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승수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조안 위피예프스키(JOANN WYPIJEWSKI)

 

나 홀로 집에

 


한 나라가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상스럽다는 건 인정한다. 더구나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사실상 삶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 공통된 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미국인들이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는 데 57(CBS), 60(Fox), 또는 62퍼센트(퀴니피악Quinnipiac 대학)만큼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온 최근 조사는 미국의 상당수가 실제로 멍청하며,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곳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퀴니피악 대학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9퍼센트가 미국과, 대충 끼워 맞춰진 어떤 동맹국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세’라는 낡은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를 부활시키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진지하게 ‘전쟁을 거부하는war-weary[각주:1] 국가’ 운운했고 작년엔 사막에서의 참수를 통해 고객들을 꾀어냈던 미디어 기업들은 의식이 없는 기억상실을 향한 경로를 뻔하게 따르고 있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2월에 온라인으로 공표했다. 한 달 후 자유주의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msnbc는 거의 동일한 언어를 썼다. ‘희미해지는 전쟁 거부: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isis 지상전을 지지한다.’

 

 

반면 인구의 극소수─대략 표준적인 기준에 따라 0.16퍼센트─는 전쟁의 리얼리티에 너무 지치고,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매우 극심해서hyper-acute 잠자리에 들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종종 살아가기조차 힘들어한다. 이들은 오랜 기간 전쟁에서 싸워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군인들이다. 개괄적으로 500000명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모든 군대의 비율로 본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부모, 배우자, 연인, 그리고 아이들 등으로 퍼지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훨씬 커진다. 그 또한 실제보다 적은 것이다. 그건 완전한 영향이 지체될 수 있는 PTSD의 성질을 반영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 혹은 남모르게 고통 받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최소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270만 병사들의 반수는 의학적 감정이나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의 정신적 상흔은 낙인이다. 그들은 또한 고통스런 모순점을 보인다. 병사들은 실제로 죄책감과 분노로 고통 받고 아파하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위안을 다급히 필요로 한다. 반면에 대중으로, 만약 도움이 안 된다면, 상상력으로 정상성을 정의하는 사회는 김빠지고, 요원하고, 진지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성적인 사람, 도덕적인 영혼이 정상이 되고 싶어 할까?

 

 

(전쟁에 대한 – 옮긴이) 외상적 거부Traumatic weariness는 어떤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영웅적이지 않다.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킬레스의 무기력보다는 그의 야만성을, 오디세우스의 눈물보다는 그의 현명함과 모험심을, US Navy SEAL 크리스 카일Chris Kyle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기 보단 ─특히 그의 자서전 American Sniper가 증명하듯─ 필적할 수 없는 살인 기록과 인종주의를 기억한다. 데이비드 핑클David Finkle은 환호를 받았고, 2007년 파병 급증의 일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켄자스 포트 라일리Fort Riley 보병대대에서의 경험을 담아 2009년 출간한 The Good Soldiers 이후로 맥아더 영재상MacArthur genius grant을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동일한 병사 일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전후’ 살아가는 모습을 좇는 2007년의 후속작 Thank You for Your Service의 판권을 샀으나, 영화 계획은 미뤄졌다. 별 다른 행동은 없었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 책은 읽기 힘든harder 전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 책을 읽는 건 곧 인내심의 발현이었다. 폭력으로 인하여 책에 삽입된 전보(戰報)에서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전보는 사건의 처음과 끝을 다루고, 형용할 수 없는 적의 끔찍한 행위들을 나열하는 동안 전우band of brothers의 끔찍한 행위들은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과 로랑 베큐-레너드Laurent Bécue-Renard의 최신 다큐멘터리 Of Men and War에서의 폭력은 군인의 존재 속에 파고들어가고, 감정적인 EFP(아마 ‘폭발 성형 관통자’Explosively formed penetrator의 약자인 듯. 하여튼 참전 군인의 통제 불가능한 정서적 불안을 말하려는 것 같다 - 옮긴이)는 어디서나, 어느 방향으로든, 몇 번이고 배치되어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는 용어는 일찍이 오랜 전쟁에서 쓰였다. ‘Support the Troops’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도시들에선 노란 리본, 잔디밭의 노란 표지판, 풍선, 그리고 자동차용 스티커가 마치 경기가 있는 날의 팀 컬러처럼 나타났다. 전쟁은 마치 하나의 스포츠였고, 사람들은 관중이었으며,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따낸 전투부대에 대한 찬사였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팀의 사기는 상업의 리듬을 따랐다. ‘Support the Troops’는 ‘Buy American[각주:2]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가게 창문, 게시판, 범퍼 스티커에 쓰인 슬로건─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기업이었고, 보안은 제품이었고, 사람들은 소비자였으며, 병사들은 숙련 노동자였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일종의 사례금이었다. (사실상 사업이라기에도 뭐했지만) 기업이 실패하자, 표지판들은 사라졌고, 때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인 ‘Pray for Our Troops’로 대체되기도 했다. 전쟁은 문제시되어왔고, 병사들은 지쳤으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얼마 남지 않은 공허한 에티켓이나 고행쯤이 되었다. 바로 그때 핑클은 시민들 사이에선 다른 문제로 넘어가려는 열망이 있고, 병사들에게는 씁쓸함이 남아있다고 적었다. ‘그들이 내가 겪었던 것을 알았다면,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그런 지랄맞은 소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정확히 똑같은 말을 했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리포터인 핑클은 그 순간의 비애감pathos과 부조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한 외교관에게 2005년 조지 부시Geroge W. Bush 대통령이 예맨으로 ‘민주주의의 수출’ 정책을 깨닫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퓰리처 상을 탔던 연작은 (외교관의) 선의와 (양측 정부의) 잘못된 방향, 그리고 돈, 위험과 중복되는 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The Good Soldiers는 패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은 모두 파탄 직전의 제국의 역사에 대한 에피소드로 읽히지만, 그가 보여준 부조리를 넘어서 이런 제국의 기획들에 대해 작가가 믿었던 것은─그가 중동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 단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무가치한 외국 파트너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서투른 문민 지도자에 의해 실행 됐다고, 혹은 지배와 확장에 대한 더 크고 오랜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털어놓지 않는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가 출간된 이후 인터뷰에서 핑클은 전쟁에 의해 모든 병사들이 끝장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은 적응하고 잘 살고 있다. 그는 힘들어 하는 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인정하고 싶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책은 ‘어젠다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엄밀히 그건 옳지 않은데, 그가 그런 것처럼, 전쟁을 영원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군국주의를 미국의 정책과 문화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책과 책 속 모든 이들은 전쟁의 정치학과 그것이 전쟁 이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것 또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핑클과, 그가 8개월 동안 의지했던 병사들이 겪었던 전쟁은 논리나 논쟁을 벗어나, 오직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만이 있기에, 정치 밖에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또는 그가 썼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전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고, 반면에 그 모든 것을 의미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의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한 Thank You for Your Service은 의미가 소멸될 때, 즉 병사들이 해산하고 그들이 겪은 극한의 경험이 집의 친밀하고 사교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원문 99-102쪽>

