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를 둘러싼 美中의 속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이 4월 6~7일 미국 플로리다 마라라고에서 첫번째 정상회담을 했다




정상회담 직후 급속히 가까워지는 美中관계…


中북핵압박공조-美사드배치유보 '빅딜' 가능성


美中은 북핵문제해결보다 국익 챙기기가 우선




4월 6일부터 7일까지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미중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악동’으로 불리는 트럼프와, 중국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태영호 공사 탈북, 김정남 암살, 연이은 미사일 발사 등으로 악화되기만 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중 양국이 어떤 논의를 나누고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회담에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당장 가시적인 성과는 없어보인다. 사실 없을 수밖에 없다. 첫 대면인 만큼, 회담은 서로의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깜짝 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등장했다.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에 미군이 시리아를 공습한 것이다.



지난 6일, 미군의 공습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 소속의 샤이라트 공군기지



트럼프는 시진핑과 함께 디저트를 먹는 순간에 시리아 정부군의 공군기지를 공격했다. 이는 시리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피력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실은 중국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다. 그렇잖아도 북한을 사이에 두고 껄끄러운 미중 사이에, 실질적인 미사일 폭격을, 그것도 시진핑이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에 자행한 것이다. 줄곧 “북한은 인류의 문제다”, “중국이 안 하면 우리가 하겠다”고 호언하며 ‘중국역할론’을 주장하던 트럼프에게, 당장 중국에 보낼 수 있는 메시지로서 이보다 강력한 방법은 없다.


실제로 정상회담 후 중국은 중국인의 북한여행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의 거센 압박에 못이겨, 마침내 대북압박에 보다 전향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그런데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인 12일, 시진핑과 전화통화를 한 트럼프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낸다. “중국이 북한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달랐다”며 중국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지금껏 중국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악동’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의외였다. 중국이 ‘고작’ 북한여행을 규제했다고 해서 그 답례로 건네는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겁다.





이상징후는 다른 곳에서도 포착됐다. 16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함께 한국을 찾은 백악관 외교보좌관이 사드 문제에 대해 “차기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말한 것이다. 외교정세에 대해 사실상 무지했던 트럼프 정부에서 큰 손을 휘두르는 외교정책 담당자가, 사드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야권 성향의 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사드 철회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드 문제로 몇 년간 골머리를 썩인 우리나라는 난리가 났다.


한미 당국은 즉각 사드 배치는 기존 계획대로 진행된다며 논란을 진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중정상회담이 끝난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몹시 의미심장하다. 중국이 대북제재를 강화하며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고, 미국이 이에 호응해 사드 배치를 유보하거나 철회하는 ‘빅딜’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이유다.




정상회담 후 경제협력 강화하는 美中……


북핵문제,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


한국, 닭 쫓는 개 신세 될 수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일관되게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빅딜’이 성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북한문제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여력을 쏟기보다, 자국 경제에 노력을 쏟는 편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면서도 국내에서 강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자국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세계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의 원활한 공조는 필수적이다. 중국 또한 2016년 이후 하락세로 접어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대일로 정책, 서부대개발, 동북3성 개발 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경제 공조는 필수적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의제는 미국이 제기한 미중 무역불균형 문제였다.


실질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정상회담 전에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북한에 대해)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며 중국을 압박하던 트럼프는, 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과 정말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미중 간) 잠재적인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라며 시진핑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시진핑 또한 “미중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1000개”라며 화답했다. 바로 며칠 뒤 트럼프는 대선공약이었던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을 철회했다. 자국의 실익이 가장 중요한 양국 정상에게, 북한문제가 이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북핵문제는 20년 넘게 1%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경제회생과 북핵해결 중 무엇이 ‘해결 가능성 있는 시급한 문제’일까?



북핵 갈등이나 사드 갈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간 '대리세력경쟁'으로서의 성격이 크다



미중은 이렇게 열심히 짝짜꿍을 맞추고 있다. 이제 눈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 남아있나? 미국이 사드를 배치해준다는 말 하나만 믿고, 백악관 외교보좌관의 말 한 마디에 당황하며 좌지우지되고 있다. 수도권 방어도 못하고, 장거리 미사일 이외의 수 천 발의 단·중거리 미사일은 막지도 못하고, 그마저도 어설픈 실험만 몇 차례 거친 사드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다.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100초 만에 살펴보는 사드 성능 보고서")


북한의 주력미사일인 노동/무수단 등은 사드포대를 넘어 부산/제주도 등을 타격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



