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글을 쓰기 정말 귀찮을 때가 있다. 성격이 게으른 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정해진 마감일에 쫓겨 마지못해 기계에서 찍어내듯이 쓰는 글’이 아니다. 그냥 쓰고 싶을 때 써야 좋은 글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쓰고 싶은 주제가 마구 떠올라서 흥분되는 바람에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에 바쁘고, 어떤 날은 정말 쓸 소재도 안 떠오른다. ‘삘’은 안 나오는 마당에 정해진 기일에 맞춰 대충 써낸 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체념감에 아예 손을 놓고(넋도 같이)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 일도 다반사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의 성과란 그 날 개인의 생체 리듬에 맞춰 변화무쌍한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은 영 날이 아니네요.”라고 태업을 하며 여유를 부리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사회이다. 낮과 밤,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시간적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생체리듬 대신, 오늘날 우리는 한낱 기계에 불과한 12진법짜리 시계의 분침과 초침의 순환적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동규칙을 정한다. 심지어는 밀리 초(1/1000초),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자본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주어진 시간을 틀에 맞추어 해야 할 과업으로 빽빽하게 배열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에 항거하거나 이에 낙오된 자를 이 사회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어버린다. 높은 생산성을 달성해 인간의 후생 개선을 위해 고안된 시간의 규격화는 역으로 우리를 시간의 권력에 복속시킨다.

 

“클릭 대기 중!”
1000분의 1초, 그 찰나의 시간 차이로 개강을 앞두고 우리는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eh5b/110132019651)

시간 권력의 역사(시간과 개인, 사회)

사실 시간의 권력은 산업사회 이전 시대에도 권력층에 의해 행사되었다. 고대에는 농사의 풍작과 치수(治水)가 곧 지배층 권력의 원동력이었다. 이 시기 시간의 개념이란 1년에 걸친 농사의 풍년을 위해 해와 달, 비와 눈의 내리는 시기를 예측하고 날씨와 풍요의 신께 제사 드리는 행위의 반복을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세 사회의 권력이었던 교회는 농사와 더불어 수많은 종교적 과업과 축일을 통해 민중의 1년 365일을 짜임새 있게 간섭하려했다. 교회가 가진, 시간을 측정 및 설정할 수 있는 능력과 일반 민중이 해야 할 일과를 배치하는 것은 곧 권력이었다. 시간의 권력은 권위적이었지만, 봉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력을 보장하는 시간적 권력이면 족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권력은 여전히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교회)에 속해 있었다.

‘시간의 주권’이 인간에게 속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먼저 알아차린 이들은 상인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 간, 도시 간 원거리 교역이 증가하자, 상인들은 유통 과정의 속도, 상품의 품질, 시장 정보력 등이 모두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됨을 깨달았다. 상대적 희소성에 따른 차익을 얻기 위해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팔고 시장의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혹은 상품 품질의 보존을 위해, 어음과 같은 신용 화폐의 청산과 상환 기일을 지키기 위해 보다 정확하고 엄정한 시간관념이 필요했다.

이후 19세기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자 시간의 권력은 더 치밀해졌다. 포드주의에 입각한 대량생산을 위해 숙련 노동자의 탁월함 대신 자본가들은 공정, 노동의 단순화와 획일화를 택하였다. 과거에는 고된 숙련 기술을 익힌 장인만이 대접을 받고 소량 생산에 따른 고부가 가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열 살짜리 어린이도 몇 분이면 익힐 간단하게 응축된 공정 기술 패러다임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자본가들의 관심은 복잡하거나 고차원적인 장인 기술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위해 단일 공정의 보다 빠른 시간 단축과 이에 반비례하여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계 생산점에 다다를 때까지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산단가를 낮추어 시장 경쟁력을 갖추고 이윤을 취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식사”
노동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이윤 창출에 도움이 안 되는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간주되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식사시간과 휴식시간 단축이 규정된 일과표 부여를 통해, 자본은 개인의 시간을 장악하였다.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출처:
http://cinemaedebate.com/2009/11/23/tempos-modernos-1936/)