 

 

 

NLR32705.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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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 사전에 따르면 war-weary는 ‘전쟁에 지친(피폐한)’정도로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보다는 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것 같아 ‘전쟁을 거부하는’으로 번역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war-weariness를 ‘War-weariness is the public or political disapproval for the continuation of a prolonged conflict or war’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거부하는’이라는 의미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옮긴이) [본문으로]
  2. 미국 정부의 국산품 구입 운동. 또는 그 정책. 1930년 연방법에 따라서 입법화되었으며, 1960년 이래 달러 방위를 위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창하였다. (네이버사전 – 옮긴이) [본문으로]

* 인터넷 낙관론에 대한 선두적인 우상파괴자(에브게니 모조로프)가 벨라루스에서의 학창시절에서부터, 불가리에서의 수학을 거쳐 중앙 유럽에서의 NGO 활동과 미국에서 『넷 딜루전』The Net Delusion의 저자로서 명성을 쌓기까지의 편력을 이야기한다. 평등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정보 인프라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담았다.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①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②
[91 jan.feb 2015] 에브게니 모로조프, <데이터 센터를 사회화하자!> - ③

 

 


핵심적인 이슈는 이 영역에서 독점화의 정도 혹은 비율이 아닌가? 이 기업들은 전임자들보다 훨씬 크게, 그리고 빠르게 성장해왔다. 자동차나 항공기 산업에서 과점체제의 출현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구글은 겨우 1996년에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같은 기업들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나 네트워크 효과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할수록, 그것의 가치는 더 커질 것이며, 각자 2천만 명의 유저를 거느린 채 경쟁하는 다섯 개의 소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건 결코 말이 안 된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플랫폼에 있기를 바랄 것이다. 검색 엔진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글을 사용할수록, 모든 검색은 어떤 점에선 해당서비스의 개선이자 수선tinkering이기 때문에 구글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글이 다른 도메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은 매우 빨랐다. 현재 그들은 온도 조절 장치, 자율주행차, 건강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구글과 페이스북은 소위 제3세계 국가들에의 연결도 추진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모든 이들이 온라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데, 추가되는 3, 4십억의 눈알들이 광고비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매우 구체적인 조건 하에서under very specific terms 고객들을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한다.

 

빈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온라인에 접속할 것이기 때문에, 페이스북은 이동통신사를 파트너로 삼는다. 유저들은 그들이 접속하고 다운로드 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만,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진 않는다. 페이스북은 무료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상당한 비용이 든다.─그건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에 아마 긍정적일 것이다. 결국 다른 모든 서비스들은 페이스북에 게재되어야 하고, 따라서 페이스북은 콘텐츠가 유저들에게 제공되는 병목이자 관문이 된다. 그래서 만약 아프리카 학생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싶다면,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페이스북을 통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마침내는 사람들이 배우는 것에 대한 데이터가 민간 기업에 의해 수집되고, 그들의 여생 동안 광고로 쓰이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전에는 오직 시장력에 의해 제한된 정도로만매개되었던 관계가, 페이스북이 사람들이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는 인프라의 제공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작스레 미국의 세계적 기업에 의해 점유된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론은 단지 페이스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반대론이다. 현재 꽤 유행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 대한 공격은 마치 실리콘밸리가 다른 모든 것들과 철저히 분리되어있는, 스스로의 역사력historical force인 것 마냥 다룬다. 유럽에선, 실리콘 밸리를 공격하는 많은 이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오랜 유형을 대변할 따름이다. 출판회사나 은행 등.

 

눈앞에 벌어진 이 모든 것들에 시대구분을 했을 때, 당신은 인터넷의 짧지만 빠른 역사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를 무엇으로 보며, 그것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분석적인 변별점은 무엇인가?

 

이미 말했듯, 나는 ‘인터넷’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이 불만이다. 5, 60년대 이후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네트워크에서는 독립적이고 유사한 국면이 있었다. 만약 70년대 후반의 상황을 돌아본다면, 세계를 연결하는 12개의 네트워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불 네트워크payments network, 여행예약 네트워크travel-reservation networks 등. 종국에 인터넷이 되었던 그 네트워크는 지배 시스템이 명확하지 않았을 당시에 등장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규격 위원회Standard Committees에서, 그리고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의 수준에서─엄청난 노력이 들었다. 또한 스마트폰 앱과 같은 개발이 있었는데, 구글과 같은 거대 기업이 생산하는 플랫폼에서 운영되기에 우리는 그걸 인터넷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지만, 인터넷네트워킹의 역사보다는 소프트웨어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 모든 역사들이 두서없이 ‘인터넷’이라는 용어로 집중됐던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이다. 만약 1993년에서 1997년 사이의 논쟁을 공부한다면, 이 단어(인터넷)는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였다. 

