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화의 조화


단어에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여있다. “고독”에는 짙은 외로움의 감정이, “여행”에는 낭만에 대한 그리움이, “복면”에는 익명성이라는 담론이 내포되어 있다. 특정한 단어가 포괄하는 다른 ‘무언가’는 시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단어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무엇과 연결되는지 면밀히 고민해야한다. 2015년 겨울, “복면”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폭력성이 깃들고 있는 복면이라는 단어를,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해도 되는 걸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서로 연결되는 현상은 흔하다. 예를 들면 ‘푸른 종소리’나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와 같은 공감각적 표현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새로운 차원의 심상을 만든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만 봐도 가슴이 뛰거나, 헤어진 연인과 함께 듣던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 ‘부조화의 조화’ 현상은 보기보다 강력해서, 심리치료에까지도 이용된다.


때문에 특정 단어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단어와 관계된 것들을 꺼린다. 그러다가는 그 단어 자체는 물론 관련된 것 모두를 거부하게 된다. 소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가 대표적인 예다. 마법사들에게 볼드모트는 곧 죽음이었다. 마법사들은 볼드모트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입 밖에 꺼내지 않음으로써 그를 두려움 자체로 만들었고, 볼드모트를 두려움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볼드모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욱 막강한 공포권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 해리포터와 볼드모트. ⓒ네이버영화


단어, 프레임


같은 것도 그것을 나타내는 서로다른 단어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어는 가장 효과적인 ‘프레임’이다. 일례로, 교정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서투르게나마 올바름을 말하는 학생들을 흔히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순간, 학생들은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지닌 느낌(강경함, 진보지향적, 조직적, 융통성 없음, 반사회적 등)에 매몰된다.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몇몇 학생에게는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나, 모든 운동권 학생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그 매몰은 실제 운동권 학생들이 지닌 신념이나 태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운동권’은 외재적인 프레임이다.


대학교에 막 입학한 새내기 시절, 90년대에 대학에 다닌 선배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선배는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었는데, 그 때를 이렇게 추억했다. “극도로 진보적이었고, 극도로 보수적이었어.” 전자의 진보는 선배가 속했던 정치적 진영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후자의 보수는 진영 속에서 선배의 태도였다. 대립적인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치 진영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광대한 의미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에 따라 다른 프레임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형의 진보와 보수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보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지칭하는 정치 진영 현실 간의 심각한 부조화를 느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혹은 우파와 좌파)는 시대와 지역과 집단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보수와 진보라는 담론이 한국 사회의 특정 진영을 의미할 때,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내포하는 다른 ‘무언가’들도 그 진영에 귀속된다.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며, 누가 보수적이고, 누가 진보적인가 하는 질문의 답은 복잡하게 뒤엉켜버린다.



▲ 종단문제 해결을 위해 50일 간 단식농성을 한 동국대학교 김건중 부총학생회장 ⓒ오마이뉴스


보수의 프레임


동국대의 경우, 2014년 12월부터 조계종의 학교 행정 개입, 총장의 논문 표절, 이사장의 탱화 절도사건 등이 문제시되며 학생과 학교당국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학생들의 반발은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의 50여일에 걸친 단식농성까지 이어졌으며, 그 결과 12월 3일 동국대 이사회는 모든 이사의 사퇴를 결의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은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저항하는 학생들의 태도다. 그들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저 진보적인가? 아니다. 저항하는 동국대 학생들은 누구보다 보수적이다.


저항이란 근원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다른 무엇보다 보수적인 행동이다. ‘저항권’이라는 개념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존 로크에 의해 공식화되었다(물론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시민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구성된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시민의 자연권을 침해할 경우,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저항하고 정부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민중총궐기를 두고 폭력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지양되어야 하며, 누구나 폭력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비난이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비난과 연결될 순 없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랐다는 이유로 배척되지 않듯, 폭력 자체와 이를 자아낸 시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단지 폭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현상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온, 복면의 마스코트가 된 ‘가이포크스’ 가면. ⓒ네이버영화


보수의 제국, 검열관의 천국


서울대학교의 최인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프레임>에서, 프레임은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발언 이후 복면에 덧씌워진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는 시위대에게 끔찍한 폭력성을 부여하며,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시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한다. 복면을 폭력과 시위를 통제하는 내면의 검열관으로 만든 것이다.


민중총궐기는 경제민주화와 공약 폐기를 넘어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정부에 대해 쌓여온 불만의 응집이며, “헌법의 가치를 지켜라”고 외치는 시민들은 너무나도 보수적이다. 이를 철저히 외면한 채, IS 운운하고 저항권을 필요악으로 규정하며 “복면을 벗으라”고 외치는 자칭 보수 세력은, 폭력에 대한 비난을 무기삼아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한다. 흔히 말하는 ‘물타기’며, 헌법이 지향하는 ‘저항’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다.


보수는 신성하다. 보수는 과거의 가장 빛나고 찬란하던 가치와 신념들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며 만들어낸 시대정신이며, 피땀흘리며 세워놓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집중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다. 반대로, 시대정신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모순에 집중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식과 노력의 집합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앞뒤 다퉈가며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보수가 아니며, ‘보수’라는 복면을 쓴 친정부적·반국가적 세력이다. 시위대의 복면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전에 ‘보수’라는 가짜 복면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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