생산비 절감을 위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쌍두마차’는 이때부터 불을 뿜기 시작했으며, 인체의 관절과 신체의 역학구조는 생산을 위한 공정단계 하나하나에 알맞게 분석되고 재조직되었다. 공정의 시간단축과 더불어 노동자의 하루 일과는 일괄적으로 생산 활동에만 최대한 투입되도록 짜였으며 출근시간, 식사시간, 휴식 시간의 엄수는 시간 권력의 냉엄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간이 곧 권력이며 시간이 곧 돈인 시대가 도래했다.

시간 측정의 통일: 패권 국가로 향하는 길(시간과 국가)

예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존재했다. 이것이 국가적 목표가 되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 ‘역법’(曆法, 달력 계산법)이다. 역법은 당시 국가나 시대에 따라 상이했다. 개별 국가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채택한 역법을 얼마나 더 넓은 세계에 ‘표준력’으로 공인받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국가 간의 권력 문제’이다. 예로부터 패권 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가 자신들만의 ‘역법’이었다. 시간을 관장하여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기에 고대부터 이집트력, 그리스력, 로마력, 율리우스력 등 패권국의 달력 계산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변국은 패권국의 역법을 수용하였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는데 중화사대질서 하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천하에서 사용할 자신들 고유의 역법이 있었고 왕조나 황제가 바뀔 때마다 그 해에 고유의 칭호를 붙이는 연호(年號)를 공표했다. 이러한 중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이웃나라에도  통용되었고 ‘건원’(建元)은 패권국만이 행사하는 특권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주변국에게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건원은 곧 ‘자주성의 표출’이었다. 우리나라는 일부 왕조를 제외하면 신라 말기 선명력, 고려 후기 수시력, 조선 전기 대통력, 후기에는 시헌력 등 역법에 관해서는 대부분 중국의 것을 차용하였고, 이는 곧 중화 패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시간 측정법의 표준화는 ‘국가 간 수직적 권력관계의 상징’이었다. 또한, 역법의 교체는 곧 개혁의 시발점이자, 정치권력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12진법대신, 10진법 시간관념 도입을 시도했던 것, 1895년 을미개혁 때 조선 정부와 1926년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이 기존의 전통 역법을 버리고 서양식 태양력을 채용한 것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력이 된 태양력, 즉 그레고리력의 보급과 더불어 전 세계는 지구의 자전에 따라 상이한 시차를 감안하여 표준 시간대를 채택하고 있다. 이 역시 국제정치 패권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7세기부터 해양 패권을 독식해온 영국은 국제 무역과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서로 다른 지리적 공간에 공통적으로 적용할만한 새로운 국제 표준 시간대의 설정이 필요하였다. 이를 자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 자오선(Greenwich Mean Time Line, 일명 GMT, 경도 0도선)으로 삼아 국제 표준 시간대의 기준으로 19세기 후반에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고 이를 토대로 각국은 영국이 만든 규칙에  따라 자국의 시간대를 수용하였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기’(西紀)라고 불리는 그레고리력의 확산과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의 공인은 영국 중심 세계패권주의에 상응하는 하나의 특권이었으며, 이로써 전 세계를 (팍스 브리태니커에 기초한) 하나의 시장권으로 묶는 국제 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켰다.  