만약 미국이 미중관계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사드 배치를 유보해버린다고 해도, 한국이 미국에 대고 ‘미중관계보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은 아직 그 성능이 불확실해 미국에게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않고, 만약 미국까지 닿는다고 해도 미국에 배치된 사드로 본토 방어에는 별 무리가 없으며, 더구나 ‘아메리카 퍼스트’의 트럼프가 한국의 국익을 미국의 국익만큼 챙겨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희망적 사고다. 한국은 미국의 말에 따라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 외교적 카드를 전부 내팽개쳐버린 비참한 말로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민감하고 번거로운 북핵문제해결에 별 관심이 없다. 적당히 상황유지만 하면서, 당장 눈앞에 있는 국익만 챙기면 그만이다. 더 이상은 닭 쫓는 개처럼 분별없이 외교정책을 세워선 안된다. 한반도는 언제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었으며, 강대국 세력갈등의 데모버전이자 대리전쟁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한 편으로 기울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편이 반발해 전쟁의 폐허가 된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철서구>(왕삥, 2003)


영화를 많이 봤었나? 당신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하루같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비록 시네마의 역사가 겉으론 매우 풍부해 보이지만, 또한 상당히 단순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즉, 처음에 당신은 여러 영화제작자, 학교, 국가적인 전통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식으로 그 분야를 검토하면, 그것의 전반적인 풍경에 대해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사는 매우 짧은 반면, 예술사는 매우 길다.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닌 시네마는 오래된 형식이 아니다. 거기다, 활동사진motion pictures이 탄생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형식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인 문화에 침투해 들어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네마는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그 영향의 정점에 다다랐다. 여러 학교와 전통이 생겨났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소련. 각각은 상대적 환경과 사회적 문맥에 따라 형성되었다. 각 사회의 시네마에는 고유한 기능과 필요조건이 있었다. 가령, 미국에서 영화가 재빨리 상업적 이익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반면, 소련에서 영화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라별로 실험과 탐구는 상이했다. 시네마 혁신─형식적. 예술적 특성과 기술적 진보 모두에 있어서─이 취한 방향들은 지역의 사회문화사와 연관되어있다.

 

학우들과의 논의에서, 당신은 촬영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물음들에 집중했었나, 아니면 이미 대개 영화제작으로 관심이 바뀌어 있었나?

 

단지 촬영기법만 한정하진 않았다. 시작부터, 우리의 관심은 특정한 측면 대신 전체를 쥐어 잡는 것에 있었다. 첫 해는 진정 시네마─역사, 동시대적 발전, 그리고 여러 국가의 전통에 대해─에 대해 배웠다. 요컨대, 목표는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였다. 꼬박 일 년 동안 이 방식으로 작업한 후에,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기본적인 요약과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향성은 점차 명료해졌다.

 

당신이 영화제작에 눈을 돌렸던 90년대 중반, 중국 감독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 시네마가 당신의 생각의 영향을 주었나?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당시 영화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제작자 개인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비록 몇 편의 영화들이 1980년대 이후로 국제적 권위의 상을 받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매우 황량했고, 세계적인 예술의 특성인 풍부함과 예측불가능성이 결여되어있었다. 모던 아트는 삶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포함하지만, 당시 영화들에 그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문화적 표지cultural markers 또는 이정표의 문제에 더하여, ─내가 보기에─PRC[각주:1]의 체제establishment 하에서 지속된 영화 제작이 주된 문제였다.

 

1990년대에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 없이 해외로 몰래 작품을 반출했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더 이상 제도적 체제institutional establishment 속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지 않나?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내가 체제 속의 영화제작이라고 말할 때, 누구라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뭘 의도한 거냐고? 간단하다. 체제의 영화들은 동시대적 문화와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몇몇 고유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체제의 관점은 여전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직 동시대적이지도, 진정으로 현대문명의 작업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 또한 이건 중국 시네마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철서구>(왕삥, 2003)

 

