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서울은 아직 벚꽃조차 만나지 못했는데 나하(오키나와 현)는 4월 초부터 이미 달아올라있다. 택시 기사의 하늘색 반팔 소매, 넘실대는 야자수 그리고 폐부와 맞닥뜨리는 습한 공기로 하여금 이곳은 일본 본토라기보다는 태평양에 놓인 전형적인 남국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다에 둘러싸인 오키나와는 지리적 특성과 달리 고유한 음식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오키나와 소바(沖縄そば)’가 대표적인데, 내가 오키나와에서 처음 접한 음식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여행 책마다 반드시 먹어보라고 하는 음식인데, 솔직히 책자의 권유보다는 찌는 날씨가 한 몫 하게 된다.

진하지만 시원한 장국과 투박하지만 호쾌하게 목 뒤로 넘어갈 수 있는 면타래. 소바하면 당연히 여름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소바는 사뭇 다르다. 아니 일반적인 소바라고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가 봐온 소바와는 판이한 모습이다.


오키나와 소바(沖縄そば)


두툼한 고기와 면발. 그리고 무엇보다 하얗게 올라오는 김은 이미 시원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일반적인 라멘이나 제주도의 고기국수와 비슷하다. 사실 소바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에선 국수 자체를 총칭하는 단어니, 내 기대가 다소 무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체념을 뒤로 하고 맛을 본다. 국물을 한 움큼 들이킨다. 돼지국밥처럼 걸쭉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국물은 맑다. 마치 소고기무국처럼 맑지만 그 뒤끝에는 진한 육향이 따라오는 느낌이다. 담백했던 국물과의 첫 조우를 마치고나면 면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 양이 상당하다. 


규슈에서 먹었던 라멘보다 차슈나 면의 양이 거의 곱빼기에 가깝다. ‘푸짐하다’라는 표현이 이 음식과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냥 밀가루로 반죽한 이 면은 라멘보다는 식감이 더 쫄깃하다. 일반적인 소바는 찰기 없이 툭툭 끊어진다면, 오키나와 소바는 우리네 칼국수마냥 적당히 찰지고 탱탱하다. 옆에 코레구스라는 양념도 같이 주는데, 할라피뇨와 같은 매운 맛을 주는 향신료이다. 진한 맛을 방해할 수도 있으나, 돼지의 진한 향이 부담스럽다면 몇 방을 넣어 먹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릇의 절반만 먹어도 배부른 이 오키나와 소바는 사실 이 섬과는 다소 맞지 않는다. 면의 재료인 밀가루의 밀 자체가 온대에서만 자생할 수 있는 작물이기에 열대에 가까운 오키나와 에선 밀이 자라기는 어려운 조건이다. 사실 오키나와 요리는 독특한 점이 더 있다. 섬임에도 불구하고 생선 요리는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다. 생선 대신 이 섬의 토종 돼지인 아구가 이 섬 요리의 주 단골이다. ‘돼지는 울음소리 빼고 전부 먹는다(豚は鳴き声以外は全部食べられ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쓰임은 다양하다. 




고야(여주)가 들어간 참프루. 담백하면서 쌉싸름한 맛이 인상적이다.



오키나와 소바와 함께 대표하는 요리는 참프루이다. 여주를 채썰어 두부와 채썬 고기와 계란 등을 볶은 요리이다. 그렇게 많이 볶지 않았기에 쌉쌀한 맛이 뒤에서부터 조금씩 올라온다. 두부와 채썬 돼지고기가 이런 쓴 맛과 조화를 이룬다. 뒤죽박죽 섞는다라는 뜻을 가진 이 요리는 만드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여주대신 햄이나 양배추 등을 넣을 수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집에서 해먹는 볶음밥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실제로 가정에서는 햄을 애용한다고 한다.)


오키나와 요리는 모자람이 없다. 어떤 음식이든 푼푼하고 기름진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사면이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생선 요리가 한 손안에 꼽을 정도이다. 정갈하고 아담한 기존의 일본 요리와는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과언은 아닐 것이다. 



류큐 왕국의 궁궐 슈리성(首里城).



넉넉한 음식의 모습은 사실 이 곳 사람들의 기저에 품고 있는 왕국 ‘류큐’가 자리하고 있다. 류큐. 이 섬을 지지하는 정신적 원동력이자 지주(支柱)와 같은 존재이다. 세 곳 건너 한 곳의 간판은 언제나 류큐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과거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이 지역이 이렇게 널리 돼지고기를 애용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류큐의 존재 덕분이다. 천년이 넘는 동안 육식을 금해온 일본의 영향 밖에서 류큐만의 독자적인 식문화가 가능했다. 


15-16세기부터 류큐는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방이 바다로 고립된 것은 오히려 이들에게는 사방으로 통하는 바닷길로 만들었다. 일본과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조선까지 그들의 길을 넓혀가며, 당대 아시아의 허브국가가 되었다. 대륙을 오가며 그들은 자연스레 호방한 기질이 음식에까지 스며들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진 것에 맞게 재창조하였다. 대륙도 바다도 아닌 류큐만의 밥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류큐 전통의상을 입은 슈리성(首里城) 안내원.
소금으로 과자를 만드는 발상을 보면 오키나와들의 창의성은 과거에만 한정된 기질은 아닐 것이다.



음식도 언어처럼 사회나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것은 시대의 흐름에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시대와 전통이 만나 제3의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키나와의 음식은 제3의 길을 찾아 자주적인 식문화를 완성했다. 일본의 침략과 미군의 진주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도 지켜온 전통을 빼앗기지도 스스로 잃지도 않고 제3의 길로써 오늘까지 이끌어왔다. ‘대장부는 굽히고 펴는데에 능해야한다’라는 말처럼 오키나와의 요리는 흐름의 변화를 다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신이 오키나와를 가게 된다면 먼저 오키나와 소바를 먼저 먹어보길 권한다. 푹푹 찌는 날씨에 왜 하필더운 국물을 권하냐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뜨거움이야말로 그들이 치열하게 찾아온 제3의 길을 모색한 흔적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오키나와의 소바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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