 

“두 번 잃어버린 시간대”
1908년 대한제국은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를 채택했는데, 1912년 일제 침탈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도쿄시’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일제 청산을 이유로 127.5도 표준시로 회귀하였으나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다시 도쿄시를 채택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표준시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015년 북한은 광복절을 기해 기존 경도 135도의 도쿄시와 30분의 시차가 있는 이전 대한제국의 127.5도로 회귀하고 이를 ‘평양시’로 명명하였다. 우리나라는 고유의 표준시를 두 번 잃어버린 셈이다.
(출처: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207)

속도경쟁의 결과: 시간의 폭력성

전술했듯이 근대부터 시간의 권력은 자본과 노동의 통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현대에 접어들어 시간은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 동네 PC방을 비롯한 편의 오락 시설 등은 이용시간을 기준으로 값을 지불해야하고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기준은 ‘시급’단위로 책정되며 자동차, 고속철도 등의 교통수단은 얼마나 더 빠른가가 기술진보의 척도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도를 측정하는 단위는 km/h, 즉 한 시간 당 얼마의 거리를 가느냐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거래 행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 하나의 공리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에서 속도 경쟁은 사회적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한민국만큼 배달이나 택배 서비스 문화가 일상화되어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가만히 앉아 전화 한 통이면 전국 어디든지 믿기 힘들 정도의 짧은 시간 이내에 맛있는 음식과 주문한 상품을 배달 받을 수 있는 특유의 배달, 택배 문화는 선진산업사회의 발전된 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껏 누려온 배달, 택배 서비스 역시 시간의 권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배달 업계에서는 배달원들에게 하루 안에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배달 업무를 배정하고 그 성과에 따라 직무평가와 보수 지급, 고용에 대한 계약 여부를 결정하였다.

 

“속도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비극”
더 빨리 소비하고 싶고, 더 빨리 팔아야만 하는 배달 문화의 이면에는 ‘시간의 폭력성’이 내재해있다.
(출처: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709590)

우리가 집에서 편하게 음식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살기 위해 살인적인 업무를 감당하여야 했다. 자연스레 이러한 '시간의 폭력성'앞에 이들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할 하등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도로에서 위험한 곡예 주행을 해야 했고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해가며 인도로 겁 없이 달린다. 법치질서는 무너지고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이로 인한 무고한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해왔던 배달, 택배 서비스가 역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범법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광적인 빠름을 추구하는 시간의 폭력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 이상, 교통위반에 대한 처벌수위만 높인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시간 압축을 향한 욕망은 파국적 결말을 맞는다. 누군가의 생계를 쥐락펴락하면서 더 빨리빨리 문화를 종용하는 ‘시간의 폭력성’은 사회 법치를 무시하는 명분이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결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시간 이용의 차등 권력화

‘부자도 돈을 주고 시간을 살 수 없다.’, 혹은 ‘누구에게나 24시간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현대에 접어들어 더 무게감 있는 인생의 격언으로 통용되고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사회적 평판이 결정된다고들 한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은 축적되어 서로 다른 인생의 군상들을 만들어낸다. 누군가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시간 활용을 게을리 한 자는 하류 인생으로 떨어질 수 도 있다는 시간의 권력이 주는 하나의 공포이다.

이렇듯 시간의 이용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당연히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권력과 성공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이라 해도 경제적 조건의 제약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자가 결국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에 시간을 더 여유롭게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초 단위로 해야 할 일과가 짜여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특권은 더 크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과 경제적 걱정 없이 더 나은 인생을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있는 사람의 시간 활용도는 분명 다르다.

이렇듯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보다, 시간을 남들보다 얼마나 더 자유롭게 할애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과 환경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제약의 차이는 계급적, 계층적 차이에 기인한다. 동일한 직장 내에서 관행적으로 허용되는 일반 사원과 부장의 출근 시간이 다르고, 업무시간동안 업무 외에 할애할 수 있는 재량권도 사회적 위치와 직급에 따라 차등 배분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자나 권력자라고 해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대신, 남들보다 ‘시간을 더 벌 수 는 있다.’ 시간이 돈, 권력이고, 권력과 돈이 곧 시간이다.

짜인 인생 시간표: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근대로 접어들어 시간은 곧 국가적 계획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대중의 사회적 리듬을 통제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시간의 관리와 계획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 일과나 방학 시간표를 짜는 습관을 들여 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르친다. 더구나 입시에 모든 교육 과정과 유년기 시절이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우리는 그 시기에 ‘해야 할 인생의 과업’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시기적으로 분명하게 정해진다.