이 말은 당신이 이른 20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영화들을 봤고 동시대 영화를 그 당시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영화들을 봤다. 당신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면, 영화는 당신의 삶이 되므로 당신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작업을 해왔다. 여전히 매일 영화를 본다. 이건 영화제작자로서 내 삶의 일부다. 중국의 영화사를 보면, 영화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건 마치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다. 영화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했고, 그들 또한 영화에 대한 의식을 형성했다. 중국인들은 시네마가 새로운 문명을 대변한다고 받아들이지도, 또 다른 문화적 형식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을 연구한다면, 당시 중국인들에게 시네마는 그저 장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화는 주로 이 새로운 장난감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걸 발견한 몇몇 부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시의 자료는 랜덤 저글링random juggling이나 무대 공연 쇼트들이 전부다. 이건 유럽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영화는 아주 강력한 시네마 문명으로서, 새로운 문명─중국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이 초기 국지화localization가 수행된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시네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 유럽과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모로 변화했다. 중국인들은 영화가 단지 갖고 노는 새로운 장난감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또한 중국 자체가 매우 급속히 변화하고 있던 시기와 겹쳤다. 정치와 경제의 발전은 중국 시네마의 역사와 함께였다. 오늘날 통상의 표현은 이 시기를 ‘좌파 시네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정의내리긴 어렵다. 1949년 이전 상하이에서 발전한 시네마는 중국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시기였다. 당시 영화들을 세심히 보면, 교과서에서 봤던 버전과는 달리, 씬 뒤에서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역사적 문제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차분하고 조리정연한 눈으로 보는 것은 쉬울 것이다. 내 눈에 이 시기의 영화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헐리우드를 표방한, 상업적이고 스타 중심적인 작품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지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도 있다. 영화를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몇몇 요소들이나, 과거 지식인들의 윤리적 표현들, 그리고 동시에 지배적인 스타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도시 아방가르드적urban avant-garde이고, 어떤 영화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리얼리즘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는 혼합되어있다. 영화의 여러 스타일은 보통 감독들의 다양한 배경 때문에 생긴다.

 

중국의 영화제작자와 평론가 대부분은 국가(중국 – 옮긴이)의 영화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그건 중국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학자들이 왕왕 중국의 시네마에 대해 논쟁하지만, 중국사회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로는 비록 그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자세한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대조적으로, 그들은 방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당면한 문화역사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자국의 시네마를 연구하는데 투자한다. 국가의 영화사는 이런 종류의 연구로 출현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와 같은 작업이 없다. 우리의 영화사를 정초하려는 노력─신중하고, 명확하며, 합리적인 노력─이 결핍되어있다. 물론 세계의 영화사와 다른 나라들의 영화사를 이해해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사회문화적 질서와 동시대적인 영화제작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본질을 무엇인가? 지금 시네마의 실정은 어떠한가? 영화제작자로서 보건대, 자기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인내력을 가져야 한다. 나의 관점은 이렇다.

 

 <원유>(왕삥, 2008)

 

 

당신은 90년대 말에 북동쪽으로, 선양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사양화한 지구의 철거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을 찍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테마로 결정했나?

 

나는 베이징에서 때로 텔레비전 시리즈 작업에 참여하거나 카메라맨으로 일하면서 삼년을 보냈다. 이후 <철서구>를 찍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톄시(铁西) 산업지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양에서 컬리지에 다닐 때, 주말이면 종종 그곳에 사진을 찍으러 가곤 했다. 그곳의 공장들, 노동자들과 거주자들. 나는 그 장소에 익숙해졌다. 반면에, 그 결정은 또한 우리네 시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왔다. 내게 톄시 지구를 상기시키는 고적감desolation─중요하던 역사가 이제 점차 우리 눈 앞에서 쇠퇴해가고, 와해되어가고 있다는 감정─이 있었다. 그 이후, 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런 테마와 수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공단과, 그곳의 생산 일과routine,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는 것도 포함되었나?

 

물론이다. 어떤 테마를 정한 뒤에, 모든 영화제작자는 여러 기술적인 접근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기술 장비들을 실행 가능하도록 배치하는 법을 고려하는 것, 그게 전부다. 많은 이들은 왜 첫 영화의 러닝 타임이 9시간인지 물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개인적으로 그건 내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는 전혀 특이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관객들로부터의 저항resistance(저조한 관객수를 말하는 듯 – 옮긴이)을 예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 제작에 있어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나?

 

저항?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완성할 때까지의 계획을 자각하며 영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 내 직업은 완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현시presentation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주로 나날의 실제 작업과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나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노동자들과 사귀는 것 등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모든 건 참으로 간단했다. 영화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이다. 매일같이 찍고, 매일같이 수많은 세부사항들을 다뤄야 한다. 작업에는 물적 자원의 지속적인 투입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내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지원해줬다.

 

<원유>(왕삥, 2008)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잠재적인 관객들의 저항을 고려하지 않았나?