 

90년대의 대부분, 당신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종다양한 기대와 불안, 해석, 비전과 그것을 나타내는 수많은 경쟁적인 용어들─가상현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인터넷─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 매체로서 인터넷이 그 모든 것들을 앞질렀고, 다른 용어들이 사라져갈 때 인터넷은 조직하는 메타카테고리organizing metacategory가 되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해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다. 인터넷은 영원하거나 문제가 없는 카테고리가 아니다. 나는 어떻게 그것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주정부 지원하의 인프라, 인프라의 민영화에서) 이 모든 유사한 역사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역사적 문맥을 빼앗고 전형적인 근원설a typical origin story을 만들어낸 분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발명─빈트 서프Vint Cerf와 다르파DARPA─이 있었고 그것은 그 자체의 역사와 함께 이 매력적인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각주:1]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재 우리의 인터넷 담론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담론들의 통합에는 하나의 객관적인 기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러한 기존의 네트워크가 각각 존재할 당시에, 기본적인 인터넷 프로토콜─TCP/IP[각주:2]─이 그들 모두가 단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현상에 등장하지 않았나?

 

나는 TCP/IP 프로토콜의 현실성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용어로서 인터넷의 산만한 통합은 거부한다. 내 걱정은 사람들이 이 구조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일련의 사실들이 존재하며, 마치 인터넷에 게재된 서비스들이 기업들에 의해 운영되거나 정부에 의해 감시되지 않는 것처럼 가정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터넷을 끝장낼 거야.”, 혹은 “인터넷은 실패할거야.”, 또는 “인터넷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거야.” 이런 식의 말들은 거의 종교적이다. 나는 심지어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내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컴퓨터에서 이용하는 것과 인터넷 이전, 그러니까 40년 전에 몇몇 도서관에서 운용되던 정보체계 사이에는 대다수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암시하는 것보다 연속성이 훨씬 강하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다 날카로운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이러한 국면을 바라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60년대에 MIT나 다른 어떤 곳의 엔지니어들은 현대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공익사업으로서 컴퓨터 사용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은 MIT 같은 장소에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를 설치하고, 사람들의 집에서 전기나 물을 쓰듯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들이 한 장소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세서를 돌릴 필요가 없거나 자신만의 하드웨어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 당시 IBM같은 거대한 컴퓨터 회사들은 대부분 큰 사업체의 중앙 컴퓨터를 공급하고 있었다. 개인 유저들, 가족들, 소비자들에게는 공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70년대 반문화와 반제도적anti-institutional 풍조 덕분에, 애플 같은 기업들이 이러한 거대 회사들의 지배구조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하고 운용할 수 있고, 컴퓨터가 단지 관료제와 공격의 기계가 아니라, 해방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데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과 <지구백과Whole Earth Ctalog>[각주:3] 같은 간행물의 지적인 조력자들─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와 이 DIY 패러다임을 고취시키고 있던 반문화 진영─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상호연결─당신은 상호연결된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되어있는지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 당신에게는 그저 대학들이 있었고, 개인 컴퓨터 사용을 향한 이동이나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었다면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클라우드 컴퓨팅으로의 이동은 그러한 초기의 수사rhetoric─물론, 이제는 인프라의 공적인 운영과 관리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업들이 공익사업에 대한 어떠한 비유도 거부하는 것을 제외한다면─를 반복하고 있다.

 

중앙 집중화된 ‘빅 데이터’라는 현재의 현상은 이 유구한 역사 위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하겠는가?

 

‘빅 데이터’는 지난 몇 년에만 해당하는 특유의 것이 아니다. 이 데이터 수집을 추동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터넷 논쟁은 잊고 유통시장secondary market─액시엄Axiom(Acxiom의 오기인 듯 - 옮긴이)이나 엠실론 같은 기업들에 정보를 파는 데이터 은행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들은 데이터를 누구에게 파는가? 은행, 보험 회사, 사설 탐정 등등에게다. 60년대 후반 미국에선 데이터 은행의 역할과 잠재적 남용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빅 데이터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국립 데이터 은행을 운영하고 연방 기관이 수집한 모든 정보들을 모든 개개의 기관이나 대학이 접근할 수 있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로 통합시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의회를 포함하여 엄청난 논쟁이 일었다. 결국에 그 아이디어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부결되었다. 하지만 많은 수의 과학자들과 기업들은 데이터가 수집되어온 이래로, 암에 대한 치료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에─정확히 현재 빅 데이터와 관련된 수사와 같은 종류다─다른 연구자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핸드폰, 스마트기기, 또는 컴퓨터를 통해 추적되고, 점차 그 양이 증폭되고 있으므로, 정보는 훨씬 더 쉽게 생산된다. 이제는 수집된 양이 상당히 많아졌으므로, (이에 대해) 새로운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순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터넷 논쟁은 모든 것을 추상적인 기술의 역사의 일환으로 이야기하는, 일종의 기억상실증과 함께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구글의 메인 랭킹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사실상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정보 과학과 색인 작업indexing에 투자한 작업의 결과였다. 어떤 아이템이 연관되었고 그렇지 않은지─누가 무엇에 연결되어있는지, 인용 패턴 등을 살펴봄으로써─를 결정하는 데 구글이 사용하는 메커니즘은 학계 논문에 대한 색인 작업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했다. (즉) 그들만의 개발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보 과학에서의 발전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절대 추측할 순 없을 것이다. 유사하게, 오늘날 ‘온라인 공개수업massive open online courses’[각주:4]을 듣는 이들은 5, 60년대에 B. F. 스키너Skinner같은 사람들이 말했던, 강사를 없앨지도 모를 ‘교수기계teaching machine’[각주:5]를 촉진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모른다. 교육을 자동화하려는 전통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여러 스타트업이 같은 영역에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초기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이 모든 분야─교육, (‘자가측정quantified self’[각주:6]와 함께) 의료, 그리고 모든 나머지들─에 퍼지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실리콘 밸리에서 시작되고, 그 외의 다른 권력이나 대의명분이라고는 없는, 멍청한 역사로 끝나버릴 위험에 처해있다.

 

당신은 지난 10여 년간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집중화로의 이러한 추동이 얼마나 불가피하다고 보는가?