입시와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은(예를 들어 연애)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얼마든지 하렴.”이라는 사회적 강요아래 자의반 타의반 보류된다. 과연 대학만 들어가면 시간의 활용이 자유로울까? 20살 때부터 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에 20대 대부분의 시간이 저당 잡힌다. 취업을 해서 서른 언저리가 됐을 쯤엔 ‘결혼’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 물론 시간 할애에 대한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에 기초하였지만, 결국 인간은 시간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쉬어가는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

결국 시간의 압박에 따른 집단적 스트레스는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보복운전이나 그에 따른 보복폭행 피의자 대부분이 평범한 직장인, 자영업자 등이 다수라는 점,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과도한 업무를 처리해야하는 부담을 겪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간의 압축을 통해 누리는 서비스는 우리 모두를 편리하게 했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의 압박에 따른 분노조절 장애의 확산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시간에 충실하려는 현대인의 욕망, 버스 도착 정보 알림판"
불확실성을 없애고 분, 초 단위를 기준으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http://goyangcity.tistory.com/2561)

오늘날 우리는 시간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분과 초의 초미세 영역까지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 다음 버스나 전철이 언제 올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대중교통 앱으로 버스, 전철이 도착하는 시간을 초 단위로 알 수 있다. 한술 더 떠 환승에 필요한 시간과 제일 빨리 환승할 수 있는 플랫폼 위치까지 알려준다. 바야흐로 현대인들은 시간을 초 단위까지 통제하여 고도의 효율성을 발휘하려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 같이 촘촘한 시간의 간격에 인간이 종속되어 감을 뜻한다.

12진법과 60진법으로 정확하게 규격화된 시간은 반복적인 규칙과 규율을 부여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본유의 자연적 리듬의 존재를 간과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은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획일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빽빽하게 짜인 일과표에서 개인이 발휘할만한 창의적인 발상이나 창조나 재충전을 위한 ‘뜻하지 않은 일탈’은 허용되기가 쉽지 않다. 이로써 산업적 발전과 별개로 사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지적, 문화적 수준의 고양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사회담론에 대한 철학적 사고행위에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이미 ‘사치스러운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시간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집단적 광기를 뿜으며 대중을 어떠한 전체 목표에 동원하려 애썼고(나치즘, 마오이즘, 북한식 공산주의), 반대로 권력을 이용해 인위적인 여가 시간을 허용하여 정치적 영역에 대해 대중의 무관심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살라자르의 3F정책, 전두환 5공 정부의 3S정책)

 

북한의 집단체조(mass game): 사적인 권력유지를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시간을 착취하는 정치적 선전 기술은 전체주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출처:
http://blog.fontanka.ru/posts/151070/)

결론: 인간, 시간의 주권자

시간의 권력은 시간의 표준화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효율적인 이용을 가능케 하는 등 인류 문명의 복리후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간의 주권자로서 인간이 시간을 주체적으로 이용한 역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인간은 시간에 쫓기고 시간의 틀에 자유를 속박 당했다. 중세에는 종교와 관습이, 근대부터는 자본이 ‘시간의 고용주’였다. 시간의 규칙성이 시간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과도하게 저해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권력이 시간의 주권을 인간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본의 이윤 축적에만 봉사한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ex: 평일에 하는 시민 참여 정책 공청회)을 초래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필자는 마감일의 압박에 쫓겨 쓰고 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한참 지났다. 반복적인 게재는 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업이긴 하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쓰는 것이 내가 쓰고 싶을 때 써서 좋은 글을 창조하는 것보다 뭐가 더 나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 글의 일부 문장과 표현은「문화정치학의 영토들」, 2007, 그린비 출판사, 이진경 편저 中 ‘근대적 시간: 시계, 화폐, 속도, 최진석’에서 부분 인용 및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