 

뭐라고? 영화의 비용은 박스오피스 수익과 다른 문제다. 둘은 연관이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박스 오피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뒤얽혀있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지는 둘은 서로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자 – 옮긴이). 그건 명백히 큰 이윤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믿는 한, 계속해야 한다. 그건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이후 당신은 <철서구>의 테마를 잇는 듯한, 다큐멘터리 두 편 <원유Crude Oil>(2008)와 <석탄 가격Coal, Money>(2010)을 더 찍었다. 엄동설한에 중국 북서쪽 칭하이靑海성의 황야에 있는 유전에서 노동자들을 기록한 <원유>의 러닝타임은 14시간이다. (<원유>는 – 옮긴이)로스 엔젤레스에서 관객들이 임의로 들어오고 나가는 전시관에서 상영되었다. 사실상, 거기 앉아서 영화 전부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설치미술 같다. 의도했었나?

 

그랬다. 로테르담 영화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설치 시네마 섹션을 원했다. 그들은 내게 요청했고, 나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영화는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익은 별로 없었다. 당시 나는 북서쪽에서 작업하고 있었으므로, 편의를 위해 유전을 찍기로 결정했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중공업이나 에너지 산업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원유>에서는 노동자들의 휴게실에서나, 바깥 리그rig(굴착 장비 – 옮긴이) 옆에서나, 대화나 행동이 거의 없다. 영화에 대한 단일한 인상은 심지어 그들이 말을 하거나 주위를 돌아다닐 때에도 끊기지 않으며, 보통 몇 분여간 지속되는 롱 쇼트들은 그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이건 관객들이 집단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공동체와 삶lived life에 대한 강렬한 감상을 품는 <철서구>와는 상반된다. 그러한 대조는 지역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중국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공장들에는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공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의 정규직 노동자라면, 노동 현장에 대한 소유 중 일부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유사하게, 사람들의 일상은 공장에서 그들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옮긴이) 이는 오늘날의 생산시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디든지 계약-노동 시스템으로 이뤄져있다. 그건 고용이라는 단순한 관계이며, 보통 일시적이다. 유전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계약 시스템에 속해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 현장은 더 이상 당신의 삶과 관계가 없다.

 

 

<원문 p.119-12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s://d1tyf8b78tco2j.cloudfront.net/3d16c62a/cea14667/images/b929d2662ab573ede55da76278e346248724a391.1000.jpg
http://www.lightindustry.org/crude_oil.jpg

  1.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옮긴이) [본문으로]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왕삥(王兵)

 

인터뷰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당신의 유소년기와 가정환경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1967년에 태어났을 때, 우리 가족의 반은 도시에, 반은 시골에 있었다.[각주:1] 부모님은 1950년대에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상대적으로 시골인 촌락에서 떠나 수도 시안(西安)으로 옮겼다. ‘대약진정책’[각주:2] 이후 1960년대 초반은 흉년이었고, (식량 – 옮긴이) 공급에 대한 압박을 줄이기 위해 도시 거주자들은 다시 시골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받았다. 당시 아버지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떠나야했지만, 우리 삼남매(누나는 나보다 두 살 많고, 남동생은 네 살 아래다)는 모두 시안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문화 대혁명’[각주:3]은 시작된 상태였다. 도시에서 살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안전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게 더 편하다고 모두가 충고했고, 아버지는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이후, 어머니는 늘 우리를 시골로 데려가 키웠다. 우리는 모두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서로 다른 도시 출신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모두 어머니와 함께 머물렀다. 내가 여섯 살 때,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를 할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누나나 동생 없이, 나는 몇 년 동안 혼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모두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에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간헐적으로 할아버지와 떨어져 있기도 했다. 때로 어머니에게 돌아가곤 했다. 이 기간 동안 내게는 마치 두 곳의 고향이 있던 셈이다. 
 