 

경계를 넘어서 집중화로 향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또한 특정 속도를 도메인과 레이어 각각에 부여하는 산업 역학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데이터에 발생하는 것은 핸드폰 제조에서 발생하는 것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구글과 페이스북은 그들이 지식과, 지식이 통과하는 출구를 만들어내는 센서를 조절하지 못한다면, 세계의 지식을 조직하는 사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속담이 그러하듯 ‘무더기’를 조작하기 위해 그들이 모든 층위─운영체계, 데이터, 색인 작업─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현재의 역경향을 인식할 수 있을까?

 

만약 구글의 목표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조직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 대한 근원적인 정보 인프라를 운영하는 것이라면, 구글이 그들 모두를 붕괴할 좋은 위치에 있게 될 거란 사실을 더 많은 산업과 기업이 깨닫게 되면 긴장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현재 국영 기업들─종종 당연하게도 구글이 자동차 산업을 인수할 것을 두려워하는 독일 자본─에 의해 유럽 정책 입안자들은 구글을 와해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독일의 거대한 빅 미디어 기업들에도 구글을 염려할 까닭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산업 내 경쟁은 속도가 늦춰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시민들에게 그렇게 유리하리라 생각하진 않는데, 구글과 페이스북은 자연독점으로 보이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와해시키려는 유럽의 미미한 압박에는 경제, 정치, 혹은 생태적으로 어떠한 대안적 비전도 없다.

 

 

<원문 p. 56-60>

 

Isn’t the key issue the rate and degree of monopolization in this area? These companies have grown much bigger and faster than their predecessors. It took a lot longer for oligopolies to emerge in the automobile or aircraft industries. Google only started in 1996.

 

That’s a function of the nature of the service and the network effects in companies like Google and Facebook. The more people are on Facebook, the more valuable it becomes, and it doesn’t really make sense to have five competing social networks with twenty million people on each; you want all of them on one platform. It’s the same for search engines: the more people are using Google, the better it becomes, because every search is in some sense a tinkering and improvement in the service. So Google’s expansion into other domains has been very fast. Right now they do thermostats, self-driving cars, health. Google and Facebook are even trying to bring connectivity to so-called Third World countries. For them it’s important to get everyone in Africa and Asia online, because that’s the next few billion eyeballs to be converted into advertising money. But they get their customers online under very specific terms.


Facebook takes mobile operators as partners, since in poor countries most people will get online through their mobile phones. Users pay for what they access and download, but don’t have to pay to access Facebook. Facebook comes free, and everything else is at a price—so that’s supposedly positive, because it’s better than paying for everything. The result is that all other services have to establish a presence on Facebook, which thus becomes the bottleneck and gateway through which content is fed to users. So if you wanted to provide education to students in Africa, you’d be better off doing it through Facebook, because they wouldn’t have to pay for it. You would then end up with a situation where data about what people learn is collected by a private company and used for advertising for the rest of their lives. A relationship previously mediated only in a limited sense by market forces is suddenly captured by a global American corporation, for the sole reason that Facebook became the provider of infrastructure through which people access everything else. But the case to be made here is not just against Facebook; it’s a case against neoliberalism. A lot of the Silicon Valley-bashing that is currently so popular treats the Valley as if it was its own historical force, completely unconnected from everything else. In Europe, many of those attacking Silicon Valley just represent older kinds of capitalism: publishing firms, banks etc.

 

In a periodization of how all this came about, what do you see as the critical turning points in the short but fast history of the Internet, and what are the most important analytical distinctions to be made within it?


I’m dissatisfied, as I’ve said, with the ambiguity of the term ‘the Internet’. From the fifties or sixties onwards, there were separate, parallel developments in software, in hardware, in networks. If you look back at the situation in the late seventies, you find a dozen networks connecting the globe: the payments network, the travel-reservation networks and so on. That the network which eventually became the Internet would emerge as the dominant system was not obvious. It took a lot of effort—in standards committees, and at the level of organizations like the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s Union—to make that happen. There were also developments such as smartphone apps, which we now perceive as part of the Internet because they run on platforms produced by giant companies like Google, but which make more sense within the history of software than that of internetworking. The fact that all of those histories discursively converged on the term ‘Internet’ is itself a significant historical development. If you study the debate between 1993 and 1997, this wasn’t the most popular term to talk about these issues; that was ‘cyberspace’.


For most of the nineties, you still had a multiplicity of different visions, interpretations, anxieties and longings for this new world, and a lot of competing terms for it—virtual reality, hypertext, World Wide Web, Internet. At some point, the Internet as a medium overtook all of them and became the organizing metacategory, while the others dropped away. What would have changed if we had continued thinking about it as a space rather than as a medium? Questions like these are important. The Net isn’t a timeless, unproblematic category. I want to understand how it became an object of analysis that incorporates all these parallel histories: in hardware, software, state-supported infrastructures, privatization of infrastructures, and strips them of their political, economic and historical contexts to generate a typical origin story: there was an invention—Vint Cerf and darpa—and it became this fascinating new force with a life of its own.6 Essentially, that’s our Internet discourse at present.

 

But isn’t there at least one objective basis for the unity of these discourses about the Internet: that, while all these previous networks existed separately, once the basic Internet protocol—tcp/ip—came onto the scene they all tended to converge into a single integrated structure?


I’m happy to accept the reality of the tcp/ip protocol, while also rejecting the discursive unity of the Internet as a term. My concern is that people assume there is a set of facts which derives directly from this architecture, as if the services that are built on it are not operated by companies or monitored by states. They start saying things like: it will break the Internet, or the Internet will fail, or the Internet will not accept it. This kind of talk is almost religious. I might even say that the Internet does not exist. This is not to deny that there is something which I use every day; but there’s much more continuity than many of these narratives suggest between what I use on my computer and an information system that ran in some library forty years ago, before the Internet.


So how might we begin looking at these developments in a sharper socio-historical perspective?


