈입니다. 화폐는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인 것이죠.

 

압달라티프 케시시,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환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입니다. 사랑은 불쑥, 맥락을 잃은 채 찾아오지만, 그건 사랑의 감정을 느낀 사람이 유별나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단언하지 마십시오. 어른인 척하는 아이, 아이인 척하는 어른 모두 건강하지 않습니다.

 

혹시 눈앞에서 오아시스가 어른거리는 여행자가 제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아마 오아시스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아시스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발은 떼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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