두 마을에서의 삶은 어땠나? 친족관계는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나?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산시성의 중심부가 고향이고, 그곳은 농경 지역이었고 농경문화가 짙게 배어있었다. 역사적으로, 그곳은 산시성의 남부나 북부보다 훨씬 빨리 개발되었다. 어머니의 고향은 시안에서 대략 80킬로미터 동쪽에 위치한 진양(旌陽)현이었다. 도시로 직접 연결된 버스가 있어 교통수단은 나쁘지 않았다. 그 마을에는 약 60가구가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시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저우즈(周至)현에 속했으며, 친링(秦嶺) 산맥의 작은 언덕에 위치했다. 그 마을에는 1970년 당시 2만의 인구─외가(外家)의 마을에 비해 훨씬 큰─가 있었는데, 산시성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두 곳의 문화는 매우 달랐다. 확실히 두 곳의 특성이나 친족적인 요소가 유사한 건 맞으나, 산시성 중부에 위치한 관중(關中)에서의 삶이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그곳의 생활양식은 허난성(河南省), 산서성(山西省)[각주:4] 혹은 허베이성(河北省)과 같은 중국 내륙의 다른 지방들과는 판이하다. 나는 여러 번 그곳에 위치한 시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늘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우리 산시성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다. 내가 봤을 때 이러한 문화적 보수주의의 주된 원인은 산시성이 중국 근대기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대학 공부는 언제 시작했나?

 

나는 1978년과 1979년에 중학교를 다녔으나, 가정사 때문에 12년이 지난 1991년에야 대학에 진학하였다. 아버지는 시안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1966년 이전에 이미 졸업하여 지방의 건설-디자인 스튜디오에 배정된 상태였다. 내가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러던 1981년, 아버지가 가스 중독으로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당시 정책은 사망한 노동자의 자식이 빈 일자리를 채울 수 있게끔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자리를 하나 얻어선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겨우 14살이었다. 처음에 나는 온갖 잡일을 하는 ‘후방 공급rear supply’ 부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정말 내게 중요했던 유일한 문제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미혼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기숙사의 젊은이들은 모두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같이 밥을 먹었고 같이 놀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한 상태였는데, 문화 대혁명 이후 대학이 재개되자마자 매년 (스튜디오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디자인 스튜디오는 지방의 최상급 학생들 몇몇을 데려왔다. 그들 중 여럿은 지적으로 뛰어났다. 그들은 모두 가슴으로 그들의 예술사를 알고 있었다. 이것이 1980년대였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80년대는 쉴 겨를이 없는─모든 이들이 미래, 직업, 개인적 삶 등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시대였다. 80년대는 그러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80년대는 또한 차라리 따분한 시기였다.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나는 예술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규율에 의존하여 광범위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는데, 건축은 그 규율의 기술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동시에, 건축은 예술 중 가장 실용적인 형식이다. 건축은 예술과 유용성─그러므로 건축을 공부한 사람들은 예술적 혹은 실용적 방향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의 혼합이다. 하지만 건축을 공부하는 것은 예술학교나 영화학교에서 훈련받는 것과 비교하여 사람들에게 독특한 힘을 갖게 한다. 예술학교 학생은 한 분야 혹은 다른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갖곤 하지만, 보통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진 않거나, 개념적인 사고를 잘하진 못한다. 그런 측면은 수학과 과학 과정을 배워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굉장히 논리적으로 생각과 논점을 갖추는 건축과 학생과는 매우 다르다.

 

당시에 당신이 공부하고자 했던 것은 건축이었나, 아니면 토목공학이었나?

 

나는 한 번도 토목공학을 전공하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건축을 전공할 생각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 시험─1984년에, 건축학과에 필요한 특별 시험을 준비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을 준비하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1986년인가 87년인가에 나는 사진을 택했다. 또한 1988년쯤에는 회화를 택했다.

 

 

어떻게 사진으로 바꾸게 되었나?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으나, 대학에서 전공을 정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에 건축학과는 입학 요건이 엄격했고, 따라서 나는 순수 예술로 눈을 돌렸다. 스튜디오 친구들은 모두 회화에 대한 기본적인 연습을 해왔었고,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활동은 내가 예술 학교를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순수-예술 과정에 진입하는 데에는 굉장히 열띤 경쟁이 있었고, 스튜디오에서 한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 옮긴이) 나에게 유일한 방편은 사진이 되었다. 거기다 나는 이미 몇 년 동안 카메라를 갖고 있었고 회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사진 연습을 해왔었다. 비록 내 사진들을 전시하지는 않았으나,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 1991년 나는 북동쪽에 있는 선양(瀋陽)의 ‘루쉰(魯迅) 예술 아카데미’에 사진 전공으로 입학했다.

 

그렇게 사진을 공부했고. (그렇다면 - 옮긴이) 언제 영화로 관심을 틀었나?