In the sixties, engineers at mit and elsewhere had a vision of computing as a public utility that looked very much like contemporary cloud computing. Their idea was that you would have one giant computer in a place like mit, and then in people’s houses you would get computing
just as you do electricity or water. You wouldn’t need to run your own processor or have your own hardware, since it would all be centralized
in one place. At that time the big computer companies like ibm were mostly supplying mainframe computing for big business—they didn’t cater to personal users, families, consumers. Thanks in part to the anti-institutional climate and counterculture of the seventies, companies like Apple challenged the dominance of those big players. It took a lot of effort by people like Steve Jobs, and their intellectual enablers in publications like the Whole Earth Catalog—Stewart Brand and the countercultural wing that was promoting this do-it-yourself paradigm—to convince consumers that computers could be owned and operated by individuals; that they were creative new tools of liberation, and not just machines of aggression and bureaucracy.


Unless you understand this, it’s hard to see how everything got interconnected—you needed something to interconnect. At the beginning you just had the universities, and it would have stayed that way if there had been no change of mentality, no shift towards personal computing. Today the move to cloud computing is replicating some of that early rhetoric—except, of course, that companies now reject any analogy with utilities, since that might open up the possibility of a publicly run, publicly controlled infrastructure.


How should the current phenomenon of centralized ‘big data’ be located in this broader history?


‘Big data’ isn’t something unique to the last few years. To understand what’s driving this data collection, you need to forget Internet debates and start focusing on the data banks selling information on the secondary market—companies like Axiom and Epsilon. Who are they selling their data to? To banks, insurance companies, private investigators and so on. There was a debate in the late sixties about the role and potential abuse of data banks in America, which was not all that different from the big data debates today. At stake was whether the us should run national data banks and aggregate all the information collected by federal agencies into one giant database accessible to every single agency and every single university. It was a huge debate, including on a Congressional level. In the end the idea was killed because of privacy concerns. But a lot of scientists and companies made a case that since the data had been collected, it ought to be made accessible to other researchers, because it might help us to cure cancer—exactly the sort of rhetoric you hear now with Big Data. Nowadays the information can be produced far more easily because everything we do is tracked by phone, smart gadget, or computer, and this amplifies its volume. So much is now gathered that you can argue it deserves a new name. But these Internet debates tend to operate with a kind of amnesia, narrating everything in a kind of abstracted history of technology.

 

There’s a story to be told even about Google’s main ranking algorithm, which actually comes out of decades of work on information science and indexing. The mechanism that Google uses to determine which items are relevant or not—by looking at who links to what, citation patterns etc—was developed in relation to the indexing of academic literature; it’s not their own invention. But you would never guess that without knowing something about developments in information science. Likewise, people looking at these ‘massive open online courses’ today don’t generally know that in the fifties and sixties people like B. F. Skinner were promoting what he called ‘teaching machines’ that would dispense with an instructor. There’s a continuous tradition of trying to automate education. The fact that a bunch of start-ups have now moved into the area does not erase those earlier developments. Now that ‘the Internet’ is spreading into everything—education, healthcare (with the ‘quantified self’), and all the rest—we’re in danger of ending up with a kind of idiot history, in which everything starts in Silicon Valley, and there are no other forces or causes.


How inevitable do you regard this drive towards technical and organizational centralization over the last decade or so?


There are tendencies towards centralization across the board, though there are also industry dynamics which lend a specific tempo to each domain and layer. So what is happening with data should be distinguished from what is happening in phone manufacturing. But Google and Facebook have figured out that they cannot be in the business of organizing the world’s knowledge if they do not also control the sensors
that generate that knowledge and the gateways through which it passes. Which means that they have to be present at all levels—operating systems, data, indexing—to establish control over the entire proverbial ‘stack’.


Can we perceive any counter-tendencies at present?


Tension may arise when more and more industries and companies realize that, if Google’s aim is not only to organize all of the world’s knowledge, but also to run the underlying informational infrastructure of our everyday life, it will be in a good position to disrupt all of them. That may generate resistance. At present there is pressure on European policy-makers to break up Google, driven by national firms—often German capital, which, understandably, is fearful that Google could take over the auto industry. The big media empires in Germany also have reason to be worried by Google. So this kind of intra-industry fight might slow things down a little. But I don’t think it will benefit citizens all that much, since Google and Facebook are based on what seem to be natural monopolies. Feeble calls in Europe to weaken or break them up lack any alternative vision, economically, politically, or ecologically.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http://www.ted.com/talks/evgeny_morozov_is_the_internet_what_orwell_feared?language=ko#t-20261

 


  1. DARPA: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펜타곤의 한 기관. 빈트 서프는 그곳의 핵심 인물이다. [본문으로]
  2. TCP/IP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핵심 프로토콜이다. 인터넷에서 전송되는 정보나 파일들이 일정한 크기의 패킷들로 나뉘어 네트워크상 수많은 노드들의 조합으로 생성되는 경로들을 거쳐 분산적으로 전송되고, 수신지에 도착한 패킷들이 원래의 정보나 파일로 재조립되도록 하는 게 바로 TCP/IP의 기능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지구백과 Whole Earth Ctalog(WEC)>는 미국의 반문화 잡지였고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도 하에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그리고 이후 1998년까지는 간헐적으로 발간되었다. 잡지는 에세이와 기사를 특징으로 했지만, 주로 제품 리뷰에 집중했다. 편집 방향은 자급자족, 생태학, 대안교육, DIY, 전체론holism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도구에 대한 접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WEC는 광범위한 제품들(옷, 책, 도구, 기계, 종자 등)을 나열하고 리뷰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직접적으로 판매하진 않았다. 대신에, 판매자의 연락처를 아이템과 리뷰 옆에 기재해놓았다. 비록 정기적으로 간행되진 않았으나, 다양한 형식으로 수많은 판본과 최신판이 있었다.(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4. 웹 기반의 온라인 공개 강좌. 정규 교육의 보조 수단에 머물지 않고 수업과 시험 등의 교육 체계를 갖춘 대학 강좌를 가리킨다. 여러 사람에게 강좌를 널리(massive) 공개(open)하기 때문에 기존 대학 교육 체계를 크게 바꿀 태세다. 미국 유명 대학이 앞서 시작했으며, 일본의 주요 대학도 2014년부터 인터넷으로 강좌를 제공했다. 한국에서도 이른바 케이무크(K(Korea)MOOC)가 추진된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5. 행동주의적 학습원리를 교육의 실천 분야에 응용한 것으로 학습자가 개별적으로 자기속도대로 학습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된 자동학습장치이다.(옮긴이 –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6. 자가측정이란 개인 일상에 있어서 투입(음식 소비, 주변 공기의 질), 상태(기분, 각성, 혈류 산소 수준), 그리고 행위(정신적이고 육체적인)의 측면에 대한 데이터의 습득과 기술을 통합시키는 움직임이다. (옮긴이 – 위키백과) [본문으로]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에브게니 모로조프[각주:1]

 

데이터 센터들을 사회화하자!

 

냉전 이후post-Cold War 동유럽의 정치학 기초 교육으로부터, 실리콘 밸리의 속사포patter 비평을 경유하여, 인터넷과 신자유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회역사적 논쟁들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작업은 어떠한 다른 기술 비평가와 달리 독특한 경로를 좇는다. 이 혁명을 양산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벨라루스Belarus의 민스크Minsk 지역에 있는, 50년대 후반 새로이 탄광 마을로 설립된 솔리고르스크Soligorsk라 불리는 지역에서 1984년에 태어났다. 거의 모든 노동력은 외부에서 유입되었고, 거기에 국가적 특성은 거의 없었다. 친가는 러시아 북부에서 왔고, 모스크바Moscow 근처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7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광산학 학위를 취득한 뒤 (솔리고르스크에) 왔다. 그 도시는 포타시움potassium을 채굴하여 세계 시장에서 매우 잘 팔리는 비료를 생산하는 거대 국영 기업 하나가 꽉 잡고 있다. 그 기업은 여전히 벨라루스에서 가장 이윤이 높은 기업이다. 조부모님에서부터 삼촌, 고모들까지 온 가족은 그 회사에서 일했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소련USSR이 해체되었고, 솔리고르스크 같이 작은 도시에서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겪었지만, 소련의 붕괴와 우리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내가 열 살 때 권력을 잡은 루카셴코Lukashenko 대통령 치하에서 벨라루스는 공식적으로는 두 개의 국어를 인정하였지만, 러시아어가 지배적인 언어였고, 솔리고르스키에서 자라는 것은 그저 러시아의 한 지방에서 자라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민스크보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훨씬 많이 접했다. 초기에 벨라루스의 텔레비전은 없었다. 국내 미디어는 별로 힘이 없었고, 그래서 우리가 보는 신문들과 집에서 보는 대다수의 TV 프로그램들은 러시아로부터 온 것이었다.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내가 솔리고르스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큰 단절cut off를 느꼈을 것이다. 후에 루카셴코는 만약 도시에서 미디어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독립 국가로서 벨라루스의 존립을 입증할 능력을 상실하고, 벨라루스가 단지 친 러시아 국가밖에 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 프로그램을 하루에 서너 시간으로 제한하고 몇몇 지역 뉴스와 벨라루스의 프로그램을 섞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 같은 이들은 위성방송 수신 안테나를 사서 러시아 TV를 계속 봤는데, 특별히 루카셴코의 정치를 불신해서라기 보다는, 지역 방송이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당신은 벨라루스를 떠나게 되었나? 

 

내 사촌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에, 운 좋게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학사 학위를 딸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나도 나라 밖에서 뭔가 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걸게 되었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일 년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차순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국경 근처에 있는, 불가리아Bulgaria의 블라고에브그라드Blagoevgrad라 불리는 작은 도시에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한 학교였던 자리에, 소로스Soros와 미국국제개발처USAID, 그리고 아마 몇몇 정부 부처의 재정적 지원으로 90년대 초에 설립된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솔리고르스키처럼 인구 7만명의 작은 도시였다. 그곳은 구소련 블록 혹은 그 인접국(불기라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몽골리아 등)에서 학생들이 넘어온 특이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대다수는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 내가 2001년 도착했을 땐 코소보 사태 직후였던 터라, 대학에서는 민족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4년을 보냈고, 구소련에 대하여 벨라루스에서보다 훨씬 많이 배웠다.


무엇을 공부했나?

 

대학의 강령은 지역의 더 나은 지도자들, 시민 사회나 정부에서 정치 경력political careers을 쌓을 준비가 된 동창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몇몇은 그렇게 됐지만, 졸업자들은 대부분 컨설팅이나, 감사auditing 또는 회계 법인에 취직했다. 나는 경영학과 경제학 복수학위 취득했다. 초기에는 투자 은행에 취직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그 야망으로부터 나를 구해낸 것은  전 세계의 모든 거래들이 이루어지는(그래서 만약 증권매매업자들이 ‘O’를 ‘I’로 잘못 타이핑했다면, 그 실수를 잡아내야 한다.) 본머스Bournemouth에 위치한 JP 모건Morgan에서의 10주간의 인턴십이었다. 나는 왜 그들이 그 과정을 자동화하지 않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투자은행은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가리아에서 졸업한 뒤 무엇을 했나?

 

역시 (이 경우에는 교양liberal arts 교육에 사로잡힌 미국의 자선가 개인에 의한) 미국 자본으로 설립되어, 지금은 바드 컬리지Bard College의 일부분인, 작은 규모의 유러피언 컬리지 오브 리버럴 아츠the European College of Liberal Arts에서 일 년간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학위 과정은 아니었지만, 전액을 지불하면 일 년간 바람직한 인문학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 내가 끝마친 프로그램은 세 명의 사상가들(프로이트Freud, 맑스Marx, 그리고 푸코Foucault를 연이어)에 초점을 맞췄다. 아홉 달 동안 우리는 매우 광범위하게 읽었다. 소설에 있어서 루카치Lukács , 제임슨Jameson, 노버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수많은 2차 자료들secondary literature 등. 매우 지적인 자극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자 은행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학자 또한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러한 공부가 대부분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그런 공부를 했다는 것이 기쁘지만.