 

예술 컬리지 2년차에 이미 나는 영화로 전과(轉科)할 생각을 품었다. 영화에 대한 책을 사고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졸업하기 전 마지막 학년 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의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각주:5] 부서로 찾아가, 단기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말했다. 내가 꽤 높은 수준의 학위 과정을 수료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내게 매우 친절했다. 사실 루쉰 예술 아카데미 졸업 일 년 전에 이미 나는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대신, 내가 했던 공부를 계속하리라 결정했었다. 졸업 후, 베이징에서 나는 여전히 카메라로, 하지만 이제는 시네마토그라피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서는 얼마나 오래 수학했나? 그 과정에 참여한 수강생은 몇 명이었으며,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는가?

 

원래 훈련 프로그램은 1년 과정이었지만, 일 년을 더 머물렀다. 여러 동기생이 있었고, 나는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상황은 크게 달랐다. 대다수는 정규 직장에서 임시로 떠나 그곳에 왔던 반면에, 나는 정규 예술 학교를 갓 졸업한 상황이었다. 기초 훈련의 측면에서, 이전에 우리가 습득한 경험은 (서로 - 옮긴이) 달랐다. 대다수는 엄격한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었다.

 

사진은 정적인 반면, 영화는 동적이다. 당신은 둘 사이에서 친숙화 과정(사진에서 영화로 분야를 옮기는 과정에서 드는 비용을 말하는 듯 – 옮긴이)을 거쳐야 했나?

 

시각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사진에는 그만의 특성과 특징properties and characteristics이 있다. 많은 이들은 평생을 사진과 함께 한다. 선양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 나는 매일같이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형식과 작업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특정 순간을 잡아내는 데 유별나게 매혹되지는 않았다. 내게는 움직이는 이미지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그것은 인간 삶의 여러 양상을 전체론적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시간의 본질the reality of our time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을 선사했다.

 

친숙화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결국 친숙화는 구성요소material의 문제다. 예를 들어, 글짓기를 하는 기자에게 언어에 대한 친숙화는 필수다. 나에게 사진과 촬영기술 모두에 있어 기본적인 언어는 이미지다. 물론 처음 베이징 필름 아카데미에 갔을 땐, 움직이는 이미지에 대해 숙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양적인 축적을 질적인 변형으로 바꾸는 문제였다. 배움은 손 안에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Learning became something in one’s own hands 사실상 현장에서 2년을 보낸 뒤로, 영화 학교는 더 이상 진정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14살에 디자인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부터 24살에 컬리지에 입학할 때까지, 당신은 다양한 관점에서 예술을 배우는데 꼬박 10년을 보냈다. 당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나?

 

선양에 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80년대 내가 배운 것이나 읽은 책들은 모두 유럽─그리고 거기서 고전적인 건축사(建築史)는 예술사의 여러 양상들과 나뉘지 않는다─에서 온 것이었다. 건축 프로젝트는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그건 여러 전문분야로 분리되지 않았다. 과거에 외딴 건축사란 없었다. 우리는 건축을 예술사─모든 종류의 예술 형식을 총망라한, 장대한 역사─의 일부로 봐야 한다. 컬리지에 입학하고 중국의 전통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동양’과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영화로 전향한 뒤에는 이 이슈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원문 p. 1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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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cdn.asiancorrespondent.com/wp-content/uploads/2013/08/WangBing.jpg

네이버영화

  1. 9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에 대해 심화된 논의를 위해선, 루 신유Lu Xinyu, ‘Ruins of the Future’, NLR 31, January-February 2005 참고. 중국의 동시대적 움직입에 대한 조사에 대해선, 잉 치안Ying Qian, ‘Power in the Frame’, NLR 74, March-April 2012 참고. [본문으로]
  2. 1958년에 시작된 중국의 경제건설운동이다. 농산부분에는 인민공사를 조직하고, 공업부문에는 중공업 최우선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흉작과 구 소련인 기사들의 철수로 이 정책은 좌절되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으며 그 힘을 빌려 중국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이었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4. 陝西省(Shaanxi)과 山西省(Shanxi)의 중국어 발음 표기는 ‘산시성’으로 같다. 둘의 구별을 위해 후자는 한자 발음, 즉 산서성으로 표기하였다. 산시성(陝西省)은 중국 중서부에 있는 성이고, 산서성(山西省)은 중국 동부에 있는 성이다.(옮긴이) [본문으로]
  5.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에 따르면 시네마cinema는 연극적인 요소가 포함된 작품을, 시네마토그라피cinematography는 영화의 특성만을 지닌 작품을 말한다.(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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