 

당신은 어떻게 투자 은행가에서 뉴 미디어 작가로 전환하게 되었나?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네덜란드 대사와 결혼하여 불가리아로 온 뒤, 블라고에브그라드에서 강의를 했던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각주:2] 기자reporter 에르노트 판 린덴Aernout Van Lynden이었다. 캠퍼스의 문화 수준은 낮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와 <파이낸셜 타임즈FT>를 매일 읽게 독려한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기본적으로 멀리 인적이 끊긴 블라고에브그라드에 사는 이들이 그러한 책들을 읽을 리 만무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지 경력에 초점을 맞췄다. 내가 장문으로 된 저널리즘을 읽고, 영어로 쓰는 것을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덕이었다. 동시에, 컬리지의 마지막 학년 즈음 나는 블로깅blogging(단지 현상으로서 블로깅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서)을 특집 보도하는 기사들이 갑작스레 쏟아지는 것에 주목했다. 하워드 딘Howard Dean이 민주당 후보로 참여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와중이었다. 소규모 모금의 수평적 배치와 블로깅,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선거에 자금을 대는 견고한 단체와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sway 주류 미디어를 우회할 수 있게 됐다.’는 해방적 수사로 그의 캠페인은 점철됐다. 대략 비슷한 시기였는데 2004년 후반, 나는 (러시아어로 의사소통하는 세계에서 매우 유명한 블로깅 플랫폼)라이브저널LiveJournal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우크라이나Ukraine의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에서 같은 도구의 사용에 대한 흥분의 물결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뭔가 흥미로운 게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서는 미디어와 기금모금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는 것에 대한 담론이 있었고, 이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결과를 볼 수 있으며, 조지아Georgia나 세르비아Serbia에서는 더 일렀다. 미국의 지원 아래서 세르비아에 대항하는 ‘오트포르!Otpor!’[각주:3]의 활동가들은 컴퓨터 게임을 함으로써 시위를 조직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밝힌 바 있다. 컴퓨터 게임, 문자메시지, 블로깅 등. 이러한 단어들이 나의 뇌리에 스쳤다. 이 기술들에 대한 내 흥미는 높아졌다. 다음 해, 나는 하워드 딘 국면moment의 주요 전문가들이 쓴, <블로그!Blog!>라 불리는 편집본edited collection을 집어 들었다. 아마 나는 중요한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유럽에서 내가 속한 집단보다 한 발 일찍 깨달았던 것 같다.

 

정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게 그 시점이었나?

 

아니다. 더 일렀다. 2003년쯤 베를린에서 하계학교를 다닐 때, 듣도보도 못한 <아크지Akzia>[각주:4]라는 신문에 자유 투고하며, 언론계에 몸담은 러시아 학생을 만났고, 그녀는 내게 편집장을 소개시켜줬다. 아크지는 러시아 카페나 진보적인 사람hipsters과 지식인들이 머무는 장소에 무료로 분배되었고, 온라인에서 꽤나 활동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단지 오락용이나 문화적 출판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급진적인 러시아의 청년 혹은 다른 활동가들에 대한 정치적 기사를 연재했다. 그들은 내게 칼럼을 제안했고, 그게 내가 언론계에 몸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는 영어로 쓰기 오래 전부터 러시아어로 쓰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대해서 쓴 건 아니었다. 나의 칼럼은 코스모폴리탄cosmopolit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전 세계적 이슈(미국 선거, 브라질의 시민 저널리즘과 모바일 기술, 온라인 출판과 저작권, 건축, 하여간)를 다뤘다. 그 당시 나는 러시아 정치에 그다지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나날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양을 주입하던 불가리아의 아메리칸 대학을 나왔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만약 내가 러시아 정치에 경도되어 있었다면, 아마 푸틴Putin의 대안으로서 친(親) 호도르코프스키Khodorkovsky[각주:5] 쪽으로 기울지 않았을까. 부분적으로는 나의 사정(당시 나는 언젠가 벨라루스가 EU에 가입할 수 있으리라 믿을 만큼 여전히 순진했다.)으로 인해, 외국의 정책 이슈를 다룰 때면  러시아와 이러저러한 말다툼을 벌이는 몰도바Moldova나 조지아 같은 작은 국가들과 동질감을 가졌다.

 

 

<원문> (p.45-48)

 

evgeny morozov


SOCIALIZE
THE DATA CENTRES!

 

Your work traces a distinctive path—unlike that of any other technology critic—from a grounding in the politics of post-Cold War Eastern Europe, via critique of Silicon Valley patter, to socio-historical debates around the relations between the Internet and neoliberalism. What was the background that produced this evolution?


I was born in 1984, in the Minsk region of Belarus, in a new mining town called Soligorsk, founded in the late fifties. More or less the whole labour force was brought in from outside, and there’s little sense of national belonging. My father’s family came from the north of Russia; my mother, who was born near Moscow, arrived in the seventies with a degree in mining from Ukraine. The town is dominated by one huge state-owned enterprise that mines potassium and produces fertilizers which sell very well on the world market: it’s still the most profitable company in Belarus. My entire family worked for it, from grandparents to uncles and aunts. The ussr dissolved when I was seven, and while there may have been all sorts of problems with living in a small city like Soligorsk, they were not linked to the ussr’s disappearance. Under Lukashenko, who came to power when I was ten, Belarus was officially bilingual, but Russian was the dominant language, and growing up in Soligorsk felt just like being in a province of Russia. We were much more connected to events in Moscow than in Minsk. Initially there was no Belarusian television; the national media were not very strong, so the newspapers we got, and most of the tv programmes we watched at home, were Russian. People in Kaliningrad probably felt more cut off than I did in Soligorsk. Later, Lukashenko realized that if he didn’t control the flow of media in the country, he could lose the ability to make a case for Belarus to exist as an independent state, however pro-Russian. So he started limiting Russian programming to three or four hours a day, and mixing in some local news and Belarusian programming. But then people like my parents bought satellite dishes and continued watching Russian tv, not particularly because they mistrusted Lukashenko’s politics, but because the local stuff was so boring.

 

How did you come to leave Belarus?


My cousin was lucky enough to have studied for her bachelor’s degree in St Petersburg, before moving to Holland. So there was an expectation in my family that I might be able to do something outside the country. I wanted to spend a year in a high school in the us, but that didn’t work out. The next best thing was to go to the American University in Bulgaria, which had been set up in the early nineties with Soros and usaid—and maybe some State Department—money, in a former school for communist leaders in a small town called Blagoevgrad, near the border with Macedonia and Greece. Like Soligorsk it’s a small town, of 70,000 people; an odd, poor place, where a lot of the students came from the former Soviet bloc or adjacent countries: Bulgaria, Romania, Yugoslavia, Georgia, Armenia, Azerbaijan, Mongolia. Many, like myself, were on scholarships. There was a lot of ethnic tension on the campus when I arrived, in 2001, soon after the Kosovo conflict. I spent four years there, and learnt far more about the former Soviet Union than I ever did in Belarus.


What were you studying?


The mission statement of the university was to educate the future leaders of the region, its alumni set for political careers in government or civil society. Some did that, but its graduates mostly found themselves working in business—in consulting, auditing or accounting firms. I ended up double-majoring in business administration and economics. My initial ambition was to work in an investment bank. What saved me from that was a ten-week internship at JP Morgan in Bournemouth, of all places, making sure all the trades went through; so if any of the traders mistyped ‘0’ as ‘1’, you would have to catch it. I never understood why they couldn’t just automate the process. I realized investment banking was probably not for me.


What did you do after graduating in Bulgaria?


I decided to take a year out at the European College of Liberal Arts, a small outfit, now part of Bard College, that was also set up with American money—in this case by a private us philanthropist obsessed with liberal arts education. It wasn’t a degree programme, but you could do a proper humanities course there for a year, with all expenses paid. The programme I ended up on focused on three thinkers: Freud, Marx and Foucault, in succession. For nine months we read very widely; Lukács on the novel, Jameson, Norbert Elias, a lot of secondary literature. It was a very intellectually stimulating programme. But while I knew I didn’t want to do investment banking, I also didn’t want to be an academic. So I thought most of this study was useless. In retrospect, of course, I’m glad I did it.

 

How did you get from investment banking to writing on new media?


A key influence on me was an Anglo-Dutch war reporter, Aernout Van Lynden, who lectured in Blagoevgrad because he was married to the Dutch ambassador to Bulgaria. The cultural standards on campus were low, but he was a genuine intellectual, who encouraged us to read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and the ft every day. Living in Blagoevgrad—in the middle of nowhere, essentially—those were not at all the kinds of things people read. Most students were just focused on their careers. It was due to him that I started reading long-form journalism and experimenting seriously with writing in English. At the same time, in the last year or so of college I noticed that there was a sudden flow of articles dedicated to blogging—not just blogging as a phenomenon in itself, but as a political tool. This was during the 2004 us presidential election, when Howard Dean was running for the nomination of the Democratic Party. His campaign was marked by the horizontal deployment of micro-fundraising and blogging, and an emancipatory rhetoric—‘finally we can bypass the entrenched institutions that fund elections, and the mainstream media that sway them’. At roughly the same time, in late 2004, I saw the same wave of excitement about the use of these tools in the Orange Revolution in Ukraine, where LiveJournal—a blogging platform that was very popular
in the Russian-speaking world—played a significant role.

So I felt there was something interesting here. In America you had this discourse about the democratization of access to the media and to fundraising, and you could already see results of these changes in Ukraine, and earlier in Georgia and Serbia. Activists in Otpor!, the American-sponsored opposition in Serbia, were reporting that they had learnt how to organize protests by playing computer games. To me, this clicked: the computer games, the text messaging, the blogging . . . My interest in these technologies intensified. The following year, I picked up a book written by leading analysts of the Howard Dean moment, an edited collection called Blog!. I was perhaps a bit ahead of my cohort in Europe in understanding that a major transformation was under way.


At this point you started writing about politics?


No, that came earlier. Around 2003, when I was at a summer school in Berlin, I met a Russian student of journalism who was freelancing for Akzia, a paper I’d never heard of, and she introduced me to the editor. Akzia was distributed free in Russian cafés and places where hipsters and intellectuals hung out, and had a quite active online presence. It wasn’t just an entertainment and culture publication: it featured political pieces about Russian youth and other movements, some more radical than others.
They offered me a column, which is how I started in journalism—I was writing in Russian long before English. But not about Russia: the column was called Kosmopolit and covered a global beat—American elections, citizen journalism and mobile technology in Brazil, online publishing and copyright, architecture, you name it. Back in those days I wasn’t much preoccupied with Russian politics. Had I been, given that I was coming out of the American University in Bulgaria, where we were fed the gospel of neoliberalism on a daily basis, I would have probably inclined toward a Khodorkovsky-like alternative to Putin. On foreign policy
issues, I identified with smaller states like Moldova or Georgia in their various squabbles with Russia, in part because of my background—I was still naive enough to believe that Belarus could one day join the eu.

 

 

 

 

socialize the data centres!(evgeny morozov).pdf

 

 

*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 : http://newleftreview.org/


  1.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 작가이자, 기술의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연구하는 벨라루스 출생 연구원이다. 그는 현재 미국의 종합 시사 주간지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수석 에디터를 맡고 있다.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 17세기 후반에 있어서의 영국과 네덜란드 양국간의 3차에 걸친 전쟁과 18세기 말엽의 1차례 일어났던 전쟁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3. ‘오트포르!Otpor!’: '저항하라!'는 의미의 세르비아어. '오트포르'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간 존재했던 세르비아의 정치조직이다.(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아크지Akzia: '행동'이라는 뜻의 러시아어(옮긴이) [본문으로]
  5. 미하일 보리소비치 호도르콥스키(1963년~): 러시아의 기업인으로 옛 러시아 최대의 민간 기업이던 석유 회사 유코스의 회장. 푸틴에 대항하여 야당에 정치자금을 대다 '탈세 및 횡령'혐의로 수감 중, 유코스는 파산했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호도르코프스키는 강력한 반(反)푸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옮긴이 -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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